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인물> ‘승부사’ 김기태 기아 타이거즈 감독

‘V11’ 호남은 지금 축제 중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지난달 30일, 2017 KBO리그 한국시리즈 5차전. 기아 타이거즈는 우승까지 1승만 남겨놓은 상황. 이범호의 만루포로 앞서 나가던 기아는 두산 베어스의 거센 공격에 9회말 7 대 6까지 몰렸다. 그러자 김기태 기아 감독은 승부수를 띄웠다. 6차전 선발로 예정돼있던 에이스 양현종을 마운드에 올린 것. 팬조차 반신반의했던 카드는 기아의 11번째 우승으로 되돌아왔다.
 

6회까지는 기아 타이거즈의 무난한 승리가 예상됐다. 한국시리즈에 올라가기만 하면 무조건 우승을 거머쥔 ‘코시 불패’의 기아로선 기록을 이어갈 절호의 기회였다. 3회초 타자 이범호가 두산 베어스의 투수 니퍼트를 상대로 만루 홈런을 치면서 대거 5점을 뽑아냈을 땐 KBO리그 2017 시즌이 싱겁게 마무리됐다는 성급한 결론도 나왔다. 시리즈 전적 3 대 1, 6회 말까지 7점차, 이대로 가면 가을야구는 기아의 최종 승리로 끝날 참이었다.

9회 승부수
5차전서 끝

극장은 7회에 열렸다. NC 다이노스와의 플레이오프 4경기 중 3경기서 10점 이상을 올리며 폭발적인 타선 응집력을 발휘했던 두산의 반격이었다. 두산은 7회 말에만 6점을 뽑아 기아를 턱밑까지 추격했다. 

잠실구장에 모인 팬들의 희비가 극명하게 엇갈리는 순간이었다. 시리즈 전적서 기아가 여유롭게 앞선 상황이었지만 기세 싸움인 단기전서 역전패는 치명적이었다.

그때 기아 불펜서 투수 양현종이 몸을 풀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양현종은 지난달 26일 2차전서 두산 타선을 9회까지 무실점으로 틀어막아 좌완 투수 사상 두 번째로 한국시리즈 완봉승을 거둔 기아의 에이스다. 


그가 불펜서 몸을 푸는 모습이 실제 중계에 잡히자 야구 관련 커뮤니티는 물론 포털 사이트 중계로 경기를 보고 있던 팬들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6차전 선발로 예정돼있던 양현종을 5차전서 당겨 썼다가 패하면 분위기 자체가 넘어갈 수 있었다. 그럼에도 김기태 기아 감독은 양현종을 마운드에 올렸다. 시리즈를 5차전서 끝내겠다는 의지의 승부수였다. 

실패하면 엉켜버린 투수 운용 문제로 두산에 우승을 내줄 수도 있다는 위기감이 팽배한 상태였다.

양현종이 1사 만루에 몰리면서 김 감독의 작전은 실패로 돌아가는 듯했다. 기아는 적시타 하나로 끝내기를 당할 위기였다. 하지만 양현종이 두산의 타자 김재호를 플라이 아웃으로 잡아내면서 5차전은 기아의 승리로 끝났다. 

기아의 11번째 우승이자 8년 만에 통합 우승이 결정된 순간이었다. 우승이 확정되자 그라운드로 뛰어나와 선수들과 기쁨을 나누던 김 감독은 결국 눈물을 보였다. 그동안 마음고생이 담긴 기쁨의 눈물이었다.
김 감독은 우승 직후 기자회견서 “너무 좋다. 우리 선수들, 두산 선수들 추운 날씨에 열심히 했다. 좋은 것만 기억하고 싶고 모두에게 감사하다”고 소감을 밝혔다.

 그러면서 기자가 ‘경기 중 아찔했던 순간’에 대해 묻자 “좋은 날에는 안 좋은 기억을 갖고 있는 선수들에 대한 이야기는 하고 싶지 않다”며 “그 선수의 가족들이 보고 있지 않나. 오늘 같은 날은 잘했던 선수들이 부각됐으면 한다”고 공을 돌렸다. 이어 “모든 선수를 칭찬하고 싶다”고 덧붙였다.

