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대담> 윤여준이 보는 혼란 속 희망

“지금 고통은 민주주의 성장통”

[일요시사 정치팀] 박희영 기자 = 지난 10년 동안 대한민국은 두 번의 탄핵과 한 번의 계엄을 겪었다. 일어서고 좌절하기를 반복하면서 경제는 휘청였고 정치 양극화는 고점을 찍었다. YS(김영삼 전 대통령)를 시작으로 정치사의 명과 암을 모두 지켜본 윤여준 전 환경부 장관은 “그럼에도 비관적으로 보지 않는다”고 말한다. 윤 전 장관이 본 희망은 이 모든 걸 겪고도 다시 일어나는 대한민국 국민의 회복력이었다.

윤여준 전 환경부 장관의 정치 인생은 좌우 이념을 가리지 않는다. 청와대를 비롯한 행정부, 국회, 선거 등 크고 작은 나랏일을 함께하며 30년 넘게 국정 운영에 관여했다.

1994년 김영삼정부 시절 청와대 대변인 겸 공보수석을 지낸 그는 1997년 제4대 환경부 장관에 임명됐으며 1998년 이회창 전 국무총리의 ‘제갈공명’으로 이름을 알렸다. 2000년 한나라당의 제16대 총선을 시작으로 2006년 오세훈 서울시장캠프 공동선대위원장, 2012년 문재인 후보 캠프 국민통합추진위원장, 2014년 안철수 의원이 이끈 새정치추진위원회 공동위원장 등을 차례로 지냈다.

지난 4월에는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 이재명 후보의 중앙선거대책위원회 상임총괄선대위원장으로 깜짝 발탁됐다. 선거를 승리로 이끌어온 윤 전 장관은 이재명 대통령의 취임 30일 기자회견을 본 뒤 “이 대통령 밑에서 일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라고 호평하기도 했다.

오랫동안 국정 운영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해 왔던 윤 전 장관은 ‘보수 책사’로 통한다. 그러나 막상 그는 이 같은 별명을 달갑게 여기지 않는 듯 했다. <일요시사>와 인터뷰 도중 “보수 책사이시다”라는 취재진의 말에 그는 양손을 내저으며 웃었다.

“책사가 아니라고 10년째 말하는데 여전히 사람들은 그러네. 책사라는 단어를 빼달라고 매번 말해도 늘 기사에 넣더라고. 지금은 국민을 설득하는 시대지, 속이는 시대가 아니에요. 책사는 꾀를 내거나 어두운 지혜를 쓰는 것을 뜻합니다. 지금 시대에는 가당치도 않은 말이지. 어떻게 주권자를 속일 수가 있나.”

다사다난한 한 해의 끝에서 <일요시사>와 만난 윤 전 장관은 책사가 아닌 국민의 잠재력을 일깨워 줄 ‘통치자’이자 ‘전략가’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다음은 윤 전 장관의 일문일답.

-2025년은 격변의 해였다. 지난 1년을 돌아본다면?

▲숙명인지 모르겠으나 근래에 항상 격랑하고 격변하는 세월을 보냈다. 국민도 상당이 이골이 난 것 같다. 지난 1년간 한국에 일어난 일은 다른 나라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엄청난 사건의 연속이다.

예전부터 우리 백성이 평온한 삶을 살았던 적이 별로 없다. 나라 자체가 분단국가이지 않은가? 그래도 긍정적으로 본다면 우리 국민은 웬만한 위기에는 까닥하지 않는다. 이미 탄핵을 겪은 만큼 올해 사건들을 보통 예사로 생각한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보았을 때 마음이 아프다.

-도서 <대통령의 자격>을 집필하셨다. ‘스테이트크래프트(Statecraft·통치 역량)’를 강조했는데, 대통령의 가장 중요한 역량은 무엇인가?

