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사냥꾼’ 엘리엇 실체 해부

잊을만하면 나타나 ‘감놔라 배놔라’

[일요시사 취재1팀] 김태일 기자 = 최근 헤지펀드 엘리엇 매니지먼트가 한국 정부와 기업을 상대로 전방위 공격을 본격화하고 있다. 특히 엘리엇은 과거 적폐 청산과 기업의 지배구조 개혁을 추진 중인 우리 정부의 약한 고리를 파고드는 모양새다. 엘리엇이 국내 정부와 재계를 상대로 공세를 강화하면서 그 실체와 속셈에 대해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지난 3월28일 현대차그룹은 현대모비스와 현대글로비스의 분할합병을 통해 그간 공정위로부터 해결 압박을 받아온 4개 순환출자 고리를 모두 끊는 내용의 지배구조 개편안을 내놨다. 현대모비스의 모듈·AS부품 사업을 인적 분할해 현대글로비스에 흡수합병시키고 이후 정몽구 회장과 정의선 부회장 등 대주주와 기아자동차, 현대글로비스, 현대제철 등 계열사들이 합병된 현대글로비스의 지분을 매각하는 일련의 작업을 통해 현대글로비스를 기아차 산하 기업으로 만들어 현대모비스가 실질적인 지주사 역할을 수행하는 방식으로 순환출자를 해소한다는 구상이었다. 

3년 만의 귀환
대기업 노리다

그간 증권가서 많이 거론됐던 현대모비스·현대차·기아차 3사를 사업 부문과 투자 부문으로 정리해 현대모비스를 지주사 체제로 전환하는 방식을 선택하지 않고 훨씬 많은 비용이 소요되는 직접 지분 매입 방식을 선택했다. 

이에 대해 공정거래위원회는 물론 증권가서도 호평이 쏟아져 현대차의 구상은 곧 현실화될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일주일 후 변수가 등장했다. 지난달 4일, 미국계 행동주의 펀드 ‘엘리엇 매니지먼트’의 투자자문사 ‘엘리엇 어드바이저스 홍콩’은 보도자료를 통해 자사가 현대차, 기아차, 현대모비스 등 3개사의 보통주 10억달러(한화 약 1조500억원) 규모를 보유하고 있다며 지배구조 개편의 추가 조치를 주문하고 나섰다. 


일단은 엘리엇이 현대차 지배구조 개편에 긍정적인 입장을 표명다. 하지만 과거 삼성그룹이 추진했던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과 관련해 강력한 태클을 걸었던 전력 때문에 이번 현대차 지배구조 개편 과정서도 큰 영향력을 행사할 것이라는 예측이 나왔다. 

투자금융업계가 엘리엇의 일거수일투족을 면밀히 주시하는 이유다. 
 

엘리엇은 일반적으로 행동주의(Activism)를 표방하는 헤지펀드(hedge fund)로 분류된다. 헤지펀드는 소수의 투자자들을 비공개로 모집해 고수익을 추구하는 기업형 펀드다. 이 중에서 행동주의 펀드는 기업의 의사결정에 적극적으로 개입해 주주 이익을 추구하는 전략을 택한다. 

대표적인 행동주의 전략으로는 배당 확대, 자사주 매입, 인수합병(M&A), 지배구조 개편 등이 있다. 한마디로 주가를 부양할 수 있는 다양한 조치를 기업에 적극적으로 요구, 관철시키는 펀드다. 

과도한 기업 경영권 침해로 인해 일각에선 ‘기업 사냥꾼’으로 매도되기도 하지만 헤지펀드 중에서 상대적으로 높은 수익률을 보이고 있어 행동주의 펀드의 투자 규모는 계속 늘어나는 추세다. 

엘리엇 매니지먼트는 1977년 미국서 하버드대 로스쿨 출신 변호사 폴 싱어가 설립한 헤지펀드다. 엘리엇어소시에이츠와 엘리엇인터내셔널의 두 펀드를 운용하고 있다. 최근까지 순 투자 수익은 14.6%이며 현재 전체 운용자산은 340억달러 이상이다. 

