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인물] ‘데뷔 60주년’ 이미자가 걸어온 길

  • 박창민 기자 cmp@ilyosisa.co.kr
  • 등록 2019.03.04 09:58:28
  • 호수 120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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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 잃고 배고픈 설움 노래로 달래다

[일요시사 취재1팀] 박창민 기자 = ‘열아홉 순정’으로 데뷔해 올해로 노래 인생 60년을 맞은 가수 이미자. 인생의 8할을 ‘엘레지의 여왕’으로 불렸다. 길었던 세월만큼 우여곡절도 많았다. 그의 노래 인생을 돌아봤다. 
 

▲ ▲‘엘레지의 여왕’ 이미자

이미자가 지난달 21일 데뷔 60주년을 기념하는 앨범 <노래 인생 60년, 나의 노래 60곡>을 발표했다. 1959년 열아홉에 데뷔, 어느덧 가수 생활 ‘환갑’을 맞이하면서 한 데 모은 60곡이다. 이번 기념 앨범은 ‘감사, 공감, 순수’의 타이틀을 붙인 3개의 CD로 나왔다. 이미자의 대표곡과 신곡에 전통가요를 버무렸다.

노래인생 
어느덧 환갑

가장 눈에 띄는 건 1번 CD의 첫 곡 ‘내 노래, 내 사랑 그대에게’이다. 이 노래는 60주년을 기념해 새로 만든 곡이다. 60년간의 활동을 지지해준 팬들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있다. 그 뒤를 이어 50주년 기념곡 ‘내 삶의 이유 있음을’, 45주년 기념곡 ‘내 영혼 노래가 되어’ 등이 수록돼있다. 물론 국민적 사랑을 받은 대표곡도 포함돼있다. 

이미자는 “50주년 기념곡이 마지막인 줄로만 알았는데 운 좋게 60주년 기념 공연을 준비하게 됐다”며 “감사한 마음을 보답하기 위해 있는 그대로의 제 모습을 담고자 했다”고 말했다. 실제 공연처럼 라이브 연주에 맞춰 10여곡을 새로 녹음한 것도 그 때문이다. 그는 “성량이 예전만 못해 조금 부끄럽기도 하지만 20대부터 70대까지 목소리를 통해 지나온 세월과 변해가는 과정을 느낄 수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미자의 ‘동백 아가씨’와 ‘흑산도 아가씨’를 듣고 눈물 한 번 훔치지 않았던 청춘이 있었을까. 그는 “다 같이 어렵던 시절과 노랫말 및 목소리가 잘 맞아서 많은 사랑을 받을 수 있었던 것 같다”며 “오늘 여기 온 기자들보다 그 부모님 세대의 사랑이 더 컸기에 이런 뜻깊은 자리를 가질 수 있게 됐다”고 밝혔다.     


신곡 ‘내 노래, 내 사랑 그대에게’ 역시 이 같은 감정의 연장선에 있다. 50주년 기념곡 ‘내 삶의 이유 있음을’을 만든 김소엽 시인, 장욱조 작곡가와 다시 한번 손을 잡았다. 이미자가 소회를 밝히면 김 시인이 노랫말로 다듬는 식이었다.

59년 19세 데뷔해 무수한 히트곡
2000여곡 부른 ‘엘레지의 여왕’ 

다만 10년 전 노랫말이 설움이 굽이굽이 맺혀있었다면 이번엔 “우리의 눈물은 이슬 되어 꽃밭에 내리고/우리의 아픔은 햇빛 되어 꽃을 피웠네” 등 한결 온화해졌다.   

그 시절 이미자의 마음을 가장 힘들게 했던 것은 무엇일까. 그는 ‘동백 아가씨’ ‘섬마을 선생님’ ‘기러기 아빠’ 등 3대 히트곡이 금지곡으로 묶였을 때를 꼽았다. 각각 ‘왜색이 짙다’, ‘다른 노래와 몇 소절이 같다’, ‘너무 처량해서 비탄조다’ 등의 이유였다.

“1964년 ‘동백 아가씨’가 KBS 음악방송서 35주간 1위를 했는데, 하루아침에 차트서 없어졌다. 어디서도 들을 수 없었고, 무대서 부를 수도 없었다. 목숨을 끊어놓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팬들께서 한사코 불러주신 덕분에 큰 힘이 됐다.”   

