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천데이트폭력 사건 심층취재>② 끝나지 않은 악몽

“악마를 만났습니다. 지금도 지옥입니다”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부천데이트폭력 사건이 일어나고 2년이 흘렀다. 가해자의 시간은 매일 흐르고 있지만 생존자의 시간은 감금됐던 그날에 멈춰 있다. 잃어버린 2년, 그리고 앞으로 잃어버릴 가능성이 높은 가늠할 수 없는 시간. 그날의 악몽은 생존자에겐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 일요시사와 인터뷰 중인 부천데이트폭력 사건 피해자

2020년 11월11일 오전 11시20분. 인천지법 부천지원 민사3단독 353호 법정. 원고 김가은(가명)과 피고 강정준(가명)의 민사재판이 열렸다. 오전 11시7분경 수의를 입은 강정준이 교정당국 관계자와 함께 모습을 드러냈다. 안경을 쓰고 마스크를 착용한 강정준의 목에 있는 한자 문신이 눈에 띄었다. 

얼굴만 봐도
두려움 떨어

판사가 사건번호를 부르면서 원고와 피고를 각각 호명했다. 김가은의 변호인이 “원고 김가은씨가 지금 오는 중입니다”라고 하자 강정준의 고개가 입구 쪽으로 돌아갔다. 3~4분 뒤, 모자를 쓰고 마스크로 얼굴을 가린 김가은이 법정으로 들어왔다.

강정준은 김가은을 쳐다봤지만 김가은은 강정준을 보지 않았다. 두 사람은 1년6개월 만에 다시 만났다.

강정준은 변호인 없이 변론했다. 강정준은 “왜 이렇게 된 건지 잘 모르겠습니다. 저는 분명히 민·형사상의 합의서를 쓴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합의금도 지불했는데 또 다시 이렇게 한 이유를(잘 모르겠습니다). (김가은이) 저에게 보복하는 것 같습니다”라고 억울함을 토로했다. 강정준이 말한 합의서는 김가은이 쓴 처벌불원서를 뜻한다.


판사가 발언 기회를 주자 김가은은 합의서에 대해 설명했다. 김가은은 “합의서를 작성하는 과정에서 (민사를 뜻하는) ‘민’ 자를 삭제했습니다”라고 주장했다. 김가은의 목소리는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판사는 합의서 내용을 확인하고 “여기에 민사상 문제를 제기하지 않겠다는 말은 없네요”라고 설명했다. 

강정준은 재판이 끝나자 교정당국 관계자와 함께 법정을 나섰다. 그 사이 김가은은 강정준과 마주칠까 봐 화장실로 몸을 피했다.

강정준이 사라지고도 김가은은 한참 주변을 계속 두리번거리면서 “갔어요? 갔어요?”하고 변호인에게 재차 확인했다. 김가은은 “심장이 터질 뻔했다”며 마치 감금됐던 그때로 돌아간 듯 두려움을 감추지 못했다. 

부천데이트폭력 사건 생존자 김가은은 가해자 강정준에 의해 2018년 10월초 자신의 집에 감금됐다가 11월7일 탈출했다. 감금 기간 동안 강정준으로부터 폭언·협박·폭행·성폭행 등을 당했다. 11월9일에 검거된 강정준은 유사강간 등의 혐의로 징역 2년6월, 강간 혐의로 징역 1년6월 등 4년형을 받고 복역 중이다. 

사건 후 2년이 지났지만 김가은의 몸과 마음은 여전히 만신창이다. 2번의 수술 과정에서 장기 일부를 잘라냈고, 강정준의 폭행으로 생긴 골반염은 이미 여러 차례 재발했다. 또 머리에 반복적인 폭행이 가해지면서 후유증으로 광시증(어둠 속에서 눈앞에 빛이 번쩍하는 현상)이 생겨 시력이 떨어졌다.

심리상태는 더 심각하다. 우울증과 공황장애,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에 시달리고 있다. 불면증으로 깊은 잠을 자본 게 언제인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고 했다. 또 잠이 들어도 끊임없이 악몽에 시달린다고 고백했다. 밤마다 괴한에게 쫓기는 꿈, 재해가 일어나는 꿈, 칼로 위협당하는 꿈을 반복적으로 꾸고 있다고 했다.

