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인물> ‘토크 대부’ 쟈니윤의 인생 이야기

  • 구동환 기자 9dong@ilyosisa.co.kr
  • 등록 2020.03.16 11:00:31
  • 호수 1262호
  • 댓글 0개

“이제 잠자리에 들 시간입니다”

[일요시사 취재1팀] 구동환 기자 = 토크쇼 선구자였던 자니윤이 세상을 떠났다. 국민을 울게 한 그는 한국 코미디계의 한 획을 그은 인물이다. <일요시사>는 무명 배우서 토크쇼 MC, 한국관광공사 사장 내정설의 주인공까지, 다사다난했던 그의 인생사를 살펴봤다.
 

▲ 쟈니 윤 ⓒKBS

지난 8일 새벽, 미국 로스앤젤레스의 한 요양병원서 자니윤이 세상을 떠났다. 향년 84세. 뇌출혈을 앓고 있었던 그는 숨지기 나흘 전 갑작스러운 호흡곤란으로 입원했다가 일어나지 못하고 결국 눈을 감았다. 본인의 뜻에 따라 그의 시신은 미국의 한 대학병원에 기증됐고 장례는 가족장으로 치러진다.

4년여
투병 끝에…

자니윤과 LA서 함께 봉사활동을 했고, 그의 투병생활을 돕는 등 마지막까지 함께했던 지인 임태랑씨는 지난 10일 <스포티비뉴스>와 인터뷰서 “2016년 뇌출혈 이후 4개월 만에 미국으로 건너가 4년간 투병했다. 지난 4일 갑자기 혈압이 낮아져 입원했고 나흘 만인 지난 8일 새벽 세상을 떠났다”며 고인의 마지막을 떠올렸다.

임씨는 “시신은 생전 고인의 뜻에 따라 UC어바인에 기증됐다. 마지막까지 사회에 보탬이 되고 싶다는 뜻이 있어 이미 수년 전 대학에 기증 의사를 밝혔다. 조용히 장례를 치를 것”이라며 “마지막까지 좋은 뜻이었는데 친지나 가족, 팬들 입장에서는 바로 장례를 치르고 위로하거나 할 수가 없어 안타까운 마음이 더 크다”고 덧붙였다.

자니윤의 별세 소식이 전해지자 연예계 후배들의 추모가 이어졌다.


가수 배철수는 지난 10일, 인스타그램에 자니윤이 사망했다는 내용의 기사를 캡처해 올린 뒤 ‘Rest in Peace(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라고 남겼다. 가수 조영남은 KBS 2TV 토크쇼 <자니윤 쇼>서 보조 MC로 활약했다.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서 “자니윤은 일상서도 유머가 넘쳤다”며 “영어를 완벽하게 하고 한국말도 되니 해외 스타들이 한국에 오면 자니윤 쇼에 출연하는 걸 최고로 알았다”고 말했다.

개그맨 권영찬도 SNS에 “‘한국 스탠딩 코미디의 별이 지다’라며 ‘인생의 덧없음을 느끼며. 하지만 그 안에서 또 행복을 찾으며. 자니윤 선생님 부디 천국에서는 맘 편히 쉬길 바란다”고 올렸다.

이홍렬, 전유성, 임하룡 등 코미디언 후배들 역시 추모의 뜻을 표현했다. 이홍렬은 “스탠드업 코미디로 한국의 위상을 떨치신 분이기에 많이 존경했다”며 “좋은 곳에 가셔서 편안하시길 바란다. 너무 안타깝다”고 말했다.

전유성도 “새로운 장을 열어주신 분이고, 감사하다”며 “미국서 돌아가셨다고 들어서 많이 아쉽다. 미국에 있는 지인을 통해 빈소에 방문해 애도의 뜻을 전하고 싶다”며 고인을 추모했다.

별세 소식 전해지자 후배들 추모
평범한 해군 유학생, MC로 대변신

임하룡은 <자니윤쇼>에 출연했던 당시를 떠올렸다. 그는 “자니윤 쇼에도 한 번 출연했었고, 한 골프 프로그램서도 호흡을 맞춘 적이 있다”며 “개인적으로 자주 연락을 취한 적은 없지만, 함께 방송활동을 했던 기억들이 생각난다”고 언급했다.

