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천데이트폭력 사건 심층취재>② 끝나지 않은 악몽

“악마를 만났습니다. 지금도 지옥입니다”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부천데이트폭력 사건이 일어나고 2년이 흘렀다. 가해자의 시간은 매일 흐르고 있지만 생존자의 시간은 감금됐던 그날에 멈춰 있다. 잃어버린 2년, 그리고 앞으로 잃어버릴 가능성이 높은 가늠할 수 없는 시간. 그날의 악몽은 생존자에겐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 일요시사와 인터뷰 중인 부천데이트폭력 사건 피해자

2020년 11월11일 오전 11시20분. 인천지법 부천지원 민사3단독 353호 법정. 원고 김가은(가명)과 피고 강정준(가명)의 민사재판이 열렸다. 오전 11시7분경 수의를 입은 강정준이 교정당국 관계자와 함께 모습을 드러냈다. 안경을 쓰고 마스크를 착용한 강정준의 목에 있는 한자 문신이 눈에 띄었다. 

얼굴만 봐도
두려움 떨어

판사가 사건번호를 부르면서 원고와 피고를 각각 호명했다. 김가은의 변호인이 “원고 김가은씨가 지금 오는 중입니다”라고 하자 강정준의 고개가 입구 쪽으로 돌아갔다. 3~4분 뒤, 모자를 쓰고 마스크로 얼굴을 가린 김가은이 법정으로 들어왔다.

강정준은 김가은을 쳐다봤지만 김가은은 강정준을 보지 않았다. 두 사람은 1년6개월 만에 다시 만났다.

강정준은 변호인 없이 변론했다. 강정준은 “왜 이렇게 된 건지 잘 모르겠습니다. 저는 분명히 민·형사상의 합의서를 쓴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합의금도 지불했는데 또 다시 이렇게 한 이유를(잘 모르겠습니다). (김가은이) 저에게 보복하는 것 같습니다”라고 억울함을 토로했다. 강정준이 말한 합의서는 김가은이 쓴 처벌불원서를 뜻한다.


판사가 발언 기회를 주자 김가은은 합의서에 대해 설명했다. 김가은은 “합의서를 작성하는 과정에서 (민사를 뜻하는) ‘민’ 자를 삭제했습니다”라고 주장했다. 김가은의 목소리는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판사는 합의서 내용을 확인하고 “여기에 민사상 문제를 제기하지 않겠다는 말은 없네요”라고 설명했다. 

강정준은 재판이 끝나자 교정당국 관계자와 함께 법정을 나섰다. 그 사이 김가은은 강정준과 마주칠까 봐 화장실로 몸을 피했다.

강정준이 사라지고도 김가은은 한참 주변을 계속 두리번거리면서 “갔어요? 갔어요?”하고 변호인에게 재차 확인했다. 김가은은 “심장이 터질 뻔했다”며 마치 감금됐던 그때로 돌아간 듯 두려움을 감추지 못했다. 

부천데이트폭력 사건 생존자 김가은은 가해자 강정준에 의해 2018년 10월초 자신의 집에 감금됐다가 11월7일 탈출했다. 감금 기간 동안 강정준으로부터 폭언·협박·폭행·성폭행 등을 당했다. 11월9일에 검거된 강정준은 유사강간 등의 혐의로 징역 2년6월, 강간 혐의로 징역 1년6월 등 4년형을 받고 복역 중이다. 

사건 후 2년이 지났지만 김가은의 몸과 마음은 여전히 만신창이다. 2번의 수술 과정에서 장기 일부를 잘라냈고, 강정준의 폭행으로 생긴 골반염은 이미 여러 차례 재발했다. 또 머리에 반복적인 폭행이 가해지면서 후유증으로 광시증(어둠 속에서 눈앞에 빛이 번쩍하는 현상)이 생겨 시력이 떨어졌다.

심리상태는 더 심각하다. 우울증과 공황장애,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에 시달리고 있다. 불면증으로 깊은 잠을 자본 게 언제인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고 했다. 또 잠이 들어도 끊임없이 악몽에 시달린다고 고백했다. 밤마다 괴한에게 쫓기는 꿈, 재해가 일어나는 꿈, 칼로 위협당하는 꿈을 반복적으로 꾸고 있다고 했다.

