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15주년 기획특집>⑥피살된 재러 영사 최덕근

머나 먼 이국땅 싸늘한 주검 ‘진실은 어디에?’

지금으로부터 15년 전인 지난 1996년, 세간을 충격으로 몰아넣은 사건이 벌어졌다. ‘재러 영사 피살사건’이 바로 그것. 당시 북한의 마약밀매 동향을 추적하던 최덕근 영사는 괴한의 습격에 싸늘한 주검으로 남았다. 수사초점은 북한의 소행일 가능성에 맞춰졌다. 모든 정황이 북한을 지목하고 있어서다. 하지만 사건은 유야무야가 됐다. 외교상의 문제 때문이었다. 러시아 형법상 살인사건의 공소시효는 15년. 올해가 끝이다. 머나먼 이국땅에서 대한민국을 대표해 일했던 한 외교관의 죽음이 결국 영구 미제로 남게 된 것이다. 머지않아 한·러 외교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될 충격적인 사건, 그 전말을 따라가 봤다.

북한 공작원들이 사용하는 독극물 검출돼
러 무성의, 한국 소극적인 태도에 유야무야

지난 1996년 10월1일 러시아로부터 끔찍한 소식이 들려왔다.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주재 한국 총영사관 소속 최덕근 영사가 자택 아파트 계단에서 싸늘한 시신으로 발견된 것. 최 영사는 블라디보스토크에 있는 한식당에서 저녁식사를 마친 뒤 귀가하던 중 괴한의 습격을 받고 피살된 것으로 알려졌다. 우리나라 외교관이 해외에서 살해된 것은 이 사건이 처음이었다.
 
수사의 초점은 북한의 소행일 가능성에 맞춰졌다. 최 영사가 사망 전 북한의 마약 밀매 동향을 캐기 위해 러시아-북한 경계지역이던 하산까지 가서 목숨을 건 첩보전을 벌인 사실이 알려진 데 따른 것이다. 피살 당시 그의 주머니에서 나온 메모는 ‘북한 소행설’에 한층 무게를 실었다.

첫 외교관 살해

메모에 따르면 최 영사는 북한의 100달러짜리 위조지폐 유통경로를 역추적하는 과정에서 인근 나홋카의 북한영사관에 상주하는 보위부의 정보망에 걸려들었다. 이 사실을 한국의 관계당국이 감지하고 신변안전에 주의를 당부했다. 하지만 최 영사는 추적을 중단하지 않았으며 거의 실체에 접근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무엇보다 부검결과, 최 영사의 몸에서 ‘네오스티그민 브로마이드’라는 성분이 검출된 게 결정적이었다. 이는 북한 공작원들이 ‘만년필 독침’에 주로 사용하는 독극물이다.

이에 따라 북한 측이 마약 및 위폐 조직과 러시아 브로커의 노출을 우려해 공작원이나 청부업자를 매수해 살해한 게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됐다. 이에 러시아 수사당국은 북한 공작요원의 테러 가능성에 대해 집중수사를 벌였다. 한국정부도 북한 측이 개입했을 가능성이 클 것으로 보고 러시아 정부에 북한 개입 여부를 철저히 수사해줄 것을 강하게 요청했다.

그러나 이후 안타깝게도 사건은 유야무야 돼 버리고 말았다. 러시아 당국의 무성의와 한국 정부의 소극적인 태도가 맞물린 결과였다.
러시아 측은 지난 1998년 10월 한?러 영사국장 회의에서 올 4월까지 최종 수사결과를 통보할 것을 약속했다. 그러나 지난 1999년 5월 김대중 전 대통령의 러시아 방문을 앞두고 시일을 미뤘다. 서로에게 감정이 상할 수 있는 일은 정상회담 테이블에 올려놓지 말자는 양측의 이해가 맞아떨어진 결과였다.

문제는 그 이후로도 러시아 당국이 최 영사 사건에 대한 수사결과 통보를 계속 미뤘다는 점이다. 이 가운데 러시아는 최 영사 사건을 강력범의 소행으로 몰고 갔다. 이와 함께 사실상 수사를 종결처리 했다. 사건 초기 북한 측의 소행으로 추정됐던 최 영사 사건의 진상은 제대로 규명되지 않은 채 한?러 외교사의 뒤안길로 밀려나게 될 처지에 놓였다.