김 감독이 팀을 맡은 지 3년 만에 우승을 이룬 것은 물론 두산의 한국시리즈 3연패를 저지하는 데 성공하면서 ‘김기태 리더십’이 주목받고 있다. 그의 리더십을 소개할 땐 형님, 큰형님, 동행, 지게 등의 단어가 단골로 등장한다. 감독으로서 구단을 이끌기보다는 ‘선수들과 함께 간다’는 의미가 담겼다.


선수, 코치…우승과 인연 멀어
프로 발들인지 27년 만에 영광

김 감독은 2014년 11월 기아 감독으로 부임할 때부터 ‘나보다는 우리’를 강조했다. FA(자유계약 선수)와 트레이드를 통해 수혈한 선수들, 기존 기아 선수들, 신인 선수들로 조합된 팀을 하나로 묶는 게 시급했다. 

김 감독은 ‘동행 야구’를 캐치프레이즈로 내세우며 선수들과의 교감을 중시했다. 소통을 통해 팀 전력을 끌어올리는 방법으로 성적 향상을 꾀한 것이다.

감독이 나서서 선수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문제가 생겼을 때 함께 고민하고 해결하려는 모습을 보이자 서로에 대한 신뢰가 높아졌다. 베테랑들을 대우해주면서 그들이 팀을 이끌 수 있도록 배려했다. 

김 감독의 리더십은 미디어를 대할 때 특히 두드러졌다. 선수들의 장점은 얘기하되 단점은 말하지 않았다. 특정 선수가 실책을 저질러도 질책보다는 칭찬을 우선시했다. 기아 선수들은 김 감독의 비호 아래 자신 있게 플레이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받았다.

2017 시즌 전 기아로 이적한 타자 최형우는 “프로야구 지도자 가운데 ‘형님 리더십’을 갖췄다고 평가받는 감독님은 많다”며 “그런데 선수들과 대화하고 소통하고 의견을 조율하는 분은 우리 감독님이 최고”라고 치켜세웠다. 
 

한국시리즈서 기아와 맞붙은 김태형 두산 감독도 “김기태 감독은 친화력이 좋다. 내가 못 가진 친형과 같은 리더십이 있다”고 인정한 바 있다.

선수를 믿고 맡기는 김 감독의 스타일은 선수들의 잠재력을 이끌어냈다. 경기 중 부진했던 선수들도 ‘감독님의 믿음에 보답하고 싶다’는 마음으로 타석에 들어서고 마운드에 올랐다. 팀의 승리와 패배에 일희일비하는 팬들조차 김 감독의 방식에는 토를 달지 않을 정도. 

대를 이어 기아를 응원 중인 광주의 김은지(29)씨는 “나를 포함해 많은 팬들이 감독님의 장점으로 ‘사람이 좋다’를 꼽을 것”이라며 “가끔 사람이 너무 좋아 속이 터질 때도 있지만 그래도 감독님의 리더십 덕분에 11번째 우승을 이뤄냈다”며 기뻐했다.

통합우승 비결
큰형님 리더십

김 감독의 리더십은 곧장 성적으로 나타났다. 김 감독 부임 전 2년 연속 9위에 그쳤던 기아는 2015년 7위로 시리즈를 마감하며 가능성을 드러냈다. 순위는 7위였지만 마지막까지 포스트시즌 진출 다툼을 벌였다. 

지난해에는 정규시즌 5위를 기록, 와일드카드 결정전에 올랐다. 1승1패로 준플레이오프 진출에는 실패했지만 저력을 발휘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올해는 최형우를 영입하며 단숨에 우승 후보로 지목됐다. 그리고 김 감독 부임 3년째 기아는 왕좌에 올랐다. 


2009년 이후 8년 만에 정규시즌에 이은 한국시리즈 우승까지 차지한 통합 우승이었다.