데이트폭력은 미혼남녀 사이에서 일어난다는 차이를 보일 뿐 가정폭력과 그 양상이 비슷하다. ▲생존자에 대한 가해자의 심리적 지배 ▲생존자의 무기력으로 인한 적극적 대응 실패 ▲당사자 간의 해결을 요구하는 수사기관의 안일한 대응 ▲친밀한 관계에 개입하지 않으려는 주변의 반응 등이다. 그 결과는 생존자의 완벽한 고립이다. 


가스라이팅
합의서까지

#. 심리적 지배

가스라이팅(타인의 심리나 상황을 교묘하게 조작해 지배력을 강화하는 행위)은 데이트폭력에서 전형적으로 나타나는 가해 양상이다. 강정준은 김가은을 때릴 때마다 “네가 맞을 짓을 해서 맞는 거다. 내가 싫어하는 짓을 했기 때문에 벌을 주는 것이다” 등의 말로 폭행을 합리화했다. 자존감을 깎는 방법을 이용해 심리적으로 김가은을 조종한 것이다.

폭언과 폭행이 반복되자 김가은은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강정준의 비위를 맞추기 시작했다. 강정준이 원하는 모습으로 외관을 꾸몄고, 말과 행동도 강정준의 뜻에 따랐다. 강정준의 요구도 무조건 다 들어줬다. 탈출 이후 조사 과정에서 경찰이 “김가은씨는 정말 강정준씨의 꼭두각시였네요”라고 말했을 정도. 

한 달간 하루도 빠짐없이 이어진 폭언과 폭행에 김가은의 정신은 붕괴됐다. 탈출 이후 몸은 수술 등을 거쳐 회복이 진행된 반면 정신적인 부분은 돌볼 겨를이 없었다. 그 사이에도 경찰 조사와 재판이 숨 가쁘게 진행됐다. 차마 데이트폭력 피해 사실을 가족에게 알릴 수 없었던 김가은은 모든 일을 혼자 처리했다. 처음에는 도와주던 친구도 점차 멀어졌다. 

사건 후 2년 지났지만
정신적 상처는 그대로

김가은에 대한 강정준의 심리적 지배는 탈출 이후 7개월 가까이 이어졌다. 그 누구에게도 도움을 청할 수 없는 완전한 고립에 빠진 김가은은 아이러니하게도 강정준을 찾아갔다. 처음에는 범행을 부인하는 강정준에게 화가 났기 때문이었지만 이후에는 대화 상대가 필요해서였다. 김가은은 강정준을 10번 이상 접견했다. 

강정준은 김가은을 감금할 당시에도 폭행을 저지르고 난 뒤 미안하다고 사과하는 모습을 여러 번 보였다. 김가은을 무자비하게 때리다가도 갑자기 무릎을 꿇고 잘못했다며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고 호소했다. 김가은에게 처음 폭행을 가했을 때, 김가은의 2차 탈출 시도에 폭행을 가했을 때도 그랬다. 김가은은 강정준에 그런 모습에 마음이 약해졌다. 

“집에 혼자 있으면 계속 그때의 기억이 떠올랐어요. 바깥에 나가고 싶은데 갈 곳이 없었어요. 친구들은 나를 피했고 가족에게는 말할 수 없었고요. 강정준이 계속 편지를 보내 미안하다고, 잘못했다고, 한 번만 더 기회를 달라고 말하더라고요. 솔직히 내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이 강정준밖에 없었어요.” 

강정준의 각서와 김가은의 합의서가 오간 시점도 이때쯤이다. 강정준은 ‘폭력을 행사하지 않겠다’ ‘(강정준이 김가은의 이름으로 받은) 대출금과 카드빚 변제에 힘쓰겠다’는 내용의 각서를 작성했고, 김가은은 ‘강정준의 처벌을 원치 않는다’ ‘형사상 합의했다’는 내용의 합의서를 작성했다. 
 

▲ 부천데이트폭력 사건의 가해자가 법정 안으로 들어서고 있다.

