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인물] 3·1정신 기리고 계승하는 김영진 3·1운동 기념재단 이사장

착한 백성들의 선한 싸움 세계에 알린다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1919년 3월1일 일제의 식민지배에 분노한 조선 민중이 거리로 나왔다.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는 민중을 향해 일제 경찰은 총칼을 들이댔다. 하지만 만세운동은 점차 확산돼 전국 규모로 발전했다. 2019년은 3·1운동이 100주년 되는 해. <일요시사>가 김영진 국회재단법인 3·1운동 UN·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 기념재단 이사장을 만나 그 의미와 가치에 대해 들었다.
 

▲ 일요시사와 인터뷰 갖고 있는 김영진 국회재단법인 3·1운동 UN·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 기념재단 이사장

3·1운동은 여러 갈래의 도화선서 시작된 불씨가 폭발하면서 일어났다. 1918년 우드로 윌슨 미국 대통령은 민족 자결주의를 주창했다. ‘민족은 스스로 민족의 운명을 결정해야 한다는 윌슨 대통령의 말은 민중의 마음에 파고들었다. 1919121일 대한제국 고종황제가 승하했다. 고종의 사인이 독살이라는 소문이 퍼지면서 나라가 술렁이기 시작했다.

19192월 일본 유학생들이 먼저 나섰다. 이들은 일본의 수도 도쿄서 2·8독립선언서를 발표하고 조선의 독립을 선언했다.

민족 자결주의와 2·8독립선언서의 영향으로 191931일 만세운동이 전개됐다. 이날 민족대표 33인은 인사동 태화관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대한독립만세를 삼창했다. 같은 시각 탑골 공원에 모인 학생, 시민들도 만세를 외쳤다.

민중 분노 폭발
일제 강력 탄압

3·1운동은 국내 전역과 해외로 확산됐다. 일제의 진압은 무자비했다. 음력 31일 충남 천안의 아우내장터서 만세를 부른 유관순 열사는 헌병대에 체포돼 모진 고문을 당하다 1920년 옥사했다. 3·1운동은 지식인과 학생뿐만 아니라 노동자와 농민·상공인 등 각계각층의 민중이 폭넓게 참여한 최대 규모의 항일운동으로, 한국 독립운동사의 큰 분수령을 이룬 사건이다.


국내는 물론 해외에까지 민족의 독립 의지와 저력을 보여줬다. 또 독립운동의 대중적 기반을 넓혀 항일전선을 체계화·조직화·활성화하는 기반이 됐다. 중국의 5·4운동과 인도 간디의 비폭력·불복종운동, 이집트의 반영자주운동, 터키의 민족운동 등 3·1운동은 아시아와 중동 지역 민족운동에 큰 영향을 끼쳤다는 평가를 받는다.

김영진 이사장은 3·1운동을 착하디 착한 우리 백성의 선한 싸움이라고 정의했다. 5선 국회의원, 전 농림부장관, 대학 석좌교수, 재단 이사장, 기념사업회 위원장 등 김 이사장을 수식하는 직책은 10여개가 넘는다. 그중 김 이사장이 최근 가장 몰두하고 있는 것은 바로 3·1운동.

김 이사장은 2008년부터 3대 민족민주화평화운동으로 정의한 5·18광주민주화운동, 4·19혁명, 3·1운동을 UN·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하기 위한 재단을 설립해 활동하고 있다. 5·18민주화운동 기록물은 2011년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됐고 4·19혁명은 UN·유네스코서 등재 여부를 결정하는 절차만 남겨두고 있다. 3·1운동 UN·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 사업은 김 이사장에게 남은 마지막 숙제나 다름없다.
 

▲ 3·1절 행사

지난 17일 김 이사장을 서울 여의도 중소기업중앙회에 위치한 국회재단법인 3·1운동 UN·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 기념재단(이하 3·1운동 기념재단) 사무실에서 만났다. 10(33) 남짓한 기념재단 사무실은 김 이사장을 만나기 위한 각계각층의 인사들로 북적였다.

-요즘 어떻게 지내십니까.

