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인물> 파란만장 풍운아 정두언

  • 박창민 기자 cmp@ilyosisa.co.kr
  • 등록 2019.07.22 10:09:01
  • 호수 122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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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에게 할 말은 했던 ‘왕의 남자’

[일요시사 취재1팀] 박창민 기자 = 정두언 전 의원이 세상을 등졌다. 향년 62세. 그는 그동안 진정한 ‘보수의 품격’을 보여주며 대중의 사랑을 받은 정치인이었다. 그의 인생은 파란만장했다. 이명박정권의 일등 개국공신서 가수, 음식점 사장, 시사평론가까지 다양한 변신을 거쳤던 풍운아였다. 
 

▲ 고 정두언 의원

 

새누리당(현 자유한국당) 정두언 전 의원이 지난 16일, 북한산 자락길서 숨진 채 발견됐다. 정 전 의원은 이날 오후 2시30분쯤 자신의 운전기사가 운전하는 차에서 내려 서울 서대문구 홍은동 인근 북한산 자락길 쪽으로 올라간 것으로 전해졌다. 오후 3시42분쯤 집에서 정 전 의원의 유서를 발견한 부인이 경찰에 신고했다. 경찰은 휴대전화 위치 추적으로 오후 4시25분쯤 정 전 의원을 찾아냈다.

4선 도전 실패
극심한 우울증

경찰은 가족에 미안하다는 취지의 유서가 발견된 점 등으로 미뤄 정 전 의원이 극단적 선택을 한 것으로 보고 있다. 정 전 의원의 갑작스런 비보에 여야 정치권 인사들은 큰 충격에 빠졌다.

이날 사고 현장을 직접 찾은 자유한국당 김용태 의원은 “동료 의원으로서 정 전 의원의 명복을 빌면서 한 말씀 드리겠다”며 “정 전 의원이 우리 정치사에 남긴 족적은 참으로 깊고도 선명하게 남을 것으로 믿는다”고 말했다. 이어 “나라를 위하고 국민을 편안하게 하는 정치였고, 현장 정치를 떠나고도 정치에 도움이 되고자 평론 등 활발하게 활동했다”며 “정 전 의원이 정치발전을 위해 꿈꿨던 꿈을 동료 의원들과 후배 정치인들이 꼭 이뤄내길 진심으로 바란다”고 고인의 명복을 빌었다.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도 깊은 애도를 표했다.


민주당 이해식 대변인은 이날 구두 논평을 내고 “2016년 정계은퇴 이후 합리적 보수 평론가로서 날카로운 시각과 깊이 있는 평론으로 입담을 과시했던 그를 많은 국민들은 잊지 못할 것”이라고 전했다. 이어 “정 전 의원은 새누리당 출신 국회의원으로서 이명박 대통령 당선에 기여했던 정권 핵심 중의 핵심이었던 노련한 전략가였다”며 “이 대통령 측근들의 권력 사유화를 비판하며 이명박정권과 등을 지기도 했던 파란만장한 정치인이기도 했다”고 고인의 삶을 평했다. 

바른미래당(이하 바미당) 역시 안타까운 심경을 전했다.

바미당 김정화 대변인은 논평을 통해 “생산적인 의정활동을 하던 정치인, TV와 라디오를 넘나들며 맹활약하던 시사평론가로서의 모습이 아직도 선한데, 갑작스럽고 황망한 죽음이 비통하기만 하다”고 애도를 표했다. 이어 “부디 하늘에서는 걱정과 고민 없이 편히 영면하시길 기원한다. 다시 한 번 고인을 애도하며, 충격과 슬픔에 잠겨 있을 유가족에게도 각별한 위로를 전한다”고 말했다.

민주평화당 박지원 의원은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진짜 합리적 보수 정치인이었다. 저와는 절친도 아니고 이념도 달랐지만 서로를 이해하는 사이였다”고 회고하며 고인의 명복을 빌었다. 그는 “우리는 MB(이명박)에게 잘못 보인 탓에 저축은행 비리에 연관됐다며 고초를 겪기도 했지만, 무죄로 명예회복돼 함께 기뻐하기도 했다. 때때로 부인과 개업한 식당에 가면 예의 쑥스러운 웃음으로 감사해하던 정두언 의원. 영면하길”이라고 덧붙였다.