이미자는 가장 잊지 못할 순간을 1959년 데뷔, 1973년 베트남 위문 공연, 2002년 평양 단독 공연 등 최초의 순간을 꼽았다. 하지만 이미자 앞에는 주홍글씨처럼 따라다니는 아픔이 있다. 이미자는 “가장 기뻐야 했을 때 역시 항상 붙어 다니는 꼬리표 때문에 힘들었다”고 말했다.

당시 세간에서는 이미자의 노래가 ‘천박하다’ ‘술집에서나 부르는 노래다’ 등 세간의 평가가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이미자는 소외감을 느꼈으며, 서구풍 발라드 노래를 불러 볼까도 생각했었다. 이미자는 “당시 참았다. 견뎠다. 60년이 흐르고 난 지금에 와서는 절제하면서 잘 지내왔구나 하는 마음에 자부심까지 갖고 있다”며 소회를 밝히기도 했다. 


이번 앨범은 감사·공감·순수를 테마로 3장의 CD에 각 20곡씩 눌러 담은 앨범이다. 그간 발표된 560장의 앨범과 2100여 곡 중에 추리는 것만도 대작업이다. 첫째 둘째 CD가 기념곡과 히트곡 위주라면, 세 번째는 온전히 가요계 선배들을 위한 장으로 ‘눈물 젖은 두만강’ ‘목포의 눈물’ 등을 담았다.

가요계 전설
애절한 울림

이미자는 “우리 가요의 원조라고 할 수 있는 노래를 들으며 나라 잃은 설움, 배고픔의 설움을 달래던 시절이 있었다”며 “그 시절 고마운 곡들이 사라져 가고 있는 현실이 너무 안타까웠다. 이를 영구 보존하기 위해 가장 심혈을 기울여 만든 장”이라고 설명했다.   

이미자는 후배들을 향한 쓴소리도 잊지 않았다.

그는 “가요의 뿌리가 사라져 가지 않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가사 전달력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며 “슬프면 슬픔을 전달해주고, 기쁘면 기쁨을 전달해줄 수 있는 게 가요”고 말했다. 이어 “하지만 서구풍이 많이 몰려오다 보니 가사 전달이 제대로 되지 않고 발음을 정확하게 들을 수도 없다. 그 부분이 제일 안타깝다. 우리 가요의 뿌리가 남겨지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이미자는 설명이 필요 없는 한국 가요계의 ‘살아있는 전설’이자 ‘국보급 가수’다. 그가 활동한 기간이 고스란히 한국 가요계의 역사와 포개진다. 작은 체구 안에서 뿜어져 나오는 애절하면서도 고운 음색은 연구 대상으로 거론될 만큼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쉽게 부르는 것 같지만 깊숙한 곳에서 우러나오는 감정은 관객의 마음을 울고 웃게 했다. 

이미자는 1941년 10월30일에 서울특별시 용산구 한남동서 아버지 이점성과 어머니 유상례 사이서 2남4녀 중 장녀로 태어났다. 이미자가 2살이 되던 1943년에 아버지가 징용으로 일본에 끌려가면서 어려운 생활을 하게 됐다. 
 

1945년에는 힘든 생활고 때문에 어머니 유상례에 의해 외할머니 댁에서 형제들과 떨어져 외롭게 자랐다. 어릴 적부터 음악에 관심을 가지던 이미자는 1957년에 방송하던 노래자랑 프로그램 KBS의 <노래의 꽃다발>에 출연해 1위를 차지했다. 1958년 이미자는 HLKZ TV 방송이 개최한 아마추어 노래 콩쿨인 예능 ‘로타리’에 출전해 1등에 선정됐다.

당시 유명한 작곡가 나화랑에게 스카우트된 이미자는 '열아홉 순정'으로 가수로 첫발을 내디뎠다. 애절하고 구성진 목소리로 주목받았다. 

1960년 어려운 시절에 함께 알고 지내던 연주자 정진흡과 첫 번째 결혼을 했다. 1964년 이미자가 부른 영화 주제가 ‘동백아가씨’가 대히트를 쳤다. 당시 스카라 극장 근처 목욕탕 건물 2층서 방음장치는 물론, 얼음물에 발을 담가가며 임신 9개월인 상태서 혼신을 다해 노래를 불렀다. 

군정 시절 
금지되기도


국내가요 사상 최초로 가요프로그램서 35주 동안 1위를 기록, 25만장이란 엄청난 음반 판매고를 올리며 부와 명예를 동시에 거머쥐었다. 당시 대한민국 음반업계가 불황을 겪던 그 해, ‘동백 아가씨’는 말 그대로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다.