5선 국회의원과 농림부 장관을 끝으로 정치권을 떠나 야인으로 살고 있습니다. 많은 분들이 제게 근황을 물을 때마다 빈직다사(貧職多事, 직책이 대단하진 않지만 일이 바쁘다)라고 말씀드립니다. 그만큼 이것저것 벌려놓은 일이 많지만 2019년은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우리 민족의 자산인 3·1운동을 UN·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하는 일에 몰두하고 있습니다.

‘대한독립만세’ 3·1 운동 100 주년 맞아
UN·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 앞장


-한국 독립사에서 3·1운동이 갖는 역사적 의미는 어느 정도일까요.

3·1운동은 일제 36년 억압통치하에서 우리 민족이 해방을 쟁취하기 위해 진행한 치열하고 선한 싸움입니다. 지구촌의 많은 나라가 자유와 독립을 위해 항거운동에 나섰습니다. 그중에서도 우리 민족은 잔인하고 반역사적인 일제의 폭압지배에 맞서 3·1운동에서 시작된 비폭력저항을 조국 광복이 이뤄진 1945815일까지 이어간 유일한 나라입니다.

우리 역사를 되짚어보면, 1000번 정도의 외침이 있었어요. 하지만 우리가 다른 나라를 침략하거나 넘본 경우는 없었습니다. 참으로 착하디 착한 백성들이죠. 많은 인류학자나 역사학자들은 3·1운동이 중국의 5·4운동, 인도 간디의 비폭력 운동 등에 엄청난 동기를 부여했다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3·1운동은) 참으로 자랑스럽고 훌륭한 민족 자산입니다.

-10년 넘게 UN·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 사업을 진행 중이십니다.

이 사무실이 3대 민족민주화평화운동인 5·18민주화운동, 4·19혁명, 3·1운동을 UN·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하기 위한 본부입니다. 5·18민주화운동 기록물은 2011년 이미 등재가 완료됐고, 4·19혁명은 올해 상반기 UN·유네스코 등재 절차를 밟고 있습니다. 이제 3·1운동 하나만 남았는데 100주년을 맞기 전 UN·유네스코 등재 신청을 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김 이사장은 2008년 국회의원 시절 아시아-태평양 지역 교육위원연맹에 야당 중진의원 자격으로 참석했다가 UN·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한국 관련자료가 전혀 없다는 사실을 알고 충격에 휩싸였다. 그 세계기록유산 자료를 보기 전까진 UN·유네스코 등재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다.

100주년 맞아
기록유산 신청

UN·유네스코는 2년에 한 번씩 각국서 들어온 자료를 검토해 세계기록유산 등재 여부를 결정한다. 순조롭게 진행한다고 해도 3대 민족민주화평화운동을 전부 등재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단순 계산으로 최소 6년이었다. 김 이사장은 당시 한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서 오랫동안 고민한 끝에 5·18민주화운동을 첫 번째 목표로 삼았다.

그로부터 10여년 뒤, 김 이사장은 세 번째이자 마지막인 3·1운동의 등재 작업에 돌입했다. ‘맨땅에 헤딩이나 다름없던 5·18민주화운동 등재 과정서 일어난 정치적 공세 같은 굴곡은 덜했지만 세계기록유산 등재 사업은 장기 프로젝트였기에 긴 호흡이 필요했다. 김 이사장은 5·18민주화운동과 4·19혁명 등재 사업 때와 마찬가지로 먼저 재단 구성에 나섰다.
 

5·18민주화운동은 광주서, 4·19혁명은 서울서 승인받아 재단을 꾸렸다. 이와 달리 3·1운동 기념재단은 국회 법인으로 등록했다. 201712월 발기인 총회를 시작으로 3·1운동 기념재단이 출범했다. 당시 3·1운동 기념재단은 100주년 이전에 UN·유네스코에 등재 관련 서류를 접수, 한 맺힌 영령들의 한을 풀어주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3·1운동 기념재단을 국회 법인으로 하신 이유가 있습니까.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은 대부분 종교인으로 구성됐습니다. 기독교, 천도교, 불교, 민족종교 인사들이 참여했습니다. 그런데 민족대표는 가장 수가 많았던 기독교가 아니라 천도교서 나왔습니다. 천도교 손병희 선생, 종교 간의 밀어붙이기, 주도권 쟁탈 같은 게 전혀 없던 거죠. 그 부분에서 저는 3·1정신을 발견했습니다.