엘리엇의 포트폴리오 중 3분의 1 정도는 부실 채권을 초저가에 사들여 높은 수익을 올리고 있다. 엘리엇은 지난 2014년 아르헨티나를 두 번째 국가부도 사태로 몰아넣은 것으로 유명하다. 


과거 2001년 아르헨티나가 950억달러 규모의 국가부도를 냈을 때 아르헨티나 정부는 자국의 국채를 매입한 해외 투자자들과 여러 차례 협상을 벌여 채무의 70% 내외를 탕감받았다. 하지만 엘리엇 등 헤지펀드들은 국채 탕감을 거부했다. 

특히 엘리엇은 국가부도 당시 4800만달러라는 폭락가에 구입한 아르헨티나 국채에 대해 액면가 6억3000만달러의 ‘전액 상환’을 요구했다. 

국가부도 몰아
여러나라 피해

헤지펀드들은 아르헨티나 정부가 약 15억달러의 국채를 상환하기 전까지는 채무 조정된 다른 빚들도 상환할 수 없게 해달라고 미국 법정에 소송을 걸었고, 2014년 6월 미국 대법원은 엘리엇 등 헤지펀드들의 손을 들어주면서 아르헨티나 정부는 궁지에 몰렸다. 

아르헨티나로서는 헤지펀드들에게 액면가로 전액을 상환하게 되면, 앞서 채무 조정을 약속한 다른 채권자들에게도 같은 조건을 적용해야 했다. 결국 아르헨티나 정부는 13년 만에 다시 국가부도를 선언했다. 
 

엘리엇은 비슷한 전략을 페루 등 빈곤 국가에 적용해 거액을 벌어들였다. 2000년 말 반정부 시위의 격화로 망명을 모색하던 페루의 알베르토 후지모리 대통령이 사례다. 엘리엇은 액면가 200만달러어치의 페루 국채를 1140만달러에 사들인 뒤 액면가와 이자를 합쳐 5800만달러의 지급소송을 냈다. 

페루 정부가 돈을 내지 않자 해외로 도피하려는 후지모리 대통령의 전용기를 압류해 원하던 금액을 모두 받아냈다.

엘리엇은 지배구조 관련 투자서도 2003년 미국 피앤지(P&G)가 독일기업 웰라를 인수하며 제시한 우선주의 가치가 부당하다며 독일 펀드와 손잡고 주가를 높이는 데 성공했다. 2006년에는 스위스 인력컨설팅업체 아데코가 독일기업을 인수하는 과정에 개입해 지분가격을 주당 54.5유로서 113유로로 끌어올리기도 했다.

이처럼 엘리엇은 헤지펀드 특성상 특정 기업 주식을 사들여 일정 의결권을 확보한 뒤 그 기업의 약한 고리를 공격하며 주로 단기이익 극대화를 추구한다. 자사주를 매입해 주가를 끌어올리도록 요구하기도 하고, 배당을 더 하라고 압박하기도 하며 때로는 지배구조 개선, 자산매각, 자기편 이사 선임 등도 요구한다. 

국내서 엘리엇이 이름을 알린 것은 2015년 제일모직과 삼성물산이 합병을 추진할 때다. 당시 엘리엇은 삼성물산 지분 7.12%를 약 7000억원에 매입한 후 제일모직과 삼성물산의 합병에 반대해 자신들이 보유한 지분가치를 높여 팔고 나갔다. 

이어 2016년에는 삼성전자의 지주사 전환설이 퍼졌을 때 지분 0.67%를 인수한 후 30조원의 특별배당을 요구하고 최소 3명의 독립적인 이사 선임과 잉여현금흐름의 75%를 주주에게 환원하라고 주장했다. 

최근에는 1조원 규모의 현대자동차그룹 계열사 지분을 무기로 지배구조 개선 추가 조치와 이익 주주환원 등을 요구하고 나섰다. 이어 엘리엇은 현대차와 현대모비스를 합병해 지주사로 전환하라고 요구하면서 노골적인 주가 띄우기라고 비판받았다. 


