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북사업’ 김칫국 마시는 기업들 막전막후

떡 줄 사람 생각도 않는데…대박의 꿈

[일요시사 취재1팀] 김태일 기자 =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지난달 27일 판문점서 정상회담을 갖고 ‘4·27 판문점 선언’을 통해 한반도 평화시대를 열 것을 약속했다. 남북정상회담서 남북경협사업 추진이 언급됨에 따라 국내 기업의 북한 진출 기대감도 높아지고 있다. 남북관계가 급진전되면서 이 기회를 놓칠까 벌써부터 여러 분야의 기업들이 준비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국내 민간 건설사들이 북한 진출의 기대감에 부풀어 있다. 한 건설업계 관계자는 “철도 연결, 발전소 건설 등 관련 양측 정상의 회담 내용이 흘러나오며 건설업계도 가시화된 남북경협 사업에 대한 기대감이 높아지고 있는 상황”이라며 “회사마다 TF를 신설, 자료 검토 등 준비가 한창이다”고 말했다. 

경협 추진 주시
건설업계 들썩

업계에 따르면 대우건설, 현대건설, GS건설, 대림산업, 롯데건설, SK건설 등 국내 대형 건설사들도 남북 경협 추진과정을 주시하며 대비하고 있다. 실제 대우건설은 대북 SOC(사회간접자본)사업 관련 TF 신설을 구체적으로 검토 중이다. 

TF는 남북경협 사업 분야가 인프라 발전인 만큼 토목, 발전 플랜트 등 실무진 10여 명으로 추려질 예정이다. 

대우건설 관계자는 “아직 북미회담 등 남북경협 사업이 추진되기까지 넘어야할 과정들이 있기에 당장 가시적인 성과를 위해서라기보다 천천히 준비한다는 마음으로 TF신설을 검토 중”이라며 “과거 대우건설이 경수로 건설 등 북한 사업을 추진해본 경험이 있어 당시 실무진들이 이번 TF에도 많은 도움을 줄 것이라 예상한다”고 밝혔다. 


현대건설도 대우건설 못지않게 남북 경제협력사업에 기대감을 지니고 있지만 대우건설과 비교해 신중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현대건설은 남북 정상회담으로 경제협력사업 재추진 분위기가 무르익었으나 북미 정상회담이라는 변수가 남아 있는 만큼 이를 지켜본 뒤 남북 경제협력사업에 참여하겠다는 계획을 세워두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대우건설과 현대건설은 모두 과거에 북한서 사업을 한 경험을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다른 건설사들보다 경제협력사업에 발빠른 행보를 보이고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은 과거 노태우 김영삼정부서 북한을 방문해 김일성 주석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스무 차례 이상 만났다. 

당시 비공식적으로 경제부문 특사 역할을 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김 전 회장은 김 주석을 만나 평양의 위성도시인 남포에 대규모 공단 투자 합의를 이끌어냈다. 당시 민간기업 차원서 남북 경제협력사업을 최초로 이끌어낸 것으로 큰 주목을 받았다. 
 

중장기적으로 200만평 규모의 TV·냉장고 공장을 건설하겠다는 계획까지 세우기도 했다. 정부는 1995년 대우그룹의 500만달러 북한 투자를 승인했고 대우그룹은 북한 삼천리총회사와 합작해 세운 민족산업총회사라는 곳을 통해 1996년부터 남포공단을 정식으로 가동할 수 있었다. 

정상회담 후 북 진출 기대…준비 착수
현대·대우건설 필두 뿌린 씨앗 수확?

대우건설은 20여년 전에 대우그룹의 대북사업을 담당했던 직원들 30여명이 아직 회사 안에 남아있는 것을 확인했는데 이들을 중심으로 사업 기반을 닦을 것으로 전망된다.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도 대북사업 길을 이미 오래 전에 닦아놨다. 정 회장의 고향은 강원도지만 현재 북한에 속해 있는 통천 지역이다. 정 회장은 1993년 현대그룹 명예회장에 오르면서 경영 일선서 물러났는데 이때부터 대북사업에 본격적으로 관심을 쏟기 시작했다. 

