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붙은’ 오일머니 10조 쟁탈전

‘석유왕자’ 왔다 가니 재계가 들썩∼

[일요시사 취재1팀] 김태일 기자 = 사우디아라비아 실권자인 무함마드 빈 살만 압둘 아지드 알사우드 왕세자가 한국을 찾았다. 문재인 대통령, 이낙연 국무총리, 그리고 5대 기업 총수까지 모두 붙었다. ‘기회의 땅’ 사우디를 향한 세일즈에 박차를 가한다는 계산이 깔렸다. 빈 살만 왕세자는 한국 기업에 10조원 규모의 파격적인 경제협력을 약속했다. 
 

사우디아라비아의 실권자인 무함마드 빈 살만 압둘 아지드 알사우드 왕세자가 지난 26일, 1박2일 일정으로 방한해 파격적인 경제협력 보따리를 풀었다. ‘미스터 에브리싱’(Mr. Everything)이라고 불리는 빈 살만 왕세자의 공식 직함은 사우디 부총리 겸 국방부장관이다. 

이유 있는 
극진 예우

그는 왕위 계승 서열 1위로, 연로한 부친을 대신해 사실상 사우디를 지배하고 있는 인물이다. 소프트뱅크비전펀드를 통해 우버 등 세계적인 혁신 기업의 사실상 최대주주 지위를 갖고 있을 뿐만 아니라, 전 세계 에너지 시장에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어 첫 방한한 그의 일거수일투족에 큰 관심이 쏠렸다. 

문재인 대통령은 청와대서 빈 살만 왕세자와 회담을 가졌다. 양측은 원자력 에너지의 평화적 이용 분야서 지속적으로 협력할 것을 강조했다. 사우디는 사우디 최초의 상용원전 사업의 입찰에 한국이 계속 참여해온 것을 환영했다. 

또 양국의 경제 협력 수준 및 교역 규모 등을 감안할 때 상호 투자를 확대해나갈 수 있는 여지가 매우 크다는 데 주목하고, 호혜적 투자가 지속적으로 창출될 수 있도록 상호 투자 가능성을 적극 모색해나가기로 합의했다. 사우디가 진행 중인 네옴(NEOM) 프로젝트, 홍해 프로젝트, 키디야(Qiddiya) 엔터테인먼트 신도시 건설 등 대규모 프로젝트의 성공을 위해 긴밀히 협력해나가기로 했다. 


문 대통령은 ‘사우디 비전 2030’에 대한 대한민국 정부의 지지를 표명했다. 양측은 한-사우디 비전 2030 위원회를 통한 전략적 파트너십 강화가 상호이익이 된다는 확신을 재확인했다. 

서울과 리야드에 비전 오피스(Vision Realization Office) 개설 등과 같은 노력을 통해 한-사우디 비전 2030 파트너십의 실현을 위한 협력을 가속화하기로 했다. 양국 협력을 4차 산업혁명 시대의 요구에 부응하는 신산업 분야로 다변화하고 확대해나가는 것에도 합의했다. 

사우디 왕세자 방한…이례적인 환대 왜?
정부·기업 MOU 10건…미래차·수소 협력

또 양측은 친환경 자동차, ICT(정보통신기술), 5G(세대) 등 미래지향형 첨단 산업 분야를 중심으로 양국 청년 일자리 확대를 위해 함께 노력해나가기로 했다. 특히 사우디는 세계 시장 내 안정적인 원유 공급을 보장하고 대한민국의 원유 및 석유 제품 수요를 충족하며 공급 교란 상황으로 인한 부족분을 대체한다는 약속을 확인했다.

문 대통령은 한국 내 투자, 특히 에너지·정유 및 석유화학 분야의 투자 추진에 대한 사우디 측 관심을 평가했다. 이러한 관심은 최근 사우디 아람코의 현대 오일뱅크 정유 공장 투자와 SABIC과 SK 간 석유화학 합작투자로 이어졌다. 

빈 살만 왕세자는 현대 중공업의 라스 알 카이르 지역 킹 살만 조선소 건설 참여 등 사우디 비전 2030 내 주요 프로젝트에 대한 한국 기업의 기여를 언급하며, 사우디 내 한국의 투자 건수 증가 및 관련 파트너십을 평가했다. 
 

