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이, 쑥갓, 가지… 소박한 우리네 밥상의 주인공이자 <식재료 이력서>의 주역들이다. 심심한 맛에 투박한 외모를 가진 이들에게 무슨 이력이 있다는 것일까. 여러 방면의 책을 집필하고 칼럼을 기고해 온 황천우 작가의 남다른 호기심으로 탄생한 작품. ‘사람들이 식품을 그저 맛으로만 먹게 하지 말고 각 식품들의 이면을 들춰내 이야깃거리를 만들어 나름 의미를 주자’는 작가의 발상. 작가는 이 작품으로 인해 인간이 식품과의 인연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식용하는 고구마줄기는 고구마 원줄기의 생장점에 잎이 붙어 있는 줄기를 지칭하는 바 고구마 줄기에 앞서 고구마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자. 먼저 고구마가 이 땅에 전래된 과정에 대해서다.
전래 과정
이를 위해 이유원(李裕元, 1814∼1888)의 <임하필기>에 실려 있는 글을 인용한다.
고구마는 채과 중에서 가장 뒤에 나온 것이다.
이는 기근을 구제할 수 있고 생명을 연장할 수 있으며, 또 황충을 막고 가뭄을 줄일 수 있다.
처음에 민(복건성)·광(광서성) 지역으로부터 시작해 거의 천하에 퍼졌다.
그러나 유독 우리나라는 근래에 와서 일본에서 종자를 구입해 연해의 몇몇 고을에서 서로 전해 심게 되었을 뿐이고, 산간의 백성들은 고구마가 무슨 물건인지 알지 못했다.
순조 갑오년(1834, 순조34)에 서유구가 호남에 관찰사로 나가 급히 고구마 종자를 찾게 해 모든 고을에 반포하고, 또 명나라 서현호(徐玄扈)의 <감저소(甘藷疏)>와 우리나라의 강필리(姜必履)와 김장순(金長淳)이 지은 <감저보(甘藷譜)>, <감저신보(甘藷新譜)>를 취해 종류별로 편집하고 간행한 다음 널리 배포해, 심고 가꾸는 방법을 알게 했다.
내가 서공에게서 찐 고구마를 얻어먹어 보니 떡 같은 것이 매우 맛이 좋았으므로 그 방법을 취했다.
고구마와 관련해 우리는 학창 시절 국사 교과서를 통해 1763년(영조39) 통신사로 일본에 갔던 조엄(1719∼1777)이 고구마 종자를 가져와 우리나라에 전파시켰다고 배운 바 있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
조선후기 실학자인 이덕무(1741∼1793)의 이야기 들어보자.
그의 작품인 <청장관전서>에 실려 있다.
고구마는 담배에 비해 이득이 매우 많은데 그 종자를 전해온 지 이미 300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전국에 고루 심어지지 않았으니 어찌 개탄할 일이 아니겠는가.
朱藷比烟。利益甚多。而僅傅其種。已近三紀。未見遍植一國。寧不慨然。
다음은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이 강진 유배생활 중에 지은 작품 중 일부를 인용한다.
土産貴藷芋(토산귀저우)
토산은 귀한 고구마인데求者此湊會(구자차주회)
그를 구하러 사람들 모여드네
정약용에 의하면 고구마가 강진에 귀한 토산이라 했다.
土産은 말 그대로 그 지방의 산물로 오랜 기간 경작돼왔음을 의미한다.
이유원과, 이덕무 그리고 정약용의 이야기를 접목시켜보면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할 수 있다.
고구마는 조선 초기 중국의 민(복건성)·광(광서성) 지역에서 전래돼 강진 등 소수 지역에서만 경작되었는데, 조엄이 일본으로부터 고구마 종자를 들여온 이후 전국으로 확산되기 시작했다.
이제 고구마줄기에 대해 언급하자.
과거 기록을 살피면 고구마줄기를 식용한 대목은 좀처럼 찾기 어렵다.
그저 가축 사료 정도로 이용되었는데 현대에 들어 그 가치가 밝혀지면서 각광 받고 있는 듯 보인다.
아울러 고구마줄기 김치는 1960년대에 공식으로 등장한다는 사실 귀띔한다.
이 대목에서 고구마꽃에 대해 언급하고 넘어가자.