하지만 왜색조라는 이유로 방송금지령을 선고받았으며 설상가상으로 남편 정씨와 이혼하게 된다. 

이미자는 1965년에 평생의 콤비가 된 작곡가 박춘석과 만나게 됐다. 박춘석은 패티 김, 최양숙, 남진 등 당대 스타들을 발굴한 당대 최고의 작곡가였다. 박춘석과 이미자는 KBS 라디오 연속극 <진도아리랑>의 주제가로 첫 인연을 맺었다.

하지만 두 사람이 뗄 수 없는 콤비로 손을 잡게 만든 노래는 ‘흑산도 아가씨’였다. 박춘석은 이미자의 천재적 가창력에 감탄했다.

이어 1966년 KBS라디오 주제가 ‘섬마을 선생님’도 발표한지 불과 일주일 만에 빅히트를 기록했다. 이미자가 스스로 3대 히트곡으로 꼽는 노래 가운데 ‘기러기 아빠’도 박춘석이 작곡한 노래이다. 한창 전성기를 누비던 1966년 2월5일에 강릉서 공연을 하던 이미자는 자신을 찾아온 생모를 22년 만에 극적으로 상봉하게 된다. 꿈에도 그리던 어머니를 만났다. 

하지만 이미자와 어머니의 몇 시간의 짧은 만남이 끝난 후 어머니는 영주로 이미자는 다음 공연을 위해 묵호로 떠났다. 이것이 이미자와 어머니의 마지막 만남이었다. 


박정희정부가 들어서고 ‘동백 아가씨’를 비롯해 이미자의 히트곡 대부분이 금지곡으로 분류됐다. 왜색이나 경제발전에 저해되는 비탄조의 노래라는 이유에서였다. 히트할 때마다 줄줄이 금지곡 낙인을 받자 그녀는 노래를 그만두려고 했을 만큼 충격을 받았다. 

기념앨범 ‘나의 노래 60곡’
신곡, 히트곡, 애창곡 등
20대부터 70대 목소리 담아  

기회 있을 때마다 해금을 요청했고, 결국 전두환정부인 1987년이 돼서야 금지곡의 족쇄가 풀렸다. 개인적으로 힘든 시기를 겪었던 이미자는 1967년부터 영화 주제가로 발표된 ‘그리움은 가슴마다’ ‘아네모네’ ‘여자의 일생’ 등 서정적인 분위기가 돋보이는 정통 트로트를 고수하며 대한민국의 대표가수의 맥을 이어가며 대중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다. 

당시 이미자와 함께 대한민국 가요계를 평정하던 패티 김과 함께 1960년대 가요계를 주름잡았다. 이미자를 따라다니는 애칭(엘레지(悲歌)의 여왕)은 1967년에 박춘석이 작곡한 이미자의 자전적인 이야기를 그린 영화 주제가 ‘엘레지의 여왕’을 히트시키면서 얻었다.

1970년에는 TBC 동양방송 드라마의 주제가였던 ‘아씨’가 큰 인기를 끌었으며 그해 KBS 방송위원이었던 김창수와 결혼했다. 

1979년에는 대한극장서 데뷔 20주년 기념공연을 개최했다. 1985년 (주)민주음악협회의 초청으로 일본 도쿄, 오사카서 공연을 개최, 공연에 앞서 한일(韓日)공동기획으로 ‘한국연가(戀歌)의 계보를 듣는다’는 2장짜리 독집 음반을 출판했다. 1989년에 뉴저지 등에서 미국공연을 가졌다.

가수생활 30년 기념으로 ‘노래는 나의 인생’을 발표, 대중가수로는 처음으로 세종문화회관서 데뷔기념 30주년 공연을 개최했다. 북한의 초청으로 2003년, 평양 동평양대극장서 열린 MBC 평양특별공연서 마이크를 잡기도 했다. 

1970년부터 서서히 가요계의 주도권을 후배 가수 남진, 나훈아, 문주란, 하춘화에게 내주게 됐지만 지금껏 취입한 노래는 스스로도 헤아리지 못할 만큼 많다. 1960년대 내내 한해에 음반을 무려 10여장씩 발표, 데뷔 10년 만인 1969년 <1000곡 돌파 기념 리사이틀>을 가졌을 정도다.

