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일본군 위안부를 소재로 한 영화 <귀향>은 상반기 극장가를 달군 흥행작으로 꼽힌다. 어느 영화든 속사정이 있겠지만 <귀향>의 개봉 과정은 눈물겨웠다. 감독의 근성, 배우와 스태프들의 재능기부, 국민들의 성원이 14년이라는 긴 제작기간 끝에 완성된 영화를 극장으로 불러냈다. 자신들의 이야기를 세상에 알려달라는 할머니들의 부탁에 그 긴 시간을 버텼다는 조정래 감독, 그를 만나봤다.
“죄송한데 옷 좀 갈아입겠습니다.”
조정래 감독은 들고 온 옷의 비닐을 빠르게 벗겨냈다. 그리고는 입고 온 점퍼를 벗고 양복 윗도리를 걸쳤다. 왼쪽 가슴 부근에는 세월호 리본 배지도 달았다. 인터뷰를 위해 양복을 세탁했다며 소년처럼 웃은 조 감독은 질문이 시작되자 진지한 얼굴로 변했다.
해외반응 ‘폭발’
조 감독에게 2016년은 ‘격동의 한해이자 감격스러운 해’였다. 지난 2월 <귀향> 개봉 후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졌기 때문이다. 그를 비롯한 제작팀은 지난 1년간 일본, 미국, 독일 등을 누비며 시사회를 열었다. 영화를 본 사람들이 그 자리서 또 다른 지역의 시사회를 요청하면서 연이어 이어진 일정이었다. 어디서나 반응은 뜨거웠다. 일본서 열린 시사회에선 “왜 이 영화를 일본서 개봉하지 않느냐”는 말도 들었다.
<귀향>은 2002년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의 쉼터, 나눔의 집을 방문했던 조 감독이 강일출 할머니가 그린 ‘태워지는 처녀들’을 접하면서 긴 여정을 시작했다. 넉넉하지 않았던 제작비 때문에 조 감독은 돈이 생길 때마다 촬영하고, 몇몇 장면을 유튜브에 공개하며 영화의 존재를 알렸다.
제작비는 뜻밖의 방향으로 채워졌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으로 시작한 크라우드 펀딩에 7만여명의 후원자가 몰렸고 12억원이라는 큰돈이 모인 것이다. <귀향>이 ‘국민이 만든 영화’라고 불리는 이유다.
어렵사리 개봉한 영화는 전국서 358만명의 관객을 끌어 모았다. 상영 기간 동안 이어진 폭발적인 흥행가도에 ‘기적’이라는 평을 받았던 <귀향>의 진가는 그 이후 더욱 두드려졌다. 나눔의 집을 비롯해 관련 시민단체들에 후원금, 자원봉사 문의 등이 늘어난 것이다. 영화를 통해 위안부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됐다는 사람들이 많아진 것, 그 자체가 <귀향>이 이뤄낸 또 하나의 기적이었다.
“개인적으로 영화를 한 번 상영할 때마다 할머니 한 분의 영혼이 고향으로 돌아온다고 굳게 믿고 있다”는 조 감독은 <귀향>의 20만회 상영을 목표로 하고 있다. 실제 일본군에 의해 강제로 끌려간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는 20만명으로 추산된다. 조 감독의 노력으로 올 한해 9만286명(20일 기준)의 할머니들이 영혼으로나마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는 “저희가 영화를 상영할 때마다 횟수를 세고 있다”며 “해외서 상영한 횟수까지 합치면 10만명의 할머님들께서 돌아오셨을 것”이라고 말했다. 조 감독은 할머니들의 혼을 고국으로 모셔오는 일뿐만 아니라 <귀향>을 통해 이루고 싶고, 이뤄내야 할 일이 많다고 전했다.
12·28 한일 위안부 합의 무효화도 그 중 하나다. 오는 28일이면 한국과 일본 간 위안부 합의가 이뤄진 지 1년이 된다.
조 감독은 “합의안서 제가 가장 화나는 부분은 ‘최종적, 불가역적’이라는 말”이라며 “전쟁범죄는 공소시효도 없고, 더군다나 위안부 문제는 여성·미성년자를 대상으로 이뤄진 인권범죄인데 끝이 어디 있단 말인가”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합의 이후 설립된 화해·치유재단은 피해 할머니들에게 현금 지급을 강행하고 있다. 조 감독은 “할머니들의 먼 친척 등 명확하지 않은 관계의 사람들에게 돈을 강제로 쥐어주고 우리는 돈을 드렸으니 할 도리는 다했다고 한다”며 비판했다.
