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을 만나다> 한국 재즈보컬 1세대 김준

  • 김민주 기자 alswn@ilyosisa.co.kr
  • 등록 2023.01.30 15:55:26
  • 호수 141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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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년, 재즈 같은 삶

[일요시사 취재1팀] 김민주 기자 = “빨간 마후라 사나이/하늘의 사나이는 빨간 마후라/빨간 마후라를 목에 두르고/구름따라 흐른다 나도 흐른다/아가씨야 내 마음 믿지 말아라/번개처럼 지나갈 청춘이란다/ 석양을 등에 지고 하늘 끝까지/폭음이 흐른다 나도 흐른다/그까짓 부귀영화 무엇에 쓰랴.” (쟈니 브라더스, <빨간 마후라>, 1964)

한국 남성 재즈 보컬리스트 1세대이자 원로 가수. 보컬리스트 김준의 수식어다. 1940년 1월14일에 태어난 김준은 ‘한국 재즈 100년의 역사’에 기록됐고, 현재까지 보컬리스트로 활동하고 있다. 

처음 그를 만난 것은 서울시 종로구의 째즈바 ‘천년동안도’였다. 연주자와 보컬 평균 연령 70대 후반인 재즈 그룹이 공연하는 모습은 이색적이었다. 공연 관람자도 보통은 아닌 것처럼 보였다. 관람 연령이 20대부터 60대까지로 모두 ‘재즈 매니아’의 면모가 엿보였다.

산증인

보컬과 연주자는 자유로웠고 관람자도 마찬가지였다. 음악으로 하나가 된다는 게 이런 느낌일까. 그날의 감상평이다. 젊은 재즈 연주자가 넘쳐나는 시대, 노련한 재즈 연주자의 모습 자체가 새로웠다.

김준은 “재즈는 내 인생이다. 나는 언제나 나를 위해 노래한다. 그래서 재즈 공연을 할 때가 가장 행복하다. 관객이 공연을 보러와 주고 좋아해주니 정말 고맙다”고 말했다.


“인생이 재즈다”. 음악이 업인 사람도 쉽게 할 수 없는 말이다. 그러나 김준의 인생은 ‘음악이 인생’이라는 명제가 어색하지 않다. 그렇다고 편하게 음악인의 길을 간 것도 아니다.

김준의 아버지는 평안북도 신의주 사람으로 삼대독자였다. 그는 20대 중국서 행상을 한 돈으로 고향 신의주의 밭과 땅을 샀다. 그는 만석꾼으로 살았고, 1945년 8월15일 해방 이후 계속 신의주에 머물렀다. 하지만 부유한 삶을 산 것도 잠시였다.

김일성이 1946년에 북한을 소련식 사회주의 경제에 편입하겠다고 발표하며 토지개혁을 실시했다. 만석꾼이었던 삶도 끝난 것이다. 이를 계기로 김준의 가족은 남한으로 향했다.

사실 그 당시는 누구에게나 평탄하지 않은 시대였고 김준도 마찬가지였다. 김준은 강원도 원주에 있는 원주초등학교를 다녔는데, 초등학교 5학년 때 6·25 전쟁이 터졌다. 그 길로 걸어서 부산까지 피난 갔다. 그 후, 강원도 영월군 주천초등학교로 전학을 간 뒤 다시 목포로 이동했다. 1·4후퇴 때 제주도로 다시 피난 간 뒤 그곳에서 초·중·고등학교를 졸업했다.

김준이 재즈를 처음 접한 곳도 제주도였다. 당시 제주도에는 미 육군통신대가 주둔하고 있었다. 중학생이었던 김준은 미군부대에 하우스보이로 아르바이트를 했는데, 이를 계기로 군부대 안에 있는 교회서 예배를 드렸다.

40년생, 여전히 현역으로 활동 중
축구 선수서 보컬리스트로 대변신

미군부대 교회 목사는 체플리 게일이라는 흑인이었다. 예배가 끝나면 목사는 김준을 조용히 집무실로 불렀다. 목사는 그에게 이것저것 물어보기도 했고 인생에 관한 조언도 했다. 그때 집무실에는 루이 암스트롱, 엘비스 프레슬리 등 항상 재즈 음악이 틀어져 있었다.


