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범도 아는 ‘공탁금’ 허점

돈 내면 감형된다?

[일요시사 취재1팀] 김철준 기자 = 범죄 가해자들이 활동하는 인터넷 커뮤니티서 형사공탁은 ‘천사공탁’으로 불린다. 피해자에게 합의금을 주는 것보다, 형사공탁을 해서 감형받겠다고 문의하는 피의자들도 있다. 피해자의 신속한 피해 회복을 위한 제도가 사실상 피고인의 감형을 위한 ‘꼼수’로 악용되고 있는 셈이다. 특히 형사공탁 특례가 시행된 지 1년2개월여가 지났지만 개선을 향한 정부의 움직임은 찾아볼 수 없고 범죄 피해자들만 피해를 보고 있다.

“피해자가 합의를 완강히 거부해도 형사공탁을 하면 감형을 끌어낼 수 있다.” 가해자들을 변호하는 변호사들이 하는 이야기다. 법원행정처에 따르면 형사공탁 특례가 시행된 후 1년간 2만5789건(1심부터 대법원 포함)의 공탁 신청이 있었다. 이 중 공탁금이 지급된 건수는 1만445건으로 신청 건수의 40%에 불과하다.

피해 회복?
뻔한 목적

형사공탁은 피고인이 피해자의 피해복구나 변제 등을 목적으로 법원의 공탁소에 금전을 맡기는 제도다. 기존에는 피해자의 이름, 주민등록번호 등 개인정보를 알아야 공탁금을 낼 수 있었지만, 2022년 12월 특례 시행 이후 사건번호나 조서·공소장 등에 기재된 내용 등만으로도 공탁이 가능해졌다.

공탁 과정서 피해자의 개인정보가 노출되는 일과, 이로 인한 2차 가해 등을 막기 위한 취지로 입법됐다.

하지만 입법 취지와는 다르게 피고인의 감형 목적으로 활용되고 있어 개선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피해자가 공탁금 수령을 거부했는데도 공탁금 유치로 ‘피해 회복을 위해 노력했던 점을 감안해’라는 판결문도 쉽게 찾아볼 수 있었다.


심지어는 피해자가 공탁된 사실도 모르는 상황서 공탁금을 내고 감형받는 사례도 나왔다.

최근 대법원서 징역 5년이 확정된 강남 스쿨존 음주운전 사고서도 공탁금 감형은 큰 화두였다. 강남 스쿨존 음주운전 사고는 지난 2022년 12월2일 서울 강남구 청담동 소재 한 초등학교 후문서 방과후수업을 마치고 귀가하던 초등학교 3학년 학생을 40대 A씨가 차로 치어 숨지게 한 사건이다.

수사기관에 따르면 사고 당시 A씨의 혈중알코올농도는 0.128%로 면허취소(0.08% 이상) 수준을 웃도는 것으로 나타났다.

검찰은 A씨가 B군을 충격한 순간 차량이 흔들렸고 사이드미러 등을 통해 A씨가 사고를 인식할 수 있었지만, 그대로 차량을 몰아 도주해 사고를 당한 B군이 방치됐던 것으로 판단했다.

이에 따라 검찰은 1심 결심서 유족 측이 엄벌을 탄원하고 있는 점과 예방적 효과를 고려해 A씨에게 징역 20년을 선고해 달라고 재판부에 요청했다. 다만 재판부는 A씨의 도주치사 혐의는 무죄로 판단해 징역 7년을 선고했다.

재판부는 “20여m 거리에 떨어진 곳에 위치해 금세 발각될 가능성이 있는 주거지 주차장으로 A씨가 들어가기보다는 사고 현장서 직진해 멀리 달아나는 것이 도주 의사에 부합하는 행동”이라며 “피고인이 다른 사람들에 비해 소극적으로 구호 조치한 것으로 볼 여지는 있다”고 말했다.

이어 “9세에 불과한 피해자는 갑작스러운 사고로 꿈을 펼쳐 보지 못하고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했다”며 “가족은 평생 치유하기 어려운 충격과 고통을 입었다”고 밝혔다.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이한 아들을 보는 가족의 절망감의 깊이는 헤아릴 수 없다며 무엇보다 유족이 피고 엄벌을 원한다는 점도 언급했다. 