데이트폭력은 미혼남녀 사이에서 일어난다는 차이를 보일 뿐 가정폭력과 그 양상이 비슷하다. ▲생존자에 대한 가해자의 심리적 지배 ▲생존자의 무기력으로 인한 적극적 대응 실패 ▲당사자 간의 해결을 요구하는 수사기관의 안일한 대응 ▲친밀한 관계에 개입하지 않으려는 주변의 반응 등이다. 그 결과는 생존자의 완벽한 고립이다. 


가스라이팅
합의서까지

#. 심리적 지배

가스라이팅(타인의 심리나 상황을 교묘하게 조작해 지배력을 강화하는 행위)은 데이트폭력에서 전형적으로 나타나는 가해 양상이다. 강정준은 김가은을 때릴 때마다 “네가 맞을 짓을 해서 맞는 거다. 내가 싫어하는 짓을 했기 때문에 벌을 주는 것이다” 등의 말로 폭행을 합리화했다. 자존감을 깎는 방법을 이용해 심리적으로 김가은을 조종한 것이다.

폭언과 폭행이 반복되자 김가은은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강정준의 비위를 맞추기 시작했다. 강정준이 원하는 모습으로 외관을 꾸몄고, 말과 행동도 강정준의 뜻에 따랐다. 강정준의 요구도 무조건 다 들어줬다. 탈출 이후 조사 과정에서 경찰이 “김가은씨는 정말 강정준씨의 꼭두각시였네요”라고 말했을 정도. 

한 달간 하루도 빠짐없이 이어진 폭언과 폭행에 김가은의 정신은 붕괴됐다. 탈출 이후 몸은 수술 등을 거쳐 회복이 진행된 반면 정신적인 부분은 돌볼 겨를이 없었다. 그 사이에도 경찰 조사와 재판이 숨 가쁘게 진행됐다. 차마 데이트폭력 피해 사실을 가족에게 알릴 수 없었던 김가은은 모든 일을 혼자 처리했다. 처음에는 도와주던 친구도 점차 멀어졌다. 

사건 후 2년 지났지만
정신적 상처는 그대로

김가은에 대한 강정준의 심리적 지배는 탈출 이후 7개월 가까이 이어졌다. 그 누구에게도 도움을 청할 수 없는 완전한 고립에 빠진 김가은은 아이러니하게도 강정준을 찾아갔다. 처음에는 범행을 부인하는 강정준에게 화가 났기 때문이었지만 이후에는 대화 상대가 필요해서였다. 김가은은 강정준을 10번 이상 접견했다. 

강정준은 김가은을 감금할 당시에도 폭행을 저지르고 난 뒤 미안하다고 사과하는 모습을 여러 번 보였다. 김가은을 무자비하게 때리다가도 갑자기 무릎을 꿇고 잘못했다며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고 호소했다. 김가은에게 처음 폭행을 가했을 때, 김가은의 2차 탈출 시도에 폭행을 가했을 때도 그랬다. 김가은은 강정준에 그런 모습에 마음이 약해졌다. 

“집에 혼자 있으면 계속 그때의 기억이 떠올랐어요. 바깥에 나가고 싶은데 갈 곳이 없었어요. 친구들은 나를 피했고 가족에게는 말할 수 없었고요. 강정준이 계속 편지를 보내 미안하다고, 잘못했다고, 한 번만 더 기회를 달라고 말하더라고요. 솔직히 내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이 강정준밖에 없었어요.” 

강정준의 각서와 김가은의 합의서가 오간 시점도 이때쯤이다. 강정준은 ‘폭력을 행사하지 않겠다’ ‘(강정준이 김가은의 이름으로 받은) 대출금과 카드빚 변제에 힘쓰겠다’는 내용의 각서를 작성했고, 김가은은 ‘강정준의 처벌을 원치 않는다’ ‘형사상 합의했다’는 내용의 합의서를 작성했다. 
 

▲ 부천데이트폭력 사건의 가해자가 법정 안으로 들어서고 있다.

특히 채무 압박에 시달리던 김가은은 엄마를 통해서라도 반드시 돈을 갚겠다는 강정준의 말을 믿고 기다렸다. 추심업체로부터 하루에 10통 이상 전화가 오고 집으로도 사람이 찾아오던 때였다. 강정준은 카드빚과 대출금 변제를 호소하는 김가은에게 해결할 테니 조금만 기다려 달라는 말을 7개월 동안 반복했다.

