뒷골목 떠도는 ‘터미널 괴담’ 오해와 진실

‘게이에 당했다’ 소문이 사실로…

[일요시사 취재1팀] 김태일 기자 = 동서울터미널은 예전부터 ‘동성애자들의 일탈 창구’ ‘남자 몰카 위험지대’ 등 갖은 루머에 시달렸다. 최근 그저 떠도는 괴담이라고만 치부했던 괴담이 사실로 드러났다. 옆 칸 남성을 몰래 촬영하던 남성이 현행범으로 체포된 것. 이 사건 이후 동서울터미널 관련 경험담들이 인터넷을 뜨겁게 달궜다. 동서울터미널 측에서 단속을 강화하겠다는 입장을 밝혔지만 이미 바닥을 친 이미지가 회복되려면 시간이 걸릴 것으로 보인다.
 

지난 23일 서울 광진경찰서는 지난 21일, 동서울터미널 3층 남자화장실서 다른 남성을 불법 촬영한 혐의(성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 위반)로 40대 남성 A씨를 현장서 검거했다고 밝혔다. 

옆 칸서 촬영
경고 무용지물

경찰 조사에 따르면 A씨는 이날 오후 5시께 해당 화장실 끝 칸에 숨어 스마트폰을 이용해 칸막이 위로 옆칸 남성을 촬영했다. 경찰은 당시 같은 화장실서 손을 씻고 있던 박모씨(23)의 신고를 받고 출동해 현장서 벗어나려던 A씨를 붙잡았다. 

박씨는 “한 남성이 망을 보듯 주위를 둘러보며 화장실 안을 맴돌아 수상하게 생각했다”며 “최근 남성 대상 몰카 범죄가 많다는 소문이 떠올라 바로 경찰에 신고했다”고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경찰 조사에서 A씨는 영상을 유포해 금전적 이익을 취득할 의도는 없었으며 본인 소장을 목적으로 영상을 촬영했다고 진술했다. 경찰 관계자는 “A씨의 휴대전화를 압수해 추가 영상이나 피해자가 있는지 조사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이미 오래 전부터 동서울터미널 2·3층 남자화장실은 동성애자들의 성적 일탈 창구로 유명세를 떨쳤다. 동서울터미널 2, 3층 화장실 벽면에는 군인을 유혹하는 동성애자들의 낙서가 가득하다. 

‘군인, 학생, 청년들 노크 3번 하면 문 열어주세요!’ 등의 손글씨가 전화번호, 메신저 아이디(ID)와 함께 적혀 있다.

‘○○섹스’ 등 성관계를 암시하는 손글씨와 나란히 적힌 전화번호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워낙 자주 낙서가 쓰이기 때문에 화장실 곳곳에는 관리실 측이 지운 흔적도 많다. 동서울터미널 남자화장실에선 동성애자뿐 아니라 부대 복귀를 앞둔 군인들 대상의 몰래카메라(몰카) 범죄도 기승을 부리고 있다. 
 

특히 승·하차장이 있는 1층에 비해 비교적 한산한 2·3층 남자화장실서 부대 복귀를 앞둔 군인들이 성욕을 해소한다는 소문이 퍼졌다. 

그러다 보니 남자화장실로는 이례적으로 “이 곳은 모두가 사용하는 공간입니다. 항상 청결하고 다음사람을 배려하여 주십시오. 미풍양속을 해치거나 다른 사람에게 불쾌한 행동을 할 시에 그 즉시 불이익을 받게 됨을 양지해 주십시오. 저희는 주기적으로 순찰중이며, 비정상적 고객을 받지 않을 권리가 있습니다. 이점 숙지해주시고, 착오 없으시길 바랍니다”라는 경고문이 붙어 있다. 

남자 화장실 몰래 촬영한 40대남 체포
스마트폰 이용 칸막이 위로 옆칸 촬영

몰카 범죄가 끊이질 않다 보니 터미널 상인들이 자발적으로 남자화장실을 순찰하고 있다. 이곳서 당구장을 운영하는 B씨는 지난달 화장실에 갔다 20대 남성이 소변을 보는 척하며 용변기 칸 안을 문틈으로 훔쳐보는 걸 목격했다. 


이 남성은 B씨가 경찰에 신고하려 하자 달아났다. 