자니윤은 ‘토크쇼’라는 장르를 국내에 새롭게 구축한 인물로 평가를 받아왔다. 미국서 파트타임 가수, 뮤지컬 배우 등을 전전하다 스탠드업 코미디로 전향해 그 끼를 갈고 닦은 것이 그 시작이었다.   


1936년 충북 음성서 출생한 자니윤은 서울 성동고를 졸업했다. 1962년 해군 유학생 신분으로 미국으로 건너가 오하이오 웨슬리언 대학교서 성악을 전공했다. 클래식으로 생업을 이어나가기 어렵다고 판단한 그는 1964년 뉴욕으로 옮겨 리 스트라스버그 액터스 스쿨서 연기를, 모던 재즈 무용학교서 춤과 모던 재즈를 공부하며 무명 MC 겸 코미디언 생활을 시작했다.

자니윤은 자신만의 독특한 스탠드업 코미디 스타일을 개발했다. 자극적인 소재나 욕설, 폭력 등의 거친 방법을 전혀 쓰지 않으면서 여유로운 표정으로 동양인으로서 자신에 대한 비하, 성적 풍자, 정치 풍자 등을 하는 식으로 블랙코미디를 선보였다.
 

뉴욕의 한 카페서 코미디를 하던 자니윤이 1977년 NBC <투나잇 쇼>의 방송 진행자 자니 카슨에게 출연 기회를 얻은 일화도 유명하다. 당시 영화 <벤허>에 출연한 배우 찰턴 헤스턴이 제시간에 도착하지 않아 자니윤이 20분 넘는 시간 동안 쇼를 진행하며 자니 카슨에게 좋은 인상을 줬다고 전해진다. 

자니윤은 <투나잇 쇼>서 자니 카슨의 보조 역할이었지만 그 기회를 십분 활용했다. 그가 풀어놓는 정치 풍자와 성적인 농담에 시청자는 환호했다. 당시 자니윤의 잠재력을 인정한 자니 카슨은 자니윤이 프로그램에 여러 번 출연할 수 있도록 힘을 썼다는 얘기도 있다. 실제로 자니윤은 동양인 중 <투나잇 쇼> 최다 출연한 게스트 2위의 기록을 세웠다.

이후 NBC는 자니윤과 계약을 맺고 <자니윤 스페셜쇼>를 선보이기도 했다. 당시 백인들이 함부로 언급하지 않았던 인종차별, 성차별 문제 등을 동양계 이민자로서 선보였다. 그의 코미디 방식은 미국 시청자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기에 충분했다. 미국 스탠딩 코미디 업계서 자니윤은 이름을 날렸다. 

자신만의
블랙코미디

자니윤의 ‘자니’는 한국 이름 ‘종승’서 비롯됐는데 미국인들이 발음하기 어려워하자 존(John)을 사용했고, 존의 애칭 자니(Johnny)가 그의 이름이 된 것으로 알려졌다.

자니윤은 영화배우기도 했다. 도산 안창호 선생의 아들인 한국계 영화배우 필립 안과 함께 TV 시리즈 <쿵푸>에 단역으로 나왔으며, 한국전쟁을 배경으로 한 드라마 <MASH> <코작> 등을 거쳐 1982년 저예산 코미디 영화 <내 이름은 브루스>에선 주인공을 맡기도 했다. 1980년대 후반 한국으로 돌아온 그는 미국식 토크쇼 형식을 빌린 <자니윤 쇼>를 진행했다. 

한국어와 영어가 섞인 자니윤 특유의 ‘느끼한’ 발음을 가감 없이 선보이며 큰 인기를 끌기도 했지만 1년 만에 폐지됐다. 수위 높은 성적 유머와 정치 풍자 등이 문제였다. 당시 프로그램 클로징에 했던 “이제 잠자리에 들 시간입니다”라는 마무리 멘트는 전 국민의 유행어였다.

이후 SBS 개국과 함께 <자니윤, 이야기쇼>라는, 타이틀은 다르지만 유사한 형식의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당대 MC 중 최고 연봉으로 계약하며 큰 화제를 낳기도 했다. 

<자니윤, 이야기쇼> 작가이면서 <주병진 쇼> <서세원 쇼> 등 대한민국 토크쇼서 대본을 쓴 김경남 작가는 <TV리포트>와의 인터뷰서 “<자니윤쇼>는 스타들이 서로 출연하고 싶어했다. 자니윤씨는 성적인 유머를 거의 처음 국내 방송서 선보인 사람이다. 그런 것을 유쾌하게 생각했고, 자니윤씨의 유머를 듣고 싶어하는 연예인이 많았던 것 같다. 자니윤씨가 워낙 신사다 보니 모두 좋아했다”고 기억했다.

