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을 만나다> 한국 재즈보컬 1세대 김준

  • 김민주 기자 alswn@ilyosisa.co.kr
  • 등록 2023.01.30 15:55:26
  • 호수 141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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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년, 재즈 같은 삶

[일요시사 취재1팀] 김민주 기자 = “빨간 마후라 사나이/하늘의 사나이는 빨간 마후라/빨간 마후라를 목에 두르고/구름따라 흐른다 나도 흐른다/아가씨야 내 마음 믿지 말아라/번개처럼 지나갈 청춘이란다/ 석양을 등에 지고 하늘 끝까지/폭음이 흐른다 나도 흐른다/그까짓 부귀영화 무엇에 쓰랴.” (쟈니 브라더스, <빨간 마후라>, 1964)

한국 남성 재즈 보컬리스트 1세대이자 원로 가수. 보컬리스트 김준의 수식어다. 1940년 1월14일에 태어난 김준은 ‘한국 재즈 100년의 역사’에 기록됐고, 현재까지 보컬리스트로 활동하고 있다. 

처음 그를 만난 것은 서울시 종로구의 째즈바 ‘천년동안도’였다. 연주자와 보컬 평균 연령 70대 후반인 재즈 그룹이 공연하는 모습은 이색적이었다. 공연 관람자도 보통은 아닌 것처럼 보였다. 관람 연령이 20대부터 60대까지로 모두 ‘재즈 매니아’의 면모가 엿보였다.

산증인

보컬과 연주자는 자유로웠고 관람자도 마찬가지였다. 음악으로 하나가 된다는 게 이런 느낌일까. 그날의 감상평이다. 젊은 재즈 연주자가 넘쳐나는 시대, 노련한 재즈 연주자의 모습 자체가 새로웠다.

김준은 “재즈는 내 인생이다. 나는 언제나 나를 위해 노래한다. 그래서 재즈 공연을 할 때가 가장 행복하다. 관객이 공연을 보러와 주고 좋아해주니 정말 고맙다”고 말했다.


“인생이 재즈다”. 음악이 업인 사람도 쉽게 할 수 없는 말이다. 그러나 김준의 인생은 ‘음악이 인생’이라는 명제가 어색하지 않다. 그렇다고 편하게 음악인의 길을 간 것도 아니다.

김준의 아버지는 평안북도 신의주 사람으로 삼대독자였다. 그는 20대 중국서 행상을 한 돈으로 고향 신의주의 밭과 땅을 샀다. 그는 만석꾼으로 살았고, 1945년 8월15일 해방 이후 계속 신의주에 머물렀다. 하지만 부유한 삶을 산 것도 잠시였다.

김일성이 1946년에 북한을 소련식 사회주의 경제에 편입하겠다고 발표하며 토지개혁을 실시했다. 만석꾼이었던 삶도 끝난 것이다. 이를 계기로 김준의 가족은 남한으로 향했다.

사실 그 당시는 누구에게나 평탄하지 않은 시대였고 김준도 마찬가지였다. 김준은 강원도 원주에 있는 원주초등학교를 다녔는데, 초등학교 5학년 때 6·25 전쟁이 터졌다. 그 길로 걸어서 부산까지 피난 갔다. 그 후, 강원도 영월군 주천초등학교로 전학을 간 뒤 다시 목포로 이동했다. 1·4후퇴 때 제주도로 다시 피난 간 뒤 그곳에서 초·중·고등학교를 졸업했다.

김준이 재즈를 처음 접한 곳도 제주도였다. 당시 제주도에는 미 육군통신대가 주둔하고 있었다. 중학생이었던 김준은 미군부대에 하우스보이로 아르바이트를 했는데, 이를 계기로 군부대 안에 있는 교회서 예배를 드렸다.

40년생, 여전히 현역으로 활동 중
축구 선수서 보컬리스트로 대변신

미군부대 교회 목사는 체플리 게일이라는 흑인이었다. 예배가 끝나면 목사는 김준을 조용히 집무실로 불렀다. 목사는 그에게 이것저것 물어보기도 했고 인생에 관한 조언도 했다. 그때 집무실에는 루이 암스트롱, 엘비스 프레슬리 등 항상 재즈 음악이 틀어져 있었다.


김준은 “피난 시절 목사님 집무실에서 재즈 음악을 접했다. 어린 시절이라 노래를 잘 부른다는 걸 몰랐다. 그런데 듣고 있으면 마음이 참 편했다. 특히 탁성으로 노래를 부를 수 있다는 걸 처음 알게 됐다. 이런 부분에 매력을 느끼고 관심을 가지게 됐다”며 유년 시절을 회상했다.

