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제의인물> '삼성경영' 25주년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

  • 김민석 ideaed@ilyosisa.co.kr
  • 등록 2012.11.26 15:0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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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경제 이끈 초일류 혁신과 도전

[일요시사=사회팀] "삼성을 세계적인 초일류기업으로 성장시키겠습니다."
삼성의 역사를 되돌아보면 25년 전 이건희 회장의 약속과 만나게 된다. 당시만 해도 그의 원대한 포부가 실현될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오늘날 삼성은 전 세계 9위 기업으로 우뚝 솟았다. 반도체·TV·휴대폰 부문은 명실상부 세계 정상에 올랐다. 이것을 일군 이 회장 경영은 혁신과 도전 그 자체였다. 이건희 회장의 취임 25주년을 맞아 한국경제 발전을 이끈 이 회장의 발자취를 집중 조명해봤다.

"책임경영과 공존공영의 원칙을 철저히 지켜 사업보국, 인재제일, 합리추구의 경영이념을 실현해 나갈 것입니다. 미래 지향적이고 도전적인 경영을 통해 삼성을 세계적인 초일류 기업으로 성장시킬 것입니다."

지금으로부터 25년 전 1987년 11월19일 삼성은 긴급 사장단 회의를 소집했다. 향년 78세를 일기로 삼성 창업주인 호암 이병철 회장이 별세하자 사장단들은 이건희 부회장을 제2대 삼성그룹 회장으로 추대했다.

1987년 12월1일 호암아트홀에서 열린 신임 회장 취임식에서 이 회장은 삼성에 가장 먼저 입사한 최관식 삼성중공업 사장으로부터 사기를 넘겨받아 힘차게 흔들었다.

브랜드 가치
전 세계 9위

이 회장은 취임한 지 3개월, 삼성 창립 50주년을 맞은 자리에서 제2의 창업을 선언했다. 그는 자율경영, 기술 중시, 인간존중 등을 창업정신으로 내세웠다. 그로부터 25년, 위기를 정면 돌파하는 혁신과 현실에 안주하지 않는 도전정신이 내수기업에 불과했던 삼성을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시켰다.


삼성은 혁신에 혁신을 거듭해 브랜드 가치 전 세계 9위 기업으로 우뚝 솟았다. 매출 규모만 놓고 봐도 25년 전과 비교해 39배 성장했다. 2100억원 수준이었던 순이익도 20조3000억원으로 늘었다. 또 해외 직수출 규모는 1987년 63억달러에서 25배나 성장한 1567억달러에 이른다. 이 모두 25년 만의 변화다. 이렇듯 수치만 봐도 이 회장을 '경영의 신'이라 일컬을 만하다. 특히 삼성의 '반도체 도전'은 우리나라 정보기술 산업을 일으킨 원동력으로 평가받고 있다.

세계일류 기업으로 성장한 삼성은 전자·IT 산업을 주도하고 있다. 삼성전자는 1992년 이후 반도체 D램 부문 1위 자리를 내주지 않았다. 휴대폰 시장에서는 갤럭시 시리즈를 내세워 노키아, 모토로라, 소니 등을 따돌렸고 이젠 애플의 아성도 뛰어넘고 있다. TV와 LCD 산업 역시 삼성이 꽉 쥐고 있다. 명실상부 삼성은 한국의 대기업을 넘어서 세계 초일류 기업으로 자리매김 한 것이다.

이 회장이 삼성을 이끌어가기 시작한 80년대 후반과 90년대 초반은 새로운 글로벌 환경이 도래하던 때였다. 소련의 붕괴와 중국의 개방으로 기업의 활동 무대가 전 세계로 확장됐고, 아날로그 시대에서 디지털 시대로 전환되고 있었다. 과거의 방법과 시스템으로는 새로운 글로벌 시대에 대응할 수 없다는 것이 이 회장의 생각이었다.

