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황천우는 우리의 현실이 삼국시대 당시와 조금도 다르지 않음을 간파하고 북한과 중국에 의해 우리 영토가 이전 상태로 돌아갈 수 있음을 경계했다. 이런 차원에서 역사소설 <삼국비사>를 집필했다. <삼국비사>를 통해 고구려의 기개, 백제의 흥기와 타락, 신라의 비정상적인 행태를 파헤치며 진정 우리 민족이 나아갈 바, 즉 통합의 본질을 찾고자 시도했다. <삼국비사> 속 인물의 담대함과 잔인함, 기교는 중국의 <삼국지>를 능가할 정도다. 필자는 이 글을 통해 우리 뿌리에 대해 심도 있는 성찰과 아울러 진실을 추구하는 계기가 될 것임을 강조했다.
“무슨…….”
“할아버지께서 왜 당나라에 뼈와 살을 뿌렸는지 그 의미를 헤아려보란 말이다.”
“제 짧은 머리로는 이해되지 않습니다.”
“할아버지께서 그곳에서 생을 마감하셨다고 당에 항복하신 게냐?”
“그야…….”
헌성이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남건의 뜻
“할아버지께서는 장기적으로 보신 게야.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에 들어가듯이. 여하튼 너는 아버지를 모시고 당으로 투항하여 목숨을 보전할 일이야. 네가 아버지와 신라에 항복한다면 당나라가 더욱 죽이려 안달할 게고. 또 그 압력에 신라가 어찌 대처할지 모르고.”
“무슨 근거로 그리 말씀하십니까?”
“길게 이야기하지 않겠다. 그저 네 아버지에게 그리 전하도록 해라.”
헌성이 무슨 의미인지 모른다는 듯 연정토의 얼굴을 빤히 주시했다.
“결국 네가 네 형 손에 죽음을 맞이하겠다는 이야기냐?”
가만히 남건의 말을 새기던 연정토가 중간에 끼어들었다.
“숙부, 형님이 항복하면 저들은 형님을 앞세우고 고구려 침공을 서두를 것입니다. 여하튼…… 우리 가문을 살리고 아버지의 뜻에 부응하는 길입니다.”
“그렇다면 나도 이곳에 남아 너와 함께 최후의 일전을 벌이도록 하마.”
“아니 됩니다, 숙부. 희생은 저 하나로 족합니다.”
“그건 무슨 소리냐?”
“숙부는 그저 고구려의 신하에 불과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굳이 죽을 이유가 없습니다.”
연정토가 고개를 들어 천장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신라에 자리 잡은 연정토가 저녁 무렵 북녘 하늘을 바라보며 깊은 생각에 빠져 있는 즈음에 하인으로부터 김유신이 방문했다는 전갈을 받았다.
고구려와 관련된 소식을 가지고 오지 않았을까 하는 마음에 급히 대문가로 나서자 하인의 손에 술과 안주를 들리고는 노구의 김유신이 서 있었다.
“바로 들어서시지 않으시고.”
“주인에게 허락을 받아야지요.”
답을 하는 유신의 표정이 밝지 못했다. 그를 살피며 만감이 교차되는 마음을 억누르고 가벼이 미소를 보냈다.
“여하튼 잘 오셨습니다, 안으로 드시지요.”
연정토가 자신의 하인에게 김유신의 하인의 손에 들린 술과 안주를 받으라 하고는 서둘러 안으로 안내했다.
“날씨가 너무 좋아 겸사겸사해서 장군과 함께 술 한잔 하고 싶어 들렀는데 결례는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결례라니 당치 않습니다. 이 모든 게 대장군의 덕인 걸 모르지는 않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고향 집만 하겠습니까?”
“당치 않으십니다. 이 늙은이 결코 대장군의 은혜 잊지 못할 일입니다.”
두 사람의 진심을 감춘 상견례가 이어지기를 잠시 후 하인이 급히 조촐하게 주안상을 마련했다.
“대장군께서 하실 말씀이 있어 어려운 걸음을 하신 듯합니다만.”
연정토가 김유신의 잔을 채우며 무겁게 말문을 열었다. 이어 김유신이 병을 받아들어 연정토의 잔을 채웠다.
“바로 말하겠소.”
말을 꺼내놓고는 유신이 주저하자 연정토가 가벼이 입맛을 다셨다.
“이미 예측하고 계셨겠지만 기어코 신라군이 당나라군의 평양성 함락을 지원하기 위해 진군하기로 하였소.”
연정토가 고개를 돌리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참으로 애석한 일입니다.”
연정토의 눈치를 살핀 김유신이 잔을 들어 마실 것을 권유하자 이어 두 사람은 약속이나 한 듯 동시에 잔을 비워냈다.