특히 채무 압박에 시달리던 김가은은 엄마를 통해서라도 반드시 돈을 갚겠다는 강정준의 말을 믿고 기다렸다. 추심업체로부터 하루에 10통 이상 전화가 오고 집으로도 사람이 찾아오던 때였다. 강정준은 카드빚과 대출금 변제를 호소하는 김가은에게 해결할 테니 조금만 기다려 달라는 말을 7개월 동안 반복했다.

“빚에 대한 스트레스가 정말 심했어요. 몸과 마음이 아픈 것보다도 더요. 당장 눈앞에 닥친 현실이니까 어쩔 줄을 모르겠더라고요. 강정준은 계속 ‘엄마가 많이 아프다. 그래도 해주실 거다’ 라면서 죄책감을 자극하더라고요.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제가 계속 돈에 절절 매니까 그걸 이용한 느낌도 들어요.”


하지만 유사강간 등의 혐의로 재판이 끝난 후 강정준은 돌변했다. 

“사실 2019년 1월 합의서를 써준 직후부터 후회했죠. 몸이 낫고 정신을 조금씩 차리기 시작하니까 강정준의 모든 게 다 이상해 보였어요. 오히려 (2019년) 6월에 강정준이 그렇게 나오는 걸 보면서 ‘사람 안 변하는구나’ 했어요. 심지어 합의금조차 5개월이 지나서야 보내주더라고요.”

카드빚만
3000만원

2019년 6월 강정준은 김가은에게 ‘이제 재판도 끝났으니 너한테 잘 보일 필요 없겠다. 너 내가 나가면 머리에 칼 꽂을 거니까, 밤길 조심해라. 조금 있으면 출소하는 사람이 있다. 그 사람 시켜서 너 죽여버릴 거다. 옛날 기억 다시 떠오르게 해줄게’라고 협박했다. 

“오히려 적반하장으로 나오는 강정준을 보면서 내가 얼마나 어리석은 짓을 했는지 깨달았어요. 확실하게 죗값을 받도록 해야겠다는 결심이 섰죠.”

#. 경제적 파탄
하지만 김가은의 상황은 녹록지 않았다. 대출금과 카드빚이 어마어마했다. 강정준이 한 달 동안 김가은의 카드로 쓴 돈은 3000만원에 이른다. 강정준은 헤어짐을 요구하는 김가은에게 돈을 주면 헤어져 주겠다고 말했다. 전정가위(가지치기용 가위)로 손가락을 자르겠다고 협박하면서도 1억원을 내놓으라고 요구했다. 


강정준은 김가은의 명의로 2000만원가량의 카드론 대출을 받았다. 이 돈으로 강정준은 자신의 빚을 갚고 중고차를 구입했다. 강아지를 2마리 사들였고, 지포라이터와 가방 등 명품 쇼핑을 했다. TV, 청소기 등 집안의 가전도 마구잡이로 바꿨다. 2018년 11월7일 이후 검거될 때까지도 강정준은 김가은의 신용카드를 사용했다. 

모든 돈은 김가은의 명의로 대출받았기 때문에 빚도 고스란히 그녀의 몫으로 남았다. 사건 전 17평대 전셋집에 살고 있던 김가은은 사건 이후 연체기록이 잔뜩 남은 신용불량자로 전락했다. 2019년 6월 몸도 마음도 제대로 회복되지 않은 채 일자리를 찾아 나섰던 것도 말 그대로 돈이 너무 없어서였다. 

“집 형편이 좋지 않아 손을 벌릴 수가 없었어요. 내가 벌어서 어떻게든 해결해야 했죠. 또 불면증도 너무 심했어요. 일을 하고 몸을 혹사시키면 조금이라도 잘 수 있을까 싶어 일자리를 찾아봤어요. 운 좋게 한 외국계 회사에 취업하게 됐죠.” 