삼성이 근본적인 수술에 나서게 된 사건은 삼성전자의 일본 현지법인 기술고문이 기술개발 수준부터 경영자의 자세, 직원들의 근무태도에 관한 것까지 삼성의 문제점을 뼈아프게 지적하면서부터다. 특히 삼성전자 디자인센터에서 근무하던 산업디자인 고문 후쿠다의 보고서를 사업본부장이 묵살한 것을 뒤늦게 알게 되면서 혁신은 시작됐다.

'세계 초일류기업' 25년 전 약속 지켜
"처자식 빼고 다 바꿔라" 혁신의 리더십

이 회장은 1993년 6월 프랑크푸르트로 떠나는 비행기 안에서 우연히 이 보고서를 읽고 격노했다. 여기에 1981년 이후 자신이 각사로 별도 지시한 284쪽 분량의 지시문이 대부분 실행되지 않은 것을 알고 통탄했다. 이 회장의 "이대로는 안 된다. 처자식 빼고 다 바꾸라"는 신경영 선언이 나온 것은 이 때문이다.

이 회장은 즉시 사장단과 핵심간부를 독일 프랑크푸르트까지 불러 호통 쳤다. 그는 "삼성전자는 진행성 암에 걸려 있고, 삼성중공업은 영양실조, 삼성건설은 당뇨병, 삼성종합화학은 애초부터 설립해서는 안 되는 회사, 삼성물산은 삼성전자와 삼성종합화학의 중간쯤 되는 증상을 보이고 있다"고 진단했다. 이는 계열사 사장단에게 충격을 줘 대대적 혁신을 일구기 위함이었다.


당시 LA에서 도쿄, 다시 독일 프랑크푸르트로 거치며 장시간 회의를 가진 이 회장은 품질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시작했다. 글로벌 시대에는 무엇보다 신용과 이미지, 다시 말해 브랜드 가치가 중요하다는 것을 이 회장은 이미 그때 알아차린 것이다. 당시 이 회장은 "단 한 개의 불량 제품을 만드는 것은 회사를 좀먹는 암적 존재이자 경영의 범죄행위"라고 역설했다. 이것은 '품질은 곧 삼성의 얼굴'이라는 선언으로 이어졌다. 이는 '삼성 신경영' 체제의 밑바탕이 됐다.

신경영 선언 이후 삼성은 개혁의 고삐를 단단히 잡았지만 초창기 개혁의 속도는 이 회장의 기대에는 다소 못 미쳤다. 이 회장은 1995년 <알게마이네 자이퉁지>에 기고한 '21세기를 향한 아젠더'라는 글에서 이 같은 위기의식을 한 번 더 전달했다.

이 회장은 "품질 위주의 경영을 끊임없이 강조해 왔지만 경영관행은 여전히 양적 기조를 벗어나지 못했다"며 "대단히 위험한 타성이 그룹을 지배하고 있다"고 진단하며 삼성 임직원들을 향해 일침을 가했다. 이처럼 항상 한발 앞서가는 삼성의 혁신은 철저한 현실 인식과 절박한 위기의식으로부터 시작됐다.

개혁과 혁신으로
위기 정면돌파

이 회장의 위기론은 계속 이어졌다. 1993년 처자식만 빼고 모두 '바꾸자', 1998년 IMF를 맞아 위기 극복을 위해 구조조정에 나선다는 '버리자', 그리고 2002년 5년 후 10년 후 무엇이 삼성을 먹여 살릴 것인지 '찾아라'까지 항상 위기의식을 강조했다.

2011년 1월 신년하례식에서도 이 회장은 "10년 내 삼성을 대표하는 사업과 제품은 모두 사라질 것"이라는 새로운 위기론을 꺼냈다. 한마디로 안주 하지 말라는 메시지를 임직원들에게 보낸 것이다. 위기 그리고 혁신은 이 회장이 항시 강조하는 단골 메뉴다.

신경영과 함께 삼성이 초일류기업으로 도약할 수 있었던 저력은 품질경영으로부터 나왔다. 특히 반도체, TV, 휴대폰, 냉장고 등 삼성의 20여 개 주력제품은 당시 시장을 장악하고 있던 미국, 일본 등의 시장선도 업체들의 제품들과 비교해도 밀리지 않았다. 오히려 가격 경쟁력 면에서 앞섰고 세계인들로부터 신뢰를 쌓아갔다.

