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달러화에는 환율 개념이 없다. 미국 이외의 모든 나라 환율은 미국 달러화를 기준으로 결정된다는 점에서 언제나 가치 상대적이며 유동적이다. 그 가치의 변화는 한 나라의 경제를 살리기도 하고 무역 경쟁서 도태시키기도 한다.
통화 경제서 달러화가 갖는 엄청난 ‘표준의 힘’은 공평하지도 공정하지도 않지만 그걸 이유로 대놓고 불평하는 나라는 없다. 그래서 더 나은 시스템은 아직 개발되지 않고 있는지도 모른다.
미국 달러가 기축통화가 된 건 미국의 경제, 군사능력 때문만은 아니다. 모든 나라가 미국이란 절대 강자의 선의에 기대한 것도 아니다. 어떤 나라와도 비교할 수 없는 절대적 금 보유량 때문이었다. 미국이 아닌 미국의 금을 신뢰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금에 기초한 달러화 기축통화 제도는 1944년부터 1971년까지 불과 27년 동안만 유지됐다.
미국은 신뢰를 바탕으로 하는 자본주의서 신뢰를 빼내서 ‘미국의 힘’의 원천으로 삼았다. 미국의 패권적 지위는 다른 나라의 자발적 또는 비자발적 기여에 근거한 셈이지만 이 역시 모두가 만족했던 건 아니다. 불만이 있다고 해도 달러 결제 시스템을 대체할 더 나은 제도를 대안으로 제시한 나라는 아직도 없다.
비트코인의 등장은 과연 세계 통화 시스템에 어떤 변화의 단초라도 제공할 수 있을까? 새로운 기대가 시작된 이유는 비트코인으로 통칭되는 암호화(가상) 화폐(Cryptocurrency)가 블록체인(Blockchain) 기술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이다.
모두가 공유하는 거래 원장은 오히려 거래의 안정성을 높였다. 그 지급 결제의 안전성 면에서는 결제통화로서 미국 달러화가 독점하고 있는 권위를 대체할 수 있는 수단이 생겼다고 볼 수 있다.
지금의 달러 시스템에선 개인 간 또는 국가 간 국경을 넘는 모든 지급 결제는 중간결제은행을 거치며 달러 중개 시스템 안에서 모니터링된다.
하지만 블록체인 기반 지급결제는 일정 수준의 익명성이 보장된다. 범죄의 목적이나 수단으로 이용되지 않는 한, 보장돼야 하는 자유로운 거래와 결제에 필요한 비밀유지 기능은 달러 시스템보다 우월한 면이 있다고 보는 이유다.
미국이 허용하지 않는 국가나 상품의 무역 거래가 불가능한 현실이 온전히 정당하지 않다면 달러화의 대체재를 찾으려는 노력이 전혀 의미 없는 것도 아니다. 선의를 가졌던, 악의를 가졌던 미국이 가진 의지에만 기대서 모든 나라가 영원히 교역을 하며 살게 될 거란 확신도 없다.
비트코인이 무슨 본질적 가치를 가졌냐고 의문을 갖거나 거부하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금과의 교환 약속을 버리고 종잇조각으로 전락한 건 달러화였다. 그러면서도 달러화는 본질가치를 의심할 수 없는 금의 가치(가격)까지도 지배하는 절대 통화가 됐다.
공정한 경쟁의 결과물로서가 아니라 지금까지 풀어낸 달러화로 미국 경제는 ‘나 홀로 호황’을 이어왔다. 기준금리 인하에 나서는 미국은 앞으로 더 많은 달러를 풀어내려 하지 않을까?
군사력이 약해지거나 경제력이 약해서 로마제국이 멸망의 길로 들어선 게 아니다. 그 시작은 로마 금화에 가치 없는 금속을 뒤섞으면서부터라지만, 먼저 무너진 건 권위가 아니라 신뢰였다. 금이 권위를 회복하고 화폐 가치의 기준으로 다시 등장할 수 있을지는 알 수 없다.
혼돈의 시대가 온다면 암호화폐가 아니라도 또 어떤 화폐가 등장할지 알 수 없다. 기대보다는 우려가 훨씬 크지만 달러가 아닌 금과 암호화폐의 미래를 지켜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조용래는?]
▲ 전 홍콩 CFSG 파생상품 운용역
▲ <또 하나의 가족>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