회사생활은 6개월 만에 한계에 다다랐다. 일을 하다가도 불현듯 떠오르는 그날의 기억, 손 떨림, 조금만 큰 소리가 나도 바짝 얼어버리는 몸, 회사로 걸려오는 연체 독촉전화, 자꾸만 주변 눈치를 보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견디기 어려웠다. 회사 동료들도 왜 이렇게 눈치를 보느냐고 조심스레 물어왔다. 결국 지난해 말 회사를 그만뒀다. 
 

대출금과 카드빚 연체기록은 두고두고 김가은의 발목을 잡았다. 최종합격한 또 다른 회사에서 연체기록을 이유로 채용취소를 통보했다. 첫 출근 후 퇴근하는 길에 받은 전화였다. 연체기록이 확인돼 채용이 어려울 것 같다는, 하루 일한 것은 일할로 계산해 돈을 챙겨주겠다는 말이 돌아왔다. 

“계속 일을 하려고 한 게, 집에만 있으면 나를 아예 놓아버리는 듯한 느낌이 들었어요. 그런데 최종합격했다가 취소되니까…. 통보를 받고 집에 오는 지하철에서 엄청나게 울었어요. 이제 정말 아무 것도 할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 꿈도 희망도 없는 미래

김가은은 올해 2월 전문상담기관을 찾았다. 일이나 취미 등으로 마음을 달래보려 했던 시도가 모두 실패했기 때문이다. 첫 상담 당시 김가은은 ‘우울감 및 불안감이 지속적이고 침습(원치 않는 생각이 계속 떠오르는 것) 및 해리 증상, 회피 행동과 과각성(자극에 대해 정상보다 과민하게 반응하는 상태) 관련 증상’이 있는 상태였다. 

또 ‘자기 자신에 대한 절망과 무력감’ ‘스스로를 굉장히 유약하고 힘이 없는 존재로 인식’ ‘일상의 일조차 버겁게 느껴지고 주변의 요구에 적절한 반응을 보이는 것이 힘겨운 상태’ ‘자책하는 면이 있음’ ‘외상적 경험 이후 유발된 정서적 혼란감을 적절히 다루지 못했음. 이것이 대인상과 자아상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음’ 등의 소견이 나왔다.

“길을 가다가도 울컥해요. 갑자기 머릿속에 기억이 떠오르면 움직일 수가 없어요. 화도 엄청나게 나요. 강정준이나 강정준 누나는 저한테 미안하단 말 한 마디가 없어요. 그저 자기 엄마가 뇌경색으로 쓰러진 걸 제 탓으로 돌리고 있어요. 자기 엄마가 잘못되면 절 죽이겠다고. 그게 왜 내 탓이에요, 대체?”

상담사들은 김가은이 최소 몇 년 동안 상담치료 등 전문적인 의료기관의 진료를 받아야 한다고 조언했다. 그러면서 주변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가족이나 친구 등 전폭적으로 김가은을 믿어줄 수 있는 사람들에게 따뜻한 보살핌을 받아야 한다는 의미다. 하지만 김가은은 고개를 저었다. 

회사원에서 신용불량자 신세
연체기록 때문에 채용 취소도

“아버지는 제가 어릴 때 일찍 돌아가셨고, 엄마는 건강이 많이 안 좋으세요. 형제도 없고요. 그래서 어릴 때부터 할머니가 저를 키워주셨어요. 솔직히 할머니께서 저를 세심하게 챙겨주신 편은 아니라 모든 걸 혼자 해야 했어요.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독립한 것도 할머니 부담을 덜어드리려고 그랬던 거고요.”

“친구들은 제 상황을 자세히 몰라요. 그래서 몇몇 친구들은 아직도 힘들어하는 저를 보고 ‘한심하다. 언제까지 그 일에 휘둘릴 거야’라면서 욕하기도 해요. 그러면 ‘네가 사건에 대해 뭘 알아’ 하고 속으로 말하고 말죠. 어떤 친구한테는 말해보려 했는데, 몇 마디 하니까 ‘징그럽다고 그만 말하라’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그 이후론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았어요.”

