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인물] 3·1정신 기리고 계승하는 김영진 3·1운동 기념재단 이사장

착한 백성들의 선한 싸움 세계에 알린다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1919년 3월1일 일제의 식민지배에 분노한 조선 민중이 거리로 나왔다.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는 민중을 향해 일제 경찰은 총칼을 들이댔다. 하지만 만세운동은 점차 확산돼 전국 규모로 발전했다. 2019년은 3·1운동이 100주년 되는 해. <일요시사>가 김영진 국회재단법인 3·1운동 UN·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 기념재단 이사장을 만나 그 의미와 가치에 대해 들었다.
 

▲ 일요시사와 인터뷰 갖고 있는 김영진 국회재단법인 3·1운동 UN·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 기념재단 이사장

3·1운동은 여러 갈래의 도화선서 시작된 불씨가 폭발하면서 일어났다. 1918년 우드로 윌슨 미국 대통령은 민족 자결주의를 주창했다. ‘민족은 스스로 민족의 운명을 결정해야 한다는 윌슨 대통령의 말은 민중의 마음에 파고들었다. 1919121일 대한제국 고종황제가 승하했다. 고종의 사인이 독살이라는 소문이 퍼지면서 나라가 술렁이기 시작했다.

19192월 일본 유학생들이 먼저 나섰다. 이들은 일본의 수도 도쿄서 2·8독립선언서를 발표하고 조선의 독립을 선언했다.

민족 자결주의와 2·8독립선언서의 영향으로 191931일 만세운동이 전개됐다. 이날 민족대표 33인은 인사동 태화관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대한독립만세를 삼창했다. 같은 시각 탑골 공원에 모인 학생, 시민들도 만세를 외쳤다.

민중 분노 폭발
일제 강력 탄압

3·1운동은 국내 전역과 해외로 확산됐다. 일제의 진압은 무자비했다. 음력 31일 충남 천안의 아우내장터서 만세를 부른 유관순 열사는 헌병대에 체포돼 모진 고문을 당하다 1920년 옥사했다. 3·1운동은 지식인과 학생뿐만 아니라 노동자와 농민·상공인 등 각계각층의 민중이 폭넓게 참여한 최대 규모의 항일운동으로, 한국 독립운동사의 큰 분수령을 이룬 사건이다.


국내는 물론 해외에까지 민족의 독립 의지와 저력을 보여줬다. 또 독립운동의 대중적 기반을 넓혀 항일전선을 체계화·조직화·활성화하는 기반이 됐다. 중국의 5·4운동과 인도 간디의 비폭력·불복종운동, 이집트의 반영자주운동, 터키의 민족운동 등 3·1운동은 아시아와 중동 지역 민족운동에 큰 영향을 끼쳤다는 평가를 받는다.

김영진 이사장은 3·1운동을 착하디 착한 우리 백성의 선한 싸움이라고 정의했다. 5선 국회의원, 전 농림부장관, 대학 석좌교수, 재단 이사장, 기념사업회 위원장 등 김 이사장을 수식하는 직책은 10여개가 넘는다. 그중 김 이사장이 최근 가장 몰두하고 있는 것은 바로 3·1운동.

김 이사장은 2008년부터 3대 민족민주화평화운동으로 정의한 5·18광주민주화운동, 4·19혁명, 3·1운동을 UN·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하기 위한 재단을 설립해 활동하고 있다. 5·18민주화운동 기록물은 2011년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됐고 4·19혁명은 UN·유네스코서 등재 여부를 결정하는 절차만 남겨두고 있다. 3·1운동 UN·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 사업은 김 이사장에게 남은 마지막 숙제나 다름없다.
 

▲ 3·1절 행사

지난 17일 김 이사장을 서울 여의도 중소기업중앙회에 위치한 국회재단법인 3·1운동 UN·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 기념재단(이하 3·1운동 기념재단) 사무실에서 만났다. 10(33) 남짓한 기념재단 사무실은 김 이사장을 만나기 위한 각계각층의 인사들로 북적였다.

