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시사=사회팀] 강현석 기자 = 도자에 그림을 그려 넣는다. 폭신한 흙이 물감을 빨아들인다. 꽃과 동물이 한데 어우러져 도자의 고운 선에 아름다움을 더한다. 도자공예가 정명훈 작가는 독특한 핸드프린팅으로 다양한 작품세계를 선보이고 있다. "내 작업이 다른 사람에게 작은 기쁨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말한 조 작가. 그의 그림은 마음의 위로이자 누군가에게는 가슴 따뜻한 선물이다.
"인터뷰를 별로 안 좋아해요." 도자공예가 정명훈 작가는 무척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나긋나긋하면서도 분명한 목소리는 그의 꼼꼼한 성격을 대변했다.
서울 성동구에서 작은 공예샵을 운영하고 있는 그는 일본에서의 유학생활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와 일본어 강사로 10년 넘게 일했다. 그리고 몇 년 전부터는 자신의 본래 전공인 도자로 돌아왔다. 정 작가는 "흙이 좋아서 다른 걸 한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었다"고 말했다. 그에게 '흙'을 물었다.
도자에 그림
"흙을 무엇무엇이라고 정의내리는 건 안 했으면 해요. 모든 단어는 상황과 연령에 따라 변한다는 생각을 하거든요. 가령 엄마란 단어도 어릴 때는 보살펴주는 존재고, 청소년 때는 잔소리꾼 혹은 고마운 사람, 성년 때는 친구, 나이 들어서는 여린 분 등으로 변하는데 한 마디로 정의내리면 고유한 단어가 갖고 있는 풍부한 느낌, 가변성을 가로막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요. 흙도 마찬가지겠죠. 다만 흙을 좋아한다는 것만은 말씀드릴 수 있겠어요."
정 작가는 본인의 표현대로 전업 작가가 되기 전까지 여러 갈래 길을 돌아왔다. 그러나 인생의 다양한 경로에서 어느 하나 소홀히 하지 않았다. 타인에게 실례가 되는 일을 할 수 없었던 까닭이다. 대학에서 배울 때는 물레도 차고 도자도 직접 빚었던 그다.
하지만 최근 정 작가는 도자에 그림을 그려 넣는 일을 하고 있다. 표현 면에서는 담백하고 색감적인 측면에서는 수려한 그의 그림들은 은은하면서도 고급스러운 인상을 주고 있다.
"제가 하고 있는 작품들은 일단 식기고요, 여자가 많이 쓰고, 장식도 되잖아요. 생활 속에 있는 작품이다 보니 곁에 있을 때 좀 더 친숙한 도자였으면 하고. 기분이 안 좋았을 때는 제 그림을 보고 조금이나마 위로가 됐으면 좋겠어요. 어떤 면에서는 사람들 간의 연결고리. 여자들끼리 수다를 떤다고 하면 '내가 이런 걸 사봤는데 좋더라' '그러니? 나도 한 번 써봤는데 다른 게 더 좋던데' 이런 식으로 소소한 이야깃거리가 됐으면 해요."
정 작가는 유독 손이 많이 가는 작업을 하고 있다. 찻주전자에 한 번 그림을 그리면 짧게는 3일에서 길게는 1주일까지 가는 경우도 있다. 주변에서 "그러면 인건비도 안 나온다"고 걱정하지만 정작 자신은 흡족하지 않은 작품을 보여주지 않겠다는 생각이다.
도자에 핸드프린팅…담백한 표현 수려한 색감
꽃 나비 고양이 등 친숙한 소재로 '맑은 그림'
"손이 자꾸 가요. 다른 사람들은 빨리 쉽게 가라는데 하다보면 부족한 게 보여요. 한 번은 어떤 사람이 선물용으로 사갔다가 마음에 안 든다면서 작품을 도로 가져왔죠. 소박맞고 온 것 같았어요. 하루 종일 우울했죠. 돈 보다는 가져간 사람이 '정말 예뻐요'하는 게 보람이거든요. 얼마 전에는 무릎 인대가 늘어났어요. 너무 앉아 있다 보니 근육이 약해진 거죠. 몸에 무리가 가지만 사물에도 '기'가 있다고 하잖아요. 될 수 있으면 좋은 생각을 갖고 정성을 다해야 작품을 사가는 사람도 좋은 기를 받을 수 있어요."
정 작가의 그림은 꽃을 비롯한 식물, 나비나 고양이와 같은 동물 등이 주를 이룬다. 세련되면서도 아기자기한 구성이 돋보이는데 간혹 정 작가는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주기 위해 특별한 작품을 만들기도 한다.
"저번 크리스마스 때는 기분전환으로 루돌프를 그려봤어요. 콘셉트는 '루돌프, 삐뚤어질테다'였는데 반응이 꽤 좋았죠. 루돌프가 썰매를 끌지 않는 모습? 익살스러운 그림이었는데 사람들이 재밌어했어요. 전 맑은 그림이 좋아요. 순수한 건 금방 질린다고 하는데 정말 힘들 때 착한 것들이 절 구원해준다는 것을 느낀 적이 있어요. 그래서 제 작품도 순수했으면 좋겠다고 하는 거죠."
세련된 구성
정 작가는 그림을 그릴 때 일명 '흙물감'을 선호한다. 보는 상대에게 따뜻한 느낌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언젠가 정 작가는 자신의 공방에서 그림뿐만 아니라 도자도 손수 만드는 날을 꿈꾸고 있다. 자연의 흙에 생명을 불어넣고 이름을 붙여주는 일이다. 흙을 만지고 있는 그의 손에서 형언할 수 없는 온기를 느꼈다.
[정명훈 작가는?]
▲일본 가나자와미술공예대학원 졸업
▲교토 마로니에 개인전 등 다수
▲아사히 여류도예전 등 그룹전 다수
▲타이완 golden ceramics award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