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인물> ‘푸바오 할부지’ 강철원 사육사

아주 특별한 판다와 너무 아쉬운 작별식

[일요시사 취재1팀] 김철준 기자 = 37년 차 베테랑 사육사가 돌보던 판다 곰과 헤어졌다. ‘푸바오 할부지’ 강철원 사육사의 이야기다. 국내 최초 판다 자연분만 번식에 성공한 강철원 사육사는 1354일 동안 푸바오와 특별한 궁합을 선보이며 대중에게 관심을 받았다. 게다가 모친상을 당하고도 푸바오의 중국행에 동행하며 누리꾼들에게 감동을 안겨주기도 했다.

강철원 사육사가 마지막까지 책임감을 보였다. 그는 모친상 중에도 푸바오의 중국행에 동행했다.

지난 2020년 7월20일 에버랜드서 태어난 첫 번째 자이언트 판다가 1354일 만에 중국으로 떠났다. 푸바오는 2016년 3월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한중 친선 도모의 상징으로 한국에 보내온 판다 러바오와 아이바오 사이서 2020년 7월20일, 에버랜드서 태어났다. 푸바오는 국내 첫 자연번식 출생 판다로, ‘용인 푸씨’ ‘푸공주’ ‘푸뚠뚠’ 등으로 불리며 국내서 많은 사랑을 받았다.

국내 태어난 
첫 번째 판다

에버랜드는 푸바오 팬들을 위해 지난 3일 오전 10시40분부터 20분간 판다월드서 장미원까지 푸바오 배웅 행사를 열었다. 푸바오의 마지막 길을 보기 위해 6000여명의 인파가 아침부터 몰렸다.

판다월드서부터 출발한 트럭이 에버랜드 장미원 분수대 앞에서 멈춰 섰다. 이날 강 사육사와 송영관 사육사가 판다 팬들에게 감사 인사를 전했다.


강 사육사는 “새로운 판생을 찾아 여행을 떠나는 푸바오를 지금까지 사랑해 주셔서 감사하고, 푸바오를 영원히 기억해달라”고 말했다. 송영관 사육사는 “팬들의 사랑 덕분에 푸바오가 잘 성장했다. 푸바오와의 행복하고 아름다운 이야기에 1354일간 함께해 주셔서 고맙다”고 소회를 전했다.

푸바오 팬들은 사육사에게 “그동안 잘 길러주셔서 감사하다”며 인사를 건네기도 했다.

사육사들이 중국으로 떠나는 푸바오를 향해 편지를 낭독하기도 했다. 강 사육사는 편지를 통해 “푸바오, 검역을 받는 중에 번식기까지 잘 견뎌낸 네가 정말 고맙고 대견하다. 이제 푸바오는 어른 판다로 손색이 없을 정도로 모든 과정을 다 해냈구나. 떠나기 전 모든 과정을 이뤄낸 푸바오가 할부지는 대견스럽단다”고 말했다.

행사를 마친 강 사육사는 푸바오와 함께 트럭에 탑승한 채 인천국제공항으로 떠났다. 푸바오가 중국으로 가기 전날 갑작스레 모친상을 당했지만, 일정은 예정대로 진행됐다. 

에버랜드 한 관계자는 “푸바오와 이별을 하루 앞두고 전해진 갑작스러운 소식에 강 사육사도 상심이 매우 큰 상태”라며 “강 사육사에게 모친의 장례를 치르라고 권고했으나 강 사육사가 ‘돌아가신 어머님도 푸바오를 잘 보내주길 원하실 것’이라는 가족들의 격려를 듣고 계획대로 일정을 진행하기 한 것으로 안다”고 전했다.

주한중국대사도 강 사육사의 모친상에 애도를 표하며 깊은 감사와 위로의 뜻을 전하기도 했다. 싱하이밍 주한중국대사는 푸바오 환송행사에서 “강 사육사가 오랜 기간 한국에 온 판다 가족에 사랑과 세심한 배려로 한중 우의를 보여줬다”며 “이에 대해 깊은 감사의 뜻을 표한다”고 말했다.