미처 안주 먹을 겨를도 없이 이번에는 유신이 술병을 들어 두 개의 잔을 채웠다.
“허면 당나라가 공격을 감행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미 신성이 당나라 수중에 넘어갔다 하더이다.”
“허허.”
연정토가 허탈한지 헛웃음을 흘리고 잔을 비워냈다. 그 모양을 살피던 유신도 천천히 잔을 비웠다.
남건, 자신이 죽어 당나라 견제하도록…
김유신과 연정토 “함께 당을 몰아내자”
“이제 고구려의 패망은 단지 시간문제입니다.”
“돌아가는 상황을 보면 그리 오래가지 않을 듯합니다.”
“그러하시면 대장군께서도 참여하셔야겠습니다.”
유신이 답을 하지 않고 공허한 웃음을 흘렸다.
“무슨 의미인지요?”
“소장은 이번 전투에 참여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그게 무슨, 대장군께서 출정하지 않으신다니요?”
“나이도 나이지만 건강이 허락하지 않는구려. 그래서 왕에게 간곡하게 부탁드렸고 그를 감안하여 그냥 이곳에 남아 있기로 하였습니다.”
그 말의 진위를 파악하기 위함인지 연정토가 침묵을 지켰다.
순간 유신이 천천히 술병을 들어 다시 두 개의 잔을 채웠다.
“이 술을 바라보니 문득 연개소문 대감이 생각납니다.”
연정토가 지속적으로 침묵을 지키자 유신이 잔을 비워내며 다시 입을 열었다.
“다 운명인 게지요, 운명.”
더 이상 침묵을 지키지 않겠다는 의미인지 연정토가 운명을 되뇌며 잔을 비우고 빈 잔을 채웠다.
“형님께서도 자주 그 이야기를 거론하더이다만.”
“소장이 대감을 만났을 때도 그런 이야기를 주더이다.”
유신이 잠시 회상에 잠겨들었다가는 지난날 고구려에서 연개소문과 나누었던 대화의 대강을 상기시켜주었다.
“그 일은 형님 생전에 대충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 여하튼 형님이 살아계셨더라면 이렇게 비참하게 결말을 보지는 않을 터인데.”
“이 모든 게 운명이지요.”
“이미 대장군께서는 그를 알고 있고, 그런 연유로 금번 출정에 빠지시기로 하셨습니다.”
“반드시 그렇다고 이야기 할 수 없소만, 내 연개소문 대감과 굳게 약조한 부분이 있소.”
“약조라면.”
“고구려의 운명이 여기까지라면 이 후가 중요하지요.”
“후라!”
“이제 우리 민족이 대동단결해야 합니다.”
연정토가 민족을 되뇌며 다시 잔을 비워내자 유신이 잔 두 개를 채웠다.
“장군.”
“말씀하시지요.”
“이제 장군과 제 역할을 찾아야지요.”
“형님의 유지를 받드는 일 말입니까?”
“당나라가 고구려까지 멸망시킨다면 그리 오래지 않아 저들의 야욕을 드러낼 것입니다.”
“물론 그러하겠지요. 백제는 물론이고 고구려 영토도 손아귀에 넣으려 하겠지요. 또한 지금 상태를 보면…….”
“그래요, 저들이 지금 신라 영토까지 넘보고 있습니다. 그러니 장군의 역할이 크다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면 우리 민족이 힘을 합쳐 당나라를 몰아내자는 이야기입니다.”
유신이 답을 하지 않고 한숨을 내쉬었다.
“다른 뜻이 있습니까?”
“연개소문 대감이 생각나서 그런다오.”
“무슨?”
“연개소문 대감이라면 당나라 놈들을 몰아내는 차원이 아니라 당나라를 점령하여 우리민족의 고토를 반드시 회복하려 할 터인데.”
“당연히 그리하겠지요.”
“그런데 우리는 당나라 점령은 고사하고 그저 그들을 몰아내려는 생각에 빠져 있으니 자괴감이 일어납니다.”
민족끼리
“참으로 통탄할 일입니다.”
“그 한축을 감당했던 사람으로서 유구무언입니다.”
유신의 고뇌에 찬 표정을 살피며 연정토가 잔을 기울이고 길게 여운을 남겼다.
“여하튼 소장으로서는 형님의 유지를 받드는 일에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리합시다, 장군. 우리 후손들이 더 이상 우리끼리 싸우지 않도록 장군과 함께 헤쳐 나갑시다.”
천천히 말을 마친 김유신이 잔을 비우고 북녘 하늘 방향을 바라보자 연정토의 물기 어린 시선 역시 그곳을 따라갔다.
<다음 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