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시사 취재1팀] 서진 기자 = 쿠팡 경영진이 한 청년의 과로사를 은폐하려 한 정황이 드러났다. 부실했던 산재 대응 매뉴얼까지 만들어 유지했다. 단순 운영 실수가 아닌 당국의 처벌을 피하기 위한 꼼수라는 지적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김범석 이사회 의장은 사퇴했지만 쿠팡을 향한 정부의 압박은 거세지고 있는 분위기다.
‘인과응보’란 과연 존재할까? 지난 17일, 쿠팡이 5년 전 경북 칠곡에서 멈춘 청년의 심장을 기저질환으로 치부하며 지워내려 했던 그 매뉴얼이 이제는 쿠팡의 숨통을 조이고 있다. 경찰은 이번 매뉴얼을 산재 증거인멸의 핵심 증거로 보고 있다.
5년 전 복선
쿠팡은 ‘산재 은폐’ 매뉴얼을 폭로한 전 임원을 믿을 수 없는 사람으로 몰아갔다. 지난 17일 국정감사에서 쿠팡 모회사(쿠팡Inc)의 임시 대표 해럴드 로저스 증인은 그가 중대한 비위행위로 해고된 사람이라고 깎아내렸다.
전 정보 최고책임자(CPO)이자 해당 매뉴얼을 세상에 보인 A씨는 법률 대리인을 통해 “해고 관련 소송에서 중대한 비위행위나 직장 내 괴롭힘에 대한 법원의 판단은 전혀 없었다”고 밝혔다.
그는 노동자로 인정되지 않아 소송에서 졌을 뿐이라면서, 재판 과정에서 비위와 관련한 증거는 단 한 건도 제출된 적이 없다고 했다. 그러면서 숨진 장씨의 유가족에게 사과를 전하기도 했다.
A씨는 “실제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릴 방법을 더 일찍 찾지 못한 것에 대해 죄송한 마음을 표한다”면서 “고인이 열심히 일했던 직원이었다는 점을 모두가 알 수 있게 돼, 유가족이 조금이라도 평안을 찾을 수 있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다음 날인 18일, 택배노동자 과로사 대책위원회(이하 대책위)는 산재 은폐 의혹을 받는 김 의장에게 사죄를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서울 서대문구 전국택배노동조합 회의실에 열린 이 기자회견 자리에는 지난 2020년 쿠팡 칠곡 물류센터에서 심근경색으로 숨진 장덕준(27)씨의 모친 박미숙씨가 참석했다.
물류센터에서 야간 근무를 하던 장씨는 2020년 10월12일 오전 2시 퇴근한 지 1시간30분 만에 숨졌다. 이듬해 2월 근로복지공단이 산재를 인정했으나 쿠팡은 책임을 부인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유족은 2023년 3월 소송을 제기했고, 쿠팡은 국회 청문회를 앞둔 지난 1월 유족과 합의하며 장장 4년 만에 과로사를 인정했다.
박씨는 “사고 직후 쿠팡이 근로계약서와 퇴직금 정산서, 12주분 근무 일수 자료만 내줬고, CCTV 영상은 없다며 제공을 거부했다”며 “결국 이 세 가지 서류에 의존해 산재 신청을 할 수밖에 없었다”고 주장했다.
장씨가 숨진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열린 국정조사에서 쿠팡 측은 유족의 과로사 주장을 태연히 부인했다.
부실했던 산재 대응
매뉴얼 만들어 유지
그러나 김범석 당시 쿠팡 한국법인 대표가 메신저로 “그가 열심히 일했다는 기록이 남지 않도록 하라”고 지시하고, CCTV 장비를 서울 본사로 옮긴 데다, 장씨가 숨지기 일주일 전부터 화장실·음료수 이용까지 초 단위로 기록한 사실이 드러나면서 이 사건은 쿠팡이 산재 책임을 피하기 위한 지침을 체계화하는 계기가 됐다는 비판이 나왔다.
쿠팡풀필먼트서비스(이하 CFS)의 ‘중대재해 발생 시 행동 지침’ 문건은 이른바 ‘대외비’로, 산재 발생 시 필수적으로 지켜야 하는 행동지침, 담당자의 개인정보 및 주의사항이 자세히 세분화돼있다.