이어 “특수한 날(모친상)임에도 사육사가 푸바오가 중국으로 동행하기로한 데 대해 깊이 감동했다”며 “주한중국대사관을 대표해 숭고한 경의를 표하고 가족에게도 진심으로 위로의 말을 전한다”고 덧붙였다.


37년 차 베테랑 수의사
국내 첫 맹수 인공 포육

강 사육사는 1969년 7월18일 전라북도 순창군 복흥면 산정리서 태어났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동물을 좋아했다. 강 사육사의 아버지가 토끼를 잡아 오자 몰래 풀어주기도 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강 사육사는 농업고등학교 축산과를 졸업하고 자연농원(현 에버랜드)에 재직 중이던 선배의 취업설명회를 들은 것을 계기로 1988년 1월 공채에 합격했다. 입사 초기엔 쥐, 고슴도치와 같은 소동물을 담당하며 사육사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당시 인도표범이 수많은 관람객이 보는 앞에서 새끼를 낳았다가 스트레스로 인해 새끼를 포기했다. 강 사육사는 담당 동물도 아니었지만 살아 있는 동물을 포기할 수 없다는 생각에 인공 포육을 자원했다,

하지만 당시 맹수 인공 포육은 대부분 40일을 넘지 못하고 장염으로 폐사하는 등 성공한 사례가 없었다. 강 사육사는 당시에는 인공 포육에 관한 자료가 없어 외국 원서를 찾아보고, 입대 이틀 전까지 밤낮으로 오토바이를 타고 동물원을 오가며 하루 8번, 3시간 간격으로 수유시켜 국내 최초로 맹수 인공 포육을 성공시켰다.

이후 말, 낙타 등을 돌보다 1990년대 들어 맹수 사육을 맡기 시작했으며 1994년에는 사파리서 곰을 담당한다는 이유로 한중수교 2주년 기념으로 도입된 판다 밍밍과 리리를 맡으면서 판다와의 인연을 시작했다. 당시 사파리 근무 중이었는데 사파리 일이 너무 재미있고 본인의 적성에 딱 맞는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단칼에 부서 이동을 고사했으나 다음 날 근무지가 바뀌어 있었다고 한다.

당시에는 중국과 한국이나 둘 다 동물 사육이나 판다 연구가 걸음마 단계에 머물러 있어 문제가 많았다. 

당시 한국서 사육사를 바라보는 시선은 ‘동물 밥 주고 똥 치워주는 사람’의 이미지가 강했고, 중국은 대약진운동 및 문화대혁명이 불러온 빈곤 때문에, 판다 자체는 보호받았으나 번식 및 습성 연구는 거의 되지 않았다. 1980년대 들어 본격적으로 연구가 시작됐으나, 중국서도 사육사는 밥 주고 똥 치우는 것 외에는 별로 할 일이 없었다. 

1354일간
함께하다

그런 이유로 당시 중국이나 한국서 판다 사육사라고 해봐야 비슷한 종류의 동물(주로 곰)을 오래 다뤄본 이들을 차출해 급하게 판다의 습성, 생태계 같은 간단한 노하우를 연수시킨 후 배치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고, 이로 인해 한국에서는 판다들을 위해 열어준 파티의 상차림이 백설기, 생크림 케이크 같은 사람이 먹는 음식들이라 화난 판다가 밥상 뒤집기를 시전하는 해프닝이 벌어지기도 했다. 

또 판다 종주국인 중국도 연구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 성별도 구분하지 못해 한국에는 암컷 판다로 한 쌍을, 소련에는 수컷 판다로 한 쌍을 보내는 일도 있었다.

그러나 1997년 외환위기로 인해 동물원을 찾는 이들이 줄어들면서 국가 경제 자체가 벼랑 끝에 몰린 마당에 외국에 거액의 판다 임대료를 지급해야 하냐는 범국민적 여론이 조성됐고, 설상가상으로 에버랜드를 운영하는 삼성그룹도 경영난에 시달리면서 1998년 판다 밍밍과 리리를 중국에 다시 반환할 수밖에 없었다.


이때도 강 사육사 본인이 직접 판다 밍밍과 리리를 김포공항으로 배웅했다.