많은 사람들이 고구마는 무화과처럼 꽃을 피우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아열대 식물인 고구마가 이 나라 기후가 맞지 않은 관계로 꽃을 피우지 않았을 뿐으로, 올 여름 이상 고온으로 인해 기어코 고구마꽃이 아름다운 자태를 드러냈다.
100년에 한 번 정도 모습을 드러내고 또 그래서 행운을 상징하는 고구마꽃 감상하기를 권한다.
먼저 고들빼기란 명칭의 어원에 대해 살펴보자.
고들빼기와 유사한 씀바귀 때문에 그렇다.
그를 위해 이익(1681∼1763)의 <성호사설>에 실린 글 인용한다.
기근 구제하고 생명을 연장하는 고구마
사마귀 없애는 고들빼기…씀바귀 아니다
4월, 씀바귀의 이삭이 팬다(苦菜秀)
고채(苦菜)는 씀바귀다. 이아(爾雅)에 ‘잎은 고거와 비슷하지만 가늘다. 자르면 흰 즙이 나온다.
노란 꽃은 국화와 비슷하다. 먹을 수 있지만 쓰다.
만추에 나서 겨울과 봄을 겪고 나서야 다 자란다’고 했다. 이삭이 팬다는 것은 이삭을 이루고 죽는다는 것이다.
여람(呂覽)에 ‘하지에 씀바귀가 죽는다’고 했다.
상기 글에 등장하는 秀(수)는 ‘이삭이 나와 꽃이 피다’라는 의미를 지니고, 이아는 중국 당나라 때 유교 경전이며 여람은 <여씨춘추>로 중국 진(秦)나라의 여불위가 학자들에게 편찬하게 한 사론서이다.
이제 고채에 주목해보자. 이익은 ‘고채도야’라고 해서 ‘고채’를 씀바귀라 못 박았다.
그런데 뒤 이어 인용한 글 내용을 살피면 씀바귀가 아니라 고들빼기를 설명하고 있다.
왜냐? 씀바귀는 여러해살이 풀인 반면 고들빼기는 해넘이 한해살이 풀이기 때문이다.
또 상기 글에 고거가 등장하는데 글 내용을 살피면 이 고거가 고들빼기를 의미하는 듯하다.
실제로 씀바귀 잎은 고들빼기 잎보다 가늘기 때문이고, 그를 반영하듯 다수의 사람들이 고들빼기로 정의내리고 있다.
여하튼 이익의 상기 글은 뒤죽박죽이다.
씀바귀와 고들빼기 어느 하나를 정확하게 지칭하지 못하고 있다.
이를 살피면 오래전에는 씀바귀와 고들빼기를 포함해 쓴 나물을 모두 고채라 지칭했던 건 아닐까 하는 의심하게 한다.
이를 감안하고 <한국민족문화대백과>에 실려 있는 고들빼기 관련 글 인용해본다.
<동의보감> <제물보> <물명고> <명물기략>에서는 ‘고채(苦菜)’라 했다.
<명물기략>에는 ‘고채는 고도라고도 하는데, 이것이 고독바기가 됐다.
고들빼기의 대궁을 자르면 흰 즙이 나오는데, 이것을 사마귀에 떨어뜨리면 저절로 떨어진다.
이 흰 즙이 젖과 비슷해 젖나물이라고 한다’고 명칭의 유래를 밝히고 있다.
이 글 역시 헷갈리기는 마찬가지다. 고도는 쓴 씀바귀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아울러 고도가 고독바기가 되었다고 하는데 이 대목도 문제가 있다.
<명물기략>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시기보다 100여년 전인 정조 시절에 정리소(整理所)에서 올린 나물 품목 중에 古乭朴(고돌박)이 등장한다.
명칭 어원
참고로, 정리소는 정조 시절 임금의 친림행사를 위해 수원에 세운 관아로 古乭朴(고돌박)은 고들빼기의 세속의 이름으로 볼 수 있다.
또 허준의 <동의보감>에는 고채(苦菜)의 훈(訓)은 씀바귀(徐音朴塊, 서음박귀)라 기록돼있다.
이런 기록들을 살피면 오래전에는 고들빼기와 씀바귀의 유사한 모습과 쓴 성질 때문에 모두 고채로 불렸고 세속의 이름은 고돌박과 씀바귀로 분리돼있었다고 정의 내릴 수 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