그러면서도 “이전까지 피고가 아무런 형사처벌을 받은 전력이 없고, 가족과 지인이 선처를 구한다”며 “종합보험에 가입됐고 3억5000만원을 공탁한 점, 암 투병 중인 점 등을 피고에 유리한 정상으로 참작했다”고 부연했다.

1년간 2만5789건 신청
피해자 몰래 해도 인정

양형 이유에 공탁금이 들어가자 피해자 유족 측은 “공탁금을 받을 생각이 전혀 없었다. 형량에 영향을 미쳐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고 반발하기도 했다.

항소심 재판부 역시 A씨가 사고 현장에 돌아온 직후 사고 사실을 알렸고, 경찰에 체포 이전까지 피해자 주변의 자리를 지킨 점 등을 근거로 도주 고의성이 입증됐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판단했다.

또 A씨의 범죄 공소사실과 관련해 상상적 경합 관계에 있다고 판단해 원심을 파기하고 징역 5년으로 형을 낮췄다. 상상적 경합은 1개의 범죄 행위가 여러개의 죄에 해당하는 경우를 뜻한다. 형법 40조는 이 같은 경우 가장 무거운 범죄에 대해 정한 형으로 피고인을 처벌하도록 규정한다.

1심은 특가법상 어린이보호구역 치사 혐의와 위험운전치사 혐의를 별개의 법률행위로 판단했다. 다만 항소심은 법리상 2개의 치사 혐의가 1개의 법률행위로 평가된다고 판단해 형량이 낮아졌다.

검사는 무죄 부분에 대한 채증법칙 위반, 법리오해 및 유죄 부분에 대한 죄수 판단을 주장하며 상고했다. 피고인 A씨는 위험운전치사에 관한 법리 오해, 양형부당을 주장하며 상고했다.

다만 대법원은 양측의 상고를 모두 기각하며 징역 5년을 선고한 원심을 최종 확정했다.

대법원 확정 이후 유족 측은 “한 줄기 희망을 품고 대법원에 나왔다. 그러나 저의 희망은 처참히 무너지고 말았다”며 “재판 과정을 통해 저의 피해가 구제되지 않고 오히려 더 큰 상처와 고통을 겪고 있다”고 울분을 토했다.

그러면서 “다른 어린이보호구역 음주 사망사건에 비해 현저히 적은 형량이 나온 것을 저는 받아들일 수 없다”며 “가해자가 전관 부장판사 출신의 대형 로펌 태평양을 쓴 점, 기습공탁금을 사용한 점 둘 다 모두 금전적인 힘이 작용해 이 같은 판결이 나온 것 아닌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고 꼬집었다.

또 “1심, 2심 모두 가해자는 기습공탁을 이용했고 저는 매번 피눈물을 흘렸다”며 “피해자인 제가 공탁금이 필요하지 않으며 용서할 의사가 없다고 수차례 밝혔음에도 재판부가 이를 감형 요소로 고려하는 것은 저 대신 용서라도 하겠다는 것이냐”고 호소했다.

프로축구 제주유나이티드 소속 유연수의 축구선수로서의 생명을 앗아간 음주운전의 피고인도 1심 선고를 앞두고 700만원을 형사공탁했다. 지난 1월19일 제주지방법원에 따르면 이날 유연수 선수를 다치게 한 음주운전 피고인 C씨가 700만원을 형사공탁했다. 지난달 25일 선고 공판(제주지법 형사1단독)을 6일 앞둔 시점이었다.


수령
안 해도…

유연수 선수는 지난달 17일 방영된 tvN <유 퀴즈 온더 블록>서 “(가해자는)지금까지도 사과 한 마디 없다. 재판에서는 저희한테 사과하려고 했다고 하던데 정작 저희는 한 번도 연락받은 적이 없다”며 “그걸 듣고 더 화가 나더라. 와서 무릎 꿇고 사과했으면 그래도 받아 줄 의향이 있었는데 너무 화가 났다”고 말했지만 사과하기보다 기습으로 공탁을 한 셈이다.

이에 유연수의 변호를 맡은 법무법인 오션 소속 오군성 변호사는 “1심 선고를 며칠 앞두고 피고인 측이 사과문을 전달하겠다는 의사를 표했다. 여기에 형사공탁도 한 것으로 확인됐다”면서 “유연수 선수와 논의한 결과 1심 선고를 며칠 앞둔 상황 속에 사과문 전달·형사공탁은 진정성이 없다고 판단했다”고 말했다.