총선 낙마 이후 우울증 앓아
홍은동 야산서 숨진 채 발견  

이명박 전 대통령도 정 전 의원 측에 조문 메시지를 전했다. 정 전 의원은 이명박 전 대통령을 만든 개국공신이자 저격수였다. 이 전 대통령의 측근인 이재오 전 의원은 장례식장을 찾아 근조화환을 전달했다. 

이 전 의원은 “(이 전 대통령이)원래 평소에 (정 전 의원과)한 번 만나겠다는 이야기를 감옥 가시기 전에도 했다”며 “이 전 대통령께서 오늘 조문을 오려고 생각을 했는데, 병원 이외에 다른 곳에는 보석으로 출입과 통신을 하는 것이 제한돼있어 변호사를 통해서 대신 말을 전했다”고 했다.


그는 “조문을 하려면 재판부에 신청해서 허락을 받아야 하는데 며칠이 걸려서 못 오게 돼서 아주 안타깝다”고 덧붙였다.

고인과 가까웠던 이들은 “정 전 의원이 평소 우울증을 앓았다”고 전했다. 그의 우울증은 4선 의원에 도전했던 서울 서대문구(을) 지역서 낙선한 뒤 발병한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정 전 의원은 이 지역구에서만 내리 3선에 당선된 성공한 정치인이었다. 

그는 일명 ‘왕의 남자’로 불릴 만큼 이 전 대통령의 최측근으로 분류됐다. 하지만 이 전 대통령의 친형 이상득 전 의원의 불출마를 주도하며 MB와 사이가 틀어졌다. 그는 MB정부 출범 직후인 2008년 3월 이상득 전 의원을 겨냥해 ‘권력을 사유화한다’며 출마 포기를 권유했다.

당시 총선에 출마하려던 29명의 총선 후보자는 정 전 의원 주도로 ‘이상득 불출마’에 서명했다. 그는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서 이 전 의원에게 총선에 나가지 말 것을 권유한 배경에 대해 “그 길만이 진정 이명박 대통령과 한나라당을 위한 길이라고 생각했다”며 “손해를 보는 것은 참아도 이치에 안 맞는 것은 참을 수 없었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후배들이 죽어가는 현장을 두고 볼 수 없었다. 내 미래가 불투명해져도 후배들을 외면할 수 없었고 그들이 하는 일에 명분이 있었다”고 덧붙였다.

MB정부 개국공신
권력사유화 비판 

정 전 의원을 포함한 29명의 총선 후보자가 지속해서 이 전 의원을 설득하자 그는 결국 ‘2선 후퇴’를 선언했다. 하지만 이 사건을 계기로 정 전 의원과 이 전 대통령과의 관계는 사실상 끝났다.

2007년 이명박 대선후보 경선캠프서 기획본부장, 대선 당시엔 전략기획총괄기획팀장 등을 지내며 얻은 이 전 대통령의 최측근이라는 후광이 없어진 것이다. 그러다 2012년 임석 전 솔로몬저축은행 회장으로부터 불법 정치자금을 받은 혐의로 재판에 넘겨져 1심서 실형을 선고받고 구속 수감되기도 했다. 이후 대법원서 무죄 취지의 판결을 받고 정치적으로 재기했지만, 당내 입지가 줄어든 정 전 의원에게 상황은 녹록지 않았다.

결국 4선 도전에 실패한 정 전 의원은 극심한 우울증을 겪은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지난해 2월 <한국일보>와의 인터뷰서 극심한 우울증에 시달려 극단적 선택을 시도한 바 있다고 토로하기도 했다.

당시 인터뷰서 그는 “내가 악몽을 꾼 건가. ‘여기가 어디지’ 싶더라고”라며 “힘든 일이 한꺼번에 찾아오니까 정말로 힘들더라고. 지옥 같은 곳을 헤매다가 눈을 떴어. 한동안은 여기가 어딘지 가늠이 안 되더라”고 말했다.
 