3·1정신은 남북도 없고 동서도 없고 보수도 진보도 없습니다. 종교마저도 초월했습니다. 이런 정신을 바탕으로 진행된 귀한 운동이기 때문에 국회 법인으로 재단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가졌습니다. 당시 국회의장을 만나 여러 자료와 내용을 공유했고, 여야 합의로 국회기념재단법인으로 승인받게 됐습니다.

민족운동 성격
국회 법인으로

-3·1운동 기념재단 창립, 운영 과정에 어려운 부분은 없었나요.

5·18민주화운동과 4·19혁명 등재를 준비할 당시에는 정치적으로 반대하는 목소리가 있었습니다. 5·18민주화운동과 4·19혁명이 지배 권력에 맞서 싸우는 과정서 일어난 일이기 때문에 반대급부가 존재했는데 가짜뉴스나 거짓말이 횡행했습니다. 저에 대한 음해가 나오기도 했고요.

하지만 3·1운동은 민족 전체가 일제의 무자비하고 억압적인 식민지배에 분노하는 과정서 일어난 사건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국가 원로들께서 저를 만나면 왜 내 이름이 3·1운동 기념재단서 빠졌지?”라고 적극적으로 말씀하십니다. 전화도 여기저기서 자주 걸려옵니다. 언론서도 관심이 많고요.

국민의 쌈짓돈으로 시작
다양한 사업 전개할 것 


그러면서도 김 이사장은 재정 부분서 고민이 없진 않았다고 털어놨다. 처음에는 3·1운동 기념재단의 취지를 알게 된 유명 기업서 종잣돈을 지원하겠다는 제안이 있었다. 하지만 김 이사장은 3·1운동 등재에 필요한 종잣돈만큼은 할아버지 쌈짓돈, 아이들 코흘리개 저금통, 주부들이 조금씩 남긴 잔돈 등 애틋한 사연이 담겨 있는 국민의 돈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야 여야, 진보보수, 남북을 초월한 3·1정신을 받들 수 있다고 봤다. 실제 3·1운동 기념재단의 소식이 알려지자 전국 각지서 작은 마음이 모이기 시작했다. 김 이사장은 당시 상황을 IMF 때 금모으기 운동, 해외동포의 달러 보내기 운동에 비유했다. 국가적 위기에 기꺼이 자신의 주머니를 털었던 한국인들의 민족성을 또 한 번 확인했다고 했다.

2000, 5000, 1만원 등 총 426명의 마음이 3·1운동 기념재단의 종잣돈이 됐다. 그리고 16개월 후 국회 법인으로 등록되면서 분위기가 달라졌다. 언론서 앞 다퉈 3·1운동 기념재단을 조명했고 국민모금운동에 대한 승인도 떨어졌다. 돈을 지원하겠다는 기업도 나왔다. 3·1운동 기념재단은 이 같은 재정적 뒷받침을 바탕으로 여러 사업을 계획 중이다.

-재단서 어떤 사업을 준비 중인가요.

먼저 남쪽 5000, 북쪽 2700, 해외동포 750만을 대표하는 발기인들이 모여 228일 국회의원회관 대강당서 국회기념재단의 기념식을 진행합니다. 3·1운동 기념재단에서는 해외지부를 만들어 당시 해외서 독립운동을 한 분들의 자료를 모으고 있습니다. 중국, 미국 등지서 항일운동을 전개한 산증인들을 모시고 기념식을 열려 합니다.

3·1운동 기념재단은 중국 북간도, 미국 워싱턴·뉴욕·필라델피아·시카고·덴버 등 7개 지역에 해외지부를 만들었다.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에 참여했던 해외 동포들을 찾아다니면서 인터뷰를 하거나 사진, 신문 기록 등 자료를 수집해 기록화를 추진하고 있다. 이번 3·1운동 100주년을 기해 해외의 자료가 한 데 모일 예정이다.