▲국가를 통치하는 기본 역량은 공공성이다. 이는 공동체 구성원의 연대 의식을 일으키는 핵심 가치다. 기본 역량은 변하지 않지만 나라가 처한 상황에 따라 유연성을 가진 지도자가 필요하겠다. 태어날 때부터 이를 습득할 수는 없겠지만, 과정은 있어야 한다. 민주주의 정치 역사가 긴 나라에서는 하루아침에 대통령이 탄생하기 어렵다.

하지만 지난 몇 년간 이 과정이 생략됐다. 그러다 보니 윤석열 전 대통령 같은 인물이 등장한 것이다. 윤석열정부와 대통령 탄핵 정국을 거치면서 국민이 많은 걸 느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책에서 “어느 시대에도 인재는 있다”고 하셨는데….

▲이 세상이 필요로 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겠나. 다 필요해서 나온 사람들이다. 본인의 역할이 있고 잘난 놈들만 역할이 있는 게 아니다.

-윤 전 대통령도 국민이 뽑은 권력이다. 무엇이 문제였을까?

▲대통령은 당선 이후가 더 중요하다. 후보들은 당선되는 데에만 혼신의 힘을 기울인다. 되고자 하는 사람은 되는 과정도 중요하지만 된 이후에 어떻게 할 것인지, 자신이 그런 실력을 갖췄는지, 이론적인 지식과 경험이 있는지를 알아야 한다. 자신에 대한 과대평가가 이뤄지면 국정이 망가지고 스스로가 망가진다.

대한민국은 규모에 비해 굉장히 다스리기 어려운 나라다. 사회가 다원화돼있고 국민의 수준이 높기 때문에 이를 소홀히 하고 “감히 내가 누구인데” 이런 식으로 생각하기 쉽다. 우리는 그런 생각으로 나라를 통치한 사람들의 말로를 지켜봤다.

-6·3 조기 대선 당시 민주당 이재명 대통령 후보 캠프의 상임총괄선대위원장으로 활동하셨다. 선거 기간 동안 바라본 이 후보는 어떤 사람이었나?

▲이재명 대통령과 처음 만난 건 그가 성남시장을 할 때였다. 전화가 와서 “무슨 일이십니까?”라고 물어보니 점심을 같이하자는 연락이었다. 가게 구석에 둘이 앉아서 꽤 긴 시간 동안 이야기를 나눴다. 당시 그는 나에게 국정에 대한 이런저런 것들을 물었고, 꽤 재밌게 대화한 기억이 난다.

대통령 기본 역량은 윤리와 공공성
이, 도덕성 신경 쓰면 훌륭한 지도자

짧은 시간 내에 사람을 평가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지만 이 대통령은 자기 생각이 분명한 사람이다. 지적과 수정을 받아들이는 그릇을 갖췄다. 지도자는 그렇게 행동해야 한다.

-이재명정부에 바라는 점이 있다면?

▲윤석열정부 이후 등장한 만큼 이 대통령의 책임이 무거워 보인다. 도덕성과 효율성, 두가지의 가치를 살려야 하기 때문이다. 모두가 알다시피 대장동 등 이 대통령의 도덕성에 문제를 제기하는 이들이 많다. 하지만 효율성 측면에서 봤을 때 이 대통령은 근래 등장한 사람 중 가장 행정력이 뛰어나다.

윤 전 대통령이 파탄 낸 국정을 빠르게 정상궤도로 올렸다. 그렇기에 효율성과 도덕성 두 가지를 놓고 극단적으로 선택하라고 했을 때 나는 효율성을 택할 것이다.

-도덕성을 중요시하는 대한민국 정서 특성상 효율성만 강조해서는 국민을 설득하기 어렵지 않을까?

▲ 도덕군자란 무엇인가? 나만 잘살고 나라를 망가지게 두면 그것을 어떻게 훌륭한 지도자라고 할 수 있겠는가. 그런 점에서 이 대통령에게 굉장히 많은 기대를 하고 있다. 이번 정부를 통해 망가진 대한민국 국정을 상당 부분 회복할 수 있겠다는 희망이 있기 때문이다.

