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재료 이력서> (35·36) 콩잎, 토란

가난한 이들의 식재료

오이, 쑥갓, 가지… 소박한 우리네 밥상의 주인공이자 <식재료 이력서>의 주역들이다. 심심한 맛에 투박한 외모를 가진 이들에게 무슨 이력이 있다는 것일까. 여러 방면의 책을 집필하고 칼럼을 기고해 온 황천우 작가의 남다른 호기심으로 탄생한 작품 <식재료 이력서>엔 ‘사람들이 식품을 그저 맛으로만 먹게 하지 말고 각 식품들의 이면을 들춰내 이야깃거리를 만들어 나름 의미를 주자’는 작가의 발상이 담겨 있다. 작가는 이 작품으로 인해 인간이 식품과의 인연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 콩잎 ⓒpixabay

콩잎

필자가 어렸던 시절엔 지금처럼 음식이 다양하지 못했다.

물론 그 양도 극히 제한돼있어 일부 어린이는 자주 굶주림에 처하곤 했다. 당시에는 서리가 빈번했다.

서리는 말 그대로 떼를 지어 남의 과일이나 곡식 혹은 가축 따위를 훔쳐 먹는 장난이다.

이 장난이 요즈음에는 절도로 둔갑됐지만 필자도 어린 시절엔 이 장난에 자주 참여했었다.


그 중에서도 콩서리에 참여했던 일은 아직도 기억에 또렷이 남아 있다. 

당시에는 콩밭이 따로 있지 않고 논두렁이나 밭두렁에 콩을 심고는 했다.

그래서 콩서리는 다른 서리보다 쉬웠고 그런 이유로 또래 친구 여러 명과 자주 콩서리를 하고는 했다. 

그렇다고 아무런 계획 없이 서리하지는 않았다.

우리는 본격적인 서리에 앞서 몸이 빠른 측과 굼뜬 측의 두 파트로 조를 편성했다.

몸이 빠른 아이들이 행동대원으로 두렁을 어슬렁거리다 주변에 인기척이 없으면 콩을 통째 뽑아 들고 근처에 있는 야산으로 내달린다.

이어 굼뜬 아이들로 편성된 다른 조는 불을 피우고 기다리고 있다가 콩을 받아 되는 대로 굽기 시작한다.


콩껍질이 시커메지면 콩이 익었다 판단하고 모두 둘러 앉아 허겁지겁 먹어 치운다.

그 고소한 맛에 이끌려 얼굴이 시커멓게 변하는 일도 잊어버린다.

그리고 모든 작업이 끝나면 포만감과 또 상대 어린이의 시커멓게 변한 얼굴을 살피며 파안대소한다.

그리고는 인근에 있는 시냇가로 달려가 대충 얼굴을 씻고는 시치미를 떼고 집으로 돌아가고는 했다.

지금도 그 시절을 회상하며 가끔 미소 짓고는 하는데, 앞서 깻잎을 이야기했을 때 밝혔듯이 아무리 기억을 짜내어 보아도 콩잎을 반찬으로 먹었던 경험은 없다.

콩만 식용하고 콩잎은 그저 가축 사료로 활용하고는 했다.

하여 여든을 넘어선 누나에게 내 기억에 대한 사실 확인에 나서자 누나 역시 콩잎을 식용했던 기억은 없다고 했다.

그러면서 한마디 첨언했다.

“경상도 지방에서는 콩잎을 반찬으로 식용했어”라고 말이다. 아울러 지역마다 식습관이 다른 점에 대한 설명 역시 이어졌다. 

누나의 말을 새겨 듣고 콩잎을 조사하는 중에 콩잎이 곤궁한 삶을 이어가던 사람들에게 오래전부터 식용됐음을 알게 됐다.

아울러 그들을 가리켜 곽식자(藿食者, 콩잎을 먹고 자란다는 뜻으로 가난한 백성을 가리키는 말)라 한다. 

이와 관련하여 정약용의 작품 중 한 구절을 인용해 본다. 


