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시사 취재1팀] 함상범 기자 = “어느 순간 연기는 그냥 제가 짝사랑하는 존재라고 받아들였던 것 같다. 그래서 언제든지 버림받을 수 있다는 마음으로 연기를 짝사랑해왔다. 절대 그 사랑은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게 제 원동력이었던 것 같다. 이 상을 받아서 사랑이 이뤄졌다고 생각하지 않겠다. 뻔한 말이지만 앞으로도 묵묵히, 정말 묵묵히 걸어가 보겠다. 지금처럼 씩씩하게 짝사랑하겠다.”
배우 조여정이 지난달 21일 열린 제40회 청룡영화상서 남긴 수상 소감은 많은 사람들에게 유의미하게 회자되고 있다.
영화 <방자전> <후궁> <인간중독>을 비롯해 유수의 작품서 훌륭한 연기를 선보여온 것은 물론 <기생충>서 최고의 퍼포먼스를 보여준 그였기에 겸손함이 순수하게 담긴 위 발언은 감동을 안겨줬다.
칸국제영화제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기생충>서 순수하고 밝다 못해 순진하기까지 한 재벌집 사모님 연교를 귀여우면서도 독특하게 표현해낸 조여정은 국내서 권위를 인정받는 청룡영화상 여우주연상을 수상하면서 배우로서 진일보했다.
누구나 인정할 수밖에 없었던 좋은 연기를 오랜 기간 천천히 갈고 닦아온 그였기에 대중과 동료 관계자들 대다수가 그의 수상을 축복했다.
축복받는 자리서 연기에 대한 짝사랑을 고백한 조여정의 다음 행보는 KBS2 수목드라마 <99억의 여자>다.
큰 상을 받고 숨 고르기를 하면서, 규모가 큰 대작이 나올 때까지 기다리는 행보를 할 수 있었음에도 조여정은 오히려 한 발 빠르게 새로운 인물을 움켜쥐었다. <99억의 여자>가 그만큼 그의 마음을 사로잡았기 때문이다.
이 드라마서 조여정은 가난과 폭력으로부터 방치돼 절망밖에 남지 않은 삶을 살아가는 정서연을 연기한다. 정서연은 껍데기밖에 남지 않은 인생서 한줄기 빛 같은 99억원과 마주하게 되면서 새로운 인생을 살고자 하는 인물이다. <기생충> 연교의 밝고 귀여운 이미지를 버리고 핏빛조차 없는 무기력한 여성으로 변신할 전망이다.
조여정은 3일 오후 2시 서울 라마다호텔서 열린 <99억의 여자> 제작발표회서 “밝고 순수하고 허당 기질이 있는 캐릭터를 연기했었다. 배우들은 정반대 캐릭터를 하고 싶은 마음이 있다. 서연의 삶은 상상하기도 어렵고 가늠하기도 어렵고 그런 삶인데 그냥 해보고 싶었다. ‘이렇게까지 힘든 삶은 어떻게 될까’라는 생각이 들었고, 그 과정서 담담하고 대범한 서연에게 매력을 느꼈던 것 같다”고 이 작품을 선택한 이유를 설명했다.
이어 “이 시대를 살고 있는 내가 절망의 끝에 있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서연이를 보면서 위로를 받았으면 한다. 큰 돈이 있다고 해서 내 삶이 나아지는 게 아니라는 걸 알았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꼭 <기생충>을 차치하더라도 그의 연기는 언제나 호평에 가까운 평가만 남았다. <방자전>에선 기존의 편견을 깨고 섹시한 춘향을, <인간중독>에서는 아이를 갖고 싶어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는 반면 여자로서의 매력은 뒤떨어지는 이숙진을, <후궁>에선 사랑하는 사람을 두고 권력과 욕망으로 점철된 궁에서 후궁으로 살아가야 했던 화연을, tvN <로맨스가 필요해>에선 평소 발랄하고 발칙하나 사랑 앞에서 어쩔 줄 모르는 선우인영을 훌륭히 표현했다.
이 외에도 다수의 작품서 조여정은 언제나 좋은 얼굴과 연기로 대중과 마주했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의 재능보다는 주위의 배려에 공을 돌렸다.
조여정은 “배우라면 다 그럴 것 같다. 본인 연기가 아쉬울 것이다. 저는 아쉬운 정도가 아니라 정말 마음에 안 든다. 이게 발전해 나가는 과정 아닐까 싶기도 하다. 저는 연기를 힘겹게 해나가고 있는데, 아마도 제가 가진 능력보다 같이 하는 감독 배우들의 도움을 받아서 좋은 모습이 나오는 것 같다. 제가 부족함에도 배우 분들 믿고 던지기 때문에 좋은 모습으로 보여지는 것 같다”고 말했다.
이 드라마에는 조여정을 비롯해 남편 홍인표 역으로 정웅인, 비밀을 파헤치는 형사 강태우에 김강우, 서연의 오랜 친구이자 재벌가 딸 윤희주 역의 오나라, 윤희주의 남편 이재훈 역의 이지훈이 출연한다. 특히 홍인표를 맡은 정웅인은 “조여정과의 연기를 함께하는 게 영광스럽다”고 언급했다.
정웅인은 “청룡영화상을 보는데 난 여정이가 못 받을 줄 알았다. 다른 쟁쟁한 후보들이 많아서”라고 농담을 던진 뒤 “호명이 되는 순간 여정이랑 앞으로 연기를 잘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제가 다 긴장했다. 여우주연상이라는 상은 상대도 긴장하게 만든다. 조여정은 얼굴도 손도, 발도 작은 배우인데 이번에 큰 배우가 됐다. 가문의 영광이다. 여우주연상 받은 배우와 어떻게 연기를 해보겠나. 여정이 옆에 딱 붙어서 <기생충>처럼 10년간은 기생하려고 한다. 많이 괴롭히는 역할이지만 귀엽게 봐주시길 바란다”고 말했다.
정웅인이 농담처럼 던진 말이지만 실제로 청룡영화상 여우주연상의 무게는 가볍지 않다. 그 자리를 거쳐 간 배우들 모두 주위의 시선도 달라지며, 스스로도 그 상의 무게가 의식된다고 했다. 2014년 상을 받은 배우 천우희는 수상 이후 시간이 지나면서 자신을 바라보는 달라진 시선이 부담스러웠었다는 말을 종종 하기도 했다.
그런 분위기를 충분히 인식한 듯 조여정은 더욱 낮은 자세로 연기에 임하겠다고 약속했다. 큰 상을 받았다고 해서 짝사랑의 완성이 되는 착각에 빠지지 않고 더 진한 ‘짝사랑’을 하겠다는 각오가 엿보였다.
조여정은 “이번 상은 연기를 완성하는 과정서 힘내라고 주신 상이라고 생각한다. 좋은 영화 다음에 작품을 바로 선택한 것을 잘했다고 생각한다. 사실 외부서 보기에 성공이라고 생각되는 작품 이후에 바로 다음 작품을 선택하는 것이 부담됐지만 그래도 좋은 선택이라고 생각한다. 배우는 불완전한 존재인데, 현장서 많은 사람들의 축하를 받고 또 연기를 하면서 우왕좌왕 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 같다. 앞으로도 바로바로 계속 보여주면서 나아가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고 마무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