▲ 고인이 된 정두언 전 의원

극단적 선택을 시도한 이유에 대해서는 “인간이 본디 욕심 덩어리인데, 그 모든 바람이 수포로 돌아가 ‘이 세상서 할 일이 없겠구나’라는 생각이 들 때 삶의 의미도 사라진다. 내가 이 세상서 의미 없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급성 우울증이 온 거지”라며 우울증이 심해 그런 행동을 했다고 털어놨다.

구치소서 출소한 뒤의 심경에 대해서는 “세상에 나오니 점점 도루묵이 되더라. 나를 기다리는 건 배신이었다. ‘이제 정두언은 끝났구나’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이 등을 돌렸다. 평온이 깨지고 분노와 증오가 서서히 생겨났다”고 말했다.


정 전 의원은 1957년 3월6일 서울서 운전기사인 아버지와 공사장 잡일을 하던 어머니 사이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해방 후 만주서 귀국, 사촌 형과의 인연으로 서울에 정착하게 됐다. 

신민당의 정치인이자 6·3사태 당시 한일협정 반대로 국회의원직을 사퇴했던 정성태 전 국부회의장은 아버지와 같은 전라남도 광주 출신으로 같은 항렬의 친척이었다. 정 전 국회부의장은 그의 아버지를 각별히 여겼고 정 전 의원은 그를 큰아버지라 불렀다고 한다. 

정 전 의원은 청소년기에 가정이 불우한 편이었다. 그의 어머니는 서대문 모래내 시장에 좌판을 펴서 5남매를 교육시켰다. 정 전 의원은 “아버지는 늘 밖으로 도셨고 수시로 어머니를 구타했다. 나는 아버지에 대한 복수심으로 내 자신을 망가뜨리는 것이 너무 두렵고 싫어서 자기애 또는 자존심을 드러냈다”며 자신의 불우한 유년시절을 고백했다.

그는 1972년 경기고등학교에 진학했다. 중학교 때부터 화장실서 30분~1시간 정도 노래를 부를 정도로 노래를 좋아했으나 가수의 꿈을 접고 서울대학교 경제학과에 진학했다. 

서울대학교 재학 시절 록밴드를 결성했다. 보컬그룹명은 ‘spirit of 1999’였는데 세기말을 염두에 둔 작명이었다. 정두언은 학과서 스타급이었다. 술자리나 회식 또는 연수회를 가면 언제나 사회를 맡았고 분위기를 주도했다.

그 뒤 진로를 고민하며 도서관을 다니던 중 제24회 행정고시에 합격했다. 고시 성적은 우수했지만 실습점수가 0점이었다. 구청 인사 담당자와 시비가 붙어 해당 관계자가 앙심을 품고 영점 처리한 것이다. 그러나 그의 재능을 알아본 다른 인사 담당자가 그를 합격시켰다. 


계속된 변신
굴곡진 인생

그 뒤 행정고시와 사법시험 합격자들에게 부여되는 특혜인 장교 복무 대신 사병으로 자원입대해 강원도 양구의 부대서 복무하고 육군병장으로 만기전역했다. 서울대 경제학과를 졸업한 후에는 행정 사무관시보에 임용됐다.

노태우 전 대통령이 정무 제2장관을 지내던 시절 보좌한 것을 시작으로 이후 20여년간 정무장관실, 문화체육부, 국무총리 행정조정실, 국무총리 비서실 등을 거쳤다. 노 전 대통령이 문화체육부장관으로 발령나자 정 전 의원은 그를 따라 문화체육부에 배속돼 올림픽 개최 지원업무를 담당했다.

1985년 1월에는 국무총리실로 발령, 청소년대책반서 근무했다. 그 뒤 국무총리 행정조정실장 비서관으로 있을 때 그는 상사의 순직을 봤다.

1987년 4월에는 4·13 호헌 결사 반대 운동에 동참하기도 했다. 그해 정 전 의원은 일주일간 휴가를 내고 KBS 방송의 드라마급 주연을 뽑는 KBS 탤런트 공채에 응시, 4단계 최종 시험까지 합격했지만 아내와 가족들의 만류로 스스로 포기했다.