김 감독에게 이번 우승은 남다를 수밖에 없다. 선수 시절을 포함 27년간 프로야구 판에 있으면서 처음 얻은 우승 반지기 때문이다. 1982년 6개 구단으로 시작한 프로야구 리그는 2015년 10개 구단 체제가 되기까지 수많은 감독들이 각 구단을 거쳤다.

이들 중 한국시리즈 우승으로 가장 높은 고지에 올라봤던 감독은 35년 프로야구 리그 역사상 13명에 불과하다. 혼자서 무려 10번의 우승을 이끈 김응용 감독을 포함, 김재박·류중일 감독(4회), 김성근 감독(3회) 등 일부 감독들이 우승을 독식하는 경향을 보였기 때문이다.

그만큼 이름을 새기기 힘든 한국시리즈 우승 감독 명단에 김 감독의 이름이 추가됐다. 김 감독은 기아의 연고지인 광주서 태어나고 자라 학창시절을 보냈지만 해태나 기아에선 한 번도 선수나 코치 생활을 한 적이 없다. 이번 우승이 김 감독에게 값진 이유다.

현역 시절 레전드
좌타 거포로 명성

김 감독은 현역 시절 남부럽지 않는 선수 생활을 보냈다. 팬들 사이서 ‘레전드’라고 회자될 정도의 활약이다. 올해로 48세인 그는 광주서림초-충장중-광주제일고를 거쳐 인하대를 졸업한 후 1991년 쌍방울 레이더스의 신생팀 특별우선 지명을 받아 입단했다.


데뷔 첫 해부터 홈런 27개를 쳐내 장종훈에 이어 홈런 2위에 오르며 좌타 거포의 등장을 알렸다. 다음해인 1992년엔 출루율 1위로 첫 개인 타이틀을 차지했다. 1994년에는 홈런 25개로 홈런왕에 올랐다. 현재 상황과 비교했을 때 홈런 25개는 홈런왕을 차지하기에 적은 수치였지만 당시 김 감독의 신분은 방위병이었다.

김 감독은 방위병 신분으로 원정 경기에 제약을 받아 126경기 체제였던 리그서 18경기를 결장한 108경기만 뛰고도 홈런왕을 따냈다. 1997년에는 타율 0.344로 타격왕을 차지하는 등 쌍방울서 활약하던 8년간 무려 6번의 개인 타이틀을 따내며 리그 최고의 타자로 군림했다.
 

부침이 시작된 건 외환위기가 발생한 1997년이었다. 모기업이 부도나면서 쌍방울은 핵심 선수들을 팔아야 했다. 이 과정서 김 감독 역시 1998 시즌이 끝난 후 팀 동료와 함께 삼성 라이온즈로 이적했다. 

삼성서도 2년 동안 홈런 54개를 때려내는 등 빼어난 활약을 펼쳤다. 그러나 2011년 김응용 감독과의 불화로 출장 수가 44경기로 현저히 줄어들었다. 결국 시즌이 끝난 뒤 현금 11억원이 포함된 6대 2 대규모 트레이드를 통해 SK 와이번스로 팀을 옮겼다.

신생팀이었던 SK는 거포가 필요한 상황이었다. 김 감독은 고참으로서 2003년 팀의 첫 한국시리즈 진출을 이끌었고, 이듬해에는 골든글러브를 수상하는 등 선수 생활의 마지막을 화려하게 불태웠다. 

2005년 SK서 은퇴할 때까지 15시즌 통산 1544경기에 출전, 타율 2할9푼4리, 1465안타, 249홈런, 923타점의 기록이 그의 찬란했던 선수 생활을 방증한다. 또 홈런왕, 타격왕, 4차례의 골든글러브 등 수많은 트로피를 들어 올렸다.

2011년 프로야구 리그 출범 30주년에는 투수 선동열, 포수 이만수 등과 함께 올스타 10인으로 뽑히는 영광을 누렸다. 김인식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대표팀 감독은 지난 2월 일본의 훈련장을 찾은 김 감독에게 “확실한 좌타 강타자가 없는 대표팀 상황에 김기태가 있었으면 큰 도움이 됐을 것”이라고 농담을 건네기도 했다.