이후 iTV 토크쇼 <자니윤의 왓츠업>, SBS골프채널 <자니윤의 싱글로> 등에 MC로 출연하기도 했다. 그는 2011년 KBS <승승장구>에 출연해 “당시에는 언론의 자유가 없었고 방송서도 제한된 것들이 많아 열심히 방송해도 편집당하기 일쑤였다”며 “나는 정치, 섹시 코미디를 즐겼는데 제재를 많이 받았다”고 말한 바 있다.


1년 뒤 그는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서도 “토크쇼는 기본적으로 민주주의가 발전하고, 잘사는 나라서 발달하기 마련이다. 국민이 굶주리거나 헐벗고, 농담을 진실로 받아들이는 나라에서는 진정한 토크쇼가 나올 수 없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이후 자니윤은 2007년 박근혜 당시 새누리당 비상대책위원장이 미국 로스앤젤레스를 방문했을 때 ‘박근혜 후원회’ 회장을 맡았다. 2012년 대선 때는 박근혜 캠프에서 재외선거 대책위원회 공동위원장에 발탁돼 해외동포들의 표심을 잡는 데 앞장섰다.

그런 그가 박 대통령 당선 직후 한국 국적을 취득하자 정가에선 한국관광공사 사장에 내정됐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돌았고 결국 2014년 한국관광공사 감사로 임명됐다. 이 같은 사실은 지난 2017년 초 박근혜정부서 첫 문화체육관광부장관을 지낸 유진룡 전 장관의 입을 통해 드러났다.

성 유머
정치 풍자

유 전 장관은 2017년 초 ‘블랙리스트’ 재판 증인으로 출석해 “2014년 장관직을 사임한 건 자니윤을 한국관광공사 감사로 임명하라는 지시 때문이었다”고 밝혔다. 지시는 김기춘 당시 대통령 비서실장으로부터 내려왔는데 낙하산 인사라고 반대하다 자리서 물러나게 됐다는 증언이었다.

또 골프장서 여성 캐디에게 골프채를 휘둘러 2주 진단 상해를 입힌 사실이 회자되며 자질 논란이 확산되기도 했다. 이 사건은 일부 언론에 알려졌으며 당시 피해자 캐디를 무료 변호했던 이재명 현 경기도지사가 페이스북에 사건의 뒷얘기를 자세히 소개하고 윤씨의 사퇴를 촉구하는 글을 올리면서 도마에 올랐다. 


<한국일보>가 입수한 당시 판결문에 따르면 자니윤은 1989년 10월3일 지인들과 경기도 성남시 한 골프장을 찾았다. 마침 이 골프장은 캐디들이 노조 설립 문제를 놓고 사측과 분규를 겪고 있던 곳이었다. 캐디들은 사측 인사가 포함된 윤씨 일행에 대해 “비회원이 회원의 날에 골프를 친다”며 문제 삼고 사진을 찍었다. 

이 과정서 카메라 필름을 뺏으려는 자니윤과 캐디들 사이에 실랑이가 벌어졌다. 당시 격분한 자니윤은 퍼터를 든 채 카메라를 들고 도망가던 캐디 유모씨를 쫓아갔고, 경사진 길에서 유씨를 붙잡던 중 함께 넘어져 유씨에게 전치 2주의 뇌진탕 등 상해를 입혔다.
 

수원지법 성남지원 민사합의2부는 1992년 10월 상해를 입은 유씨가 자니윤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및 위자료 청구소송서 “130여만원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이 판결은 자니윤이 항소를 포기하면서 그대로 확정됐다.

유씨의 변호를 맡았던 이재명 도지사(당시 성남시장)는 당시 페이스북을 통해 ‘당시 캐디들이 너무 억울하다고 해서 치료비 배상소송을 무료 변론했는데 자니윤은 배상 판결을 받고도 돈을 지급하지 않은 채 미국으로 돌아갔다’며 ‘윤씨가 3년여 뒤 다시 방송 출연을 위해 귀국한다기에 출연료 압류를 준비하고 있었는데 뒤늦게 윤씨 측으로부터 연락이 와서 배상금을 받아냈다’고 밝혔다.