엘리엇은 다시 공격을 시작했다. 이번에는 정부를 상대한 것이다. 엘리엇은 지난 2일 한국 정부가 국민연금을 동원해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에 부당하게 개입했다고 주장하며 지난달 13일 우리 법무부에 중재의향서를 제출했다고 밝혔다. 

중재의향서는 투자자-국가 간 소송(ISD)의 전 단계에 해당한다.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 후 약 3년이 지난 시점에 엘리엇이 이 문제를 다시 들고나온 것은 이례적이다. 

국정 농단 걸림돌
정부 압박하기?

엘리엇은 2015년 6월 합병을 결정하는 삼성물산 주주총회 결의를 금지해달라고 가처분 신청 등을 냈지만 기각된 바 있다. 그러나 최순실 국정 농단 사태가 터지며 특검은 국민연금이 직권을 남용해 합병에 찬성했다고 판단했고, 법원은 1·2심서 문형표 전 보건복지부장관과 홍완선 전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장이 국민연금에 손해를 초래(업무상 배임죄)했다며 징역 2년6개월을 선고했다. 

이는 엘리엇이 ISD에 나설 수 있는 근거를 제공하는 결과로 작용했다는 분석이 나온다. 

익명을 요구한 국내 대기업의 법무 담당 임원은 “2015년 합병이 진행된 시기는 코스피 지수가 하락하던 때”라며 “주가 하락이 합병 때문이라고 단정하기에는 무리가 있기에 엘리엇의 손해액을 산정하기 힘들다”고 말했다. 
 


그는 “엘리엇이 국정 농단 사태와 관련한 재판을 지켜보면서 치고 들어갈 우리 정부의 ‘약점’을 찾은 것으로 보인다”고 덧붙였다. 

자산운용 업계에선 엘리엇이 우리 정부에 ‘앞으로 있을 한국 기업에 대한 경영권 공격에 개입하지 말라’는 신호를 던진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엘리엇은 현재 ‘현대차와 현대모비스를 합병하라’며 현대차그룹을 압박하고 있는데 이런저런 기업의 일에 정부가 함부로 개입했다간 소송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경고했다는 것이다. 

김상조 공정거래위원장은 최근 “엘리엇의 제안은 금산분리 원칙을 고려하지 않은 부당한 제안”이라며 현대차를 두둔하는 듯한 평가를 내놓은 바 있다. 

한 사모투자전문회사(PEF) 관계자는 “35년간 연 평균 20%가 넘는 수익을 올린 엘리엇이 ISD를 통해 얻는 실익은 여기에 들어가는 시간·비용을 고려할 때 그다지 크지 않다”며 “다른 곳에 투자해 얻는 이익이 더 큰데도 ISD를 감행한 것은 다른 의도가 있다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이어 “엘리엇이 노리는 한국 기업은 삼성·현대차만이 아니다”라며 “지배구조 개편, 주주 이익 환원 등을 요구하며 한국 기업을 압박해 수익률을 높이기 위한 장기적인 포석”이라고 덧붙였다. 
 

재계에선 정부가 기업들의 경영권 방어를 힘들게 하는 상법 개정을 추진하면서 엘리엇과 같은 투기자본의 공격이 더욱 거세질 것을 우려하고 있다. 

삼성 측은 공식 반응을 자제하고 있으나 각종 악재가 잇따르는 상황서 합병 적절성 논란이 다시 불거진 데 곤혹스러워하고 있다. 정부는 엘리엇의 중재에 응하지 않을 전망이다. 이 경우 엘리엇은 3개월 후인 7월부터 한국 정부에 대한 제소가 가능하다. 

정부는 앞서 미국계 사모펀드 론스타 등과도 중재 없이 ISD에 들어갔다. 

법무부 관계자는 “만약 정부가 국민연금을 동원해 부당하게 개입했다고 하더라도 그 일이 어떤 손해를 끼쳤는지 명확하게 입증돼야 하는데 중재의향서에는 이런 내용이 전혀 담겨있지 않다”고 말했다. 

