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즈막 들어 주변에서 하나둘 세상을 떠나는 모습을 보면서 가끔 필자의 마지막을 생각해보곤 한다.
말인즉 어떤 식으로 삶을 마무리 지을 것인가에 대해서다.
고민 끝에 한 가지 결론에 도달했다. 살면서 소중한 인연을 이어온 사람들과 마지막 술잔을 기울이며 그들이 보는 앞에서 조용히 생을 마감하기로.
물론 이 발상이 가능하지는 않아 보인다. 그러나 “불가능은 없다”고 자부하는 소설가로서 이와 유사한 방식에서 마무리 지을 생각이다.
물론 태어났을 때는 자의가 아니었던 만큼 죽을 때는 필자 의지에 따라 선택하리라는 생각에서다.
필자 바람의 기저에는 생과 사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존재하고 있다. 필자는 생과 사를 별개로 바라보지 않고 하나로 간주하고 있다.
아울러 생의 과정을 우리 몸속에 존재하는 기(氣)의 순환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생명체가 잉태되는 순간 기가 발생한다. 그리고 이 세상에 태어나면서 외부의 기를 받아들이며 한동안 왕성하게 기가 작동된다.
이어 어느 순간에 이르면 기 활동이 정점에 이르고 서서히 약화되기 시작하며 죽음을 목전에 둔 시점에는 기가 소멸된다.
이제 기가 모두 소멸된 상태에서 생명체를 바라보자.
그 시점에 인간이 살아있다면 어떻게 될까. 기의 부재에 따른 무기력, 그리고 그에 수반되는 고통을 고스란히 받는다면 생각하기도 끔찍한 상황이 연출될 게 자명하다.
이 대목에서 영혼의 존재에 대해 살펴보자.
종교계, 특히 기독교에서는 스러지지 않는 영혼을 빌미로 사후세계를 인정하고 있으나 필자는 이에 절대 동조하지 않는다.
왜냐, 사는 물질 즉, 육체와의 이별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만약에 종교에서 언급하는 영혼이 존재한다면 그게 무슨 의미를 줄까.
필자가 살필 때 육체와 결별된 상태에서 영혼이 존재한다면, 그것도 일시적이 아니라 영원히 존재한다면 그는 행복이 아니라 불행 그것도 저주에 지나지 않는다.
아울러 기가 모두 소멸된 상태에서 죽음은 생의 막바지에 제기되는 무기력 즉, 고통으로부터 생명체를 구원하는 일이라 본다.
다소 애매하게 들릴지 모르나 죽음이 결국 생명체를 온전하게 제 자리로 돌려놓는 일이라 간주한다.
그런데 문제는 앞서 언급한 자연사가 아니라 돌연사 즉, 사고나 질병으로 인한 죽음과 관련해서다.
지금 이와 관련해 극심한 고통에 시달리는 말기 환자에게 의사가 약물 등을 제공해 환자 스스로 삶을 마칠 수 있도록 하는 일명 ‘조력 존엄사법’이 국회에서 발의됐다.
조력 존엄사란 수용하기 어려운 고통을 겪는 말기 환자가 본인이 희망하는 경우 담당 의사의 도움을 받아 환자가 스스로 약물을 투약해 삶을 마무리하는 방식으로 의사가 약물을 투약하는 안락사와는 차이를 보이고 있다.
아울러 필자는 조력 존엄사 대신 적극적 개념을 지니고 있는 안락사를 권장한다.
필자뿐만 아니다. 최근 이와 관련해 실시된 여론조사 결과를 살피면 국민 중 76%가 안락사 제도를 지지한다고 한다.
이와 관련해 우리 헌법 제10조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 국가는 개인이 가지는 불가침의 기본적 인권을 확인하고 이를 보장할 의무를 진다’를 인용한다.
동 조항을 확대 해석하면 모든 국민은 인간의 존엄성 파괴와 행복이 아닌 고통을 거부할 수 있고 국가는 이를 전적으로 보장해야 한다.
따라서 생전에 존엄과 행복을 지킬 수 있는 안락사를 금지한 일은 동 조항에 정면으로 위배된다.
※본 칼럼은 <일요시사> 편집 방향과 다를 수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