앞으로 이 대통령이 도덕성을 신경 쓰면 훌륭한 대통령으로 기억될 것이라고 본다. 이후에 등장할 대통령에 대한 기준치도 높인 셈이다. 국민의 눈높이가 올라갔으니, 후임자 역시 그에 걸맞은 사람이어야 한다.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물리적인 규모는 큰 나라가 아닐지 몰라도 잠재 능력은 몹시 크다. 워낙 국민적 역량이 뛰어나고 다양성을 갖춘 나라인데, 일부 정치인은 대통령이 돼 권력만 잡으면 일이 쉽게 풀린다고 생각한다. 어림도 없는 일이다.

-보수 진영에서는 여전히 이 대통령의 ‘비호감’ 프레임이 짙다.

▲국민이 원하는데 대통령이 봤을 때 옳지 않은 길일 수도 있다. 따라서 지도자는 자기의 반대편에 선 다수의 국민을 설득할 수 있어야 한다. 국민을 설득하고 동의를 얻는 탁월한 리더십과 신뢰를 갖춰야 한다. 정도를 걸으면서 이 모든 걸 갖추는 게 쉽지는 않다.

-‘제왕적 대통령제’가 대한민국을 비극으로 이끌었다는 분석이 나온다. 대통령은 크게 통치하고 다스리는 것인데, 제왕적이지 않은 대통령이 존재할 수 있을까?

▲물론이다. 꼭 제왕적이라야만 대통령 되는 건 아니다. 권력의 속성은 ‘집중’과 ‘연장’이다. 대통령이 된 사람이 이를 절제하고 욕망을 누르면서 국가를 민주적으로 운영해야 한다. 국민 다수의 의사가 효과적으로 반영되면 우리는 통상 민주적이라고 말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민주적인 가치가 자연스럽게 내면화돼야 한다. 평생 민주화를 위해 투쟁한 이들도 권력을 잡으면 제왕적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인물의 문제가 아닌, 국가 정치 운영 방식에 따른 차이인데 민주주의를 하나의 굳어진 제도와 체제로 받아들이면서 생긴 오류라고 생각한다.

-국가 최고 통수권자는 매 순간 권력의 유혹을 마주할 것 같다.

▲실제로 많이 느낄 것이다. 권력을 잡는다는 건 사람을 마취시키는 효과가 있다. 그 마취 효과를 이겨내야 한다. 특히 대한민국은 국민 의식 수준이 굉장히 높기 때문에 대통령의 자리를 쉽게 봐서는 안 된다.

-국민의 의식은 높아지고 있지만 그들로부터 형성된 여론이 정치권에 잘 반영되고 있다고 보는지? 소수의 의견이 다수의 의견처럼 포장되는 경향이 있다는 해석도 나오는데….

▲그렇게 치부하는 것이 권력자의 입장에서 편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시민사회의 역량이 조직화될 필요가 있다고 본다. 그러면 어떤 권력도 함부로 휘두르지 못하고 비로소 민주주의가 제도적, 문화적으로 정착하는 때가 올 것이다.

좌절 반복…그래도 희망적인 이유?
“다시 일어난 국민, 버텨낸 기업”

-민주당 등 범여권은 ‘내란 청산’을 주장하고 있다. 내란 청산 이후 대한민국이 나아가야 할 길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국민의 여론은 내란 세력을 청산하라는 것이다. 문제는 척결에 그쳐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척결은 하나의 과정이고, 이후 어떤 국가를 건설할 건지 계획하는 과정에 국민의 동의가 있어야 한다. 반복해서 말하지만 지도자는 국민의 동의를 얻은 목표를 직접 실현하기 위한 정치적, 행정적 역량을 보여줘야 한다.

-국민의힘의 상황이 좋지 않다. 여론을 쇄신하는 방법이 있을까? 보수 진영에 오래 몸담았던 만큼 고민도 많을 것 같은데….