이후 본래 담당 부서인 맹수 종류로 돌아가 1997년에는 국내 최초로 백호 번식을 성공시켰고, 2005년 몽키밸리(현 알버트 스페이스 센터)로 이임해 1년10개월간 오픈 준비를 맡아 2007년 몽키밸리를 오픈시켰다. 2009년에는 오랑우탄을 번식시키는 등 국내 번식이 어려웠던 동물들을 연달아 번식시키는 기염을 토했다.

2017년에는 어미에게 버림받은 황금머리사자타마린 찬이의 인공 포육과 재활을 성공시키며 부모에게 돌려보냈다.

그러던 중 강 사육사가 다시 판다를 담당하게 됐다. 지난 2014년 중국 시진핑 주석이 방한했을 당시 박근혜 전 대통령과의 회담서 판다 재도입이 논의되면서다.

강 사육사는 논의 당시 판다 사육 경험이 있는 본인이 담당자가 되지 않을까라는 기대를 했고 제의가 왔을 때 몽키밸리에서 함께 일했던 송 사육사, 이세현 사육사를 합류시키는 조건으로 판다월드를 맡기로 했다.

그는 판다 재도입 이전인 2016년 1월13일부터 3월3일까지 2개월간 중국 쓰촨성 두장옌 판다 기지에 머무르며 연수를 받았다. 연수 당시 자신이 담당했던 리리가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찾아갔더니 늙은 판다 한 마리가 구부정하게 앉아 있었다고 한다.


대나무 찾아
매일 출장길

강 사육사가 자연농원 시절에 불렀던 것처럼 “리리~ 리리~” 하고 부르자 갑자기 돌아보며 뚜벅뚜벅 걸어와 쳐다보며 아는 체를 해줬다고 한다. 이때 동행한 중국 당국 관계자들이 “리리가 평소에는 저렇지 않으며 당신은 판다 아버지로 불릴 자격이 있다”고 치켜세우며 ‘슝마오빠바(판다 아빠)’라고 불렀다고 한다.

이것이 판다 할아버지로 불린 시초인 셈이다.

강 사육사는 판다와의 벽을 허물기 위해 판다 우리 옆에 야전침대를 놓고 자는 등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다. 그는 지난 2019년 tvN 예능프로그램 <유퀴즈 온 더 블록>에 출연해 “중국 연수 당시 두 달간 교감을 위한 시간을 가졌는데 러바오는 철이 없어 보이는 만큼 쉽게 친해졌지만 아이바오는 낯선 사람을 두려워해 친해지는 데 2~3주 걸렸다”고 말했다.

강 사육사는 식성이 예민한 판다들을 위해 매일 경상남도 하동군서 당일 채취한 대나무를 가지러 매일 출장을 다니기도 했다.

그는 “동물원의 사육사로 있으면서 꼭 해보고 싶은 게 있다”면서 “판다를 번식시켜서 국내 최초로 아기 판다를 볼 수 있게 만드는 것이 꿈이다. 올해에는 아기를 만들어보려고 애쓰고 있다. 판다 할아버지라고 불리는 게 꿈”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하지만 판다의 임신과 출산은 1년에 약 3~4일밖에 되지 않는 짧은 가임기 탓에 시도 자체가 어려운 데다가, 독립적으로 생활하는 판다의 기질 탓에 번식기에 잠깐 만나 짝짓기에 성공할 확률 역시 매우 낮은 편이다. 강 사육사도 2018년부터 판다 번식을 시도했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한번은 러바오가 갑자기 성호르몬이 급상승하면서 아이바오와 짝짓기하고 싶어 하는 모습을 보여 아이바오가 외출한 사이에 러바오를 아이바오 사육장에 들여보냈고 러바오의 체취를 남겼다. 그러나 아이바오가 아직 마음의 준비가 안된 것인지 들어오자마자 다른 판다가 들어왔다는 사실에 마구 화를 내기도 했다.

중국서도 판다 아빠로 인정
모친상에도 귀환 동행 감동

그러던 중 코로나19로 관람객이 줄자 아이바오와 러바오 모두 스트레스가 해소됐는지 합사 후 임신에 성공했다. 

2020년에는 국내 최초로 판다의 자연분만 번식에 성공하며 푸바오를 얻었다. 당시 강 사육사는 “한국에서는 판다 번식에 대한 경험이 없었다”며 “처음 겪는 과정이다 보니 어려움이 있었다”고 털어놨다.