7월에는 한 남성이 양변기를 밟고 올라서 옆칸에서 용변 보던 다른 남성을 스마트폰으로 촬영하는 걸 목격해 붙잡으려다 실패했다. 

B씨는 “남자화장실 몰카 때문에 한숨이 절로 나온다”고 말했다. 편의점 주인 C씨는 “전국서 사람이 모이고 군인도 많다 보니 남자화장실 몰카범을 포함해 희한한 사람이 꽤 되지만 현장서 적발하지 않으면 사실상 못 잡는다”며 “종종 화장실을 순찰해도 허탕치는 게 다반사”라고 말했다. 

같은 건물서 식당을 운영하고 있는 D씨는 “몰카 찍지 말라는 스티커만 붙이면 어떡하느냐”며 “관리나 단속이 전혀 안된다”고 하소연했다. 

실제 화장실 벽면은 지나친 낙서와 광고지 때문에 주기적으로 페인트칠을 새로 하고 있지만, 다시 그 위에 광고지가 붙는 상황이 반복되고 있다. 

한 가게 점원은 “3층 남자화장실의 경우에는 군 장병 라운지가 있고 인적이 드물어 동성애 관련 광고 등이 더 심하게 붙는다”며 “터미널서 스티커와 낙서를 떼다 못해 아예 페인트를 새로 칠하지만 그때마다 다시 생긴다”고 말했다. 

군인이 타깃
동성애 천국

동서울터미널 남자화장실서 찍은 몰카와 동성애 동영상이 온라인상에서 큰 논란이 되고 있다. 최근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텀블러의 블로그 ‘동서울터미널 군인 전문’에는 남자화장실을 이용하는 군인들을 몰래 촬영한 동영상이 연이어 올라오고 있다. 

주로 군복을 입은 남성이 화장실서 스마트폰으로 음란 동영상을 시청하며 자위행위를 하는 모습을 누군가가 옆칸서 몰래 찍은 것이다. ‘국내 100% 리얼 짜릿 영상’이라고 홍보하는 이 블로그 속 동영상에는 몰카를 찍고 있는 중년 남성이 스테인리스 소재 가림막에 어렴풋이 비친다. 
 

이 화장실서 군복을 입은 남성에게 유사성행위를 해주는 동영상도 텀블러에 여럿 올라와 있다. 늘 황금색 마스크를 쓴 채 등장하는 한 남성은 ‘2017년 10월7일 찍은 따끈한 영상입니다. 연휴 기간 동안 총 3번 했네요. 너무 좋습니다’라며 음란 동영상을 올렸다. 

이 남성이 올린 동영상 배경 수십 곳이 모두 동서울터미널 화장실이었다. 

얼마 전에는 한 누리꾼이 직접 경험했다고 고백한, 동서울 터미널 화장실 괴담이 온라인상에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 혼자 할머니댁에 가기 위해 터미널에 간 그는 갑작스럽게 배가 아파 화장실에 갔지만 1·2층 화장실 모두 사람이 가득했다. 


그렇게 가게 된 3층 화장실. 근데 분위기가 묘했다. 누리꾼은 “변기칸 문에 남자 성기랑 게이 관련된 낙서도 많고 뭔가 게이? 집합소? 느낌이 났다. 화장실 안엔 저랑 어떤 뚱보 아저씨밖에 없었다. 그 아저씨는 저랑 몇 칸 떨어진 곳에 들어갔고 전 별일 있겠어? 하고 일을 봤다”라고 당시 상황을 전했다. 

그런데 몇 칸 떨어진 곳에 간 아저씨가 갑자기 누리꾼의 바로 옆 칸으로 옮겼다. 이때부터 살짝 무서웠다고. 

스티커, 낙서…
단속도 소용없다

누리꾼은 “잠시 뒤 무슨 소리가 나서 위를 올려다봤는데 벽 위로 머리 하나가 나오더니 저랑 딱 눈이 마주쳤다. 그리고 핸드폰으로 동영상인지 찍더라. 마치 영화 <도가니>서 나온 그 장면처럼 저를 감상하고 있었다”라고 말했다. 