1991년 미국으로 특별 유학을 간 그는 2년간의 연수를 받았으며 이 기간 중 조지타운 대학에 다니면서 정책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그 뒤 국무총리 비서실로 옮겨 국무총리실 정무 비서관, 정보 비서관, 공보 비서관 등을 지냈다.

2000년 정 전 의원은 이회창의 권고로 정계 입문을 결심했으나 같은 해 서울 서대문구에 출마했다가 장재식 후보에게 2000표 차이로 낙선하고 만다. 이듬해 그는 공무원 생활의 경험을 근거로 총리 등 행정부 고위 관료의 부끄러운 실태를 공개하고 비평한 책인 <최고의 총리 최악의 총리>를 발간했다.

정치권 충격에 빠져
여야 애도 물결 쇄도

같은 해 교통사고로 2개월간 병상에 입원했던 그에게 서울시장 출마를 준비하던 이명박 전 대통령이 찾아와 캠프 합류를 권했다. 당시 이 전 대통령은 그에게 “공직생활 20년을 채워 연금을 타도록 해주겠다”며 영입했다고 한다. 그는 이 전 대통령의 콘셉트가 시대정신에 부합한다는 판단을 내리고 서울시장 출마를 거의 혼자 준비했다. 

민선 3기 이명박 서울특별시장 당선으로 정 전 의원은 서울특별시 정무부시장에 임명돼 2002년 7월1일부터 2003년 11월1일까지 일했다. 2003년 서울특별시 프로축구단 추진위원장에 위촉됐고, 2004년 서대문(을)구서 17대 국회의원으로 당선됐다. 

2007년 17대 대통령 선거 때 이명박 후보 캠프의 선대위 기획본부장과 전략기획 총괄팀장으로 활동하며, 이 전 대통령의 당선에 큰 기여를 했다. 2007년 12월 이명박이 대통령에 당선되자 정 전 의원은 17대 대통령 당선자 보좌역으로 지명받았다. 
 

2008년에는 18대 총선에 재선한다. 2010년 7·14전당대회서 지도부에 입성, 최고위원으로서 중도개혁과 보수혁신의 길을 주장했다. 한나라당 여의도연구소장을 역임했으며, 2009년에는 가수로 4집 앨범까지 냈다.

주호영과 박형준과 함께 이 전 대통령의 최측근이었으며, 대선 이후 여당의 지도력에 있어서 핵심적인 인물이 됐다. 하지만 정 전 의원은 정권 초기부터 ‘형님(이상득 의원)의 권력 사유화’를 정면서 거론했고, 줄기차게 당내 실세(이재오 전 의원)를 공격했다. 

그는 이명박정부와 한나라당 지도부를 향해 독설을 퍼붓는 몇 안되는 소신 있는 정치인이었고, 이 때문에 이 전 대통령 당선의 1등 공신임에도 불구하고 MB정권 내내 변방서 머물러야 했다. 

정치인·가수
평론가·사장

정 전 의원은 2016년 20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했지만 고배를 마셨다. 그는 박근혜 국정 농단이 터진 2016년 11월 새누리당을 탈당했다. 이후 정치를 접고 시사평론가로 종횡무진 활동했다. 정 전 의원은 지난해 초 “17대 대선 때 이 전 대통령의 부인 김윤옥 여사가 큰 실수를 해서 각서까지 써주고 무마했다”고 주장해 MB와의 악연을 이어갔다. 지난해 재혼한 그는 서울 마포구서 일식집을 개업하며 제2의 인생을 시작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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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곡점’ 의정 갈등 엔드게임