김 감독은 뛰어난 개인 성적은 물론 현역 시절 거쳐 갔던 모든 팀에서 주장을 역임할 만큼 이미 리더십으론 정평이 나 있었다. 은퇴 후에는 SK서 1군 타격보조코치로 지도자 생활을 시작했다. 2007년부터 일본 명문구단 요미우리 자이언츠서 육성코치와 2군 타격코치로 활동하며 지도자 경험을 쌓았다.

LG감독 시절 성적 부진으로 나락
기아 부임 3년 만에 ‘특급사령탑

2008년 베이징 올림픽에선 대표팀 타격코치로 한국의 퍼펙트 우승에 기여했다. 베이징 올림픽서의 금메달이 이번 우승 전까지 김 감독이 경험한 사실상 유일한 우승 경력이었다. 2010년에는 국내로 복귀, LG 트윈스의 2군 감독과 수석코치를 역임했다. 그러다 2012년 LG의 사령탑에 오르면서 감독으로서 첫 발을 내딛었다.

LG서의 감독 생활은 순탄치 않았다. ‘런(Run)기태(도망가는 기태)’ ‘포기가 빠른 남자’ 등의 오명을 얻었던 것도 이 시기다. 김 감독이 팀을 맡을 무렵 LG의 전력은 누수가 상당한 상태였다. 

FA 자격을 얻은 이택근, 조인성 등 주전 선수들이 모두 이적을 택했고, 투수 2명이 승부조작 사건에 연루되면서 영구제명당했다. 전력 보강이 필요한 시기에 전력 약화 상태로 시즌을 맞이한 LG는 그해 8개 구단 중 7위에 머물렀다.

김 감독이 부임하고도 가을야구에 실패하자 많은 비판이 쏟아졌다. 하지만 부임 다음해 LG는 정규시즌서 2위를 차지하며 11년 만에 가을야구에 진출했다. 

LG 감독 시절에도 특유의 형님 리더십과 코팅 스태프와의 철저한 분업화는 야구판 전체에 신선한 자극을 줬다는 평가를 받았다. 김 감독의 지휘 아래 성적이 향상된 LG의 2014년을 기대하는 사람이 많았다.
 

그러나 2014년 4월23일 김 감독은 삼성과의 시즌 2차전이 열린 대구구장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감독이 경기장에 나타나지 않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지자 온갖 추측과 억측이 난무했다. 

이날 LG 측은 “김기태 감독이 성적 부진에 대한 책임을 지고 자진 사퇴하겠다는 의사를 구단에 전달했다”고 밝혔다.

김 감독이 사의를 표명할 당시 LG는 시즌 개막 후 18경기에서 4승1무13패로 최하위에 머물러 있었다. 선수단은 삭발식을 갖고 투혼을 불살랐지만 경기력은 나아지지 않았다. 그의 갑작스러운 사퇴 소식에 팬들은 분노와 안타까움을 감추지 않았다. 

팀의 성적 부진을 책임졌다고는 하나 아직 많은 경기가 남은 상황서 일찌감치 포기한 게 아니냐는 원성이 뒤따랐다.

이런 상황서 김 감독과 기아의 만남이 이뤄졌다. 기아는 당시 선동렬 감독을 선임했다가 팬들의 반발에 부딪혀 방향을 선회한 상태였다. 선 감독은 팬들의 비난 여론이 거세지자 스스로 감독직서 물러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계약까지 마친 감독이 전격적으로 사퇴하자 입장이 난감해진 기아가 선택한 게 김 감독. 김 감독은 기아의 요청에 오랜 고민 없이 감독직을 받아들였다. 계약기간 3년에 계약금 2억5000만원, 연봉 2억5000만원으로 총 10억원의 계약조건이었다.

LG서 자진사퇴
기아선 우승감독

기아에 부임할 무렵 김 감독의 어깨엔 ‘명가 재건’이라는 팀의 목표와 명예회복이라는 개인의 목표가 얹힌 상태였다. 2014년 김 감독이 기아 유니폼을 입을 무렵 “팬들에게 박수 받는 감독이 되겠다”는 포부를 밝힌 바 있다. 

