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당 손학규 대표가 ‘통 큰 정치’를 꺼내 들었다. 4·27 재보선과 관련, 야권 단일화를 위해 ‘통 큰 양보’를 하겠다고 나선 것. 심지어 순천 재보선에서는 무공천 의사를 밝혀 정가 안팎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야권 연대와 희망대장정으로 민심을 향한 잰걸음을 하고 있는 손 대표. 그러나 정가 일각에서는 그의 결단이 ‘양날의 칼’이라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이번 재보선이 가지는 의미와 지난 지방 선거, 그리고 앞으로 다가올 총선, 대선까지 큰 그림을 보면 ‘필연적 선택’인 동시에, 그를 죽일 수도 살릴 수도 있는 ‘벼랑 끝 전술’이라는 주장이다.
4·27 재보선 앞두고 야권 단일화 위해 ‘통 큰 양보’
당내 반발에도 흉흉한 재보선 전망 속 ‘순천 무공천’
4·27 재보선이 성큼 다가오면서 여야가 선거 전략을 가다듬는 데 신경을 집중하고 있다. 선거의 중요성은 커지고 있는 반면 당초 계획했던 ‘필승 전략’은 하나 둘 흔들리고 있다는 이유에서다.
승부수 띄운 손학규
통 크게 정치판 흔든다
김해을 재보선에서 김경수 봉하재단 사무국장 카드를 잃은 손 대표의 선택은 야권 단일화였다. 야권 연대를 위해 민주당이 양보하겠다는 뜻을 내비친 것. 그러나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통 큰 선택이었다.
손 대표는 지난달 20일 저녁 비공개로 열린 최고위원회에서 “민주당이 기득권에 집착하지 않고 통 큰 양보를 하겠다. 순천은 당연히 들어가지 않겠느냐”고 밝혔다. 이러한 발언은 그의 최측근인 차영 대변인을 통해 전해졌다.
민주당 대변인실은 그러나 이날 밤 출입기자단에게 보낸 문자 메시지에서 “‘통 큰 양보’ 발언은 특정 지역과 관련이 없다”고 못 박았다.
손 대표는 그러나 다음 날인 21일 최고위원회의에서 다시 한 번 순천 무공천 방침을 확인시켰다. 그는 “(재보선) 결과만큼 중요한 것은 민주당의 자세와 후보 단일화”라며 “민주당은 오늘의 기득권에 집착하지 않고 내일의 희망을 보고 큰 걸음으로 나갈 것이다. 더 큰 민주당, 더 큰 진보의 길로 나갈 것이다. 이러한 원칙을 가지고 정도로 나아갈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는 그동안 야권 단일화를 위해 민주당이 외쳤던 ‘기득권 포기’와는 강도가 달랐다. 재보선, 지방 선거 등에서 민주당은 ‘민주당을 중심으로 한 연대’로 야권 정당들이 ‘야권 연대는 허울 좋은 것일 뿐 민주당의 들러리를 선 것’이라고 불만의 목소리를 낸 데 대해 야권 연대의 칼자루를 건네는 것으로 답한 것이었다.
순천은 민주당 의원의 지역구였던 데다 전통적으로 민주당 지지층이 두터운 호남 지역에 위치하고 있어, 민주당이 ‘무공천’을 하겠다는 것은 야권 단일화를 했을 때 야당들에게 ‘잘 차려진 밥상’을 건네겠다는 것이나 마찬가지기 때문이다.
그동안 야권 단일화를 위해 ‘기득권 포기’를 외쳤던 민주당이지만 목소리의 크기만큼 결과로 보여주지 못했다는 지적을 상쇄시킬 패를 꺼내든 것이다.
정가 한 인사는 “현 정권 출범 후 각종 선거에서 ‘야권 단일화’가 승리의 열쇠가 돼 왔다. 민주당은 야권 정당들과 시민사회 진영을 야권 연대의 협상 테이블에 앉히기 위해 기득권 포기를 외쳤지만 정말 기득권을 포기했냐는 점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의문을 표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민주당은 야당이 연대를 하면서 파이가 커졌고 소수 정당들도 그들이 가지지 못할 지역과 표를 얻게 됐다고 하지만 압도적인 정당의 크기 차 등으로 야권연대의 중심축이 민주당을 향해 돌았던 게 사실”이라며 “‘이길 수 있는 후보’를 강조하면서 후보 단일화의 무게 중심도 민주당으로 기울었다”고 했다.