김준은 “피난 시절 목사님 집무실에서 재즈 음악을 접했다. 어린 시절이라 노래를 잘 부른다는 걸 몰랐다. 그런데 듣고 있으면 마음이 참 편했다. 특히 탁성으로 노래를 부를 수 있다는 걸 처음 알게 됐다. 이런 부분에 매력을 느끼고 관심을 가지게 됐다”며 유년 시절을 회상했다.

노래를 잘 부른다는 칭찬을 받긴 했지만, 김준은 유년 시절 축구선수였다. 이런 그가 노래를 시작하게 된 것은 고등학교 교장 선생님 덕분이었다. 

김준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난 뒤, 전국 고등학교 콩쿨대회가 생겼다. 그가 졸업한 학교에도 공문이 왔고, 평소 김준의 노래 실력을 눈여겨봤던 교장 선생님은 그를 추천했다. 물론 불법이었다. 김준은 다시 머리를 자르고 교복을 입었다.

콩쿨대회에는 고등학생 성악부만 85명이 참가했다. 여기서 상을 받게 됐고, 김준은 대회 수상을 계기로 경희대학교 성악과에 입학했다. 그리고 예그린 악단(서울 시립가무단의 전신)에 취직하게 됐지만 1년 뒤 해체됐다. 

예그린 악단의 해체가 아쉬웠던 합창단원 4명이 모여 4중창을 결성했고 이름을 ‘쟈니 브라더스’라고 지었다. 이들의 활약은 대단했다. 노래자랑 방송 프로그램에서 특상을 받았고, 1962년 KBS 라디오 연속극 주제가로 부른 <빨간 마후라>가 히트쳤다.

<빨간 마후라>로 쟈니 브라더스는 슈퍼스타가 됐지만, 쥐꼬리만한 출연료로는 쟈니 브라더스를 이어갈 수 없었다. 

피란 때 흑인 목사 통해 들어 
“위로도 얻고 용기도 생겨요”

오히려 김준에겐 기회였다. 꾸준히 연습했던 작곡과 재즈로 바로 솔로 가수로 데뷔했다. 1970년대였다. 솔로 데뷔 후 어려움이 있지 않았을까 추측했지만, 그의 대답은 “아니오”였다.

김준은 매일 일기를 쓰듯 작곡했다. 솔로 데뷔를 대비해서 곡 레퍼토리를 준비했다. 그야말로 생활이 음악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렇게 그는 한국 남성 재즈 보컬리스트 1세대가 됐다. 

김준이 재즈 가수로만 활동한 것은 아니다. 그는 예그린 악단에서 만화 성우 활동도 했었다. 대표작은 <인어공주>의 세바스찬과 <미녀와 야수>의 루미에다. 뛰어난 노래 실력으로 만화 OST인 ‘Under the Sea’ ‘Be Our Guest’와 같은 유명 곡의 한국어 더빙도 참여했다.

수원여자대학교 대중음악과 겸임교수로 재직한 적도 있다. 김준은 겸임교수로 재직하면서 학생들의 음악성을 발굴하는 데 매진했다. 다만 그가 처음 재즈를 접했던 것처럼 자연스러운 방식을 택했다. 수업 시간에는 교수와 학생 구분 없이 테이블에 앉아서 음악 이야기를 나눴다.

음악을 듣고 감상을 평가하는 시간도 가졌다. 편하게 음악성을 끌어내는 것이 김준의 방법이다.


김준은 아직도 현역 가수로 활동하고 있다. 이런 그에게 재즈가 무엇이냐고 물었다. 

“재즈는 미국 뉴올리언스 흑인에 의해 시작됐다고 알려졌어요. 그런데 문헌에 보니까 프랑스에서 시작됐다고 나옵니다. 이 사람들이 이민하고 정착하는 과정에 만들어진 음악이란 거죠. 재즈는 흑인의 애환을 담은 음악이라서 그런지 영감이 있어요. 그래서 저는 재즈가 영적인 것을 표현하고 위로한다고 생각합니다. 나도 재즈를 부르면서 위로도 얻고 용기도 생겨요.”

편하게

김준의 바람이 있다면 대중이 재즈를 편하게 생각하는 것이다. “음악을 들을 때 관객이 ‘내가 피아노 연주자다’ ‘색소폰 연주자다’ 이렇게 생각하면 더 흥미롭고 즐겁잖아요. 자주 들으면 친숙해져요. 저는 루이 암스트롱의 ‘What A Wonderful World’와 토미 배넷의 ‘I left my heart in San Francisco’를 많이 듣고 있어요. 우리 주위에 항상 재즈가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줬으면 좋겠어요.”
 

