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인물> 임기 마친 정의화 전 국회의장

‘의리!’ 끝까지 소신 지킨 의장님

[일요시사 취재1팀] 박창민 기자 = 정의화 전 국회의장이 2년간 국회의장 임기를 마치고 물러났다. 임기 동안 입법부의 수장으로서 그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했다는 게 중론. 나름의 소신을 갖고 공무를 수행했다. 그는 쓴소리도 아끼지 않았다.

정의화 전 국회의장은 19대 국회 후반기 의장으로 지난 29일부로 임기가 종료됐다. 정 전 의장은 지난 25일 퇴임 기자회견서 그동안의 소외를 밝혔다. 정 전 의장은 “낡은 정치질서를 타파하고 새로운 정치 질서를 열어나가는 길에 작은 밀알이 되고자 한다”고 말했다.

“정치 새 희망
빅텐트 편다”

정 전 의장은 이날 기자회견서 새로운 정치 세력을 구축하겠다는 의지를 내비쳤다. 그는 “협치와 연대의 정치개혁, 국민 중심의 정치 혁신에 동의하는 우리 사회의 훌륭한 분들과 손을 잡겠다”며 “정치에 새로운 희망을 만들 수 있는 ‘빅텐트’를 함께 펼치겠다”며 향후 정치적 행보를 밝혔다.

정 전 의장은 지난 26일, 자신이 이사장을 맡은 사단법인 ‘새한국의 비전’ 출범을 하루 앞두고 개최한 이날 기자회견서 중도세력 규합을 통한 새로운 정치 결사체 추진을 피력했다. 그는 “국민 화합과 통합을 이룰 수 있고, 초당적 협력을 이끌어내며 갈등을 녹여낼 수 있는 새로운 정치질서, 협치의 플랫폼이 필요하다”며 “4·13 총선에 드러난 민심은 ‘정치를 바꾸라’는 것”이라고 언급했다.

낡은 정치구조 타파를 위한 개헌과 선거제도 개혁의 필요성도 빼놓지 않았다. 그는 “시대의 요구가 바뀌면 헌법을 바꾸어내는 것이 우리의 의무”라며 “20대 국회 출범 직후 개헌 논의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어 “현행 소선거구제는 다수의 사표가 발생할 수밖에 없고 고질적인 지역 구도를 깨기 어려운 심각한 단점이 있다”며 20대 국회서 선거제도 개혁을 이뤄야 한다고 주문했다.


국회 상임위 차원의 상시 청문회를 골자로 한 국회법 개정안에 대한 박근혜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 가능성에 대해서는 “사실이 아니기를 바란다”며 부정적인 입장도 표명했다. 그는 “상임위 청문회 활성화 부분을 두고 일부에서 ‘행정부 마비법’이라는 비판이 있다고 들었다”며 “국정을 감시하고 특정 국정사안을 조사하는 것은 헌법 61조에 규졍돼 있는 국회의 당연한 책무”라고 강조했다.

2년간 입법부 수장 면모 유감없이 발휘
낡은 정치질서 타파…새정치 밀알 역할

이어 “국민의 편에 서서 올바르게 일하라고 만든 법을 ‘귀찮다’ ‘바쁘다’는 이유로 반발하는 것이야말로 민주주의 원칙을 훼손하는 일”이라며 “과거의 일부 청문회에서 나타났던 부정적 측면만 강조하며 정책 청문회 활성화 자체에 반대하는 것 또한 ‘구더기 무서워 장 못 담그겠다’는 식의 회피성 주장일 뿐”이라고 말했다.

기자회견 말미에도 “낡은 정치를 바꾸려면, 정치의 틀 역시 바꿔야 한다”며 현시대를 극복해야 할 구조적 전환기라고 평가했다.
 

정 전 의장 발의로 19대 국회가 마지막으로 통과시킨 상시청문회법을 두고 정치권에서는 “20대 국회의 예고편이자, 정계 개편의 ‘시금석’”이라고 입을 모은다.

거대 야당이 결의하고 청와대가 거부하는 모양새가 되면서 여소야대가 된 20대 국회의 예고편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청와대는 일단 박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를 비롯해 상시청문회법을 무력화할 다양한 대안을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박 대통령의 아프리카·유럽 순방 중 거부권 행사가 이뤄질 가능성도 제기된다. 여당도 청와대 입장을 적극 거들고 있다. 이처럼 정부·여당이 반대하는 법안이 과반수가 넘는 야 3당의 결의로 국회를 통과하면서 대통령 거부권 행사가 반복될 수 있는 게 ‘20대 국회 예고편’이라는 말이 나온다.