-요즘 어떻게 지내십니까.

5선 국회의원과 농림부 장관을 끝으로 정치권을 떠나 야인으로 살고 있습니다. 많은 분들이 제게 근황을 물을 때마다 빈직다사(貧職多事, 직책이 대단하진 않지만 일이 바쁘다)라고 말씀드립니다. 그만큼 이것저것 벌려놓은 일이 많지만 2019년은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우리 민족의 자산인 3·1운동을 UN·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하는 일에 몰두하고 있습니다.

‘대한독립만세’ 3·1 운동 100 주년 맞아
UN·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 앞장


-한국 독립사에서 3·1운동이 갖는 역사적 의미는 어느 정도일까요.

3·1운동은 일제 36년 억압통치하에서 우리 민족이 해방을 쟁취하기 위해 진행한 치열하고 선한 싸움입니다. 지구촌의 많은 나라가 자유와 독립을 위해 항거운동에 나섰습니다. 그중에서도 우리 민족은 잔인하고 반역사적인 일제의 폭압지배에 맞서 3·1운동에서 시작된 비폭력저항을 조국 광복이 이뤄진 1945815일까지 이어간 유일한 나라입니다.

우리 역사를 되짚어보면, 1000번 정도의 외침이 있었어요. 하지만 우리가 다른 나라를 침략하거나 넘본 경우는 없었습니다. 참으로 착하디 착한 백성들이죠. 많은 인류학자나 역사학자들은 3·1운동이 중국의 5·4운동, 인도 간디의 비폭력 운동 등에 엄청난 동기를 부여했다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3·1운동은) 참으로 자랑스럽고 훌륭한 민족 자산입니다.

-10년 넘게 UN·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 사업을 진행 중이십니다.

이 사무실이 3대 민족민주화평화운동인 5·18민주화운동, 4·19혁명, 3·1운동을 UN·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하기 위한 본부입니다. 5·18민주화운동 기록물은 2011년 이미 등재가 완료됐고, 4·19혁명은 올해 상반기 UN·유네스코 등재 절차를 밟고 있습니다. 이제 3·1운동 하나만 남았는데 100주년을 맞기 전 UN·유네스코 등재 신청을 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김 이사장은 2008년 국회의원 시절 아시아-태평양 지역 교육위원연맹에 야당 중진의원 자격으로 참석했다가 UN·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한국 관련자료가 전혀 없다는 사실을 알고 충격에 휩싸였다. 그 세계기록유산 자료를 보기 전까진 UN·유네스코 등재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다.

100주년 맞아
기록유산 신청

UN·유네스코는 2년에 한 번씩 각국서 들어온 자료를 검토해 세계기록유산 등재 여부를 결정한다. 순조롭게 진행한다고 해도 3대 민족민주화평화운동을 전부 등재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단순 계산으로 최소 6년이었다. 김 이사장은 당시 한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서 오랫동안 고민한 끝에 5·18민주화운동을 첫 번째 목표로 삼았다.

그로부터 10여년 뒤, 김 이사장은 세 번째이자 마지막인 3·1운동의 등재 작업에 돌입했다. ‘맨땅에 헤딩이나 다름없던 5·18민주화운동 등재 과정서 일어난 정치적 공세 같은 굴곡은 덜했지만 세계기록유산 등재 사업은 장기 프로젝트였기에 긴 호흡이 필요했다. 김 이사장은 5·18민주화운동과 4·19혁명 등재 사업 때와 마찬가지로 먼저 재단 구성에 나섰다.
 

5·18민주화운동은 광주서, 4·19혁명은 서울서 승인받아 재단을 꾸렸다. 이와 달리 3·1운동 기념재단은 국회 법인으로 등록했다. 201712월 발기인 총회를 시작으로 3·1운동 기념재단이 출범했다. 당시 3·1운동 기념재단은 100주년 이전에 UN·유네스코에 등재 관련 서류를 접수, 한 맺힌 영령들의 한을 풀어주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3·1운동 기념재단을 국회 법인으로 하신 이유가 있습니까.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은 대부분 종교인으로 구성됐습니다. 기독교, 천도교, 불교, 민족종교 인사들이 참여했습니다. 그런데 민족대표는 가장 수가 많았던 기독교가 아니라 천도교서 나왔습니다. 천도교 손병희 선생, 종교 간의 밀어붙이기, 주도권 쟁탈 같은 게 전혀 없던 거죠. 그 부분에서 저는 3·1정신을 발견했습니다.