1998년 김대중정부가 들어서면서 남북 화해 분위기가 조성되기 시작하자 정 회장도 발걸음을 재촉했다. 결국 정 회장은 김대중정부가 출범한 지 넉 달 만인 1998년 6월16일 판문점을 통해 ‘통일소’라고 불린 소 500마리와 함께 판문점을 넘는 역사적 장면을 전 세계에 알리는 데 성공했다. 

정 회장은 판문점 소 이벤트 이후에도 북한을 여러 차례 더 방문해 유람선을 통한 금강산 관광사업을 시작했고 1999∼2003년에는 평양에 체육관을 건설했다. 최근 남한 예술인들이 북한을 방문해 공연한 곳이 바로 이때 지어진 ‘류경정주영체육관’이다. 

현대건설은 대북 경수로사업을 주도해 진행한 경험도 지니고 있어 대북사업이 재개되면 앞으로도 사업을 주도해나갈 가능성이 큰 회사로 꼽힌다.

이 밖에 대한건설협회는 대형 건설사, 연구기관, 공기업, 학계 등 100여명의 건설 전문가가 참가해 통일시대 건설업계 미래에 대해 논의하는 ‘통일건설포럼’을 준비 중이다. 

대한건설협회 관계자는 “남북정상회담 등 통일을 향한 가시적인 성과들이 나오고 있는 상황서 건설업계가 먼저 이에 대한 밑그림을 논의하는 자리가 필요하다 생각돼 준비하게 됐다”며 “본래 8일 개최 예정이었으나 북미회담 등 차후 과정을 조금 더 지켜 본 다음에 진행하기로 결정했다”고 설명했다.

북한 진출이 가장 유력시되는 곳은 섬유·패션기업이다. 2016년 개성공단이 폐쇄되기 전까지 개성공단 입주 기업의 60% 이상은 섬유·패션 관련 업체였다. 섬유·패션기업 특성상 노동집약적 산업이기 때문에 북한의 풍부하고 저렴한 노동력에 관심이 많다. 

업계 관계자는 “개성공단은 저렴한 인건비와 같은 언어 사용, 인접한 지리적 특성 등으로 비용이 적게 든다”며 “현지 노동 인력은 기술력도 세계 최고 수준”이라고 말했다. 

비용 절감 뿐 아니라 현재 남북간 평화흐름을 살펴보면 개성공단 폐쇄 전 전체 부지(100만평)의 40%도 사용하지 못했던 것을 100% 사용할 가능성도 높다. 이로 인해 더 많은 업체들이 북한으로 진출하고 현지 고용도 확대될 것으로 예상된다. 
 

한국섬유산업연합회 관계자는 “다음달 12일 열리는 북미정상회담 결과에 따라 북한으로 다시 진출이 가능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며 “섬유·패션업계의 경우 북한으로 가장 활발히 진출한 산업이다. 지난 2013년 섬유산업계 관계자들을 대상으로 수요조사를 한 결과 섬유·패션 산업단지 조성에 대한 요청이 높아 정부에 단지 조성을 요구한 바 있다”고 말했다. 

섬유·패션 대세
공기업들도 박차

2016년 개성공단 폐쇄 전까지 공장을 가동한 기업은 124개이며 신원, 태광산업, 인디에프, 좋은 사람들, 쿠쿠전자 등이 있다. 


최근 개성공단기업 비생대책위원회가 입주 기업을 대상으로 공단에 다시 들어갈지 조사한 설문조사 결과 응답 기업 101곳 중 95%가 재입주 의사를 밝혔다. 

한편 마이크 폼페이오 미국 국무장관은 지난 13일(현지시각) 북한이 핵무기를 완전히 포기하면 미국 민간 기업들의 북한 투자가 가능할 것이라고 밝혔다. 

폼페이오 장관은 “민간 부문서 미국인들이 북한에 들어가 에너지 설비 구축을 도울 것이다. 북한은 엄청난 양의 전기가 필요하다”며 “북한이 핵을 포기한다면 인프라 개발과 북한 주민들이 필요한 모든 것들을 위해 협력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국내 은행들도 북한 진출 준비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지난 21일 금융권에 따르면 하나은행은 대북 금융사업 준비를 전담할 태스크포스(TF) ‘남북 하나로 금융사업 준비단’(가칭)을 이달 중 출범시킬 예정이다. 
 