“빚에 대한 스트레스가 정말 심했어요. 몸과 마음이 아픈 것보다도 더요. 당장 눈앞에 닥친 현실이니까 어쩔 줄을 모르겠더라고요. 강정준은 계속 ‘엄마가 많이 아프다. 그래도 해주실 거다’ 라면서 죄책감을 자극하더라고요.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제가 계속 돈에 절절 매니까 그걸 이용한 느낌도 들어요.”


하지만 유사강간 등의 혐의로 재판이 끝난 후 강정준은 돌변했다. 

“사실 2019년 1월 합의서를 써준 직후부터 후회했죠. 몸이 낫고 정신을 조금씩 차리기 시작하니까 강정준의 모든 게 다 이상해 보였어요. 오히려 (2019년) 6월에 강정준이 그렇게 나오는 걸 보면서 ‘사람 안 변하는구나’ 했어요. 심지어 합의금조차 5개월이 지나서야 보내주더라고요.”

카드빚만
3000만원

2019년 6월 강정준은 김가은에게 ‘이제 재판도 끝났으니 너한테 잘 보일 필요 없겠다. 너 내가 나가면 머리에 칼 꽂을 거니까, 밤길 조심해라. 조금 있으면 출소하는 사람이 있다. 그 사람 시켜서 너 죽여버릴 거다. 옛날 기억 다시 떠오르게 해줄게’라고 협박했다. 

“오히려 적반하장으로 나오는 강정준을 보면서 내가 얼마나 어리석은 짓을 했는지 깨달았어요. 확실하게 죗값을 받도록 해야겠다는 결심이 섰죠.”

#. 경제적 파탄
하지만 김가은의 상황은 녹록지 않았다. 대출금과 카드빚이 어마어마했다. 강정준이 한 달 동안 김가은의 카드로 쓴 돈은 3000만원에 이른다. 강정준은 헤어짐을 요구하는 김가은에게 돈을 주면 헤어져 주겠다고 말했다. 전정가위(가지치기용 가위)로 손가락을 자르겠다고 협박하면서도 1억원을 내놓으라고 요구했다. 


강정준은 김가은의 명의로 2000만원가량의 카드론 대출을 받았다. 이 돈으로 강정준은 자신의 빚을 갚고 중고차를 구입했다. 강아지를 2마리 사들였고, 지포라이터와 가방 등 명품 쇼핑을 했다. TV, 청소기 등 집안의 가전도 마구잡이로 바꿨다. 2018년 11월7일 이후 검거될 때까지도 강정준은 김가은의 신용카드를 사용했다. 

모든 돈은 김가은의 명의로 대출받았기 때문에 빚도 고스란히 그녀의 몫으로 남았다. 사건 전 17평대 전셋집에 살고 있던 김가은은 사건 이후 연체기록이 잔뜩 남은 신용불량자로 전락했다. 2019년 6월 몸도 마음도 제대로 회복되지 않은 채 일자리를 찾아 나섰던 것도 말 그대로 돈이 너무 없어서였다. 

“집 형편이 좋지 않아 손을 벌릴 수가 없었어요. 내가 벌어서 어떻게든 해결해야 했죠. 또 불면증도 너무 심했어요. 일을 하고 몸을 혹사시키면 조금이라도 잘 수 있을까 싶어 일자리를 찾아봤어요. 운 좋게 한 외국계 회사에 취업하게 됐죠.” 

회사생활은 6개월 만에 한계에 다다랐다. 일을 하다가도 불현듯 떠오르는 그날의 기억, 손 떨림, 조금만 큰 소리가 나도 바짝 얼어버리는 몸, 회사로 걸려오는 연체 독촉전화, 자꾸만 주변 눈치를 보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견디기 어려웠다. 회사 동료들도 왜 이렇게 눈치를 보느냐고 조심스레 물어왔다. 결국 지난해 말 회사를 그만뒀다. 
 

대출금과 카드빚 연체기록은 두고두고 김가은의 발목을 잡았다. 최종합격한 또 다른 회사에서 연체기록을 이유로 채용취소를 통보했다. 첫 출근 후 퇴근하는 길에 받은 전화였다. 연체기록이 확인돼 채용이 어려울 것 같다는, 하루 일한 것은 일할로 계산해 돈을 챙겨주겠다는 말이 돌아왔다. 