3·1정신은 남북도 없고 동서도 없고 보수도 진보도 없습니다. 종교마저도 초월했습니다. 이런 정신을 바탕으로 진행된 귀한 운동이기 때문에 국회 법인으로 재단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가졌습니다. 당시 국회의장을 만나 여러 자료와 내용을 공유했고, 여야 합의로 국회기념재단법인으로 승인받게 됐습니다.

민족운동 성격
국회 법인으로

-3·1운동 기념재단 창립, 운영 과정에 어려운 부분은 없었나요.

5·18민주화운동과 4·19혁명 등재를 준비할 당시에는 정치적으로 반대하는 목소리가 있었습니다. 5·18민주화운동과 4·19혁명이 지배 권력에 맞서 싸우는 과정서 일어난 일이기 때문에 반대급부가 존재했는데 가짜뉴스나 거짓말이 횡행했습니다. 저에 대한 음해가 나오기도 했고요.

하지만 3·1운동은 민족 전체가 일제의 무자비하고 억압적인 식민지배에 분노하는 과정서 일어난 사건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국가 원로들께서 저를 만나면 왜 내 이름이 3·1운동 기념재단서 빠졌지?”라고 적극적으로 말씀하십니다. 전화도 여기저기서 자주 걸려옵니다. 언론서도 관심이 많고요.

국민의 쌈짓돈으로 시작
다양한 사업 전개할 것 


그러면서도 김 이사장은 재정 부분서 고민이 없진 않았다고 털어놨다. 처음에는 3·1운동 기념재단의 취지를 알게 된 유명 기업서 종잣돈을 지원하겠다는 제안이 있었다. 하지만 김 이사장은 3·1운동 등재에 필요한 종잣돈만큼은 할아버지 쌈짓돈, 아이들 코흘리개 저금통, 주부들이 조금씩 남긴 잔돈 등 애틋한 사연이 담겨 있는 국민의 돈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야 여야, 진보보수, 남북을 초월한 3·1정신을 받들 수 있다고 봤다. 실제 3·1운동 기념재단의 소식이 알려지자 전국 각지서 작은 마음이 모이기 시작했다. 김 이사장은 당시 상황을 IMF 때 금모으기 운동, 해외동포의 달러 보내기 운동에 비유했다. 국가적 위기에 기꺼이 자신의 주머니를 털었던 한국인들의 민족성을 또 한 번 확인했다고 했다.

2000, 5000, 1만원 등 총 426명의 마음이 3·1운동 기념재단의 종잣돈이 됐다. 그리고 16개월 후 국회 법인으로 등록되면서 분위기가 달라졌다. 언론서 앞 다퉈 3·1운동 기념재단을 조명했고 국민모금운동에 대한 승인도 떨어졌다. 돈을 지원하겠다는 기업도 나왔다. 3·1운동 기념재단은 이 같은 재정적 뒷받침을 바탕으로 여러 사업을 계획 중이다.

-재단서 어떤 사업을 준비 중인가요.

먼저 남쪽 5000, 북쪽 2700, 해외동포 750만을 대표하는 발기인들이 모여 228일 국회의원회관 대강당서 국회기념재단의 기념식을 진행합니다. 3·1운동 기념재단에서는 해외지부를 만들어 당시 해외서 독립운동을 한 분들의 자료를 모으고 있습니다. 중국, 미국 등지서 항일운동을 전개한 산증인들을 모시고 기념식을 열려 합니다.