▲ 문재인 대통령과 반 살만 사우디 왕세자

문 대통령과 빈 살만 왕세자는 양측 간 합의 사항의 성공적인 이행을 위해 한-사우디 간 공동위원회, 한-사우디 비전 2030 위원회 등 기존 고위급 소통 채널을 더욱 발전시켜나가기로 했다. 특히 올해 신설된 차관급 국방협력 위원회를 통해 국방 분야 협력도 더욱 증진시키기로 합의했다. 


이날 양국 정부는 총 83억달러(약 9조6000억원) 규모 계약과 양해각서(MOU)를 체결했다. 양국은 수소차와 연료전지는 물론 수소생산·저장·운송 등 전 주기에 걸친 수소경제를 공동 추진하기로 했다. 이를 통해 정부는 친환경차, 수소에너지, 수소연료전지 등에서 중동 시장 진출을 위한 발판을 마련할 수 있게 됐다.

정부 간 MOU 외에도 양국 석유화학, 조선, 자동차 등 기업들도 계약과 MOU를 총 8건 체결하는 성과를 올렸다. 

10조 규모 계약
노리는 기업들

사우디 국영석유회사 아람코는 에쓰오일을 통해 2024년까지 60억달러를 투자하기로 했다. 5조원을 들여 이날 준공 기념식을 진행한 에쓰오일의 복합석유화학시설에 이은 대규모 추가 프로젝트다. 이를 위해 에쓰오일은 울산시 온산공장서 가까운 부지 약 40만㎡를 현대중공업으로부터 매입했다.

현대자동차는 아람코와 수소에너지 및 미래차 분야의 기술협력 양해각서를 체결했다. 양사가 국내에 수소충전소를 건설하고 사우디 내 수소전기차 보급 확대에 나선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현대중공업은 아람코, 사우디 산업투자공사와 함께 사우디 내 선박엔진공장을 설립하는 합작투자 계약을 체결했다. 총 4억2000만달러를 투자해 킹살만 조선소에 엔진공장을 세우게 된다.

SK가스는 사우디 석유화학기업인 APC의 자회사인 AGIC와 사우디 주바일에 프로필렌 등의 공장을 건설하는 사업의 타당성 조사에 나서기로 했다. 예상되는 합작투자 금액은 18억4000만달러다.

GS는 아람코와 석유 및 가스, 석유 화학 등 에너지사업뿐 아니라 건설, 무역 등에서 새로운 사업 기회를 모색하는 내용의 협약을 체결했다. 
 

▲ (사진 왼쪽부터)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정의선 현대자동차 부회장, 최태원 SK그룹 회장

효성은 탄소섬유 공장 설립 검토를 위한 MOU를 체결했다. 효성과 아람코는 탄소섬유 생산 기술 개발과 적용에 협력해 향후 사우디아라비아나 국내 등에 탄소섬유 공장을 신·증설하는 방안을 적극 검토하기로 했다. 그 외 효성이 개발한 첨단신소재 폴리케톤, PPDH 등의 화학분야와 ESS, 송·배전 그리드 등 전력분야서도 상호협력을 강화할 예정이다.

재계 총수들도 접촉면을 넓히는 데 적극적이었다. 빈 살만 왕세자와 국내 5대 그룹 총수들은 지난 26일 밤 서울 한남동서 깜짝 회동을 했다. 문재인 대통령과 빈 살만 왕세자가 청와대 만찬을 가졌던 직후다.  

한국을 대표하는 기업 총수 5명은 이날 오후 7시45분쯤 삼성의 영빈관 격인 서울 한남동 승지원에 도착했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을 비롯해 정의선 현대차그룹 수석부회장, 최태원 SK 회장, 구광모 LG 대표,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이었다. 대기업 총수들이 이곳에 한꺼번에 모인 건 9년 전인 2010년 7월 이후 처음 있는 일이다. 

