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시사 송구영신 특별 인터뷰> 위안부 피해자 지원단체 정의기억연대 윤미향 이사장

“여러분이 할머니들의 보약입니다”

[일요시사 정치팀] 설상미 기자 = 매주 수요일, 주한일본대사관 앞에서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 문제에 대해 일본정부의 공식 사과와 배상을 촉구하기 위한 집회가 열린다. 28년째다. 그 사이 수많은 피해자 할머니들이 한을 풀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현재는 평균 연령 90세인 할머니 스무 분만 남았다. <일요시사>가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 문제 해결을 위해 설립된 ‘정의기억연대’의 윤미향 이사장을 만나봤다.
 

“제 고향은 평양이고, 저는 13세에 일본으로 끌려가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당했습니다. 제 나이 이제 92세입니다. 제가 죽기 전에 꼭 진실을 밝히기를 원합니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길원옥 할머니가 외교부를 상대로 한 ‘한일 위안부 합의’에 관한 문건 공개 요구 항소심에 쓴 호소문이다. 2019년은 반인륜적 극우 세력들과 정부·국회의 무능함으로 인해 상처로 점철된 한해였지만, 할머니는 수요집회에 참여한 시민들을 향해 ‘보약’이라고 했다. 2020년엔 피해자 할머님들이 바람을 타는 나비가 돼 훨훨 날 수 있는 해가 되길 기대해본다. 아래는 윤 이사장님과의 일문일답.

-1992년 1월8일부터 28년째 매주 수요집회를 이어오고 계십니다.
▲92년에 미야자와 기이치 일본 총리가 방한한다는 뉴스가 보도되더라고요.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한 해결 없이 한국에 와서 외교를 논하는 건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죠. 피해자들의 인권 회복을 우선으로 해야 한다는 목소리를 내면서 수요시위를 시작했어요. 이 문제를 해결될 때까지 계속한다고 했는데, 28년째 지속될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죠.

-지난 11월 일본정부는 ‘2015 위안부 한일 합의’ 때 한국정부가 ‘성노예’라는 표현을 쓰지 않겠다고 합의했다고 주장했습니다.
▲일본정부가 “성노예라는 표현은 맞지 않다”고 했을 때 박근혜정부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문제뿐임을 재차 확인한다”고 답변을 하죠. 이면합의가 있었어요. 한국정부의 책임을 면할 수가 없습니다. 한일합의 때 굉장히 비주체적이고 부끄러운 모습을 보여준 거죠. 박근혜정부가 잘못됐었다는 점은 반드시 지적해야 합니다. 한일합의 자체가 잘못 됐고요. 여전히 일본정부는 이 문제에 대한 진실을 밝혀야 하고, 피해자들에게 사죄와 배상을 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일본정보가 ‘성노예’라는 표현에 대해 예민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성노예라는 표현 자체가 일본정부가 어떤 범죄를 저질렀는지를 그대로 잘 드러내주는 단어기 때문이에요. ‘노예’는 국제적으로 금지된 인권유린 범죄고, ‘성노예’는 인류 역사상 다시 없을 범죄인데 용어 속에 다 포함돼있잖아요. 일본정부가 이미 드러난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려 하는 거예요. 그러나 피해자들의 증언뿐만 아니라 일본군이 당시에 직접 작성했던 문서들, 일본 병사들이 일지, 일기 등을 통해서 일본이 제도적으로 자행한 전쟁 범죄이자 성노예 범죄였다는 것이 드러났어요.

 


-국제 사회서도 ‘성노예’라는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역사적인 사실에 근거해 그동안 유엔인권이사회와 노동문제를 다룬 ILO(국제노동기구)도 ‘위안부 문제는 성노예 범죄기 때문에 일본이 국제법을 위반했다. 따라, 피해자들에게 국제법 위반에 따른 사죄와 배상을 해야 된다’고 권고를 내렸어요. 국제기구 문서에는 ‘Military Sexual Slavery by Japan(일본군 성노예)’라는 표현을 쓰고 있고요. 이미 국제적으로 확인되고 드러나 있는 사실을 가해국인 일본정부만 부정하고 있어요. 지금도 계속해서 그 범죄를 지우려고 하는 행태를 보이고 있는 거죠.