이어 “온 몸이 덜덜 떨리고 땀이 나고 온갖 생각이 다 들고 엄청 무서웠다. 막 마취시켜서 성폭행하려는 건 아닌지. 칼로 갑자기 찌르는 건 아닌지 그런 생각도 들고. 112에 전화하려다가 그 전에 해코지 당할까봐 전화도 못하고. 뭘 쳐다보냐고 하니까 다행히 머리를 내리긴 했지만 그래도 무섭더라”라고 아찔했던 당시의 이야기를 어렵게 털어놨다. 

대충 짐을 챙겨 밖으로 뛰쳐나온 그는 이후로도 잘 때도 누가 자신을 보는 것 같고 선풍기마저 자신을 쳐다보는 듯한 이상한 기분에 한동안 힘들었다고 한다. 


끝으로 “트라우마라는 게 왜 생기는지 알겠더라. 그때 왜 경찰에 신고하지 못했는지 너무 후회된다”라고 글을 마무리 지었다. 실제로 이를 접한 일부 누리꾼들은 해당 괴담을 들어본 적이 있다고 고백했다. 

타 커뮤니티 및 SNS에도 비슷한 사례들이 쏟아졌다. 이를 접한 한 누리꾼은 “대한민국 남자화장실 중 몰카 조심해야하는 장소 중 하나가 동서울 터미널 3층 화장실이다. 화장실 곳곳에 몰카 설치돼있고 거기서 볼일 보면 그 장면 그대로 동영상으로 녹화돼 사이트에 올라간다”라고 경고했다. 

특히 “뭣 모르고 갔다가 파트너 찾으러 나온 게이로 오해받을 수도 있고 정말 위험한 장소니 늦은 시간대에는 절대 가지 말기 바란다”라고 덧붙였다. 

몰카범 소문이 퍼지면서 터미널 내는 초상집 분위기다. 상인들은 “구멍이 뚫린다는 소문이 돌면서 아예 벽면을 철제로 바꾼 지 오래”라며 “그럼에도 화장실을 사용할 때마다 걱정이 되는 것은 사실”이라고 답했다. 

관리소 이례적으로 경고문 부착
상인들이 직접 순찰 나서기도

일부에선 “경찰이 스티커만 붙이고 추가 대책을 내놓지 않아 문제가 반복되는 것 같다”며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상황”이라고 지적하기도 했다. 

동서울터미널 화장실에는 여전히 퇴폐 유흥업소 광고와 성적인 내용이 담긴 낙서가 가득하다. 최근 몰카 논란에 경찰이 화장실 칸마다 몰카 경고 스티커를 붙여놨지만 스티커 위에 다시 유흥업소 광고가 붙어 있는 모습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화장실에 붙어 있는 광고지는 대부분 ‘남성 사우나’ 또는 ‘찜방’으로 불리는 동성애 유흥업소 광고로, 전화번호와 함께 선정적인 문구가 쓰여 있다. 

한 업소는 “스티커를 보고 찾아오는 사람이 많다”며 “스티커를 보고 전화를 건 사람들에게 주소를 알려주는 식으로 영업을 하고 있다”고 답했다. 

경찰 관계자는 동서울터미널 화장실 논란에 대해 “유동인구가 많은 곳이기 때문에 주기적으로 순찰을 돌고 있다”며 “최근 논란이 된 화장실에 대해서도 자주 살펴보고 있다”고 설명했다. 

남자화장실 몰카 유통창구인 텀블러를 운영하는 야후는 미국 법을 들어 성인음란물 수사에 비협조적이라 몰카범 체포가 쉽지 않은 게 현실이다. 미국 법률은 아동음란물은 매우 엄격히 처벌하면서도 성인음란물에는 관대한 편이다. 

야후가 2012년 한국 시장에서 철수하면서 수사 협조를 요청할 창구도 마땅치 않다. 경찰 관계자는 “텀블러를 통한 음란물 유포가 심각해지자 일각에선 텀블러 접속 자체를 막아야 한다는 강경론까지 나온다”고 말했다.

남자 몰카 피해자는 계속 증가하고 있다. 보통 성범죄 사건은 남성이 여성을 상대로 저지르는 일이 대부분이지만 최근에는 동성 간의 성범죄, 특히 남성 간의 성범죄도 늘어나고 있는 추세다. 