통상 판다가 출산하면 중국서 판다 전문가를 파견한다. 그러나 당시엔 코로나로 국제이동이 막혀 중국 전문가 1명만 국내로 파견됐고, 나머지는 CCTV를 통해 아이바오의 출산을 지켜봤다. 

대중은 푸바오와 사육사들의 교감을 3년이 조금 넘는 시간 동안 영상으로 지켜봤다. 그리고 강철원, 송영관 사육사를 각각 ‘강바오·할부지’ ‘송바오·작은 할부지’로 부르고 있다. 마치 사육사들이 ‘진짜’ 판다 가족이 된 것처럼 느껴지는 별명이다.

게다가 이들은 지난해 7월7일 암컷 판다 쌍둥이를 다시 자연분만 번식으로 얻으며 판다 할아버지라는 타이틀을 더욱 견고히 했다.

판다 외교는 1972년 리처드 닉슨 미국 대통령의 깜짝 중국 방문을 계기로 중국 정부가 미국에 판다 2마리를 선물하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판다는 ‘죽의 장막(Bamboo curtain)’으로 불리던 중국의 이미지 개선에 크게 기여했다.

중국은 판다를 자원확보와 무역을 위한 수단으로도 활용했다. 우라늄 공급계약체결 후 캐나다·프랑스·호주에 판다를 보냈고, 싱가포르·태국·말레이시아에는 자유무역협정(FTA)에 대한 보답으로 판다를 선물했다.

해외로 임대된 판다들은 ‘어느 대사보다 유능한 외교관’으로 불리며 교류와 우호의 상징이 됐다. 문제는 각국서 사랑받던 판다들이 푸바오처럼 4세가 되기 전에 다시 중국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미국 사우스캐롤라이나에서는 미국서 태어난 판다는 반환하지 않도록 하는 법안까지 발의됐을 정도로 비판 여론이 거셌다.

중국 정부는 최근 미국 샌디에이고 동물원에 판다를 다시 보내기로 결정하는 등 판다 외교 재개에 나섰지만, 세계 곳곳 동물원서 ‘눈물의 작별식’이 이어진다면 판다 외교의 효과는 반감될 수밖에 없을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지난 3일 늦은 오후 중국 청두국제공항에 도착한 푸바오는 케이지 가림막 없이 소음과 카메라 플래시에 노출돼 긴장한 모습을 보여 안타까움을 자아냈다.

“거기서도
행복하렴”

한 관계자가 장갑을 끼지 않은 손으로 푸바오를 찌르는 모습과 푸바오가 낯선 손길에 움츠러드는 모습도 고스란히 온라인으로 생중계되면서 누리꾼들은 ‘저럴 줄 알았다’ ‘다시 한국으로 보내달라’며 반감을 드러내기도 했다.

연구센터 측은 “이들은 센터의 전문 수의사들로 손가락 터치는 푸바오의 컨디션 확인을 위해 필수적인 검사였다”면서 “푸바오는 안전하고 건강한 상태”라고 밝혔다. 함께 중국에 간 강사육사도 “푸바오가 조금 긴장해서 예민했지만 이건 정상”이라면서 “중국 사육사들이 사육 방법을 잘 알고 높은 기술을 가졌기 때문에 문제없다고 본다”고 말했다.

<kcj5121@ilyosis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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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꾸는’ 장동혁 용꿈