회사 생활, 대학원 준비, 사업 준비, 운동, 독서 등으로 바빴던 김가은의 삶은 이제 단조로워졌다. 일어나서 밥을 먹고 TV 앞에 앉아 시간을 보내는 것이 전부. 그러다 일주일에 1번 상담을 위해 병원에 가고 아주 가끔 친구들을 만난다. 해야 할 일도, 하고 싶은 일도 산더미처럼 많지만 무기력증이 김가은을 놓아주지 않고 있다. 

“강정준에 대한 추가 고소도 준비해야 하거든요. 공갈도 있고, 협박도 있고. 고소 시효가 있어서 빨리 해야 하는데 정말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 거예요. 마음은 급한데 뭘 하려고 하면 집중도 안 되고. 일상을 사는 방법을 아예 까먹은 것 같아요.”

“솔직히 너무 힘들어요. 바깥으로 다 드러내면 주변에 아무도 남아있지 않을까 봐 드러낼 수가 없어요. 그런데 속은 다 썩어 문드러졌거든요. 정말 회사 다니고 사회생활하면서 정상적으로 살고 싶어요. 제 미래에 대해서만 걱정하면서요. 사실 이런 생각만 해도 머리 아프고 힘들잖아요, 충분히. 근데 왜 내가 이런 것까지….”

#. 엄습해오는 공포

강정준은 2022년 11월 사회로 돌아온다. 2년도 채 남지 않았다. 김가은은 올해 초 다른 지역으로 이사했다. 이전 집은 악몽의 공간이 됐다. 줄곧 원룸에서 살다가 처음 넓은 집으로 이사하게 돼 직접 페인트칠까지 하면서 꾸몄던 집이었다. 30년간 쓴 이름도, 주민번호도 바꿔야 한다. 김가은이 아는 강정준은 ‘출소하면 너를 찾아가 죽이겠다’고 한 말을 실행으로 옮길 수 있는 사람이다. 

“가족에도
말 못해요”

“2018년 11월7일에 탈출하고 보호소에서 잤던 때가 생각나요. 그때 30일 만에 정말 편안한 잠을 잤거든요. 그 이후로 편안한 잠을 잔 적이 없어요. 그래도 지금은 발 뻗고 잘 수 있죠. 그런데 앞으로 전 어떻게 해야 할까요.”
 



배너

관련기사

16건의 관련기사 더보기






설문조사

진행중인 설문 항목이 없습니다.