이처럼 최근 엘리엇의 행동은 정부가 추진하는 적폐 청산과 대기업의 지배구조 개선 작업과 맞물려 있는 약한 고리를 공격하고 있는 양상이다. 

약점 간파해야…
적절한 대응 필요

한 경제연구소 연구원은 “과거의 사례를 봐도 엘리엇은 자신만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집단으로 볼 수 있다”며 “이번 정부를 상대로 한 엘리엇의 공격은 자신들의 이익에 걸림돌이 될 수 있는 우리 정부 길들이기로 보여진다”고 말했다. 이어 “정부가 헤지펀드 특성과 약점을 간파해 적절한 대응을 펼쳐야 한다”고 조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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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엔진 멈춘 3억 마이바흐 미스터리

[단독] 엔진 멈춘 3억 마이바흐 미스터리

[일요시사 취재1팀] 김성민 기자 = 서울 소재 H건설사 대표가 타는 메르세데스 벤츠의 최고급 사양인 마이바흐가 구매한 지 3년 만에 엔진 고장으로 멈췄다. H사 대표 박모씨는 2022년 말 메르세데스벤츠코리아와 한성자동차를 상대로 수리비 및 대차료 지급 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무상 수리해야 한다고 했던 1심 재판부는 급기야 ‘벤츠의 책임이 없다’는 판결을 내렸다. 2019년식 ‘마이바흐 S560 4MATIC’은 2022년 9월13일 오전 11시, 박씨의 운전기사가 서울 용산 한강로를 주행하던 중 계기판에 엔진 경고등이 켜지면서 차체 진동과 함께 엔진이 멈췄다. 곧바로 차량을 한성자동차 성동서비스센터에 입고했으나 진단은 충격적이었다. 침수차 의심 수리 나 몰라라 “엔진 연소실에 물이 들어가 부품이 손상된 것으로 보인다. 침수 차로 의심된다”며 무상 수리가 어렵다는 것이었다. 이에 박씨와 자동차 감정사는 반대 의견을 제시했다. 그날은 폭우나 침수와 무관한 날씨였으며 정상 주행 도중 발생한 차량 고장이었기 때문이다. 원고인 H사는 “벤츠코리아가 제공하는 ‘통합서비스패키지(ISP)’ 보증에 따라 3년 또는 10만km 이내의 결함은 무상 수리 대상”이라고 주장했다. 이에 1심 재판부(서울중앙지법 민사47단독, 2024년 7월23일)는 “침수나 연료 혼유 등 외부 요인으로 단정할 증거가 부족하다. 한성자동차는 ISP 약정에 따라 엔진 결함을 무상 수리해야 한다”며 원고의 손을 들어줬다. 그러면서 벤츠의 수입사인 한성자동차에 대해 월 400만원의 대차료 배상을 명령했다. 법원은 독립 감정인 강대공씨를 지정해 정밀 감정을 실시했다. 강씨의 감정서에는 “침수 차량에서 보이는 오염 흔적이 없다. 냉각수(부동액) 누출 흔적도 발견되지 않았다”며 “엔진 내부 수분은 외부 요인이나 정비 과정에서 유입됐을 가능성이 있다”고 분석했다. 또 추가 사실조회 회신에서도 “혼유(연료 내 수분 혼입) 여부는 감정 범위를 벗어나며, 침수가 아닌 요인으로 인한 수분 유입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밝혔다. 2심(서울중앙지법 제8-3민사부)에서 피고 측은 반격했다. 벤츠코리아의 법률대리인 김성진 변호사(김앤장 법률사무소)는 지난 8월27일 제출한 준비서면에서 “ISP는 차량 ‘결함’이 발견된 경우에만 적용된다. 