그러던 지난 2007년, 러시아는 주러 한국대사관에 “수사 종결에 동의해 달라”고 요청하기도 했다. 러시아 형법상 살인 사건의 공소시효는 15년이다. 공소시효가 4년 남은 사건에 대해 수사 종결을 서두르는 이유에 대해 러시아는 “본국 영토 안에서는 조사를 할 만큼 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결국 영구 미제


이 같은 러시아 측의 해명을 두고 당시 한국 사회에선 많은 말들이 오고 갔다. 우선 진상이 드러날 경우 러시아는 북한과의 외교단절까지도 생각해야 하지만 이는 러시아에 손해가 되기 때문에 수사 조기 종결 카드를 꺼낸 것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 됐다. 일각에서는 북한 첩보를 수집했던 최 영사의 특수한 직무 때문에 한국과 러시아 양국 모두에 ‘말 못할 사정’이 있다는 추측도 흘러나왔다. 또 이 사건에 연루된 러시아인들 때문에 진상이 밝혀지기 어렵다는 얘기도 있었다.

그러나 지금까지 거론된 ‘특별한 사정’ 중 어느 것도 이 사건의 진상 규명을 가로 막는 결정적인 요인으로 보기 어렵다. 설령 스파이 스캔들이라고 해도 개인의 일생을 파괴한 사건에서 범인을 지목하지도 못하고 조사를 끝내는 것은 국제관례와 상식에 맞지 않는다는 지적이다.

결국 먼 이국땅에서 대한민국을 대표해 일했던 한 외교관의 죽음은 사실상 영구 미제로 남게 됐다. 그러나 “공소시효를 꽉 채워 살인자의 형사 책임을 벗겨주는 선례를 남길 것인가”라는 질책의 목소리는 15년이 흐른 지금도 여전히 울려 퍼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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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계 캄보디아’ 정부 뒷북 내막