이번 재보선은 야권 연대의 역량을 확인해 보는 자리인 동시에 야권 연대를 대하는 민주당의 모습을 야권에 확인시키는 기회이기도 하다. 즉, 야권 연대와 관련한 과거와 현재의 교차점이 되는 셈이다.
지방 선거 뒷마무리
총선 위한 ‘기회비용’
정치전문가들은 “이번 재보선은 야권에 불리하게 진행되고 있는 만큼 야권 연대의 중요성이 높다”면서 “그러나 총선을 향한 발판을 만들어야 한다는 점에서 소수 정당들의 목소리가 어느 때보다 높을 수밖에 없다”고 입을 모았다.
손 대표도 이 점을 깊게 인식하고 있다. 그는 순천 무공천 의사를 밝히며 “민주당은 이번 재보선을 통해 총선 승리, 정권 교체의 의지를 보일 것”이라며 “재보선의 결과만큼 중요한 것은 재보선을 치르는 민주당의 자세와 후보 단일화의 과정일 것”이라고 야권 후보 단일화의 중요성을 재차 강조했다.
이인영 최고위원도 “어떤 지역을 어느 당에 양보할지 특별히 정해진 바는 없다”면서도 “그러나 필요하다면 기득권을 내려놓을 것이고 주도적이고 책임있게 나서서 4·27 재보선에 연대 연합이 반드시 성사되도록 노력하겠다”며 손 대표의 의견에 동조했다.
그러나 손 대표의 ‘통 큰 정치’가 제 효과를 발휘할 수 있을지는 아직 미지수다. 호남권 의원들과 순천 출마를 준비해 온 이들의 반발이 만만찮다는 이유에서다.
당장 이날 최고위원회의에서 박주선 최고위원이 “적어도 민주당이 야권의 승리를 내년 대선까지 이어가기 위해 통 크고 대승적 차원에서 양보해야 하는 것은 맞지만, 그 양보도 원칙과 기준에 입각한 양보를 해야지 떼쓴다고 달래기 위해서 양보하고, 여론이 큰 정당이기 때문에 떼어 주라고 해서 떼어 준다면 그것이 국민의 뜻에 맞고 유권자의 권리에 충실한 야권 연대의 방식인지 깊게 생각해 봐야 한다”고 강하게 반발했다.
순천 출마를 준비해 온 이들도 “공천 양보는 순천 지역민들의 의사에 반하는 것은 물론이고 야권 전체의 시너지효과를 내자는 연대의 근본 취지에 어긋나는 논리”라고 주장하고 있다.
호남권 의원 들썩
역풍으로 불어올까
이들 중 일부는 무소속 출마까지 염두에 두고 있다는 게 지역 정가의 전언이다.
박준영 전남지사도 지난달 22일 전남도청 기자실에서 기자 간담회를 갖고 “민주당이 4·27 순천 재보선에서 후보를 내지 않는 이른바 ‘순천 무공천’ 방침을 밝힌 데 대해 반대한다”고 밝히며 손 대표에게 반기를 들었다.
박 지사는 “정당의 존립 근거는 당의 가치를 실현하는 데 있고, 선거는 이를 추구하는 중요한 방법”이라며 “정당 정치를 위해서는 정당 나름대로 가치를 가지고 경쟁하다 필요하면 (야권 연대나 DJP처럼) 연합할 수도 있지만, 대선에서의 연합과 이번 사안은 다르다. 지역민, 지역 국회의원, 도의원 대부분이 반대하는 일을 굳이 할 필요 있겠느냐”고 되물었다.
6월 지방 선거 설거지냐 vs 총선·대선 노림수냐
손학규 대권 전략 중대 고비 넘길 벼랑 끝 전술?