“계속 일을 하려고 한 게, 집에만 있으면 나를 아예 놓아버리는 듯한 느낌이 들었어요. 그런데 최종합격했다가 취소되니까…. 통보를 받고 집에 오는 지하철에서 엄청나게 울었어요. 이제 정말 아무 것도 할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 꿈도 희망도 없는 미래

김가은은 올해 2월 전문상담기관을 찾았다. 일이나 취미 등으로 마음을 달래보려 했던 시도가 모두 실패했기 때문이다. 첫 상담 당시 김가은은 ‘우울감 및 불안감이 지속적이고 침습(원치 않는 생각이 계속 떠오르는 것) 및 해리 증상, 회피 행동과 과각성(자극에 대해 정상보다 과민하게 반응하는 상태) 관련 증상’이 있는 상태였다. 

또 ‘자기 자신에 대한 절망과 무력감’ ‘스스로를 굉장히 유약하고 힘이 없는 존재로 인식’ ‘일상의 일조차 버겁게 느껴지고 주변의 요구에 적절한 반응을 보이는 것이 힘겨운 상태’ ‘자책하는 면이 있음’ ‘외상적 경험 이후 유발된 정서적 혼란감을 적절히 다루지 못했음. 이것이 대인상과 자아상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음’ 등의 소견이 나왔다.

“길을 가다가도 울컥해요. 갑자기 머릿속에 기억이 떠오르면 움직일 수가 없어요. 화도 엄청나게 나요. 강정준이나 강정준 누나는 저한테 미안하단 말 한 마디가 없어요. 그저 자기 엄마가 뇌경색으로 쓰러진 걸 제 탓으로 돌리고 있어요. 자기 엄마가 잘못되면 절 죽이겠다고. 그게 왜 내 탓이에요, 대체?”

상담사들은 김가은이 최소 몇 년 동안 상담치료 등 전문적인 의료기관의 진료를 받아야 한다고 조언했다. 그러면서 주변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가족이나 친구 등 전폭적으로 김가은을 믿어줄 수 있는 사람들에게 따뜻한 보살핌을 받아야 한다는 의미다. 하지만 김가은은 고개를 저었다. 

회사원에서 신용불량자 신세
연체기록 때문에 채용 취소도

“아버지는 제가 어릴 때 일찍 돌아가셨고, 엄마는 건강이 많이 안 좋으세요. 형제도 없고요. 그래서 어릴 때부터 할머니가 저를 키워주셨어요. 솔직히 할머니께서 저를 세심하게 챙겨주신 편은 아니라 모든 걸 혼자 해야 했어요.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독립한 것도 할머니 부담을 덜어드리려고 그랬던 거고요.”

“친구들은 제 상황을 자세히 몰라요. 그래서 몇몇 친구들은 아직도 힘들어하는 저를 보고 ‘한심하다. 언제까지 그 일에 휘둘릴 거야’라면서 욕하기도 해요. 그러면 ‘네가 사건에 대해 뭘 알아’ 하고 속으로 말하고 말죠. 어떤 친구한테는 말해보려 했는데, 몇 마디 하니까 ‘징그럽다고 그만 말하라’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그 이후론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았어요.”

회사 생활, 대학원 준비, 사업 준비, 운동, 독서 등으로 바빴던 김가은의 삶은 이제 단조로워졌다. 일어나서 밥을 먹고 TV 앞에 앉아 시간을 보내는 것이 전부. 그러다 일주일에 1번 상담을 위해 병원에 가고 아주 가끔 친구들을 만난다. 해야 할 일도, 하고 싶은 일도 산더미처럼 많지만 무기력증이 김가은을 놓아주지 않고 있다. 

“강정준에 대한 추가 고소도 준비해야 하거든요. 공갈도 있고, 협박도 있고. 고소 시효가 있어서 빨리 해야 하는데 정말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 거예요. 마음은 급한데 뭘 하려고 하면 집중도 안 되고. 일상을 사는 방법을 아예 까먹은 것 같아요.”

“솔직히 너무 힘들어요. 바깥으로 다 드러내면 주변에 아무도 남아있지 않을까 봐 드러낼 수가 없어요. 그런데 속은 다 썩어 문드러졌거든요. 정말 회사 다니고 사회생활하면서 정상적으로 살고 싶어요. 제 미래에 대해서만 걱정하면서요. 사실 이런 생각만 해도 머리 아프고 힘들잖아요, 충분히. 근데 왜 내가 이런 것까지….”

