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이, 쑥갓, 가지… 소박한 우리네 밥상의 주인공이자 <식재료 이력서>의 주역들이다. 심심한 맛에 투박한 외모를 가진 이들에게 무슨 이력이 있다는 것일까. 여러 방면의 책을 집필하고 칼럼을 기고해 온 황천우 작가의 남다른 호기심으로 탄생한 작품. ‘사람들이 식품을 그저 맛으로만 먹게 하지 말고 각 식품들의 이면을 들춰내 이야깃거리를 만들어 나름 의미를 주자’는 작가의 발상. 작가는 이 작품으로 인해 인간이 식품과의 인연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음식점서 고기 먹을 때 유독 마늘에 자주 손이 가는 내게 지인들이 그 이유를 묻는다. 그러면 잠시 능청 떨다 한마디 한다.
“마늘 많이 먹고 사람 좀 되려고 그런다”고.
그러면 상대는 말이 된다 싶은지, 나의 자유분방했던 과거를 회상하는지 그저 웃어넘긴다.
내 젊은 시절 삶에 대해 시시콜콜 언급하는 대신 삼국유사에 실린 단군신화 내용 인용해보자.
[마늘]
곰 한 마리와 호랑이 한 마리가 환웅에게 사람이 되게 해 달라고 빌자 환웅은 신령한 쑥(靈艾, 영애)과 마늘(蒜, 산) 20개를 주면서 “너희가 이것을 먹고 햇빛을 100일간 보지 않으면 사람의 형상을 얻을 수 있다”라고 했다.
이에 따라 곰은 금기를 지킨 지 21일 만에 여인이 됐으나 호랑이는 금기를 지키지 못하고 사람의 몸을 얻는 데 실패했다.
여인으로 변한 웅녀는 매일 태백산 신단수 아래서 잉태하기를 빌지만, 결혼할 사람이 없어 환웅이 사람으로 변화해 웅녀와 혼인하고 아들을 낳으니 이 사람이 단군왕검이다.
그런데 일부 사람들이 이 신화에 등장하는 蒜(산)이 마늘이 아닌 다른 물체라 주장한다.
물론 원산지 문제 때문에 그렇다.
마늘의 원산지는 중앙아시아 정도로 추정되는데 그 시기에, 기원전 2333년에 이 땅에 마늘이 전래되지 않았을 것이라는 게 그 요체다.
참으로 아쉬운 대목이 아닐 수 없다. 蒜이 진정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제쳐두고 단군왕검이 탄생했다는 태백산에 대해 언급해보자.
다수의 사람들이 태백산을 강원도에 있는 태백산 혹은 백두산으로 강변하고 있다.
참으로 황당하지 않을 수 없다.
기원 전 2333년이라면 이 땅 즉 한반도에는 소수의 토착민들이 씨족 혹은 부족의 형태로 삶을 이어가고 있었다.
그렇다면 삼국유사에 등장하는 태백산이 어느 곳을 지칭할까.
역사는 순리에 입각해야 한다는 진리에 따라 접근해보자.
그를 입증하기 위해 먼저 백제란 국가의 탄생 과정을 살펴본다.
백제의 시조 온조왕은 고구려 동명왕의 둘째 아들로 형인 비류에게 밀려 남하해 한강 유역에 백제를 세운다.
이제 고구려 시조인 동명왕에 대해 살펴본다.
동명왕은 고구려보다 한참 위쪽에 위치해 있던 부여의 왕인 금와의 아들이다.
그는 금와의 장남인 대소(帶素)와 다른 형제들이 자신을 죽이려 하자 남하해 고구려를 세운다.
백제와 고구려의 건국을 살피면 한반도에 국가가 형성되는 과정을 살필 수 있다.
권력을 잡는 과정에서 밀려난 사람 혹은 국가를 세우고자 하는 의지가 강했던 사람이 북이 아닌 남으로 이동하여 국가를 세웠다고 말이다.
다시 언급하자면, 이 민족의 주 세력의 시원은 황하 유역의 중원이었는데 상기 경우처럼 혹은 이민족의 침입으로 인해 지속적으로 한반도까지 이동하게 되고, 그 과정에 소수의 토착민들을 정복하고 국가를 세운 것이다.
이제 기원전 2333년으로 거슬러 올라가보자.
그 무렵 이 민족 최초의 국가였던 고조선의 위치는 어디였을까.
역사의 순리에 입각하면 분명 한반도는 아니었다.
그렇다고 현재로서 어느 위치라고 확언할 수 없지만 이동하는 과정을 살피면 한반도보다는 오히려 중원에 더 가까울 수 있다.
그렇다면 태백산이 이 땅에 있었다는 주장은 그저 허구에 불과할 뿐이다.
결론적으로 이야기해서 원산지 문제로 인해 삼국유사에 등장하는 蒜(산)이 마늘이 아니라는 주장은 무모하기 짝이 없다.
여하튼 곰도 사람으로 만들 수 있는 영험을 지닌 마늘에 대해 접근해보자.