C씨는 특정범죄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 위반(위험운전치상), 강제추행 혐의로 1심서 징역 4년, 40시간 성폭력 치료 강의 수강, 아동.청소년 관련 기관 등 5년간 취업 제한을 선고받았다. 검찰은 양형부당을 이유로 재판부에 항소장을 제출한 상황이다.

이외에도 후임병에게 상습적으로 가혹행위를 일삼은 해병대 선임도 기습공탁을 통해 감형받고 벌금형이 선고되기도 했다.

D씨는 2022년 7월부터 지난해 2월까지 인천 강화 소재의 한 해병대 생활관서 후임병들에게 이른바 식고문을 일삼고 이유 없이 폭행한 혐의 등으로 재판에 넘겨졌다.


재판부는 “후임병들에게 반복적으로 가혹행위 등을 가했고 수단과 방법도 불량하다”고 지적하면서도 “일부 피해자와 합의하고 합의 못한 피해자를 위해 형사공탁하는 등 피해복구를 위해 노력한 점 등을 고려했다”고 양형 이유를 설명했다.

이들은 모두 판결 선고일이 임박해 형사공탁을 진행한 예시들이다. 이 같은 형사공탁은 소위 기습공탁으로 불린다.

피고인의 형사공탁을 원고가 수령 의사가 없음을 밝히기 위해 공탁금회수동의서 또는 엄벌탄원서를 제출할 시간도 없게 만드는 것이다. 형사공탁 특례법이 시행되기 이전에는 피해자의 동의가 없으면 형사공탁금을 신청하지 못했다. 

그로 인해 피고인들은 형사변제공탁이 아닌 민사변제공탁으로 돌려서 공탁을 신청하는 꼼수를 사용했다. 대표적인 예로 ‘지리산 산청 펜션 살인사건’ 재판이 있다.

지리산 산청 펜션 살인사건은 2021년 경남 산청서 투숙객이 펜션 주인을 마구 구타해 살해한 사건이다. 해당 사건서 1심 재판부는 피고인 E씨에게 범행이 잔혹하고 심신미약도 인정할 수 없다며 징역 20년을 선고했다.

하지만 2심 재판부는 E씨에게 4년을 감형한 징역 16년을 선고했다.

돈으로 사고 
다시 주머니로

2심 판결문에 따르면 “피고인은 별다른 이유 없이 피해자의 얼굴 부위를 주먹과 발로 수회 구타해 살해했는데 그 수단과 방법이 매우 잔혹하며 피해자는 두부에 광범위한 손상을 입어 사망해 범행의 결과 역시 참혹하다”며 “피해자는 사망에 이르기까지 극심한 육체적·정신적 고통을 겪었을 것으로 보이고 피해자의 유족들 역시 피해자의 죽음으로 인한 정신적 충격을 호소하며 피고인에 대해 엄벌을 탄원하고 있다”고 판시했다.

다만 “피고인은 조현병 등의 정신장애로 인해 사물을 변별하거나 의사를 결정할 능력이 미약한 상태서 이 사건 범행을 저질렀다. 피고인은 이 사건 이전에 형사처벌을 받은 전력이 전혀 없고 일관되게 잘못을 인정하며 진심 어린 반성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피고인의 가족들이 피고인에 대한 선처를 호소하는 등 사회적 유대관계가 비교적 분명해 보이며 향후 피고인에 대한 치료와 계도를 다짐하고 있다. 당심에 이르러 피고인의 가족들이 피해자의 유족들을 위해 상당한 금원을 공탁한 점 등을 고려해 이같이 형을 정한다”고 부연했다.

유족 측은 해당 공탁 사실을 알지도 못했으며 받을 생각도 없던 공탁금으로 감형이 된 것이 이해되지 않는다는 입장이다.

알고 보니 E씨는 선고 일주일 전에 1억5000만원을 민사변제공탁했으며, 심지어 선고 일주일 후 가해자는 공탁금을 회수하기도 했다.

형사공탁금은 돈을 맡길 때부터 공탁금을 가져갈 수 없다는 점에 동의해야 해 회수가 불가능하지만 가해자는 민사변제공탁을 신청해 회수가 가능했다.