준비단은 남북 경제협력과 금융지원 관련 계획을 수립하는 역할을 맡는다. 또 북미관계 변화, 정부정책 방향과 연계해 단계적으로 대북 금융사업을 추진하고 지원사업을 발굴한다. 단장은 일단 은행 임원이 맡을 전망이지만, 추후 외부전문가 넘겨받을 수 있다. 

하나은행은 또 지주와 은행 간 대북 금융사업 시너지를 꾀하기 위해 중국 하나은행과 지린은행, 옌볜대학 등과 협력하는 방안도 구상 중이다. 


신한금융도 이달 중 지주사를 중심으로 남북관계의 변화와 경협에 체계적으로 대응하는 협의체를 구성할 예정이다. 학계와 연구기관 등 외부 북한 전문가들과 네트워크를 구축할 예정이다. 

대북경협 금융지원, 정책금융기관이 주도하는 경협사업 참여, 북한 금융개혁을 위한 인프라 구축 지원 등 구체적인 전략을 수립할 계획이다. 

은행들도 준비
TF 발족 속속

우리은행은 이미 ‘남북 금융협력 지원 TF’를 발족했으며, 오는 7월까지 3개월간 운영할 예정이다. TF에는 전략기획부, 글로벌, 외환, 투자은행, 개입영업, 기업영업 등 8개 부서와 우리금융경영연구소가 참여했다. 

TF는 우선 개성공단 재가동 시 개성공단에 재입점하는 방안을 논의하고 있다. 우리은행의 개성공단지점은 2004년 12월 개성공단관리위원회 건물에 입주해 영업을 시작했으나 2016년 정부의 개성공단 폐쇄 결정으로 철수했다.

변호사 업계에도 ‘북한 열공모드’가 두드러지고 있다. 남북관계가 풀려 민간 교류가 재개되면 이로 인해 발생할 수 있는 민·형사상 문제 등 법률 수요가 생길 것을 염두한 로펌들이 외부 전문가를 초청해 세미나를 열고 있다. 

유산상속과 가족관계 등도 중요 이슈다. 개인적으로 스터티 그룹이나 사모임을 꾸려 공부하는 변호사들도 있다고 한다. 
 

법무법인 바른이 북한투자팀을 꾸렸다. 다른 로펌서 통일 법제 관련 팀은 있지만 북한 투자를 겨냥한 팀 구성은 바른이 처음이다. 

바른은 문성우 대표변호사(사법연수원 11기)와 한명관 변호사(15기)를 주축으로 국내기업의 북한 투자와 통일과 남북교류협력 등에 대한 법제 마련 등을 위해 북한투자팀을 구성했다고 지난 17일 밝혔다. 

바른 북한투자팀의 업무 분야는 ▲북한 법률·투자제도 자문 ▲남북교류·협력사업 자문 ▲북한 인프라 자원개발 및 금융 관련 자문 ▲북한과의 교역·투자설비 면세 자문 ▲외국기업과의 합작투자법인 설립 자문 등이다. 

문 대표변호사와 한 변호사는 법무부에서 통일과 남북교류 협력 등에 대한 법제를 마련하는 법무부 통일법무를 관장한 경험을 토대로 이 팀의 구심점을 맡게 된다. 

이들은 한국기업에 북한에 투자할 경우 검토해야 할 북한의 북남경제협력법뿐만 아니라 북한투자 실제 경험이 있는 중국 로펌들과의 협력을 통해 북한의 외국인투자법, 합영법, 합작법 등 법령을 연구해왔다. 

또 최재웅 변호사(38기)는 중국 현지 로펌 근무 경력을 살려 북한투자팀의 실무 책임을 맡고 있다. 이외에도 오희정 외국변호사, 한태영 변호사(41기), 김용우 변호사(41기) 등이 포진해있다. 

최 변호사는 “기존에는 개별 기업 단위로 개성공단과 금강산 특구로만 진출할 수 있었지만 북미정상회담 이후 제재가 풀리며 전면 개방 형태를 기대할 수 있게 됐다”며 “기존 북한 진출기업들이 남북관계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면 이제 중국회사와의 합작 투자 등 방법을 통해 리스크를 줄이는 투자 방법을 연구하고 있다”고 말했다. 