‘혼자 꾸는’ 장동혁 용꿈

[일요시사 정치팀] 박형준 기자 = 이재명 대통령의 임기 초반 난맥상이 이어지지만,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힘의 지지율 격차는 더욱 벌어지고 있다. 국민의힘 장동혁 대표는 용꿈을 꾸지만, 새 비전을 제시하지 못한 채 강경 보수 세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장 대표에게 그와 용꿈을 함께 꿀 수 있는 창조적 소수가 없는 이유는 뭘까? 국민의힘은 지난달 장외투쟁에 집중했다. 지난달 21일엔 대구에서, 지난달 28일엔 서울에서 각각 개최했다. 국민의힘 장동혁 대표는 지난 2일 기자간담회에서 “장외투쟁을 통해 정부·여당의 잘못을 국민에게 알렸다”며 “그 과정에서 정부·여당의 지지율이 하락했다면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것이고, 지지층 결집으로 싸울 동력도 확보했다”고 주장했다. 벌어지는 지지율 격차 하지만 외부의 평가는 다르다. 보수 신문 <조선일보>는 지난달 23일 사설에서 “스마트폰과 각종 미디어가 발달한 시대라서 국민은 정치권 소식을 실시간으로 보고 듣는다”며 “장외투쟁은 시대에 뒤떨어졌다는 느낌을 준다”고 비판했다. 추석 연휴 직전인 지난 2일 오후엔 이진숙 전 방송통신위원장이 체포됐다가 지난 4일 체포적부심이 인용돼 석방됐다. 김건희 여사의 경기 양평군 공흥지구 개발사업 개입 의혹과 관련해 김건희 특검에 소환돼 조사를 받았던 고 정희철 단월면장도 “특검이 강압 수사를 했다”는 취지의 자필 메모를 남긴 채 같은 날 사망했다. 이후 국민의힘은 국회에 정 면장의 분향소를 차렸고, 의원들이 돌아가면서 빈소를 지키고 있다. 지난달 6일 방송된 JTBC 예능 프로그램 <냉장고를 부탁해>엔 이재명 대통령 부부가 출연했다. 이 방영분은 지난달 26일 발생한 국가정보자원관리원 화재 사건 이후인 지난달 28일 촬영됐다. 이를 두고, 국민의힘 주진우 의원은 “국가적 재난 때문에 지금도 국민은 피해를 보고 있는데, 한가하게 예능 촬영하고 있었다면, 이 대통령은 대통령 자격이 없다”고 주장하면서 추석 연휴 내내 쟁점화를 주도했다. 하지만 국민의힘의 대여 투쟁엔 힘이 붙지 않는다. 리얼미터가 <에너지경제신문> 의뢰로 지난 1일부터 2일까지 전국 18세 이상 유권자 1008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국민의힘 지지율은 전주 대비 2.4% 하락한 35.9%로 확인됐다. 47.2%의 지지를 얻은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보다 11.3% 뒤처지는 수치였다. 이는 장 대표의 자화자찬과는 다른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그동안 이 대통령과 민주당엔 ▲검찰 해체 시도 ▲조희대 대법원장과의 갈등 ▲이 대통령의 예능프로 출연 논란 ▲김현지 제1부속실장 관련 논란 등 악재가 이어졌다. 그런데도 지지율 격차가 10% 이상 벌어진 결과가 나온 것이다. 정의화 전 국회의장은 지난 13일 장 대표와 상임고문단의 오찬 회동에 참석해 그 이유를 설명했다. 정 전 의장은 장 대표에게 “과거 안하무인 정치 행태를 보여온 보수 정당의 잘못이 크다는 걸 인정해야 하고, 깊은 반성과 성찰도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이어 “국민의힘 한동훈 전 대표·개혁신당 이준석 대표·국민의힘 유승민 전 의원 등과 함께 못할 이유가 없다. 새 지도부는 용광로 같은 화합의 정치를 만들어내길 바란다”며 “부정선거론이나 ‘윤 어게인’ 같은 낡은 의제와 결별하고, 민생을 살피면서 국가 미래 비전을 제시하는 데 온 힘을 다해주길 바란다”고 강조했다. 