건강상에 문제가 있었던 자니윤은 2016년 4월 뇌출혈로 병원에 입원한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한국관광공사 관계자는 자니윤 뇌출혈 입원에 대해 “생명이 위독할 정도로 심각한 상황은 아니다”라며 자니윤이 치료를 잘 받고 회복 후 업무에 복귀하겠다는 의지를 보인다고 전했다.

미국서 인종·성차별 문제로 유머
뇌출혈·치매 등 쓸쓸한 노년 보내

하지만 2017년 12월에 치매에 걸려 미국 캘리포니아 헌팅턴 요양원에 다시 입원하게 됐다.

치매의 영향으로 자신이 누구인지조차도 잘 기억하지 못하면서 쓸쓸한 노년을 보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런 상황서도 그가 자니 카슨의 <투나잇 쇼>는 기억한다는 걸 보면, 자신의 인생서 가장 빛나던 순간만은 기억한 것으로 보여 씁쓸함을 더했다.

자니윤은 1999년 18세 연하인 줄리아 리와 결혼했지만 2010년 이혼했다. 줄리아 리는 남편의 갑작스러운 난폭함에 결국 이혼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그러나 이혼 후에도 헌신했다고 언급했다. 줄리아 리는 <국민일보>와의 인터뷰서 “선생님이 싫어서가 아니라 무서워서 이혼했다”며 “안 그랬던 분인데 갑자기 화를 많이 내기 시작하더니 사람을 너무 난폭하게 대하더라”고 전했다.

당시 줄리아 리는 자니윤이 조울증인 줄 알고 치료를 받았지만 차도가 없었다고 설명했다. 결국 2010년 8월 이혼했고, 그 후 자니윤이 뇌경색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고 했다.

줄리아 리는 경제적인 이유로 자니윤과 결혼했다는 루머에 대해 억울함을 토로했다. 줄리아 리는 “생활비 한 번 받아본 적 없다. 그래도 (자니윤에게)돈 벌어오라는 소리 안 하고, 지갑에 돈 없으면 기죽을까봐 넣어드리곤 했다”고 회상했다.

한국에 온 이유에 대해선 “자니윤을 돌보다 쓰러져 목 디스크가 걸렸고, 이를 치료 차 잠시 들어왔다”고 설명했다. 미국으로 돌아가면 자니윤을 돌볼 것이냐는 질문에 “내가 죽을 때까지 돌보겠다고 약속했으니 지키겠다”며 “아기 같고 유리 같은 분이다. 수단이 없어 돈도 많이 못 벌고 사셨을 거다. 내가 사랑을 많이 받았다”고 답했다.

지난 10일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선 “얼마 전에 한국에 수술을 받으러 나왔다. 올 때만 해도 선생님이 멀쩡하셨는데, 갑자기 운명하셨다”며 침통한 마음을 전했다. 얼마 전 교통사고를 당해 한국서 수술을 받았다는 줄리아 리는 코로나19 확산으로 인해 퇴원 후 방역 당국의 권고로 자가 격리 중이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다사다난
파란만장

줄리아 리는 “멀리 떨어져 있기에 어쩔 수 없이 영상통화로 고인의 임종을 지켜봤다”며 “의사 말로는 정신이 혼미해도 청각은 듣는다고 하더라. 영상통화로 선생님에게 기도하고 ‘좋은 데서 고통받지 말고 계시라’고 했더니 눈을 한 번 뜨시더라. 그걸 화상으로 다 봤다. 아들이 영상통화를 얼른 걸어줘서 아들과 같이 마지막 모습을 봤다”고 말했다. 그는 “마음이 많이 아프다. 가실 때 손을 잡아 드리기로 했는데 당장 별 도리가 없어서 화상통화로 선생님 운명하시는 걸 보고, 평상시 유언대로 해드렸다”고 덧붙였다.
 

<9dong@ilyosisa.co.kr>
 

<기사 속 기사> 전설의 ‘자니윤쇼’는?

<자니윤 쇼>는 KBS 2TV서 방송됐던 토크쇼 프로그램으로 메인 진행자는 자니윤이며, 보조 진행자는 조영남이었다. 1989년 3월8일에 첫 방송이 시작됐고, 그 후 1990년 4월5일에 종영됐다.