정 전 의장은 여권 내 비박계, 유승민 의원 등이 주도하는 정계개편의 ‘시금석’이 될 수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당장은 아니지만 이른바 ‘제3지대’를 지향하는 세력이 결집할 경우, 정국에 미칠 파괴력을 이미 보여줬다는 것이다. 

책임형 리더
중립자 역할

정 전 의장은 역대 국회의장 중에서는 존재감이 큰 편이었다. 국회선진화법 이후 거의 필수적으로 여·야 합의를 거친 후 본회의에 의안을 상정하게 됐는데,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는 경우가 잦아지다 보니 본회의 참석을 끝까지 기다리는 등 정치력을 잘 발휘했다는 평가다. 오히려 정부와 여당에서 바라는 신속 법안 처리가 이뤄지지 않아 원성을 사는 편이었다.

경제선진화법 입법 문제로 박 대통령이 조속한 통과를 요구했지만, 그는 “직권상정은 국가비상상태에서만 가능하다. 내가 성을 바꾸지 않는 이상 직권상정은 없다”며 완강히 거부의사를 밝혔다. 사실상 정면충돌을 불사한 것이었는데, 그동안 존재감이 적었던 국회의장이 새삼 주목받기도 했다.

정치적 노련함이 돋보였던 것은 '직권상정 거부사건' 뿐만이 아니었다. 지난해 세월호 특별법 합의 과정 여야가 모두 참석한 국회 본회의를 여는 뚝심도 보여줬다. 이 과정에서 여야 양쪽에서 비판을 받기도 했지만 본회의가 열리면서 당시 정 의장의 대화와 타협, 합의정신이 성과를 냈다는 평가가 나왔다.

하지만 지난 2월23일, 국민보호와 공공안전을 위한 테러방지법은 직권상정했다. 이는 본인의 말을 바로 뒤집는 행위로 테러방지법의 정당성 문제와 엮여 논란이 됐다.

청문회법 논란
그의 소신은?

정 전 의장은 미세 뇌혈관수술의 대가이자 세계가 인정한 의학박사기도 하다. 의사로서뿐만 아니라 병원원장으로서 일자리 1200개를 창출해낸 성공한 CEO로 이름을 날렸다. 1974년 초대 병원장인 김원묵 박사가 타계하고, 1978년 2월25일 정 전 의장이 4대 병원장으로 취임했으며, 1985년 3월 김원묵 기념 봉생병원을 종합병원으로 승격시켰다.

 

정 전 의장은 1948년 경남 창원군 웅동면 소사리(현재 창원시 진해구 편입), 웅동중학교 교장 사택에서 태어났다. 정 의장은 1955년 여름, 부산 건국중학교 교장으로 부임한 아버지를 따라 부산 중앙초등학교로 전학하면서 처음으로 부산 땅을 밟게 된다.

고교 2학년 때 형님의 권유로 시작한 사진은 한국일보 국제사진살롱전에 입선을 하는 등 각종 사진전에서 수상하는 수준에 이르렀다. 대학시절 부산 대학생으로서는 처음으로 개인전을 열만큼 실력을 인정받기도 했다. 당시 학보사 사진기자로 활동하면서 한국사회에 대한 과학적 인식과 합리적 대안을 모색하는 안목을 키우기도 했다.

지금도 차에 항상 카메라를 비치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해외출장을 가거나 지방에 갈 때는 전문가용 카메라를 갖고 다니며 틈만 나면 카메라 셔터를 누르는 그다. 세계 각국을 돌며 직접 찍은 사진 12장으로 달력도 만들었다. 실제로 그의 별명은 ‘사진 찍는 정치인’.

여야 안가르고 화합형 스타일
역대 의장 중 존재감 돋보여


극도로 악화된 지역감정 해소를 위해 뜻 있는 의료계와 학계 인사들과 영호남민간인협의회를 만드는 등 NGO 활동에도 적극나섰다. 1996년 그는 15대 총선을 앞두고 신한국당에서 단행한 공천에 발탁돼 정치계에 뛰어들었다. 초선시절부터 8년 연속 국감 베스트 의원에 선정될 만큼 전문성도 인정받았다.