‘변곡점’ 의정 갈등 엔드게임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구성원의 압도적인 지지로 당선된 수장이 반년 만에 끌려 내려왔다. 막말에 가까운 강한 발언과 제멋대로인 행보가 탄핵을 불렀다. 강성 수장이 물러나면서 변화를 기대하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대화의 문이 열릴 것인가, 더 높은 벽이 쌓일 것인가. 임현택 대한의사협회(이하 의협) 전 회장이 3년 임기를 다 채우지 못하고 탄핵당했다. 지난 5월 취임 이후 6개월 만으로 의협 역사상 2번째, 최단기간 내 불명예 퇴진한 회장이 됐다. 첫 번째는 2014년 4월 임기 1년여를 앞두고 탄핵당한 노환규 전 회장이다. 두 번째 최단기간 의협은 지난 10일 오후 서울 용산구 의협회관서 임시대의원총회를 열고 임 전 회장의 불신임안을 처리했다. 참석 의원 224명 가운데 170명(75.9%)이 찬성했다. 반대는 50명, 기권 4명이다. 전체 대의원 249명 가운데 224명(91.1%)이 표결에 참여했다. 의협 정관에 따르면, 회장 불신임안은 제적 대의원 3분의 2 이상이 출석하고, 출석 대의원 3분의 2 이상이 찬성하면 가결된다. 지난 3월 임 전 회장은 선거서 유효 투표수 3만3084표 중 2만1646표를 받아 당선됐다. 65.43%의 압도적인 지지다. 의협 회장 선거는 정부의 의대 정원 증원 발표로 의정 갈등 수위가 높아지고 있을 무렵에 치러졌다. 전공의가 병원을 떠났고 정부가 ‘2000명’을 강조하던 시기였다. 의협 회원들은 강성 중의 강성으로 분류되는 임 전 회장에게 힘을 실었다. 임 전 회장의 어깨에 너무 힘이 들어갔던 것일까? 임 전 회장의 언행은 사사건건 도마 위에 올랐다. SNS에 올린 글, 공식 석상서 했던 발언 등이 막말 논란으로 번졌고, 단식투쟁 등의 행보는 ‘쇼’라는 비판을 받았다. 무엇보다 박단 대한전공의협의회(이하 대전협) 비대위원장과 갈등을 빚으면서 의료계 내부 분열을 조장한다는 지적이 뼈아팠다. 임 전 회장이 8개월 동안 보여준 모습은 고스란히 탄핵 사유가 됐다. 의협 회원 사이에서는 임 전 회장이 SNS로 막말과 실언을 해 의사단체의 명예를 훼손했다는 비판이 일었다. 또 ‘임 회장이 전공의 지원금을 빼돌렸다’는 허위 비방 글을 올린 시도의사회 임원에게 고소 취하 대가로 1억원을 요구한 사실이 녹취록을 통해 알려져 논란이 불거졌다. 특정 인물에 대한 수위 높은 비판은 여론의 역풍을 불렀다. 장상윤 대통령실 사회수석을 겨냥해 “정신분열증 환자 같은 개소리”라고 비난하는 글을 올렸다가 환자를 비하했다는 지적을 받았다. 임현택, 6개월 만에 탄핵당해 막말 논란·의대 증원 못 막아 또 2021년 한 의사가 80대 환자에게 ‘맥페란’ 주사제를 투여한 뒤 부작용이 나타나 기소된 재판에 대해서도 도 넘는 발언을 쏟아냈다. 이른바 ‘맥페란 재판’ 항소심서 판사가 1심의 금고 10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은 해당 의사의 항소를 기각하자 “이 여자 제정신입니까?”라는 글을 SNS에 올린 것이다. 임 전 회장의 발언에 법원은 이례적으로 “재판장의 인격에 대한 심각한 모욕일 뿐 아니라 국민의 신뢰를 크게 훼손할 수 있는 매우 부적절한 행동”이라고 공개적으로 유감을 표명했다. 의대 정원 증원 집행정지와 관련해 기각·각하 결정을 내린 재판장이 ‘회유’받았을 것이라는 주장으로도 입길에 올랐다. 서울고등법원 재판부가 결정을 내린 다음 날 한 라디오 프로그램에 출연해 재판장의 실명을 거론하면서 “지난 정권에서는 고법 판사들이 차후 승진으로 법원장으로 갈 수 있는 그런 길이 있었는데 제도가 바뀐 다음에는 그런 통로가 막혀서 이분이 아마 어느 정도 대법관에 대한 회유가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있다” 말했다. 