‘마계 캄보디아’ 정부 뒷북 내막

[일요시사 취재1팀] 오혁진 기자 = 캄보디아 대학생 피살 사건에 대한 정부의 뒷북 대응에 논란이 일고 있다. 한국인들을 대상으로 한 범죄가 급증했음에도 침묵한 것이다. <일요시사>가 최초 보도했던 보이스피싱 원조 김미영 팀장 탈옥 사건에 이어 주무부처의 소극 행정이 지속되고 있는 셈이다. 정부는 급히 대책을 마련 중이지만 ‘코리안데스크’가 능사는 아니라는 분석이 나온다. 캄보디아 당국에 구금된 한국인은 수백명이다. 스캠(사기) 산업에 연루된 수만 1000여명으로 추산된다. 일부는 불법행위라는 걸 알면서도 발을 들였다. 문제는 구금 시설에서 빠져나오려다가 인신매매를 당하거나 살해당하는 일이 적지 않다는 것이다. 정부는 여러 사건을 인지했음에도 그저 피해자들에게 “기다리라”고만 했다. 감금 한국인 그들은 왜? 위성락 국가안보실장은 지난 15일 용산 대통령실에서 기자간담회를 열고 한국인 대상 범죄 피해가 확산하는 캄보디아 문제에 대해 언급했다. 앞서 정부는 지난 1월부터 8월까지 현지 공관에 접수된 감금 관련 신고는 약 330건, 외교부 공관 신고를 포함하면 약 550건인 것으로 파악했다. 대다수 사안이 처리된 가운데 현재 처리 중인 신고 건은 70여건이라고 위 실장은 설명했다. 위 실장은 “정부 차원에서 여러 대처를 하고 있지만, 캄보디아 내에서 범죄 대응은 본질적으로 캄보디아 주권 사안이기 때문에 우리가 대응하는 데 일정한 한계가 있다”며 “우리 국민 중 불법행위라는 것을 알면서도 자발적으로 발을 들인 경우도 많다”고 설명했다. 최근 현지에서 고문당해 숨진 대학생의 시신 운구가 지연된 상황과 관련해서는 “유가족과 소통하는 과정에서 공동 부검을 요구한 것과 관련이 있다”며 “캄보디아 측에서는 공동 부검이 흔치 않기 때문에 소화하려면 내부 절차가 있고, 내부 절차가 진행되는 데 시간이 소요됐다”고 부연했다. 위 실장은 현지 당국에 구금된 한국인 60명 송환 계획과 관련해서는 “빠른 시일 내 그분들을 서둘러서 데려오려는 입장”이라며 “항공편도 다 준비됐다”고 말했다. 돈이 급한 한국인들은 ‘큰돈을 벌 수 있다’는 인터넷 커뮤니티 게시글을 보고 동남아로 향한다. 태국이나 라오스 및 캄보디아 국경지대서 피싱 조직에 납치당하면 빠져나오기 쉽지 않다. 현지 당국에 신고한다고 해도 오히려 살해 협박을 받을 가능성이 크다. 캄보디아는 필리핀처럼 현지 수사기관 및 공무원들과 범죄조직 사이의 비리가 만연하다. 범죄조직 아지트를 당국이 확인해도 눈감아주는 경우가 다반사다. 현지 코리안데스크 있으나마나 똑같다? 유족·피해자에 “기다려라” 황당 대응 한 경찰 관계자는 “수감 중인 한국인이 다른 조직에 팔려가 인신매매가 벌어지거나 탈출을 시도하면 살해당하는 경우도 있다”고 전했다. 캄보디아 피싱 조직은 대부분 중국계 갱단인 ‘흑사회’로 구성돼있다. 이들은 캄보디아 고위 공무원들에게 우리나라 돈 수억원을 상납한다. 매수된 공무원은 구속된 조직원을 빼주는 것은 물론, 경찰 급습 시점을 사전에 알려주기도 한다. 캄보디아 피싱 조직이 드러나기 시작한 건 필리핀과 태국에 주둔했던 흑사회 간부들이 캄보디아에 자리 잡기 시작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피싱 조직에 몸담았던 한 관계자는 “필리핀과 태국은 자본주의 국가다. 아무리 부패와 비리가 심해도 공산주의와 독재 국가 체제인 캄보디아보다 심하지 않다”며 “중국 갱단은 원래 필리핀에 자리 잡았다. 마약, 도박 범죄 등으로 여러 번 언급되자 4~5년 전부터 캄보디아에 모여들기 시작했다”고 주장했다. 이 관계자는 “캄보디아는 필리핀보다 공무원을 매수하는 비용이 싸다. 경찰관 한 명을 매수해 자신의 인터폴 수배 여부를 확인하는 등 수사 정보를 알기 위한 비용이 한국 돈으로 100만원이면 충분하다”고 설명했다. 정부는 한국인 대상 범죄 급증에 대한 대책으로 캄보디아 ‘코리안데스크(한인 사건 전담반)’ 설치를 추진 중이다. 지난 10일 조현 외교부 장관이 쿠언폰러타낙 주한 캄보디아 대사를 외교부 청사로 불러 항의했다. 영사협의회에서도 코리안데스크 설치 협력을 요청하기도 했다. 경찰청도 최근 캄보디아와의 양자 협의에서 이를 논의하겠다고 밝혔다. 코리안데스크는 경찰 협력관과 달리 대사관 등 외교 채널을 거치지 않고 현지 경찰과 소통할 수 있어 합동 수사에 용이하다. 국외도피사범을 추적하거나 한국인 범죄 피해를 파악할 때 교민 사회 등에서 관련 내용을 수집해 현지 경찰관에게 정보를 제공하고 수사를 돕는다. 실종, 살해… 뒤늦게 논의 현지 경찰관들과 친밀한 관계를 맺어 국제형사사법공조나 인터폴(국제형사경찰기구) 등을 통한 공식 요청보다 빠르게 현지 수사가 가능하다. 필리핀에서 코리안데스크는 한국인을 상대로 자행된 청부살인 등 강력 사건 해결에 큰 역할을 했다. 캄보디아 공권력을 신뢰하기 어렵고 현지 치안이 열악한 점 등을 고려해볼 때 최우선 해결책으로 꼽히는 이유다. 