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타트 체제는 지난 5일부로 효력을 다했다. 2011년 발효 이후 미국과 러시아의 핵탄두를 1550기로 묶고 상호 검증을 유지해 온 마지막 안전장치는 이제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연장이나 대체 합의는 마련되지 못했다. 핵 억제의 운영 방식이 새로운 단계로 진입한 것이다.
전 세계 핵탄두의 절대 다수는 여전히 미·러가 보유하고 있다. 그러나 감축과 감시의 관성이 멈추면서 핵 경쟁이 중심 의제가 됐다.
도널드 트럼프 진영에서 제기됐던 핵실험 재개론은 이런 전환의 분위기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실험은 능력 입증이자 의지의 표명이다. 동맹에게는 공약의 현실성을, 경쟁국에는 대응 필요성을 환기한다. 신호는 상호작용을 낳고, 상호작용은 다시 군비 계획을 밀어 올린다.
결국 실험 논의 자체가 새로운 군비 경쟁의 시대가 됐음을 의미한다.
중국은 이미 속도를 내고 있다. 다수의 신규 사일로, 해상 기반 전력 강화, 극초음속 체계 개발이 병행됐다. 최소 억제의 틀을 유지하던 과거와 달리 보다 확실한 보복 능력을 확보하려는 움직임이 뚜렷해졌다. 양자 구도는 사실상 다자 경쟁 체제로 변환됐다.
전략 안정성을 설계하던 시대에서 전략 우위를 계산하는 시대로 무게중심이 이동했다.
이 흐름 속에서 북핵 문제 역시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 핵보유국들이 전력을 고도화하는 현실은 비핵화 요구의 정치적 무게를 약화시켰다. 북한은 글로벌 군비 환경을 자신들의 정당성 논리에 활용하려 할 가능성이 커졌다. 한반도는 더 넓은 전략 경쟁에 편입됐다. 지역 문제로 관리하던 접근은 점점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뉴스타트가 종료된 다음날, 마코 루비오 미국 국무 장관은 미국과 러시아, 그리고 중국이 함께 모여 새로운 틀을 논의하자고 말했다. 핵 질서를 다시 설계하자는 제안이었다. 최소한 대화의 형식을 유지하며 완전한 공백만은 막아 보자는 절박함이었다.
그러나 세르게이 랴브코프 러시아 외무 차관은 “지금은 그런 논의를 할 조건이 아니”라며 선을 그었다. 전쟁과 제재, 불신의 구조 속에서 군축은 후순위라는 현실 인식이 깔려 있었다. 중국은 침묵했다. 긍정도 부정도 없이 말을 아꼈다.
참여 의무가 없는 위치에서 책임을 지지 않는 방식이다. 이 두 나라의 전략은 이미 다른 계산 위에 있었다.
이 장면을 바라보며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이름이 있다. 국제원자력기구(IAEA, International Atomic Energy Agency)다. 핵을 감시하고 검증하는 국제 체제의 상징 같은 기관이다. 세계는 오랫동안 이 조직이 존재한다는 사실에서 안도해 왔다. 위기의 순간마다 중재를 기대했다.
하지만 질문이 생긴다. 전략핵을 둘러싼 가장 큰 뉴스타트라는 틀이 무너졌는데, IAEA는 이제 무엇을 할 수 있는가. 규칙이 흐려지면 심판의 권한도 함께 약해지고, 권한이 약해지면 역할도 줄어든다.
여기에 또 하나의 기둥이 있다. 우리가 흔히 부르는 핵확산금지조약(NPT, Nuclear Non Proliferation Treaty)이다. 핵 확산을 막고 군축을 약속하며 평화적 이용을 허용하는 거대한 합의로, 반세기 넘게 국제 핵 질서의 뼈대를 담당해 왔다. 그런데 뉴스타트 종료로 NPT 위상이 흔들리고 있다.
그래서 뉴스타트의 종료는 단순히 조약 하나가 사라진 사건이 아니다. ‘마지막 안전판은 있다’는 심리적 완충까지 함께 사라진 사건이다.
물론 IAEA가 할 수 있는 일은 여전히 많다. 사찰하고, 보고서를 내고, 경고를 보내는 것이다. 국제사회에 기준을 제시하는 역할도 수행할 수 있다. 그러나 전략핵의 중심에서 벌어지는 힘의 이동까지 막을 수는 없다. 규범은 있지만 집행은 국가의 손에 달려 있다.
NPT도 마찬가지다. 합의는 살아 있으나 분위기는 달라졌다. 군축을 향한 낙관 대신 억제의 현실이 앞선다. 모두가 원칙을 말하지만 행동은 각자 계산에 맡긴다.
뉴스타트 이후 국제사회는 묘한 상황에 들어와 있다. 제도는 유지되지만 확신은 줄어들고, 강대국은 책임을 나누기보다 부담을 줄이려 하고, 손익을 따지며 계산기를 두드리고 있다. 이 틈에서 중견국과 비핵국의 고민만 깊어진다.
그렇다면 국제기구의 현재 역할은 무엇인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최소한 핵 확산을 완벽하게 막지 못하더라도 늦출 수는 있어야 한다. 위험을 줄이지 못해도 관리할 수 있어야 한다. 지금까지도 그렇게 버텨 왔다.
그러나 이제 버티는 방식만으로는 미래를 설계하기 어렵다. 이번 상황이 주는 신호는 분명하다. 핵 질서는 안정의 단계에서 불확실성의 단계로 이동했다. 예측 가능한 위험에서 계산 불가능한 위험으로 옮겨가고 있다. 그래서 더 복잡해졌다.
이런 상황에서 각 국가의 지도자는 이제 ‘억제를 강화할 것인가, 힘을 키울 것인가’라는 새로운 답을 요구받는다. 선택은 어느 쪽이든 어렵다. 국민 역시 질문을 피할 수 없다. 오래된 합의에 기대어 안도할 것인가. 아니면 새로운 틀을 요구할 것인가.
뉴스타트 이후의 시간은 시험대다. 제도가 습관처럼 작동하던 시대가 끝났기 때문이다. 이제는 의지가 필요하다. IAEA와 NPT가 무의미해졌다고 단정하기엔 아직 이르다. 다만 분명한 것은 그것들만으로 충분하지 않다는 사실이다. 보완과 재설계가 필요한 시점이다. 세계는 다음 단계를 준비해야 한다.
뉴스타트의 종료는 끝이 아니라 출발일지도 모른다. 오래된 구조가 내려간 자리에 무엇을 세울 것인지 묻는 신호일 수 있다. 국제 정치는 다시 설계의 시간으로 들어갔다. 선택의 무게가 커졌다. 그리고 우리는 그 설계가 완성되기 전까지, 더 불안한 세계를 살아야 한다.
특히 한국의 전략적 위치는 매우 중요하다. 북핵 위협과 미·중 경쟁, 일본의 역할 변화가 동시에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국제기구나 미국의 약속만으로는 안심할 수 없다. 우리가 핵 전략을 다시 짜야 하는 이유다.
뉴스타트가 종료됐는데도 세계가 조용한 이유는 끝났기 때문이 아니라, 모두가 다음 수를 재고 있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