마늘이 살균·항암효과, 항균작용, 빈혈 완화, 저혈압 개선 등에 이롭다고 하지만 뭐니 뭐니해도 남자들의 정력 강화에 탁월한 효과를 보인다.
중국의 약학서인 <본초강목>에도 마늘이 강정 효과가 있다고 기록돼있다.
또 고대 이집트인들은 피라미드를 건설하는 노예들의 체력을 보강하기 위해 마늘을 먹였고, 세계적으로 명성이 자자한 이탈리아의 호색한 카사노바도 마늘을 정력식품으로 애용했을 정도다.
이와 관련해 우리에게도 흥미로운 기록이 있어 소개한다.
조선이 개국하고 고려의 국교인 불교를 부정하는 과정에 등장하는 대목이다.
김종서 등이 편찬한 <고려사절요> 고려 제 11대 왕인 문종 재위 시인 1056년에 승려들의 폐해를 다룬 기록이 보인다.
범패(梵唄, 석가여래의 공덕을 찬미하는 노래)를 부르는 마당은 갈라서 마늘 밭이 되었으며 중들이 그들에게 금기 식품인, 정력 강화에 탁월한 마늘을 먹고 음탕한 짓을 한다는 이야기다.
이제 이응희 작품 감상해보자.
蒜(산)
마늘
薑桂非無貴(강계비무귀)
생강과 계피도 귀하지 않은 건 아니지만無踰此味長(무유차미장)
이 맛보다 더 뛰어난 건 없다네衆玉扶金柱(중옥부금주)
여러 옥 금 기둥 떠받치고群珠拆素房(군주탁소방)
많은 구슬 소박한 방에서 터졌다네硏肌瓜炙美(연기과자미)
갈아 넣으면 오이 부침 맛나고添汁水漫香(첨즙수만향)
즙 더하면 물에 향기 퍼진다네葷氣雖云濁(훈기수운탁)
훈채 기운 비록 탁하다지만 參書却暑方(참서각서방)
더위 물리칠 처방에 들어 있네
이응희에 의하면 마늘을 섭취함으로써 무더위를 물리칠 수 있다고 한다. 각별히 새겨둬야 할 일이다.
정력 강화에 탁월…더위 물리칠 처방
아삭아삭한 식감, 쌉싸름한 맛이 별미
[마늘종]
마늘종은 마늘 싹이라고도 하며 꽃대가 완전히 자란 마늘 꽃의 줄기를 지칭한다.
그런데 왜 마늘 꽃 줄기를 하필이면 마늘종이라 부르는지 의아함이 발생한다.
해서 그 사연을 먼저 풀어본다.
마늘종은 한자로 蒜薹(산대)라 한다. 蒜(산)은 마늘을, 薹(대)는 여러 의미를 지니고 있지만 식물과 관련해서 종대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종대는 파, 마늘, 달래 따위에서 꽃을 달기 위해 한가운데서 올라오는 줄기를 지칭한다.
즉 마늘로부터 올라오는 줄기는 ‘마늘 종대’라 지칭해야 옳다.
그런데 그 마늘 종대서 대를 생략해 마늘종으로 줄여버렸다.
추측하건데 간략한 것을 좋아하는 우리 민족의 습성으로부터 그렇게 된 게 아닌가하는 생각 지울 수 없다.
이와 관련해 필자는 또 다른 생각을 하고는 한다.
종이 종대가 아닌 하인의 의미를 지니고 있는 그 종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
마늘종은 마늘에 예속되어 마늘의 종과 같은 존재이기에 누군가가 해학적으로 마늘종으로 명명한 것이 지금에 이르고 있지 않나 하는 것이다.
여하튼 마늘종이란 음식을 처음 접한 시점은 초등학교 고학년 시절이었다.
당시 거의 모든 어린이들의 점심 반찬은 김치 혹은 콩자반이 전부였다.
내 살던 동네서 짓는 농사는 그게 전부였던 게다.
그러던 차에 전학 온 한 친구가 생전 보지도 못했던 반찬을 지니고 왔다.
바로 마늘종이었다.
마늘종을 기름에 볶아왔는데 아삭아삭한 식감은 물론이고 쌉싸름한 맛이 참으로 별미였다.
그를 맛본 이후 그 친구에게 매일 마늘종을 싸오도록 간청하고는 했다.
그 친구 고맙게도 어떤 때는 볶아오고 또 어떤 때는 무쳐오기도 해 우리들의 입맛을 즐겁게 해주고는 했다.
그렇다면 마늘 종은 언제부터 식용되었을까.
홍만선의 <산림경제>에 실려 있는 글이다.
5월에 살지고 연한 것을 가려, 끓는 소금물에 데쳐서 볕에 말렸다가 쓸 때쯤 해서 끓는 물에 넣어 부드럽게 되거든 양념해 먹는다.
살진 고기를 넣어서 요리하면 더욱 좋다.
홍만선은 원나라 시절 저술된 것으로 여겨지는 <거가필용>서 이를 인용했는데, 이를 살피면 오래전부터 마늘종을 식용하지 않았나 추측해본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