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시사 취재1팀] 박창민 기자 = ‘양비’(양정철 비서관)가 돌아왔다. 문재인정권 출범 후 2선 후퇴와 백의종군을 택했던 양정철 민주연구원장이 여의도의 ‘인싸’(인사이더, 무리에 잘 섞여 노는 사람들을 뜻하는 신조어)로 급부상했다. 국회의장·국장원장·지자체 단체장들을 잇달아 만나며 총선을 앞두고 ‘광폭행보’에 나서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의 복심으로 불리는 양정철 전 홍보기획비서관이 방랑생활을 끝내고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 산하 정책연구소 민주정책연구원장 책임자로 여의도에 복귀했다. 문재인정부 출범 후 ‘백의종군’을 선언했던 양 전 비서관이 현 여권서 공식 직책을 맡은 것은 처음이다.
숨어 지내다
세상 밖으로
민주연구원은 지난 4월29일 이사회를 열고 만장일치로 양 전 비서관을 신임 민주연구원장으로 공식 선임했다. 양 원장은 취임 일성서 민주연구원 ‘병참기지론’을 펼쳤다.
양 원장은 “총선 승리에 꼭 필요한 병참기지로서 역할을 하겠다”며 “민주연구원이 총선을 앞두고 비상한 상황이다. 돌아오는 총선서 정책과 인재로 승부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이해찬 대표와 연구원 운영 방안과 목표 등에 대해 충분히 의논을 많이 했다”며 “이 대표와 지도부를 잘 모시면서 좋은 성과를 낼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덧붙였다.
양 원장의 복귀를 두고, 친문 세력 중심으로 총선을 치르려는 여권 핵심부의 구상이 담긴 것이란 해석이 나온다. 민주연구원이 총선의 실질적 ‘컨트롤타워’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온 이유다.
실제 양 원장은 연구원의 정책 연구 기능을 다소 축소하고, 총선 전략 수립 등의 기능을 강화하겠다는 방침을 기존 연구원 멤버들에게 전달한 것으로 알려졌다.
취임 이후 양 원장은 여의도서 가장 주목 받는 정치인으로 급부상했다. 국회의장, 국정원당, 여권의 유력 대권 잠룡인 광역단체장들을 잇따라 만나며 광폭행보를 이어 나가고 있다. 언론의 이목이 쏠릴 수밖에 없다.
양 원장은 취임 직후인 지난달 16일 문희상 국회의장을 예방했다. 이날 만남의 공식적인 사유와 정치적인 의미는 다를 수 있다는 점에서 주목을 끌었다. 양 원장은 인사 차 문 의장을 방문한 것으로 전해진다. 문 의장과 양 원장은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과 문재인 대통령이라는 공통분모가 있다. 노 전 대통령이 가장 신임하는 참모 중 하나였던 양 원장은 참여정부 시절 청와대 비서실장으로 문 의장을 모신 경험이 있다.
이날 국회의장실서 20분 정도 대화를 나눈 양 원장은 예방 직후 “여의도에 계신 큰 어른께 인사드리러 온 것이고 참여정부 때 첫 비서실장을 하셨는데, 제가 의장님께 비서관 임명장을 받았다”며 “존경하는 정치 선배이자 어른이신데 최근에 여러 정치 상황에 대한 좋은 당부 말씀과 가르침을 많이 받았다”고 말했다.
민주당 싱크탱크 맡은 ‘문의 남자’
단순 소통? 총선 앞두고 광폭행보
양 원장은 국회의장에 이어 서훈 국가정보원장과도 만찬을 가지며 ‘실세 행보’를 보였다. 양 원장은 지난달 21일 저녁 서울의 한 한정식 식당서 서 원장과 만찬을 가졌다. 4시간 가까이 이어진 만찬 이후 양 원장은 자리를 뜬 서 원장을 배웅했다.
당 외곽 조직인 민주연구원을 맡으면서 원외인사인 양 원장이 대통령, 대법원장과 함께 ‘3부 요인’으로 꼽히는 국회의장에 이어 국정원장까지 두루 만난 것은 상당히 이례적이다. 그만큼 여권 내에선 양 원장의 영향력이 크다는 점을 방증하는 게 아니냐는 목소리도 나온다.
양 원장은 기자들에게 문자메시지를 보내 “독대가 아니라 오래 전부터 알고 지내던 지인들과 함께한 만찬이었다”며 “사적인 모임이어서 특별히 민감한 얘기가 오갈 자리도 아니었고 그런 대화도 없었다”고 해명했다.
반면 야당은 총선을 앞두고 양 원장과 서 원장의 만남이 부적절하다고 지적했다. 자유한국당(이하 한국당) 나경원 원내대표는 “민감한 정보가 모이는 국정원 수장과 여당 싱크탱크의 수장이 만났다. 누가 봐도 부적절한 만남”이라며 “원래 잡혀 있던 사적인 모임이라는 해명은 국민을 우롱하는 무책임한 설명”이라고 비판했다.