그 이후 3년 만에 김 감독은 두 가지 목표를 모두 달성했다. 김 감독과 기아는 앞으로 3년 더 함께 동행한다. 그는 “우승에 만족하지 않고 꾸준하게 강한 팀으로 자리 잡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전했다. 김 감독의 마음은 벌써부터 2018 시즌을 향하고 있다.


<jsjang@ilyosisa.co.kr>

 

<기사 속 기사> '2018시즌 10개 구단 감독은?' 사령탑은 정해졌다

KBO리그 2017 시즌이 기아 타이거즈의 우승으로 마무리됐다. 10개 구단은 5개월여의 담금질을 거쳐 2018 시즌을 준비한다. 2017 시즌이 끝난 지 1주일 남짓이지만 10개 구단의 다음 시즌 감독은 모두 정해진 상태. 경기만 없을 뿐 2018 시즌이 시작됐다는 목소리가 나올 정도다.

8년 만에 통합 우승으로 V11을 달성한 기아는 김기태 감독과 재계약했다. 계약 조건은 기간 3년에 계약금 5억원, 연봉 5억원 등 총액 20억원의 초특급 대우다. 김 감독의 몸값은 3년 전 기아로 올 때와 비교해 두 배나 뛰었다.

류중일·김기태 최고 대우 1·2위

삼성 라이온즈서 LG 트윈스로 자리를 옮긴 류중일 감독은 3년 계약에 총액 21억원으로 KBO리그 최고 대우를 받았다. 한용덕 전 두산 수석 코치는 한화 이글스의 새 사령탑을 맡았다. 한화의 프랜차이즈 스타 출신으로 승부욕과 포용력이 있어 내년 시즌이 기대된다는 평가다.

조원우 롯데 자이언츠 감독은 올해 정규 시즌 3위를 기록하며 2012년 이후 5년 만에 가을 야구를 한 공로를 인정받아 재계약에 성공했다. 

그 외 김태형 두산 베어스 감독, 김경문 NC 다이노스 감독, 트레이 힐만 SK 와이번스 감독, 장정석 넥센 히어로즈 감독, 김한수 삼성 감독, 김진욱 kt 위즈 감독은 계약기간이 남아 2018년에도 팀을 이끈다. <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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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보이스피싱·스캠 조직 캄보디아 ‘셀허브’ 추적