대법원 예규에 따르면 변제공탁자가 회수청구권의 행사에 조건을 붙이는 경우의 처리지침에 따른 공탁금 회수 제한 신고서를 첨부하지 않은 경우에는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판결 선고 전후를 불문하고 피공탁자의 동의 여부에 상관없이 공탁자가 공탁금을 회수할 수 있으므로 공탁 사실을 양형에 참작함에 있어서는 공탁금회수 제한 신고서가 첨부됐는지 여부를 확인해야 하지만 해당 재판부서 이를 지키지 않은 것이다.

유족 측은 “돈으로 감형을 사고 다시 그 돈을 자기 호주머니에 넣은 상황인데 법원의 묵인이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형량에 영향 미치면 안 된다”
과거엔 민사변제공탁 꼼수도

피고인 측 변호사는 “해당 사건과 관련해 민사도 진행 중이라 민사변제공탁을 진행한 것이며 당시 형사공탁 특례가 시행되기 전이라 피해자 동의 없이 공탁하려면 민사변제공탁을 이용할 수밖에 없었다”며 “당시에는 다들 이렇게 공탁했다”고 말했다.

서초동 한 변호사는 “아무리 같은 사건으로 형사‧민사재판이 둘 다 진행 중이더라도 민사공탁금을 통해 감형을 받고 다시 회수한 것은 법의 허점을 이용했다고 볼 수밖에 없다”며 “변호인은 법의 허점을 파고들었고 법원은 확인 절차를 제대로 하지 못해 유족 측만 고통받은 것”이라고 일침을 가했다.

형사공탁 특례 시행 한 달이 지났을 무렵 가해자가 피해자와의 합의가 불가능할 때 공탁을 통해 감형을 노린다는 지적이 나오자 대검찰청은 대응책을 마련하기로 했다.

이원석 검찰총장은 “변론 종결 후 선고가 나오기 전 기습공탁이 접수되면 검사가 법원에 변론 재개를 신청해 피해자의 의사와 공탁 경위 금액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할 수 있도록 개진하라”는 명령을 일선 청에 내렸다. 또 대검찰청은 법원행정처와 실무협의에도 나섰지만 의미있는 결론은 내지 못한 것으로 전해진다.

국회에도 기습공탁을 금지하기 위한 다수의 법안이 발의됐지만 별 다른 움직임은 없다.

국회 의안정보시스템에 따르면 지난해 9~12월에 발의된 총 4건의 공탁법 개정안이 현재 국회에 계류 중이다. 황운하 전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대표 발의한 개정안은 법원이나 검찰에 형사공탁 내용이 통지되면 ‘7일 이내’에 피공탁자 또는 법률대리인에게 고지하도록 하는 조항을 신설하는 내용이 담겨있다.

특히 피공탁자가 공탁수령 의사가 없을 경우 공탁회수동의서 등을 제출해 원치 않는 공탁이 피고인의 양형에 유리하게 반영되지 않도록 하자는 것이 핵심 골자다. 같은 당 이탄희·윤영찬 의원도 유사한 취지의 개정안을 각각 대표 발의했다.

설훈 전 민주당 의원은 형사공탁 기간을 ‘해당 형사사건의 변론 종결기일 14일 전’으로 제한하는 조항을 신설하는 내용의 개정안을 대표 발의했다. 각종 사건 등에서 피고인이 피해자와 합의하려는 노력 대신 변론종결일에 맞춰 기습공탁해 유리한 양형을 받는 사례를 막기 위해서다.

하지만 이들 개정안 모두 상임위원회 심사가 지지부진한 상황이다. 다음달 22대 국회의원 총선을 앞두고 국회 법안심사는 사실상 멈춰있는 상태다.

법조인도
비판 목소리

법조계에서는 물질만능주의 선고라며 법원을 비판하는 모양새다.

법무법인 영민의 김슬아 변호사는 “한국 법원은 유독 금전공탁을 피해복구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다”며 “피해자의 의사에 반한 공탁은 피해자의 피해복구로 이어지지 않고 오히려 정신적 피해를 입히고 있는 것을 재판부는 생각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한 형사전문 변호사는 “공탁을 양형 요인으로 보는 것은 재판부의 재량인데 유독 후하게 공탁 감형을 하는 모습”이라며 “사기, 절도 등 금전적 피해가 회복될 수 있는 선고형이 아닌 피해자를 인격적, 정신적으로 괴롭히는 성범죄, 아동학대, 무고 등에 관한 선고형에 공탁이 왜 감형 요소가 되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kcj5121@ilyosis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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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꾸는’ 장동혁 용꿈