9년 만에…
총수들 집결


빈 살만 왕세자가 승지원에 도착한 시간은 이날 오후 8시45분쯤. 왕세자가 도착하기 수십분 이전부터 검은색 정장을 입은 경호 인력과 경찰이 승지원 주변을 정리했다. 삼엄한 경비 속에서 사우디 왕실 소속 취재진 역시 승지원에 입장하지 못했다.  

사우디 왕세자와 5대 기업 오너는 승지원서 약 15분간 티타임을 가졌다. 앞서 청와대 오찬에선 짧은 대화밖에 나누지 못한 탓에 따로 마련된 자리라고 전해진다. 티타임이 끝나고 오후 9시20분을 전후해 정 수석부회장, 최 회장, 구 대표, 신 회장 등 4대 기업 총수의 의전 차량이 먼저 승지원 안으로 들어가 이들을 태우고 나왔다.
 

▲ 구광모 LG그룹 회장,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

이들 오너 4명이 나간 뒤 승지원의 주인 격인 이재용 부회장과 빈 살만 왕세자, 둘이서만 단독 면담을 했다고 한다. 

빈 살만 왕세자와 이 부회장은 사우디가 현재 의욕적으로 추진 중인 스마트 시티 사업인 ‘네옴(NEOM) 프로젝트’ 등을 놓고 약 10분간 이야기를 나눴다. 스마트시티 및 경제자유구역을 골자로 한 네옴 프로젝트의 규모는 5000억달러(약 600조원)다.

재계 관계자는 “경호 문제도 있고 과거 승지원이 해외 귀빈들을 모시는 영빈관으로 사용됐다는 점을 고려한 것으로 추측된다”고 말했다. 

승지원서 대기업 총수들이 모인 건 2010년 7월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단 만찬 이후 처음이다. 당시 사의를 표명한 조석래 효성그룹 회장의 뒤를 이을 전경련 회장을 추대할 목적으로 이건희 삼성 회장이 전경련 회장단을 승지원에 초청했다.


당시 만찬에는 고(故)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 최태원 SK그룹 회장,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 등이 참석했다. 

그로부터 9년 뒤 세대교체가 이뤄진 5대 기업 리더가 무함마드 왕세자와 만나기 위해 삼성 승지원에 모였고, 이 모임을 이재용 부회장이 주재한 성격이 짙었다는 게 재계의 분석이다.

5대 그룹 총수 총출동…한밤 중 회동 내용은?
재산 1246조7375억…세계 1위보다 9배 많아

빈 살만 왕세자가 한국 기업과 손을 잡은 것에는 여러 의미가 있다. 우선 1970년대 중동 건설 과정서 쌓은 한-사우디 관계를 미래지향적 협력관계로 발전시킨다는 것이다. 여기에 한국 산업의 미래 먹거리로 꼽히는 수소경제·ICT 분야 협력이 가시화됐다는 점도 중요하다. 양국은 원자력 기술·안전 분야서도 지속적인 협력을 약속했다. 

재계에선 빈 살만 왕세자의 대규모 경제협력 약속이 한국 경제에 활력을 불어넣기를 기대한다. 영업이익 규모만 285조원(2018년 기준)인 ‘큰손’ 아람코의 직접투자뿐 아니라, 중동 등 신시장 개척의 마중물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란 분석에서다. 

아람코와 협력하기로 한 대기업 관계자는 “미국의 이란 봉쇄로 사우디에 대한 원유 의존도가 높아졌고, 비전 2030을 통해 사우디가 국가적 투자계획을 내놓고 있어 다양한 사업이 가능한 기회”라고 말했다. 
 

한 무역학과 교수는 “중동 비즈니스엔 많은 변수가 작용한다”며 “사우디 안팎의 정치적 상황에 흔들리지 않고 실질적 상호 이득을 끌어낼 수 있도록 지속해서 관리하고 대응해야 한다”고 말했다.

빈 살만 왕세자의 방문과 함께 그의 재산 규모에 대해서도 세간의 관심이 쏠렸다. 국내서 이름을 알린 맨체스터 시티 FC의 구단주 ‘만수르’보다 35배 많은 재산을 소유한 것으로 알려진 빈 살만 왕세자의 재산 규모는 8500억파운드, 한화로 1246조7375억원. 