국제 앰네스티는 지난 6월 보고서에서 캄보디아 내 범죄 산업이 성행한 원인이 “조직범죄와 부패한 공권력의 결합 구조”에 있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그러나 정보·수사기관 안팎에서는 무의미한 조치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캄보디아 당국이 국제 공조에 소극적이기도 하지만 코리안데스크는 수사 권한이 없다는 게 핵심이다. <일요시사> 취재를 종합하면 경찰청은 최근까지 캄보디아 당국에 20건의 국제 공조를 요청했으나 절반도 되지 않는 답변을 받았다. 특히 캄보디아 당국이 코리안데스크 설치를 세 차례 거부하기도 한 것으로 파악됐다. 코리안데스크 출신 한 경찰은 “필리핀은 우리나라 정부가 집요하게 압박해 코리안데스크를 설치한 이후 현지 경찰과의 협조가 가능해졌다. 협조가 된다고 해도 범죄자 송환이나 사건 조사가 이뤄지는 경우는 절반도 안 된다. 캄보디아는 더 힘들 것”이라고 평가했다. 경찰 파견 무의미? 이 경찰은 “정부 차원에서 강하게 압박을 넣어야 한다. 외교부의 역할이 중요하다. ‘받아들이지 않으면 국물도 없다’는 식의 각오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코리안데스크 설치가 불발될 경우의 수가 존재하는 만큼 경찰관 직무 파견 확대가 현실적 대안으로 거론된다. 파견 경찰관을 선발한 뒤 1년 단위로 재발령을 거쳐 최대 2~3년간 현지에서 근무하도록 하는 방식이다. 단기간에 경찰 주재관을 늘리는 게 쉽지 않은 게 이유다. 2021년 11월 가나 해군은 한국인이 승선한 어선을 위해 안전조치를 하고 있다. 선례도 있다. 앞서 정부는 러시아, 아르헨티나 등에 경찰 인력을 직무 파견했다. 2020년엔 가나 대사관에 해양경찰관을 직무 파견했다. 서아프리카 해역에 해적이 출몰하면서 한국인 선원 13명이 납치된 데 따른 조치였다. 정부는 외교 채널을 통해 가나 부처에 공식적으로 도움을 청하는 동시에 파견 경찰은 물밑에서 움직였다. 현지 해군, 경찰 관계자를 지속해 접촉하며 설득을 이어갔고, 가나에 주재하는 타국 외교 사절과도 교류하며 정보를 공유했다. 또 가나가 필요로 하는 컴퓨터 등 기자재를 무상으로 제공하는 방식으로 호감을 얻으며 협의를 이어갔다고 한다. 이는 결국 가나 해군이 투입되는 결과로 이어지기도 했다. 소극 행정을 일삼는 우리 정부도 문제다. 국회 행정안전위원회 소속 더불어민주당 위성곤 의원이 외교부와 행정안전부 등에서 받은 자료에 따르면, 행안부는 지난해 주캄보디아 대사관 경찰 주재관을 증원해달라는 외교부의 요청을 불승인했다. ‘해외 도주’ 황하나 프놈펜 잠적 단독 확인 인터폴·경찰 수배 피하려 피싱조직 연루설도 당시 행안부는 외교부 증원 요청을 불승인한 이유에 대해 “사건 발생 등 업무량 증가가 인력 증원 필요 수준에 못 미친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캄보디아에서 발생한 한인 범죄 피해는 2022년 81건에서 2023년 134건, 지난해 348건으로 급증했다. 올해 상반기까지 확인된 범죄 피해는 303건에 달한다. 현재 주캄보디아 한국 대사관에서 근무 중인 경찰은 주재관 1명과 협력관 2명 등 총 3명이다. 그나마 이렇게 늘어난 인력도 애초 경찰 주재관 1명만 있다가 지난해 10월과 지난달 직무 파견 형태로 협력관을 1명씩 추가 투입한 데 따른 것이다. 위 의원은 “캄보디아에서 우리 국민이 잇따라 납치·감금 피해를 당하고 있음에도 당시 윤석열정부가 경찰 주재관 증원을 외면한 것은 명백한 잘못”이라며 “국민 안전을 지키기 위한 최소한의 조치조차 거부한 이유를 이번 국정감사에서 반드시 따져 묻겠다”고 강조했다. 캄보디아는 범죄자들에게 천국이다. 필리핀에서 송환되지 않거나 자유롭게 탈옥해 붙잡히지 않은 텔레그램 ‘마약왕 전세계’ 박왕열과 보이스피싱 원조 김미영 팀장 박정훈 등이 그렇다. 국내에서 수차례 마약 사건의 중심에 섰던 황하나씨도 이들의 수법을 활용 중인 것으로 보인다. <일요시사>는 지난해부터 황씨가 인터폴 수배 대상에 오르자 태국과 필리핀, 캄보디아 등을 오간 사실을 확인하고 취재해 왔다. 실제로 황씨는 지난해 3월 <일요시사>와 전화 통화에서 “지금 태국에 있는데, 아파서 병원에 왔다. 나중에 연락하겠다”고 말했다. 황씨는 수년 전부터 화류계에 몸담거나 연예계에 종사하는 여성들을 재벌가에 연결하는 일종의 브로커를 담당했다. 그로 인해 마약을 강제로 투약당하거나 피해 본 인물이 있을 정도다. 국내에서의 생활이 어려워진 황씨가 캄보디아에서 브로커 역할을 이어가고 있다는 의혹이 제기된다. 범죄자 천국 악당 은신처 인터폴에 체포되지 않으려 캄보디아 피싱 조직에 한국인 여성들을 공급한다는 것이다. 실제 캄보디아 공항에 도착한 한국인 20~30대 여성들은 납치된 이후 여권과 휴대전화를 빼앗겨 범죄 단지 ‘웬치’에 감금된다. 이 여성들은 대부분 유흥업소로 끌려간 것으로 알려졌다. ‘웬치’에는 현재 한국인 1000명 이상이 거주 중이다. 다만 이들의 범죄 연루 여부는 구체적으로 확인되지 않은 상황이다. <hounder@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