그 뒤에 1991년 12월9일 SBS가 텔레비전 방송을 개국한 이후로 주말에 <자니윤, 이야기쇼>를 방영한 바 있었으며 자니윤은 이 프로그램 이후 브라운관서 자취를 감췄다가 2002년 7월14일 첫 회가 나간 iTV <Whats up>이 2002년 11월10일부터 <자니윤 나이트쇼>로 제목을 변경해, 2003년 1월 26일까지 일요일 오후 10시30분에 방영했다.

그해 2월8일부터 4월5일 마지막 회까지 진행을 맡았으며 <자니윤 쇼> 보조 MC였던 조영남이 첫 회 초대 손님으로 나오기도 했다. 

하지만 외설적인 내용으로 일관해 시청자들의 큰 반발을 샀으며, 1990년 3월 계약 만료로 프로그램이 막을 내렸다.

1989년 10월18일 방영서 비속어 남발뿐 아니라 특정업체를 간접으로 선전해 방송위원회로부터 ‘주의’ 조치를 받기도 했다. <구>
 



배너





설문조사

진행중인 설문 항목이 없습니다.


용산에 날아들 영수회담 성적표

용산에 날아들 영수회담 성적표

[일요시사 정치팀] 박희영 기자 = 꼬박 720일이 걸렸다. 한 나라의 대통령과 제1야당 대표가 만나기까지 걸린 시간이다. 악재에 악재가 겹쳐 궁지에 몰린 용산 대통령실이 꺼내든 최후의 카드는 영수회담이었다. 온 국민의 관심이 무색하게 이번 만남은 여야 어느 한쪽도 만족시키지 못했다. 윤석열 대통령의 임기가 3년 차에 접어든 시점서 또다시 ‘강 대 강’ 매치가 예상된다. 정치권이 학수고대하던 윤석열 대통령과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 이재명 대표의 만남이 성사됐다. 이번 영수회담은 지난 19일, 윤 대통령이 이 대표에게 만남을 제안하면서 시작됐다. 이도운 대통령실 홍보수석은 브리핑을 통해 “윤 대통령은 이날 오후 3시30분 이 대표와 통화했다”며 “이 대표에게 다음 주 형편이 된다면 용산서 만나자고 제안했다”고 말했다. 둘의 만남은 윤 대통령 취임 이후 1년 11개월 만이다. 어렵게 만났는데… 같은 날 민주당은 즉각 환영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민주당 강선우 대변인은 “윤 대통령은 이 대표에게 내주에 만날 것을 제안했다”며 “이 대표는 ‘많은 국가적 과제와 민생 현장에 어려움이 많다’며 되도록 이른 시일 안에 만나자고 화답했다”고 전했다. 그동안 이 대표는 꾸준히 영수회담을 요청했지만 윤 대통령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재판을 받고 있는 이 대표가 피의자 신분인 만큼 만남이 적절치 않다는 무언의 거절이었다. 윤 대통령의 변심에는 지지율이 20%대로 급락한 상황이 영향을 끼친 것으로 풀이된다. 여당인 국민의힘이 4·10 총선서 참패한 데 이어 인사 문제를 두고 대통령실의 손발이 맞지 않자 비선 개입 의혹까지 가중됐다. 야당과 소통함으로써 단단하게 굳어진 불통 이미지를 벗어던지는 등 현 상황을 돌파하겠단 뜻이다. 개혁신당 이준석 당선인은 “이번 총선 이후 ‘야당 대표를 무시하다가는 총리도 임명 못하겠구나’라는 상황을 파악한 것”이라며 “아마 구체적인 내용보다는 총리 인선 협조 정도를 받아내기 위한 피상적 대화가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어 “이 대표에겐 편한 회담이 될 것이다. 자기 할 말만 하면 되기 때문”이라며 “예를 들어 ‘채 상병 특검 받고 거부권 행사하지 말아달라’고 했을 때 대통령이 못 받으면 회담까지 하고 욕먹는 건 본인”이라고 주장했다. 두 사람이 만남을 갖기로 합의를 봤지만 하나부터 열까지 조율해야 하는 상황의 연속인 만큼 넘어야 할 고비는 많았다. 1차 실무진 회의도 쉽지만은 않았다. 당초 지난 22일 예정됐던 만남이 대통령실의 일방적인 취소로 불발된 것이다. 