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 2024.10.05 00:01
‘와타나베 부인’(Mrs. Watanabe)이란 이름은 30년 세월의 저금리 환경에 적응하려는 일본인을 상징한다. 경기침체(Recession)는 물가하락(Deflation)을 이끌고 낮은 물가는 경제를 더 끌어내리는 악순환을 겪었다. 일본의 실질금리가 마이너스 경로에 빠져들었다는 것은 은행에 돈을 맡긴 국민이 이자를 받기는커녕 오히려 돈 보관비까지 물게 된 것과 마찬가지다. 한 푼의 이자 수입이 절실한 일본인이 금리 관점으로만 엔화를 바라본다면 엔화는 돈도 아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다른 나라의 돈, 그 중에서도 단연 미국 달러화다. 일본과 미국의 기준금리 차이는 계속 확대돼 5.5%에 이르렀다. 와타나베 부인 입장서 캐리트레이드는 더 나은 선택이 아니라 생존 그 자체였을 것이다. ‘엔캐리트레이드’라는 이름의 투자 방식은 우리나라에도 영향을 크게 끼쳤다. 1990년대 후반, 국내 외환위기 때, 외화대출 중에서도 특히 엔화 대출은 악명이 높았다. 눈떠보니 하루아침에 대출금이 두 배, 세 배로 커지는 기현상이 벌어졌다. 안전자산으로 인식되던 달러/엔 환율은 떨어지고 심각한 경제위기를 맞은 우리나라의 원화는 달러당 800원 선에서 2000원 위로
엔화 환율이 심상치 않다. 1000원 대 100엔, 그 오래된 교환 비율이 깨진 건 벌써 지난해 일이다. 2008년 이후 가장 낮은 100엔 대 850원을 기록하고 있다. 가성비 좋아진 일본 여행 수요가 폭발한다. 그러나 우리 돈 가치가 상승하는 효과가 마냥 편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우리 경제가 튼튼해졌고 원화 실질 가치가 높아진 건지 분명히 말하기 어렵다. 당장 내년 우리 원화 환율은 어떻게 될까? 엔화 가치, 가만두면 어디까지 내려갈지 모르겠다는 얘기는 일본 은행서 나온다. 1970년대 엔화는 달러 대비 270원도 넘었다. 시장가격엔 ‘영원한 고점도 영원한 저점도 없다’는 말이 틀리지 않다면 엔화 환율의 역사적 고점까지는 아직 110엔의 여유가 있는 셈이다. 내년 또는 더 먼 미래에 엔화 가치가 크게 변한다면 우리의 고민은 한 가지다. 우리나라에 좋은지 나쁜지,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될지 뿐이다. 어느 나라나 마찬가지지만, 개별 국가의 환율은 미국 달러화 가치에 종속돼있다. 270엔을 넘어갔던 엔화 환율이 100엔 아래로 곤두박질친 건 미국의 결정이었다. 미국의 결정을 일본이 수용했단 점은 분명하지만 ‘플라자 합의’란 이름처럼 정말 아름다운 합의를 이뤘던
1990년대 후반, 외환위기를 겪었던 우리는 환율 뉴스에 유난히 민감하다. 특히 환율 급등(원화 가치 하락) 소식엔 더 그렇다. 이름이 외환위기라서 그렇지, 당시 국가 경제 파탄 원인 중에서 얼마나 많은 부분이 외화(달러) 부족에 기인한 것인지 명확히 알지 못한다. 무지한 상태의 우리에겐 트라우마가 있다. 경제위기란 단어가 뉴스에 등장하면 즉각 달러 부족을 떠올린다. 수입 물가를 걱정하는 건 소비자, 그중에서도 서민이다. 수출 대기업은 환율이 오르면 오히려 단기적으론 이익이 늘고 조금 길게 봐도 가격 경쟁력이 커진다. 환율정책이 국가 경제에 어떤 영향을 끼치게 될지 단편적으로 말하는 건 어렵지만, 국민 소비 생활엔 확실히 즉각적인 악영향을 끼친다. 수입 생필품과 식품, 원재료의 가격상승은 물가를 직접 자극하기 때문이다. 환율이 급등하면 정부는 시장에 개입한다. 최소한 ‘개입하는’ 흉내라도 내야 한다. 언론을 통해 구두로 개입하거나 때로는 달러를 풀어서 실제로 개입하기도 한다. ‘강 건너 불구경’하느냐는 따가운 여론을 모른 체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환율 방어를 위해 실탄으로 쓸 수 있는 달러가 얼마나 있는지, 어떤 구체적인 계획을 가졌을지 모든 국민이 알 수는