古來藿食少深憂(고래곽식소심우) 
예로부터 콩잎 먹는 자는 깊은 근심 적다네

상기 글은 정약용이 중국의 고사를 인용한 것인데, 중국 춘추전국시대 진나라에 가난한 백성이 군주인 헌공(晉獻公)에게 나라 다스리는 계책 듣기를 요청하자, 헌공이 “고기 먹는 자가 이미 다 염려하고 있는데, 콩잎 먹는 자가 정사에 참견할 것이 뭐 있느냐.”고 했다는 데서 온 말이다.

가혹하게 들리는 이 말은 가난한 백성은 정사에 관여하지 말고 그저 먹고 사는 데 신경 쓰라는 의미다. 

여하튼 이 대목에서 흥미로운 부분이 나타난다.

콩잎을 의미하는 藿(곽)이란 글자다.

다른 여타의 잎은 채소의 이름에 잎의 의미를 지니고 있는 엽(葉)을 사용하는데 콩잎은 콩잎을 의미하는 두엽(豆葉)외에도 풀을 의미하는 초(艸→艹)와 빠르다는 의미를 지닌 곽(霍)을 합성한 독립된 글자를 지니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결국 콩잎이 오래전부터 인간과 가까운 관계 즉 식용되었음을 입증하는 단서가 아닐 수 없다. 

또한 허균의 성소부부고를 살피면 ‘음식은 양약(良藥)이니 몸이 파리해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 먹어야 한다’며 콩잎을 오소(五蔬, 아욱·콩잎·염교·파·부추)에 포함시켰다.

이는 콩잎이 사람에게 상당히 유용한 채소라는 의미다.

농촌진흥청은 콩 종자에는 이소플라본과 사포닌만 존재하는데 반해 콩잎에는 '이소플라본'을 비롯 '플라보놀' '소야사포닌' 등 16종의 건강 기능성 생리활성 물질이 함유돼 있다고 밝혔다.

이소플라본은 주로 콩과 식물에만 함유돼있으며 유방암과 전립선암, 골다공증, 심장병 등 성인병 예방에 효과적이며 특히 이번에 콩잎에 함유된 것으로 확인된 '테로카판'은 혈액 산화작용을 억제해 성인병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동맥경화증 예방에 큰 도움을 주는 것으로 나타났다.

또 소야사포닌은 인삼 사포닌과 유사한 성분으로 항암과 항고지혈증에 효과적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 같은 사실을 진즉에 알았다면 콩서리할 당시 콩뿐만 아니라 콩잎까지 먹어치웠을 걸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예로부터 콩잎 먹는 자는 깊은 근심이 적다”
올빼미가 쭈그리고 앉아 있는 모습의 토란

토란

지금도 어린 시절 추석이 되면 항상 차례상에 오르던 토란국, 토란탕을 떠올리게 된다.

처음에는 먹음직스러워 젓가락을 놀려보았지만 입에 들어가면 그저 그렇고 해서 이후에는 토란국을 멀리하고는 했었다.

그런데 묘한 일이다.

세월 지나면 입맛도 바뀐다고 했듯이 나이가 들어가면서 토란 맛에 이끌리게 됐다.

마냥 텁텁하게만 느껴졌었던 그 맛이 고소한 맛으로 바뀌어 이제는 자주 토란국을 접하고는 한다.   

그 토란이 서거정의 눈에는 어떻게 비쳤는지 그의 작품을 감상해보자.

芋(우)
토란

病口曾無可(병구증무가) 
일찍이 병중에 입에 맞는 게 없는데
蹲鴟早策勳(준치조책훈) 
토란은 일찌감치 내게 은택 주었네 
龍涎香欲動(용연향욕동)
용연의 향기가 움직이는 듯
牛乳滑堪論(우유활감론)
우유의 매끄러움 논할만하네
啖擬山僧共(담의산승공)
먹을 때 산승과 함께 헤아리고
來從野客分(래종야객분)
찾아온 손님에게 나누어 주네
殷勤誰種汝(은근수종여)
누가 은근하게 너를 심겠는가
我亦望田園(아역망전원)
나 역시 전원 바라보리

蹲鴟(준치)는 토란의 별칭이다. 토란이 올빼미가 쭈그리고 앉아 있는 모습과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또 山僧(산승)은 중국 당(唐) 나라 때 고승인 나잔 선사로 그가 토란을 구워 먹은 고사에서 온 말이다. 
 