28년째 이어진 수요집회
“참가자들 있어서 버텼다”

-일본정부에 해주고 싶으신 말이 있으시다면.
▲아무리 너희들이 손바닥으로 역사와 진실을 가려고 해도 가려지지 않는다. 진실은 가리려고 시도할수록 오히려 더 선명하게 보일 것이고, 진실이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지 더 극명하게 사람들에게 알려줄 것이라는 얘기를 하고 싶어요. 생존자들이 모두 다 돌아가신 이후에라도 진실을 외치기 위해 행동하는 사람이 단 한명이라도 있다면 진실은 계속해서 드러날 겁니다. 일본정부는 반드시 이 문제에 대한 책임을 이행해야 될 것입니다.

-활동에 힘드신 점이 있으시다면.
▲일본정부는 세계를 돌면서 저희들이 평화의 소녀상을 세우거나 위안부 문제에 대한 전시회를 열면 그곳에 찾아가요. 가해국인 일본이 우리를 압박하고 방해하는 거예요. 2012년에 김복동 할머니와 저희가 나비 기금을 만들었어요. 나비 기금을 만들어서 전 세계 성폭력 생존자들을 지원하기 시작했어요. 근데 저희가 지원하는 곳에 일본 정부가 찾아가서 뭐라고 얘기했는지 아세요. “저 단체(정의기억연대)는 위험한 단체다. 우리는 이미 다 해결했는데 저 단체가 억지를 부리면서 일본을 공격하고 있다. 반일을 만들고 있다. 당신들이 저 단체하고 연대를 끊으면 일본정부가 지원을 하겠다고 했어요.

 

▲ 일요시사와 특별 인터뷰 갖고 있는 윤미향 이사장

일본정부는 그렇게 하고 있는데, 한국정부는 왜 이 같은 행태에 대해 비판 안 하나요. 없는 말을 얘기하라는 게 아닌데. 그런 목소리를 내야 저희들도 더 힘차게 활동하게 되고, 국제사회도 한국정부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게 되죠. 어느 누구도 이야기 하지 않는데 누가 한국정부의 목소리를 들어 주겠어요. 그건 말이 안 되죠.

-한국정부도 더 목소리를 내야한다.
육체적으로 힘든 건 제가 견디면 돼요. 일본에 갈 때 얘들이 또 혹시 나를 입국 못하게 나를 잡아놓고 뭐라고 하면 어떡하지 두려운 적은 있죠. 근데 그게 힘들진 않아요. 정말 힘들 때에는
‘문희상 안’과 같이 국회나 정부의 무능함을 느낄 때요. 내가 거대한 철벽 밑에서 낑낑대고 있다고 느낄 때가 있어요. 우리 할머니들은 얼마나 힘들까 진실과 정의는 멈추면 안돼요. 그건 미래 세대들에게 물려줄 인권이라는 소중한 권리를 박탈시키는 겁니다. 지금 피해 당사자들이 목소리를 외치고 있을 때, 국제사회서 이 문제에 관심을 갖고 있을 때 목소리를 더 내야해요.

-문희상안이 최근에 문제가 많이 됐습니다.
▲너무 부끄러워요. 한국 국회서 가해국을 대신해 해결해주는 법안이 국회의장에 의해 발의된다는 거 자체가요. 이 법안은 양국 기업과 민간의 자발적 기부금을 위자료란 명분으로 피해자들에게 지급하고, 일본정부에 대한 청구권을 영원히 갖지 못하도록 했습니다. 이 문제는 가해국인 일본이 해결해야 할 문제예요. 가해국은 여전히 아무 양심의 가책 없이 책임을 인정하지 않고 있어요. 피해국이 가해자들에 대한 피해자들의 최소한의 권리 청구권을 차단하겠다는 취지나 마찬가지예요. 왜 일본과의 외교적·경제적 관계를 풀어나가기 위해서 피해국 스스로 가해자들에게 면죄부를 주는 그런 법안을 제출하는 건가요.