지역감정 해소와 영호남 화합을 위해 1991년부터 헌신해온 정 전 의장은 2004년부터 한나라당 내 ‘지역화합특별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호남 예산확보, 현안 과제 해결 등 당내 ‘호남 창구’ 역할을 톡톡히 해왔다.

특히 여수세계박람회유치특별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하면서 여수엑스포 유치 성공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2008년 1월에는 여수 명예시민증도 받았다. 이어 2008년 11월엔 영호남 화합과 교류증진에 기여한 공로로 한나라당(새누리당의 전신) 의원 최초로 광주 명예시민으로 추대됐다. 2009년 2월엔 ‘영남 출신 정치인으로는 드물게 호남 지역 발전을 위해 적극적으로 일한 공적’으로 조선대학교에서 명예정치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와 함께 2015광주유니버시아드대회 유치위원장으로 2009년 5월 광주유치를 이뤄냈는데, 정부와 국회의 적극적인 지원을 이끌어 낸 그의 노력이 유치 성공으로 이어졌다는 평가를 받았다. 2010년 1월 대회 조직위원장으로 추대되면서 2015광주하계유니버시아드대회 성공개최의 토대 마련을 위해 적극적으로 앞장섰다.

정 의장은 평소 “조그마한 한반도가 남북으로 갈려있는 데다 동서마저 간극이 있으면 우리나라에 미래가 없다”는 소신으로 영호남 화합을 위해 노력해왔으며, 이러한 배경에는 영호남 화합이 남북통일의 선결과제라는 확고한 신념이 깔려 있다.

“타협은 없다”
앞으로 행보는?


정 전 의장은 당내 비주류였다. 자신의 정치철학과 원칙에 부합되지 않으면 결코 타협하지 않는 탓에 계파 간 줄서기 풍토를 외면, 당내 비주류로 적잖은 설움을 겪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난 19대 국회 후반기 국회의장 경선에 출마해 당선됐다. 당시 새누리당 의원총회에서 열린 선출 투표에서 총 투표수 147표 가운데 101표를 획득해 46표에 그친 황우여 전 새누리당 대표에 압승을 거뒀다.

옛 친이(친 이명박)계를 포함한 비주류 측과 초선 의원들로부터 몰표를 받아 친박(친 박근혜)계 주류에서 지원한 것으로 알려진 황 전 대표를 상대로 예상 밖의 압승을 거뒀다. 정 전 의장은 이명박정부 시절 친이(친 이명박)계 주류로 분류됐지만, 친박계와도 원만한 사이를 유지해 당내 온건파로 불린다.


<min1330@ilyosisa.co.kr>

 

[차기 국회의장 누구?]

20대 국회 출범을 앞두고 국가 의전서열 2위인 국회의장을 누가 맡을지 정가의 관심이 쏠리고 있다.

입법기관 수장인 국회의장은 관례상 원내 제1당에서 맡는다. 임기는 국회법(제9조)상 전반기와 후반기로 나눠 각각 2년씩이다. 의장은 다수당이 내부 경선을 통해 후보를 추천하고 본회의에서 무기명 표결을 통해 확정하지만, 일반적으로는 단수 후보 추천 뒤 본회의에서 추인하는 형식을 취하는 게 관행이다.

이번 총선 결과로 볼 때 여당인 새누리당은 제1당 자리를 더불어민주당에 내줘 국회의장직을 내놓아야 할 형편이다.

더민주의 경우 국회의장 후보군은 6선에 성공한 문희상·이석현·정세균 의원 등이 꼽힌다. 더민주를 탈당한 이해찬 의원은 7선이지만, 복당 여부가 남아있어 사실상 후보군에서 밀리는 분위기다. <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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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세보다 무서운 산재와의 전쟁