노래를 잘 부른다는 칭찬을 받긴 했지만, 김준은 유년 시절 축구선수였다. 이런 그가 노래를 시작하게 된 것은 고등학교 교장 선생님 덕분이었다. 

김준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난 뒤, 전국 고등학교 콩쿨대회가 생겼다. 그가 졸업한 학교에도 공문이 왔고, 평소 김준의 노래 실력을 눈여겨봤던 교장 선생님은 그를 추천했다. 물론 불법이었다. 김준은 다시 머리를 자르고 교복을 입었다.

콩쿨대회에는 고등학생 성악부만 85명이 참가했다. 여기서 상을 받게 됐고, 김준은 대회 수상을 계기로 경희대학교 성악과에 입학했다. 그리고 예그린 악단(서울 시립가무단의 전신)에 취직하게 됐지만 1년 뒤 해체됐다. 

예그린 악단의 해체가 아쉬웠던 합창단원 4명이 모여 4중창을 결성했고 이름을 ‘쟈니 브라더스’라고 지었다. 이들의 활약은 대단했다. 노래자랑 방송 프로그램에서 특상을 받았고, 1962년 KBS 라디오 연속극 주제가로 부른 <빨간 마후라>가 히트쳤다.

<빨간 마후라>로 쟈니 브라더스는 슈퍼스타가 됐지만, 쥐꼬리만한 출연료로는 쟈니 브라더스를 이어갈 수 없었다. 

피란 때 흑인 목사 통해 들어 
“위로도 얻고 용기도 생겨요”

오히려 김준에겐 기회였다. 꾸준히 연습했던 작곡과 재즈로 바로 솔로 가수로 데뷔했다. 1970년대였다. 솔로 데뷔 후 어려움이 있지 않았을까 추측했지만, 그의 대답은 “아니오”였다.

김준은 매일 일기를 쓰듯 작곡했다. 솔로 데뷔를 대비해서 곡 레퍼토리를 준비했다. 그야말로 생활이 음악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렇게 그는 한국 남성 재즈 보컬리스트 1세대가 됐다. 

김준이 재즈 가수로만 활동한 것은 아니다. 그는 예그린 악단에서 만화 성우 활동도 했었다. 대표작은 <인어공주>의 세바스찬과 <미녀와 야수>의 루미에다. 뛰어난 노래 실력으로 만화 OST인 ‘Under the Sea’ ‘Be Our Guest’와 같은 유명 곡의 한국어 더빙도 참여했다.

수원여자대학교 대중음악과 겸임교수로 재직한 적도 있다. 김준은 겸임교수로 재직하면서 학생들의 음악성을 발굴하는 데 매진했다. 다만 그가 처음 재즈를 접했던 것처럼 자연스러운 방식을 택했다. 수업 시간에는 교수와 학생 구분 없이 테이블에 앉아서 음악 이야기를 나눴다.

음악을 듣고 감상을 평가하는 시간도 가졌다. 편하게 음악성을 끌어내는 것이 김준의 방법이다.


김준은 아직도 현역 가수로 활동하고 있다. 이런 그에게 재즈가 무엇이냐고 물었다. 

“재즈는 미국 뉴올리언스 흑인에 의해 시작됐다고 알려졌어요. 그런데 문헌에 보니까 프랑스에서 시작됐다고 나옵니다. 이 사람들이 이민하고 정착하는 과정에 만들어진 음악이란 거죠. 재즈는 흑인의 애환을 담은 음악이라서 그런지 영감이 있어요. 그래서 저는 재즈가 영적인 것을 표현하고 위로한다고 생각합니다. 나도 재즈를 부르면서 위로도 얻고 용기도 생겨요.”

편하게

김준의 바람이 있다면 대중이 재즈를 편하게 생각하는 것이다. “음악을 들을 때 관객이 ‘내가 피아노 연주자다’ ‘색소폰 연주자다’ 이렇게 생각하면 더 흥미롭고 즐겁잖아요. 자주 들으면 친숙해져요. 저는 루이 암스트롱의 ‘What A Wonderful World’와 토미 배넷의 ‘I left my heart in San Francisco’를 많이 듣고 있어요. 우리 주위에 항상 재즈가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줬으면 좋겠어요.”
 