그는 “당 지도부에 대한 반박은 아니”라며 결정에 따르겠다는 뜻을 밝혔지만 “지역민과 정치권의 뜻에 어긋난 무공천은 자칫 반발성 탈당과 항명에 따른 징계 등을 불러올 수 있어 결국 당을 혼란에 빠뜨릴 수 있는 만큼 신중한 자세가 필요하다”는 점을 거듭 강조했다.
이러한 혼란을 감수하면서까지 손 대표가 결단을 내리게 된 진짜 이유는 무엇일까.
한 정치 전문가는 “이번 4·27 재보선에서 민주당의 전망은 매우 어둡다. 3곳의 국회의원 선거와 강원도지사 선거 1곳 중 3곳이 민주당의 자리였던 만큼 ‘잘해 봐야 본전’이다. 강원도는 이광재 전 지사의 당선 전까지만 해도 한나라당의 세가 강한 곳으로 평가받아 왔고 경기 분당을 또한 한나라당의 세가 강하다. 김해을은 한나라당의 텃밭이자 노무현 전 대통령의 사저 가까이에 있는 곳이고 순천은 민주당의 텃밭이다. 이 중 민주당이 승리를 자신하는 곳은 순천뿐”이라고 말했다.
그는 “후보 단일화를 위해 야당에 양보를 한다고 했을 때 가장 좋은 곳이 순천과 김해을”이라면서 “양보한다고 했을 때 한나라당의 세가 강한 곳을 양보하는 것은 ‘섶을 지고 불 속으로 뛰어들라’고 등을 떠미는 꼴이 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어 “어차피 1년여 후면 총선”이라며 “야권 정당들의 차기 총선 기반을 마련해 주는 것이 장기적으로 봤을 때 더 ‘남는 장사’가 될 수 있다는 계산”이라고 풀이했다.
그는 다만 “민주당은 김해을 재보선과 관련, 히든카드를 잃었다. 이 상황에서 국민참여당이 김해을 양보를 바란다면 승산이 있는 승부처 2곳을 내주는 것이 돼 출혈이 적지 않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순천 무공천’ 등 ‘통 큰 정치’가 손 대표의 차기 대권전략 중 한 부분이라는 분석도 제기되고 있다. 손 대표는 당권·대권 분리 원칙에 따라 4월 재보선 이후 연말이 되기 전에 당 대표직에서 물러나야 한다. 이 경우 양보와 희생을 통해 총선 승리를 위한 ‘판’을 짜 뒀다는, 야권 연대·야권 통합의 밀알이 됐다는 부분이 ‘잘해야 본전’인 4월 재보선의 결과보다 그의 ‘치적’에 어울린다는 것이다.
당장의 상황만을 본다면 4월 재보선에서의 ‘선택과 집중’이 가능해졌다. 일부 지역을 야권에 넘기면서 힘든 싸움이 예상되지만 물러설 수 없는 곳에 화력을 집중하는 것이 한결 수월해진 것.
그렇게 선택된 곳이 강원도지사 선거다. 손 대표는 지난 16일 강원도 평창을 찾아 최고위원회·평창동계올림픽 유치지원 특위 연석회의를 진행했다.
선택과 집중으로
대권 큰 그림 완성?
그는 이 자리에서 “평창 동계 올림픽 유치를 위해 그간 많은 노력해 오고 구체적 노력을 실천하던 이광재 지사가 안타깝게 그 직을 내놓게 되어 동계 올림픽 유치에 많은 지장을 초래하고 있음을 유감스럽게 생각한다”며 “이 전 지사의 빈 자리가 너무 크지만 민주당이 뜻을 모아, 힘을 모아 그 자리를 채우고 반드시 동계 올림픽 유치의 꿈을 이루겠다”고 말했다.
정치권은 그러나 손 대표의 승부수에 대해 “4·27 재보선의 향배와 그 후폭풍이 어디서 어떻게 불지는 아직 아무도 모른다”며 “손 대표가 쏜 화살이 다시 그에게 되돌아 올지도 모를 일”이라고 사태의 추이에 시선을 집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