탈세보다 무서운 산재와의 전쟁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이재명 대통령이 ‘산재와의 전쟁’을 선포했다. 건설 현장에서 근로자가 사망하는 사건을 줄이겠다는 취지다. 이 대통령이 칼을 휘두르자 기업은 납작 엎드렸다. 이 대통령의 행보를 보는 시각은 엇갈린다. 산재 사망사고가 끊이지 않는 만큼 단호한 조치가 필요하다며 환영하는 의견과 구조적 문제를 뒤로하고 기업 ‘잡도리’만 하고 있다는 의견 등이다. 건설업계에 칼바람이 불고 있다. 미국발 관세나 국내 경기 문제가 아니다. 산업재해(이하 산재)가 건설 현장을 뒤흔드는 중이다. 대통령은 여러 현안 중 산재로 인한 사망사고 근절을 국정 과제 첫머리에 올린 듯한 모습이다. 대통령 한마디 이재명 대통령이 반복되는 산재 사망사고의 고리를 끊겠다고 나섰다. 산재 사망사고가 발생한 기업을 법과 제도를 통해 처벌하겠다고 선언했다. 발언 수위도 나날이 세지고 있다. 본보기가 된 기업은 대통령이 일으킨 칼바람을 온몸으로 맞는 모양새다. 지난 5월 고용노동부가 발표한 1분기 ‘산업재해 현황 부가 통계’에 따르면 올해 1~3월 재해 조사 대상 사고 사망자는 총 137명(잠정)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138명)보다 1명(0.7%) 줄었다. 사망사고 건수도 같은 기간 136건에서 129건으로 7건(5.1%) 감소했다. 업종별로는 제조업이 29명으로 지난해보다 2명, 기타 업종(건설업과 제조업 이외 업종)이 38명으로 6명 감소했지만 건설업은 71명으로 오히려 7명 늘었다. 노동부는 부산 기장군 건설 현장 화재와 서울-세종고속도로 교량 붕괴 등 대형 사고의 영향으로 건설업 사망자 수가 증가했다고 분석했다. 지난 2월14일 부산 기장군 반얀트리 리조트 신축 공사장에서 불이 나 6명이 숨졌다. 또 같은 달 25일, 경기도 안성시 서울-세종고속도로 건설 현장 교량 상판 구조물이 붕괴해 4명이 목숨을 잃는 사고가 일어났다. 규모별로는 상시 근로자 50인(건설 업종은 공사 금액 50억원) 미만 사업장에서 올해 1분기 사망자는 83명으로 지난해보다 5명(6.4%), 사망사고 건수는 83건으로 7건(9.2%) 늘었다. 반면 50인 이상 대형 사업장과 대규모 공사 현장에선 사망자 54명, 사고 건수 46건으로 각각 6명, 14건 줄었다. 사망사고 유형별로는 ‘추락’ 62명, ‘끼임’ 11명, ‘물체에 맞음’ 16명으로 지난해와 비교해 각각 1명, 7명, 5명 감소했다. 화재와 폭발로는 10명, ‘붕괴’ 사고로는 11명이 목숨을 잃었다. 지자체별로는 경기(31명), 서울(17명), 경북(15명), 부산·전남(12명), 경남(11명), 충남(9명), 강원·울산(6명) 순으로 많았다. 산재로 인한 사망은 건설 현장에서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사고다. 정부는 산재 사망사고를 줄이기 위한 각종 대책을 내놨다. 2022년 1월부터 시행된 중대재해처벌법(이하 중처법)도 그중 하나다. 중처법은 근로자의 사망사고 등 중대 재해가 발생했을 때 기업의 경영 책임자 등이 안전 보건 관리 체계 구축 등 의무를 위반한 것으로 확인되면 처벌하도록 하는 내용이 골자다. 취임 이후부터 직접 챙겨 국정 운영 계획에도 포함 문제는 실효성이다. 중처법이 시행된 이후에도 건설 현장에서 근로자가 죽는 일이 계속 일어나고 처벌은 ‘솜방망이’ 수준에 그친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았다. 결국 이 대통령이 칼을 빼 들었다. 이 대통령은 지난 12일 “비용을 아끼기 위해 누군가의 목숨을 빼앗는 것은 일종의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 또는 사회적 타살”이라고 비판했다. 필요하면 법을 개정해서라도 ‘산재 공화국’이라는 오명을 벗겠다는 뜻도 밝혔다. 이 대통령은 이날 국무회의에서 “일상적으로 산업 현장을 점검해서 필요한 안전조치를 하지 않고 작업하면 엄정하게 제지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며 “제도가 있는 범위 내에서 할 수 있는 최대의 조치를 해달라”고 주문했다. 