2019년 <포브스>가 발표한 세계 억만장자 1위인 아마존 창업자 제프 베이조스의 1310억달러보다 약 9배 가까이 많다. 

상상도 못할 재산
만수르보다 35배

그러나 빈 살만 왕세자의 재산은 사우디의 사생활 보호법으로 정확히 파악하기 어렵고, 왕가의 재산과 분리하기 힘들어 억만장자 명단에는 오르지 못했다. 어마어마한 재산가이자 사우디아라비아의 실권을 쥐고 있는 그가 한국의 주요 기업체와 회동을 가지며 관심을 표한 이번 방한이 어떤 결과로 이어질지 귀추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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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엔진 멈춘 3억 마이바흐 미스터리

[단독] 엔진 멈춘 3억 마이바흐 미스터리

[일요시사 취재1팀] 김성민 기자 = 서울 소재 H건설사 대표가 타는 메르세데스 벤츠의 최고급 사양인 마이바흐가 구매한 지 3년 만에 엔진 고장으로 멈췄다. H사 대표 박모씨는 2022년 말 메르세데스벤츠코리아와 한성자동차를 상대로 수리비 및 대차료 지급 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무상 수리해야 한다고 했던 1심 재판부는 급기야 ‘벤츠의 책임이 없다’는 판결을 내렸다. 2019년식 ‘마이바흐 S560 4MATIC’은 2022년 9월13일 오전 11시, 박씨의 운전기사가 서울 용산 한강로를 주행하던 중 계기판에 엔진 경고등이 켜지면서 차체 진동과 함께 엔진이 멈췄다. 곧바로 차량을 한성자동차 성동서비스센터에 입고했으나 진단은 충격적이었다. 침수차 의심 수리 나 몰라라 “엔진 연소실에 물이 들어가 부품이 손상된 것으로 보인다. 침수 차로 의심된다”며 무상 수리가 어렵다는 것이었다. 이에 박씨와 자동차 감정사는 반대 의견을 제시했다. 그날은 폭우나 침수와 무관한 날씨였으며 정상 주행 도중 발생한 차량 고장이었기 때문이다. 원고인 H사는 “벤츠코리아가 제공하는 ‘통합서비스패키지(ISP)’ 보증에 따라 3년 또는 10만km 이내의 결함은 무상 수리 대상”이라고 주장했다. 이에 1심 재판부(서울중앙지법 민사47단독, 2024년 7월23일)는 “침수나 연료 혼유 등 외부 요인으로 단정할 증거가 부족하다. 한성자동차는 ISP 약정에 따라 엔진 결함을 무상 수리해야 한다”며 원고의 손을 들어줬다. 그러면서 벤츠의 수입사인 한성자동차에 대해 월 400만원의 대차료 배상을 명령했다. 법원은 독립 감정인 강대공씨를 지정해 정밀 감정을 실시했다. 강씨의 감정서에는 “침수 차량에서 보이는 오염 흔적이 없다. 냉각수(부동액) 누출 흔적도 발견되지 않았다”며 “엔진 내부 수분은 외부 요인이나 정비 과정에서 유입됐을 가능성이 있다”고 분석했다. 또 추가 사실조회 회신에서도 “혼유(연료 내 수분 혼입) 여부는 감정 범위를 벗어나며, 침수가 아닌 요인으로 인한 수분 유입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밝혔다. 2심(서울중앙지법 제8-3민사부)에서 피고 측은 반격했다. 벤츠코리아의 법률대리인 김성진 변호사(김앤장 법률사무소)는 지난 8월27일 제출한 준비서면에서 “ISP는 차량 ‘결함’이 발견된 경우에만 적용된다. 