이제는 '삼성'이라는 한글 발음 그대로 부르는 사람들보다 '쌤송'이라는 영어 발음으로 부르는 사람의 숫자가 더 많다. 삼성은 그만큼 한국의 대기업을 넘어선 글로벌 기업으로 우뚝 선 것이다.

삼성이 글로벌 기업으로 올라서게 된 가장 큰 원동력은 반도체와 휴대폰 등 IT 사업부문의 경쟁력이었다. 하지만 내수산업과 경공업 중심의 사업구조로 성장해왔던 삼성이 세계적인 기업으로 성장하기까지 이 회장은 사운을 건 결단을 수차례나 내려야했다.

그 시작은 반도체다. 이 회장은 "기술 식민지에서 벗어나 전자사업을 하려면 반도체를 자체 개발해야 한다"며 한국반도체 인수를 통한 반도체 산업 진출 의사를 굽히지 않았다. 

하지만 당시 반도체 사업 진출은 도박이나 다름없었다. 막대한 자금이 드는 것은 물론이고 반도체 기술조차 없었다. 그리고 그것을 팔 수 있는 시장이 개척될지도 미지수였다. 당시 경공업에 머물러 있었던 우리나라 현실에서 반도체 사업 진출은 실패가 불 보듯 뻔했다.

당시 주위에서도 이 회장의 한국반도체 인수를 부정적으로 봤다. 전 세계가 오일 파동 중인데다가, 삼성전기와 삼성전관은 경영난에 허덕이고 있었다. 그럼에도 이 회장은 "오히려 고전을 거듭하는 전자부문을 살릴 수 있는 것은 오직 반도체 자급에 달려있다"며 반도체 사업을 밀어붙였다.


이 회장의 이런 집념이 결실을 맺은 것은 1981년 초였다. 삼성이 컬러TV용 색신호 집적회로(IC)를 개발했고 64K D램도 6개월 만에 개발했다. 이어 1984년 10월에는 256K D램을 개발하며 반도체 기술과 노하우를 쌓아갔다.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삼성에서 쌤송으로

1987년은 반도체 역사에 전환점을 맞는 중요한 시기였다. 당시로서는 대용량이었던 4Mb D램 개발과 관련 '스택' 방식과 '트렌치' 방식 중 어느 하나를 선택해야 했던 시점이었다. 두 기술은 서로 장단점을 가지고 있어 양산 단계 전 누구도 어떤 방식이 유리한지 알기 어려웠다. 이때 이 회장이 "단순하게 생각하자. 안으로 파는 것보다 위로 쌓는 게 쉽지 않겠느냐"고 단숨에 결정한 것은 유명하다. 

이 회장의 판단은 결국 옳았다. 트렌치 방식을 채택했던 당시 반도체 부문 세계 1위 도시바는 양산 저하 문제를 일으키며 D램 선두자리를 삼성에 내줬다. 반면 삼성은 과감한 투자로 64메가 D램 개발로 세계 반도체 산업에서의 기술 주도권을 확보했다. 이후 생산량을 지속적으로 늘려 시장 점유율도 1위로 올라섰다.

1993년 이 회장의 8인치 웨이퍼의 채택은 삼성 반도체가 세계 1위로 부상하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실패하면 당시 1조원의 손실이 예상됐지만 이 회장은 세계 1위 반도체 업체가 올라서기 위한 도전을 시도한 것이다. 이를 계기로 삼성은 일본에 늘 한 단계 앞서가며 세계 1위 메모리 반도체 업체로 부상했다.

특히 이 회장은 지난 2001년 당시 플래시메모리 원천 기술을 보유하고 있던 도시바가 합작을 제안해 왔을 때도 흔들림 없이 독자적인 길을 고수했다. 그로부터 2년 뒤. 삼성의 플래시메모리 사업은 거짓말처럼 세계 1위 도시바의 시장 점유율을 역전했다.