▲당연히 고민한다. 문제는 우리가 고민하는 것만큼 국민의힘도 고민하는지, 그건 잘 모르겠다. 한 사회의 민주주의가 성숙하는 길로 향하고 있고, 지금의 우리는 혼란의 한가운데에 서 있다. 이걸 거쳐서 민주주의가 완성되는 것이지, 하루아침에 민주주의에 도달할 수는 없다.

이 모든 과정은 성숙한 사회로 향하기 위해 지나야 하는 필수적인 길목으로, 절대 비관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분단국가인 데다 경제적 어려움마저 겪어 ‘가능한 한 빨리 혼란을 극복하자’는 염원이 있는 것이지 단숨에 평화로운 사회로 거듭나는 법은 없다.

-윤 어게인(Yoon Again)이 국민의힘을 휘두르는 지금 보수를 일으킬 새 인물이 등장할 수 있을까?

▲새로운 인물이 등장해야 하고, 빠를수록 좋다. 보수든 진보든 어느 한쪽 세력이 올바르게 서야 다른 한쪽도 따라 서게 된다. 정권을 놓고 경쟁하는 세력이니 당연한 말이다.

-2026년은 병오년, 붉은 말의 해다. 역동적이고 진취적인 해로 정치권에도 역시 많은 일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새로운 해를 맞아 국회에 바라는 것이 있다면?

▲제23대 총선이 한참 남지 않았나. 현역인 국회의원 한 명 한 명 붙잡고 바뀌라고 애원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지금 의석 그대로 다음 총선까지 가야 한다. 그래도 비관적으로 보지 말자는 이야기다. 우리는 성숙한 사회로 향하는 대가를 치르고 있다. 뼈를 깎는 대가를 줄이려 노력은 하겠지만 지금의 고통 역시 필요한 시간이다.

-현 상황을 비관적으로 보지 말자고 하셨다. 최근 우리 사회에서 희망을 품을 일이 있는지?

▲나는 앞날을 낙관적으로 보는 사람이다. 어떤 상황이든 희망을 놓지 않고 산다.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의 잠재력을 발휘하는 사회 분위기를 만들고 그런 시스템을 제도로 갖추면 나라가 빠르게 성장할 것으로 본다. 대한민국은 비슷한 어려움을 수없이 겪었지만 그럼에도 이 정도의 국가를 만들었다. 보통 능력으로는 안 되는 일이다.

또 하나 예를 들자면 지금 경제체제가 유지되고 있지 않나. 민생은 경제고, 경제는 국력의 바탕이다. 경제가 망가지면 국가가 무슨 소용인가? 반복되는 악조건 속에서도 기업은 굉장히 잘 해줬다. 정치적으로 혼란스러운 와중에 부도가 나기는커녕 성장한 곳도 있다. 새삼 대단하지 않은가. 그런 점에서 우리 기업과 기업인의 역할이 굉장히 중요하다.

-2026년 새해를 맞아 국민에게 덕담 한마디 부탁드린다.

▲희망을 품자고 말했지만 국민도 지친 것 같다. ‘이번 국면만 지나면 좀 낫겠지’ 했더니 비슷한 일이 반복됐다. 한때 정치권에 몸을 담았던 고위 관료로서 국민에게 미안한 마음이 아주 크다. 하지만 우리 국민은 워낙 총명하다. 혼란의 시기도 언젠가는 지난다. 그날이 오면 국가가 경제적으로 윤택해지고 정서적으로 안정될 것이다.

<hypak28@ilyosis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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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이태리 석유 재벌 행세’ 이상한 경찰 수사 내막