#. 엄습해오는 공포

강정준은 2022년 11월 사회로 돌아온다. 2년도 채 남지 않았다. 김가은은 올해 초 다른 지역으로 이사했다. 이전 집은 악몽의 공간이 됐다. 줄곧 원룸에서 살다가 처음 넓은 집으로 이사하게 돼 직접 페인트칠까지 하면서 꾸몄던 집이었다. 30년간 쓴 이름도, 주민번호도 바꿔야 한다. 김가은이 아는 강정준은 ‘출소하면 너를 찾아가 죽이겠다’고 한 말을 실행으로 옮길 수 있는 사람이다. 

“가족에도
말 못해요”

“2018년 11월7일에 탈출하고 보호소에서 잤던 때가 생각나요. 그때 30일 만에 정말 편안한 잠을 잤거든요. 그 이후로 편안한 잠을 잔 적이 없어요. 그래도 지금은 발 뻗고 잘 수 있죠. 그런데 앞으로 전 어떻게 해야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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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생기업 잡은’ 신정훈 의원실 수상한 보도자료

[단독] ‘생기업 잡은’ 신정훈 의원실 수상한 보도자료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한 업체가 국회의원실발 보도자료에 직격탄을 맞았다. 해당 업체는 보도자료의 내용이 사실과 다르다고 억울함을 토로했다. 보도자료를 쓴 의원실 보좌관은 “잘못된 부분이 없다”고 반박했다. 양측의 입장이 첨예하게 엇갈리는 상황에서 <일요시사>가 사건의 전말을 파헤쳐 봤다. 국회의원은 최고 헌법기관인 국회의 구성원인 동시에 개개인이 헌법기관이라는 이중적 지위를 갖는다. 법률을 만들고 개정하는 입법 기능 외에도 인사청문회, 국정감사 등을 통해 행정부를 견제하고 감시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 투표로 선출된 ‘국민의 종’으로서 국회의원은 기자회견, 보도자료 등을 통해 국민에게 활동 상황을 보고한다. 국회의원 민원 창구? 국회의원 이름으로 하루에도 수건씩 보도자료가 쏟아진다. 법안을 발의하거나 지역구 예산을 수주했다는 내용, 자료와 데이터를 바탕으로 정부 기관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내용 등이다. 언론은 국회의원실발 보도자료를 받아 기사로 작성한다. 언론 보도는 사정기관의 감사나 수사 등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최근 한 국회의원실에서 나온 보도자료가 논란이 되고 있다. 보도자료에 언급된 정부 기관, 그 기관과 일하는 업체 등이 후폭풍에 휘말렸다. 보도자료를 받아 쓴 일부 매체는 언론중재위원회에 제소됐다. 언론사 기자들의 이메일로 배포된 보도자료는 국회의원실 보좌관이 직접 작성한 것으로 확인됐다. 지난 5월14일 더불어민주당 신정훈 의원실 오모 보좌관은 ‘경찰청, 순찰차 납품 지연 및 특정 업체 유착 의혹에도 자료 제출 거부!’라는 제목의 보도자료를 작성해 언론사 기자들에게 보냈다. 신정훈 의원은 전남 나주·화순을 지역구로 하는 3선 의원으로, 현재 국회 행정안전위원회 위원장을 맡고 있다. 경찰청은 행정안전위원회의 피감기관이다. 순찰차는 일반 차량에 특장 작업을 거쳐 경찰청에 납품된다. 멀리서도 순찰차임을 확인할 수 있는 리프트 경광등을 달고 겉면에 스티커를 부착하는 ‘데칼’ 작업을 거쳐 수배·체납·도난 차량을 확인할 수 있는 멀티캠을 내부에 다는 등의 작업을 거친다. 순찰차 한 대를 특장하는 데 약 1700만원의 비용이 드는 것으로 알려졌다. 매년 1000여대의 노후 순찰차가 교체된다. 신정훈 의원실에 따르면 지난해 노후 순찰차 959대를 교체하기 위해 총 491억원의 예산이 집행됐다. 하지만 이 중 약 225억원 상당인 343대가 납기를 맞추지 못했고 완성 검사를 통과하지 못했다. 