<alswn@ilyosis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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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춤 추는 이정현 마이웨이

칼춤 추는 이정현 마이웨이

[일요시사 정치팀] 박형준 기자 = 국민의힘 이정현 공천관리위원장이 거침없이 칼을 휘두르고 있다. 주호영 국회부의장·김영환 충북도지사가 이 공관위원장의 칼에 희생됐다. 변방의 이방인이어서 휘둘러야 했던 칼의 운명은 반복되고 있다. 그는 왜 칼을 휘두르는 걸까? 국민의힘 이정현 공천관리위원장(이하 공관위원장)이 지난 13일 “여러 의견을 존중하는 과정에서 제가 생각했던 방향을 더는 추진하기 어렵다고 판단했다”면서 사퇴했다가 이틀 후 번복했다. 이 공관위원장은 사퇴했던 이유를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았다. 이틀 후 또 번복 정치권 안팎에선 대체로 이 공관위원장의 갑작스러운 사퇴의 주요 원인으로 오세훈 서울시장과의 갈등을 주된 원인으로 거론했다. 오 시장은 ▲윤석열 전 대통령과의 절연에 소극적인 지도부 혁신 ▲혁신적인 선거대책위원회 조기 출범 등을 요구하면서 지방선거 공천 기간 내 후보 등록을 하지 않았다. 이 공관위원장의 사퇴 번복에는 장 대표가 큰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사퇴 번복 후 “장 대표가 지난 14일 공천 혁신을 완수해 달라면서 공천 관련 전권을 맡긴다는 뜻을 전해왔다”고 밝혔다. 따라서 이 공관위원장의 사퇴는 대체로 ‘무력 시위’로 해석되고 있다. 결국 오 시장은 지난 17일 국민의힘 서울시장 경선 후보로 등록했다. 복귀한 이 공관위원장은 ‘장 대표가 부여한 공천 관련 전권’을 거침없이 휘둘렀다. 지난 16일에 “국민의힘 공천관리위원회(이하 공관위)는 박형준 부산시장 공천 컷오프를 검토하고 있다”는 소식을 전했다. “박 시장을 컷오프하고, 국민의힘 주진우 의원을 단수공천하자”고 주장한 핵심은 이 공관위원장이었다. 그러자 부산에 지역구를 둔 국민의힘 의원들이 장 대표를 방문해 항의했고, 장 대표는 박 시장·주 의원 간 경선을 결정했다. 같은 날 공천이 날아간 현역 광역자치단체장은 김영환 충북도지사였다. 공관위는 김 지사를 컷오프한 이유를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았다. 그저 “김 지사의 공적·업적을 부정·평가절하 하기 위한 게 결코 아니”라면서 시대 교체·세대 교체를 언급했다. 정치권에선 ▲만 70세 고령 ▲수뢰 혐의로 경찰 수사를 받는 등 사법 리스크 ▲재임 중 각종 발언 논란 등 대체로 김 지사의 약점이 컷오프의 실제 이유 아니겠느냐는 추측이 돌고 있다. 김 지사는 곧바로 “특정인을 두고 면접을 진행하다니 기가 막힌다”면서 일각에서 거론됐던 ‘국민의당 김수민 전 의원 충북도지사 후보 내정설’을 암시했다. 김 전 의원은 지난 2024년부터 1년 동안 충북 정무부지사를 지냈다. 김 지사는 지난 18일엔 서울남부지법에 공천 배제 효력 정지 가처분을 신청했다. 이어 다음 날 진행된 심문에서 “이 공관위원장이 김 전 의원에게 개인적으로 연락해서 출마 여부를 타진했다”며 “절차적 정당성이 파기됐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공관위는 이와 상관없이 지난 20일 김 지사를 제외한 경선 구도를 확정했다. 이 공관위원장은 국민의힘 대구시장 후보 공천과 관련해서도 존재감을 드러냈다. 공관위는 지난 22일 국민의힘 대구시장 후보 경선과 관련해 주호영 국회부의장·이진숙 전 방송통신위원장을 공천에서 배제했다. 