[단독]‘이태리 석유 재벌 행세’ 이상한 경찰 수사 내막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광주에서 일어난 ‘장윤기 사건 증거인멸’ 논란으로 경찰 조직이 시험대에 올랐다. 피의자 가족이 나서서 증거를 없애고 이 과정에 주변 경찰이 적극적으로 관여했다. 이 사건으로 검찰청 해체 이후 수사 권력을 한 손에 쥘 경찰에 대한 국민의 신뢰도가 떨어지고 있다. 한 여고생이 일면식도 없던 남자에게 살해됐다. 여학생을 구하려던 남학생은 크게 다쳤다. 경찰이 범인을 검거했고 사건의 심각성에 따라 얼굴을 공개했다. 생떼 같은 10대 여고생의 황망한 죽음에 국민은 경악했다. 하지만 국민이 더 분노한 지점은 따로 있었다. 수사 과정에서 드러난 비위 의혹은 경찰 조직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졌다. 조직 명운 달렸다 장윤기 사건에서 수사 기밀 유출, 증거인멸, 초동수사 부실 등의 의혹이 제기됐다. 무엇보다 충격적이었던 부분은 장윤기의 혐의를 경찰이 나서서 축소하려 했다는 의혹이다. 경찰은 장윤기에게 강간·살인이 아닌 일반 살인 혐의를 적용했다. 이 과정에서 형량이 더 높은 강간·살인 혐의를 입증할 케이블 타이 등의 증거를 경찰이 없앴다는 의심을 받고 있다. 이 같은 사실은 검찰의 보완수사로 드러났다. 현재 정치권은 해체될 검찰에 보완수사권을 남겨둘지를 두고 팽팽하게 맞서고 있다. 심지어 여권에서도 입장이 엇갈린다. 이런 상황에서 검찰의 보완수사로 경찰의 부실 수사 문제가 확인되면서 권력을 한쪽에만 과도하게 몰아줘서는 안 된다는 여론이 부상하고 있다. 홍석기 국가수사본부장이 장윤기 사건에서 드러난 경찰 유착 의혹을 두고 “명운을 걸고 수사하겠다”고 말한 것은 조직에 대한 국민의 불신을 최대한 불식하겠다는 의도도 담겼다는 게 중론이다. 안 그래도 검찰청 해체로 수사 공백에 대한 우려가 제기되는 상황에 이번 일로 그동안 쌓아온 ‘공든 탑’이 무너질 수 있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경찰 수사를 의심하는 목소리는 곳곳에서 나오고 있다. 2023년 8월 공동대표였던 하모씨를 업무상 배임 혐의로 고소한 R스타트업의 이모 대표도 그 가운데 한 사람이다. 이 대표는 하씨가 회사를 그만둔 이후 단독대표가 돼 R스타트업을 떠안았다(<일요시사> 1493호 ‘<단독>스타트업 대표 1000억대 역외탈세 의혹’). 앞서 두 사람이 공동대표일 무렵 R스타트업은 활로를 모색하기 위해 마스크 사업을 추진하기로 했다. 코로나19 팬데믹으로 국내에서 마스크 품귀 현상이 있던 때였다. 하씨는 마스크 사업을 주도적으로 진행했고 아버지가 운영하는 필리핀의 법인을 이용해 수급하겠다고 했다. 미국의 한 회사와 판매 계약까지 체결하는 등 순조롭게 진행되는 듯했던 사업은 ‘마스크를 수급할 수 없게 됐다’는 하씨의 말에 흐지부지됐다. 이후 마스크 관련 이야기는 나오지 않았고 하씨는 R스타트업을 떠났다. 2022년 3월경에는 서로 연락도 끊겼다. 하씨의 회사 이메일 계정도 이 시기에 정지 조처됐다. 회사와도, 사적으로도 이 대표와 하씨의 관계가 끝난 것이다. 상황은 2023년 6월 이 대표가 하씨의 이메일에서 석연찮은 점을 발견하며 반전됐다. 장윤기 사건으로 신뢰 바닥 새로운 자료 찾아도 시큰둥 이 대표는 하씨의 이메일을 통해 흐지부지된 줄 알았던 마스크 사업이 몰래 진행됐다는 사실을 파악했다. 