[단독] 보이스피싱·스캠 조직 캄보디아 ‘셀허브’ 추적

[일요시사 취재1팀] 오혁진 기자 = 캄보디아 보이스피싱·스캠 조직의 민낯이 드러났다. 주로 수도인 프놈펜 인근과 시아누크빌 범죄 단지가 그들의 주둔지였다. 국내 조직폭력배가 중국 갱단과 결탁해 만든 ‘셀허브’의 경우 피해자만 수십명이다. 이들은 엔터테인먼트 기업을 가장했다. 사이트에는 유명인의 사진이 수차례 도용된 것으로 확인됐다. 현재는 사라진 셀허브 엔터테인먼트의 홈페이지. 지난해 7월 <일요시사>가 취재한 이후 대표이사의 이름과 사진이 여러 차례 바뀌었다. 유인촌 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에게 표창장을 받았다며 문서를 위조하기도 했다. 이 기업의 정체는 로맨스 스캠 조직이다. 확인된 피해액만 약 40억원, 피해자는 수십명이다. 한 언론사는 보도자료까지 작성하며 홍보하기도 했다. 조직적 준비 경찰 수사 중 서울경찰청 사이버수사대는 지난 24일, 셀허브 조직원 3명을 각각 구속·불구속으로 서울중앙지검에 송치했다. <일요시사> 취재를 종합하면, 이들은 조건 만남 사이트를 운영한 로맨스 스캠 조직이다. 여성 관련 데이트 상품을 판매하거나 연애 빙자 사기를 일삼았다. 셀허브 조직원이던 A씨는 “연예인 지망생이나 모델과 연락하게 해 준다며 50만원에서 100만원까지 대포통장 계좌에 돈을 입금하게 한 뒤 텔래그램 아이디를 알려주고 연락하게 하는 시스템”이라며 “연결된 여자는 실제 남성이고 한국에서 조직폭력배로 활동하던 사람들이 대부분”이라고 주장했다. 이 조직은 지난해 3월 캄보디아 범죄 밀집 지역인 태자 단지에서 인력을 모으기 시작했다. 같은 해 5월 사이트를 개설해 조직원들에게 민간인 협박, 중국어 통역 등의 역할을 맡기고 수십명으로부터 약 40억원을 뜯어냈다. 같은 해 7월 <일요시사> 취재가 시작되자 이 조직은 셀허브 엔터테인먼트 대표이사의 이름을 ‘김현숙’에서 ‘박소희’로 변경하고 유명인의 사진을 수차례 도용했다. 유 전 장관에게 표창장까지 수여받았다며 피해자들의 의심을 피하려는 꼼수도 서슴지 않았다. A씨는 “조직에서 탈출하려는 사람은 밤새 맞거나 강제로 마약을 투약당하기도 했다. 조직폭력배 출신 한국 사람들이 간부고 일반 조직원은 교민 사이트를 통해 ‘한 달에 500만~1000만원을 벌 수 있다’는 거짓말에 속아 일하게 된 사람들”이라고 설명했다. 이 사건은 서울경찰청이 수사하기 이전인 지난해 7월부터 강서·영등포·구로경찰서 등에 여러 고소장이 접수됐었다. 하지만 수사는 원활하지 않았다. 주요 혐의자가 해외에 거주 중이거나 피의자 특정이 어려운 게 난관이었다. 수사를 담당했던 한 경찰 관계자는 “캄보디아 프놈펜에 주요 혐의자들이 거주한다는 사실을 파악하고 지난해부터 공조를 요청했으나 캄보디아 당국이 비협조로 일관했다”며 “고소인분들이 ‘왜 안 잡냐’ ‘내 돈 어떻게 하냐’는 등 불만이 많으셨다. 매번 죄송하다고 말씀드리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캄보디아가 협조하지 않으면 조치가 불가능했다”고 토로했다. 지난해 3월부터 조직원 모집…태자 단지서 모의 ‘유인촌 표창장’ 걸어 놓고 ‘정상 기업’ 홍보 막막했던 수사는 대학생 박모씨 피살 사건이 사회적 파장을 일으키면서 풀리기 시작했다. 이재명정부가 캄보디아를 압박했고 현지에 구금된 한국인 범죄자 겸 피해자 수십명을 국내로 송환했다. 송환된 인원 중 일부는 셀허브 사건과도 연관된 것으로 파악됐다. 정성학 충남경찰청 수사부장은 지난 20일 청내 프레스센터에서 브리핑을 열고 “이들을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사기) 및 범죄단체 가입 및 활동 혐의로 전원 구속했다”고 밝혔다. 