또 납품업체의 문제로 순찰차 납품이 늦어졌는데도 불구하고 발주 기관인 경찰청은 지체상금 부과, 계약 해지 등의 조치를 하지 않는 등 직무유기를 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신정훈 의원실의 자료 요구에 경찰청이 제출을 거부하고 있다고도 덧붙였다. 신정훈 의원실은 ‘공공계약에 정통한 한 법조계 관계자’의 “경찰청이 계약성 권리조차 행사하지 않고 이를 묵인한 데다 국회의 자료 제출 요구도 거부한 것은 행정 편의주의를 넘어 법적 의무의 명백한 방기”라며 “이 정도 사안이면 감사원 감사는 물론 직권남용과 배임 혐의까지 적용될 수 있는 중대한 사안”이라는 코멘트를 인용했다. 순찰차 납품 과정 지적 해당업체 “사실과 달라” 납품업체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신정훈 의원실은 “동일한 지배 구조를 가진 Y사(보도자료에는 A사)와 N사(B사)가 10여년간 경찰청의 대형 계약을 반복적으로 수주해 왔다”며 “수의계약이나 경쟁입찰의 형식을 빌린 사실상의 내정 또는 담합 행위로 해석될 수 있다. 공정거래법상 ‘부당 공동행위’ 및 ‘입찰 방해’에 해당될 여지가 있다”고 설명했다. N사는 Y사의 임직원이 만든 회사로 두 업체는 모회사-자회사 관계다. 신 의원은 “국민의 세금으로 집행되는 치안 장비 도입 사업이 법적 절차와 원칙을 무시한 채 일부 업체에 특혜로 왜곡되고 있다”며 “기존 계약분에 대한 의혹이 해소되지 않은 상태에서 신규 발주가 진행돼서는 안 된다. 철저한 진상 조사와 책임자 처벌, 재발 방지 대책이 선행돼야 한다”고 말했다. 보도자료를 바탕으로 몇몇 언론이 기사를 냈다. 보도 이후 납품업체인 Y사가 보도자료 내용에 사실과 다른 부분이 있다고 주장했다. Y사는 경찰, 법무부 등에 차량을 개조해 납품하는 특장업체다. Y사 관계자는 “보도자료가 배포되기 전, 기사가 나가기 전에 신정훈 의원실이나 언론으로부터 단 한 차례의 연락도 받지 못했다. 보도가 나간 이후 오 보좌관을 만나 사실과 다른 부분을 상세히 설명했지만 아무것도 반영되지 않았다. 오히려 지난달에 관련 보도가 한 차례 더 나갔다”고 주장했다. Y사는 경찰청과 직접 계약을 맺거나 현대자동차로부터 하도급을 받는 형태로 이번 납품에 참여했다. <일요시사> 취재를 종합하면 경찰청은 현대자동차로부터 616대(소나타), Y사로부터 73대(스타리아 37대, 넥쏘 36대), N사로부터 270대(아이오닉 181대, 그랜저 89대) 등 총 959대를 납품받았다. Y사 관계자는 신정훈 의원실에서 지적한 납품 지연과 검사 불합격에 대해 “제작은 이미 완료됐고 출고를 기다리던 중에 검사 하나가 마무리되면 또 다른 검사를 요청하는 식으로 5개월 동안 시간을 끌었다”며 “2015년부터 경찰청에 순찰차를 납품해 왔지만 이번을 제외하고 단 한 번도 납기에 늦은 적이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우리와 N사의 계약 차량은 납품까지 5개월 넘게 걸렸고 H사의 계약 차량은 검사 하루 만에 출고 처리됐다”며 “그동안 경찰청 검사가 미진했다고 주장하려면 우리든 H사든 같은 잣대로 진행해야 하는 것 아닌가”라고 반문했다. 사실 확인 안 했다? H사는 순찰차에 설치하는 리프트 경광등을 제작하는 업체로 현대자동차와 하도급 계약을 맺고 납품한 것으로 알려졌다. Y사와 N사가 담합해 경찰청 계약을 10년 동안 수주해 왔다는 내용에 대해서는 “경찰청은 조달사업법에 따른 나라장터 종합쇼핑몰 우선 구매 제도를 통해 (업체들과) 계약했다. 나라장터에 물건을 올리면 경찰청에서 선택하는 방식”이라면서 “우리와 N사는 같은 차종으로 경쟁한 적이 단 한 차례도 없다”고 반박했다. 