3·1운동 기념재단은 7가지 목표와 방향에 따라 사업을 구체화하고 있다. 우선적인 목표는 3·1운동 UN·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 사업이다. 세계기록유산 등재를 위해서는 자료 수집과 정리가 최우선이다. 이를 위해 3·1운동 기념재단에서는 전문가 집단을 구성했다. 정해구 청와대 정책기획위원회 위원장이자 성공회대 교수가 총괄책임을 맡고 있다.
 

3·1운동 당시 전국서 낭독된 선언문, 일본 경찰에 끌려가 조사를 받았던 민중들을 찾아 나섰다. 국내 신문뿐만 아니라 국외서 3·1운동을 어떤 시각으로 바라봤고, 어떻게 평가했는지에 대한 자료도 모았다. 그렇게 모은 자료로 등재 신청에 쓸 책자를 만들었다. 김 이사장은 “(3·1운동 자료로 구성한 책자는) 정말 소중한, 국보 같은 존재가 될 것이라고 자신했다.

3·1정신을 지구촌에 확산시키기 위한 ‘3·1운동 UN·유네스코 국제평화대상을 제정한다는 계획도 세웠다. 국내·국제 부문으로 나누어 UN의 지향점인 인류 공영과 세계평화에 기여한 인물을 선정해 수상자들의 활동과 사상, 생애를 조명하면서 3·1정신을 널리 알리겠다는 취지다. 3·1정신을 구현할 수 있는 국내외 인재양성을 위한 장학재단 설립을 목표로 두고 있다.

노벨평화상 수상자를 1년에 2, 상반기와 하반기에 초청해 국제 강연회를 개최하는 사업도 준비 중에 있다. 수상자들의 강연을 통해 국민과 해외동포에게 평화에 대한 인식을 강조한다는 취지다. 전통가락과 농악, 창 등 한()의 정서가 담긴 우리 가락의 전통을 이어가기 위한 국악경연대회도 진행한다. 국내·국제 부문으로 2년에 1번씩 격년제로 개최할 계획이다.

67만명을 수용할 수 있는 국회 잔디 광장서 3·1운동 기념재단이 주관하는 평화음악회를 정기적으로 열 생각도 갖고 있다. 현재는 정부기념식만 진행되고 있는 3·1절과 8·15광복절에 대해 3·1운동 기념재단 주최로 국회서도 기념식을 진행하는 것을 목표로 세우는 등 다양한 방향으로 3·1운동 알리기와 3·1정신 전파에 나서겠다는 입장이다.

-3·1운동 등재 가능성과 시기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100%입니다. 올해 하반기 4·19혁명이 UN·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될 것으로 확신하고 있습니다. 5·18민주화운동과 4·19혁명 등 이미 두 차례에 걸쳐서 등재 절차를 경험했기 때문에 3·1운동은 절차상으로는 조금 더 수월하게 준비할 수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또 국민적 지지가 강하기 때문에 순항하고 있다고 자신 있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소중한 역사
전 세계로

김 이사장은 기성세대들, 구체적으로 정부와 역사학자들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사랑하는 자식들에게 우리의 역사를 알려줘야 할 책임이 있다. 지금까지 3·1운동의 전국화, 세계화를 외쳐 왔지만 실제 제대로 이뤄진 부분은 없었다비록 뒤늦은 감이 있지만 5·18민주화운동을 시작으로 4·19혁명, 3·1운동까지 자랑스럽고 소중한 민족의 자산인 우리의 역사를 국민들에게 알리고 만방에 선포할 수 있길 바란다고 말했다.
 



배너






설문조사

진행중인 설문 항목이 없습니다.