▲ 토란 ⓒpixabay

법명은 명찬 선사(明瓚禪師)인데 성격이 게을러서 남이 먹다 남긴 음식만 먹었으므로 나잔(懶殘)이라 호칭했는데, 이필(李泌)이 일찍이 형악사에서 글을 읽을 때 나잔 선사를 몹시 기이하게 여겨 한 번은 밤중에 방문했더니, 그때 마침 나잔 선사가 화롯불을 뒤적여서 토란을 굽고 있다가 이필에게 구운 토란 반 조각을 주면서 이르기를 “여러 말 할 것 없다. 10년 재상을 취할 것”이라고 했다고 한다.

여하튼 토란의 한자명을 芋라 이르는데 이 글을 집필하기 전까지는 토란의 한자명이 土卵으로 알고 있었다.

물론 토란 역시 맞는 말이지만 과거에는 土卵이란 이름 대신 주로 芋라 지칭했다. 

이를 이상하게 여기며 조사하는 중에 박지원의 연암집에서 芋에 대해 ‘俗所謂土卵’이란 기록을 발견하게 된다.

다시 말해 토란은 세속에서 이르는 이름이라는 의미다.

또 홍만선의 산림경제에는 或稱土芝。鄕名土蓮(혹칭토지. 향명토련)이라 기록되어 있다.

토지(흙에서 나는 영지)라 칭하기도 하고 시골 이름은 연을 닮았다는 뜻에서 토련(土蓮)이라고도 한다는 이야기다.

이 대목에서 다시 이응희 작품 芋(우, 토란)을 감상해보자.

種芋盈長圃(종우영장포) 
긴 채마밭에 토란 가득 심으니
秋來息且蕃(추래식차번) 
가을 오자 무성하게 자라났네
紫莖含露茁(자경함로줄) 
자줏빛 줄기 이슬 머금고 자라며
靑葉向風飜(청엽향풍번) 
푸른 입은 바람 향해 펄럭이네
抱玉傍多子(포옥방다자) 
옥 품은 듯 구근 많이 달렸고
懷蒼碩本根(회창석본근) 
푸른 빛 속에 줄기 굵다네
俗名稱毋立(속명칭무립) 
속명으로 무립이라 부르니
端合老翁飧(단합노옹손) 
늙은이 저녁밥으로 제격이네 

이응희에 의하면 토란이 저녁밥을 대신한다고 했다.

또 증류본초에서도 우(芋)를 삶아 먹으면 양식으로 대용할 수 있어 흉년을 넘길 수 있다고 기록돼있다.

이를 감안하면 토란 역시 과거에는 구황작물로 각광받았었음을 알 수 있다.

마지막으로 장유의 토란 저장 법(藏芋, 장우)을 감상해보자.

蹲鴟宜沃野(준치의옥야)
토란은 비옥한 들에 적격이고
荒歲可代穀(황세가대곡)
흉년 시 곡식 대용 가능하네
我圃最重此(아포최중차)
내 채마밭에 토란 가장 중하니
頗費抱甕力(파비포옹력)
물 길어 대는 일 매우 힘들었네
秋魁動徑尺(추괴동경척)
가을 되면 큰 놈은 지름이 한 치나 되고
一區收一斛(일구수일곡)
한 구역에서 열 말 거둔다네
深窖藏不爛(심교장불난)
깊은 움에 저장하면 문드러지지 않고
地爐煨易熟(지로외이숙)
땅 화로의 재는 쉽게 익게하네
留作歲暮計(유작세모계)
한 해 동안 지속해서 먹으리니
道人生事足(도인생사족)
도인의 살림 살이로 족하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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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곡점’ 의정 갈등 엔드게임

