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2년 8월에 실시된 제2대 대통령선거 당시의 일이다. 대한민국 진보 진영의 선구자로 평가받고 있는 조봉암이 선거를 앞두고 동 선거에 출마가 유력한, 독립운동가 출신으로 초대 부통령을 역임했던 이시영을 방문한다. 이승만을 상대로 야권 후보 단일화를 성사시키기 위해서였다.
그 자리서 조봉암은 이시영의 출마 여부를 타진한다. 그러나 이시영은 대통령 출마에 뜻이 없다며 조봉암에게 출마를 권유한다. 이를 기회로 조봉암은 야권 단일후보로 대통령선거 출마를 선언한다.
그러자 당시까지 관망세를 유지하던 민주국민당(이하 민국당)이 움직이기 시작한다. 민국당으로서는 조봉암으로 하여금 야권을 대표하게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민국당은 한사코 출마를 고사하는 이시영을 설득하여 민국당 후보로 대통령선거에 참여토록 하고, 결국 조봉암의 야권 후보 단일화는 물거품이 되고 만다.
1956년 5월에 실시된 제3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동 선거에 출마했던 조봉암이 민주당 신익희 후보와 야권 후보 단일화를 도모한다. 민주당 역시 신익희가 야권의 단일 후보가 돼야 한다고 주장하던 터였다.
하지만 후보 단일화가 되지 않은 상태서 민주당의 신익희 후보가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난다. 그 일로 조봉암은 자연스럽게 야권의 단일후보가 되는 듯 보였다.
그러나 민주당은 그를 묵인하지 않았다. 조봉암을 야권 단일후보로 인정할 수 없다며, 선거일 직전에 ‘대통령선거 투표에 대한 해명’이란 성명서를 발표해 사망한 신익희 후보에게 투표할 것을 종용했다.
이제 1987년 12월에 실시된 제13대 대통령 선거를 살펴보자. 동 선거는 민주정의당 노태우, 통일민주당 김영삼, 평화민주당 김대중, 그리고 신민주공화당 김종필이 경쟁한 선거로 당시 가장 뜨거운 화두는 김영삼과 김대중의 야권 후보 단일화였다.
군사정권을 끝장내자는 국민들의 염원이 최고조에 달했던 상황서 두 사람 간의 후보 단일화는 시대의 소명일 정도로 중요했다. 그러나 두 사람은 이를 무시하고 각개전투를 벌인 결과 동반 낙선한다.
그로 인해 국민들은 통탄을 머금을 정도로 실망했지만, 이후 그 두 사람은 시간 차이만 있을 뿐이지 결국 자신의 목표였던 대통령이 된다.
그런데 왜 그 당시 김영삼과 김대중은 후보 단일화를 이루지 못했을까, 아니 하지 않았을까. 당시의 정치적 역학관계 등 여러 이유가 있을 수 있지만, 필자는 그 이유를 두 전직 대통령의 소신, 즉 꼼수를 거부하고 정도로 가겠다는 신념서 비롯된 것이라고 판단한다.
상기서 대통령선거의 후보 단일화에 대한 세 가지 경우를 실례로 들었다. 이 실례와 이 나라 진보의 선구자로 추앙받던 조봉암의 행태를 자세히 살펴보면, 선거서 후보 단일화는 소위 진보 진영의 전유물로 보인다.
이제 시선을 현실로, 즉 진보 진영의 대표주자로 평가받았던 노회찬 전 의원의 행태로 돌려보자. 노 전 의원은 생전 지역구서 자력으로, 즉 정도로 당선된 적 없다. 조봉암의 행적, 후보 단일화라는 구걸(求乞)을 통해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최근 노 전 의원의 타계로 실시된 보궐선거서 정의당의 한 인사가 또 민주당을 상대로 구걸해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구걸한 당사자도 그렇지만, 그 구걸을 선선히 받아들인 정당 역시 한심스럽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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