‘혼자 꾸는’ 장동혁 용꿈

[일요시사 정치팀] 박형준 기자 = 이재명 대통령의 임기 초반 난맥상이 이어지지만,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힘의 지지율 격차는 더욱 벌어지고 있다. 국민의힘 장동혁 대표는 용꿈을 꾸지만, 새 비전을 제시하지 못한 채 강경 보수 세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장 대표에게 그와 용꿈을 함께 꿀 수 있는 창조적 소수가 없는 이유는 뭘까? 국민의힘은 지난달 장외투쟁에 집중했다. 지난달 21일엔 대구에서, 지난달 28일엔 서울에서 각각 개최했다. 국민의힘 장동혁 대표는 지난 2일 기자간담회에서 “장외투쟁을 통해 정부·여당의 잘못을 국민에게 알렸다”며 “그 과정에서 정부·여당의 지지율이 하락했다면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것이고, 지지층 결집으로 싸울 동력도 확보했다”고 주장했다. 벌어지는 지지율 격차 하지만 외부의 평가는 다르다. 보수 신문 <조선일보>는 지난달 23일 사설에서 “스마트폰과 각종 미디어가 발달한 시대라서 국민은 정치권 소식을 실시간으로 보고 듣는다”며 “장외투쟁은 시대에 뒤떨어졌다는 느낌을 준다”고 비판했다. 추석 연휴 직전인 지난 2일 오후엔 이진숙 전 방송통신위원장이 체포됐다가 지난 4일 체포적부심이 인용돼 석방됐다. 김건희 여사의 경기 양평군 공흥지구 개발사업 개입 의혹과 관련해 김건희 특검에 소환돼 조사를 받았던 고 정희철 단월면장도 “특검이 강압 수사를 했다”는 취지의 자필 메모를 남긴 채 같은 날 사망했다. 이후 국민의힘은 국회에 정 면장의 분향소를 차렸고, 의원들이 돌아가면서 빈소를 지키고 있다. 지난달 6일 방송된 JTBC 예능 프로그램 <냉장고를 부탁해>엔 이재명 대통령 부부가 출연했다. 이 방영분은 지난달 26일 발생한 국가정보자원관리원 화재 사건 이후인 지난달 28일 촬영됐다. 이를 두고, 국민의힘 주진우 의원은 “국가적 재난 때문에 지금도 국민은 피해를 보고 있는데, 한가하게 예능 촬영하고 있었다면, 이 대통령은 대통령 자격이 없다”고 주장하면서 추석 연휴 내내 쟁점화를 주도했다. 하지만 국민의힘의 대여 투쟁엔 힘이 붙지 않는다. 리얼미터가 <에너지경제신문> 의뢰로 지난 1일부터 2일까지 전국 18세 이상 유권자 1008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국민의힘 지지율은 전주 대비 2.4% 하락한 35.9%로 확인됐다. 47.2%의 지지를 얻은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보다 11.3% 뒤처지는 수치였다. 이는 장 대표의 자화자찬과는 다른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그동안 이 대통령과 민주당엔 ▲검찰 해체 시도 ▲조희대 대법원장과의 갈등 ▲이 대통령의 예능프로 출연 논란 ▲김현지 제1부속실장 관련 논란 등 악재가 이어졌다. 그런데도 지지율 격차가 10% 이상 벌어진 결과가 나온 것이다. 정의화 전 국회의장은 지난 13일 장 대표와 상임고문단의 오찬 회동에 참석해 그 이유를 설명했다. 정 전 의장은 장 대표에게 “과거 안하무인 정치 행태를 보여온 보수 정당의 잘못이 크다는 걸 인정해야 하고, 깊은 반성과 성찰도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이어 “국민의힘 한동훈 전 대표·개혁신당 이준석 대표·국민의힘 유승민 전 의원 등과 함께 못할 이유가 없다. 새 지도부는 용광로 같은 화합의 정치를 만들어내길 바란다”며 “부정선거론이나 ‘윤 어게인’ 같은 낡은 의제와 결별하고, 민생을 살피면서 국가 미래 비전을 제시하는 데 온 힘을 다해주길 바란다”고 강조했다. 