사운을 건 반도체·휴대폰 '역전드라마'
프랑크푸르트 선언 20돌…대변화 예고

이후 삼성은 비메모리 반도체(시스템LSI) 사업도 진출했다. 삼성은 1996년 미국 디지털이큅먼트와 손잡고 64비트 알파칩 개발에 나서면서 비메모리 반도체 사업에 본격 뛰어들었다. 현재 삼성은 스마트폰의 바람을 타고 모바일 분야 AP(애플리케이션 프로세서)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며 인텔과 동등한 지위로 올라서고 있다.

반도체에 이어 '애니콜 신화'가 뒤를 이었다. 현재의 글로벌 스마트폰 판매 1위 역시 이 회장의 집념에서 비롯됐다. 이 회장은 "반드시 1명당 1대의 무선 단말기를 갖는 시대가 온다"며 삼성의 신수종 사업으로 휴대폰 사업을 예견했다. 1994년 10월 애니콜 첫 모델인 SH-770을 출시했고, 1년도 안 돼 전 세계 휴대폰 시장 1위인 모토로라를 제치고 시장 점유율 51.5%를 차지하며 국내 정상에 올랐다.

이 과정에서 유명한 일화가 있다. 통화가 원활하지 않는 등 품질 문제가 지적되자 이 회장은 500억원 상당의 완제품을 태워버리는 결단을 했다. 1995년 3월 삼성전자 구미공장에서 2000여 명의 직원들이 바라보는 가운데 수 만대의 휴대폰이 불태워진 것. 당시 이 회장은 "고객을 두려워하라. 돈을 받고 불량품을 파는 것은 고객을 속이는 짓"이라고 질책했다. 삼성은 이런 경험이 있었기에 15년 후 갤럭시 신화를 만들어 낼 수 있었던 것이다.

이 회장은 2000년을 기점으로 삼성의 글로벌 경영을 본격화했다. 2006년 출시된 TV '파브'는 삼성TV를 글로벌 1위로 만들었고, 2007년 삼성중공업은 수주액 200억달러를 돌파하며 세계 최고의 조선소로 성장했다. 삼성물산 건설부문도 2010년 1월 세계에서 가장 높은 건축물인 두바이의 '부르즈칼리파'를 완공했다.

글로벌 삼성은 질적으로도 괄목할 만한 성과를 이뤄냈다. 삼성전자는 미국의 소비자전문지 <컨슈머리포트>가 선정한 '올해 10대 전자제품'에 갤럭시S3, 갤럭시노트10.1, HT-E6730W(홈시어터) 등 3개 제품이 이름을 올렸다.

삼성의 브랜드 가치도 올해 인터브랜드 조사결과 벤츠와 토요타, 디즈니, HP, 시스코 등을 제치고 당당히 세계 9위에 진입하는 기염을 토했다.

신사업 없이
미래도 없다

삼성의 혁신과 도전은 아직 멈추지 않았다. 이 회장은 2010년 3월 경영에 복귀한 후 두 달 만에 태양전지와 자동차용 전지, LED, 바이오제약, 의료기기 등 삼성의 미래를 책임질 5대 신수종 사업을 발표했다. 특히 내년 6월은 이 회장의 신경영 포부를 담은 프랑크푸르트 선언 20주년을 맞는 해다. 이에 삼성 안팎에서는 내년에 대대적인 변화가 있을 것이라는 관측이 나오고 있다.

벌써부터 미래 전략과 비전이 동시에 담길 내년 이 회장의 '제2의 신경영' 선언이 기대된다.