반면 오 보좌관은 순찰차 사업과 관련해 드러난 문제를 고치라고 여러 차례 얘기했는데 시정되지 않자 보도자료를 통해 지적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지난 1일 국회 행정안전위원회 비서실에서 <일요시사>와 만나 “공무원이 어떤 업무를 하다가 다소간 실수가 발생할 수 있고 관행적으로 잘못된 부분이 있을 수 있다. 그걸 인정하고 시정하면 끝까지는 안 간다”고 말했다. 이어 “순찰차 관련 문제를 (경찰청에) 수도 없이 얘기했는데 고쳐지지 않았다. 1차 차량 검사에서 불합격이 나왔는데 2차 검사를 할 때 보니 1차에서 나온 문제가 하나도 시정되지 않았다. 3차 검사는 나도 모르게 진행됐다. 시험성적서를 달라는 말에도 개인 정보를 이유로 주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이번에 납품한 순찰차에 설치된 경광등이 사양서에 맞지 않는다고도 지적했다. 오 보좌관은 “리프트 경광등의 핵심 기능은 주야간 150m 구간에서 잘 보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번에 납품된 것은 그게 안 된다. 30m만 떨어져도 잘 보이지 않는다. 순찰차에 치명적인 장애”라고 비판했다. Y사 관계자는 “사양서가 존재하는데 30m 밖에서 안 보인다는 건 말이 안 된다. 경찰청에서 3회가량 시연회를 진행했고 현장에서도 더 밝다는 의견이 있었다. 경광등이 사양서와 일부 맞지 않는 건 애초에 사양서 자체가 H사의 제품에 맞춰진 것이기 때문”이라면서 “오히려 H사의 경광등이 경찰청 순찰차 사양서에 적용돼 2015년부터 2024년, 우리와 문제가 생기기 전까지 10여년간 독점적으로 사용됐다”고 반박했다. “현장 직원들 사이에서 고장이 잦아 수리 비용이 많이 나온다는 말을 들은 적 있다”는 이 관계자는 “이번 일이 일어난 것도 H사가 자사의 경광등을 납품하기 위해 오 보좌관에게 문제 제기를 한 게 시발점이 된 것으로 알고 있다”고 설명했다. “시정 안 해” “문제 없다” 순찰차를 납품하는 업체들이 자사의 경광등이 아닌 다른 업체의 것을 사용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H사가 민감하게 반응하면서 이번 일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Y사 관계자는 “2022~2023년 H사 경광등에 문제가 발생해 현대자동차가 납기를 놓치는 일이 일어났다. 이 일을 계기로 지난해 5~6월 경광등 납품업체를 바꾸려는 시도가 있었던 걸로 안다”고 주장했다. Y사 역시 H사와 경광등 발주 문제로 갈등을 겪었다. Y사 관계자는 “지난해 6월부터 11월까지 H사에 경광등 발주 견적서를 달라고 요청했지만 답을 받지 못했다. 납기가 (지난해) 12월12일까지라 우리한테도 시간이 많지 않았다. 그래서 (지난해) 11월15일 경찰청과 경광등 업체를 바꾸는 문제로 협의를 진행했고, 11월26일에 바뀐 업체의 경광등으로 우리 공장에서 시연회를 열었다”고 말했다. <일요시사> 취재를 종합하면 H사는 순찰차 납품업체들과의 갈등을 ‘민원’을 통해 해결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H사 대표가 신정훈 의원실 오 보좌관을 만나 억울함을 토로했고 그 내용이 지난 5월 나온 보도자료의 배경이 됐다는 의혹이다. 실제로 오 보좌관은 처음에는 민원을 받아 보도자료를 작성한 게 아니라고 했다가 나중에는 H사 대표를 만났다고 인정했다. 지난해 8월경 지역의 향우회장과 함께 H사의 대표가 찾아왔다는 것이다. 공교롭게도 오 보좌관이 경찰청의 순찰차 사업을 들여다보기 시작한 시기와 일치한다. 오 보좌관은 지난 5월14일에 나온 보도자료에 대해 묻자 “지난해 8월부터 이 문제를 파고 있었다”며 “내부에서 나온 정보도 있고 경찰청에서도 (순찰차 사업에 대해) 문제 의식을 갖고 있었다. 이 문제로 경찰청 관계자를 30~40번 만났다”고 밝혔다. 