외부 수분 유입으로 인한 손상은 명백히 예외 사항이며 제조사 귀책이 없는 이상 무상 수리 의무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한성자동차 측(법무법인 세종)도 항소이유서에서 “ISP는 제조상의 하자에 국한된 품질보증 계약이다. 이번 사안은 ‘우발적 손상’으로 보증 대상이 아니다”라고 반박했다. 서울중앙지법 민사8-3부는 지난 9월26일, “한성자동차의 패소 부분을 취소하고, 박씨의 청구를 기각한다”고 판시했다. 2심 판결은 “외부 요인, 제조 결함이 아니”라며 1심을 전면 뒤집은 것이다. 항소심 재판부는 “외부 수분 유입으로 인한 손상은 차량 제조사 귀책 사유에 해당하지 않는다. ISP는 ‘제조 결함’에 한정된 보증이다. 한성자동차의 패소 부분을 취소하고 원고의 청구를 기각한다”고 밝혔다. 즉, 법원은 이 사건을 ‘차체·부품 결함’이 아닌 ‘사용 중 발생한 외부 요인’으로 결론 내린 것이다. 주행 중 경고등 켜지고 진동 후 엔진 스톱 감정 결과 “누수 없음, 외부 수분 가능성” 결국 박씨는 3년에 걸친 법정 다툼 끝에 패소했다. 따라서, 한성자동차는 더 이상 수리 의무를 부담하지 않게 됐으며, H사의 항소도 기각됐다. 이번 재판의 핵심 쟁점은 ‘수분 유입의 원인’이 제조 결함이냐, 외부 요인이냐였다. 법원은 “차체·부품의 결함으로 인한 냉각수 누수가 없었고, 외부 요인 가능성이 더 크다”고 판단했다. 결국, 제조물 책임(PL법)에 따른 보증 범위가 아닌 사용·관리상의 문제로 결론이 난 셈이다. 이번 판결은 ‘결함’의 해석 범위를 좁혀 정의한 사례다. 즉, ‘사용자 과실이 아닌 상황’이라도 차체·부품 자체의 결함이 입증되지 않으면 보증이 적용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자동차 전문가들은 “소비자 입증 책임만 더 무거워졌다”며 “ISP나 제조사 보증이 소비자 보호장치로 설계됐지만, 현실적으로 ‘결함 입증’의 벽이 너무 높다. 이번 판결은 소비자가 과실이 없더라도 제조사 책임을 묻기 어렵다는 선례가 될 수 있다”고 비판했다. 법조계 일각에서는 이번 판결을 “제조물 책임법과 민법상 품질보증의 경계선을 명확히 한 판례”로 평가하고 있다. 박씨의 마이바흐는 결국 엔진을 교체하지 못한 채 3년 동안 방치됐다. 이번 사건은 ‘명차’의 기술력보다 보증 체계의 경계선이 어디까지인지를 가늠케 한 사건이다. 소비자는 결함을 주장할 때 ‘입증의 문턱’을, 제조사는 ‘보증의 한계’를 확인했다. 독일 명차 대명사인 벤츠의 전기차는 해마다 폭발하는 배터리 화재로 뉴스를 장식하고 있다. 전기차뿐만 아닌 내연기관 모델 중에서도 최상위급인 마이바흐조차 원인 모를 엔진 고장으로 멈췄지만, 고객과 3년간 법정 다툼을 이어간 회사로 남겨졌다. 1심선 인정 “무상 수리” 벤츠는 고객과 진행한 재판에선 승소했지만, 우리나라 정부의 제재 착수 대상이 됐다. 공정거래위원회는 전기차에 저가 배터리를 쓰고도 고가 배터리를 쓴 것처럼 허위 광고한 혐의를 받는 벤츠코리아에 대한 제재에 착수했다. 공정위의 최종 판단은 벤츠코리아와 벤츠 전기차 이용자 간 진행 중인 법적 분쟁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칠 전망이다. 해당 저가 배터리는 지난해 인천 청라 아파트 지하 주차장 화재가 시작된 전기차에도 쓰였다. 업계에 따르면 공정위는 지난 8월12일, 벤츠코리아를 표시광고법·공정거래법 위반 혐의로 제재해야 한다는 의견을 담은 심사보고서(검찰 공소장에 해당)를 회사 쪽에 발송했다. 