광주시장 출마 아닌 공관위원장 지방선거와 묶인 운명의 끝은? 대구시장 후보 경선에 대해선 한동안 “국민의힘 최은석 의원 공천이 사실상 내정된 게 아니냐”는 설이 돌아다녔다. 그러자 최 의원은 지난 21일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이 공관위원장은 공천 심사 면접에서 처음 만났다”면서 이를 강하게 부인했다. 주 부의장은 공천 배제에 크게 반발했다. 그는 공천 배제 가능성이 거론되던 지난 17일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대구를 공천 실험장으로 삼으면 안 된다”며 “대구시장을 더불어민주당에 상납하려는 거냐”고 비판했다. 이어 “이 공관위원장은 대구의 자존심을 더 이상 짓밟지 말라”고 요구했다. 하지만 주 부의장 공천 배제는 지난 22일 확정됐다. 그는 지난 25일 가처분 신청과 무소속 출마 가능성을 언급했다. 일각에서 의아하게 해석하는 지점은 유튜버 고성국씨 등 강경 보수 진영에서 강하게 지지했던 이 전 위원장이 공천에서 배제됐다는 것이다. 이를 두고, “추 의원이 국민의힘 대구시장 후보로 확정돼 의원직에서 물러나면, 이 전 위원장이 추 의원의 지역구 대구 달성 재보궐선거에 출마하는 게 아니냐”는 설이 나왔다. 반대로 “주 부의장이 무소속으로서 대구시장 선거에 출마하면, 국민의힘 한동훈 전 대표가 주 부의장의 지역구인 대구 수성갑에 출마하는 것 아니냐”는 설도 나오고 있다. 국민의힘 친한(친 한동훈)계 일원으로 거론되는 국민의힘 박정하 의원은 지난 24일 MBC 라디오 <김종배의 시선집중>에 출연해 “주 부의장의 공천 배제엔 감정이 어느 정도 반영돼있는 게 아니냐는 생각을 하지 않고선 해석이 잘 안 된다”며 “장 대표의 생각도 분명히 들어가 있다고 본다”고 주장했다. 이어 주 부의장과 한 전 대표의 연대설에 대해서도 “한 전 대표가 보수 재건 후 당에 돌아오는 길을 찾아가는 길에 있어선 주 부의장의 선택 여하에 따라 모든 가능성을 다 열어 검토할 것이라고 본다”면서 연대설을 부정하진 않았다. 장 대표는 지난 23일 국민의힘 대구시당을 방문해 “공천 관련 모든 것은 당 대표인 제 책임”이라면서 공천 내정설에 대한 간접적인 의견을 밝혔다. 이어 “시민이 납득할 수 있는 경선을 치르겠다는 말씀을 드렸고, 당 대표로서 역할을 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광역지방자치단체장 경선 상황·흐름에 대해선 “영남권 기성 중진과 반 장동혁 성향 인사를 배제하는 방향으로 가는 게 아니냐”는 의문이 나오고 있다. 일각에선 장 대표와 이 곤공관위원장이 각각 ‘굿 캅’과 ‘배드 캅’으로 역할을 분담한다고 의심하고 있다. 의외의 연대설 이 공관위원장의 활동 방향을 놓고, 일각에선 그가 “사실상 장 대표의 칼 역할을 하고 있다”고 보고 있다. 그의 삶과 정치 활동은 국민의힘 주류 정치인과 많이 다르다. 국민의힘은 영남을 주된 지역 기반으로 두고 있지만, 이 공관위원장은 전남 곡성 출신이다. 그가 태어나 자란 곡성에서도 특히 위치가 외진 목사동면 동암리로 알려졌다. 그는 고등학생 시절부터 정치에 관심을 둔 것으로 알려졌고, 정계 입문 계기는 그의 고향을 지역구로 두고 국회의원으로 활동했던 민주정의당 구용상 전 의원의 비서관으로 발탁된 것이었다. 구 전 의원이 지난 1988년 제13대 총선에서 낙선한 후 이 공관위원장은 민주정의당의 말단 간사로 특채됐다. 영남 기반 정당의 호남 출신 당직자였던 그는 훗날 “늘 근본 없는 놈 취급을 받았다”고 주장했다. 그로부터 26년 후 그는 고향 전남 순천·곡성에서 진행된 재보궐선거에서 새누리당 후보로 당선되는 이변을 일으켰고, 다시 2년이 지나선 새누리당 대표로 당선됐다. 