2021년 1월 작성된 이 매뉴얼은 유족의 산재 신청을 최대한 막고 언론과의 접촉을 차단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 사고 발생 직후 유족 중 협조적인 ‘소통 창구’를 먼저 확보하고, CCTV 등 영상 자료의 활용과 공유를 엄격히 제한하도록 지시했다.
매뉴얼에는 일명 ‘미션’이 존재했다. 사건 발생, 병원 대응, 장례식장, 고용노동부 대응, 국회 대응, 경찰 대응 등 일곱 단계로 구성됐다. 특히 장례식장 단계에선 “유족을 우리 편으로 만든다” “오염된 정보를 차단한다” 등 두 가지가 미션으로 언급됐다.
유족에 따르면 장덕준씨 사망 당시, 쿠팡에는 장례식장 대응 담당 부서가 없었다. 그러나 매뉴얼이 생긴 후 이들은 장례식장에 대응팀을 배치해 외부 정보 유입을 관리하도록 했다.
또 노조·언론·집회 움직임을 실시간으로 감시해 공유하도록 했다. 국회의원실 관심도를 체크해 문제 확산을 차단하라는 지침도 있었다. 쿠팡의 대외비 산재 대응 매뉴얼 그대로다.
현장 관리자들은 이 비밀 지침에 따라 사망 노동자의 작업 강도 데이터를 수정하거나, 목격자의 진술을 통제하며 법망을 피해왔던 것으로 해석된다.
근로복지공단이 규정하는 과로사 산재 기준 가운데 주 58시간 초과 근무와 야간 교대 등 가중 요인이 있을 때 업무 관련성이 인정된다. 지난 5월 숨진 쿠팡 퀵플렉스 기사 정슬기씨는 주 평균 78시간이라는 살인적 노동에 시달렸으나, 대리점 소속 특수고용직이라는 신분 탓에 법적 규제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었다.
유족 회유·데이터 조작 지시
‘끝까지 피하기’ 지침 체계화
고인의 사인은 과로사의 전형인 뇌심혈관계 질환이었지만, 쿠팡 측은 개인사업자 소속이라는 점을 내세워 책임을 부인해 왔다. 결국 지난 10월 정씨에게 산재가 인정되며 업무상 재해임이 공식화됐으나, 그 과정에서 유족은 쿠팡의 책임 회피와 법률상 입증 책임이라는 이중고를 겪어야 했다.
법조계 관계자는 “과로사 인정 과정에서 업무시간 초과와 가중 요인인 야근과 교대근무가 충족돼도 회사 측이 개인 질환이나 자료 부족으로 초기에 불승인되는 경우가 부지기수”라며, “근무 기록·건강검진 등 객관적인 증거가 남아있다면 유족에게 희망적인 경우”라고 전했다.
또 쿠팡의 산재 대응 매뉴얼이 작성된 시점은 상당히 정교하다. 장덕준씨 사망 두 달 뒤, 김범석 의장이 대표이사직에서 물러난 직후다. 특히 경영책임자를 처벌하는 ‘중대재해처벌법’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하기 불과 9일 전, 이 대외비 문건은 완성됐다.
사태는 겉잡을 수 없이 커지고 있지만, 정작 근로 감독의 주체인 고용노동부는 “현재 사안이 많아 아직 대답하기 어렵다”는 입장이다.
산재 은폐 지침의 실체가 드러나면서 쿠팡은 유족과 여론의 거센 분노에 직면했다. 세계시장에 새로운 ‘글로벌 스탠더드’를 제시하겠다던 호언장담과 달리, 뒤에서는 반인륜적인 매뉴얼을 운용해 왔다는 모순이 증명된 셈이다.
사태는 결국 법정 싸움으로 번졌다. 지난 23일, 대책위가 산재 은폐 혐의 등으로 김범석 의장을 경찰에 고발하면서다. 수사의 칼날은 세워졌으나, 미국 국적인 김 의장이 실제 소환 조사에 응할지는 여전히 불투명한 상황이다.
사라진 기준
대책위는 쿠팡이 산재 은폐 매뉴얼을 제작하는 등 사태를 조직적으로 방조했다고 지적했다. 이들은 “노동자의 생명을 비용으로, 죽음마저 관리 대상으로 여기는 천박한 기업 윤리에 반드시 법적 책임을 묻겠다”며 강경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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