하지만 양 원장은 이런 비판을 뒤로한 채 이번에는 여권의 ‘대권 잠룡’으로 꼽히는 박원순 서울시장과 이재명 경기지사를 연이어 만났다. 서훈 국정원장과의 비공개 회동으로 논란의 중심에 선 뒤 일주일 만에 가진 공개 행사였다.
양 원장은 지난 3일 서울시청, 경기도청을 각각 찾아 서울연구원, 경기연구원과 정책 연구 협력을 위한 업무협약식을 체결했다. 민주당의 싱크탱크와 지방정부의 싱크탱크가 정책 협약을 맺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양 원장은 “(박 시장은)우리 당의 소중한 자산이고, 정책의 보고이자 아이디어 은행”이라며 “좋은 협약을 통해 함께 공유할 수 있는 정책적 성과가 나올 수 있었으면 좋겠다. 한 수 배우러 왔다”고 말했다. 박 시장은 “당원의 한 사람으로서 든든하다”며 “서울시의 많은 혁신 정책들이 문재인정부 들어 전국화하고 있는데(양 기관이) 좀 더 긴밀하게 협력해 정책 성과로 나오면 좋겠다”고 화답했다.
총선 병참기지
역할론 설파
양 원장은 이어 경기연구원과의 업무협약 체결식서 이 지사를 만났다. 양 원장은 “지사님이 가진 획기적 발상, 담대한 추진력, 경기연구원에 축적된 연구성과와 민주연구원이 힘을 합쳐 경기도와 나라에 보탬이 되는 방향으로 힘을 모으자”고 말했다. 이에 이 지사는 “내년 선거도 그렇고 정책이 정말 중요한데 저희가 경기도에서 시범적으로 하거나 앞으로 할 일들을 연구원서 많이 받아주면 저희도 영광”이라고 했다.
민주당과 지방정부 싱크탱크의 정책 협약은 내년 총선을 앞두고 당내 역할과 입지를 굳히려는 양 원장과 국회 내 영향력 확대를 꾀하는 두 대권주자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 만남으로 해석된다.
박 시장은 최근 한 방송서 한국당 황교안 대표를 향해 “공안검사는 독재정권의 하수인”이라고 각을 세우고, 대북 식량지원에 나서겠다는 뜻을 밝히는 등 차기 대권 준비에 군불을 때기 시작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친형 강제입원 등 직권남용 혐의로 기소됐다가 지난달 16일 1심 무죄판결을 받은 이 지사도 재판 과정서 탄원서에 서명한 의원들에게 개별적으로 감사 인사를 하는 등 최근 빠른 정치행보를 이어가고 있다.
양 원장은 조만간 김경수 경남지사도 만날 것으로 보인다. 양 원장은 “우리 당 소속이 아닌 단체장 관할의 싱크탱크에도 협약 제안을 했다. 정치적으로 해석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며 “국리민복에 보탬이 될 만한 좋은 정책 결과물을 도출하기 위한 것이지, 선거로 해석하지는 말아달라”고 했다.
민주연구원의 위상과 역할을 ‘총선의 병참기지’라고 규정한 양 원장이 연이어 지자체를 방문하자 야당에선 비판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잠룡으로 거론되는 광역단체장들과의 만남이 이어지는 것에도 예민하게 반응하는 모습이다.
나 원내대표는 “양 원장은 문재인 대통령만 떠받들겠다는 ‘문(文)주연구원장’다운 오만한 행보를 보이고 있다”고 비판했다. 나 원내대표는 양 원장이 서훈 국정원장과 만찬을 가진 것을 지적하며 “몰래 뒤에서 나쁜 행동을 하다 들키더니 이제는 대놓고 보란 듯이 한다. 지자체를 선거전략을 짜는 데 동원하려 한다”고 주장했다.
민주평화당 홍성문 대변인도 “양 원장의 발걸음이 수상하고 매우 부적절하다. 선거법 위반의 소지도 있다”고 지적했다.
그간 ‘문의 남자’ 또는 ‘강성 친노’로 불렸던 양 원장은 이번 광폭행보로 ‘원외대표’라는 별명을 하나 더 추가했다. 이인영 원내대표와 함께 집권여당 민주당을 이끄는 양대 축이라는 점을 드러낸 게 아니냐는 분석이 나온다.
지금까지 이런
원장은 없었다
앞서 양 원장은 민주연구원의 총선 병참기지론을 언급했다. 민주연구원 부원장에는 재선 출신의 백원우 전 청와대 민정비서관과 함께 김영진·이철희 의원과 민주당 전략기획위원장인 이근형 윈지코리아컨설팅 대표가 맡아 전현직 전략기획위원장이 포진했다.
당 대변인을 맡고 있는 이재정 의원까지 포함해 부원장을 현역 의원이 맡는 것 자체가 이례적이라는 평가다. 양 원장은 현역 의원을 총괄하는 위치서 총선 전 인재 영입 또한 속도감 있게 진행할 것으로 보인다.