‘변곡점’ 의정 갈등 엔드게임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구성원의 압도적인 지지로 당선된 수장이 반년 만에 끌려 내려왔다. 막말에 가까운 강한 발언과 제멋대로인 행보가 탄핵을 불렀다. 강성 수장이 물러나면서 변화를 기대하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대화의 문이 열릴 것인가, 더 높은 벽이 쌓일 것인가. 임현택 대한의사협회(이하 의협) 전 회장이 3년 임기를 다 채우지 못하고 탄핵당했다. 지난 5월 취임 이후 6개월 만으로 의협 역사상 2번째, 최단기간 내 불명예 퇴진한 회장이 됐다. 첫 번째는 2014년 4월 임기 1년여를 앞두고 탄핵당한 노환규 전 회장이다. 두 번째 최단기간 의협은 지난 10일 오후 서울 용산구 의협회관서 임시대의원총회를 열고 임 전 회장의 불신임안을 처리했다. 참석 의원 224명 가운데 170명(75.9%)이 찬성했다. 반대는 50명, 기권 4명이다. 전체 대의원 249명 가운데 224명(91.1%)이 표결에 참여했다. 의협 정관에 따르면, 회장 불신임안은 제적 대의원 3분의 2 이상이 출석하고, 출석 대의원 3분의 2 이상이 찬성하면 가결된다. 지난 3월 임 전 회장은 선거서 유효 투표수 3만3084표 중 2만1646표를 받아 당선됐다. 65.43%의 압도적인 지지다. 의협 회장 선거는 정부의 의대 정원 증원 발표로 의정 갈등 수위가 높아지고 있을 무렵에 치러졌다. 전공의가 병원을 떠났고 정부가 ‘2000명’을 강조하던 시기였다. 의협 회원들은 강성 중의 강성으로 분류되는 임 전 회장에게 힘을 실었다. 임 전 회장의 어깨에 너무 힘이 들어갔던 것일까? 임 전 회장의 언행은 사사건건 도마 위에 올랐다. SNS에 올린 글, 공식 석상서 했던 발언 등이 막말 논란으로 번졌고, 단식투쟁 등의 행보는 ‘쇼’라는 비판을 받았다. 무엇보다 박단 대한전공의협의회(이하 대전협) 비대위원장과 갈등을 빚으면서 의료계 내부 분열을 조장한다는 지적이 뼈아팠다. 임 전 회장이 8개월 동안 보여준 모습은 고스란히 탄핵 사유가 됐다. 의협 회원 사이에서는 임 전 회장이 SNS로 막말과 실언을 해 의사단체의 명예를 훼손했다는 비판이 일었다. 또 ‘임 회장이 전공의 지원금을 빼돌렸다’는 허위 비방 글을 올린 시도의사회 임원에게 고소 취하 대가로 1억원을 요구한 사실이 녹취록을 통해 알려져 논란이 불거졌다. 특정 인물에 대한 수위 높은 비판은 여론의 역풍을 불렀다. 장상윤 대통령실 사회수석을 겨냥해 “정신분열증 환자 같은 개소리”라고 비난하는 글을 올렸다가 환자를 비하했다는 지적을 받았다. 임현택, 6개월 만에 탄핵당해 막말 논란·의대 증원 못 막아 또 2021년 한 의사가 80대 환자에게 ‘맥페란’ 주사제를 투여한 뒤 부작용이 나타나 기소된 재판에 대해서도 도 넘는 발언을 쏟아냈다. 이른바 ‘맥페란 재판’ 항소심서 판사가 1심의 금고 10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은 해당 의사의 항소를 기각하자 “이 여자 제정신입니까?”라는 글을 SNS에 올린 것이다. 임 전 회장의 발언에 법원은 이례적으로 “재판장의 인격에 대한 심각한 모욕일 뿐 아니라 국민의 신뢰를 크게 훼손할 수 있는 매우 부적절한 행동”이라고 공개적으로 유감을 표명했다. 의대 정원 증원 집행정지와 관련해 기각·각하 결정을 내린 재판장이 ‘회유’받았을 것이라는 주장으로도 입길에 올랐다. 서울고등법원 재판부가 결정을 내린 다음 날 한 라디오 프로그램에 출연해 재판장의 실명을 거론하면서 “지난 정권에서는 고법 판사들이 차후 승진으로 법원장으로 갈 수 있는 그런 길이 있었는데 제도가 바뀐 다음에는 그런 통로가 막혀서 이분이 아마 어느 정도 대법관에 대한 회유가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있다” 말했다. 