외부 수분 유입으로 인한 손상은 명백히 예외 사항이며 제조사 귀책이 없는 이상 무상 수리 의무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한성자동차 측(법무법인 세종)도 항소이유서에서 “ISP는 제조상의 하자에 국한된 품질보증 계약이다. 이번 사안은 ‘우발적 손상’으로 보증 대상이 아니다”라고 반박했다. 서울중앙지법 민사8-3부는 지난 9월26일, “한성자동차의 패소 부분을 취소하고, 박씨의 청구를 기각한다”고 판시했다. 2심 판결은 “외부 요인, 제조 결함이 아니”라며 1심을 전면 뒤집은 것이다. 항소심 재판부는 “외부 수분 유입으로 인한 손상은 차량 제조사 귀책 사유에 해당하지 않는다. ISP는 ‘제조 결함’에 한정된 보증이다. 한성자동차의 패소 부분을 취소하고 원고의 청구를 기각한다”고 밝혔다. 즉, 법원은 이 사건을 ‘차체·부품 결함’이 아닌 ‘사용 중 발생한 외부 요인’으로 결론 내린 것이다. 주행 중 경고등 켜지고 진동 후 엔진 스톱 감정 결과 “누수 없음, 외부 수분 가능성” 결국 박씨는 3년에 걸친 법정 다툼 끝에 패소했다. 따라서, 한성자동차는 더 이상 수리 의무를 부담하지 않게 됐으며, H사의 항소도 기각됐다. 이번 재판의 핵심 쟁점은 ‘수분 유입의 원인’이 제조 결함이냐, 외부 요인이냐였다. 법원은 “차체·부품의 결함으로 인한 냉각수 누수가 없었고, 외부 요인 가능성이 더 크다”고 판단했다. 결국, 제조물 책임(PL법)에 따른 보증 범위가 아닌 사용·관리상의 문제로 결론이 난 셈이다. 이번 판결은 ‘결함’의 해석 범위를 좁혀 정의한 사례다. 즉, ‘사용자 과실이 아닌 상황’이라도 차체·부품 자체의 결함이 입증되지 않으면 보증이 적용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자동차 전문가들은 “소비자 입증 책임만 더 무거워졌다”며 “ISP나 제조사 보증이 소비자 보호장치로 설계됐지만, 현실적으로 ‘결함 입증’의 벽이 너무 높다. 이번 판결은 소비자가 과실이 없더라도 제조사 책임을 묻기 어렵다는 선례가 될 수 있다”고 비판했다. 법조계 일각에서는 이번 판결을 “제조물 책임법과 민법상 품질보증의 경계선을 명확히 한 판례”로 평가하고 있다. 박씨의 마이바흐는 결국 엔진을 교체하지 못한 채 3년 동안 방치됐다. 이번 사건은 ‘명차’의 기술력보다 보증 체계의 경계선이 어디까지인지를 가늠케 한 사건이다. 소비자는 결함을 주장할 때 ‘입증의 문턱’을, 제조사는 ‘보증의 한계’를 확인했다. 독일 명차 대명사인 벤츠의 전기차는 해마다 폭발하는 배터리 화재로 뉴스를 장식하고 있다. 전기차뿐만 아닌 내연기관 모델 중에서도 최상위급인 마이바흐조차 원인 모를 엔진 고장으로 멈췄지만, 고객과 3년간 법정 다툼을 이어간 회사로 남겨졌다. 1심선 인정 “무상 수리” 벤츠는 고객과 진행한 재판에선 승소했지만, 우리나라 정부의 제재 착수 대상이 됐다. 공정거래위원회는 전기차에 저가 배터리를 쓰고도 고가 배터리를 쓴 것처럼 허위 광고한 혐의를 받는 벤츠코리아에 대한 제재에 착수했다. 공정위의 최종 판단은 벤츠코리아와 벤츠 전기차 이용자 간 진행 중인 법적 분쟁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칠 전망이다. 해당 저가 배터리는 지난해 인천 청라 아파트 지하 주차장 화재가 시작된 전기차에도 쓰였다. 업계에 따르면 공정위는 지난 8월12일, 벤츠코리아를 표시광고법·공정거래법 위반 혐의로 제재해야 한다는 의견을 담은 심사보고서(검찰 공소장에 해당)를 회사 쪽에 발송했다. 