경찰청에 따르면 남자 몰카 피해자는 2015년 120명서 지난해 160명으로 늘었으며 올해 1∼8월에는 이미 125명의 피해자가 발생했다 한다. 즉, 남성 몰카 피해자가 계속 증가하고 있다는 뜻이다.

남성 간의 성범죄 사건이 늘어나고 있지만 사실상 피해자들의 대처는 아직 소극적인 것으로 보인다. 2016년 전국 성폭력 실태조사에서 남성들은 성폭력 피해사실을 남에게 알리는 경우가 여성에 비해 매우 드물었다고 나타났다. 

남자는 대부분 몰카 피해자가 될 수 있다는 경각심이 거의 없어 주의를 덜 기울이는 점 등을 감안하면 실제로는 피해자가 더 많을 거라고 경찰은 예상했다. 

남 몰카 증가
경각심 부족

성범죄와 관련된 법조항을 보면 피해자를 ‘부녀’로 한정하지 않고 ‘사람’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 말은 즉 남성도 성범죄 피해자에 포함이 되며, 처벌도 똑같이 이루어진다는 뜻이다. 

한 변호사는 “오해에 의한 남성 간의 성범죄 혐의를 받고 있을 때 스스로 가벼운 사안이라 여겼다가 사건이 잘못되는 경우가 많다”며 “성범죄의 경우 처벌이 강력해지는 추세이므로 사건 초기부터 성범죄 전담 변호사의 조력은 필수”라고 조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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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엔진 멈춘 3억 마이바흐 미스터리