<alswn@ilyosis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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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국방부, 내란 문건 ‘대청소 프로젝트’

[단독] 국방부, 내란 문건 ‘대청소 프로젝트’

[일요시사 취재1팀] 오혁진·김철준 기자 = 12·3· 내란 사태와 관련된 국방부 문건이 대규모로 파쇄된 것으로 파악됐다. 이 조치는 오영대 전 인사기획관의 지시로 이뤄졌다. 오 전 기획관은 검찰 특수본과 재판서 정보사와 수사2단 인사안의 문제점을 증언했던 인물이다. 자신이 비상계엄에 적극적으로 가담한 사실을 숨기기 위해 수사에 협조한 것으로 의심되는 대목이다. “올해 초 신년맞이 대청소라면서 문서를 대량으로 파쇄했다.” <일요시사>와 접촉한 국방부 직원들의 말이다. 파쇄된 문건들은 12·3 내란 사태와 관련된 자료라고 한다. 지시자는 오영대 전 국방부 인사기획관이다. 검찰 수사에 협조했던 인물로 알려져 있으나 실상은 다르다는 게 군 내부자들의 주장이다. 뭘 숨기나 안규백 국방부 장관이 지난달 말 취임하면서 시작한 첫 번째 군 개혁은 인사다. 신임 인사기획관에 일반 공무원 출신인 이인구 군사시설기획관을 임용한 건 안 장관이 강조해 왔던 ‘군 문민통제’와도 맞닿아 있다. 인사기획관은 본래 예비역 장성이 맡아왔다. 이 신임 기획관의 전임자였던 오 전 기획관도 예비역 준장 출신이다. 군 내부에서는 국방부에 여전히 12·3 내란 사태에 협조한 군인들이 남아 있다고 지적한다. 핵심으로 인사기획관실의 총괄과이자 인사기획관의 일정, 예산 등을 모두 관리하는 인사기획관리과가 언급된다. 다수의 국방부 관계자들은 “오 전 기획관은 물러났지만 책임져야 할 다수의 인물이 아직 자리를 보전하고 있다”고 전했다. 이 부서의 간부들은 전부 육군사관학교 출신이다. 과장 김모 대령은 오 전 기획관이 대령이었을 때 소령으로 근무했고, 총괄 이모 중령은 오 전 기획관이 특전사 여단장을 역임했던 1공수여단서 중대장과 707중대장을 거쳤다. 장군인사팀장 김모 대령은 김용현 전 국방부 장관이 수도방위사령관으로 근무했던 시절 비서실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김 전 장관과 가깝거나 육사 출신인 이들이 국방부 인사의 핵심부서인 인사기획관리과에 포진하면서 계엄 실행을 위한 보직 이동이 이뤄진 셈이다. 김 전 장관은 실제 대통령경호처장일 때부터 노상원 전 국군정보사령관과 군 인사에 대해 논의했다. 직무에서 배제되지 않은 인사기획관리과 간부들은 ‘장관이 모든 책임을 오 전 기획관에게 묻는 형식으로 퇴직을 시켰으니 우리는 지시를 받아 어쩔 수 없이 한 것처럼 조용히 지내면서 정부초기 개혁의 소나기만 피하면 진급 가능’이라며 서로서로 쉬쉬하고 있다고 한다. <일요시사> 취재를 종합하면 인사기획관리과 간부들은 내란 이후인 지난해 12월 중순 오 전 기획관의 지시에 따라 문건 파쇄를 계획했다. 김 전 장관이 물러난 이후 인사기획관리과장 김 대령 및 총괄인 이 중령 외에는 계획되지 않은 대면보고는 금지했고 내부 보안에 심혈을 기울였다. 인사과 간부들 계엄 실패 후 12월 계획···1월 파쇄 “지시자는 검찰 수사 응했던 오영대 전 인사기획관” 한 달여 뒤 이 중령은 모든 과에 ‘신년맞이 대청소’를 하라고 전파했다. TF 자리 배치와 오래된 문건을 정리한다며 유독 인사기획관리과만 복도로 책상을 빼고, 대량 세절이 가능한 세절실을 예약해 엄청난 양의 문서들을 파쇄했다. 여기엔 내란 핵심 파일도 포함된 것으로 파악됐다. 안 장관은 이와 관련해 국회에서 오 전 기획관에게 여러 차례 질문한 바 있다. 당시 오 전 기획관이 당황해하며 우물쭈물하는 모습이 담긴 동영상이 퍼지기도 했다. 이 중령은 동영상을 보며 웃는 직원들의 명단과 안 장관에게 제보한 인물을 색출하기 위해 탐문 활동을 벌여 오 전 기획관에게 추정해 보고했다. 이들은 모두 오 전 기획관으로부터 승진추천, 성과상여금, 각종 포상 등 인사상 불이익을 본 것으로 전해진다. 