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시사 취재1팀] 김태일 기자 = 국내 손해보험사들이 때아닌 돌발 악재로 회계상 최대 700억원의 손실을 떠안을 처지에 놓였다. 싱가포르계 재보험사인 아시아캐피탈재보험(ACR)이 지난달 청산 절차에 돌입하면서 신용등급을 자진 철회했고, 그러면서 해당 재보험자산의 감액 처리가 불가피해진 탓이다. 회사별로는 코리안리가 350억원 수준으로 가장 많고, KB손해보험이 100억원대로 그 뒤를 이었다.
2006년 설립된 ACR은 싱가포르에 본사를 두고 있으며, 국내는 물론 일본과 홍콩, 인도, 두바이, 타이완 등 아시아·태평양 지역서 사업을 영위해왔다. 지난해 9월 말 현재 ACR의 총 자산은 13억 4000만달러, 한국지점의 자산은 953억원 수준이다. 그런데 최근 아시아권서 자연 재해가 늘면서 손실이 커졌고 결국 청산 수순에 들어갔다.
청산 수순
재보험사는 보험사들의 보험사로서, 보험사들이 인수한 물건의 리스크 일부를 다시 보험해주는 역할을 맡고 있다. 큰 빌딩 등 대형 물건의 경우 주간 보험사가 보험계약을 인수한 뒤 타 손보사나 재보험사들에 셀다운하는 구조다.
ACR의 재보험금 지급 문제는 올해 강력한 태풍이 일본을 연이어 강타하면서 부각됐다. ACR이 일본 태풍(파사이·하기비스) 피해로 인해 국내 손보업계에 지급해야 할 재보험금 규모는 700억원가량으로 추정됐다.
ACR은 지난달 5일, 청·파산 전문회사인 카탈리나 홀딩스(Catalina Holdings)와 지분 100% 이전 계약에 합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자 글로벌 신용평가사들이 매각 이슈를 반영해 ACR의 신용등급을 줄줄이 내렸다.
A.M.Best는 ACR의 신용등급을 ‘A-(부정적)’서 ‘B++’로 낮췄고, S&P는 ‘A-(안정적)’서 ‘BBB+’로 하향조정했다. 재보험 영업이 가능한 투자적격 수준이긴 하지만 두 신용평가사 모두 ACR를 관찰대상으로 분류했다.
재보험은 보험사들이 가입하는 보험을 말한다. 한꺼번에 거액의 보험금을 지급해야 하는 위험을 분산하기 위해 다시 보험을 드는 방식이다. 금융당국은 일반 보험사들이 재무 건전성과 신용등급이 일정 수준 이상인 재보험사들만 거래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재보험사에 문제가 생기면 연쇄적으로 보험사들에도 피해를 줄 수밖에 없어서다.
문제는 ACR이 지난해 12월9일과 10일 각각 A.M.Best와 S&P의 신용등급을 자진 철회했다는 점이다. 청산 과정에 들어간 만큼 추가적인 보험계약을 체결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함인데 신용등급 자체가 사라지다 보니 재보험사로서 적격성 여부도 불명확해졌다.
보험사들은 제때 보험금을 돌려줄 수 있도록 보험금이나 해지환급금 등의 일정 금액을 미리 책임준비금(부채)으로 쌓아야 한다. 다만 재보험에 가입할 경우 그만큼 위험 부담이 줄어들어 책임준비금 없이 재보험자산으로만 분류하면 된다.
자체 신용등급 철회…재보험 출재 부적격
코리안 350억 KB손보 100억 등 700억 규모
다만 해당 재보험사가 ▲국내 감독기관이 정하는 재무건전성 기준을 충족하지 못하거나 ▲글로벌 신용평가기관서 최근 3년 이내 신용등급이 투자 적격이 아닌 경우 재보험자산을 감액하도록 정하고 있다.
그러면서 ACR의 재보험에 가입한 보험사들의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그동안 책임보험금 없이 재보험자산으로 분류했던 금액이 회계상 비용으로 처리되면서다. 회사별 손실 규모는 코리안리가 약 350억원으로 가장 많고, KB손보가 약 100억원, 나머지 손보사들이 수십억 원대다. 전체 금액은 700억원 규모로 추산되고 있다.
안 그래도 지난해 실적이 크게 부진할 것으로 예상되고 있는 가운데 12월 말 결산을 앞두고 갑작스럽게 돌발 악재를 만난 셈이다.
이에 업계는 금융위원회에 ACR의 신용등급 인정 유예를 신청했다. 금융위원회(이하 금융위)는 신용등급 기준이 ‘최근 3년’인 만큼 신평사의 관찰대상 이후 재평가 기간인 90일을 적용해 신용등급을 유예하는 유권해석을 내렸다.
금융위 관계자는 “갑작스레 매각이 결정됐고, 신용등급 철회 전에는 투자적격 등급에 해당해 재보험자산으로 계상할 수 있었던 상황”이라며 “매각 시 등급 재평가 기간인 90일 동안은 이전 신용등급이 유효한 걸로 결론을 내렸다”고 말했다.
손실 반영을 90일 미룰 수 있다는 해석이다. 시점을 미루긴 했지만 올해 1분기 손실 반영은 불가피할 전망이다.
금융위 관계자는 “유예기간이 지나는 3월 초부터 ACR에 넘겼던 재보험 계약을 통해 재보험자산으로 잡았던 부분을 감액해야 하는 만큼 올해 1분기에는 손실로 반영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한숨 돌렸지만…
보험업계 관계자는 “일단 한숨 돌렸지만 1분기 손실 반영은 감내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며 “다만 계약 자체의 부실이 아니라 ACR의 대주주가 투자를 철회하는 과정서 비롯된 일인 만큼 ACR로부터 지급보증서를 받는 등 방법을 강구하고 있으며, ACR이 보유한 자산도 적지 않은 만큼 최종적인 손실 규모는 크지 않을 것”이라고 예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