하씨가 가족과 지인을 동원해 마스크를 수급하고 수출해 상당한 돈을 벌었다는 사실도 이 시기에 알게 됐다. 극심한 배신감을 느낀 이 대표는 하씨를 업무상 배임 혐의로 인천 연수경찰서에 고소하기에 이른다. 연수경찰서는 하씨의 마스크 거래 규모를 1000억원대로 판단했고 수사를 인천경찰청 반부패경제범죄수사계로 넘겼다. 이 대표에 따르면 당시 연수경찰서에서 추정한 하씨의 마스크 거래 규모는 1400억원에 달한다. 이 대표는 “하씨는 회사(R스타트업) 메일 계정을 이용해 마스크 거래를 진행했다. 그사이 회사에는 일언반구도 없었다”고 주장했다. 이 대표를 더욱 화나게 한 건 경찰의 태도였다. 처음 사건을 맡은 인천경찰청 반부패경제범죄수사1계는 미진한 수사 태도로 이 대표의 불만을 샀다. 이 대표는 “하씨가 한국에 있지도 않은데 출국금지를 걸지를 않나, 경제범죄를 수사하면서 CFO가 뭐냐고 묻질 않나, 이렇게 많은 양의 자료를 제출했는데 고소인 조사를 20분밖에 하질 않나, 수사 자체가 엉망이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인천경찰청 반부패경제범죄수사1계는 2024년 2월 말 하씨를 불송치 처분했다. 하지만 인천지방검찰청(이하 인천지검)의 판단은 달랐다. 인천지검은 필리핀과의 국제 공조 수사를 통해 하씨와 가족의 해외 계좌를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고 했다. 경찰의 불송치에 대해 보완수사를 해야 한다고 본 것이다. 이때가 2024년 3월이다. 경찰 수사에 답답함을 느낀 이 대표는 하씨와 관련된 자료를 이 잡듯이 뒤졌다고 한다. 특히 하씨의 회사 계정으로 오간 이메일을 꼼꼼히 살폈다. 그 결과 하씨가 카카오뱅크를 통해 6개월 동안 거래한 내역을 찾아냈다. 이 대표는 거래 내역에서 가족으로 추정되는 인물과 돈이 여러 차례 오간 것을 발견했다. 이 대표는 “2024년 5월에 거래 내역을 발견해 바로 경찰에 전달했다. 경찰이 나를 조사에 부른 건 (그해) 8월경이었는데 그때까지 거래 내역에 대한 어떤 수사도 이뤄지지 않은 상태였다. 그보다 제대로 파악조차 못하고 있었다”고 분통을 터트렸다. 그러면서 “수사 권한도 없는 일반인이 이 정도로 자료를 찾아 건넸으면 좀 들여다봐야 하는 것 아닌가. 일반 국민은 경찰보다 계좌 접근 권한이 제한돼있지 않느냐”고 따져 물었다. 고소 이후 3년 지나 하씨와 그 가족의 필리핀 계좌를 보기 위한 국제 공조에도 시간이 지체됐다고 토로했다. 검찰에서 보완수사를 요구한 때가 2024년 3월29일이었는데 그해 7월에서야 공조 요청을 했다는 것이다. 이 대표는 “처음 고소인 조사를 받을 때부터 필리핀 법인 이야기를 숱하게 했다. 필리핀 법인에 보낸 은행 송금증, 해당 필리핀 법인이 운영하는 SNS 내용, 현지 언론 기사까지 제출했을 때는 나 몰라라 하다가 보완수사가 떨어지고 나서야 공조를 진행하면 기다리는 고소인은 답답해서 죽는다”고 말했다. 하씨의 지인으로 추정되는 인물이 써준 사실확인서도 문제로 지적했다. 이 대표는 “해당 인물이 사실확인서를 써준 이후에 하씨와 함께 사업한 의혹이 있다. 이런 사람이 써준 사실확인서를 믿을 수 있나. 경찰 조사에서 이 부분을 상세하게 진술했는데 ‘고소인은 ○○○의 사실확인서를 믿을 수 없음’ 이렇게 한 줄만 적었더라. 