이들이 문건을 파쇄한 이유는 내란에 적극적으로 가담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내란 당일 오후 10시가 넘은 시각임에도 퇴근하지 않고 사무실에 있던 오 전 기획관의 지시를 받은 이 중령은 각 과의 총괄 담당자들을 소집해 ‘계엄 선포가 됐는데 선제적으로 인사 관련 조치를 왜 안 하냐’ ‘합참에는 계엄사령부가, 지작사령부에는 지역계엄사령부가 곧 창설될 텐데 각 군 본부 및 지작사와 인사 지침을 협의해 계엄령 취지에 맞게 배포하라’고 강조했다. 특히 오 전 기획관은 계엄 해제 결의안이 국회 본회의 테이블을 통과했음에도 합동참모본부 전투통제실에서 이 중령에게 “(계엄이) 해제되긴 했는데 다시 시행될 수도 있으니 빨리 계엄사 창설 지원을 위한 인사 조치를 완성하고 지작사 병력에 대한 휴가 지침 및 통제 등 건의 사항을 받아보라”고 지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오 전 기획관은 내란 직전까지 김 전 장관의 의중에 따라 군 인사를 반영했다. 최근 내란 특검팀이 군 장성급 인사 자료 확보에 나선 것도 이에 관해 들여다보기 위한 것으로 확인됐다. 특검팀은 최근 국방부 장군인사팀과 육군본부 장군인사실 등을 압수수색해 해당 부서 내 인사 관련 파일 등을 확보했다. 정치권에선 지난 2023년 11월과 지난해 4월 이례적인 인사가 이뤄졌다는 지적이 제기됐다. 진급에 절박한 군 인사들을 계엄 실행 세력으로 활용했단 의혹이다. 더불어민주당 추미애 의원은 “윤석열정부 장군 인사는 특이하고, 이례적인 경우가 유독 많았다”며 “인사를 통해 군을 장악하고, 내란을 준비했다는 의혹 관련 특검의 철저한 수사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2·3차 계엄 대비 문건 없애” 증거 인멸 국회서 해제 불구 지작사와 인사 논의? 내란중요임무종사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여인형 전 방첩사령관, 이진우 전 수도방위사령관, 곽종근 전 특수전사령관은 지난 2023년 11월 인사에서 소장에서 중장으로 진급했다. 박안수 전 계엄사령관은 ‘75주년 국군의 날 행사기획단장 겸 제병지휘관’ 등 한직에서 2023년 10월 육군참모총장에 발탁됐다. 지난해 4월엔 지휘부에 이어 작전본부 인사가 이어졌다. 원천희 당시 육군 소장이 4차 진급으로 합참 정보본부장으로 승진했고, 이승오 소장은 군단장을 거치지 않고 합참 작전본부장으로 진급했다. 안찬명 당시 육군22사단장은 임명 5개월 만에 합참 작전부장으로 보직을 옮겼다. 통상 사단장은 1년 반~2년가량 보직을 맡는다. 군 안팎에서 이례적이란 평가가 나왔던 이유다. 경질 위기이던 문상호 전 정보사령관은 유임됐다. 그는 지난해 6월 정보사 군무원의 블랙요원 명단 국외 유출 사건 및 박민우 전 정보사 100여단장과의 갈등 등으로 논란의 중심에 섰다. 당시 국방부 장관이던 신원식 전 안보실장은 지난해 8월 국회에서 “후속 조치를 강하게 할 생각”이라고 언급했지만, 다음 달 본인이 장관직에서 물러났다. 검찰 비상계엄 특별수사본부는 군 관계자에게서 “노 전 사령관과 김 전 장관이 장군들 인사에 대해 논의했고 오 전 기획관에게 전달됐다”는 진술을 확보한 바 있다. 위기감을 느낀 오 전 기획관은 특수본 수사에 적극적으로 협조하기 시작했다. <일요시사>가 입수한 오 전 기획관의 특수본 진술조서를 보면 그는 “신원식 (전 국방부) 장관이 저와 원천희 국방부 정보본부장에게 문 전 사령관에 대한 보직해임·정보사령관 교체 검토를 지시했으나 지난해 9월6일, 김 전 장관이 취임하면서 문 전 사령관에 대한 ‘현 보직 유지’를 지시했다”며 “납득하기 어려운, 이해하기 어려운 인사였다”고 했다. 앞뒤 달랐다 오 전 기획관은 “(문 전 사령관이 박 준장으로부터 고소당한 혐의가) 어느 정도 사실로 확인됐지만 문 전 사령관에 대한 인사 조치는 없었다”며 “공론화된 문제고 어느 정도 사실로 확인됐는데도 이렇게 유야무야 넘어가는 일은 거의 없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hounder@ilyosisa.co.kr> <kcj5121@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