조 감독은 “최순실이 대통령을 등에 업고 800억원을 훔칠 동안 정부는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을 100억원에 팔아 넘겼다”며 “위안부 합의는 진보·보수 문제가 아니라 이미 상식에서 벗어난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어 “일본 정부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의 몇몇 분들은 서른아홉 분의 할머니들이 얼른 돌아가시길 바라는 것 같다”며 “그들은 천벌을 받을 것”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그는 지난 11월 일본군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과 함께 시국선언에 동참하는 등 매주 광화문으로 달려 나가고 있다. 조 감독은 촛불집회에 등장하는 거대 소녀상 모형과 ‘위안부 합의 무효’를 외치는 시민들의 외침에 무한한 감사를 느낀다고 밝혔다.
“촛불을 든 시민들 가운데 세월호 참사로 죽어간 피같은 아이들에게 죄책감을 가진 분들이 많은 것 같다”며 “집회에 나온 많은 분들은 내가 이렇게 목소리를 높이는 것으로 억울하게 죽어간 사람들의 한을 풀어줄 수 있다고 믿지 않을까”라고 세월호를 언급했다.
그러면서 “명확하게 진실 규명이 되지 않은 점, 정부가 사안을 덮기에 급급하다는 점 등 세월호 참사와 위안부 문제는 닮은 점이 많다”며 “지금이라도 정부가 이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였으면 한다”고 호소했다.
영화 한 편으로 사회 곳곳에 큰 영향을 끼친 조 감독은 여러 상을 통해 그 진정성을 인정받았다. 그는 지난해 11월 받은 ‘김학순상’을 보여주며 “제가 가장 영광스러워 하는 상”이라고 했다. 김학순상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임을 최초로 증언한 고 김학순 할머니의 뜻을 기리고자 제정된 상이다.
조 감독은 제33회 가톨릭 대상서 충북 음성 꽃동네에서 28년간 봉사해온 조봉숙 간호사, 24년간 위안부 할머니들을 위해 활동한 여성운동가 김선실씨와 함께 문화 부문 수상자로 선정됐다. 그는 “앞으로 죽을 때까지, 지금 하고 있는 일을 목숨 걸고 하라는 뜻에서 주신 상이라고 생각한다”며 수상 소감을 밝혔다.
회사 대표이자 스태프들의 수장, 가정의 가장 등 짊어지고 갈 사람이 많은 그는 “해야 되는 일이니까”라는 말로 치열한 삶의 이유를 대변했다.
조 감독은 “사실 어떻게 이런 일을 계속 할 수 있느냐고 누군가가 물어주시면 송구스럽기도 하고 영광스럽기도 하다”며 “나눔의 집 관계자 분들이나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 분들은 평생을 바쳐 이 일을 하고 있다. 내게 <귀향>은 속죄의 의미다.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셔서 감사하다”고 겸손하게 답했다.
14년 만에 빛을 본 영화가 큰 성공을 거뒀지만 그의 행보에는 변화가 없을 것으로 보인다. 제작사 측은 영화로 거둔 수익에서 투자자들에게 돌려준 돈을 뺀 나머지를 나눔의 집 등에 기부했다. 지금까지 기부한 돈은 5억원에 이른다.
“영화를 통해 번 돈은 ‘소녀들의 핏값’이다. 그들을 위해 쓰는 게 당연하다”며 “영화 수익에 대한 비판적인 시선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행동으로 진정성을 보여드릴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무조건 열심히 하겠다”고 다짐했다.
수익금 기부
조 감독과 제작사 측은 내년 8·15광복절 개봉을 목표로 <귀향> 미공개 영상, 14년간의 제작 과정, 할머니들의 인터뷰 등을 담은 <귀향, 두 번째 이야기>(가제)라는 다큐멘터리 영화를 편집 중에 있다. 그는 마지막으로 “영화 제작 기간 내내 과분한 사랑을 받았다”며 “국민들께서 저희를 도와주신 의미를 평생 가슴에 새기고 살아가겠다”고 감사 인사를 잊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