‘검머외 쿠팡’ 막가는 싸가지 행보

‘검머외 쿠팡’ 막가는 싸가지 행보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고객 개인정보 유출에 대한 쿠팡의 태도가 도마 위에 올랐다. 현재까지 대응만 봐서는 국민은 물론, 정부와도 전면전을 벌일 기세다. 새어나간 정보의 범위와 규모가 ‘역대급’이라는 말이 나올 만큼 최악의 사태임에도 불구하고 쿠팡의 고개는 꺾일 줄 모르고 있다. 일각에서는 ‘뭘 믿고 저러나’ 소리가 나오는 중이다. 쿠팡의 고객 개인정보 유출 사건, 이른바 쿠팡 사태가 점입가경이다. 사태가 일어난 지 한 달이 지났지만 수습은커녕 국민의 화만 돋우고 있다. 쿠팡의 대응 태도가 미지근한 수준을 넘어 뻔뻔한 지경에 이르렀기 때문. 김범석 의장은 모습을 비추지 않고 보상안은 꼼수로 가득하다. 국민을 조롱하는 게 아니냐는 말이 나올 정도다. 한 달 만에 고개 숙여 지난해 11월 말 3370만명에 이르는 쿠팡 고객의 개인정보가 ‘탈탈’ 털렸다. 앞서 쿠팡은 4500여건의 고객 정보가 유출됐다고 정부 당국에 신고했지만 2주 만에 그 수치는 7500배까지 늘어났다. 전 국민의 65% 수준이며 지난해 4월 SKT 개인정보 유출 사태 범위(2300만명)를 훌쩍 넘는 사태였다. 쿠팡은 이커머스 시장에서 독점적 지위를 갖고 있다. 대형마트 등이 규제에 막혀 뒷걸음질 칠 때 쿠팡은 로켓배송으로 시장을 싹쓸이했다. 전날 저녁에 주문해도 새벽이면 물건이 문 앞에 와 있는 총알 배송에 소비자는 쿠팡으로 몰렸다.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라는 비판을 받던 물류센터는 거점 역할을 하고 있다. 이번 사태는 아이러니하게도 쿠팡이 국민의 실생활에 얼마나 스며들어있는지를 바로 보여줬다. 쿠팡 사태가 터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글로벌 투자은행 JP모건은 “쿠팡이 경쟁자가 없는 시장 지위를 누리고 있고 한국 고객이 데이터 유출에 덜 민감해 보인다”며 “잠재적 고객의 이탈은 제한적일 것”이라는 내용의 보고서를 내놨다. 그래서일까? 쿠팡은 역대 최악의 정보 유출 사태라는 오명을 뒤집어쓰고도 제대로 된 대응을 하지 않고 있다. 심지어 대통령이 언급하고 정부 차원의 TF가 꾸려졌는데도 불구하고 오히려 ‘힘겨루기’를 하는 태도를 보이는 중이다. 최근에는 정부의 반박에도 자체 조사 결과를 고집하는 등 이해할 수 없는 행보로 눈살을 찌푸리게 하고 있다. 쿠팡은 지난달 25일 ‘정보 유출자는 3300만개 계정에 접근했으나 실제 저장한 정보는 3000여개에 불과하며 제3자 유출 정황은 없는 등 피해가 미미하다’는 내용의 자체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그러면서 “(유출자는) 개인정보 유출에 대한 언론 보도를 접한 이후 저장했던 정보를 모두 삭제하고 범죄에 사용한 노트북을 파손해 하천에 던졌다”고 주장했다. 쿠팡은 “잠수부들이 벽돌에 담긴 쿠팡 가방에 든 노트북을 하천에서 회수했고 유출자가 클라우드 계정에 등록한 일련번호와 해당 노트북의 일련번호가 일치하는 것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이어 “범행에 사용된 PC 와 노트북 등 모든 장치를 회수해 안전하게 확보했고 글로벌 보안업체들의 조사 결과도 진술 내용과 같았다”고 설명했다. 국내에서 매출 90% 나오는데 정보 유출 태도·대응 낙제점 쿠팡이 발표한 대로라면 고객 정보 유출 피해 규모는 기하급수적으로 줄어든다. 또 유출자와 접촉해 장치를 확보했으니 추가 피해는 없다. 전체적으로 사건이 축소되는 것이다. 쿠팡의 발표에 정부는 강하게 반발했다. 쿠팡의 조사 내용은 사전에 정부와 어떤 논의도 없이 일방적으로 진행됐다는 설명이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이하 과기부)는 “정보 유출 종류와 규모, 경위 등은 민관합동조사단이 조사 중인 사안”이라며 “쿠팡이 발표한 내용은 조사단에 의해 확인된 바 없다”고 밝혔다. 