벤츠코리아는 자사의 모든 전기차에 중국 1위 배터리 업체인 시에이티엘(CATL)의 배터리가 장착됐다며 허위 사실을 소비자에게 알린 혐의를 받는다. 제휴사 딜러를 상대로 소비자에게 이런 허위 사실을 설명하라고 교육하는 등 소비자를 부당하게 속여 유인한 혐의도 있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EQE 차주들은 벤츠 본사, 벤츠코리아, 공식 딜러사 한성자동차 등 판매사 7곳, 벤츠파이낸셜서비스코리아 등 리스사 2곳을 상대로 손해배상소송을 제기했다. 벤츠 전기차는 지난해 8월1일 인천 청라국제도시 아파트 지하주차장에서 화재 사고를 일으켰다. 당시 충전 중이던 벤츠 전기차 한 대에서 불이 나 인근 차량 87대가 전소되고 783대가 그을러 38억원에 달하는 재산 피해가 발생했다. 당시 주민 23명은 연기를 마셔 병원으로 이송됐으며 화재로 아파트 14개 동 1581가구의 수돗물 공급이 끊기고, 5개동 480가구가 단전돼 승강기 운행이 중단되는 등 입주민 불편이 극심했다. 한때 주민 수백명이 피신하는 등 ‘도심 대형 전기차 화재’의 대표 사례로 기록됐다. 하지만 경찰은 장기간의 감식 끝에 “정확한 화재 원인을 확인할 수 없다”며 ‘원인 불명’ 결론을 내렸다. 수사 결과, 해당 벤츠 전기차의 배터리는 중국 CATL이 제조한 셀을 벤츠가 직접 조립해 만든 배터리팩으로 확인됐다. 현재 국내에서 판매 중인 벤츠 전기차 대부분(EQE, EQS 등)은 중국 CATL 또는 파라시스(Parasis) 배터리를 탑재하고 있다. 2심에선 “책임 없다” EQA 등 극히 일부 모델에만 LG에너지솔루션, SK온 배터리가 사용된다. 이에 공정위는 화재 발생 이후 벤츠코리아에 대한 직권조사를 시행했다. 공정위는 지난해 9월과 지난 1월에 각각 벤츠코리아 본사와 제휴 딜러사에 대한 현장 조사를 벌여 제재가 필요하다는 결론을 냈다. 공정위는 벤츠코리아 추가 의견서를 받고, 위원회 회의를 열어 최종 제재 여부와 수위를 확정할 예정이다. 표시광고법 위반 시 관련 매출액 최대 2%, 공정거래법 위반 시 최대 4% 내에서 과징금이 산정, 제재 강도가 낮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이다. 공정위 제재 착수에도 벤츠의 콧대는 꺾이지 않았다. 벤츠코리아는 “심사보고서의 결론은 당사의 법률적 판단과는 일치하지 않으며 제기된 혐의는 근거가 없다고 보고 있다”며 “추후 심사보고서 내용을 면밀히 검토한 후, 절차에 따라 의견을 제출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그러면서 “공정위 판단을 존중하지만, 회사의 법률적 판단과는 일치하지 않는다”며 “제기된 혐의는 근거가 없다고 보고 있다”는 공식 입장을 발표해 진통이 예상된다. 벤츠 전기차는 지난해 인천 청라 아파트 지하주차장에서 대형 화재를 낸 데 이어, 최근 수원시에서도 유사한 사고를 일으켜 배터리 안정 논란을 다시 불러일으켰다. 지난 10월5일 경찰과 소방에 따르면, 이날 오전 8시4분경 경기 수원시 권선구의 1800세대 규모 아파트 지하 1층 주차장에 서 있던 벤츠 전기차에 불이 났다. 이 불로 관리사무소 50대 직원이 연기를 마셔 병원으로 옮겨졌으며, 주민 수십여명이 명절 전날 오전 한때 대피하는 소동이 벌어졌다. 이 사고로 벤츠 전기차를 포함해 인근 차량 3대가 불에 탔고, 주차장 내부가 그을려 한동안 입주민 출입이 통제됐다. 