1991년 KBS자료실은 그녀가 취입한 노래를 2064곡으로 집계했는데 이는 국내 가수들 가운데 누구도 견줄 사람이 없는 기네스북에 등재된 기록적인 숫자다. 

가요계 주름
여전한 가왕

지난 1995년엔 화관문화훈장을 받기도 했다. 흔히 그녀가 노래하는 장르를 트로트로 분류하고 트로트의 여왕이라고 부르지만 본인은 자신의 노래들이 트로트보다는 전통가요로 분류돼야 한다고 주장한다. 현재까지도 뛰어난 가창력과 대중을 사로잡는 무대로 한국인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2014년에는 데뷔 55주년을 맞이해 전국 투어 콘서트, 디너쇼를 열었으며 이듬해에는 가수 장사익과 <이미자-장사익 특집 콘서트>를 개최했다. 이 특집 콘서트는 KBS 1TV서 방영돼 20.1%라는 높은 시청률을 기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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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김건희 일가 연루 의혹 ‘선라이즈F&T’ 주주명부 공개

[단독] 김건희 일가 연루 의혹 ‘선라이즈F&T’ 주주명부 공개

갈수록 증폭되는 평택 논란 이제야 공개된 소소한 흔적 쉽게 거두지 못하는 의심 의미심장 세력 교체 과정 [일요시사 취재1팀] 양동주 기자 = 소문이 어느덧 사실처럼 인식되고 있다. 명확한 물증이 없는 가운데 파편적인 의혹이 덧씌워진 양상은 좀처럼 바뀌지 않고 있으며, 흐름을 파악할 만한 유의미한 흔적이 이제야 겨우 나왔을 뿐이다. 증폭된 의혹 뒤편에서 여전히 진실은 빼꼼히 잘 보이지 않는다. 2010년 9월 설립된 ‘선라이즈에프앤티’는 황해경제자유구역에 자리 잡은 유일한 농산물 가공 업체로, 그간 심심치 않게 밀수 의혹을 받아왔다. 가공 목적으로 수입한 농산물을 가공 없이 시중에 유통시켜 엄청난 차익을 봤다는 꼬리표가 뒤따랐다. 의혹하는 눈초리 선라이즈에프앤티가 취급했던 대다수 농산물이 고관세 품목이라는 점은 이 같은 의혹을 부채질했다. 그간 선라이즈에프앤티는 ▲녹두 ▲콩나물콩 ▲다대기(혼합양념) ▲생강 ▲마늘 ▲참깨 ▲팥 ▲서리태 등 높은 세율이 붙는 고관세 품목을 주로 수입했던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한 예로 콩나물콩의 경우 그대로 들여와 국내에 유통하면 487% 관세가 부과되지만, 콩나물 재배 목적으로 수입하면 27%만 반영된다. 평택세관에 몸담았던 다수의 전직 세관공무원이 기업 출범 및 운영에 관여했다는 점도 선라이즈에프앤티를 부정적으로 보게 만들었다. 심지어 선라이즈에프앤티 이사진에 포함됐던 특정 세관 출신 임원이 한때 다이아몬드 밀수 사건에 이름이 오르내린 사례도 존재한다. 수년 전부터는 김건희씨 일가와 선라이즈에프앤티를 동일선상에서 바라보는 경향이 강해졌다. 선라이즈에프앤티의 밀수 의혹을 수차례에 걸쳐 제기했던 공익 제보자 이성열씨가 재판에 연루되는 과정에서 김건희씨의 모친인 최은순씨가 거론됐던 게 이 같은 흐름에 불을 지핀 형국이다. 이런 가운데 정치평론가인 장성철 공론센터 소장이 최근 ‘평택항’을 언급하자, 김건희씨 일가와 선라이즈에프앤티 간 연관성은 사실처럼 받아들여질 정도가 됐다. 장 소장은 SBS라디오 <김태현의 뉴스쇼>가 운영하는 유튜브 방송에 출연해 김건희씨 일가의 수상한 물건 수입 의혹과 관련한 이야기를 전했다. 장 소장은 “최은순씨가 주인으로 있는 농수산물 수입업체에서 이상한 것을 들고 오려고 하다가 걸려서 (김건희) 오빠와 김건희씨가 그것을 무마시키려고 여러 가지 이상한 (일들을 했다고 한다)”며 “어떤 물건인지 구체적으로 밝히지는 않았지만, 부적절한 물건인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고 말했다. 