답 없는 장외투쟁에 멀어지는 대권 ‘밖에서’ 집착… 본질 “사람 없어서” 정 전 의장의 발언 중 핵심은 한 전 대표를 향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장 대표는 지난해 12월 윤석열 전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와 관련해 의견이 엇갈려 한 전 대표와 결별했다. 장 대표는 지난달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 “한 전 대표를 지지하는 분들이 무차별적으로 저를 비난·모욕·배척하는데 어떻게 정치 행보를 같이 할 수 있겠느냐”고 비판했다. 장 대표는 취임 직후엔 자신의 당 대표 당선을 도운 강경 보수 성향 유튜버들의 반발을 감수하면서 당내 중도 성향으로 평가받는 김도읍 의원을 정책위의장으로 발탁하는 등 중도 공략을 고려하는 것으로 보였다. 유튜버 고성국씨는 이에 크게 반발하면서 “많은 분이 ‘김도읍이 웬 말이냐’고 비판하는데, 김 의원은 그런 비판을 받을 만하다”고 주장했다. 고씨는 “국민의힘은 자유통일당 등 원외 보수 정당에 지방자치단체장 30석을 양보하라”고 요구했다. 장 대표는 이들의 요구를 일체 무시하면서 이들의 영향력 감소를 시도하는 것으로 보였다. 한때는 “공천 청탁을 받고 있다”고 주장하는 등 “보수의 김어준 반열에 오르려는 것 아니냐”는 평가까지 들었던 전한길씨도 최근엔 전당대회 당시의 기세는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 장 대표는 추석 연휴이던 지난 7일, 서울의 한 극장에서 다큐멘터리 영화 <건국전쟁 2>를 관람했다. <건국전쟁 2>는 1947년부터 군·경찰·서북청년단 등과 남조선노동당이 제주도에서 번갈아 이어간 학살 사건인 4·3 사건을 다뤘다. 이를 연출한 김덕영 감독은 주로 남조선노동당의 학살 위주로 내용을 구성했다. 김 감독은 평소 이승만 전 대통령을 지지하면서 부정선거론을 주장해 왔던 인물이다. 4·3 사건은 국가 폭력을 상징하는 전형적인 사건이기 때문에 여전히 민감하다. 하지만 국민의힘과 보수 진영 일각에선 잊을 만하면 양민 학살을 부정하거나 군경의 대응을 찬양하는 움직임이 있었다. 장 대표의 <건국전쟁 2> 관람은 보수 정당 수장이 4·3 사건에 대한 국가 책임을 부정하는 것으로 해석될 소지를 남긴다. 아울러 국가 책임을 부정하는 주장을 수시로 제시하는 세력은 강경 보수 세력이다. 이런 대응은 이재명 대통령을 비판하는 사람들에게 “국민의힘이 대안이 될 수 있다”는 믿음을 주지 못하고 있다. 이는 국민의힘 지지율 추세로 확인할 수 있다. 추석 연휴 전까지 집중했던 장외투쟁도 장 대표 스스로 직접 전면에 나서 여론을 움직이려 한다는 취지로 해석됐다. 하지만 장 대표가 강경 보수 진영의 지원을 토대로 당선됐던 것 자체가 강경 보수 외 유권자에겐 큰 호감을 주지 못하는 족쇄가 되고 있다. 윤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 이후 국민의힘에서 가장 큰 문제가 됐던 것은 당내 쇄신이었다. 기행은 멈췄지만… 특검 3개(김건희·내란·채 상병)가 국민의힘을 동시에 겨냥하는 현 상황은 모두 윤 전 대통령의 그림자로부터 비롯된 것이었다. 따라서 국민의힘엔 ▲부정선거론 근절 ▲강경 보수 세력의 영향력 제거 ▲중도 공략 등 산적한 숙제가 있었다. 장 대표가 무시 전술로써 강경 보수 세력의 영향력을 서서히 줄이고 있지만, 유권자로선 만족을 느끼기 어렵다. 정권을 맡을 수 있는 정당으로 다시 도약하기 위해선 확실한 절연이 필요했다. 하지만 장 대표 스스로 <건국전쟁2>를 관람하면서 그동안 구사했던 무시 전술도 그 진의를 의심받을 가능성이 열렸다. “당내 쇄신이 아닌 자신의 영향력 확대만을 위한 무시였느냐”는 의심이다. 특정 세력의 지원을 받은 수장이 수성을 위해서 해야 할 일은 대개 토사구팽이다. 현대에 이르러서도 정치력을 높이 평가받는 역사적 인물들은 적절한 토사구팽을 통해 수성기를 열었다는 공통점이 있다. 