[단독] 엔진 멈춘 3억 마이바흐 미스터리

[일요시사 취재1팀] 김성민 기자 = 서울 소재 H건설사 대표가 타는 메르세데스 벤츠의 최고급 사양인 마이바흐가 구매한 지 3년 만에 엔진 고장으로 멈췄다. H사 대표 박모씨는 2022년 말 메르세데스벤츠코리아와 한성자동차를 상대로 수리비 및 대차료 지급 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무상 수리해야 한다고 했던 1심 재판부는 급기야 ‘벤츠의 책임이 없다’는 판결을 내렸다. 2019년식 ‘마이바흐 S560 4MATIC’은 2022년 9월13일 오전 11시, 박씨의 운전기사가 서울 용산 한강로를 주행하던 중 계기판에 엔진 경고등이 켜지면서 차체 진동과 함께 엔진이 멈췄다. 곧바로 차량을 한성자동차 성동서비스센터에 입고했으나 진단은 충격적이었다. 침수차 의심 수리 나 몰라라 “엔진 연소실에 물이 들어가 부품이 손상된 것으로 보인다. 침수 차로 의심된다”며 무상 수리가 어렵다는 것이었다. 이에 박씨와 자동차 감정사는 반대 의견을 제시했다. 그날은 폭우나 침수와 무관한 날씨였으며 정상 주행 도중 발생한 차량 고장이었기 때문이다. 원고인 H사는 “벤츠코리아가 제공하는 ‘통합서비스패키지(ISP)’ 보증에 따라 3년 또는 10만km 이내의 결함은 무상 수리 대상”이라고 주장했다. 이에 1심 재판부(서울중앙지법 민사47단독, 2024년 7월23일)는 “침수나 연료 혼유 등 외부 요인으로 단정할 증거가 부족하다. 한성자동차는 ISP 약정에 따라 엔진 결함을 무상 수리해야 한다”며 원고의 손을 들어줬다. 그러면서 벤츠의 수입사인 한성자동차에 대해 월 400만원의 대차료 배상을 명령했다. 법원은 독립 감정인 강대공씨를 지정해 정밀 감정을 실시했다. 강씨의 감정서에는 “침수 차량에서 보이는 오염 흔적이 없다. 냉각수(부동액) 누출 흔적도 발견되지 않았다”며 “엔진 내부 수분은 외부 요인이나 정비 과정에서 유입됐을 가능성이 있다”고 분석했다. 또 추가 사실조회 회신에서도 “혼유(연료 내 수분 혼입) 여부는 감정 범위를 벗어나며, 침수가 아닌 요인으로 인한 수분 유입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밝혔다. 2심(서울중앙지법 제8-3민사부)에서 피고 측은 반격했다. 벤츠코리아의 법률대리인 김성진 변호사(김앤장 법률사무소)는 지난 8월27일 제출한 준비서면에서 “ISP는 차량 ‘결함’이 발견된 경우에만 적용된다. 외부 수분 유입으로 인한 손상은 명백히 예외 사항이며 제조사 귀책이 없는 이상 무상 수리 의무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한성자동차 측(법무법인 세종)도 항소이유서에서 “ISP는 제조상의 하자에 국한된 품질보증 계약이다. 이번 사안은 ‘우발적 손상’으로 보증 대상이 아니다”라고 반박했다. 서울중앙지법 민사8-3부는 지난 9월26일, “한성자동차의 패소 부분을 취소하고, 박씨의 청구를 기각한다”고 판시했다. 2심 판결은 “외부 요인, 제조 결함이 아니”라며 1심을 전면 뒤집은 것이다. 항소심 재판부는 “외부 수분 유입으로 인한 손상은 차량 제조사 귀책 사유에 해당하지 않는다. ISP는 ‘제조 결함’에 한정된 보증이다. 한성자동차의 패소 부분을 취소하고 원고의 청구를 기각한다”고 밝혔다. 즉, 법원은 이 사건을 ‘차체·부품 결함’이 아닌 ‘사용 중 발생한 외부 요인’으로 결론 내린 것이다. 주행 중 경고등 켜지고 진동 후 엔진 스톱 감정 결과 “누수 없음, 외부 수분 가능성” 결국 박씨는 3년에 걸친 법정 다툼 끝에 패소했다. 따라서, 한성자동차는 더 이상 수리 의무를 부담하지 않게 됐으며, H사의 항소도 기각됐다. 이번 재판의 핵심 쟁점은 ‘수분 유입의 원인’이 제조 결함이냐, 외부 요인이냐였다. 법원은 “차체·부품의 결함으로 인한 냉각수 누수가 없었고, 외부 요인 가능성이 더 크다”고 판단했다. 결국, 제조물 책임(PL법)에 따른 보증 범위가 아닌 사용·관리상의 문제로 결론이 난 셈이다. 이번 판결은 ‘결함’의 해석 범위를 좁혀 정의한 사례다. 즉, ‘사용자 과실이 아닌 상황’이라도 차체·부품 자체의 결함이 입증되지 않으면 보증이 적용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자동차 전문가들은 “소비자 입증 책임만 더 무거워졌다”며 “ISP나 제조사 보증이 소비자 보호장치로 설계됐지만, 현실적으로 ‘결함 입증’의 벽이 너무 높다. 