[일요시사 취재1팀] 박창민 기자 = 정두언 전 의원이 세상을 등졌다. 향년 62세. 그는 그동안 진정한 ‘보수의 품격’을 보여주며 대중의 사랑을 받은 정치인이었다. 그의 인생은 파란만장했다. 이명박정권의 일등 개국공신서 가수, 음식점 사장, 시사평론가까지 다양한 변신을 거쳤던 풍운아였다.
새누리당(현 자유한국당) 정두언 전 의원이 지난 16일, 북한산 자락길서 숨진 채 발견됐다. 정 전 의원은 이날 오후 2시30분쯤 자신의 운전기사가 운전하는 차에서 내려 서울 서대문구 홍은동 인근 북한산 자락길 쪽으로 올라간 것으로 전해졌다. 오후 3시42분쯤 집에서 정 전 의원의 유서를 발견한 부인이 경찰에 신고했다. 경찰은 휴대전화 위치 추적으로 오후 4시25분쯤 정 전 의원을 찾아냈다.
4선 도전 실패
극심한 우울증
경찰은 가족에 미안하다는 취지의 유서가 발견된 점 등으로 미뤄 정 전 의원이 극단적 선택을 한 것으로 보고 있다. 정 전 의원의 갑작스런 비보에 여야 정치권 인사들은 큰 충격에 빠졌다.
이날 사고 현장을 직접 찾은 자유한국당 김용태 의원은 “동료 의원으로서 정 전 의원의 명복을 빌면서 한 말씀 드리겠다”며 “정 전 의원이 우리 정치사에 남긴 족적은 참으로 깊고도 선명하게 남을 것으로 믿는다”고 말했다. 이어 “나라를 위하고 국민을 편안하게 하는 정치였고, 현장 정치를 떠나고도 정치에 도움이 되고자 평론 등 활발하게 활동했다”며 “정 전 의원이 정치발전을 위해 꿈꿨던 꿈을 동료 의원들과 후배 정치인들이 꼭 이뤄내길 진심으로 바란다”고 고인의 명복을 빌었다.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도 깊은 애도를 표했다.
민주당 이해식 대변인은 이날 구두 논평을 내고 “2016년 정계은퇴 이후 합리적 보수 평론가로서 날카로운 시각과 깊이 있는 평론으로 입담을 과시했던 그를 많은 국민들은 잊지 못할 것”이라고 전했다. 이어 “정 전 의원은 새누리당 출신 국회의원으로서 이명박 대통령 당선에 기여했던 정권 핵심 중의 핵심이었던 노련한 전략가였다”며 “이 대통령 측근들의 권력 사유화를 비판하며 이명박정권과 등을 지기도 했던 파란만장한 정치인이기도 했다”고 고인의 삶을 평했다.
바른미래당(이하 바미당) 역시 안타까운 심경을 전했다.
바미당 김정화 대변인은 논평을 통해 “생산적인 의정활동을 하던 정치인, TV와 라디오를 넘나들며 맹활약하던 시사평론가로서의 모습이 아직도 선한데, 갑작스럽고 황망한 죽음이 비통하기만 하다”고 애도를 표했다. 이어 “부디 하늘에서는 걱정과 고민 없이 편히 영면하시길 기원한다. 다시 한 번 고인을 애도하며, 충격과 슬픔에 잠겨 있을 유가족에게도 각별한 위로를 전한다”고 말했다.
민주평화당 박지원 의원은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진짜 합리적 보수 정치인이었다. 저와는 절친도 아니고 이념도 달랐지만 서로를 이해하는 사이였다”고 회고하며 고인의 명복을 빌었다. 그는 “우리는 MB(이명박)에게 잘못 보인 탓에 저축은행 비리에 연관됐다며 고초를 겪기도 했지만, 무죄로 명예회복돼 함께 기뻐하기도 했다. 때때로 부인과 개업한 식당에 가면 예의 쑥스러운 웃음으로 감사해하던 정두언 의원. 영면하길”이라고 덧붙였다.