장 대표 취임 이후의 국민의힘이 이전과 달라진 게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장 대표 취임 이전 국민의힘은 권영세 전 비상대책위원장·권성동 전 원내대표가 일명 ‘쌍권 체제’를 구성해 ▲대선후보 심야 교체 시도 ▲자체 개혁안에 대한 특정 계파의 조직적 저항 등 기행을 저지르면서 여론의 손가락질을 받았다. 장 대표 취임 이후의 국민의힘에서 이런 기행은 잘 보이지 않으나, 그 이상으로 나아가질 못하고 있다. 이는 재보궐선거 당선으로 국회에 입성해 재선 의원이 된 지 불과 1년여가 지난 장 대표의 짧은 정치 경험 등 부실한 정치 기반으로부터 비롯되는 문제라고 할 수 있다. 개혁신당 이준석 대표는 장 대표에 대해 꾸준히 “용꿈을 꾸고 있다”고 평가한다. 장 대표도 이를 직접 부인하진 않는다. 그런데 용꿈은 특정 정치인 1명이 특출나다는 이유만으로 꿀 수 있는 꿈이 아니다. 장 대표는 아직 “용꿈을 꿀 만큼 특출난 정치인”이란 평가를 받고 있지 못하다. 용꿈을 현실로 구현하기 위해선 ▲시대적 사명 구현 ▲강한 개혁 의지 ▲구체적 개혁 대안 제시 ▲강도 높은 자체 혁신 ▲추상적 비전을 구체화할 수 있는 전문가 집단 구성 등 요소가 필요하다. 용꿈은 용이 되려는 사람과 이를 뒷받침하는 집단의 상호 작용으로 현실이 된다. 전문가 집단은 추상적 비전을 구체적 개혁 대안으로 제시해야 하고, 용꿈을 꾸는 사람은 구체적 개혁 대안을 현실에서 구현해 민심의 호응을 얻어야 한다. 부실한 정치 기반 역사학자 아놀드 토인비는 저서 <역사의 연구>를 통해 ‘창조적 소수’라는 개념으로 용꿈을 현실화하는 과정을 이론화했다. 토인비는 문명의 순환을 통해 역사의 변혁 과정을 설명했다. 그에 따르면, 문명이 쇠퇴하거나 낯선 도전에 직면했을 때 이를 극복하면서 새로운 발전을 꿈꾸는 집단이 나타난다. 토인비는 이들에게 ‘창조적 소수’라는 이름을 붙였다. 장 대표가 강경 보수와의 관계에 명확하게 선 긋지 못한 채 장외투쟁에 집중하는 것에 대한 해답도 있다. 토인비는 창조적 소수가 새로운 발전을 이끌 수 있는 비결로 혁신적인 구상을 제시했다. 혁신적인 구상을 통해 세상에 충격을 주면서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동력을 확보해야 한다. 이는 우리 역사에서도 충분히 확인할 수 있다. 진골 귀족들 간 왕위 쟁탈전이 장기간 이어져 중앙정부가 지방 통제 능력을 잃었던 통일신라 말기엔 후삼국시대가 이어졌다. 이때까지만 해도 이미 멸망한 고구려·백제가 통치했던 지역에선 유민 의식이 유지되고 있었다. 고려 태조 왕건이 후백제 견훤을 물리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정치적 비전이었다. 왕건은 ‘삼한일통’이란 구호를 내걸면서 신라에 우호적인 관점을 유지했다. 이는 신라를 무력으로 함락해 경애왕을 살해한 후 신라의 각종 기술자를 후백제로 압송했던 견훤의 대응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었다. 견훤의 대응에 분노했던 신라 호족은 고려로 기울었고, 이는 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하게 된 결정적 밑거름이 됐다. 훗날 고려는 원나라의 간접 지배와 권문세족의 수탈로 인해 저물었다. 권문세족이 산과 강을 경계로 대농장을 소유하면서, 조세·부역을 직접 감당하는 평민의 경제 기반이 무너졌다. 조선 태조 이성계는 2000명 규모의 사병 집단 가별초를 거느린 대부호였다. 그는 경제력과 군사력을 기반으로 왜구와의 전쟁에서 대활약해 실력자로 부상했다. 그의 막료로 가담한 정도전·조준·남은·윤소종은 당시 새로운 흐름이었던 성리학을 배운 신진사대부였다. 이들 중 조준은 권문세족의 토지 겸병을 막을 수 있는 방편으로 과전법을 제시했다. 