이번 판결은 소비자가 과실이 없더라도 제조사 책임을 묻기 어렵다는 선례가 될 수 있다”고 비판했다. 법조계 일각에서는 이번 판결을 “제조물 책임법과 민법상 품질보증의 경계선을 명확히 한 판례”로 평가하고 있다. 박씨의 마이바흐는 결국 엔진을 교체하지 못한 채 3년 동안 방치됐다. 이번 사건은 ‘명차’의 기술력보다 보증 체계의 경계선이 어디까지인지를 가늠케 한 사건이다. 소비자는 결함을 주장할 때 ‘입증의 문턱’을, 제조사는 ‘보증의 한계’를 확인했다. 독일 명차 대명사인 벤츠의 전기차는 해마다 폭발하는 배터리 화재로 뉴스를 장식하고 있다. 전기차뿐만 아닌 내연기관 모델 중에서도 최상위급인 마이바흐조차 원인 모를 엔진 고장으로 멈췄지만, 고객과 3년간 법정 다툼을 이어간 회사로 남겨졌다. 1심선 인정 “무상 수리” 벤츠는 고객과 진행한 재판에선 승소했지만, 우리나라 정부의 제재 착수 대상이 됐다. 공정거래위원회는 전기차에 저가 배터리를 쓰고도 고가 배터리를 쓴 것처럼 허위 광고한 혐의를 받는 벤츠코리아에 대한 제재에 착수했다. 공정위의 최종 판단은 벤츠코리아와 벤츠 전기차 이용자 간 진행 중인 법적 분쟁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칠 전망이다. 해당 저가 배터리는 지난해 인천 청라 아파트 지하 주차장 화재가 시작된 전기차에도 쓰였다. 업계에 따르면 공정위는 지난 8월12일, 벤츠코리아를 표시광고법·공정거래법 위반 혐의로 제재해야 한다는 의견을 담은 심사보고서(검찰 공소장에 해당)를 회사 쪽에 발송했다. 벤츠코리아는 자사의 모든 전기차에 중국 1위 배터리 업체인 시에이티엘(CATL)의 배터리가 장착됐다며 허위 사실을 소비자에게 알린 혐의를 받는다. 제휴사 딜러를 상대로 소비자에게 이런 허위 사실을 설명하라고 교육하는 등 소비자를 부당하게 속여 유인한 혐의도 있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EQE 차주들은 벤츠 본사, 벤츠코리아, 공식 딜러사 한성자동차 등 판매사 7곳, 벤츠파이낸셜서비스코리아 등 리스사 2곳을 상대로 손해배상소송을 제기했다. 벤츠 전기차는 지난해 8월1일 인천 청라국제도시 아파트 지하주차장에서 화재 사고를 일으켰다. 당시 충전 중이던 벤츠 전기차 한 대에서 불이 나 인근 차량 87대가 전소되고 783대가 그을러 38억원에 달하는 재산 피해가 발생했다. 당시 주민 23명은 연기를 마셔 병원으로 이송됐으며 화재로 아파트 14개 동 1581가구의 수돗물 공급이 끊기고, 5개동 480가구가 단전돼 승강기 운행이 중단되는 등 입주민 불편이 극심했다. 한때 주민 수백명이 피신하는 등 ‘도심 대형 전기차 화재’의 대표 사례로 기록됐다. 하지만 경찰은 장기간의 감식 끝에 “정확한 화재 원인을 확인할 수 없다”며 ‘원인 불명’ 결론을 내렸다. 수사 결과, 해당 벤츠 전기차의 배터리는 중국 CATL이 제조한 셀을 벤츠가 직접 조립해 만든 배터리팩으로 확인됐다. 현재 국내에서 판매 중인 벤츠 전기차 대부분(EQE, EQS 등)은 중국 CATL 또는 파라시스(Parasis) 배터리를 탑재하고 있다. 2심에선 “책임 없다” EQA 등 극히 일부 모델에만 LG에너지솔루션, SK온 배터리가 사용된다. 이에 공정위는 화재 발생 이후 벤츠코리아에 대한 직권조사를 시행했다. 공정위는 지난해 9월과 지난 1월에 각각 벤츠코리아 본사와 제휴 딜러사에 대한 현장 조사를 벌여 제재가 필요하다는 결론을 냈다. 공정위는 벤츠코리아 추가 의견서를 받고, 위원회 회의를 열어 최종 제재 여부와 수위를 확정할 예정이다. 표시광고법 위반 시 관련 매출액 최대 2%, 공정거래법 위반 시 최대 4% 내에서 과징금이 산정, 제재 강도가 낮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이다. 공정위 제재 착수에도 벤츠의 콧대는 꺾이지 않았다. 벤츠코리아는 “심사보고서의 결론은 당사의 법률적 판단과는 일치하지 않으며 제기된 혐의는 근거가 없다고 보고 있다”며 “추후 심사보고서 내용을 면밀히 검토한 후, 절차에 따라 의견을 제출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그러면서 “공정위 판단을 존중하지만, 회사의 법률적 판단과는 일치하지 않는다”며 “제기된 혐의는 근거가 없다고 보고 있다”는 공식 입장을 발표해 진통이 예상된다. 