사고 위험이 큰 업무를 하청과 외주를 통해 해결하는 ‘위험의 외주화’ 현상에 대해서도 지적했다. 이 대통령의 산재 사망사고 근절 ‘드라이브’는 점진적으로 거세지고 있다. 초기에는 주무 부처에 대책을 요구했다면 최근에는 직접 목소리를 내고 움직이는 식이다.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산재를 줄이라고 지시했는데도 불구하고 사망사고가 이어지자 특유의 행동력을 보이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실제 이 대통령이 고용노동부에 산재 관련 종합 대책을 주문한 뒤에도 ▲인천 맨홀 작업 노동자 질식사 ▲포스코이앤씨 노동자 끼임사 ▲경기 의정부 아파트 신축 현장 노동자 추락사 등의 사고가 일어났다. 불과 한 달 새 일어난 일이다. 지난달 6일 인천 계양구 병방동의 한 도로 맨홀 안에서 지하 시설물 조사 작업 중이던 노동자 1명이 의식을 잃고 1명은 실종됐다. 이들은 결국 사망했다. 조사 결과 이 사고는 용역 계약 위반에 따라 허가 절차 없이 진행하다가 발생한 인재로 드러났다. 법으로도 안 됐는데… 숨진 근로자는 산소 마스크 등 안전 장비를 제대로 착용하지 않은 채 작업하다 유독가스에 중독된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이 대통령은 “현장 안전 관리에 미흡한 점이 있었는데 철저히 밝히고 법령 위반 여부가 있었는지를 조사해 책임자를 엄중히 조치하라”며 “후진국형 산업재해가 다시는 발생하지 않도록 현장 안전관리를 정비하고 사전 지도·감독을 강화하는 등 관련 부처도 특단의 조처를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지난달 28일 포스코이앤씨가 시공하는 경남 함양-울산고속도로 의령나들목 공사 현장에서 사면 보강 작업을 하던 60대 근로자가 천공기(지반을 뚫는 건설기계)에 끼어 숨지는 사고가 일어났다. 포스코이앤씨 시공 현장에서만 올해 들어 4번째 일어난 사망사고다. 지난 1월 경남 김해 아파트 신축 현장 추락사고, 경기도 광명 신안산선 건설 현장 붕괴사고, 대구 주상복합 신축 현장 추락사고 등도 줄을 이었다. 이 대통령은 “똑같은 방식으로 사망사고가 나는 것은 결국 죽음을 용인하는 것이고 아주 심하게 얘기하면 법률적 용어로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이라고 질타했다. 그러면서 “(산재 사망사고가 나면) 여러 차례 공시하도록 해서 투자를 안 하고 주가가 폭락하게 (해야 한다)”고도 말했다. 여름휴가를 마치고 복귀 첫 일성도 산재 관련 발언이었다. 이 대통령은 “앞으로 모든 산업재해 사망사고는 최대한 빠른 속도로 대통령에게 직보하라”고 지시했다. 산재 사망사고를 직접 챙기겠다는 의지를 다시 한번 천명한 것이다. 사과문 내고 또 반복되다 지난 9일 강유정 대통령실 대변인을 통해 전해진 이 대통령의 발언은 전날인 8일 경기 의정부 신축 아파트 공사 현장에서 안전망 철거 작업을 하던 50대 근로자가 6층 높이에서 떨어져 숨진 사고가 영향을 미쳤다. 이 대통령이 선포한 ‘산재와의 전쟁’에 기업은 바짝 얼어붙은 상황이다. 지난달 25일 경기 시흥 SPC 삼립 공장을 방문해 ‘중대산업재해 발생 사업장 현장 간담회’를 열었다. 해당 공장은 지난 5월 50대 여성 노동자가 작동 중인 컨베이어벨트에 끼어 사망했고 2022년과 2023년에도 여성 노동자가 각각 소스 교반기와 반죽 기계에 끼어 숨지는 등 중대 산재가 빈번하게 일어났던 곳이다. 이 대통령은 이날 간담회에서 SPC 근로자의 노동 시간 등을 자세히 물었다. 그러면서 “(산재가) 심야에 대체적으로 발생하고 12시간씩 4일간 일하다 보면 사실 심야 시간에 힘들다. 주의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며 “심야 장시간 노동 때문에 생긴 일로 보여진다”고 말했다. 