화폐 가치로 표시되는 세상 모든 물질의 가치는 시간이 가면 자연 감소한다. 간혹 귀중한 사료적 가치나 보존 가치가 있는 골동품이라면 예외가 되기도 한다. 때론 가치가 오르락 내리락하지만 충분한 시간이 지난다면 예외가 없다. 가격이 오른다는 게 반드시 물질의 가치가 상승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화폐의 가치가 떨어진 결과 물건에 표시된 숫자(가격)가 커지기도 한다. 수요와 공급의 불일치가 가격 변동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돈(가격)과 사물의 관계는 평행하지 않아서 그 명목가치와 실질적 가치가 일치하지도 않는다. 다만, 원화 가치에 달러화의 관계가 개입되면 얘기는 훨씬 복잡해진다. 어떤 통화로 가격을 표시하느냐에 따라 상대적 가치는 시시각각 변한다. 사람들은 자신이 가진 물건의 값이 오르기를 고대한다. 그것이 본질 가치가 아니라 숫자일 뿐이라도 그렇다. 가장 대표적인 건 주식과 부동산이다. 이것의 가치 평가는 너무도 주관적인 영역에 속하므로 시장가격에 의해 표시될 수밖에 없다. 이런 생각에 반대하는 사람도 공감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지금 우리 경제를 보면 주식과 부동산 같은 자산 가격의 대폭락 조짐이 보인다. 경제의 흐름에 이상 징후가 느껴진다는 얘기다. 세상에 돈이
가난할 땐 힘들어도 희망이 있었다. 저축률은 30%를 훨씬 넘었다. 사람들은 성실하게 일하며 적금을 들었고 가정을 꾸릴 꿈을 꿨다. 1988년 서울올림픽이 열리고도 한동안 고속 성장을 이어갔다. 1997년의 외환위기를 맞이하기 전의 대한민국은 그랬다. 신자유주의를 받아들인 한국은 세계를 향해 금융시장을 열었다. 저축하던 개인은 투자자로 변신했다. 역설적이게도 과도한 기업부채로 발생한 외환위기가 지나자 가계부채가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은 외환위기 극복에 유효했다는 평가와 극단적인 양극화 문제의 본질적인 원인이라는 비판을 동시에 받는다. 사람들은 부채를 두려워하지 않게 됐다. 저금리 시대엔 현명한 빚쟁이가 오히려 빛을 발했다. 누구나 대출받아 집을 사고 주식을 샀다. 소비는 미덕이 됐고 노동 소득은 오히려 가난의 상징처럼 느껴졌다. 지금도 전혀 다르지 않다. 고금리와 고물가가 아직 익숙하지 않아서인지 사람들은 금리가 떨어지기만을 기다린다. 마약성 진통제가 치료제가 아니듯 저금리가 유일한 최선책이 아니란 건 누구나 알고 있다. 하지만 저금리의 환각은 강력하다. 가계부채는 여전히 늘어나고 있고 자영업자들은 비명을 지르고 있다. 부동산 위기도 몸으로
중국 동방항공 화물기에 가득 실린 상품은 한국뿐 아니라 전 세계를 향해 날아간다. 수십년 동안 생산, 공급능력을 확장해 온 중국을 외면할 수 있는 나라는 거의 없다. 글로벌 공급망을 중국 상품이 장악한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지만 불과 몇 년 전과 달라진 것이 있다. 중국 생산자가 외국의 기업이나 국가에 공급하던 중간제품, 완제품이 지금은 많은 나라의 가정과 개인에게 직배송되기 시작한 것이다. 중국의 기술력 확장을 막아 세우려는 미국의 치열한 공격은 멈출 기세가 없다. 중국 산업이 위축되고 경제는 활력을 잃어가고 있지만, 그렇다고 중국의 제조업 생산능력이나 제품 공급능력이 갑자기 사라지는 건 아니다. 신자유주의 경제의 상징으로 여겨지던 세계 경제 공급망에 균열이 조금 생겼을 뿐이다. 1970년대 오일 쇼크를 겪으면서 치솟은 물가로 미국만 고통을 받은 건 아니었지만 미국은 가장 빨리 적극적으로 대안을 만들어냈다. 중국을 시장경제로 끌어내 새로운 공급망을 구축하는 데 성공했다. 미·중 간의 핑퐁 외교는 덩샤오핑의 개혁개방 신호탄이 됐다. 하지만 더 먼저 중국을 찾았던 이는 월마트의 창시자 샘 월튼이었다. 연방준비제도(연준)가 기준금리를 20%대로 끌어올리며 물