소방당국은 ‘지하주차장 차량에서 연기가 난다’는 신고를 받고 출동, 펌프차 등 장비 10여대와 소방관 50여명을 투입해 진화 작업을 벌였다. 화재 발생 20여분 만에 연소 확대를 저지했고, 오전 8시43분경 초진에 성공했다. 이후 잔불 정리와 차량 냉각 작업을 거쳐 오전 10시16분에 완진시켰다. 소방 관계자는 “119 신고가 신속했고 출동 거리가 짧아 초기 대응이 빠르게 이뤄져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었다”고 밝혔다. 법원 ‘결함 아님’ 판결 ‘제재 대상’ 벤츠 편든 재판부 소방대원들은 불이 난 차량을 지상으로 끌어올려 열기를 식히는 등 2차 발화를 막기 위한 안전조치를 이어갔다. 현재까지 파악된 바에 따르면, 화재 당시 차량은 충전 중이었던 것으로 확인됐다. 다만 배터리 결함에 의한 발화인지, 전선 또는 충전기 접속부 문제 등 다른 원인에 의한 것인지는 아직 조사 중이다. 경찰과 소방당국은 국립과학수사연구원과 함께 합동감식을 실시해 배터리팩 손상 여부 및 충전 설비 결함을 중심으로 원인을 조사할 예정이다. 화재 차량은 2023년식 EQA-250 모델로 SK온 배터리가 장착된 것으로 알려졌다. 한편 국내 전기차 등록 대수는 지난 9월 기준, 60만대를 돌파했지만 화재 사고 관련 안전 관리는 미흡한 상태다. 국토교통부는 청라 화재 이후 지하주차장 내 전기차 충전소 안전기준 강화안을 추진 중이지만, 구체적인 방재 설비 기준은 아직 확정되지 않았다. 지방자치단체별 안전관리 강화 조례도 제각각이다. 지속되는 품질 문제에 전기차 관련 허위광고 혐의까지 겹치면서 벤츠의 입지가 좁아지고 있다. 일각에서는 “벤츠코리아 설립 이후 최대 위기”라는 평가도 나온다. 여기에 국내 최대 딜러사인 한성자동차 노조의 파업으로 서비스 품질 저하 문제가 불거지며 브랜드 이미지에도 타격이 예상된다. 연일 터진 사고 이전까지 벤츠는 국내 수입 전기차 시장에서 높은 판매량을 기록했다. 소형 전기 스포츠유틸리티차(SUV) EQA·EQB에 이어 전기 세단 EQE·EQS까지 라인업을 확대하며 시장을 선도했다. 2023년에는 전기차 판매량 9282대를 기록하기도 했다. 그러나 2024년 8월 벤츠 EQE 전기차 화재 사고 이후 분위기는 급변했다. 화재 전 월평균 400대 수준이던 판매량은 사고 이후 절반 이하로 급감했다. 한국수입자동차협회(KAIDA)에 따르면 올해 상반기 벤츠 전기차 판매량은 768대로, 전년 동기(2764대) 대비 72.2% 줄었다. 사고 이후 월 판매량은 100~200대에 그치며 반등 조짐을 보이지 않고 있다. 벤츠의 국내 최대 딜러사인 한성자동차의 노조 파업도 새로운 악재다. 수입차 업계는 딜러사와 벤츠코리아가 별개 법인임에도 불구하고 노조 파업으로 소비자 피해가 커지고 있어 결국 벤츠의 이미지 실추로 이어지고 있다고 분석한다. 추락하는 럭셔리카 한성자동차 노조는 지난 7월 31일부터 무기한 총파업에 돌입했다. 2023년 노조 설립 이후 진행된 3년 연속 파업으로, 사실상 매년 파업을 이어오고 있다. 노조는 구조조정과 차량 할인에 영업사원 인센티브를 활용하는 ‘선수당 할인’ 제도 등에 반발하고 있다. 최근에는 일부 정비 인력까지 준법투쟁에 나서면서 서비스 지연도 발생하고 있다. 실제 차량 정비 예약이 당일 일방적으로 취소되는 사례가 잇따르면서 소비자 불만은 커지고 있다. 이로 인해 “벤츠의 사후 관리 부실은 결국 한성자동차 탓”이라는 비판까지 나온다. <smk1@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