-문희상안을 본 할머님들의 반응은 어땠나요.
▲“우리가 수재민이냐” 그러시더라고요. 굉장히 모욕감을 느꼈단 얘기예요. “우리가 무슨 일본정부에게 돈을 달라고 하는 것이냐. 1000억을 준다 해도 받을 수 없다”고요. 우리는 범죄 피해자인데 선의의 대상으로 생각하는 걸 굉장히 굴욕적으로 느끼시죠. 당당한 권리가 있는 피해자들의 명예를 또 훼손하는 일이고요.


-국회와 정부가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 문제를 풀기 위해 어떻게 하는 것이 옳을까요.
▲한일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우리 외교부가 어떤 국제적인 외교를 하고 있는지 모르겠어요. 일본군 성노예제 문제는 한국과 일본 간에 역사적인 맥락서만 이해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에요. 이미 지난 30년동안 유엔서 인권의 문제라고 계속 얘기를 해왔어요. 근데 왜 우리 정부는 국제적인 인권 외교를 하지 않는 건가요.

 

경제 외교, 안보 외교도 중요하지만 인권 외교도 굉장히 중요해요. 우리 미래 세대들에게 자긍심을 갖게 할 수 있는 지점이기도 하고요. 처음에 이 정부가 들어섰을 때 인권문제를 다루는 투트랙 외교를 한다고 얘기했어요. 그럼 그렇게 해야죠. 경제·안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인권문제를 결부시키는 건 아니죠. 정부가 말하는 미래지향적인 관계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아요.

-피해자 할머님 분들이 몇 분 정도 남아 계신가요.
▲참 안타까운 일인데요. 지금 겨우 스무분이 살아 계세요. 중국도 한 자리 숫자로 생존자가 줄어들었고. 필리핀, 인도네시아서도 할머니들이 돌아가셨다는 소식들이 전해오고 있어요. 평균연령이 90세를 넘으셨고요. 우리의 하루와 피해자 할머님들의 하루는 어마어마한 차이가 있다는 것을 현재 할머니들 상황을 보면 알 수 있는 거죠.

“2020년 연대한다면
희망은 현실이 될 것”

-매주 수요일마다 일본대사관 앞에서 집회가 열리고 있습니다.
우리가 수요일마다 일본대사관 앞에서 외치는 목소리들은 해방으로 가는 만세 소리라는 생각이 들어요. 진정한 해방으로 가는 목소리에 더 많은 분들이 동참해주시면 좋을 거 같고요. 일본대사관 앞에 오시면 평화의 소녀상이 있습니다. 평화의 소녀상은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간 수많은 분들의 아팠던 역사뿐만 아니라 눈보라가 치나 비가 오나 늘 그 자리에 앉아서 포기하지 않고 목소리를 외쳤던 여성들의 모습을 그대로 담은 거예요

그 소녀 옆에는 빈 의자가 있습니다. 그 빈 의자는 이미 고인이 되신 피해자 분들을 추모하고 기억하는 자리이기도 하지만 빈 의자에 앉을 사람들이 연대하는 자리기도 해요. 즉 죽은 것이 죽은 게 아니라는 것. 죽었다고 역사가 없어진 게 아니라는 것. 죽었다고 목소리가 사라지는 게 아니라는 것.

죽었다고 진실이 묻히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상징하는 자리거든요. 우리가 그 자리에 앉아 내가 김학순입니다’ ‘내가 김복동입니다’ ‘내가 길원옥입니다’ ‘내가 이용수입니다’. 우리가 피해 당사자의 목소리와 기억으로 함께 앉아서 포기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하는 자리에요.