답 없는 장외투쟁에 멀어지는 대권 ‘밖에서’ 집착… 본질 “사람 없어서” 정 전 의장의 발언 중 핵심은 한 전 대표를 향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장 대표는 지난해 12월 윤석열 전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와 관련해 의견이 엇갈려 한 전 대표와 결별했다. 장 대표는 지난달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 “한 전 대표를 지지하는 분들이 무차별적으로 저를 비난·모욕·배척하는데 어떻게 정치 행보를 같이 할 수 있겠느냐”고 비판했다. 장 대표는 취임 직후엔 자신의 당 대표 당선을 도운 강경 보수 성향 유튜버들의 반발을 감수하면서 당내 중도 성향으로 평가받는 김도읍 의원을 정책위의장으로 발탁하는 등 중도 공략을 고려하는 것으로 보였다. 유튜버 고성국씨는 이에 크게 반발하면서 “많은 분이 ‘김도읍이 웬 말이냐’고 비판하는데, 김 의원은 그런 비판을 받을 만하다”고 주장했다. 고씨는 “국민의힘은 자유통일당 등 원외 보수 정당에 지방자치단체장 30석을 양보하라”고 요구했다. 장 대표는 이들의 요구를 일체 무시하면서 이들의 영향력 감소를 시도하는 것으로 보였다. 한때는 “공천 청탁을 받고 있다”고 주장하는 등 “보수의 김어준 반열에 오르려는 것 아니냐”는 평가까지 들었던 전한길씨도 최근엔 전당대회 당시의 기세는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 장 대표는 추석 연휴이던 지난 7일, 서울의 한 극장에서 다큐멘터리 영화 <건국전쟁 2>를 관람했다. <건국전쟁 2>는 1947년부터 군·경찰·서북청년단 등과 남조선노동당이 제주도에서 번갈아 이어간 학살 사건인 4·3 사건을 다뤘다. 이를 연출한 김덕영 감독은 주로 남조선노동당의 학살 위주로 내용을 구성했다. 김 감독은 평소 이승만 전 대통령을 지지하면서 부정선거론을 주장해 왔던 인물이다. 4·3 사건은 국가 폭력을 상징하는 전형적인 사건이기 때문에 여전히 민감하다. 하지만 국민의힘과 보수 진영 일각에선 잊을 만하면 양민 학살을 부정하거나 군경의 대응을 찬양하는 움직임이 있었다. 장 대표의 <건국전쟁 2> 관람은 보수 정당 수장이 4·3 사건에 대한 국가 책임을 부정하는 것으로 해석될 소지를 남긴다. 아울러 국가 책임을 부정하는 주장을 수시로 제시하는 세력은 강경 보수 세력이다. 이런 대응은 이재명 대통령을 비판하는 사람들에게 “국민의힘이 대안이 될 수 있다”는 믿음을 주지 못하고 있다. 이는 국민의힘 지지율 추세로 확인할 수 있다. 추석 연휴 전까지 집중했던 장외투쟁도 장 대표 스스로 직접 전면에 나서 여론을 움직이려 한다는 취지로 해석됐다. 하지만 장 대표가 강경 보수 진영의 지원을 토대로 당선됐던 것 자체가 강경 보수 외 유권자에겐 큰 호감을 주지 못하는 족쇄가 되고 있다. 윤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 이후 국민의힘에서 가장 큰 문제가 됐던 것은 당내 쇄신이었다. 기행은 멈췄지만… 특검 3개(김건희·내란·채 상병)가 국민의힘을 동시에 겨냥하는 현 상황은 모두 윤 전 대통령의 그림자로부터 비롯된 것이었다. 따라서 국민의힘엔 ▲부정선거론 근절 ▲강경 보수 세력의 영향력 제거 ▲중도 공략 등 산적한 숙제가 있었다. 장 대표가 무시 전술로써 강경 보수 세력의 영향력을 서서히 줄이고 있지만, 유권자로선 만족을 느끼기 어렵다. 정권을 맡을 수 있는 정당으로 다시 도약하기 위해선 확실한 절연이 필요했다. 하지만 장 대표 스스로 <건국전쟁2>를 관람하면서 그동안 구사했던 무시 전술도 그 진의를 의심받을 가능성이 열렸다. “당내 쇄신이 아닌 자신의 영향력 확대만을 위한 무시였느냐”는 의심이다. 특정 세력의 지원을 받은 수장이 수성을 위해서 해야 할 일은 대개 토사구팽이다. 현대에 이르러서도 정치력을 높이 평가받는 역사적 인물들은 적절한 토사구팽을 통해 수성기를 열었다는 공통점이 있다. 