서울고법은 법원 명의로 입장문을 내고 “해당 단체장의 아무런 객관적 근거가 없는 추측성 발언은 재판장의 명예와 인격에 대한 심대한 모욕”이라면서 “사법부 독립에 관한 국민의 신뢰를 현저히 침해할 수 있는 매우 부적절한 언사다. 깊은 유감을 표명한다”고 밝혔다. 여기에 결정적으로 정부의 2025학년도 의대 증원을 막지 못한 점, 간호법 제정을 저지하지 못한 점이 탄핵 사유로 꼽혔다. 임 전 회장은 총회를 앞두고 의사 회원들에게 사과하고 페이스북 계정을 삭제하는 등 재신임을 호소했지만 반전은 없었다. 회장을 탄핵한 의협은 비대위원회 체제로 전환하고 지난 13일 새로운 회장 선거 전까지 단체를 이끌 비대위원장을 뽑았다. 그 결과 박형욱 대한의학회 부회장이 1차 투표서 총 유효 투표수 233표 중 123표(52.8%)를 얻어 과반으로 당선이 확정됐다. 임기는 내년 1월 차기 회장이 선출될 때까지다. 뒤늦게 호소했지만… 박형욱 비대위원장은 “정부는 의료 파탄이란 시한폭탄을 장착해놨다”며 “정말 대화를 원한다면 정부는 먼저 시한폭탄을 멈춰야 한다. 그래야 진정한 대화가 가능하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비대위원들의 합의에 기초해 입장과 행동을 결정할 것”이라며 “비대위 운영서 소외돼왔던 전공의들과 의대생들의 견해가 충분히 반영될 수 있게 하겠다”고 소감을 밝혔다. 임 전 회장이 물러나고 새로운 비대위원장이 등장하면서 의협의 투쟁 방향에 변화가 생길 가능성이 커졌다. 일각에서는 의협의 이번 행보를 의정 갈등의 중요한 변곡점으로 보고 있다. 강성 회장을 필두로 정부와 강하게 대립했던 이전 모습서 벗어나 대화에 참여할 것이라는 의견과 이전보다 더 수위 높은 대정부 투쟁이 예상된다는 의견으로 갈리는 중이다. 후자의 배경에는 대전협이 있다. 앞서 박단 비대위원장 등 전공의 70여명은 전날 의협 대의원들에게 “비대위원장으로 박형욱 교수를 추천한다”는 메시지를 보내 공개 지지 의사를 드러냈다. 대의원회서도 박단 비대위원장의 공개 지지에 대해 경고하는 등 잡음이 일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대전협의 지지를 등에 업은 박형욱 비대위원장이 당선되면서 전공의의 영향력이 상대적으로 커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됐다. 의협과 대전협의 공조가 본격화될 것이라는 관측이 나오는 이유다. 문제는 양측의 교류가 정부와의 대화로까지 이어질 수 있느냐는 점이다. 박형욱 비대위원장은 당선 소감부터 정부의 태도 변화를 요구하고 나섰다. 또 윤석열 대통령의 변화도 필요하다고 언급했다. 의정 갈등서 줄곧 선봉에 선 전공의들은 ‘의대 정원 증원 백지화’라는 요구사항서 앞으로도 뒤로도 움직인 적이 없다. 전공의의 행보는 의대생, 의대 교수 등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영향력 커진 전공의 단체 의료계가 전공의 중심으로 굴러가고 있는 셈이다. 실제 대전협은 지난 11일 출범했던 여야의정협의체(이하 협의체)에 대해서도 부정적인 태도를 보인다. 협의체는 야당인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이 불참하고 의료계에서는 학술 단체인 대한의학회와 의대 학장 모임인 한국의과대학·의학전문대학원협회(KAMC)만 참석하는 등 ‘반쪽 출범’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협의체의 운영 기한은 올해 말까지로, 다음 달 22~23일 전에 의미 있는 결과를 낼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는 태도다. 하지만 박단 비대위원장은 협의체에 대해 ‘무의미하다’고 평가했다. 그는 협의체가 첫발을 뗀 11일 SNS에 “국민의힘 한동훈 대표는 전공의와 의대생, 당사자 없이 대화나 하겠다는 한가한 소리를 하고 있다”며 “한 대표는 2025년 의대 모집 정지와 업무개시명령 폐지에 대한 입장부터 명확히 밝히시길 바란다”고 일갈했다. 