-매주 수요집회마다 많은 분들이 오랫동안 함께 해주셨는데.
▲우리 길원옥 할머니, 92세신데요. 건강이 안 좋으신데…. 그분이 하셨던 말씀이 있어요. 수요시위에 오는 청소년들, 시민분들 보면서 “여러분, 여러분들이 우리의 보약이에요. 여러분을 보면 저는 힘이 나요”라고 하셨어요. 늘 함께 해줬던 분들이 있었기 때문에 할머니들이 지금까지 30년을 버틸 수 있었고, 우리도 할머니들이 계셨기 때문에 버틸 수 있었어요.

 

-2019년 한 해가 마무리됩니다.
▲2019년 한 해에도 일본정부가 역사를 부정하고 피해자들에게 2차 가해를 가했어요. 피해자가 28년 동안 만들어 놓았던 평화·인권의 역사를 무너뜨리려고 하는 일들도 많았고요. 한국 내부서도 폭력적인 일들이 너무 많았습니다. 피해자들이 강제로 가지 않았다. 자발적으로 돈을 벌기 위해서 스스로 매춘부가 됐다일본 우익들에게서 그런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할머니들이 분노하며 저항할 수 있었어요.

그런데 우리나라 사람들이 그 시대를 살아 보지 않았으면서 어떻게 저런 이야기를 할 수 있나요그런 절규를 했던 2019년이기도 합니다. 상처 투성이였던 한 해였지만, 수많은 분들이 할머니들 곁에서 함께 노란 날개를 펼쳐서 ‘우리가 할머니들과 함께 연대할게요’라며 따뜻한 위로가 돼주셨던 한 해이기도 했어요. 상처와 고통을 이겨낼 수 있도록 희망이 되어주신 많은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여러분들 덕분에 할머니들이 더 힘내서 주저앉지 않았고, 포기하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2020년에 바라는 점이 있다면.
부디 2020년에는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들의 인권과 명예가 회복될 수 있길 바랍니다. 그리고 세계 곳곳서 계속되고 있는 전쟁 무력 분쟁서 성폭력 피해를 입고 있는 여성들, 인권유린을 당하고 있는 수많은 약자들에게도 진정한 평화가 오는 2020년이 될 수 있도록 정의기억연대가 열심히 포기하지 않고 활동하겠습니다. 여러분들께서 함께 손잡고 연대해주신다면 반드시 희망은 현실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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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곡점’ 의정 갈등 엔드게임