서울경찰청 사이버수사과도 “쿠팡 측이 제출한 진술서와 노트북 등 증거물을 분석 중”이라며 “사실관계를 면밀하게 확인하겠다”고 했다. 논란이 계속되자 쿠팡은 정부의 지시를 받아 조사를 진행했다고 해명했다. 하지만 경찰은 사전 협의가 없었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사실관계가 엇갈리고 있는 것이다. 쿠팡은 지난달 26일 내놓은 입장문에서 “정부의 지시에 따라 수주간 진행한 조사였다”고 선을 그었다. 같은 달 9일 정부가 쿠팡 측에 유출자와 접촉할 것을 제안했고 14일 쿠팡은 유출자를 처음 만난 뒤 해당 사실을 정부에 보고했으며 16일에는 정부 지시에 따라 유출자의 데스크톱과 하드드라이브를 정부에 제공했다는 게 쿠팡 측 주장이다. 하지만 국가정보원(이하 국정원)도 “쿠팡의 입장문 형식의 보도자료에서 정부와 협력했다는 내용 중 일부 국정원으로 추정되는 부분도 사실과 다르거나 왜곡된 부분이 있다”고 반박했다. 쿠팡이 자체 조사와 관련해 정부와 사실 공방을 벌이고 있는 와중에 김범석 쿠팡 의장이 사건 발생 한 달여 만에 사과했다. 그동안 박대준 전 대표가 청문회 등에서 뭇매를 맞고 있는 동안에도 김 의장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랬던 그가 정부의 압박이 거세지자 처음으로 입을 연 것이다. 5만원 상당 속사정은? 김 의장은 지난달 28일 “쿠팡의 창업자이자 이사회 의장으로서, 쿠팡 전체 임직원을 대표해 진심으로 사과드린다”고 밝혔다. 이어 “저희의 책임으로 발생한 이번 데이터 유출로 인해 많은 분께서 자신의 개인정보가 안전하지 않다는 두려움과 불안을 느꼈고 사고 초기부터 명확하게 직접적으로 소통하지 못한 점으로 인해 큰 좌절감과 실망을 안겨 드렸다”며 “사고 직후 미흡했던 초기 대응과 소통 부족에 대해 진심으로 사과드린다”고 말했다. 김 의장은 한 달 만에야 입을 연 부분에 대해 “무엇보다 제 사과가 늦었다”면서 “모든 사실이 확인된 이후에 공개적으로 소통하고 사과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판단했다. 돌이켜보면 이는 잘못된 판단”이라고 고개를 숙였다. 비판과 질책을 겸허히 받아들인다고도 했다. 하지만 자체 조사 논란에 대해서는 기존 입장을 고수했다. 김 의장은 “쿠팡은 조사 초기부터 정부에 전면적으로 협력해 왔다”며 “일련의 과정에서 많은 오정보가 확산하는 상황에서도 정부의 ‘기밀 유지’ 요청을 엄격히 준수했다”고 주장했다. 김 의장의 사과는 국회 6개 상임위원회가 참여하는 대규모 연석 청문회를 이틀 앞두고 나왔다. 정부가 범부처 TF를 과기부 총리 산하로 확대하고 다각도로 압수수색과 조사를 진행하는 등 대응 수위를 높이는 상황에 압박을 느꼈을 것이라는 분석이 제기된다. 그러나 사과와는 별개로 김 의장은 청문회에 불출석하겠다고 밝혔다. 김 의장뿐만 아니라 동생인 김유석 쿠팡 부사장, 강한승 전 쿠팡 대표 등이 불출석 사유서를 제출하면서 쿠팡에 대한 부정적 여론에 기름을 부었다. 여기에 쿠팡이 내놓은 보상안도 도마 위에 올랐다. 쿠팡은 지난달 29일 고객 정보 유출 사태와 관련해 총 1조6850억원 규모의 보상안을 시행하겠다고 밝혔다. 전체적으로 보면 1인당 5만원 상당이다. 하지만 세부적으로 뜯어보면 쿠팡의 ‘꼼수’가 보인다. 청문회는 나 몰라라 보상안은 ▲쿠팡 전 상품 구매 이용권 5000원 ▲쿠팡이츠 5000원 ▲쿠팡트래블 2만원 ▲명품 플랫폼 알럭스 2만원 등으로 구성됐다. 소비자들은 보상금의 상당 부분이 쿠팡트래블과 알럭스 등 평소 이용 빈도가 낮은 서비스 이용권 위주로 구성된 점을 지적했다. 실제 이번 보상안을 통해 쿠팡트래블과 알럭스를 처음 알게 됐다는 소비자도 있다. 시민단체도 쿠팡의 보상안에 반발했다. 참여연대는 “1인당 5만원 보상이라고 했지만 현금이 아닌 구매 이용권으로 사실상 강제 소비를 유도하는 방식”이라며 “보상이 아니라 매출 확대를 위한 마케팅에 불과하다”는 내용의 논평을 발표했다. 쿠팡의 행보는 사사건건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다. 