당선 이후 그의 28년에 대해선 “한 편의 드라마” 혹은 “인간 승리”라는 평가도 나왔다. 이 공관위원장에겐 2명의 이 위원장이 있다. 그는 재보궐선거 당시 49.43%를 득표해 40.32%를 득표한 당시 새정치민주연합 서갑원 후보를 물리쳤다. 이 후보의 당선엔 서 후보와 노관규 전 순천시장의 갈등도 큰 영향을 미쳤다는 분석이 있다. 하지만 정치적 흐름만을 탄 결과라고 보기 어렵다는 판단도 있다. 고향 곡성에서 이 공관위원장에 대한 지지세가 높아 70% 이상 득표를 한 것으로 알려졌다. 아울러 그는 새누리당이 아닌 ‘곡성 출신 이정현’을 내세워 자전거를 타고 지역구를 누볐다. 당시 그는 스스로 ‘머슴’ 혹은 ‘촌놈’을 자처했다. 그러면서 “고향을 위해 미치도록 일하고 싶다”며 “죽도록 부려먹다가 못하면 그때 쓰레기통에 다시 넣으시더라도 이번 한번만큼은 제 손을 한 번 잡아달라”고 호소하는 등 지역의 호감을 얻는 발언을 이어나간 영향도 컸던 것으로 분석됐다. 비판·조롱 낯설게하기 지난 2016년 총선에선 지역구 조정 영향으로, 이 공관위원장은 전남 순천에 출마했다. 고향이 아닌 지역구에 출마한 것은 일견 불리할 수도 있는 선택이었다. 하지만 그는 44.54%를 득표해 당선됐다. 그는 재보선 당선 이후 매주 지역구를 방문해 현장을 누빈 것으로 알려졌다. 아울러 당시 야권이었던 더불어민주당·국민의당에서 모두 후보를 출마시킨 구도의 영향도 호재로 작용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 공관위원장은 지난 2022년 지방선거에선 국민의힘 전남도지사 후보로 출마해 선거 비용 보전액 하한선 15%를 넘기는 18.81%를 득표해 “선전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런데 그는 중앙 정치에선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그가 중앙 정치에서 큰 물의를 일으켰을 때 그 원인은 대체로 설화였다. 청와대 홍보수석비서관으로 재직했던 2014년엔 길환영 당시 KBS 사장에게 연락해 “세월호 참사 관련 해경에 대한 비판을 지금은 자제해 달라”고 요구한 게 2년여가 흐른 후 뒤늦게 알려져 물의를 일으켰다. 이는 방송 편성 관련 규제·간섭을 금지한 방송법 위반 행위가 될 위험이 있었는데 실제로 그는 벌금형을 확정받았다. 새누리당 최고위원이었던 지난 2015년엔 광주를 방문해 ‘광주 비하’로 해석될 수 있는 발언을 했다. 당시 그는 “광주 시민이 이정현이를 쓰레기통에 버렸다”며 “박근혜 대통령이 나 같은 쓰레기를 끄집어내서 탈탈 털어 청와대 정무수석·홍보수석을 시켜주는 배려를 했다”고 주장했다. 박 전 대통령에게 과잉 충성하는 이 공관위원장의 모습이나 발언은 지금도 쉽게 찾을 수 있다. 새누리당 대통령 후보였던 박 전 대통령은 지난 2012년 9월 과거사 사과 기자회견에서 회견문을 읽은 후 고개 숙여 인사했다. 당시 상황을 촬영한 사진 중에 후보 공보단장이었던 이 공관위원장이 “질의 시간을 가지면 안 된다”는 의미로 손가락으로 X 표시를 만드는 사진도 있다. 새누리당 대표였던 지난 2016년 11월엔 야권이 박 전 대통령의 임기 단축 협상을 거절하고 탄핵소추를 추진하자 “그 사람들이 탄핵을 실천하면 뜨거운 장에 손을 집어넣겠다”고 반발해 한동안 이 공관위원장을 조롱하는 합성 사진이 범람했다. 정치인은 대체로 선거 현장·당내 투쟁에선 정반대의 모습을 보여준다. 일부 정치인은 그 간극이 커서 주목받는다. 이 공관위원장의 태도는 “상대방에게 진정성 있게 몰입한다”는 장점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상황에 따라 그 진정성 있는 몰입은 정반대의 이미지를 연출한다. 지역구에선 유권자들이 전통적인 지역 구도에 따른 관성을 무시하고 그를 지지하는 이변으로 이어진다. 