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시사 취재1팀] 양동주 기자 =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가석방이 확정됐다. 총수 부재라는 최악의 상황을 벗어났다는 것만으로도 기대효과는 엄청나다. 그간 미뤄졌던 삼성전자의 투자 계획에 속도가 붙을 것으로 예상된다.
지난 9일, 법무부 가석방심사위원회(이하 심사위)는 오후 2시부터 6시30분까지 약 4시간30분 간 비공개 회의 끝에 총 810명을 가석방하기로 의결했다. 가석방 명단에서 가장 눈길을 끈 건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었다.
결국…
이례적 조치
총 9명(법무부 4명, 외부 위원 5명)으로 구성된 심사위는 이재용 부회장이 수형 성적 등 가석방을 위한 정량적 요소를 모두 충족했다는 데 의견을 모았다. 법무부는 지난 4월부터 모범 수형자의 사회복귀 촉진 등을 위해 형기의 60% 이상을 복역하면 가석방 대상이 될 수 있도록 내부 규정을 개정해 시행해왔다.
가석방이 확정된 이재용 부회장은 수감 207일 만인 지난 13일 오전 10시에 서울구치소를 나왔다. 만기 출소를 11개월 앞둔 시점이었다. 이재용 부회장은 지난 1월 국정 농단 사건 파기환송심에서 전직 대통령 박근혜씨와 최순실씨에게 뇌물을 준 혐의로 징역 2년6월의 실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이던 상태였다.
이재용 부회장에게 내려진 ‘가석방’ 조치는 다소 이례적이다. 역대 정부는 복역 중이던 재벌 총수를 풀어줄 때 주로 ‘사면’ 방식을 택해왔다. 박근혜 대통령 재임 시절인 2015년에 최태원 SK그룹 회장, 2016년에 이재현 CJ그룹 회장이 광복절 직전 사면된 사례가 대표적이다.
일각에서는 현 정부가 문재인 대통령의 소신에 어긋나지 않는 선에서 절충안을 냈다고 평가한다. 지금껏 문재인 대통령은 복역 중인 재벌 총수를 사면하는 결정을 단행하지 않았다. 이는 문 대통령이 직접 언급했던 뇌물·알선수재·알선수뢰·배임·횡령 등 ‘5대 중대 부패범죄’의 사면을 배제한다는 원칙과 맞닿아 있다.
그러나 가석방은 얘기가 달라진다. 법률상 사면이 대통령의 권한이라면, 가석방에는 법무부의 의중이 반영된다. 이재용 부회장의 조기 출소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생기더라도, 비난의 화살을 대통령이 아닌 법무부로 돌릴 여지를 만든 셈이다.
구속 207일 만에 가석방 출소
제한된 보폭…엄청난 기대효과
다만 가석방 결정이 이 부회장의 경영 일선 복귀를 의미하는 건 아니다. 특정경제범죄 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 제 14조는, 특정 범죄를 저질러 유죄 판결을 받은 자는 관련 회사에 취업할 수 없다고 규정한다. 취업제한 기간은 ▲징역형의 집행이 종료되거나 집행을 받지 않기로 확정된 날부터 5년 ▲징역형의 집행유예 기간이 종료된 날부터 2년 ▲징역형의 선고유예 기간 등이다.
이 부회장은 5억원 이상 횡령 등으로 인해 유죄가 확정된 만큼 향후 5년간 삼성전자를 비롯한 삼성그룹 계열사 경영에 참여가 불가능하다. 삼성전자 최대주주로서의 지위만 보장된다.
가석방이라는 한계에도 불구하고 삼성전자는 총수의 출소만으로도 천군만마를 얻은 격이다. 미국 반도체 투자를 비롯해 삼성 계열사들의 대규모 투자와 인수합병(M&A)에 속도가 붙을 것으로 기대되는 까닭이다.
재계에서는 총수 부재 리스크가 일정 부분 해소된 만큼 삼성전자 특유의 초격차 전략에 다시 시동이 걸릴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삼성전자는 2016년 자동차 부품 기업인 하만 인수 이후 대규모 M&A를 진행하지 않았다.
실제로 총수의 경영 참여 여부가 기업 경쟁력에 미치는 영향력은 수차례에 걸쳐 입증된 바 있다. 한 예로 현대자동차그룹은 정의선 회장의 주도 하에 11억달러에 달하는 기업가치를 보유한 글로벌 로봇 전문업체 ‘보스턴다이내믹스’ 인수를 매듭지었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74억달러 규모의 대미 투자 계획을 발표했다.
다시 가동된
초격차 전략
반도체 시장에서의 위상 강화를 위한 구체화된 전략이 나올 거란 관측도 나온다. 인텔, TSMC 등 경쟁사의 공격적인 경영 전략에 대한 맞대응 차원이다.
인텔은 2025년까지 반도체 공정 기술 로드맵을 공개하면서 삼성전자를 제치고 업계 선두에 오르겠다는 의지를 드러낸 상황이다. 아울러 인텔은 34조원(300억달러) 규모를 투자해 반도체 위탁생산(파운드리) 업체 글로벌파운드리 인수를 추진하는 등 올해 파운드리 분야에만 총 500억달러를 투자할 예정인 것으로 알려졌다.
글로벌 파운드리 1위 업체인 TSMC는 반도체 생산능력 확충을 위해 앞으로 3년간 1000억달러를 투자한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일본에 약 3700억원 규모의 반도체 연구개발(R&D) 거점을 마련한다는 계획을 밝히기도 했다.
반면 삼성전자의 최근 행보는 경쟁사들과 비교해 소극적이었다. 지난 5월 문 대통령과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 간 정상회담 과정에서 발표한 미국 내 두 번째 파운드리 공장 건설 계획과 관련한 투자 규모만 밝혔을 뿐이다.
텍사스주 오스틴과 테일러 애리조나 인근 굿이어, 퀸크리크 지역, 뉴욕 제네시카운티 등 기존 생산시설이 들어선 지역이 언급되고 있지만, 공장 건설 지역과 시기 등 세부적인 결정은 아직 내려지지 않았다. 이 부회장의 가석방이 미국 공장 건설 계획의 시기에 중차대한 영향을 줄 거란 관측이 계속된 이유다.
이 부회장의 인적 네트워크를 활용해 반도체 생산 설비 업체와의 협력관계를 긴밀하게 할 수 있다는 점도 기대요소다. 반도체 생산에 필요한 장비를 확보하는 경쟁에서 뒤쳐지지 않으려면 장비 제조업체와의 긴밀한 관계 유지가 필수다.
다만 이 부회장의 행동반경이 제한될 수밖에 없다는 점은 삼성전자 입장에서 아쉬운 부분이다. 가석방과 사면은 기업활동에 있어 큰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재계 일각에서 ‘자유로운 경제활동을 위해서라도 이 부회장의 사면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나온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절실했던
현장 복귀
게다가 이 부회장은 현장을 몸소 챙기는 경영 행보를 나타냈던 인물이다. 2018년 2월 항소심 재판부의 집행유예형으로 풀려났던 이 부회장은 ‘뉴 삼성’이라는 새로운 경영가치를 제시하며 광폭행보를 보인 바 있다.
당시 이 부회장은 출소 한 달 뒤부터 거의 매달 해외 출장길에 올랐다. 2018년 3월 말 유럽과 캐나다 출장에 나선 것을 시작으로 5월 중국, 6월 일본, 7월 인도, 8월 유럽을 둘러봤고, 같은 해 11월 베트남을 방문한 데 이어 12월 인도를 재방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