‘변곡점’ 의정 갈등 엔드게임

‘변곡점’ 의정 갈등 엔드게임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구성원의 압도적인 지지로 당선된 수장이 반년 만에 끌려 내려왔다. 막말에 가까운 강한 발언과 제멋대로인 행보가 탄핵을 불렀다. 강성 수장이 물러나면서 변화를 기대하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대화의 문이 열릴 것인가, 더 높은 벽이 쌓일 것인가. 임현택 대한의사협회(이하 의협) 전 회장이 3년 임기를 다 채우지 못하고 탄핵당했다. 지난 5월 취임 이후 6개월 만으로 의협 역사상 2번째, 최단기간 내 불명예 퇴진한 회장이 됐다. 첫 번째는 2014년 4월 임기 1년여를 앞두고 탄핵당한 노환규 전 회장이다. 두 번째 최단기간 의협은 지난 10일 오후 서울 용산구 의협회관서 임시대의원총회를 열고 임 전 회장의 불신임안을 처리했다. 참석 의원 224명 가운데 170명(75.9%)이 찬성했다. 반대는 50명, 기권 4명이다. 전체 대의원 249명 가운데 224명(91.1%)이 표결에 참여했다. 의협 정관에 따르면, 회장 불신임안은 제적 대의원 3분의 2 이상이 출석하고, 출석 대의원 3분의 2 이상이 찬성하면 가결된다. 지난 3월 임 전 회장은 선거서 유효 투표수 3만3084표 중 2만1646표를 받아 당선됐다. 65.43%의 압도적인 지지다. 의협 회장 선거는 정부의 의대 정원 증원 발표로 의정 갈등 수위가 높아지고 있을 무렵에 치러졌다. 전공의가 병원을 떠났고 정부가 ‘2000명’을 강조하던 시기였다. 의협 회원들은 강성 중의 강성으로 분류되는 임 전 회장에게 힘을 실었다. 임 전 회장의 어깨에 너무 힘이 들어갔던 것일까? 임 전 회장의 언행은 사사건건 도마 위에 올랐다. SNS에 올린 글, 공식 석상서 했던 발언 등이 막말 논란으로 번졌고, 단식투쟁 등의 행보는 ‘쇼’라는 비판을 받았다. 무엇보다 박단 대한전공의협의회(이하 대전협) 비대위원장과 갈등을 빚으면서 의료계 내부 분열을 조장한다는 지적이 뼈아팠다. 임 전 회장이 8개월 동안 보여준 모습은 고스란히 탄핵 사유가 됐다. 의협 회원 사이에서는 임 전 회장이 SNS로 막말과 실언을 해 의사단체의 명예를 훼손했다는 비판이 일었다. 또 ‘임 회장이 전공의 지원금을 빼돌렸다’는 허위 비방 글을 올린 시도의사회 임원에게 고소 취하 대가로 1억원을 요구한 사실이 녹취록을 통해 알려져 논란이 불거졌다. 특정 인물에 대한 수위 높은 비판은 여론의 역풍을 불렀다. 장상윤 대통령실 사회수석을 겨냥해 “정신분열증 환자 같은 개소리”라고 비난하는 글을 올렸다가 환자를 비하했다는 지적을 받았다. 임현택, 6개월 만에 탄핵당해 막말 논란·의대 증원 못 막아 또 2021년 한 의사가 80대 환자에게 ‘맥페란’ 주사제를 투여한 뒤 부작용이 나타나 기소된 재판에 대해서도 도 넘는 발언을 쏟아냈다. 이른바 ‘맥페란 재판’ 항소심서 판사가 1심의 금고 10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은 해당 의사의 항소를 기각하자 “이 여자 제정신입니까?”라는 글을 SNS에 올린 것이다. 임 전 회장의 발언에 법원은 이례적으로 “재판장의 인격에 대한 심각한 모욕일 뿐 아니라 국민의 신뢰를 크게 훼손할 수 있는 매우 부적절한 행동”이라고 공개적으로 유감을 표명했다. 의대 정원 증원 집행정지와 관련해 기각·각하 결정을 내린 재판장이 ‘회유’받았을 것이라는 주장으로도 입길에 올랐다. 서울고등법원 재판부가 결정을 내린 다음 날 한 라디오 프로그램에 출연해 재판장의 실명을 거론하면서 “지난 정권에서는 고법 판사들이 차후 승진으로 법원장으로 갈 수 있는 그런 길이 있었는데 제도가 바뀐 다음에는 그런 통로가 막혀서 이분이 아마 어느 정도 대법관에 대한 회유가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있다” 말했다. 