변호사들 수업 듣고 
세미나·연구회 꾸려

법무법인 태평양은 남북정상회담을 앞두고 과거 남북기본합의서를 바탕으로 주요 사항과 법적 절차, 국제 제재, 정전(停戰)·종전(終戰) 협정, 다자안보체제 등에 대한 내부 스터디를 하고 있다. 

유욱(55·사법연수원 19기) 변호사 등 북한팀이 주축이다. 태평양은 북한의 자원개발, 사회간접자본(SOC) 개발·투자, 보험 분쟁, 손해배상 등 자문 업무도 하고 있다. 
 

법무법인 광장은 외부 북한법·통일법제 전문가를 초청해 매년 ‘광장 통일법제 세미나’를 개최하고 있다. 광장 통일법제팀 구성원 가운데는 자발적으로 외부 활동에 나선 경우도 많다.

권순엽(61) 미국변호사는 대통령 직속 북방경제협력위원회서 활동하고 있다. 임형섭(41·36기) 변호사는 학술단체 ‘모자이크 코리아’와 연계해 한반도 통일 이후 시나리오를 연구하는 ‘한반도 통일 시나리오 플래닝’에 참여하고 있으며 ‘한반도 통일 시나리오 플래닝’은 올해 결과물을 낸다. 

법무법인 세종의 남북경협팀은 조용준(59·17기), 이수현(48·30기) 변호사 등 10여명이 모여 북한과 남북경협을 주제로 연구하고 있다. 최근에는 ‘북한의 시장경제화 과정에서의 법률적 문제와 대응방안’을 펴냈다. 

이 외에도 ▲북한의 법제 현황 ▲남북경협 관련 법제에 대한 연구 ▲북한의 경제개발구에 대한 연구 등을 주제로 세미나를 열고 북한 관련 외부 전문가들과 의견을 교류한다. 

법무법인 화우는 이병수(52·27기) 변호사를 중심으로 10명 규모의 남북경협TF팀을 꾸렸다. 이 변호사는 법무부 특수법령과(현 통일법무과) 검사 출신이다. 

법무법인 율촌은 최근 ‘북한 투자 자산에 대한 손해 발생 시 보상 관련 자문’, ‘남북상사중재위원회의 중재 절차 관련 자문’ 등을 수행했다. 한수연(40·36기) 변호사 등이 북한노동법을 비롯한 대북관련 투자 기업법무·조세 등에 관해 역량을 키우고 있다.

북한 진출 기업에 대한 지원도 활발히 이뤄질 전망이다. 기업은행이 남북 통일금융 추진 방안을 마련하기 위해 ‘IBK남북경협지원위원회’를 구성한다. 이 위원회는 기업은행의 개성공단 지점 설치를 포함한 대북 금융 진출 방안이나 ▲도로 ▲철도 ▲항만 ▲환경 등 SOC 인프라 구축 시 파이낸싱 참여 등을 관장한다. 특히 기업은행은 공단 산업단지 내 중소기업 제조 설비 관련 투자를 맡을 가능성이 크다.

기업은행 투자
중소기업 지원도

기존에 나가 있는 기업뿐만 아니라 추가 북한 진출을 희망하는 중소기업 지원도 추진한다. 기업은행 고위 관계자는 “북한에 진출한 중소기업 지원에 중점을 둔다는 점에서 남북경협이 의미를 잘 담아낸다고 생각해 명칭을 바꿨다” 며 “국책은행인 만큼 정부 정책 방향에 따라 실질적 중소기업 지원을 위한 역할을 해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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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세보다 무서운 산재와의 전쟁