3·1운동 기념재단은 중국 북간도, 미국 워싱턴·뉴욕·필라델피아·시카고·덴버 등 7개 지역에 해외지부를 만들었다.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에 참여했던 해외 동포들을 찾아다니면서 인터뷰를 하거나 사진, 신문 기록 등 자료를 수집해 기록화를 추진하고 있다. 이번 3·1운동 100주년을 기해 해외의 자료가 한 데 모일 예정이다.

3·1운동 기념재단은 7가지 목표와 방향에 따라 사업을 구체화하고 있다. 우선적인 목표는 3·1운동 UN·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 사업이다. 세계기록유산 등재를 위해서는 자료 수집과 정리가 최우선이다. 이를 위해 3·1운동 기념재단에서는 전문가 집단을 구성했다. 정해구 청와대 정책기획위원회 위원장이자 성공회대 교수가 총괄책임을 맡고 있다.
 

3·1운동 당시 전국서 낭독된 선언문, 일본 경찰에 끌려가 조사를 받았던 민중들을 찾아 나섰다. 국내 신문뿐만 아니라 국외서 3·1운동을 어떤 시각으로 바라봤고, 어떻게 평가했는지에 대한 자료도 모았다. 그렇게 모은 자료로 등재 신청에 쓸 책자를 만들었다. 김 이사장은 “(3·1운동 자료로 구성한 책자는) 정말 소중한, 국보 같은 존재가 될 것이라고 자신했다.

3·1정신을 지구촌에 확산시키기 위한 ‘3·1운동 UN·유네스코 국제평화대상을 제정한다는 계획도 세웠다. 국내·국제 부문으로 나누어 UN의 지향점인 인류 공영과 세계평화에 기여한 인물을 선정해 수상자들의 활동과 사상, 생애를 조명하면서 3·1정신을 널리 알리겠다는 취지다. 3·1정신을 구현할 수 있는 국내외 인재양성을 위한 장학재단 설립을 목표로 두고 있다.

노벨평화상 수상자를 1년에 2, 상반기와 하반기에 초청해 국제 강연회를 개최하는 사업도 준비 중에 있다. 수상자들의 강연을 통해 국민과 해외동포에게 평화에 대한 인식을 강조한다는 취지다. 전통가락과 농악, 창 등 한()의 정서가 담긴 우리 가락의 전통을 이어가기 위한 국악경연대회도 진행한다. 국내·국제 부문으로 2년에 1번씩 격년제로 개최할 계획이다.

67만명을 수용할 수 있는 국회 잔디 광장서 3·1운동 기념재단이 주관하는 평화음악회를 정기적으로 열 생각도 갖고 있다. 현재는 정부기념식만 진행되고 있는 3·1절과 8·15광복절에 대해 3·1운동 기념재단 주최로 국회서도 기념식을 진행하는 것을 목표로 세우는 등 다양한 방향으로 3·1운동 알리기와 3·1정신 전파에 나서겠다는 입장이다.

-3·1운동 등재 가능성과 시기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100%입니다. 올해 하반기 4·19혁명이 UN·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될 것으로 확신하고 있습니다. 5·18민주화운동과 4·19혁명 등 이미 두 차례에 걸쳐서 등재 절차를 경험했기 때문에 3·1운동은 절차상으로는 조금 더 수월하게 준비할 수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또 국민적 지지가 강하기 때문에 순항하고 있다고 자신 있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소중한 역사
전 세계로

김 이사장은 기성세대들, 구체적으로 정부와 역사학자들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사랑하는 자식들에게 우리의 역사를 알려줘야 할 책임이 있다. 지금까지 3·1운동의 전국화, 세계화를 외쳐 왔지만 실제 제대로 이뤄진 부분은 없었다비록 뒤늦은 감이 있지만 5·18민주화운동을 시작으로 4·19혁명, 3·1운동까지 자랑스럽고 소중한 민족의 자산인 우리의 역사를 국민들에게 알리고 만방에 선포할 수 있길 바란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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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김건희 일가 연루 의혹 ‘선라이즈F&T’ 주주명부 공개