서울고법은 법원 명의로 입장문을 내고 “해당 단체장의 아무런 객관적 근거가 없는 추측성 발언은 재판장의 명예와 인격에 대한 심대한 모욕”이라면서 “사법부 독립에 관한 국민의 신뢰를 현저히 침해할 수 있는 매우 부적절한 언사다. 깊은 유감을 표명한다”고 밝혔다. 여기에 결정적으로 정부의 2025학년도 의대 증원을 막지 못한 점, 간호법 제정을 저지하지 못한 점이 탄핵 사유로 꼽혔다. 임 전 회장은 총회를 앞두고 의사 회원들에게 사과하고 페이스북 계정을 삭제하는 등 재신임을 호소했지만 반전은 없었다. 회장을 탄핵한 의협은 비대위원회 체제로 전환하고 지난 13일 새로운 회장 선거 전까지 단체를 이끌 비대위원장을 뽑았다. 그 결과 박형욱 대한의학회 부회장이 1차 투표서 총 유효 투표수 233표 중 123표(52.8%)를 얻어 과반으로 당선이 확정됐다. 임기는 내년 1월 차기 회장이 선출될 때까지다. 뒤늦게 호소했지만… 박형욱 비대위원장은 “정부는 의료 파탄이란 시한폭탄을 장착해놨다”며 “정말 대화를 원한다면 정부는 먼저 시한폭탄을 멈춰야 한다. 그래야 진정한 대화가 가능하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비대위원들의 합의에 기초해 입장과 행동을 결정할 것”이라며 “비대위 운영서 소외돼왔던 전공의들과 의대생들의 견해가 충분히 반영될 수 있게 하겠다”고 소감을 밝혔다. 임 전 회장이 물러나고 새로운 비대위원장이 등장하면서 의협의 투쟁 방향에 변화가 생길 가능성이 커졌다. 일각에서는 의협의 이번 행보를 의정 갈등의 중요한 변곡점으로 보고 있다. 강성 회장을 필두로 정부와 강하게 대립했던 이전 모습서 벗어나 대화에 참여할 것이라는 의견과 이전보다 더 수위 높은 대정부 투쟁이 예상된다는 의견으로 갈리는 중이다. 후자의 배경에는 대전협이 있다. 앞서 박단 비대위원장 등 전공의 70여명은 전날 의협 대의원들에게 “비대위원장으로 박형욱 교수를 추천한다”는 메시지를 보내 공개 지지 의사를 드러냈다. 대의원회서도 박단 비대위원장의 공개 지지에 대해 경고하는 등 잡음이 일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대전협의 지지를 등에 업은 박형욱 비대위원장이 당선되면서 전공의의 영향력이 상대적으로 커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됐다. 의협과 대전협의 공조가 본격화될 것이라는 관측이 나오는 이유다. 문제는 양측의 교류가 정부와의 대화로까지 이어질 수 있느냐는 점이다. 박형욱 비대위원장은 당선 소감부터 정부의 태도 변화를 요구하고 나섰다. 또 윤석열 대통령의 변화도 필요하다고 언급했다. 의정 갈등서 줄곧 선봉에 선 전공의들은 ‘의대 정원 증원 백지화’라는 요구사항서 앞으로도 뒤로도 움직인 적이 없다. 전공의의 행보는 의대생, 의대 교수 등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영향력 커진 전공의 단체 의료계가 전공의 중심으로 굴러가고 있는 셈이다. 실제 대전협은 지난 11일 출범했던 여야의정협의체(이하 협의체)에 대해서도 부정적인 태도를 보인다. 협의체는 야당인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이 불참하고 의료계에서는 학술 단체인 대한의학회와 의대 학장 모임인 한국의과대학·의학전문대학원협회(KAMC)만 참석하는 등 ‘반쪽 출범’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협의체의 운영 기한은 올해 말까지로, 다음 달 22~23일 전에 의미 있는 결과를 낼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는 태도다. 하지만 박단 비대위원장은 협의체에 대해 ‘무의미하다’고 평가했다. 그는 협의체가 첫발을 뗀 11일 SNS에 “국민의힘 한동훈 대표는 전공의와 의대생, 당사자 없이 대화나 하겠다는 한가한 소리를 하고 있다”며 “한 대표는 2025년 의대 모집 정지와 업무개시명령 폐지에 대한 입장부터 명확히 밝히시길 바란다”고 일갈했다. 