총선 낙마 이후 우울증 앓아
홍은동 야산서 숨진 채 발견
이명박 전 대통령도 정 전 의원 측에 조문 메시지를 전했다. 정 전 의원은 이명박 전 대통령을 만든 개국공신이자 저격수였다. 이 전 대통령의 측근인 이재오 전 의원은 장례식장을 찾아 근조화환을 전달했다.
이 전 의원은 “(이 전 대통령이)원래 평소에 (정 전 의원과)한 번 만나겠다는 이야기를 감옥 가시기 전에도 했다”며 “이 전 대통령께서 오늘 조문을 오려고 생각을 했는데, 병원 이외에 다른 곳에는 보석으로 출입과 통신을 하는 것이 제한돼있어 변호사를 통해서 대신 말을 전했다”고 했다.
그는 “조문을 하려면 재판부에 신청해서 허락을 받아야 하는데 며칠이 걸려서 못 오게 돼서 아주 안타깝다”고 덧붙였다.
고인과 가까웠던 이들은 “정 전 의원이 평소 우울증을 앓았다”고 전했다. 그의 우울증은 4선 의원에 도전했던 서울 서대문구(을) 지역서 낙선한 뒤 발병한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정 전 의원은 이 지역구에서만 내리 3선에 당선된 성공한 정치인이었다.
그는 일명 ‘왕의 남자’로 불릴 만큼 이 전 대통령의 최측근으로 분류됐다. 하지만 이 전 대통령의 친형 이상득 전 의원의 불출마를 주도하며 MB와 사이가 틀어졌다. 그는 MB정부 출범 직후인 2008년 3월 이상득 전 의원을 겨냥해 ‘권력을 사유화한다’며 출마 포기를 권유했다.
당시 총선에 출마하려던 29명의 총선 후보자는 정 전 의원 주도로 ‘이상득 불출마’에 서명했다. 그는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서 이 전 의원에게 총선에 나가지 말 것을 권유한 배경에 대해 “그 길만이 진정 이명박 대통령과 한나라당을 위한 길이라고 생각했다”며 “손해를 보는 것은 참아도 이치에 안 맞는 것은 참을 수 없었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후배들이 죽어가는 현장을 두고 볼 수 없었다. 내 미래가 불투명해져도 후배들을 외면할 수 없었고 그들이 하는 일에 명분이 있었다”고 덧붙였다.
MB정부 개국공신
권력사유화 비판
정 전 의원을 포함한 29명의 총선 후보자가 지속해서 이 전 의원을 설득하자 그는 결국 ‘2선 후퇴’를 선언했다. 하지만 이 사건을 계기로 정 전 의원과 이 전 대통령과의 관계는 사실상 끝났다.
2007년 이명박 대선후보 경선캠프서 기획본부장, 대선 당시엔 전략기획총괄기획팀장 등을 지내며 얻은 이 전 대통령의 최측근이라는 후광이 없어진 것이다. 그러다 2012년 임석 전 솔로몬저축은행 회장으로부터 불법 정치자금을 받은 혐의로 재판에 넘겨져 1심서 실형을 선고받고 구속 수감되기도 했다. 이후 대법원서 무죄 취지의 판결을 받고 정치적으로 재기했지만, 당내 입지가 줄어든 정 전 의원에게 상황은 녹록지 않았다.
결국 4선 도전에 실패한 정 전 의원은 극심한 우울증을 겪은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지난해 2월 <한국일보>와의 인터뷰서 극심한 우울증에 시달려 극단적 선택을 시도한 바 있다고 토로하기도 했다.
당시 인터뷰서 그는 “내가 악몽을 꾼 건가. ‘여기가 어디지’ 싶더라고”라며 “힘든 일이 한꺼번에 찾아오니까 정말로 힘들더라고. 지옥 같은 곳을 헤매다가 눈을 떴어. 한동안은 여기가 어딘지 가늠이 안 되더라”고 말했다.