김민석 기자 <ideaed@ilyosis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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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김건희 일가 연루 의혹 ‘선라이즈F&T’ 주주명부 공개

[단독] 김건희 일가 연루 의혹 ‘선라이즈F&T’ 주주명부 공개

[일요시사 취재1팀] 양동주 기자 = 소문이 어느덧 사실처럼 인식되고 있다. 명확한 물증이 없는 가운데 파편적인 의혹이 덧씌워진 양상은 좀처럼 바뀌지 않고 있으며, 흐름을 파악할 만한 유의미한 흔적이 이제야 겨우 나왔을 뿐이다. 증폭된 의혹 뒤편에서 여전히 진실은 빼꼼히 잘 보이지 않는다. 2010년 9월 설립된 ‘선라이즈에프앤티’는 황해경제자유구역에 자리 잡은 유일한 농산물 가공 업체로, 그간 심심치 않게 밀수 의혹을 받아왔다. 가공 목적으로 수입한 농산물을 가공 없이 시중에 유통시켜 엄청난 차익을 봤다는 꼬리표가 뒤따랐다. 의혹하는 눈초리 선라이즈에프앤티가 취급했던 대다수 농산물이 고관세 품목이라는 점은 이 같은 의혹을 부채질했다. 그간 선라이즈에프앤티는 ▲녹두 ▲콩나물콩 ▲다대기(혼합양념) ▲생강 ▲마늘 ▲참깨 ▲팥 ▲서리태 등 높은 세율이 붙는 고관세 품목을 주로 수입했던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한 예로 콩나물콩의 경우 그대로 들여와 국내에 유통하면 487% 관세가 부과되지만, 콩나물 재배 목적으로 수입하면 27%만 반영된다. 평택세관에 몸담았던 다수의 전직 세관공무원이 기업 출범 및 운영에 관여했다는 점도 선라이즈에프앤티를 부정적으로 보게 만들었다. 심지어 선라이즈에프앤티 이사진에 포함됐던 특정 세관 출신 임원이 한때 다이아몬드 밀수 사건에 이름이 오르내린 사례도 존재한다. 수년 전부터는 김건희씨 일가와 선라이즈에프앤티를 동일선상에서 바라보는 경향이 강해졌다. 선라이즈에프앤티의 밀수 의혹을 수차례에 걸쳐 제기했던 공익 제보자 이성열씨가 재판에 연루되는 과정에서 김건희씨의 모친인 최은순씨가 거론됐던 게 이 같은 흐름에 불을 지핀 형국이다. 이런 가운데 정치평론가인 장성철 공론센터 소장이 최근 ‘평택항’을 언급하자, 김건희씨 일가와 선라이즈에프앤티 간 연관성은 사실처럼 받아들여질 정도가 됐다. 장 소장은 SBS라디오 <김태현의 뉴스쇼>가 운영하는 유튜브 방송에 출연해 김건희씨 일가의 수상한 물건 수입 의혹과 관련한 이야기를 전했다. 갈수록 증폭되는 평택 논란 이제야 공개된 소소한 흔적 장 소장은 “최은순씨가 주인으로 있는 농수산물 수입업체에서 이상한 것을 들고 오려고 하다가 걸려서 (김건희) 오빠와 김건희씨가 그것을 무마시키려고 여러 가지 이상한 (일들을 했다고 한다)”며 “어떤 물건인지 구체적으로 밝히지는 않았지만, 부적절한 물건인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고 말했다. 급기야 선라이즈에프앤티의 폐업이 알려지자, 의혹은 그야말로 걷잡을 수 없이 커진 양상이다. 선라이즈에프앤티는 국세청 사업자 과세 유형 조회 결과 지난 10일자로 폐업한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폐업자로 조회된 지난 10일은 김건희 특검법이 공포된 시기와 맞물린다. 물론 꾸준히 의혹이 제기된 것과 별개로, 김건희씨 일가와 선라이즈에프앤티 간 연관성을 입증할 만한 확실한 단서는 없는 상황이다. 