서울고법은 법원 명의로 입장문을 내고 “해당 단체장의 아무런 객관적 근거가 없는 추측성 발언은 재판장의 명예와 인격에 대한 심대한 모욕”이라면서 “사법부 독립에 관한 국민의 신뢰를 현저히 침해할 수 있는 매우 부적절한 언사다. 깊은 유감을 표명한다”고 밝혔다. 여기에 결정적으로 정부의 2025학년도 의대 증원을 막지 못한 점, 간호법 제정을 저지하지 못한 점이 탄핵 사유로 꼽혔다. 임 전 회장은 총회를 앞두고 의사 회원들에게 사과하고 페이스북 계정을 삭제하는 등 재신임을 호소했지만 반전은 없었다. 회장을 탄핵한 의협은 비대위원회 체제로 전환하고 지난 13일 새로운 회장 선거 전까지 단체를 이끌 비대위원장을 뽑았다. 그 결과 박형욱 대한의학회 부회장이 1차 투표서 총 유효 투표수 233표 중 123표(52.8%)를 얻어 과반으로 당선이 확정됐다. 임기는 내년 1월 차기 회장이 선출될 때까지다. 뒤늦게 호소했지만… 박형욱 비대위원장은 “정부는 의료 파탄이란 시한폭탄을 장착해놨다”며 “정말 대화를 원한다면 정부는 먼저 시한폭탄을 멈춰야 한다. 그래야 진정한 대화가 가능하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비대위원들의 합의에 기초해 입장과 행동을 결정할 것”이라며 “비대위 운영서 소외돼왔던 전공의들과 의대생들의 견해가 충분히 반영될 수 있게 하겠다”고 소감을 밝혔다. 임 전 회장이 물러나고 새로운 비대위원장이 등장하면서 의협의 투쟁 방향에 변화가 생길 가능성이 커졌다. 일각에서는 의협의 이번 행보를 의정 갈등의 중요한 변곡점으로 보고 있다. 강성 회장을 필두로 정부와 강하게 대립했던 이전 모습서 벗어나 대화에 참여할 것이라는 의견과 이전보다 더 수위 높은 대정부 투쟁이 예상된다는 의견으로 갈리는 중이다. 후자의 배경에는 대전협이 있다. 앞서 박단 비대위원장 등 전공의 70여명은 전날 의협 대의원들에게 “비대위원장으로 박형욱 교수를 추천한다”는 메시지를 보내 공개 지지 의사를 드러냈다. 대의원회서도 박단 비대위원장의 공개 지지에 대해 경고하는 등 잡음이 일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대전협의 지지를 등에 업은 박형욱 비대위원장이 당선되면서 전공의의 영향력이 상대적으로 커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됐다. 의협과 대전협의 공조가 본격화될 것이라는 관측이 나오는 이유다. 문제는 양측의 교류가 정부와의 대화로까지 이어질 수 있느냐는 점이다. 박형욱 비대위원장은 당선 소감부터 정부의 태도 변화를 요구하고 나섰다. 또 윤석열 대통령의 변화도 필요하다고 언급했다. 의정 갈등서 줄곧 선봉에 선 전공의들은 ‘의대 정원 증원 백지화’라는 요구사항서 앞으로도 뒤로도 움직인 적이 없다. 전공의의 행보는 의대생, 의대 교수 등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영향력 커진 전공의 단체 의료계가 전공의 중심으로 굴러가고 있는 셈이다. 실제 대전협은 지난 11일 출범했던 여야의정협의체(이하 협의체)에 대해서도 부정적인 태도를 보인다. 협의체는 야당인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이 불참하고 의료계에서는 학술 단체인 대한의학회와 의대 학장 모임인 한국의과대학·의학전문대학원협회(KAMC)만 참석하는 등 ‘반쪽 출범’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협의체의 운영 기한은 올해 말까지로, 다음 달 22~23일 전에 의미 있는 결과를 낼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는 태도다. 하지만 박단 비대위원장은 협의체에 대해 ‘무의미하다’고 평가했다. 그는 협의체가 첫발을 뗀 11일 SNS에 “국민의힘 한동훈 대표는 전공의와 의대생, 당사자 없이 대화나 하겠다는 한가한 소리를 하고 있다”며 “한 대표는 2025년 의대 모집 정지와 업무개시명령 폐지에 대한 입장부터 명확히 밝히시길 바란다”고 일갈했다. 