극단적 선택을 시도한 이유에 대해서는 “인간이 본디 욕심 덩어리인데, 그 모든 바람이 수포로 돌아가 ‘이 세상서 할 일이 없겠구나’라는 생각이 들 때 삶의 의미도 사라진다. 내가 이 세상서 의미 없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급성 우울증이 온 거지”라며 우울증이 심해 그런 행동을 했다고 털어놨다.
구치소서 출소한 뒤의 심경에 대해서는 “세상에 나오니 점점 도루묵이 되더라. 나를 기다리는 건 배신이었다. ‘이제 정두언은 끝났구나’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이 등을 돌렸다. 평온이 깨지고 분노와 증오가 서서히 생겨났다”고 말했다.
정 전 의원은 1957년 3월6일 서울서 운전기사인 아버지와 공사장 잡일을 하던 어머니 사이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해방 후 만주서 귀국, 사촌 형과의 인연으로 서울에 정착하게 됐다.
신민당의 정치인이자 6·3사태 당시 한일협정 반대로 국회의원직을 사퇴했던 정성태 전 국부회의장은 아버지와 같은 전라남도 광주 출신으로 같은 항렬의 친척이었다. 정 전 국회부의장은 그의 아버지를 각별히 여겼고 정 전 의원은 그를 큰아버지라 불렀다고 한다.
정 전 의원은 청소년기에 가정이 불우한 편이었다. 그의 어머니는 서대문 모래내 시장에 좌판을 펴서 5남매를 교육시켰다. 정 전 의원은 “아버지는 늘 밖으로 도셨고 수시로 어머니를 구타했다. 나는 아버지에 대한 복수심으로 내 자신을 망가뜨리는 것이 너무 두렵고 싫어서 자기애 또는 자존심을 드러냈다”며 자신의 불우한 유년시절을 고백했다.
그는 1972년 경기고등학교에 진학했다. 중학교 때부터 화장실서 30분~1시간 정도 노래를 부를 정도로 노래를 좋아했으나 가수의 꿈을 접고 서울대학교 경제학과에 진학했다.
서울대학교 재학 시절 록밴드를 결성했다. 보컬그룹명은 ‘spirit of 1999’였는데 세기말을 염두에 둔 작명이었다. 정두언은 학과서 스타급이었다. 술자리나 회식 또는 연수회를 가면 언제나 사회를 맡았고 분위기를 주도했다.
그 뒤 진로를 고민하며 도서관을 다니던 중 제24회 행정고시에 합격했다. 고시 성적은 우수했지만 실습점수가 0점이었다. 구청 인사 담당자와 시비가 붙어 해당 관계자가 앙심을 품고 영점 처리한 것이다. 그러나 그의 재능을 알아본 다른 인사 담당자가 그를 합격시켰다.
계속된 변신
굴곡진 인생
그 뒤 행정고시와 사법시험 합격자들에게 부여되는 특혜인 장교 복무 대신 사병으로 자원입대해 강원도 양구의 부대서 복무하고 육군병장으로 만기전역했다. 서울대 경제학과를 졸업한 후에는 행정 사무관시보에 임용됐다.
노태우 전 대통령이 정무 제2장관을 지내던 시절 보좌한 것을 시작으로 이후 20여년간 정무장관실, 문화체육부, 국무총리 행정조정실, 국무총리 비서실 등을 거쳤다. 노 전 대통령이 문화체육부장관으로 발령나자 정 전 의원은 그를 따라 문화체육부에 배속돼 올림픽 개최 지원업무를 담당했다.
1985년 1월에는 국무총리실로 발령, 청소년대책반서 근무했다. 그 뒤 국무총리 행정조정실장 비서관으로 있을 때 그는 상사의 순직을 봤다.