탈세보다 무서운 산재와의 전쟁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이재명 대통령이 ‘산재와의 전쟁’을 선포했다. 건설 현장에서 근로자가 사망하는 사건을 줄이겠다는 취지다. 이 대통령이 칼을 휘두르자 기업은 납작 엎드렸다. 이 대통령의 행보를 보는 시각은 엇갈린다. 산재 사망사고가 끊이지 않는 만큼 단호한 조치가 필요하다며 환영하는 의견과 구조적 문제를 뒤로하고 기업 ‘잡도리’만 하고 있다는 의견 등이다. 건설업계에 칼바람이 불고 있다. 미국발 관세나 국내 경기 문제가 아니다. 산업재해(이하 산재)가 건설 현장을 뒤흔드는 중이다. 대통령은 여러 현안 중 산재로 인한 사망사고 근절을 국정 과제 첫머리에 올린 듯한 모습이다. 대통령 한마디 이재명 대통령이 반복되는 산재 사망사고의 고리를 끊겠다고 나섰다. 산재 사망사고가 발생한 기업을 법과 제도를 통해 처벌하겠다고 선언했다. 발언 수위도 나날이 세지고 있다. 본보기가 된 기업은 대통령이 일으킨 칼바람을 온몸으로 맞는 모양새다. 지난 5월 고용노동부가 발표한 1분기 ‘산업재해 현황 부가 통계’에 따르면 올해 1~3월 재해 조사 대상 사고 사망자는 총 137명(잠정)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138명)보다 1명(0.7%) 줄었다. 사망사고 건수도 같은 기간 136건에서 129건으로 7건(5.1%) 감소했다. 업종별로는 제조업이 29명으로 지난해보다 2명, 기타 업종(건설업과 제조업 이외 업종)이 38명으로 6명 감소했지만 건설업은 71명으로 오히려 7명 늘었다. 노동부는 부산 기장군 건설 현장 화재와 서울-세종고속도로 교량 붕괴 등 대형 사고의 영향으로 건설업 사망자 수가 증가했다고 분석했다. 지난 2월14일 부산 기장군 반얀트리 리조트 신축 공사장에서 불이 나 6명이 숨졌다. 또 같은 달 25일, 경기도 안성시 서울-세종고속도로 건설 현장 교량 상판 구조물이 붕괴해 4명이 목숨을 잃는 사고가 일어났다. 규모별로는 상시 근로자 50인(건설 업종은 공사 금액 50억원) 미만 사업장에서 올해 1분기 사망자는 83명으로 지난해보다 5명(6.4%), 사망사고 건수는 83건으로 7건(9.2%) 늘었다. 반면 50인 이상 대형 사업장과 대규모 공사 현장에선 사망자 54명, 사고 건수 46건으로 각각 6명, 14건 줄었다. 사망사고 유형별로는 ‘추락’ 62명, ‘끼임’ 11명, ‘물체에 맞음’ 16명으로 지난해와 비교해 각각 1명, 7명, 5명 감소했다. 화재와 폭발로는 10명, ‘붕괴’ 사고로는 11명이 목숨을 잃었다. 지자체별로는 경기(31명), 서울(17명), 경북(15명), 부산·전남(12명), 경남(11명), 충남(9명), 강원·울산(6명) 순으로 많았다. 산재로 인한 사망은 건설 현장에서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사고다. 정부는 산재 사망사고를 줄이기 위한 각종 대책을 내놨다. 2022년 1월부터 시행된 중대재해처벌법(이하 중처법)도 그중 하나다. 중처법은 근로자의 사망사고 등 중대 재해가 발생했을 때 기업의 경영 책임자 등이 안전 보건 관리 체계 구축 등 의무를 위반한 것으로 확인되면 처벌하도록 하는 내용이 골자다. 취임 이후부터 직접 챙겨 국정 운영 계획에도 포함 문제는 실효성이다. 중처법이 시행된 이후에도 건설 현장에서 근로자가 죽는 일이 계속 일어나고 처벌은 ‘솜방망이’ 수준에 그친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았다. 결국 이 대통령이 칼을 빼 들었다. 이 대통령은 지난 12일 “비용을 아끼기 위해 누군가의 목숨을 빼앗는 것은 일종의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 또는 사회적 타살”이라고 비판했다. 필요하면 법을 개정해서라도 ‘산재 공화국’이라는 오명을 벗겠다는 뜻도 밝혔다. 이 대통령은 이날 국무회의에서 “일상적으로 산업 현장을 점검해서 필요한 안전조치를 하지 않고 작업하면 엄정하게 제지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며 “제도가 있는 범위 내에서 할 수 있는 최대의 조치를 해달라”고 주문했다. 