눈여겨볼 대목은 H사 대표가 같은 시기 신 의원에게 정치후원금을 냈다는 점이다. <일요시사>가 나주시·화순군 선거관리위원회를 통해 입수한 신 의원의 ‘연간 300만원 초과 기부자 명단’을 확인한 결과 H사 대표는 지난해 8월22일 500만원을 기부했다. 신 의원은 2014년 7월30일 보궐선거에서 당선돼 국회의원이 됐고 20대(2020년), 21대(2024년) 총선에서 배지를 달았다. 2014~2016년, 2020~2024년 등 신 의원이 국회의원 활동을 하는 동안 H사 대표가 후원금을 낸 건 지난해 8월이 유일하다. 경광등 업체 변경 문제 때문? “사기업 갈등에 보좌관이 왜?” 오 보좌관은 H사 대표가 신 의원에게 후원금을 낸 사실을 알았냐는 질문에 “몰랐다”면서 “회계를 관리하는 직원은 나주에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H사 대표에 대해 “이전까지 전혀 몰랐던 사람”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전체 정치후원금 모금 한도) 3억원 중에 500만원을 후원했다고 해서 지난해 8월부터 지금까지 이 문제에 매달리겠느냐”며 “피해를 입었다고 주장한 업체의 문제 제기가 합당하다고 생각했고, 자료를 받아보니 문제가 있다고 판단해 진행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보좌관은 “경찰차 특장 시장 자체가 그렇게 크지 않아 뛰어드는 업체도 많지 않다. 이런 상황에서 맨날 같이 했던 업체를 빼버리면 가만히 있겠나. 나는 Y사가 욕심을 부리면서 이 상황까지 왔다고 생각한다. 기존에 해왔던 곳과 똑같이 하면 되지, 더 이익을 취하려 하느냐”고 되물었다. 업체 간 중재의 의도도 있었다는 것이다. H사 대표는 신 의원에게 후원금을 낸 사실은 인정하면서도 민원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고 주장했다. 신 의원을 지지하는 차원에서 후원금을 냈다는 것이다. H사 대표는 <일요시사>와의 통화에서 “일을 잘하신다는 말을 들어서 후원금을 냈다. 지금 이 문제와는 무관하다”며 “사업을 접을까 생각할 정도로 머리 아픈 문제”라고 말했다. 지난해 8월 오 보좌관을 만나 민원을 넣었는지는 “오래돼서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고 했다. Y사는 신정훈 의원실발 보도자료로 큰 피해를 입었다고 주장했다. Y사 관계자는 “정부 기관에 납품하는 제품을 만드는 건 맞지만, 엄연히 사기업 간 일어난 일에 국회 보좌진이 개입하는 게 맞는지 모르겠다”며 “기사가 나간 이후 우리 회사는 경제, 이미지 부분에서 큰 타격을 받았다”고 토로했다. 그러면서 “경찰청과 지체상금에 대한 논의가 진행되고 있다. 업체 문제로 인한 지연이 결정되면 지체상금을 물어야 하는 상황이다. 차량 출고가 늦어지면서 보관을 위한 토지 대여료가 1억2000만원 정도 나갔다. 무엇보다 자회사인 N사의 신용등급 하락, 기사로 인한 이미지 훼손 등 무형적인 피해도 만만찮다”고 하소연했다. 받아쓴 언론 “취하해 달라” 한편 Y사는 신정훈 의원실에서 나간 보도자료로 기사를 작성한 매체 3곳을 언론중재위원회에 제소했다. Y사는 “언론의 잘못된 보도로 인해 명예가 심각하게 훼손됐으며 국민에게 경찰 장비 도입 과정에 대한 불신을 초래했다”며 “신청인(Y사)의 업무 수행 능력과 투명성에 대한 의구심을 야기해 치안 활동에 대한 신뢰도 저하로 이어질 수 있는 회복할 수 없는 피해를 입어 정정보도를 구한다”고 조정을 신청했다. Y사 관계자는 “2곳의 매체에서 ‘기사를 내릴 테니 소를 취하해 달라’는 내용의 답변을 언론중재위원회에 보낸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jsjang@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