장 대표 취임 이후의 국민의힘이 이전과 달라진 게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장 대표 취임 이전 국민의힘은 권영세 전 비상대책위원장·권성동 전 원내대표가 일명 ‘쌍권 체제’를 구성해 ▲대선후보 심야 교체 시도 ▲자체 개혁안에 대한 특정 계파의 조직적 저항 등 기행을 저지르면서 여론의 손가락질을 받았다. 장 대표 취임 이후의 국민의힘에서 이런 기행은 잘 보이지 않으나, 그 이상으로 나아가질 못하고 있다. 이는 재보궐선거 당선으로 국회에 입성해 재선 의원이 된 지 불과 1년여가 지난 장 대표의 짧은 정치 경험 등 부실한 정치 기반으로부터 비롯되는 문제라고 할 수 있다. 개혁신당 이준석 대표는 장 대표에 대해 꾸준히 “용꿈을 꾸고 있다”고 평가한다. 장 대표도 이를 직접 부인하진 않는다. 그런데 용꿈은 특정 정치인 1명이 특출나다는 이유만으로 꿀 수 있는 꿈이 아니다. 장 대표는 아직 “용꿈을 꿀 만큼 특출난 정치인”이란 평가를 받고 있지 못하다. 용꿈을 현실로 구현하기 위해선 ▲시대적 사명 구현 ▲강한 개혁 의지 ▲구체적 개혁 대안 제시 ▲강도 높은 자체 혁신 ▲추상적 비전을 구체화할 수 있는 전문가 집단 구성 등 요소가 필요하다. 용꿈은 용이 되려는 사람과 이를 뒷받침하는 집단의 상호 작용으로 현실이 된다. 전문가 집단은 추상적 비전을 구체적 개혁 대안으로 제시해야 하고, 용꿈을 꾸는 사람은 구체적 개혁 대안을 현실에서 구현해 민심의 호응을 얻어야 한다. 부실한 정치 기반 역사학자 아놀드 토인비는 저서 <역사의 연구>를 통해 ‘창조적 소수’라는 개념으로 용꿈을 현실화하는 과정을 이론화했다. 토인비는 문명의 순환을 통해 역사의 변혁 과정을 설명했다. 그에 따르면, 문명이 쇠퇴하거나 낯선 도전에 직면했을 때 이를 극복하면서 새로운 발전을 꿈꾸는 집단이 나타난다. 토인비는 이들에게 ‘창조적 소수’라는 이름을 붙였다. 장 대표가 강경 보수와의 관계에 명확하게 선 긋지 못한 채 장외투쟁에 집중하는 것에 대한 해답도 있다. 토인비는 창조적 소수가 새로운 발전을 이끌 수 있는 비결로 혁신적인 구상을 제시했다. 혁신적인 구상을 통해 세상에 충격을 주면서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동력을 확보해야 한다. 이는 우리 역사에서도 충분히 확인할 수 있다. 진골 귀족들 간 왕위 쟁탈전이 장기간 이어져 중앙정부가 지방 통제 능력을 잃었던 통일신라 말기엔 후삼국시대가 이어졌다. 이때까지만 해도 이미 멸망한 고구려·백제가 통치했던 지역에선 유민 의식이 유지되고 있었다. 고려 태조 왕건이 후백제 견훤을 물리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정치적 비전이었다. 왕건은 ‘삼한일통’이란 구호를 내걸면서 신라에 우호적인 관점을 유지했다. 이는 신라를 무력으로 함락해 경애왕을 살해한 후 신라의 각종 기술자를 후백제로 압송했던 견훤의 대응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었다. 견훤의 대응에 분노했던 신라 호족은 고려로 기울었고, 이는 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하게 된 결정적 밑거름이 됐다. 훗날 고려는 원나라의 간접 지배와 권문세족의 수탈로 인해 저물었다. 권문세족이 산과 강을 경계로 대농장을 소유하면서, 조세·부역을 직접 감당하는 평민의 경제 기반이 무너졌다. 조선 태조 이성계는 2000명 규모의 사병 집단 가별초를 거느린 대부호였다. 그는 경제력과 군사력을 기반으로 왜구와의 전쟁에서 대활약해 실력자로 부상했다. 그의 막료로 가담한 정도전·조준·남은·윤소종은 당시 새로운 흐름이었던 성리학을 배운 신진사대부였다. 이들 중 조준은 권문세족의 토지 겸병을 막을 수 있는 방편으로 과전법을 제시했다. 