사고 위험이 큰 업무를 하청과 외주를 통해 해결하는 ‘위험의 외주화’ 현상에 대해서도 지적했다. 이 대통령의 산재 사망사고 근절 ‘드라이브’는 점진적으로 거세지고 있다. 초기에는 주무 부처에 대책을 요구했다면 최근에는 직접 목소리를 내고 움직이는 식이다.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산재를 줄이라고 지시했는데도 불구하고 사망사고가 이어지자 특유의 행동력을 보이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실제 이 대통령이 고용노동부에 산재 관련 종합 대책을 주문한 뒤에도 ▲인천 맨홀 작업 노동자 질식사 ▲포스코이앤씨 노동자 끼임사 ▲경기 의정부 아파트 신축 현장 노동자 추락사 등의 사고가 일어났다. 불과 한 달 새 일어난 일이다. 지난달 6일 인천 계양구 병방동의 한 도로 맨홀 안에서 지하 시설물 조사 작업 중이던 노동자 1명이 의식을 잃고 1명은 실종됐다. 이들은 결국 사망했다. 조사 결과 이 사고는 용역 계약 위반에 따라 허가 절차 없이 진행하다가 발생한 인재로 드러났다. 법으로도 안 됐는데… 숨진 근로자는 산소 마스크 등 안전 장비를 제대로 착용하지 않은 채 작업하다 유독가스에 중독된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이 대통령은 “현장 안전 관리에 미흡한 점이 있었는데 철저히 밝히고 법령 위반 여부가 있었는지를 조사해 책임자를 엄중히 조치하라”며 “후진국형 산업재해가 다시는 발생하지 않도록 현장 안전관리를 정비하고 사전 지도·감독을 강화하는 등 관련 부처도 특단의 조처를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지난달 28일 포스코이앤씨가 시공하는 경남 함양-울산고속도로 의령나들목 공사 현장에서 사면 보강 작업을 하던 60대 근로자가 천공기(지반을 뚫는 건설기계)에 끼어 숨지는 사고가 일어났다. 포스코이앤씨 시공 현장에서만 올해 들어 4번째 일어난 사망사고다. 지난 1월 경남 김해 아파트 신축 현장 추락사고, 경기도 광명 신안산선 건설 현장 붕괴사고, 대구 주상복합 신축 현장 추락사고 등도 줄을 이었다. 이 대통령은 “똑같은 방식으로 사망사고가 나는 것은 결국 죽음을 용인하는 것이고 아주 심하게 얘기하면 법률적 용어로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이라고 질타했다. 그러면서 “(산재 사망사고가 나면) 여러 차례 공시하도록 해서 투자를 안 하고 주가가 폭락하게 (해야 한다)”고도 말했다. 여름휴가를 마치고 복귀 첫 일성도 산재 관련 발언이었다. 이 대통령은 “앞으로 모든 산업재해 사망사고는 최대한 빠른 속도로 대통령에게 직보하라”고 지시했다. 산재 사망사고를 직접 챙기겠다는 의지를 다시 한번 천명한 것이다. 사과문 내고 또 반복되다 지난 9일 강유정 대통령실 대변인을 통해 전해진 이 대통령의 발언은 전날인 8일 경기 의정부 신축 아파트 공사 현장에서 안전망 철거 작업을 하던 50대 근로자가 6층 높이에서 떨어져 숨진 사고가 영향을 미쳤다. 이 대통령이 선포한 ‘산재와의 전쟁’에 기업은 바짝 얼어붙은 상황이다. 지난달 25일 경기 시흥 SPC 삼립 공장을 방문해 ‘중대산업재해 발생 사업장 현장 간담회’를 열었다. 해당 공장은 지난 5월 50대 여성 노동자가 작동 중인 컨베이어벨트에 끼어 사망했고 2022년과 2023년에도 여성 노동자가 각각 소스 교반기와 반죽 기계에 끼어 숨지는 등 중대 산재가 빈번하게 일어났던 곳이다. 이 대통령은 이날 간담회에서 SPC 근로자의 노동 시간 등을 자세히 물었다. 그러면서 “(산재가) 심야에 대체적으로 발생하고 12시간씩 4일간 일하다 보면 사실 심야 시간에 힘들다. 주의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며 “심야 장시간 노동 때문에 생긴 일로 보여진다”고 말했다. 