‘변곡점’ 의정 갈등 엔드게임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구성원의 압도적인 지지로 당선된 수장이 반년 만에 끌려 내려왔다. 막말에 가까운 강한 발언과 제멋대로인 행보가 탄핵을 불렀다. 강성 수장이 물러나면서 변화를 기대하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대화의 문이 열릴 것인가, 더 높은 벽이 쌓일 것인가. 임현택 대한의사협회(이하 의협) 전 회장이 3년 임기를 다 채우지 못하고 탄핵당했다. 지난 5월 취임 이후 6개월 만으로 의협 역사상 2번째, 최단기간 내 불명예 퇴진한 회장이 됐다. 첫 번째는 2014년 4월 임기 1년여를 앞두고 탄핵당한 노환규 전 회장이다. 두 번째 최단기간 의협은 지난 10일 오후 서울 용산구 의협회관서 임시대의원총회를 열고 임 전 회장의 불신임안을 처리했다. 참석 의원 224명 가운데 170명(75.9%)이 찬성했다. 반대는 50명, 기권 4명이다. 전체 대의원 249명 가운데 224명(91.1%)이 표결에 참여했다. 의협 정관에 따르면, 회장 불신임안은 제적 대의원 3분의 2 이상이 출석하고, 출석 대의원 3분의 2 이상이 찬성하면 가결된다. 지난 3월 임 전 회장은 선거서 유효 투표수 3만3084표 중 2만1646표를 받아 당선됐다. 65.43%의 압도적인 지지다. 의협 회장 선거는 정부의 의대 정원 증원 발표로 의정 갈등 수위가 높아지고 있을 무렵에 치러졌다. 전공의가 병원을 떠났고 정부가 ‘2000명’을 강조하던 시기였다. 의협 회원들은 강성 중의 강성으로 분류되는 임 전 회장에게 힘을 실었다. 임 전 회장의 어깨에 너무 힘이 들어갔던 것일까? 임 전 회장의 언행은 사사건건 도마 위에 올랐다. SNS에 올린 글, 공식 석상서 했던 발언 등이 막말 논란으로 번졌고, 단식투쟁 등의 행보는 ‘쇼’라는 비판을 받았다. 무엇보다 박단 대한전공의협의회(이하 대전협) 비대위원장과 갈등을 빚으면서 의료계 내부 분열을 조장한다는 지적이 뼈아팠다. 임 전 회장이 8개월 동안 보여준 모습은 고스란히 탄핵 사유가 됐다. 의협 회원 사이에서는 임 전 회장이 SNS로 막말과 실언을 해 의사단체의 명예를 훼손했다는 비판이 일었다. 또 ‘임 회장이 전공의 지원금을 빼돌렸다’는 허위 비방 글을 올린 시도의사회 임원에게 고소 취하 대가로 1억원을 요구한 사실이 녹취록을 통해 알려져 논란이 불거졌다. 특정 인물에 대한 수위 높은 비판은 여론의 역풍을 불렀다. 장상윤 대통령실 사회수석을 겨냥해 “정신분열증 환자 같은 개소리”라고 비난하는 글을 올렸다가 환자를 비하했다는 지적을 받았다. 임현택, 6개월 만에 탄핵당해 막말 논란·의대 증원 못 막아 또 2021년 한 의사가 80대 환자에게 ‘맥페란’ 주사제를 투여한 뒤 부작용이 나타나 기소된 재판에 대해서도 도 넘는 발언을 쏟아냈다. 이른바 ‘맥페란 재판’ 항소심서 판사가 1심의 금고 10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은 해당 의사의 항소를 기각하자 “이 여자 제정신입니까?”라는 글을 SNS에 올린 것이다. 임 전 회장의 발언에 법원은 이례적으로 “재판장의 인격에 대한 심각한 모욕일 뿐 아니라 국민의 신뢰를 크게 훼손할 수 있는 매우 부적절한 행동”이라고 공개적으로 유감을 표명했다. 의대 정원 증원 집행정지와 관련해 기각·각하 결정을 내린 재판장이 ‘회유’받았을 것이라는 주장으로도 입길에 올랐다. 서울고등법원 재판부가 결정을 내린 다음 날 한 라디오 프로그램에 출연해 재판장의 실명을 거론하면서 “지난 정권에서는 고법 판사들이 차후 승진으로 법원장으로 갈 수 있는 그런 길이 있었는데 제도가 바뀐 다음에는 그런 통로가 막혀서 이분이 아마 어느 정도 대법관에 대한 회유가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있다” 말했다. 