1987년 4월에는 4·13 호헌 결사 반대 운동에 동참하기도 했다. 그해 정 전 의원은 일주일간 휴가를 내고 KBS 방송의 드라마급 주연을 뽑는 KBS 탤런트 공채에 응시, 4단계 최종 시험까지 합격했지만 아내와 가족들의 만류로 스스로 포기했다.
1991년 미국으로 특별 유학을 간 그는 2년간의 연수를 받았으며 이 기간 중 조지타운 대학에 다니면서 정책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그 뒤 국무총리 비서실로 옮겨 국무총리실 정무 비서관, 정보 비서관, 공보 비서관 등을 지냈다.
2000년 정 전 의원은 이회창의 권고로 정계 입문을 결심했으나 같은 해 서울 서대문구에 출마했다가 장재식 후보에게 2000표 차이로 낙선하고 만다. 이듬해 그는 공무원 생활의 경험을 근거로 총리 등 행정부 고위 관료의 부끄러운 실태를 공개하고 비평한 책인 <최고의 총리 최악의 총리>를 발간했다.
정치권 충격에 빠져
여야 애도 물결 쇄도
같은 해 교통사고로 2개월간 병상에 입원했던 그에게 서울시장 출마를 준비하던 이명박 전 대통령이 찾아와 캠프 합류를 권했다. 당시 이 전 대통령은 그에게 “공직생활 20년을 채워 연금을 타도록 해주겠다”며 영입했다고 한다. 그는 이 전 대통령의 콘셉트가 시대정신에 부합한다는 판단을 내리고 서울시장 출마를 거의 혼자 준비했다.
민선 3기 이명박 서울특별시장 당선으로 정 전 의원은 서울특별시 정무부시장에 임명돼 2002년 7월1일부터 2003년 11월1일까지 일했다. 2003년 서울특별시 프로축구단 추진위원장에 위촉됐고, 2004년 서대문(을)구서 17대 국회의원으로 당선됐다.
2007년 17대 대통령 선거 때 이명박 후보 캠프의 선대위 기획본부장과 전략기획 총괄팀장으로 활동하며, 이 전 대통령의 당선에 큰 기여를 했다. 2007년 12월 이명박이 대통령에 당선되자 정 전 의원은 17대 대통령 당선자 보좌역으로 지명받았다.
2008년에는 18대 총선에 재선한다. 2010년 7·14전당대회서 지도부에 입성, 최고위원으로서 중도개혁과 보수혁신의 길을 주장했다. 한나라당 여의도연구소장을 역임했으며, 2009년에는 가수로 4집 앨범까지 냈다.
주호영과 박형준과 함께 이 전 대통령의 최측근이었으며, 대선 이후 여당의 지도력에 있어서 핵심적인 인물이 됐다. 하지만 정 전 의원은 정권 초기부터 ‘형님(이상득 의원)의 권력 사유화’를 정면서 거론했고, 줄기차게 당내 실세(이재오 전 의원)를 공격했다.
그는 이명박정부와 한나라당 지도부를 향해 독설을 퍼붓는 몇 안되는 소신 있는 정치인이었고, 이 때문에 이 전 대통령 당선의 1등 공신임에도 불구하고 MB정권 내내 변방서 머물러야 했다.
정치인·가수
평론가·사장
정 전 의원은 2016년 20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했지만 고배를 마셨다. 그는 박근혜 국정 농단이 터진 2016년 11월 새누리당을 탈당했다. 이후 정치를 접고 시사평론가로 종횡무진 활동했다. 정 전 의원은 지난해 초 “17대 대선 때 이 전 대통령의 부인 김윤옥 여사가 큰 실수를 해서 각서까지 써주고 무마했다”고 주장해 MB와의 악연을 이어갔다. 지난해 재혼한 그는 서울 마포구서 일식집을 개업하며 제2의 인생을 시작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