특히 주주명부가 지금껏 외부에 공개되지 않았다는 게 의혹과 진실을 구분 짓기 어렵게 만들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일요시사>가 최초 입수한 주주명부는 간접적으로나마 의문을 풀 수 있는 열쇠로 작용할 여지를 남긴다. 2022년 10월 작성된 ‘카리나에프앤티(선라이즈에프앤티에서 2020년 9월 상호 변경) 주주명부’를 검토한 결과 주주는 총 17명, 발행주식은 91만8400주(1주당 5000원)로 확인됐다. 2010년 9월 자본금 5억원으로 설립된 선라이즈에프앤티는 수차례 증자를 거쳤고, 해당 시기에 자본금을 45억9200만원으로 늘린 상태였다. 의문 해소 첫 단추 일단 주주명부에서는 김건희씨 일가의 이름을 찾을 수 없다. 대신 경영권 교체 과정이나마 엿볼 수 있을 뿐이다. 법인 등기와 주주명부를 교차 검증한 결과를 토대로 추정하면, 표면상 선라이즈에프앤티 지배 세력은 ‘전직 세관공무원(설립~2018년 중순)→지엔티에이치(~2020년 중순)→킴스에O엔O(~2022년 초순)→동OO앤에스(~2025년 6월)’ 순으로 변경된 흐름이다. 첫 번째 경영권 교체는 ‘펀딩하이 연체 사건’과 함께 발생했다. 펀딩하이는 중국·동남아시아에서 농산물을 수입하는 업체에 돈을 빌려 주고, 투자자들에게 15% 이상 수익을 보장하는 펀딩 상품으로 인기를 끌던 P2P 업체였다. 그러나 펀딩하이는 2018년 6월20일 ‘마늘 시즌2-17차(모집 금액 3억원, 차주 승리산업)’ 펀딩 상품의 연체를 시작으로 ▲세척 당근 시즌2-18차(모집금액 5억원, 차주 지엔티에이치) ▲김치 펀딩 2차(모집금액 1억2000만원, 차주 상아농산) ▲번데기 펀딩 1차(모집금액 1억8000만원, 차주 월량완코리아) 등에서 차주의 투자금 상환 실패를 알렸다. 연체 금액은 ▲지엔티에이치 29억원 ▲승리산업 33억원 ▲상아농산 11억8000만원 ▲월량완코리아 1억8000만원 등 총 75억6000만원에 달했다. 급기야 펀딩하이는 연체율 100%를 찍은 채 영업을 중단했다. 상환 실패 이후 차주 사이에 관련성이 드러났다. 지엔티에이치와 승리산업에서 대표이사였던 윤석호씨는 두 회사 지분을 각각 60%, 100% 보유 중이었다. 또한 월량완코리아 사내이사로도 등재돼있었다. 거듭되는 교체 수순 연체가 발생한 직접적인 사유는 선라이즈에프앤티를 대상으로 한 지분 투자였다. 지엔티에이치는 펀딩받은 금액을 농산물을 들여오는 데 쓰지 않고, 선라이즈에프앤티 주식을 매입하는 데 활용한 것으로 뒤늦게 확인됐다. 이를 계기로 지엔티에이치는 2018년 6월경 주식 16만1400주를 확보한 선라이즈에프앤티 최대주주로 올라섰다. 지엔티에이치가 지배력을 확보한 이후 선라이즈에프앤티 임원 명단에 변화가 목격됐다. 선라이즈에프앤티 초창기부터 함께했던 사내이사와 부친에 이어 회사에 몸담았던 대표이사를 대신해 지엔티에이치가 끌어들인 얼굴들이 등기임원 자리를 꿰찼다. 정작 지엔티에이치는 연체 발생 넉 달 후인 2018년 10월 보유 중이던 선라이즈에프앤티 주식을 ‘란릉현래보식품유한공사’에 넘겼다. 펀딩하이 투자자들과의 소송전이 불거지자 중국에 본거지를 둔 우군에 주식을 양도한 모양새였다. 두 번째 경영권 교체는 ‘킴스에O엔O’ 측이 선라이즈에프앤티의 주체로 올라서는 과정에서 발생한 것으로 보인다. 충청권에 본적을 둔 킴스에O엔O는 2022년 10월 기준 선라이즈에프앤티 주식 10만8200주를 확보한 것으로 확인됐다. 