서울고법은 법원 명의로 입장문을 내고 “해당 단체장의 아무런 객관적 근거가 없는 추측성 발언은 재판장의 명예와 인격에 대한 심대한 모욕”이라면서 “사법부 독립에 관한 국민의 신뢰를 현저히 침해할 수 있는 매우 부적절한 언사다. 깊은 유감을 표명한다”고 밝혔다. 여기에 결정적으로 정부의 2025학년도 의대 증원을 막지 못한 점, 간호법 제정을 저지하지 못한 점이 탄핵 사유로 꼽혔다. 임 전 회장은 총회를 앞두고 의사 회원들에게 사과하고 페이스북 계정을 삭제하는 등 재신임을 호소했지만 반전은 없었다. 회장을 탄핵한 의협은 비대위원회 체제로 전환하고 지난 13일 새로운 회장 선거 전까지 단체를 이끌 비대위원장을 뽑았다. 그 결과 박형욱 대한의학회 부회장이 1차 투표서 총 유효 투표수 233표 중 123표(52.8%)를 얻어 과반으로 당선이 확정됐다. 임기는 내년 1월 차기 회장이 선출될 때까지다. 뒤늦게 호소했지만… 박형욱 비대위원장은 “정부는 의료 파탄이란 시한폭탄을 장착해놨다”며 “정말 대화를 원한다면 정부는 먼저 시한폭탄을 멈춰야 한다. 그래야 진정한 대화가 가능하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비대위원들의 합의에 기초해 입장과 행동을 결정할 것”이라며 “비대위 운영서 소외돼왔던 전공의들과 의대생들의 견해가 충분히 반영될 수 있게 하겠다”고 소감을 밝혔다. 임 전 회장이 물러나고 새로운 비대위원장이 등장하면서 의협의 투쟁 방향에 변화가 생길 가능성이 커졌다. 일각에서는 의협의 이번 행보를 의정 갈등의 중요한 변곡점으로 보고 있다. 강성 회장을 필두로 정부와 강하게 대립했던 이전 모습서 벗어나 대화에 참여할 것이라는 의견과 이전보다 더 수위 높은 대정부 투쟁이 예상된다는 의견으로 갈리는 중이다. 후자의 배경에는 대전협이 있다. 앞서 박단 비대위원장 등 전공의 70여명은 전날 의협 대의원들에게 “비대위원장으로 박형욱 교수를 추천한다”는 메시지를 보내 공개 지지 의사를 드러냈다. 대의원회서도 박단 비대위원장의 공개 지지에 대해 경고하는 등 잡음이 일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대전협의 지지를 등에 업은 박형욱 비대위원장이 당선되면서 전공의의 영향력이 상대적으로 커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됐다. 의협과 대전협의 공조가 본격화될 것이라는 관측이 나오는 이유다. 문제는 양측의 교류가 정부와의 대화로까지 이어질 수 있느냐는 점이다. 박형욱 비대위원장은 당선 소감부터 정부의 태도 변화를 요구하고 나섰다. 또 윤석열 대통령의 변화도 필요하다고 언급했다. 의정 갈등서 줄곧 선봉에 선 전공의들은 ‘의대 정원 증원 백지화’라는 요구사항서 앞으로도 뒤로도 움직인 적이 없다. 전공의의 행보는 의대생, 의대 교수 등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영향력 커진 전공의 단체 의료계가 전공의 중심으로 굴러가고 있는 셈이다. 실제 대전협은 지난 11일 출범했던 여야의정협의체(이하 협의체)에 대해서도 부정적인 태도를 보인다. 협의체는 야당인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이 불참하고 의료계에서는 학술 단체인 대한의학회와 의대 학장 모임인 한국의과대학·의학전문대학원협회(KAMC)만 참석하는 등 ‘반쪽 출범’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협의체의 운영 기한은 올해 말까지로, 다음 달 22~23일 전에 의미 있는 결과를 낼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는 태도다. 하지만 박단 비대위원장은 협의체에 대해 ‘무의미하다’고 평가했다. 그는 협의체가 첫발을 뗀 11일 SNS에 “국민의힘 한동훈 대표는 전공의와 의대생, 당사자 없이 대화나 하겠다는 한가한 소리를 하고 있다”며 “한 대표는 2025년 의대 모집 정지와 업무개시명령 폐지에 대한 입장부터 명확히 밝히시길 바란다”고 일갈했다. 