[단독] 김건희 일가 연루 의혹 ‘선라이즈F&T’ 주주명부 공개

갈수록 증폭되는 평택 논란 이제야 공개된 소소한 흔적 쉽게 거두지 못하는 의심 의미심장 세력 교체 과정 [일요시사 취재1팀] 양동주 기자 = 소문이 어느덧 사실처럼 인식되고 있다. 명확한 물증이 없는 가운데 파편적인 의혹이 덧씌워진 양상은 좀처럼 바뀌지 않고 있으며, 흐름을 파악할 만한 유의미한 흔적이 이제야 겨우 나왔을 뿐이다. 증폭된 의혹 뒤편에서 여전히 진실은 빼꼼히 잘 보이지 않는다. 2010년 9월 설립된 ‘선라이즈에프앤티’는 황해경제자유구역에 자리 잡은 유일한 농산물 가공 업체로, 그간 심심치 않게 밀수 의혹을 받아왔다. 가공 목적으로 수입한 농산물을 가공 없이 시중에 유통시켜 엄청난 차익을 봤다는 꼬리표가 뒤따랐다. 의혹하는 눈초리 선라이즈에프앤티가 취급했던 대다수 농산물이 고관세 품목이라는 점은 이 같은 의혹을 부채질했다. 그간 선라이즈에프앤티는 ▲녹두 ▲콩나물콩 ▲다대기(혼합양념) ▲생강 ▲마늘 ▲참깨 ▲팥 ▲서리태 등 높은 세율이 붙는 고관세 품목을 주로 수입했던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한 예로 콩나물콩의 경우 그대로 들여와 국내에 유통하면 487% 관세가 부과되지만, 콩나물 재배 목적으로 수입하면 27%만 반영된다. 평택세관에 몸담았던 다수의 전직 세관공무원이 기업 출범 및 운영에 관여했다는 점도 선라이즈에프앤티를 부정적으로 보게 만들었다. 심지어 선라이즈에프앤티 이사진에 포함됐던 특정 세관 출신 임원이 한때 다이아몬드 밀수 사건에 이름이 오르내린 사례도 존재한다. 수년 전부터는 김건희씨 일가와 선라이즈에프앤티를 동일선상에서 바라보는 경향이 강해졌다. 선라이즈에프앤티의 밀수 의혹을 수차례에 걸쳐 제기했던 공익 제보자 이성열씨가 재판에 연루되는 과정에서 김건희씨의 모친인 최은순씨가 거론됐던 게 이 같은 흐름에 불을 지핀 형국이다. 이런 가운데 정치평론가인 장성철 공론센터 소장이 최근 ‘평택항’을 언급하자, 김건희씨 일가와 선라이즈에프앤티 간 연관성은 사실처럼 받아들여질 정도가 됐다. 장 소장은 SBS라디오 <김태현의 뉴스쇼>가 운영하는 유튜브 방송에 출연해 김건희씨 일가의 수상한 물건 수입 의혹과 관련한 이야기를 전했다. 장 소장은 “최은순씨가 주인으로 있는 농수산물 수입업체에서 이상한 것을 들고 오려고 하다가 걸려서 (김건희) 오빠와 김건희씨가 그것을 무마시키려고 여러 가지 이상한 (일들을 했다고 한다)”며 “어떤 물건인지 구체적으로 밝히지는 않았지만, 부적절한 물건인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고 말했다. 급기야 선라이즈에프앤티의 폐업이 알려지자, 의혹은 그야말로 걷잡을 수 없이 커진 양상이다. 선라이즈에프앤티는 국세청 사업자 과세 유형 조회 결과 지난 10일자로 폐업한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폐업자로 조회된 지난 10일은 김건희 특검법이 공포된 시기와 맞물린다. 물론 꾸준히 의혹이 제기된 것과 별개로, 김건희씨 일가와 선라이즈에프앤티 간 연관성을 입증할 만한 확실한 단서는 없는 상황이다. 특히 주주명부가 지금껏 외부에 공개되지 않았다는 게 의혹과 진실을 구분 짓기 어렵게 만들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일요시사>가 최초 입수한 주주명부는 간접적으로나마 의문을 풀 수 있는 열쇠로 작용할 여지를 남긴다. 