과전법은 권문세족의 토지를 모두 몰수해 국유화한 후 전·현직 관료에게 경기도에 한정해 세금을 거둘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하는 제도였다. 과전법은 이성계의 막강한 권력·군사력을 기반으로 실현됐고, 그가 새 왕조의 문을 열 수 있었던 결정적 계기가 됐다. 과전법이 시행돼 백성들이 춤을 추면서 기뻐할 때, 국왕 즉위 이전부터 대토지를 보유했던 고려 마지막 임금 공양왕은 아쉬움의 눈물을 흘렸다. 고려가 왜 멸망했고, 조선이 왜 개창될 수 있었는지 잘 보여주는 한 장면이다. “싸울 동력 확보” 자화자찬 “이미 한계만 노출” 평가도 이성계의 등장 이전 강력한 권력과 군사력을 가졌던 사람은 최씨 무신정권을 열었던 최충헌이었다. 그런데 최충헌은 정치개혁과 체질 개심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는 정예 병력을 자신의 사병 조직에 포함할 뿐, 거란 유민의 고려 침공을 방치했다. 거란 유민은 당시 떠오르던 몽골과의 협력을 통해 물리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는 늑대를 몰아내고 호랑이를 불러들였을 뿐이었다. 최충헌 사후 닥친 국난은 여몽 전쟁이었다. 최우 등 최충헌의 후계자들은 임시 수도 강화도에서 오로지 정권 보위에만 집중했다. 그들은 몽골군이 쳐들어오면 항복한 후 몽골군이 철군하면 항복 조건을 어기는 행태를 반복했다. 그러는 사이 백성들은 각자도생해야 했다. 최씨 정권이 몰락한 후 집권했던 무신 집권자들도 이 행태를 반복했다. 그들이 국난 극복을 등한시한 결과, 고려는 몽골이 중국을 접수한 후 세운 원나라의 간섭을 장기간 받아야 했다. 이는 현대 정치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역대 정권은 모두 새로움을 강조하는 슬로건을 제시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군정 종식을, 김대중 전 대통령은 최초의 수평적 정권교체를, 노무현 전 대통령은 사람 사는 세상을, 이명박 전 대통령은 경제위기 극복을, 문재인 전 대통령은 적폐 청산을, 이 대통령은 내란 종식을 제시했다. 토인비가 문명의 순환을 강조했던 이유는 성공하거나 많은 것을 누리면 나태해지는 인간의 속성과 관련돼있다. 토인비는 “성공한 창조자는 다음 단계에서 다시 창조자가 되기 어렵다”고 주장했다. 그 이유로는 “성공 자체가 큰 흠결이 되기 때문”이라며 “이미 성공했기 때문에 노를 젓는 손을 쉬고 있어서 사회 발전에 쓸모를 다했다”고 설명했다. 국민의힘에선 김용태 전 비대위원장과 윤희숙 전 혁신위원장이 당 체질을 개선할 혁신안을 발표한 후 실행하려고 했다. 하지만 일명 ‘언더 찐윤’으로 통하는 영남권 일부 국민의힘 의원들은 조직적으로 이를 방해했다. 이를 똑똑히 목격한 장 대표는 지방선거 승리를 외치면서도 당내 혁신에 대해선 언급하지 않는다. 오히려 당 주류와 반목하는 한 전 대표와 친한계(친 한동훈)를 겨냥해 패널 인증제를 언급하는 등 당 주류의 영향력을 고착화하는 방안을 발표했다. 누구나 꿈꿔도 이룰 수 없는… 하지만 여론은 국민의힘의 혁신과 중도 확장을 바라고 있다. 이 때문에 이재명정부의 초반 난맥상에도 불구하고, 민주당과 국민의힘의 지지율 격차는 더욱 커지고 있다. 용꿈을 함께 실현할 창조적 소수는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는다. 자기 사람은 진득하게 비전을 통해 설득하면서 만들어진다. 장 대표에게 필요한 것은 “국정감사 이후엔 어디서 장외투쟁을 하느냐”가 아니라 “왜 내 주변엔 사람이 없어서 내가 직접 장외투쟁을 해야 하느냐”는 것이다. 용꿈은 누구나 꿀 수 있지만, 아무나 이룰 수는 없다. <ctzxp@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