이어 “눈치만 보며 뭐라도 하는 척만 하겠다면 한동훈의 ‘여야의정 협의체’ 역시 임현택 전 의협 회장의 ‘올바른 의료를 위한 특별위원회(올특위)’와 결국 같은 결말일 것”이라고 우려했다. 올특위는 의료계의 입장을 하나로 모으기 위해 의협 주도로 구성한 범의료계 특별위원회다. 전공의와 의대생이 해당 위원회에 불참하면서 파행 운영되다 지난 7월 해체됐다. 정부는 협의체서 의료계가 제안한 내용에 대해 “진정성 있게 검토하겠다”는 견해를 밝혔다. 지난 11일 협의체서 의료계는 한국의학교육평가원 자율성 보장, 추가 합격 제한 등을 통한 2025학년도 의대 선발 인원 축소 등을 제안한 것으로 알려졌다. 정윤순 보건복지부 보건의료정책실장은 지난 14일 의사 집단행동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이하 중대본) 회의를 주재하면서 “마주 앉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린 만큼 활발한 대화와 소통을 통해 누적된 갈등을 해소하고 신뢰를 회복해 국민이 원하는 결과를 끌어낼 수 있길 기대한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의협과 전공의 등 다른 의료계 단체의 참여를 호소했다. 박단 공개 지지 새 비대위원장 강경 투쟁이냐 VS 노선 변화냐 의료계 내부 상황은 크게 바뀌었지만 향후 상황은 여전히 ‘시계 제로(0)’ 상태다. 임 전 회장과 박단 비대위원장 간 갈등의 불씨도 여전히 살아있다. 대전협은 임 전 회장의 탄핵을 공개적으로 요청하는 등 ‘(임 전 회장과)같이 갈 수 없다’는 뜻을 분명히 밝힌 바 있다. 실제 대전협은 임 전 회장의 탄핵을 요청하면서 “이해와 소통이 가능한 새로운 회장을 필두로 의협과 대전협 두 단체가 향후 상호 연대를 구축할 수 있길 기대한다”는 입장문까지 냈다. 임 전 회장의 탄핵안 가결 직후 박 비대위원장이 “결국 모든 길은 바른 길로”라는 내용의 SNS 글을 올리기도 했다. 문제는 임 전 회장이 박단 비대위원장을 상대로 반격을 진행하고 있다는 점이다. 임 전 회장은 탄핵 사흘 만에 닫았던 페이스북 계정을 다시 열고 “박단과 그 뒤에서 박단을 배후 조종해 왔던 자들이 무슨 일을 해왔는지 전 의사 회원들에게 아주 상세히 밝히겠다”며 박단 비대위원장을 저격하는 글을 올렸다. 그러면서 “의협 대의원회 비대위원장과 의협 회장 선거가 더 이상 왜 필요한가”라면서 “박단이 의협 회장 겸 비대위원장을 맡아 모든 권한과 책임하에 의료 농단을 해결하면 된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지지해주셨던 모든 분에게 우선 사과의 말씀을 드린다”며 “이유가 어떻든 회장 취임 전부터 탄핵하겠다고 마음먹고 있던 자들에게 빌미를 주어 넘어간 것 자체가 제 잘못”이라고 주장했다. 또 의협의 근본적인 개혁의 첫걸음으로 의협 대의원회 폐지 등을 내용으로 하는 민법상의 사원총회를 개최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사원총회는 민법에 규정된 사단법인의 최고의사결정 기관이다. 의협 최고의결기구로 알려진 대의원총회보다 상위에 있고 정관의 규정으로 폐지할 수 없다. 사원총회는 이사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경우나 총 사원 5분의 1 이상이 회의의 목적 사항을 제시해 청구하는 경우 소집될 수 있다. 반격 시작 내부 갈등? 올해 2월 시작된 정부와 의료계의 갈등이 10개월째로 접어들었다. 온갖 말이 오갔지만 되짚어보면 조금도 좁혀지지 않은 평행선 상황이 계속되는 모양새다. 정부와 의료계의 대치 상황이 길어질수록 ‘의료 붕괴’는 가시화되고 있다. 한 의료계 관계자는 이렇게 말했다. “이제는 정말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jsjang@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