의문 해소 첫 단추 2022년 10월 작성된 ‘카리나에프앤티(선라이즈에프앤티에서 2020년 9월 상호 변경) 주주명부’를 검토한 결과 주주는 총 17명, 발행주식은 91만8400주(1주당 5000원)로 확인됐다. 2010년 9월 자본금 5억원으로 설립된 선라이즈에프앤티는 수차례 증자를 거쳤고, 해당 시기에 자본금을 45억9200만원으로 늘린 상태였다. 일단 주주명부에서는 김건희씨 일가의 이름을 찾을 수 없다. 대신 경영권 교체 과정이나마 엿볼 수 있을 뿐이다. 법인 등기와 주주명부를 교차 검증한 결과를 토대로 추정하면, 표면상 선라이즈에프앤티 지배 세력은 ‘전직 세관공무원(설립~2018년 중순)→지엔티에이치(~2020년 중순)→킴스에O엔O(~2022년 초순)→동OO앤에스(~2025년 6월)’ 순으로 변경된 흐름이다. 첫 번째 경영권 교체는 ‘펀딩하이 연체 사건’과 함께 발생했다. 펀딩하이는 중국·동남아시아에서 농산물을 수입하는 업체에 돈을 빌려 주고, 투자자들에게 15% 이상 수익을 보장하는 펀딩 상품으로 인기를 끌던 P2P 업체였다. 그러나 펀딩하이는 2018년 6월20일 ‘마늘 시즌2-17차(모집 금액 3억원, 차주 승리산업)’ 펀딩 상품의 연체를 시작으로 ▲세척 당근 시즌2-18차(모집금액 5억원, 차주 지엔티에이치) ▲김치 펀딩 2차(모집금액 1억2000만원, 차주 상아농산) ▲번데기 펀딩 1차(모집금액 1억8000만원, 차주 월량완코리아) 등에서 차주의 투자금 상환 실패를 알렸다. 연체 금액은 ▲지엔티에이치 29억원 ▲승리산업 33억원 ▲상아농산 11억8000만원 ▲월량완코리아 1억8000만원 등 총 75억6000만원에 달했다. 급기야 펀딩하이는 연체율 100%를 찍은 채 영업을 중단했다. 상환 실패 이후 차주 사이에 관련성이 드러났다. 지엔티에이치와 승리산업에서 대표이사였던 윤석호씨는 두 회사 지분을 각각 60%, 100% 보유 중이었다. 또한 월량완코리아 사내이사로도 등재돼있었다. 연체가 발생한 직접적인 사유는 선라이즈에프앤티를 대상으로 한 지분 투자였다. 지엔티에이치는 펀딩받은 금액을 농산물을 들여오는 데 쓰지 않고, 선라이즈에프앤티 주식을 매입하는 데 활용한 것으로 뒤늦게 확인됐다. 이를 계기로 지엔티에이치는 2018년 6월경 주식 16만1400주를 확보한 선라이즈에프앤티 최대주주로 올라섰다. 지엔티에이치가 지배력을 확보한 이후 선라이즈에프앤티 임원 명단에 변화가 목격됐다. 선라이즈에프앤티 초창기부터 함께했던 사내이사와 부친에 이어 회사에 몸담았던 대표이사를 대신해 지엔티에이치가 끌어들인 얼굴들이 등기임원 자리를 꿰찼다. 정작 지엔티에이치는 연체 발생 넉 달 후인 2018년 10월 보유 중이던 선라이즈에프앤티 주식을 ‘란릉현래보식품유한공사’에 넘겼다. 펀딩하이 투자자들과의 소송전이 불거지자 중국에 본거지를 둔 우군에 주식을 양도한 모양새였다. 거듭되는 교체 수순 두 번째 경영권 교체는 ‘킴스에O엔O’ 측이 선라이즈에프앤티의 주체로 올라서는 과정에서 발생한 것으로 보인다. 충청권에 본적을 둔 킴스에O엔O는 2022년 10월 기준 선라이즈에프앤티 주식 10만8200주를 확보한 것으로 확인됐다. 킴스에O엔O 대표이사의 친인척이 보유한 주식 13만2800주를 합산하면 우호 주식은 24만주 안팎이다. 