근거를 가지고 말했는데 경찰은 나를 ‘우기는 사람’으로 만들어 버린 것”이라고 비판했다. 눈여겨볼 대목은 이 대표가 경찰에 제출한 자료로 인천경찰청 반부패경제범죄수사1계에서 하씨를 불송치 처분할 때 근거가 됐던 내용을 다시 들여다볼 여지가 생겼다는 점이다. 당시 인천경찰청 반부패경제범죄수사1계는 불송치 이유로 ▲(하씨가) 거래대금을 몰래 착복하려는 의도가 전혀 없었고 ▲실제 거래가 성사된 사실이 없다면서 배임 혐의를 부인한 점 등을 들었다. 이때 ▲미국 A사와의 거래 과정에서 필리핀 법인을 사용하기로 합의한 점 ▲미국 A사 측의 거래 취소 요청 이메일 ▲계약 관련자의 사실확인서 등을 ‘혐의없음’의 근거로 제시했다. 즉, 경찰은 하씨가 마스크 사업을 진행하지 않았다고 본 것이다. 마스크 사업으로 수익을 본 것도 없고 그러니 배임 혐의도 확인되지 않는다는 것. 이 대표는 “카카오뱅크 거래 내역은 마스크 사업 과정에서 돈이 오간 흔적으로 추정할 수 있다. 이 부분에 대한 수사가 필요하다고 말한 것이고, 사실확인서 역시 동업 관계에서 나왔기에 그 배경을 더 들여다봐야 한다는 뜻을 전했다. 이 자료만 제대로 봤어도 수사가 달라졌을 것이라 확신한다. 경찰의 결론 자체를 뒤집는 자료 아닌가”라고 답답함을 토로했다. 특히 지난해 1월 이 대표는 하씨의 카카오뱅크 거래 내역에 자주 등장하는 인물의 정체를 밝혀내기에 이른다. 하씨가 마스크를 수출하는 과정에서 수급을 담당한 업체가 있는데, 그곳의 대표와 이름이 같았던 것이다. “확인해 달라” 호소에도… 또 이메일을 확인하면서 하씨가 2억4000만원에 이르는 신용 미수 거래를 한 내역도 찾아냈다. 증권사에서 돈을 빌려 주식을 했다는 뜻이다. 이 대표는 “신용 미수 거래금이 2억원이 넘는다는 건 담보 제공 현금이 1억5000만원 이상 있다는 의미로 알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마스크 사장 이름을 알아낸 것도 그렇다. 대단한 기술을 쓴 것도 아니고 거래 내역에 있는 사람 이름과 다른 단어를 인터넷에서 조합해 검색했더니 내용이 나왔다. 이건 내가 다 수사한 것이나 다름없다”고 강조했다. 이 대표의 적극적인 행보에도 경찰은 인천경찰청 반부패경제범죄수사1계에서 2계로 수사팀을 한 차례 바꾼 것 빼고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지난해 4월30일 ‘수사 중지’를 결정했다. 국제 공조 수사 결과를 기다려야 한다는 게 근거였다. 이 대표는 하씨의 거주지 주소가 바뀐 것을 지적하면서 ‘이송’을 요청했지만 ‘보완수사 중에는 관할지 이송이 불가능하다’는 말을 들어야 했다. 이후 수사는 1년 넘게 멈춘 상태다. 이 대표는 국세청에도 관련 내용을 제보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경찰과 국세청에 같은 자료를 냈는데 국세청은 조사를 진행한 뒤 하씨가 ‘탈세를 한 게 맞다’는 취지로 답했다. 하지만 경찰에 그 사실을 알리자 ‘국세청 관계자와 통화했는데 사건과 관련 없다고 말했다’고 하더라. 국세청에 확인했더니 ‘기밀이라 말해줄 수 없다고 했다’는 말이 돌아왔다. 왜 거짓말까지 하는지 모르겠다”고 토로했다. 문제는 그사이 하씨가 다른 사업을 벌이고 있다는 점이다. 이 대표는 “지난해 9~10월경 가상자산 전문 매체 기사에서 하씨의 영어 이름을 발견했다. 하씨가 ‘키키캣 코인’이라는 걸 만들었는데 이게 사기라는 내용이었다. 