급기야 선라이즈에프앤티의 폐업이 알려지자, 의혹은 그야말로 걷잡을 수 없이 커진 양상이다. 선라이즈에프앤티는 국세청 사업자 과세 유형 조회 결과 지난 10일자로 폐업한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폐업자로 조회된 지난 10일은 김건희 특검법이 공포된 시기와 맞물린다. 물론 꾸준히 의혹이 제기된 것과 별개로, 김건희씨 일가와 선라이즈에프앤티 간 연관성을 입증할 만한 확실한 단서는 없는 상황이다. 특히 주주명부가 지금껏 외부에 공개되지 않았다는 게 의혹과 진실을 구분 짓기 어렵게 만들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일요시사>가 최초 입수한 주주명부는 간접적으로나마 의문을 풀 수 있는 열쇠로 작용할 여지를 남긴다. 의문 해소 첫 단추 2022년 10월 작성된 ‘카리나에프앤티(선라이즈에프앤티에서 2020년 9월 상호 변경) 주주명부’를 검토한 결과 주주는 총 17명, 발행주식은 91만8400주(1주당 5000원)로 확인됐다. 2010년 9월 자본금 5억원으로 설립된 선라이즈에프앤티는 수차례 증자를 거쳤고, 해당 시기에 자본금을 45억9200만원으로 늘린 상태였다. 일단 주주명부에서는 김건희씨 일가의 이름을 찾을 수 없다. 대신 경영권 교체 과정이나마 엿볼 수 있을 뿐이다. 법인 등기와 주주명부를 교차 검증한 결과를 토대로 추정하면, 표면상 선라이즈에프앤티 지배 세력은 ‘전직 세관공무원(설립~2018년 중순)→지엔티에이치(~2020년 중순)→킴스에O엔O(~2022년 초순)→동OO앤에스(~2025년 6월)’ 순으로 변경된 흐름이다. 첫 번째 경영권 교체는 ‘펀딩하이 연체 사건’과 함께 발생했다. 펀딩하이는 중국·동남아시아에서 농산물을 수입하는 업체에 돈을 빌려 주고, 투자자들에게 15% 이상 수익을 보장하는 펀딩 상품으로 인기를 끌던 P2P 업체였다. 그러나 펀딩하이는 2018년 6월20일 ‘마늘 시즌2-17차(모집 금액 3억원, 차주 승리산업)’ 펀딩 상품의 연체를 시작으로 ▲세척 당근 시즌2-18차(모집금액 5억원, 차주 지엔티에이치) ▲김치 펀딩 2차(모집금액 1억2000만원, 차주 상아농산) ▲번데기 펀딩 1차(모집금액 1억8000만원, 차주 월량완코리아) 등에서 차주의 투자금 상환 실패를 알렸다. 연체 금액은 ▲지엔티에이치 29억원 ▲승리산업 33억원 ▲상아농산 11억8000만원 ▲월량완코리아 1억8000만원 등 총 75억6000만원에 달했다. 급기야 펀딩하이는 연체율 100%를 찍은 채 영업을 중단했다. 상환 실패 이후 차주 사이에 관련성이 드러났다. 지엔티에이치와 승리산업에서 대표이사였던 윤석호씨는 두 회사 지분을 각각 60%, 100% 보유 중이었다. 또한 월량완코리아 사내이사로도 등재돼있었다. 연체가 발생한 직접적인 사유는 선라이즈에프앤티를 대상으로 한 지분 투자였다. 지엔티에이치는 펀딩받은 금액을 농산물을 들여오는 데 쓰지 않고, 선라이즈에프앤티 주식을 매입하는 데 활용한 것으로 뒤늦게 확인됐다. 이를 계기로 지엔티에이치는 2018년 6월경 주식 16만1400주를 확보한 선라이즈에프앤티 최대주주로 올라섰다. 지엔티에이치가 지배력을 확보한 이후 선라이즈에프앤티 임원 명단에 변화가 목격됐다. 선라이즈에프앤티 초창기부터 함께했던 사내이사와 부친에 이어 회사에 몸담았던 대표이사를 대신해 지엔티에이치가 끌어들인 얼굴들이 등기임원 자리를 꿰찼다. 정작 지엔티에이치는 연체 발생 넉 달 후인 2018년 10월 보유 중이던 선라이즈에프앤티 주식을 ‘란릉현래보식품유한공사’에 넘겼다. 펀딩하이 투자자들과의 소송전이 불거지자 중국에 본거지를 둔 우군에 주식을 양도한 모양새였다. 