벤츠코리아는 자사의 모든 전기차에 중국 1위 배터리 업체인 시에이티엘(CATL)의 배터리가 장착됐다며 허위 사실을 소비자에게 알린 혐의를 받는다. 제휴사 딜러를 상대로 소비자에게 이런 허위 사실을 설명하라고 교육하는 등 소비자를 부당하게 속여 유인한 혐의도 있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EQE 차주들은 벤츠 본사, 벤츠코리아, 공식 딜러사 한성자동차 등 판매사 7곳, 벤츠파이낸셜서비스코리아 등 리스사 2곳을 상대로 손해배상소송을 제기했다. 벤츠 전기차는 지난해 8월1일 인천 청라국제도시 아파트 지하주차장에서 화재 사고를 일으켰다. 당시 충전 중이던 벤츠 전기차 한 대에서 불이 나 인근 차량 87대가 전소되고 783대가 그을러 38억원에 달하는 재산 피해가 발생했다. 당시 주민 23명은 연기를 마셔 병원으로 이송됐으며 화재로 아파트 14개 동 1581가구의 수돗물 공급이 끊기고, 5개동 480가구가 단전돼 승강기 운행이 중단되는 등 입주민 불편이 극심했다. 한때 주민 수백명이 피신하는 등 ‘도심 대형 전기차 화재’의 대표 사례로 기록됐다. 하지만 경찰은 장기간의 감식 끝에 “정확한 화재 원인을 확인할 수 없다”며 ‘원인 불명’ 결론을 내렸다. 수사 결과, 해당 벤츠 전기차의 배터리는 중국 CATL이 제조한 셀을 벤츠가 직접 조립해 만든 배터리팩으로 확인됐다. 현재 국내에서 판매 중인 벤츠 전기차 대부분(EQE, EQS 등)은 중국 CATL 또는 파라시스(Parasis) 배터리를 탑재하고 있다. 2심에선 “책임 없다” EQA 등 극히 일부 모델에만 LG에너지솔루션, SK온 배터리가 사용된다. 이에 공정위는 화재 발생 이후 벤츠코리아에 대한 직권조사를 시행했다. 공정위는 지난해 9월과 지난 1월에 각각 벤츠코리아 본사와 제휴 딜러사에 대한 현장 조사를 벌여 제재가 필요하다는 결론을 냈다. 공정위는 벤츠코리아 추가 의견서를 받고, 위원회 회의를 열어 최종 제재 여부와 수위를 확정할 예정이다. 표시광고법 위반 시 관련 매출액 최대 2%, 공정거래법 위반 시 최대 4% 내에서 과징금이 산정, 제재 강도가 낮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이다. 공정위 제재 착수에도 벤츠의 콧대는 꺾이지 않았다. 벤츠코리아는 “심사보고서의 결론은 당사의 법률적 판단과는 일치하지 않으며 제기된 혐의는 근거가 없다고 보고 있다”며 “추후 심사보고서 내용을 면밀히 검토한 후, 절차에 따라 의견을 제출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그러면서 “공정위 판단을 존중하지만, 회사의 법률적 판단과는 일치하지 않는다”며 “제기된 혐의는 근거가 없다고 보고 있다”는 공식 입장을 발표해 진통이 예상된다. 벤츠 전기차는 지난해 인천 청라 아파트 지하주차장에서 대형 화재를 낸 데 이어, 최근 수원시에서도 유사한 사고를 일으켜 배터리 안정 논란을 다시 불러일으켰다. 지난 10월5일 경찰과 소방에 따르면, 이날 오전 8시4분경 경기 수원시 권선구의 1800세대 규모 아파트 지하 1층 주차장에 서 있던 벤츠 전기차에 불이 났다. 이 불로 관리사무소 50대 직원이 연기를 마셔 병원으로 옮겨졌으며, 주민 수십여명이 명절 전날 오전 한때 대피하는 소동이 벌어졌다. 이 사고로 벤츠 전기차를 포함해 인근 차량 3대가 불에 탔고, 주차장 내부가 그을려 한동안 입주민 출입이 통제됐다. 소방당국은 ‘지하주차장 차량에서 연기가 난다’는 신고를 받고 출동, 펌프차 등 장비 10여대와 소방관 50여명을 투입해 진화 작업을 벌였다. 