대통령실의 수석급 교체 일정으로 인해 일정에 변동이 생긴 것으로 전해진다. 피치 못할 사정이라지만 준비 회동조차 잡음이 새 나오면서 위태위태한 앞날이 예고됐다. 결국 첫 실무진 만남은 이로부터 하루 뒤인 지난 23일 이뤄졌다. 대통령실 측에서는 홍철호 정무수석과 차순오 정무비서관이 참석했다. 민주당 측에서는 천준호 비서실장과 권혁기 정무기획실장이 자리했다. 이날 회의는 영수회담 날짜는 물론 의제도 정하지 못한 채 빈손으로 종료됐다. 지지율 하락에 반등 노렸지만… 의제 놓고 격돌…샅바 잡은 윤-이 지난 25일 진행된 2차 회의도 큰 소득은 없었다. 테이블에 올릴 의제를 놓고 양측이 이견을 좁히지 못한 탓이다. 그동안 민주당은 채 상병 사망 사건 수사외압 의혹을 담은 특검법 수용과 윤 대통령의 거부권 남용에 대한 사과 등을 의제로 다루자는 입장을 밝혀왔다. 반면 이를 전해 들은 대통령실은 난감하단 태도를 보이며 팽팽하게 대립했다. 천 비서실장은 실무 협상 직후 브리핑서 “사전에 조율해 성과 있는 회담이 되도록 의제에 대한 검토 의견을 (대통령실이)제시하면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고 말했다. 홍철호 대통령실 정무수석은 “지도부와 상의를 거쳐야 한다”며 추후 답변을 주겠다고 밝혔다. 민주당 측이 제안한 의제와 관련해서는 ‘포괄적 수용’이라는 입장을 전달했다. 의제를 놓고 양쪽이 평행선을 달리면서 이대로 영수회담이 불발되는 게 아니냐는 우려도 나왔다. 하지만 지난 26일 이 대표가 “다 접어두고 먼저 윤 대통령을 만나도록 하겠다”고 말하면서 논의는 급물살을 탔다. 진통 끝에 영수회담 날짜가 정해지면서 세간의 관심이 두 사람의 입에 집중됐다. 윤 대통령과 이 대표는 지난달 29일 오후 2시 용산 대통령실서 만났다. 대통령실에선 정진석 대통령 비서실장과 홍철호 정무수석, 이도운 홍보수석이 배석했다. 민주당에선 천준호 당 대표 비서실장과 진성준 정책위의장, 박성준 수석 대변인이 자리했다. 대통령실은 이번 영수회담을 통해 정국을 풀어갈 실마리를 확보할 것으로 기대했다. 민주당은 ‘총선 민의’를 가감 없이 전달하겠다고 거듭 강조했다. 이재명 15분 독주 윤 대통령은 대통령실로 들어선 이 대표를 웃음으로 맞이했다. 곧이어 두 사람은 악수를 한 뒤 건강 등 안부를 주고받았다. 이 대표는 “저희가 (국회서 이곳으로)오다 보니 20분 정도 걸리던데, 실제 여기 오는 데 700일이 걸렸다”며 뼈 있는 농담을 건넸다. 윤 대통령은 대답 대신 웃음으로 갈음했다. 이날 영수회담서 가장 눈길을 끈 건 이른바 이 대표의 ‘작심 발언’이다. 윤 대통령의 인사말 이후 취재진이 퇴장하려 하자 이 대표는 “퇴장할 건 아니고, 제가 대통령님한테 드릴 말씀을 써왔다”며 멈춰 세운 뒤 품에서 종이 뭉치를 꺼내 읽어 내려갔다. 700일 동안 묵혀둔 말을 몽땅 쏟아내겠다는 듯, 이 대표의 발언은 장장 15분 넘게 이어졌다. 이 대표는 “대통령님께서 너무 잘 아시겠지만 지금 우리의 현실이 참으로 팍팍하고 국민의 삶이 어렵다”고 운을 띄웠다. 이어 “국가적으로 보면 정치, 경제, 사회, 또 외교 안보, 모든 영역서 많은 위기가 도출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며 “물가, 고금리, 고환율 이런 삼중고를 포함해서 우리 국민의 민생과 경제가 참으로 어렵다는 것은 대통령님께서도 절감하실 걸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곧이어 이 대표는 ‘전 국민 1인당 25만원 민생회복지원금 지급’을 요구하면서 본격적인 의제를 던졌다. 이 대표는 “민간경제가 어려울 때 정부가 나서는 것이 원칙이다. 