거듭되는 교체 수순 두 번째 경영권 교체는 ‘킴스에O엔O’ 측이 선라이즈에프앤티의 주체로 올라서는 과정에서 발생한 것으로 보인다. 충청권에 본적을 둔 킴스에O엔O는 2022년 10월 기준 선라이즈에프앤티 주식 10만8200주를 확보한 것으로 확인됐다. 킴스에O엔O 대표이사의 친인척이 보유한 주식 13만2800주를 합산하면 우호 주식은 24만주 안팎이다. 기존 지엔티에이치 측 우호 세력(란릉현래보식품유한공사 16만1400주+마송재 3만주)과 비교해 5만주 가까이 격차를 벌린 셈이다. 킴스에O엔O 측이 선라이즈에프앤티 주식을 대량 매입한 시기는 2020년 중후반으로 추정된다. 이 무렵 선라이즈에프앤티 등기임원 구성이 크게 요동쳤다는 점을 통해 짐작 가능한 사안이다. 실제로 지엔티에이치가 지배력을 발휘하던 2018년 7월 대표이사에 선임됐던 김정일 대표는 2020년 3월 해임됐다. 2018년 9월 취임했던 또 다른 대표이사 역시 당해 10월을 넘기지 못한 채 사임했다. 공석이 된 주요 등기임원 자리는 킴스에O엔O 측 인물로 채워졌다. 킴스에O엔O 대표이사가 2020년 10월 선라이즈에프앤티 대표이사로 취임했고, 해당 시기에 사외이사, 감사 등 등기임원 전원이 새 얼굴로 교체됐다. 킴스에O엔O에 이어 지배 세력으로 등장한 곳은 식료품 제조업을 영위하는 동OO앤에스였다. 이 회사는 2022년 10월 기준 주주명부에 선라이즈에프앤티 주식 41만주(지분율 44.64%)를 보유한 단일 최대주주로 등재돼있다. 여기에 우호 세력(글로O포O 1만주+김성수 2만주+김종봉 788주)의 주식을 합산하면 지분율은 50%에 육박한다. 동OO앤에스는 사실상 선라이즈에프앤티를 인수하고자 만든 업체로 비쳐질 여지를 남긴다. 2022년 2월 출범 당시 자본금 10억원짜리였던 동OO앤에스는 불과 두 달 만인 2022년 4월14일 자본금을 21억원으로 두 배 이상 키웠다. 공교롭게도 동OO앤에스가 설립 이후 8개월 사이 선라이즈에프앤티 주식 41만주를 확보하는 과정에서 투입한 금액은 총 20억5000만원이었다. 이는 동OO앤에스 자본금 21억원이 선라이즈 주식 41만주를 매입하는 데 쓰였을 가능성에 주목하게 만든다. 게다가 선라이즈에프앤티는 기존 61만8400주였던 발행주식을 2022년 4월22일 91만8400주로 30만주 확대했다. 동OO앤에스가 자본금을 21억원으로 확충한 지 8일 만이다. 선라이즈에프앤티가 발행주식을 30만주 늘린 덕분에 동OO앤에스는 상대적으로 수월하게 주식 41만주를 확보한 형국이다. 동OO앤에스가 선라이즈에프앤티를 지배하는 위치로 올라설 무렵에 선라이즈에프앤티 임원 구성은 또 한 번 바뀌었다. 동OO앤에스 대표이사가 사내이사, 글로O포O 대표이사가 사외이사에 이름을 올렸고, 김성수 대표이사가 신규 선임됐다. 이후 김성수 대표는 선라이즈에프앤티 폐업 전까지 자리를 지킨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되짚어보는 연결고리 한편 일각에서는 김건희씨 일가에서 선라이즈에프앤티에 영향력을 행사했다면 그 시기는 지엔티에이치 측이 지배력을 상실한 이후일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나마 킴스에O엔O 혹은 동OO앤에스와의 연관성이 높다고 보는 것이다. 한 경찰 관계자는 “김건희씨 일가에서 선라이즈에프앤티에 관여한 직접적인 흔적이 발견되지 않았지만, 만약 영향력을 행사했다면 그 시기를 2021년 이후로 특정해볼 수 있을 것”이라며 “항간에 떠도는 마약 적발 여부는 2022년 근방으로 얘기가 오가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heatyang@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