일각에선 이처럼 민주연구원의 위상이 강화되는 것에 대해 경계감을 드러내기도 했다. 당 대표를 중심으로 내년 총선을 대비한다기보다 민주연구원이라는 원외조직을 중심으로 당이 쪼개지는 모습을 연출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특히 양 원장이 인재 영입 작업을 주도하면서 다선 의원을 젊은 정치 신인으로 대거 물갈이하는 역할을 할 것이라는 관측까지 나와 내년 총선까지 양 원장을 둘러싼 당내 갈등이 더욱 첨예해질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원외대표 별명이 향후 민주당 총선에 발목을 잡는 게 아니냐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양 원장은 지난 2002년 대선 당시 서울팀서, 문재인 대통령은 부산팀서 노무현 전 대통령의 당선을 도왔다. 이후 청와대에 함께 입성했다. 지난 2009년 노 전 대통령 서거 뒤 문 대통령은 노무현재단 상임이사를, 양 원장은 사무처장을 맡았다. 양 원장은 지난 2011년 문 대통령의 자서전 <운명>의 출간을 돕기도 했다.
이후 양 원장은 2012년 제18대 대선 때는 문재인 후보 메시지팀장을 맡았다. 2017년 19대 대선에서는 18대 대선 때의 ‘비선 실세’ 논란을 우려해 선대위 내 비서실 부실장으로 활동하며, 메시지 관리와 선거전략 수립 등의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양 원장은 자타 공인하는 문 대통령 당선의 ‘일등 공신’이자 최측근이라고 할 수 있다.
양 원장은 1964년 7월4일 서울서 태어나 한국외국어대학교 법학과를 졸업했다. 대학생 시절 자민투(반미자주화 반파쇼 민주화투쟁위) 위원장과 한국외국어대학교 학보 편집장으로 활동했다.
노태우정부 시절인 1990년 9월 <언론노보> 기자로 있을 때 군 복무 중 보안사에 근무하던 후배로부터 보안사의 민간인 사찰 자료를 전달받게 되고, 그것을 <한겨레> 기자에게 전달하면서 세상에 알려지게 했다.
국회의장, 국정원장, 잠룡들 잇단 회동
19대 이어 다음 대선도 킹메이커 역할?
<한겨레>는 창간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이었고 권력의 압력과 로비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언론매체였기 때문에 선택됐는데 <한겨레>의 심층취재 보도로 국방부장관과 보안사령관이 경질되고 보안사가 기무사로 개편되는 등 엄청난 사회적 파장을 낳았다. 이 사건은 후에 영화 <모비딕>의 모티브가 됐다.
이후 양 원장은 시민단체 간사, 미디어 전문 기자 등으로 활동하다가 노무현을 통해 언론개혁을 이루고자 제16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노무현 후보 대선 준비 캠프에 합류했다. 그는 노무현정부서 5년 동안 비서관을 지냈다.
노 전 대통령 퇴임 후에도 비서관으로 활동하면서 저서 집필작업을 도왔던 그는 노 전 대통령이 2009년 5월23일 서거하자 ‘사람사는세상’ 홈페이지에 노 전 대통령의 글을 여러 개 올리면서 슬픔과 추모를 하기도 했다.
노 전 대통령이 서거한 해 9월 노무현재단이 설립됐다. 양 원장은 노무현재단의 사무처장을 맡으며 당시 노무현재단 상임이사였던 문 대통령과 급속도로 가까워졌다. 이때 문 대통령의 정계입문을 권유한 사람도 양 원장인 것으로 알려졌다.
양 원장은 문 대통령이 2011년 출간한 자서전 <문재인의 운명>을 기획하고 집필을 도왔다. 반향이 커지자 전국 각지를 도는 ‘북콘서트’를 기획해 문 대통령의 입지를 구축하는 데 일조했다. <문재인의 운명>과 북콘서트의 흥행을 기반으로 2012년 문 대통령은 정계에 입문하게 된다. 이로써 양 원장은 ‘문재인을 호랑이 등에 태운 인물’이자 ‘킹메이커’로 불리게 됐다.
문 대통령이 2016년 6월 민주당 대표직서 물러난 뒤 네팔로 떠나 히말라야 트레킹을 했을 때 동행한 사람도 양 원장이었다. 2016년부터는 문 대통령의 대선 준비를 실무적으로 뒷받침한 ‘광흥창팀’에 참여했다. 광흥창팀은 대선 후보의 일정, 정책, 메시지, 조직 등을 준비하는 역할을 맡았다.
2017년 대선에서는 문 대통령의 선거대책위원회 부실장을 맡아 임종석 전 청와대 비서실장과 손발을 맞추면서 대선 승리에 기여하기도 했다.
그를 만나야…
여의도 인싸
2017년 5월 문 대통령이 대선서 승리하자 당선에 큰 기여를 한 양 원장이 정부나 청와대로 다시 들어갈 것이라는 전망이 나왔다. 하지만 양 원장은 2017년 5월16일 기자들에게 “내 역할은 여기까지”라는 제목의 문자메시지를 남기면서 정계와 거리를 두겠다고 선언했다. 그 뒤 뉴질랜드 크라이스트처치에 사는 작은형의 집에서 머물다가 일본 도쿄로 거처를 옮겨 2년여를 보내며 정치와는 거리를 뒀다. 2018년 4월부터는 도쿄 게이오대학교 법학과 방문교수로 일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