우리 민주당이 제안한 긴급 민생회복 조치를 적극적으로 검토해주실 것을 부탁드린다”며 “특히 지역화폐로 지급하면 소득 지원 효과에 더해서 골목상권 소상공인 자영업자 지방에 대한 지원 효과가 매우 큰 민생회복지원금을 꼭 수용해주길 부탁드린다”고 강조했다. 이 대표는 ‘김건희 특검법’ 수용도 에둘러 촉구했다. 그는 “이번 기회에 국정운영에 큰 부담이 되는 가족 등 주변 인사들의 여러 의혹도 정리하고 넘어가시면 좋겠다는 생각”이라고 말했다. 이 밖에도 이태원 참사나 채 상병 순직 사건의 진상을 밝혀 그 책임을 묻고 재발 방지 대책을 생각할 것과 연구·개발(R&D) 예산 등도 화제로 올렸다. 거부권 행사를 자제할 것도 강하게 요구했다. 아울러 “지금까지 제가 말씀드린 게 상당히 불편하실 수 있을 것 같다”면서도 “또 민심을 과감하게 가감 없이 전달하는 것이 이 자리가 마련된 이유라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윤 대통령은 이 대표의 말을 들으면서 중간중간 고개를 끄덕이는 식으로 답했다. 처음 웃는 얼굴로 이 대표를 맞이할 때와 달리 표정은 점차 굳어져 갔다. 모두발언이 끝나자 윤 대통령은 “이 대표와 민주당이 강조해 오던 이야기라 예상하고 있었다”며 모두발언은 생략한 뒤 비공개 회담을 이어갔다. 이날 회담은 예상 시간인 1시간을 훌쩍 넘은 오후 4시10분쯤에 마무리됐다. 130분간 자리를 함께했지만 도중에 배석자를 제외하는 등 두 사람이 독대하는 상황은 발생하지 않았다. 정치권 안팎에서는 두 사람이 영수회담 도중 배석자를 물리고 자연스럽게 만찬 회동을 가질 것으로도 기대했지만 이번 만남은 차담 수준서 그쳤다. 영수회담을 마친 뒤 대통령실과 민주당은 각각 브리핑을 진행했다. 같은 장소서 같은 시간을 보냈지만 이번 회담을 바라본 양측의 시각은 극명하게 엇갈렸다. 두 쪽 난 여론 국민의 판단은? 이도운 대통령실 홍보수석은 영수회담 종료 직후 브리핑을 통해 “전체적으로 볼 때 대통령은 제1야당인 민주당의 대표와 민생 문제 등에 대해 깊이 또 솔직하고 허심탄회한 대화를 나눴다”며 “합의에 이르지는 않았지만, 양측이 총론적 혹은 대승적으로 인식을 같이한 부분은 있었다”고 평가했다. 이 수석의 설명처럼 별도의 합의문은 없었다. 다만 의료개혁이 필요하고 의대 정원 증원이 불가피하다는 데 인식을 같이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 대표가 “의료개혁은 시급한 과제며 대통령의 정책 방향이 옳다. 민주당도 협력하겠다”라는 취지로 말했다는 것이다. 다만 “민생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개선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대통령실과 여야 간의 정책적 차이가 존재한다는 데 대해서도 조금 이견이 있다는 것도 확인했다”며 “대통령은 민생 협의를 위한 여야정 협의체 같은 기구가 필요할 수 있다고 말했고 이 대표는 ‘여야가 국회라는 공간을 우선 활용하자’는 입장을 표명했다”고 말했다. 이태원 특별법에 대해서는 “대통령은 이 사건에 대한 조사나 재발 방지책, 피해자 유족들에 대한 지원에 대해서는 공감을 하지만 지금 국회에 제출된 법안이 법리적으로 볼 때 민간조사위원회서 그 영장 청구권을 갖는 등 좀 법리적으로 문제가 있을 부분이 있기 때문에 ‘이런 부분은 조금 해소하고 다시 논의를 하면 좋겠다’ ‘그렇게 한다면은 무조건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라는 취지로 말했다”고 밝혔다. 아울러 “대통령과 이 대표는 앞으로도 종종 만나기로 했다”며 “두 분이 만날 수도 있고 여당의 지도체제가 들어서면 3자 회동도 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양측이 대승적으로 인식을 같이한 부분은 있었다는 대통령실의 평가와 달리 민주당은 이번 영수회담에 대해 냉랭한 반응을 보였다. 