이어 “눈치만 보며 뭐라도 하는 척만 하겠다면 한동훈의 ‘여야의정 협의체’ 역시 임현택 전 의협 회장의 ‘올바른 의료를 위한 특별위원회(올특위)’와 결국 같은 결말일 것”이라고 우려했다. 올특위는 의료계의 입장을 하나로 모으기 위해 의협 주도로 구성한 범의료계 특별위원회다. 전공의와 의대생이 해당 위원회에 불참하면서 파행 운영되다 지난 7월 해체됐다. 정부는 협의체서 의료계가 제안한 내용에 대해 “진정성 있게 검토하겠다”는 견해를 밝혔다. 지난 11일 협의체서 의료계는 한국의학교육평가원 자율성 보장, 추가 합격 제한 등을 통한 2025학년도 의대 선발 인원 축소 등을 제안한 것으로 알려졌다. 정윤순 보건복지부 보건의료정책실장은 지난 14일 의사 집단행동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이하 중대본) 회의를 주재하면서 “마주 앉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린 만큼 활발한 대화와 소통을 통해 누적된 갈등을 해소하고 신뢰를 회복해 국민이 원하는 결과를 끌어낼 수 있길 기대한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의협과 전공의 등 다른 의료계 단체의 참여를 호소했다. 박단 공개 지지 새 비대위원장 강경 투쟁이냐 VS 노선 변화냐 의료계 내부 상황은 크게 바뀌었지만 향후 상황은 여전히 ‘시계 제로(0)’ 상태다. 임 전 회장과 박단 비대위원장 간 갈등의 불씨도 여전히 살아있다. 대전협은 임 전 회장의 탄핵을 공개적으로 요청하는 등 ‘(임 전 회장과)같이 갈 수 없다’는 뜻을 분명히 밝힌 바 있다. 실제 대전협은 임 전 회장의 탄핵을 요청하면서 “이해와 소통이 가능한 새로운 회장을 필두로 의협과 대전협 두 단체가 향후 상호 연대를 구축할 수 있길 기대한다”는 입장문까지 냈다. 임 전 회장의 탄핵안 가결 직후 박 비대위원장이 “결국 모든 길은 바른 길로”라는 내용의 SNS 글을 올리기도 했다. 문제는 임 전 회장이 박단 비대위원장을 상대로 반격을 진행하고 있다는 점이다. 임 전 회장은 탄핵 사흘 만에 닫았던 페이스북 계정을 다시 열고 “박단과 그 뒤에서 박단을 배후 조종해 왔던 자들이 무슨 일을 해왔는지 전 의사 회원들에게 아주 상세히 밝히겠다”며 박단 비대위원장을 저격하는 글을 올렸다. 그러면서 “의협 대의원회 비대위원장과 의협 회장 선거가 더 이상 왜 필요한가”라면서 “박단이 의협 회장 겸 비대위원장을 맡아 모든 권한과 책임하에 의료 농단을 해결하면 된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지지해주셨던 모든 분에게 우선 사과의 말씀을 드린다”며 “이유가 어떻든 회장 취임 전부터 탄핵하겠다고 마음먹고 있던 자들에게 빌미를 주어 넘어간 것 자체가 제 잘못”이라고 주장했다. 또 의협의 근본적인 개혁의 첫걸음으로 의협 대의원회 폐지 등을 내용으로 하는 민법상의 사원총회를 개최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사원총회는 민법에 규정된 사단법인의 최고의사결정 기관이다. 의협 최고의결기구로 알려진 대의원총회보다 상위에 있고 정관의 규정으로 폐지할 수 없다. 사원총회는 이사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경우나 총 사원 5분의 1 이상이 회의의 목적 사항을 제시해 청구하는 경우 소집될 수 있다. 반격 시작 내부 갈등? 올해 2월 시작된 정부와 의료계의 갈등이 10개월째로 접어들었다. 온갖 말이 오갔지만 되짚어보면 조금도 좁혀지지 않은 평행선 상황이 계속되는 모양새다. 정부와 의료계의 대치 상황이 길어질수록 ‘의료 붕괴’는 가시화되고 있다. 한 의료계 관계자는 이렇게 말했다. “이제는 정말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jsjang@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