반대로 중앙 정치에선 지지자들의 환호와 반대파의 비판·조롱으로 나뉜다. 주호영·김영환 치니 한동훈 꿈틀…나비효과? 마구 휘두르고 장동혁이 수습…굿 캅 배드 캅? 20세기 독일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의 존재론에 따르면, 이 공관위원장은 ‘호남 출신 보수정당 소속’으로 던져졌다. 이는 그 스스로 선택한 것이지만, 주어진 운명이 그를 던진 측면도 있다. 던져진 상황을 극복하는 것은 그의 선택이 부여한 운명이었다. 이 때문에 이 공관위원장은 고향에선 ‘친근한 고향 사람’이 돼 선거에 임하면서 국회의원으로 당선됐다. 하지만 보수정당에 뿌리내릴 수 있도록 그를 발탁한 사람은 박 전 대통령이다. 박 전 대통령에 대한 충성은 그 스스로 선택해 자신의 삶을 던진 것으로 볼 수 있다. ‘영남 출신 엘리트’ 주축으로 구성된 국민의힘 기준에서 이 공관위원장은 변방의 이방인이다. <조선일보> 양상훈 주필은 지난 2016년 8월 이 공관위원장이 새누리당 대표에 당선된 후 그에 관한 칼럼을 썼다. 양 주필에 따르면, 이 공관위원장은 당직자 시절 자신보다 어린 당 출입기자로부터 반말을 들어가면서 그의 심부름을 했다. 변방의 이방인이었기 때문에 그에 대한 태도는 훨씬 ‘편하게’ 나왔을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하지만 그는 지금도 국민의힘에 있다. 러시아 문예비평가 빅토르 슈클로프스키는 시 창작과 관련해 ‘낯설게하기’란 이론을 창안했다. “익숙한 대상을 생경하게 바라보면서 그 본질을 시로 표현할 수 있다”는 취지의 이론이다. 그런데 이 공관위원장은 존재 자체가 ‘낯설게하기’였다. 고향에선 보수 정당 소속이기 때문에 낯설다. 보수 정당에선 호남 출신인 그의 존재는 낯설면서도 동시에 강렬하다. 공천관리위원장으로서 시행하는 주요 정치인 컷오프도 그가 낯선 존재이기 때문에 더욱 부각된다. 박 전 대통령에 대한 그의 충성도 반대파·비판자의 관점에선 개종자의 열정·과잉 사회화로 보일 여지가 있다. 개종자의 열정은 원래 특정 집단 소속이 아니었던 사람이 집단에 들어간 이후 기존 구성원보다 더 근본주의적인 태도로 열정을 쏟아붓는 현상을 말한다. 이는 대체로 “난 원래 이 집단 사람이 아니었다”는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 진행된다. 그에게는 늘 ‘근본’과 관련된 비판을 받으면 안 된다는 불안감이 있기 때문이다. 과잉 사회화도 뒤늦은 주류 문법 학습 때문에 유연성을 발휘하기보다 집단의 규범을 그대로 집행하려는 경향으로 이어지는 측면을 일컫는다. 개종자의 열정·과잉 사회화를 상징하는 역사 속 인물로는 긍정적인 측면에선 한때 유대교 바리새파에서 촉망받았다가 예수의 가르침을 전파한 사도 바울을 언급할 수 있다. 부정적인 측면에선 20세기 소련의 공안 탄압을 상징하는 라브렌티 베리야를 언급할 수 있다. 조지아 출신인 베리야는 이오시프 스탈린에게 발탁된 후 대숙청을 진두지휘했던 니콜라이 예조프를 몰아내고 방첩기관 NKVD의 수장이 됐다. 지금도 베리야는 공안 탄압을 상징한다. 특정 집단에 기반이 없는 이방인이 그 집단에서 생존하기 위해 누군가의 ‘칼’이 되는 것은 숙명에 가깝다. 숙명적으로 묶인 운명 이 공관위원장은 원래 광주·전남통합시장 출마를 준비했다가 국민의힘 공천관리위원장으로 임명됐다. 그는 임명된 직후 군복을 연상시키는 야전상의를 입고 다시 등장했다. 사실상 장 대표의 칼로써 공천을 진두지휘하면서 그의 정치적 운명은 지방선거에 묶였다. 그의 운명은 여전히 칼인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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