회담에 배석한 박성준 민주당 수석 대변인은 같은 날 국회서 브리핑을 열고 “영수회담에 대해 큰 기대를 했지만 변화를 찾아볼 수 없었다”고 지적했다. 박 수석 대변인은 “상황 인식이 너무 안일해서 향후 국정이 우려된다”며 “특히 우리 당이 주장했던 민생회복 국정기조와 관련해 민생을 회복하고 국정 기조를 전환하겠다는 의지가 없어 보였다”고 밝혔다. 이날 회담에 대해 이 대표의 소회를 묻는 질문에는 “답답하고 아쉬웠다. 소통의 첫 장을 열었다는 데 의미를 둬야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소통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서로 공감했으나 이 대표가 내민 청구서에 윤 대통령이 딱 떨어지는 답변을 내놓지 않았다는 점을 꼬집은 것이다. 범야권 집중 포격 맞은 대통령실 “결과도 실리도 없다” 쏟아진 질타 범야권도 일제히 쓴소리를 얹었다. “이럴 거면 대체 왜 만났냐”는 반응이 대체적이다. 조국혁신당(이하 조국당)은 “윤 대통령의 답은 거의 없었다”며 “총선 민심에 관한 시험을 치르면서 백지 답안지를 낸 것과 다름이 없다”고 혹평했다. 조국당 강미정 대변인은 <일요시사>와의 통화서 이번 회담을 통해 윤 대통령의 기조가 곧바로 바뀌진 않을 것으로 전망했다. 강 대변인은 “준비가 덜 된 대통령과 그럼에도 최대한 민심을 담아 질문을 한 야당 대표의 만남”이라며 “(대통령이)여러 가지 법안과 자신의 가족 문제 등 민감한 질문은 빼버렸다. 추후 만남을 기약한 정도일 뿐 아무런 결실이 없었다”고 지적했다. 다만 “그래도 윤 대통령 측에서 ‘자주 소통하자’는 뉘앙스가 나왔다”며 “만남을 거듭한다면 나아질 가능성이 있을 거라는 희망을 걸어본다”고 말했다. 새로운미래는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은 없었다”며 “130분간 회담을 했으나 공동합의문은 없고 소모적인 정쟁에 불과했다”고 양측을 모두 비판했다. 새로운미래 신재용 대변인은 <일요시사>와의 통화서 “가장 시급한 문제인 의료대란 관련해 조금이라도 진정성 있는 결과가 나왔어야 이번 회담이 성과가 있었다고 본다”며 “진전도 성과도 없이 끝나 버렸다”고 혹평했다. 김준우 정의당 대표는 자신의 SNS를 통해 “130여분간 진행됐다는 대화의 결말은 결국 ‘2년 만에 첫 대화를 했다’는 그 자체와 여야 모두 입장이 애초에 비슷했던 의대 정원 확대 필요성을 확인한 것 외엔 아무런 성과가 없었다”고 비판했다. 다만 일각에서는 이번 영수회담이 아쉽게 끝난 것에 대해 이 대표에게도 책임이 있다고 봤다. 익명을 요구한 정치권 관계자는 <일요시사>와의 통화에서 “(이 대표는)대화의 기본이 안 돼있다”며 “대화라는 건 서로 말을 주고받는 걸 전제로 해야 하는데, (이 대표처럼)하고 싶은 말을 모조리 한다고 해서 소통이 되는 건 아니다”라고 지적했다. 또 다른 정치권 관계자 역시 “이번 만남은 이 대표의 1승”이라면서도 “이 대표가 무리하게 정국을 끌고 갈 가능성처럼 비칠까 우려되는 지점도 있다”고 말했다. 첫술에 배부르랴 현재로서는 이번 회담이 윤 대통령의 ‘자충수’라는 여론이 강하다. 소통하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TK·PK 기반의 집토끼를 꽉 쥐는 데 효과적일지 몰라도 중도층이 보기에는 여러모로 아쉬움이 남는다는 평이다. 영수회담 민심이 반영된 여론조사 결과도 주목된다. 레임덕 돌파구로 이 대표와의 만남을 선택한 윤 대통령의 선택이 자충수인지 신의 한 수인지 지켜봐야 할 전망이다. <hypak28@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