화재 발생 20여분 만에 연소 확대를 저지했고, 오전 8시43분경 초진에 성공했다. 이후 잔불 정리와 차량 냉각 작업을 거쳐 오전 10시16분에 완진시켰다. 소방 관계자는 “119 신고가 신속했고 출동 거리가 짧아 초기 대응이 빠르게 이뤄져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었다”고 밝혔다. 법원 ‘결함 아님’ 판결 ‘제재 대상’ 벤츠 편든 재판부 소방대원들은 불이 난 차량을 지상으로 끌어올려 열기를 식히는 등 2차 발화를 막기 위한 안전조치를 이어갔다. 현재까지 파악된 바에 따르면, 화재 당시 차량은 충전 중이었던 것으로 확인됐다. 다만 배터리 결함에 의한 발화인지, 전선 또는 충전기 접속부 문제 등 다른 원인에 의한 것인지는 아직 조사 중이다. 경찰과 소방당국은 국립과학수사연구원과 함께 합동감식을 실시해 배터리팩 손상 여부 및 충전 설비 결함을 중심으로 원인을 조사할 예정이다. 화재 차량은 2023년식 EQA-250 모델로 SK온 배터리가 장착된 것으로 알려졌다. 한편 국내 전기차 등록 대수는 지난 9월 기준, 60만대를 돌파했지만 화재 사고 관련 안전 관리는 미흡한 상태다. 국토교통부는 청라 화재 이후 지하주차장 내 전기차 충전소 안전기준 강화안을 추진 중이지만, 구체적인 방재 설비 기준은 아직 확정되지 않았다. 지방자치단체별 안전관리 강화 조례도 제각각이다. 지속되는 품질 문제에 전기차 관련 허위광고 혐의까지 겹치면서 벤츠의 입지가 좁아지고 있다. 일각에서는 “벤츠코리아 설립 이후 최대 위기”라는 평가도 나온다. 여기에 국내 최대 딜러사인 한성자동차 노조의 파업으로 서비스 품질 저하 문제가 불거지며 브랜드 이미지에도 타격이 예상된다. 연일 터진 사고 이전까지 벤츠는 국내 수입 전기차 시장에서 높은 판매량을 기록했다. 소형 전기 스포츠유틸리티차(SUV) EQA·EQB에 이어 전기 세단 EQE·EQS까지 라인업을 확대하며 시장을 선도했다. 2023년에는 전기차 판매량 9282대를 기록하기도 했다. 그러나 2024년 8월 벤츠 EQE 전기차 화재 사고 이후 분위기는 급변했다. 화재 전 월평균 400대 수준이던 판매량은 사고 이후 절반 이하로 급감했다. 한국수입자동차협회(KAIDA)에 따르면 올해 상반기 벤츠 전기차 판매량은 768대로, 전년 동기(2764대) 대비 72.2% 줄었다. 사고 이후 월 판매량은 100~200대에 그치며 반등 조짐을 보이지 않고 있다. 벤츠의 국내 최대 딜러사인 한성자동차의 노조 파업도 새로운 악재다. 수입차 업계는 딜러사와 벤츠코리아가 별개 법인임에도 불구하고 노조 파업으로 소비자 피해가 커지고 있어 결국 벤츠의 이미지 실추로 이어지고 있다고 분석한다. 추락하는 럭셔리카 한성자동차 노조는 지난 7월 31일부터 무기한 총파업에 돌입했다. 2023년 노조 설립 이후 진행된 3년 연속 파업으로, 사실상 매년 파업을 이어오고 있다. 노조는 구조조정과 차량 할인에 영업사원 인센티브를 활용하는 ‘선수당 할인’ 제도 등에 반발하고 있다. 최근에는 일부 정비 인력까지 준법투쟁에 나서면서 서비스 지연도 발생하고 있다. 실제 차량 정비 예약이 당일 일방적으로 취소되는 사례가 잇따르면서 소비자 불만은 커지고 있다. 이로 인해 “벤츠의 사후 관리 부실은 결국 한성자동차 탓”이라는 비판까지 나온다. <smk1@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