이 대통령의 지적에 SPC 회장을 비롯해 그룹 관계자들이 쩔쩔맨 것으로 전해졌다. SPC그룹은 이 대통령이 다녀간 지 이틀 만인 지난달 27일, 8시간 초과 야근을 폐지하겠다는 대책을 내놨다. 제품 특성상 필수적인 품목 외에는 야간 생산을 최대한 없애 공장 가동 시간을 축소하겠다는 것이다. 또 주간 근무 시간도 점진적으로 줄여 장시간 근무로 인한 피로 누적, 집중력 저하, 사고 위험 등을 사전에 차단하겠다고 밝혔다. 포스코이앤씨는 지난달 29일 담화문을 내고 고개를 숙였다. 정희민 전 대표이사는 “어제(28일) 사고 직후 모든 현장에서 즉시 모든 작업을 중단했고 전사적 긴급 안전 점검을 실시해 안전히 확실하게 확인되기 전까지 무기한 작업을 중지하도록 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협력업체를 포함한 모든 근로자의 안전이 최우선 가치가 되도록 필요한 자원과 역량을 총동원해 근본적인 쇄신 계기로 삼겠다”며 “또다시 이런 비극이 발생하는 일이 없도록 사즉생의 각오와 회사의 명운을 걸고 안전 체계의 전환을 이뤄내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정 전 대표의 사과는 엿새 만에 또다시 일어난 사고로 빛이 바랬다. 지난 4일 오후 경기 광명시 옥길동 광명-서울고속도로 민간투자사업 제1공구 현장에서 미얀마 국적 30대 근로자가 감전돼 심정지 상태로 발견됐다. 이 근로자는 병원으로 이송된 지 8일 만인 지난 12일 의식을 회복했다. 높아진 발언 수위·제재 조치 “왜 기업만 잡도리?” 의견도 정 전 대표는 사의를 표명하고 물러났다. 연이어 산재사고가 일어난 포스코이앤씨는 ‘본보기’가 될 가능성이 커진 상황이다. 일단 이 대통령은 포스코이앤씨에 대한 건설 면허 취소, 공공 입찰 금지 등 법률상 가능한 방안을 모두 찾아서 보고하라는 지시를 내린 바 있다. 국내 건설 면허 취소는 현행 건설산업기본법상 최고 수위의 징계다. 1994년 성수대교 붕괴 책임이 있던 동아건설산업에 내려진 사례가 유일하다. 건설 면허가 취소되면 신규 사업을 할 수 없고, 다시 면허를 취득한다고 해도 수주 이력이 없기 때문에 관급공사를 따내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다. 경찰은 사고 관련 수사 전담팀을 만들고 고용노동부 안양지청과 함께 포스코이앤씨와 하청업체에 대한 압수수색에 돌입했다. DL건설도 대표이사를 비롯한 임원진 전원이 공사 현장에서 발생한 사망사고에 책임을 지고 일괄 사표를 제출하는 등 납작 엎드렸다. 특히 이 대통령이 휴가에서 돌아와 산재 관련 발언을 한 직후 터진 사고여서 충격파가 더 컸다. DL건설에서 사표를 제출한 임직원은 80여명, 공사를 중단한 현장은 44곳에 이른다. 이재명정부는 산재사고로 인한 사망자 비율을 2030년까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 수준인 1만명당 0.29명까지 끌어내리는 방안을 추진하기로 했다. 지난해 우리나라에서 발생한 산재로 인한 사망자 비율은 1만명당 0.39명으로 OECD 평균을 크게 웃도는 실정이다. 이 같은 내용은 ‘이재명정부 국정 운영 5개년 계획’에 포함됐다. 이 대통령이 지난달 수석보좌관 회의에서 “전 세계에서 또는 OECD 국가 중 산업재해율, 사망재해율이 가장 높다는 불명예를 이번 정부에서 반드시 끊어내겠다”고 의지를 드러낸 부분을 국정과제로 담은 것이다. 구조 문제 나 몰라라 일각에서는 이 대통령이 지나치게 건설업계만 잡고 있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관련 법과 제도가 시행되고 있는데도 사망사고가 끊이지 않는다면 구조적인 문제도 살펴봐야 한다는 것이다. 수주 경쟁이 과열되면서 저가 입찰이 늘고 안전관리에 소홀해지는 점이 산재로 이어지는 식의 고리를 끊어야 진정한 의미의 ‘근절’이 이뤄질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jsjang@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