‘공중분해(Mid-Air Decomposition)’란 말은 어떤 것이 갑자기 사라지거나 노력이 허사로 돌아간 상황 또는 손해를 보면서도 아무것도 건질 게 없어진 경우에 비유적으로 사용된다. 운항 중 폭발한 항공사고를 떠올리기 쉽다. 하지만 이 경우에도 잔해는 남는다. 바닷속에 영원히 가라앉을망정 사라지진 않는다. 다만 찾을 수 없거나 찾지 않을 뿐이다. 진실이 은폐되는 불편하고 보편적인 방식이다. ‘소실(消失 또는 燒失)’은 원형을 복원할 수 없을 정도로 망가지고 실체가 사라진 상태로서 관리나 보관을 잘하지 못해 무엇을 잃어버린 형편을 뜻한다. 뭔가 불에 타 잿더미가 된 경우에 흔히 쓰인다. ‘공중분해’됐다면 이유가 있을 것이고 ‘소실’이라면 흔적이라도 남아야 한다. 이번 ELS 손실 사태에 대한 <주간동아> 보도에 왜 ‘공중분해’와 ‘단순 소실’ 같은 단어가 등장한 것일까? “피해자 손실분이 은행이나 증권사 몫으로 돌아가는 건 아니다”거나 “ELS 판매자(은행 또는 증권사)와 ELS 매수자의 손익이 대칭적이지 않다”고 보도한 것은 말장난에 불과하며 피해자를 우롱한 것과 다름없다. 왜냐면 여기서 ‘대칭관계’는 ELS를 만들거나 판매한 증권사나 은
ELS 사태로 원금 손실을 입은 피해자들은 ‘국민의 등에 칼 꽂은 은행’을 향해 울분을 토한다. 그러면서 손실 위험 고스란히 품은 금융상품의 설계 제조 책임은 왜 아무에게도 묻지 않을까? 정작 수수료 듬뿍 얹어주며 판매를 맡긴 ELS 제조사, 설계자는 베일에 가려져 있다. 피해자들은 그들이 누군지 알 수도 없고 고발조차 하지 못한다. 아무리 봐도 정상적이지 않은 이 기형적 상황은 누구 책임일까? 이 비극적인 금융 테러 사건은 언제 어디서부터 시작된 걸까? 1980년대, 세계적인 신자유주의 물결은 거셌다. 미국 투자은행이 처음 ELS를 선보인 것도 그쯤부터다. 경쟁을 통해 경쟁력을 키운다며 시장에 자유를 선물했다. 투자은행, 상업은행 가리지 않고 자유롭게 새로운 파생 금융상품을 출시했고 자본시장의 외형은 급격하게 커졌다. 1990년대엔 유럽의 상업은행도 가세했고 본격적으로 일반인들에게 ELS를 판매하기 시작했다. IMF 사태로 불리는 외환위기가 지나고 2000년대를 맞았을 무렵, ELS는 한국에 상륙했다. 정부는 ‘자본시장 안정화’를 명분으로 삼았다. 국가 자원과 역량으론 재벌 기업의 덩치를 키우는 데 급급하면서도 정작 시장 안정화엔 전문적 지식과 정보 접근성
홍콩 H지수 파생 연결 증권, ELS 상품 투자자들에게 대량 원금 손실 사태가 발생했다. 손실을 피할 수 없었던 본질적인 이유는 사라지고 은행의 불완전판매만 논란이다. 파생상품에 대한 사회 일반의 몰이해에 기댄 금융사의 부도덕은 아무도 지적하지 않는다. 아무리 봐도 그들이 선의를 가지고 금융상품을 설계했다고는 보이지 않는다. 국민의 신뢰를 바탕으로 존재하는 은행의 책임감은 눈을 씻고 봐도 보이지 않는다. 돈을 둘러싼 뺏고 뺏기는 싸움에 개인은 언제나 패배자다. 왜 이런 불행이 끝나지 않는 걸까? 옵션(파생상품)을 간략히 설명하자면, 가격의 상승(Call Option) 또는 하락(Put Option) 가능성을 사거나 팔 수 있는 권리 정도로 이해하면 좋겠다. 옵션은 다른 어떤 상품과도 다르게 가격결정 모델이 불완전하다. 노벨상을 수상한 블랙과 숄즈의 모델을 보편적으로 사용하지만 가격도(Moneyness)가 특정 시간, 가격대서 급격히 변하는 ‘비선형성’을 극복하지 못한다. 애당초 시간의 가치 변화를 정확히 측정할 수도, 예측할 수도 없다는 의미다. 옵션가격 변동성은 본질 가치의 변화보다 가격이 변하는 속도 자체에 더 빠르고 민감하게 반응한다. 옵션의 위험은 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