현재까지 부건(총책 가명, 40대 초반, 한국말을 쓰는 외국인 추정) 조직으로부터 확인된 피해 건수는 110건, 피해액은 93억여원에 달했다. 약 100명의 조직원을 거느린 부건은 지난해 중순부터 올해 7월까지 주로 프놈펜 웬치(범죄 단지) 및 태국 방콕 등지에서 한국인을 상대로 범행을 벌여왔다. 부건 조직은 지난 2018년 중국에서부터 활동을 시작해 그동안 단속을 피하려 태국, 캄보디아 등지로 거주지를 옮겨가며 범행을 계속해 왔다. 이들은 데이터베이스, 입출금 등을 지원·관리하는 CS팀과 광고를 보고 접근한 피해자를 기망하는 로맨스팀, 검찰 사칭 보이스피싱팀, 코인투자리딩 사기팀, 공무원 사칭 노쇼 사기팀 등 총 5개 팀으로 이뤄진 조직체계를 갖췄다. 이들은 가구판매업을 하러 캄보디아에 갔다고 진술했으나 이후 지역 선·후배 권유, 고액 아르바이트 인터넷 광고 등을 접하고 범죄에 연루된다는 걸 알면서도 조직에 가입해 활동한 것으로 조사됐다. 속아서 조직에 들어갔다고 진술하지 않은 이들의 유입 경로는 ▲지인 포섭 29명 ▲인터넷 광고 등 포섭 8명 ▲현지 카지노 포섭 6명 ▲기타 2명으로 나타났다. 이들은 남성 42명과 여성 3명으로 연인도 있었다. 대부분은 20~30대 연령으로 최소 2개월부터 최대 16개월까지 범행에 가담해 왔던 것으로 드러났다. 조건 만남 사이트 경기북구경찰청 형사기동대도 전기통신금융사기특별법 위반 등 혐의로 피의자 15명 중 11명을 구속 송치했다. 이들은 지난해 8월부터 한 달간 캄보디아 범죄 단지에서 여성을 사칭, 조건 만남 등을 명목으로 피해자들로부터 돈을 가로챘다. 또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이성 만남 광고를 낸 후 이를 보고 연락해 온 피해자에게 여성인 척 채팅으로 유인했다. 여성을 소개받기 위해서는 자신들이 개발한 조건 만남 사이트에 회원 가입과 인증을 받아야 한다고 속여 인증을 위한 돈을 요구했다. 3차례에 걸친 인증 절차 과정에서 여러 게임에 성공하면 가입비를 돌려준다고 속여 피해자로부터 1인당 적게는 수십만원에서 많게는 수억원을 받아 챙겼다. 피해자들이 믿을 수 있도록 별도의 만남 인증과 후기글을 남기는 ‘화력방’도 운영했다. 현재까지 확인된 피해 규모는 피해자 36명, 피해금 16억원 상당이며, 1인당 최대 피해 금액은 2억1000만원이다. 이들은 대부분 20~30대 남녀다. 최초 범죄집단을 구성한 캄보디아 프놈펜 지역 명칭 ‘툴콕’을 의미하는 ‘TK’파로 스스로를 부르며 총책을 정점으로 한 지휘·통솔 체계를 갖췄다. 조직 운영을 총괄하는 총책, 이를 보좌하며 실무 전반과 인력 공급 등을 담당하는 총관리자, 각 파트 팀원의 근태를 관리하고 지시하는 팀장으로 구성됐다. 또 자체적인 조건 만남 홈페이지를 제작하는 개발자, SNS에 광고 글을 게시하는 홍보팀과 광고를 보고 접근한 피해자를 기망하는 로맨스 2개팀으로 역할을 분담했다. ▲상호 가명 사용 ▲근무 중 휴대전화 금지 ▲사진 촬영 금지 ▲야간에는 커튼으로 외부 차단 ▲다른 부서와의 업무 내용 공유 금지 등의 규칙에 따라 생활하기도 했다. 중국 국적 100명 뒷배 이들은 총책이 마련한 건물에서 2인1조로 합숙했는데 프놈펜 툴콕 지역의 13층 건물을 사용하다가 지난 8월, 현지 단속을 피해 센소크 지역 7층 건물로 이전해 범행을 이어오던 중 현지 수사 당국에 의해 검거됐다. 이들은 경찰 조사에서 경제적 이익을 목적으로 SNS 구직 광고나 조직원을 통해 범죄단체에 가입했다고 진술했으며 사기임을 알고도 범행을 지속한 것으로 조사됐다. 피의자 대부분은 현지에서 구금된 중에도 총책이 이른바 관작업을 통해 자신들을 석방시켜 줄 것이라는 말만 믿고 대사관의 도움을 거절하고 귀국하지 않았다. 