또 다른 인터넷 커뮤니티에서는 하씨가 코인사업을 하면서 ‘이태리 석유 재벌의 아들’인 척했다는 글도 발견했다”고 주장했다. 불송치했다 보완수사 결정 “그건 1계에서 처분한 것” 이 대표의 주장대로라면 하씨는 업무상 배임 혐의로 수사를 받는 도중에 또 다른 사기 행각을 벌였다는 뜻이 된다. 이 대표는 “(키키캣 코인의) 시가총액이 1억달러까지 올랐다가 현재 100만달러까지 떨어진 걸로 안다. 키키캣 코인을 구매한 사람들이 모인 단체채팅방에 참여하고 있는데, 지금은 피해자 방이나 다름 없다”고 설명했다. 이 대표는 중지된 수사를 재개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최근에는 하씨의 여동생으로 추정되는 인물이 페이퍼컴퍼니를 운영한 사실도 발견했다. 그는 “하씨와 거래한 마스크 제조업체는 여러 곳인데 수출을 진행한 곳은 하씨 동생 명의의 페이퍼컴퍼니로 확인된다”며 “이 내용을 근거로 수사를 재개해 달라고 요청했는데 (경찰은) ‘규정 위반’이라고 윽박질렀다”고 주장했다. 경찰 수사 규칙 제102조(수사 중지 사건 수사 재개)는 ‘경찰은 수사 중지된 사건의 피의자를 발견하는 등 수사 중지 사유가 해소된 때에는 …(중략)… 즉시 수사를 진행해야 한다’고 명시했다. 여기서 경찰과 이 대표의 주장이 엇갈린다. 경찰은 수사 재개에 필요한 요건을 국제 공조 수사 결과라고 말했다. 반면 이 대표는 새로운 증거가 나왔는데 왜 수사를 재개하지 않느냐는 입장이다. 이 대표는 “필리핀과의 국제 공조 결과가 아직 회신되지 않았다는 건 하씨의 해외 (계좌) 자료가 필요한 일부 수사에 제약이 있다는 뜻일 뿐이다. 하씨의 마스크 사업 규모를 확인하는 정도에 필요한 자료”라며 “하씨의 여동생이 페이퍼컴퍼니를 갖고 있다는 의혹은 수사가 시작된 이후 3년여 동안 단 한 번도 나오지 않은 내용이다. 수사를 재개하고 관련 계좌에 대한 압수수색을 다시 진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인천경찰청 반부패경제범죄수사2계 담당자는 “국제 공조 수사 결과가 올 때까지 수사를 재개할 수 없다”는 태도를 고수했다. 하씨의 혐의를 입증하기 위해서는 국제 공조 수사 결과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국제 공조 수사 결과가 언제쯤 올 것으로 예상되냐는 질문에도 “알 수 없다”는 말만 돌아왔다. 또 앞서 하씨를 불송치한 내용에 대해 거론했을 때는 “그 부분은 1계에서 처분한 것”이라며 “우리(2계)는 검찰의 보완수사 요청 이후 수사를 시작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고소인이 제출한 자료는 경찰 수사 규칙에 따라 사건 기록에 편철해 놨다”며 “국제 공조 수사 결과가 없어도 수사를 재개할 수 있는지 국수본(국가수사본부)에 질의해 둔 상태”라고 말했다. 언제까지 기다려야 수사가 길어지는 사이 하씨가 또 다른 일을 벌이고 있는 부분에 대해서는 “범죄 혐의가 확인되지 않은 부분 아닌가. 피고소인이 현재 받는 업무상 배임 혐의 외의 별건 수사가 될 수 있다”고 덧붙였다. 그러면서도 이 대표가 담당 수사관에게 언급한 하씨의 코인 사업 관련 내용에 대해서는 “확인해 줄 수 없다”고 했다. <jsjang@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