이 대통령의 지적에 SPC 회장을 비롯해 그룹 관계자들이 쩔쩔맨 것으로 전해졌다. SPC그룹은 이 대통령이 다녀간 지 이틀 만인 지난달 27일, 8시간 초과 야근을 폐지하겠다는 대책을 내놨다. 제품 특성상 필수적인 품목 외에는 야간 생산을 최대한 없애 공장 가동 시간을 축소하겠다는 것이다. 또 주간 근무 시간도 점진적으로 줄여 장시간 근무로 인한 피로 누적, 집중력 저하, 사고 위험 등을 사전에 차단하겠다고 밝혔다. 포스코이앤씨는 지난달 29일 담화문을 내고 고개를 숙였다. 정희민 전 대표이사는 “어제(28일) 사고 직후 모든 현장에서 즉시 모든 작업을 중단했고 전사적 긴급 안전 점검을 실시해 안전히 확실하게 확인되기 전까지 무기한 작업을 중지하도록 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협력업체를 포함한 모든 근로자의 안전이 최우선 가치가 되도록 필요한 자원과 역량을 총동원해 근본적인 쇄신 계기로 삼겠다”며 “또다시 이런 비극이 발생하는 일이 없도록 사즉생의 각오와 회사의 명운을 걸고 안전 체계의 전환을 이뤄내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정 전 대표의 사과는 엿새 만에 또다시 일어난 사고로 빛이 바랬다. 지난 4일 오후 경기 광명시 옥길동 광명-서울고속도로 민간투자사업 제1공구 현장에서 미얀마 국적 30대 근로자가 감전돼 심정지 상태로 발견됐다. 이 근로자는 병원으로 이송된 지 8일 만인 지난 12일 의식을 회복했다. 높아진 발언 수위·제재 조치 “왜 기업만 잡도리?” 의견도 정 전 대표는 사의를 표명하고 물러났다. 연이어 산재사고가 일어난 포스코이앤씨는 ‘본보기’가 될 가능성이 커진 상황이다. 일단 이 대통령은 포스코이앤씨에 대한 건설 면허 취소, 공공 입찰 금지 등 법률상 가능한 방안을 모두 찾아서 보고하라는 지시를 내린 바 있다. 국내 건설 면허 취소는 현행 건설산업기본법상 최고 수위의 징계다. 1994년 성수대교 붕괴 책임이 있던 동아건설산업에 내려진 사례가 유일하다. 건설 면허가 취소되면 신규 사업을 할 수 없고, 다시 면허를 취득한다고 해도 수주 이력이 없기 때문에 관급공사를 따내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다. 경찰은 사고 관련 수사 전담팀을 만들고 고용노동부 안양지청과 함께 포스코이앤씨와 하청업체에 대한 압수수색에 돌입했다. DL건설도 대표이사를 비롯한 임원진 전원이 공사 현장에서 발생한 사망사고에 책임을 지고 일괄 사표를 제출하는 등 납작 엎드렸다. 특히 이 대통령이 휴가에서 돌아와 산재 관련 발언을 한 직후 터진 사고여서 충격파가 더 컸다. DL건설에서 사표를 제출한 임직원은 80여명, 공사를 중단한 현장은 44곳에 이른다. 이재명정부는 산재사고로 인한 사망자 비율을 2030년까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 수준인 1만명당 0.29명까지 끌어내리는 방안을 추진하기로 했다. 지난해 우리나라에서 발생한 산재로 인한 사망자 비율은 1만명당 0.39명으로 OECD 평균을 크게 웃도는 실정이다. 이 같은 내용은 ‘이재명정부 국정 운영 5개년 계획’에 포함됐다. 이 대통령이 지난달 수석보좌관 회의에서 “전 세계에서 또는 OECD 국가 중 산업재해율, 사망재해율이 가장 높다는 불명예를 이번 정부에서 반드시 끊어내겠다”고 의지를 드러낸 부분을 국정과제로 담은 것이다. 구조 문제 나 몰라라 일각에서는 이 대통령이 지나치게 건설업계만 잡고 있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관련 법과 제도가 시행되고 있는데도 사망사고가 끊이지 않는다면 구조적인 문제도 살펴봐야 한다는 것이다. 수주 경쟁이 과열되면서 저가 입찰이 늘고 안전관리에 소홀해지는 점이 산재로 이어지는 식의 고리를 끊어야 진정한 의미의 ‘근절’이 이뤄질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jsjang@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