킴스에O엔O 대표이사의 친인척이 보유한 주식 13만2800주를 합산하면 우호 주식은 24만주 안팎이다. 기존 지엔티에이치 측 우호 세력(란릉현래보식품유한공사 16만1400주+마송재 3만주)과 비교해 5만주 가까이 격차를 벌린 셈이다. 킴스에O엔O 측이 선라이즈에프앤티 주식을 대량 매입한 시기는 2020년 중후반으로 추정된다. 이 무렵 선라이즈에프앤티 등기임원 구성이 크게 요동쳤다는 점을 통해 짐작 가능한 사안이다. 실제로 지엔티에이치가 지배력을 발휘하던 2018년 7월 대표이사에 선임됐던 김정일 대표는 2020년 3월 해임됐다. 2018년 9월 취임했던 또 다른 대표이사 역시 당해 10월을 넘기지 못한 채 사임했다. 쉽게 거두지 못하는 의심 의미심장 세력 교체 과정 공석이 된 주요 등기임원 자리는 킴스에O엔O 측 인물로 채워졌다. 킴스에O엔O 대표이사가 2020년 10월 선라이즈에프앤티 대표이사로 취임했고, 해당 시기에 사외이사, 감사 등 등기임원 전원이 새 얼굴로 교체됐다. 킴스에O엔O에 이어 지배 세력으로 등장한 곳은 식료품 제조업을 영위하는 동OO앤에스였다. 이 회사는 2022년 10월 기준 주주명부에 선라이즈에프앤티 주식 41만주(지분율 44.64%)를 보유한 단일 최대주주로 등재돼있다. 여기에 우호 세력(글로O포O 1만주+김성수 2만주+김종봉 788주)의 주식을 합산하면 지분율은 50%에 육박한다. 동OO앤에스는 사실상 선라이즈에프앤티를 인수하고자 만든 업체로 비쳐질 여지를 남긴다. 2022년 2월 출범 당시 자본금 10억원짜리였던 동OO앤에스는 불과 두 달 만인 2022년 4월14일 자본금을 21억원으로 두 배 이상 키웠다. 공교롭게도 동OO앤에스가 설립 이후 8개월 사이 선라이즈에프앤티 주식 41만주를 확보하는 과정에서 투입한 금액은 총 20억5000만원이었다. 이는 동OO앤에스 자본금 21억원이 선라이즈 주식 41만주를 매입하는 데 쓰였을 가능성에 주목하게 만든다. 게다가 선라이즈에프앤티는 기존 61만8400주였던 발행주식을 2022년 4월22일 91만8400주로 30만주 확대했다. 동OO앤에스가 자본금을 21억원으로 확충한 지 8일 만이다. 선라이즈에프앤티가 발행주식을 30만주 늘린 덕분에 동OO앤에스는 상대적으로 수월하게 주식 41만주를 확보한 형국이다. 동OO앤에스가 선라이즈에프앤티를 지배하는 위치로 올라설 무렵에 선라이즈에프앤티 임원 구성은 또 한 번 바뀌었다. 동OO앤에스 대표이사가 사내이사, 글로O포O 대표이사가 사외이사에 이름을 올렸고, 김성수 대표이사가 신규 선임됐다. 이후 김성수 대표는 선라이즈에프앤티 폐업 전까지 자리를 지킨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되짚어보는 연결고리 한편 일각에서는 김건희씨 일가에서 선라이즈에프앤티에 영향력을 행사했다면 그 시기는 지엔티에이치 측이 지배력을 상실한 이후일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나마 킴스에O엔O 혹은 동OO앤에스와의 연관성이 높다고 보는 것이다. 한 경찰 관계자는 “김건희씨 일가에서 선라이즈에프앤티에 관여한 직접적인 흔적이 발견되지 않았지만, 만약 영향력을 행사했다면 그 시기를 2021년 이후로 특정해볼 수 있을 것”이라며 “항간에 떠도는 마약 적발 여부는 2022년 근방으로 얘기가 오가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heatyang@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