이어 “눈치만 보며 뭐라도 하는 척만 하겠다면 한동훈의 ‘여야의정 협의체’ 역시 임현택 전 의협 회장의 ‘올바른 의료를 위한 특별위원회(올특위)’와 결국 같은 결말일 것”이라고 우려했다. 올특위는 의료계의 입장을 하나로 모으기 위해 의협 주도로 구성한 범의료계 특별위원회다. 전공의와 의대생이 해당 위원회에 불참하면서 파행 운영되다 지난 7월 해체됐다. 정부는 협의체서 의료계가 제안한 내용에 대해 “진정성 있게 검토하겠다”는 견해를 밝혔다. 지난 11일 협의체서 의료계는 한국의학교육평가원 자율성 보장, 추가 합격 제한 등을 통한 2025학년도 의대 선발 인원 축소 등을 제안한 것으로 알려졌다. 정윤순 보건복지부 보건의료정책실장은 지난 14일 의사 집단행동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이하 중대본) 회의를 주재하면서 “마주 앉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린 만큼 활발한 대화와 소통을 통해 누적된 갈등을 해소하고 신뢰를 회복해 국민이 원하는 결과를 끌어낼 수 있길 기대한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의협과 전공의 등 다른 의료계 단체의 참여를 호소했다. 박단 공개 지지 새 비대위원장 강경 투쟁이냐 VS 노선 변화냐 의료계 내부 상황은 크게 바뀌었지만 향후 상황은 여전히 ‘시계 제로(0)’ 상태다. 임 전 회장과 박단 비대위원장 간 갈등의 불씨도 여전히 살아있다. 대전협은 임 전 회장의 탄핵을 공개적으로 요청하는 등 ‘(임 전 회장과)같이 갈 수 없다’는 뜻을 분명히 밝힌 바 있다. 실제 대전협은 임 전 회장의 탄핵을 요청하면서 “이해와 소통이 가능한 새로운 회장을 필두로 의협과 대전협 두 단체가 향후 상호 연대를 구축할 수 있길 기대한다”는 입장문까지 냈다. 임 전 회장의 탄핵안 가결 직후 박 비대위원장이 “결국 모든 길은 바른 길로”라는 내용의 SNS 글을 올리기도 했다. 문제는 임 전 회장이 박단 비대위원장을 상대로 반격을 진행하고 있다는 점이다. 임 전 회장은 탄핵 사흘 만에 닫았던 페이스북 계정을 다시 열고 “박단과 그 뒤에서 박단을 배후 조종해 왔던 자들이 무슨 일을 해왔는지 전 의사 회원들에게 아주 상세히 밝히겠다”며 박단 비대위원장을 저격하는 글을 올렸다. 그러면서 “의협 대의원회 비대위원장과 의협 회장 선거가 더 이상 왜 필요한가”라면서 “박단이 의협 회장 겸 비대위원장을 맡아 모든 권한과 책임하에 의료 농단을 해결하면 된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지지해주셨던 모든 분에게 우선 사과의 말씀을 드린다”며 “이유가 어떻든 회장 취임 전부터 탄핵하겠다고 마음먹고 있던 자들에게 빌미를 주어 넘어간 것 자체가 제 잘못”이라고 주장했다. 또 의협의 근본적인 개혁의 첫걸음으로 의협 대의원회 폐지 등을 내용으로 하는 민법상의 사원총회를 개최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사원총회는 민법에 규정된 사단법인의 최고의사결정 기관이다. 의협 최고의결기구로 알려진 대의원총회보다 상위에 있고 정관의 규정으로 폐지할 수 없다. 사원총회는 이사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경우나 총 사원 5분의 1 이상이 회의의 목적 사항을 제시해 청구하는 경우 소집될 수 있다. 반격 시작 내부 갈등? 올해 2월 시작된 정부와 의료계의 갈등이 10개월째로 접어들었다. 온갖 말이 오갔지만 되짚어보면 조금도 좁혀지지 않은 평행선 상황이 계속되는 모양새다. 정부와 의료계의 대치 상황이 길어질수록 ‘의료 붕괴’는 가시화되고 있다. 한 의료계 관계자는 이렇게 말했다. “이제는 정말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jsjang@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