과전법은 권문세족의 토지를 모두 몰수해 국유화한 후 전·현직 관료에게 경기도에 한정해 세금을 거둘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하는 제도였다. 과전법은 이성계의 막강한 권력·군사력을 기반으로 실현됐고, 그가 새 왕조의 문을 열 수 있었던 결정적 계기가 됐다. 과전법이 시행돼 백성들이 춤을 추면서 기뻐할 때, 국왕 즉위 이전부터 대토지를 보유했던 고려 마지막 임금 공양왕은 아쉬움의 눈물을 흘렸다. 고려가 왜 멸망했고, 조선이 왜 개창될 수 있었는지 잘 보여주는 한 장면이다. “싸울 동력 확보” 자화자찬 “이미 한계만 노출” 평가도 이성계의 등장 이전 강력한 권력과 군사력을 가졌던 사람은 최씨 무신정권을 열었던 최충헌이었다. 그런데 최충헌은 정치개혁과 체질 개심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는 정예 병력을 자신의 사병 조직에 포함할 뿐, 거란 유민의 고려 침공을 방치했다. 거란 유민은 당시 떠오르던 몽골과의 협력을 통해 물리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는 늑대를 몰아내고 호랑이를 불러들였을 뿐이었다. 최충헌 사후 닥친 국난은 여몽 전쟁이었다. 최우 등 최충헌의 후계자들은 임시 수도 강화도에서 오로지 정권 보위에만 집중했다. 그들은 몽골군이 쳐들어오면 항복한 후 몽골군이 철군하면 항복 조건을 어기는 행태를 반복했다. 그러는 사이 백성들은 각자도생해야 했다. 최씨 정권이 몰락한 후 집권했던 무신 집권자들도 이 행태를 반복했다. 그들이 국난 극복을 등한시한 결과, 고려는 몽골이 중국을 접수한 후 세운 원나라의 간섭을 장기간 받아야 했다. 이는 현대 정치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역대 정권은 모두 새로움을 강조하는 슬로건을 제시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군정 종식을, 김대중 전 대통령은 최초의 수평적 정권교체를, 노무현 전 대통령은 사람 사는 세상을, 이명박 전 대통령은 경제위기 극복을, 문재인 전 대통령은 적폐 청산을, 이 대통령은 내란 종식을 제시했다. 토인비가 문명의 순환을 강조했던 이유는 성공하거나 많은 것을 누리면 나태해지는 인간의 속성과 관련돼있다. 토인비는 “성공한 창조자는 다음 단계에서 다시 창조자가 되기 어렵다”고 주장했다. 그 이유로는 “성공 자체가 큰 흠결이 되기 때문”이라며 “이미 성공했기 때문에 노를 젓는 손을 쉬고 있어서 사회 발전에 쓸모를 다했다”고 설명했다. 국민의힘에선 김용태 전 비대위원장과 윤희숙 전 혁신위원장이 당 체질을 개선할 혁신안을 발표한 후 실행하려고 했다. 하지만 일명 ‘언더 찐윤’으로 통하는 영남권 일부 국민의힘 의원들은 조직적으로 이를 방해했다. 이를 똑똑히 목격한 장 대표는 지방선거 승리를 외치면서도 당내 혁신에 대해선 언급하지 않는다. 오히려 당 주류와 반목하는 한 전 대표와 친한계(친 한동훈)를 겨냥해 패널 인증제를 언급하는 등 당 주류의 영향력을 고착화하는 방안을 발표했다. 누구나 꿈꿔도 이룰 수 없는… 하지만 여론은 국민의힘의 혁신과 중도 확장을 바라고 있다. 이 때문에 이재명정부의 초반 난맥상에도 불구하고, 민주당과 국민의힘의 지지율 격차는 더욱 커지고 있다. 용꿈을 함께 실현할 창조적 소수는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는다. 자기 사람은 진득하게 비전을 통해 설득하면서 만들어진다. 장 대표에게 필요한 것은 “국정감사 이후엔 어디서 장외투쟁을 하느냐”가 아니라 “왜 내 주변엔 사람이 없어서 내가 직접 장외투쟁을 해야 하느냐”는 것이다. 용꿈은 누구나 꿀 수 있지만, 아무나 이룰 수는 없다. <ctzxp@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