벤츠 전기차는 지난해 인천 청라 아파트 지하주차장에서 대형 화재를 낸 데 이어, 최근 수원시에서도 유사한 사고를 일으켜 배터리 안정 논란을 다시 불러일으켰다. 지난 10월5일 경찰과 소방에 따르면, 이날 오전 8시4분경 경기 수원시 권선구의 1800세대 규모 아파트 지하 1층 주차장에 서 있던 벤츠 전기차에 불이 났다. 이 불로 관리사무소 50대 직원이 연기를 마셔 병원으로 옮겨졌으며, 주민 수십여명이 명절 전날 오전 한때 대피하는 소동이 벌어졌다. 이 사고로 벤츠 전기차를 포함해 인근 차량 3대가 불에 탔고, 주차장 내부가 그을려 한동안 입주민 출입이 통제됐다. 소방당국은 ‘지하주차장 차량에서 연기가 난다’는 신고를 받고 출동, 펌프차 등 장비 10여대와 소방관 50여명을 투입해 진화 작업을 벌였다. 화재 발생 20여분 만에 연소 확대를 저지했고, 오전 8시43분경 초진에 성공했다. 이후 잔불 정리와 차량 냉각 작업을 거쳐 오전 10시16분에 완진시켰다. 소방 관계자는 “119 신고가 신속했고 출동 거리가 짧아 초기 대응이 빠르게 이뤄져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었다”고 밝혔다. 법원 ‘결함 아님’ 판결 ‘제재 대상’ 벤츠 편든 재판부 소방대원들은 불이 난 차량을 지상으로 끌어올려 열기를 식히는 등 2차 발화를 막기 위한 안전조치를 이어갔다. 현재까지 파악된 바에 따르면, 화재 당시 차량은 충전 중이었던 것으로 확인됐다. 다만 배터리 결함에 의한 발화인지, 전선 또는 충전기 접속부 문제 등 다른 원인에 의한 것인지는 아직 조사 중이다. 경찰과 소방당국은 국립과학수사연구원과 함께 합동감식을 실시해 배터리팩 손상 여부 및 충전 설비 결함을 중심으로 원인을 조사할 예정이다. 화재 차량은 2023년식 EQA-250 모델로 SK온 배터리가 장착된 것으로 알려졌다. 한편 국내 전기차 등록 대수는 지난 9월 기준, 60만대를 돌파했지만 화재 사고 관련 안전 관리는 미흡한 상태다. 국토교통부는 청라 화재 이후 지하주차장 내 전기차 충전소 안전기준 강화안을 추진 중이지만, 구체적인 방재 설비 기준은 아직 확정되지 않았다. 지방자치단체별 안전관리 강화 조례도 제각각이다. 지속되는 품질 문제에 전기차 관련 허위광고 혐의까지 겹치면서 벤츠의 입지가 좁아지고 있다. 일각에서는 “벤츠코리아 설립 이후 최대 위기”라는 평가도 나온다. 여기에 국내 최대 딜러사인 한성자동차 노조의 파업으로 서비스 품질 저하 문제가 불거지며 브랜드 이미지에도 타격이 예상된다. 연일 터진 사고 이전까지 벤츠는 국내 수입 전기차 시장에서 높은 판매량을 기록했다. 소형 전기 스포츠유틸리티차(SUV) EQA·EQB에 이어 전기 세단 EQE·EQS까지 라인업을 확대하며 시장을 선도했다. 2023년에는 전기차 판매량 9282대를 기록하기도 했다. 그러나 2024년 8월 벤츠 EQE 전기차 화재 사고 이후 분위기는 급변했다. 화재 전 월평균 400대 수준이던 판매량은 사고 이후 절반 이하로 급감했다. 한국수입자동차협회(KAIDA)에 따르면 올해 상반기 벤츠 전기차 판매량은 768대로, 전년 동기(2764대) 대비 72.2% 줄었다. 사고 이후 월 판매량은 100~200대에 그치며 반등 조짐을 보이지 않고 있다. 벤츠의 국내 최대 딜러사인 한성자동차의 노조 파업도 새로운 악재다. 수입차 업계는 딜러사와 벤츠코리아가 별개 법인임에도 불구하고 노조 파업으로 소비자 피해가 커지고 있어 결국 벤츠의 이미지 실추로 이어지고 있다고 분석한다. 추락하는 럭셔리카 한성자동차 노조는 지난 7월 31일부터 무기한 총파업에 돌입했다. 2023년 노조 설립 이후 진행된 3년 연속 파업으로, 사실상 매년 파업을 이어오고 있다. 노조는 구조조정과 차량 할인에 영업사원 인센티브를 활용하는 ‘선수당 할인’ 제도 등에 반발하고 있다. 최근에는 일부 정비 인력까지 준법투쟁에 나서면서 서비스 지연도 발생하고 있다. 실제 차량 정비 예약이 당일 일방적으로 취소되는 사례가 잇따르면서 소비자 불만은 커지고 있다. 이로 인해 “벤츠의 사후 관리 부실은 결국 한성자동차 탓”이라는 비판까지 나온다. <smk1@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