이어 “눈치만 보며 뭐라도 하는 척만 하겠다면 한동훈의 ‘여야의정 협의체’ 역시 임현택 전 의협 회장의 ‘올바른 의료를 위한 특별위원회(올특위)’와 결국 같은 결말일 것”이라고 우려했다. 올특위는 의료계의 입장을 하나로 모으기 위해 의협 주도로 구성한 범의료계 특별위원회다. 전공의와 의대생이 해당 위원회에 불참하면서 파행 운영되다 지난 7월 해체됐다. 정부는 협의체서 의료계가 제안한 내용에 대해 “진정성 있게 검토하겠다”는 견해를 밝혔다. 지난 11일 협의체서 의료계는 한국의학교육평가원 자율성 보장, 추가 합격 제한 등을 통한 2025학년도 의대 선발 인원 축소 등을 제안한 것으로 알려졌다. 정윤순 보건복지부 보건의료정책실장은 지난 14일 의사 집단행동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이하 중대본) 회의를 주재하면서 “마주 앉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린 만큼 활발한 대화와 소통을 통해 누적된 갈등을 해소하고 신뢰를 회복해 국민이 원하는 결과를 끌어낼 수 있길 기대한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의협과 전공의 등 다른 의료계 단체의 참여를 호소했다. 박단 공개 지지 새 비대위원장 강경 투쟁이냐 VS 노선 변화냐 의료계 내부 상황은 크게 바뀌었지만 향후 상황은 여전히 ‘시계 제로(0)’ 상태다. 임 전 회장과 박단 비대위원장 간 갈등의 불씨도 여전히 살아있다. 대전협은 임 전 회장의 탄핵을 공개적으로 요청하는 등 ‘(임 전 회장과)같이 갈 수 없다’는 뜻을 분명히 밝힌 바 있다. 실제 대전협은 임 전 회장의 탄핵을 요청하면서 “이해와 소통이 가능한 새로운 회장을 필두로 의협과 대전협 두 단체가 향후 상호 연대를 구축할 수 있길 기대한다”는 입장문까지 냈다. 임 전 회장의 탄핵안 가결 직후 박 비대위원장이 “결국 모든 길은 바른 길로”라는 내용의 SNS 글을 올리기도 했다. 문제는 임 전 회장이 박단 비대위원장을 상대로 반격을 진행하고 있다는 점이다. 임 전 회장은 탄핵 사흘 만에 닫았던 페이스북 계정을 다시 열고 “박단과 그 뒤에서 박단을 배후 조종해 왔던 자들이 무슨 일을 해왔는지 전 의사 회원들에게 아주 상세히 밝히겠다”며 박단 비대위원장을 저격하는 글을 올렸다. 그러면서 “의협 대의원회 비대위원장과 의협 회장 선거가 더 이상 왜 필요한가”라면서 “박단이 의협 회장 겸 비대위원장을 맡아 모든 권한과 책임하에 의료 농단을 해결하면 된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지지해주셨던 모든 분에게 우선 사과의 말씀을 드린다”며 “이유가 어떻든 회장 취임 전부터 탄핵하겠다고 마음먹고 있던 자들에게 빌미를 주어 넘어간 것 자체가 제 잘못”이라고 주장했다. 또 의협의 근본적인 개혁의 첫걸음으로 의협 대의원회 폐지 등을 내용으로 하는 민법상의 사원총회를 개최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사원총회는 민법에 규정된 사단법인의 최고의사결정 기관이다. 의협 최고의결기구로 알려진 대의원총회보다 상위에 있고 정관의 규정으로 폐지할 수 없다. 사원총회는 이사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경우나 총 사원 5분의 1 이상이 회의의 목적 사항을 제시해 청구하는 경우 소집될 수 있다. 반격 시작 내부 갈등? 올해 2월 시작된 정부와 의료계의 갈등이 10개월째로 접어들었다. 온갖 말이 오갔지만 되짚어보면 조금도 좁혀지지 않은 평행선 상황이 계속되는 모양새다. 정부와 의료계의 대치 상황이 길어질수록 ‘의료 붕괴’는 가시화되고 있다. 한 의료계 관계자는 이렇게 말했다. “이제는 정말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jsjang@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