일각에서는 국민을 조롱하고 정부를 기만하는 게 아니냐는 말까지 나오고 있다. 쿠팡이 미국 시장에 상장한 기업이지만 매출 대부분을 우리나라에서 벌어들이는 상황인데도 이 같은 태도를 보이는 것에 분노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회원 탈퇴, 보상안 거부, 집단소송 참여 움직임이 거세지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심지어 이재명 대통령도 쿠팡 사태에 대해 여러 차례 언급했다. 이 대통령은 쿠팡 사태가 일어나고 사흘 뒤인 지난달 2일 “쿠팡 때문에 국민의 걱정이 많다”면서 “사고 원인을 규명하고 엄중하게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주문했다. 그러면서 “관계부처는 해외 사례를 참고해 과징금을 강화하고 징벌적 손해배상 제도도 현실화하는 등 실질적인 실효적 대책에 나서주길 바란다”고 강조했다. 뒤늦은 사과·꼼수 보상안 도마 위에 이래서 정치권 인사 영입했나? 의혹 12일에도 개인정보 유출 사고가 반복되는 것에 대해 “경제 제재가 너무 약해서 규정 위반을 밥 먹듯이 한다”며 “앞으로는 규정을 위반해 국민에게 피해를 주면 엄청난 경제 제재를 당해서 ‘회사가 망한다’는 생각이 들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규정을 위반하면 난리가 나야 하는 것 아니냐”며 “그런데 위반해도 태도를 보면 ‘그래서 어쩔 건데’ 이런 느낌이 든다”고 지적했다. 정부도 쿠팡에 강력하게 경고하며 전방위 대응을 예고했다. 실제로 같은 달 29일, 배경훈 부총리 겸 과기부 장관 주재로 ‘쿠팡 사태 범정부TF’ 회의를 개최했다. 이 자리에서 과기부와 경찰청, 개인정보위원회, 금융위원회 등은 역할을 분담해 신속한 조사를 진행한다는 방침을 세웠다. 배 부총리는 “쿠팡이 국내 고객 정보 3000만건 이상을 유출한 것은 명백한 국내법 위반 사항으로 정부는 쿠팡이 관련 법령을 위반한 사실이 확인될 경우, 다른 기업과 동일하게 법과 원칙에 따라 엄정하게 조치할 것”이라고 말했다. 상황에 따라서는 영업정지 여부도 판단할 것으로 보인다. 사방에서 몰아치는 압박에도 쿠팡이 연달아 이상한 행보를 보이자 ‘믿는 구석’이 있는 게 아니냐는 의혹도 제기됐다. 그 정도로 쿠팡의 현재 대응 방식을 이해할 수 없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일각에서는 쿠팡이 미국 기업인 것에 주목하고 있다. 미국 증시가 쿠팡의 모든 결정에 가장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요소라는 것이다. 실제 쿠팡이 자체 조사 결과를 발표한 다음 날 미국 뉴욕 증시에서 쿠팡의 주가는 6% 급등했다. 국내에서는 쿠팡의 ‘셀프 조사’에 분통을 터트리고 있는데 미국 시장에는 호재로 작용한 것이다. 쿠팡이 정치·국회 인사를 대거 영입한 게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게 아니냐는 분석도 나온다. 정치권 인사를 영입해 쿠팡 관련 각종 논란을 틀어막고 있다는 의혹이다. 해당 의혹은 ‘강력 경고’ ‘전방위적 대응’ 등의 수사를 사용하고 있지만 실제 조사는 흐지부지될 것이라는 관측이 조심스럽게 나오는 배경으로도 꼽힌다. 변죽 울리다 무사통과? 실제 최근 원내대표직에서 사퇴한 더불어민주당 김병기 의원이 국정감사를 한 달여 앞둔 시점에 박대준 전 쿠팡 대표 및 대관 총괄과 오찬을 한 사실이 드러났다. 당시 쿠팡이 일용직 퇴직금 미지급 사건에서 검찰 외압 의혹, 물류센터·배송 기사의 과로 및 산재 사망 문제가 제기된 상황이었던 만큼 적절성 논란이 불거졌다. 김 의원은 그달 16일 자신의 SNS에 “공개 일정이고 적어도 5명이 (함께) 식사했다”고 적었다. 그러면서 “만남보다 대화의 내용이 중요한 것 아니냐? 참고로 지난해 7월16일 쿠팡 물류센터도 방문했었다”고 적었다. <jsjang@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