기존 지엔티에이치 측 우호 세력(란릉현래보식품유한공사 16만1400주+마송재 3만주)과 비교해 5만주 가까이 격차를 벌린 셈이다. 킴스에O엔O 측이 선라이즈에프앤티 주식을 대량 매입한 시기는 2020년 중후반으로 추정된다. 이 무렵 선라이즈에프앤티 등기임원 구성이 크게 요동쳤다는 점을 통해 짐작 가능한 사안이다. 실제로 지엔티에이치가 지배력을 발휘하던 2018년 7월 대표이사에 선임됐던 김정일 대표는 2020년 3월 해임됐다. 2018년 9월 취임했던 또 다른 대표이사 역시 당해 10월을 넘기지 못한 채 사임했다. 공석이 된 주요 등기임원 자리는 킴스에O엔O 측 인물로 채워졌다. 킴스에O엔O 대표이사가 2020년 10월 선라이즈에프앤티 대표이사로 취임했고, 해당 시기에 사외이사, 감사 등 등기임원 전원이 새 얼굴로 교체됐다. 킴스에O엔O에 이어 지배 세력으로 등장한 곳은 식료품 제조업을 영위하는 동OO앤에스였다. 이 회사는 2022년 10월 기준 주주명부에 선라이즈에프앤티 주식 41만주(지분율 44.64%)를 보유한 단일 최대주주로 등재돼있다. 여기에 우호 세력(글로O포O 1만주+김성수 2만주+김종봉 788주)의 주식을 합산하면 지분율은 50%에 육박한다. 동OO앤에스는 사실상 선라이즈에프앤티를 인수하고자 만든 업체로 비쳐질 여지를 남긴다. 2022년 2월 출범 당시 자본금 10억원짜리였던 동OO앤에스는 불과 두 달 만인 2022년 4월14일 자본금을 21억원으로 두 배 이상 키웠다. 공교롭게도 동OO앤에스가 설립 이후 8개월 사이 선라이즈에프앤티 주식 41만주를 확보하는 과정에서 투입한 금액은 총 20억5000만원이었다. 이는 동OO앤에스 자본금 21억원이 선라이즈 주식 41만주를 매입하는 데 쓰였을 가능성에 주목하게 만든다. 게다가 선라이즈에프앤티는 기존 61만8400주였던 발행주식을 2022년 4월22일 91만8400주로 30만주 확대했다. 동OO앤에스가 자본금을 21억원으로 확충한 지 8일 만이다. 선라이즈에프앤티가 발행주식을 30만주 늘린 덕분에 동OO앤에스는 상대적으로 수월하게 주식 41만주를 확보한 형국이다. 동OO앤에스가 선라이즈에프앤티를 지배하는 위치로 올라설 무렵에 선라이즈에프앤티 임원 구성은 또 한 번 바뀌었다. 동OO앤에스 대표이사가 사내이사, 글로O포O 대표이사가 사외이사에 이름을 올렸고, 김성수 대표이사가 신규 선임됐다. 이후 김성수 대표는 선라이즈에프앤티 폐업 전까지 자리를 지킨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되짚어보는 연결고리 한편 일각에서는 김건희씨 일가에서 선라이즈에프앤티에 영향력을 행사했다면 그 시기는 지엔티에이치 측이 지배력을 상실한 이후일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나마 킴스에O엔O 혹은 동OO앤에스와의 연관성이 높다고 보는 것이다. 한 경찰 관계자는 “김건희씨 일가에서 선라이즈에프앤티에 관여한 직접적인 흔적이 발견되지 않았지만, 만약 영향력을 행사했다면 그 시기를 2021년 이후로 특정해볼 수 있을 것”이라며 “항간에 떠도는 마약 적발 여부는 2022년 근방으로 얘기가 오가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heatyang@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