셀허브 사건 간부들은 타 사건에도 연루됐다. 지난 7일 캄보디아 바벳에 인접한 베트남 떠이닌 지역 국경 검문소 인근에서 30대 여성 B씨가 차 안에서 숨진 채 발견됐는데, 숨지기 직전까지 셀허브 간부와 같이 있었다. B씨의 사인은 마약 과다 투약이었다. 국내 정보·수사기관은 B씨가 셀허브에서 한국인 명의의 대포통장을 공급해 왔다고 보고 있다. A씨는 “셀허브에서 일할 사람을 모집하는 역할을 했던 B씨인데 통장을 팔려고 캄보디아에 도착한 한국인들을 유인해 범죄 단지로 팔아넘기고 유인하기도 했다”고 주장했다. 실제 정보·수사기관도 B씨에 의해 범죄 단지에 넘겨지는 피해를 입거나 유흥업소 일을 강요당한 사례를 확인하고 조사 중이다. 정보기관 관계자는 “사실상 마약을 강제로 과다하게 투약당한 살인사건이라는 첩보는 아직 확인 중”이라며 “특정 조직과 사이가 좋지 않았던 건 현지 경찰도 수사 중인 내용”이라고 말했다. 대개 조직폭력배 출신…지휘는 중국 조직이 맡아 40억 피해액 환수 불가능 “자금 세탁 끝났다” 첫 데이트하던 연인을 치어 여교사를 숨지게 했던 이른바 ‘대전 머스탱 교통사고’의 피의자도 셀허브 조직원으로 확인됐다. 피의자 전모씨는 2019년 2월10일 오전 10시14분 대전 중구 대흥동에서 면허도 없이 외제차를 운전하던 중 인도를 걷던 조모씨와 박모씨를 들이받아 박씨를 숨지게 하고, 조씨에게 중상을 입혔다. 전씨가 대여한 외제차는 불법 대여 차량이었다. 이 차량은 애초 대구에 사는 C씨가 자신 명의로 캐피털에서 월 115만원씩 주는 조건으로 60개월간 대여한 것이다. C씨는 사촌 안모씨와 함께 인터넷 중고거래 사이트에서 나모씨가 올린 ‘외제차 저렴하게 빌려줄 사람을 찾는다”는 글을 보고 접근, 한 달에 136만원씩 받기로 하고 대여한 머스탱 차량을 재임대했다. 나씨는 이렇게 빌린 머스탱 차량을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활용해 “외제차를 빌려준다”고 광고하며 또다시 대여업을 했다. 전씨는 나씨가 올린 이 글을 보고 일주일에 90만원씩 주기로 약속하고 머스탱을 빌려 운전했다. 매년 확정되는 범죄수익 추징금은 30조원을 넘지만 환수 금액은 1%에도 미치지 않는다. 법무부가 캄보디아에서 보이스피싱과 로맨스 스캠 등의 범죄로 발생한 현지 범죄수익을 국내로 환수하는 방안을 추진하기로 했지만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우선 법무부는 “캄보디아 내에서 벌어진 범죄 가운데 현재 국내에서 수사 중이거나 재판 중인 사건이 1차 현지 수사 의뢰 대상”이라며 “이후 국내에서 유죄 선고를 받으면 최종적으로 환수 대상이 된다”고 밝혔다. 국제형사사법공조 조약에 따르면 해외에서 발생한 범죄라 하더라도 피해자가 국내에 있고 피해액이 특정될 경우, 우리 정부가 해외에 범죄수익 환수를 요청할 수 있다. 우리나라는 2019년 캄보디아와 국제형사사법공조 조약을 체결해 2021년 정식 발효됐다. 주요 간부들 타 사건 연루 정보기관 관계자는 “범죄자 개인이 아닌 조직을 대상으로 한 범죄수익 환수 사례는 거의 없다. 특히 국내에서 수사와 재판이 끝나야 한다”며 “정부 차원에서 적극적으로 나서는 건 좋지만 이미 늦었다. 범죄조직 특성상 이미 코인이나 대포 통장으로 제3국에 은닉하거나 세탁을 하고도 남았을 시간”이라고 지적했다. 부장검사 출신 한 변호사도 “수사가 끝나고 유죄 판결이 나기까지 수년이 걸리는데 환수 절차는 이 모든 사법절차가 종료돼야 가능하다. 특히 조세회피처로 범죄수익을 옮겨놨다면 환수는 불가능에 가깝다”고 봤다. <hounder@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