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시사 취재2팀] 김해웅 기자 = ‘중국 바둑의 자존심’으로 불리는 커제 9단이 한국서 열린 메이저 대회서 반칙패를 당하는 사상초유의 사태가 발생했다.
사건의 발단은 지난 22일, 서울 성동구 소재의 한국기원 신관 대회장서 열린 제29회 LG배 기왕전 결승 3번기 2국서 벌어졌다. 커제는 이날 한국의 변상일 9단과의 경기서 18수 착수 후 따낸 돌(사석)을 사석통에 넣지 않고 손에 들고 있다가 경고 1회를 받았다.
이후 82수 만에 같은 실수를 반복하면서 경고 누적(2회)으로 반칙패했다.
한국기원에 따르면, 국내 바둑대회 경기 규정상 ‘사석을 통 뚜껑에 보관하지 않는 경우’(제4장 벌칙 제18조 경고 조항), ‘경고가 2회 누적된 경우’(제19조 반칙 조항) 반칙으로 인정한다.
대회 주최 측에서 커제의 반칙패를 선언하자 중국 측에서도 이의를 제기했다. 하지만 한국 바둑 경기 규정이 사전에 이미 고지됐던 점, 영상 판독 결과 문제의 장면 후 커제가 추가로 한 차례 더 착수하면서 대국이 진행됐던 점을 근거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날 대국 심판은 한국의 유재성 5단이 맡았다.
한국기원에 따르면, 경기 규정을 개정하고 지난해 11월부터 한국기원 주최 및 주관의 모든 대회에 적용해 왔다. 또 중국을 비롯한 모든 외국 단체에도 이 같은 개정 사항을 사전에 공지했다. 통상 바둑 국제경기는 주최국의 룰을 따르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
바둑 세계 메이저 대회서 반칙패가 나온 것은 사상초유의 일이다.
변 9단이 커제의 반칙패로 1승을 거두면서 23일 결승 3국서 3억원의 주인공을 가리게 됐다. 이날 변 9단이 커제 9단에 승리를 거두면서 상대 전적은 7전 전패서 8전1승7패이 됐다.
바둑계 일각에선 ‘결국 터질 게 터졌다’는 반응도 있다.
익명을 요구한 한 바둑계 관계자는 “사실 이번 규정은 지난해 삼성화재배부터 바뀌었는데 당시엔 결승이 중국 기사끼리 대국하다 보니 제대로 적용되지 않았다가 이번 LG배 결승부터 강하게 적용됐다”며 “룰이라는 것은 일관성 있게 지켜져야 하는 것인데 아쉽다”고 말했다.
바둑판 위에 남은 돌의 개수로 승패를 좌우하는 중국식 바둑과는 달리, 한국은 집의 개수를 계산하는 방식이다 보니 서로의 규정에 익숙할 수밖에 없고 결국 혼란을 초래할 수밖에 없다는 지적이다.
이 관계자에 따르면 한국과 일본의 바둑은 입문 때부터 사석통에 사석을 담는 것을 기본으로 배워 자연스레 습관이 되는 데 반해 중국은 자유로운(바둑판 위에만 두지 않으면 무관) 방식으로 운영하고 있다. 실제로 중국 대국에선 바둑판 아래에 흑백돌들이 뒤섞여 있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회는 한국서 치러졌고, 경기 규정도 이미 사전에 공지됐었기 때문에 주최 측의 판정은 문제가 없다는 반론도 제기된다. 한 아마추어 바둑인은 “국내 경기는 대국 중 사석의 수를 파악해야 판의 형세를 판단할 수 있어 반드시 사석은 통에 넣도록 규정하고 있는데 커제가 룰을 지키지 않은 것”이라고 주장했다.
국내 바둑계에선 현대 바둑은 일본에서 정립됐으며, 집 계산 등 대부분의 바둑 룰도 일본 방식이 대세였다는 기류가 강하다. 실제로 중국의 문화 개방 이전엔 바둑은 일본, 한국, 대만의 전유물이나 마찬가지였다. 조남철, 조훈현, 임해봉 등 초기 국내 기사들은 일본 유학파 출신이기도 했다.
중국의 개방 이후로 ‘응창기’라는 부호가 응씨배라는 바둑 세계대회를 창설하면서 응씨진만법이라는 새로운 집 계산 방법을 도입한 것이 현재까지 중국 룰로 통용되고 있다.
커제 9단은 지난 2018년 11월부터 51개월 연속 중국 바둑 랭킹 1위를 유지하는 등 명실공한 중국의 바둑 스타다.
앞서 지난 2016년 3월, 구글의 딥마인드가 개발한 바둑 인공지능(AI) 알파고와의 세기의 대결서 한국의 이세돌 9단이 2연패를 당하자 “이세돌이 0-5로 질 수도 있을 것”이라며 “인류 대표 자격이 없다”고 말했다가 빈축을 샀던 바 있다.
당시 5전 3선승제의 경기 제 4국에서 이세돌은 ‘신의 한 수’로 평가받는 78수를 놓으며 인류 최초로 AI와의 바둑 대국서 승리를 따내며 전 세계적인 스타가 되기도 했다.
이세돌 9단을 평가절하했던 커제는 이듬해 5월16일, 홈그라운드이자 고향인 중국 저장성서 업그레이드된 알파고와 대국을 펼쳤지만 단 1국도 챙기지 못한 채 3연패를 당하는 수모를 겪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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