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신혼부부 실종 미스터리

어느날 갑자기 감쪽같이 사라졌다

[일요시사 취재1팀] 안재필 기자 = 부산에 거주하고 있던 한 부부의 행방이 묘연하다. 경찰 수사가 진행 중이지만 여전히 단서조차 잡지 못하고 있다. 범죄 혐의점이나 실종 이유도 나타나지 않아 답답함만 가중되고 온갖 추측만 난무할 뿐이다.

지난달 29일, 부산 남부경찰서는 수영구 광안동에 살고 있던 A(35)씨와 B(35·여)씨 부부가 지난 5월28일 이후 실종됐다고 밝혔다. A씨 부부는 지난해 11월 결혼한 동갑내기 신혼부부다. 이들의 실종은 인터넷 커뮤니티에 올라왔지만 경찰의 발표가 있기 전까진 자작극이 아니냐는 의견이 많아 비난을 샀다.

문자만 남기고…

A씨 부부의 실종은 A씨의 아버지가 경찰에 신고하면서 알려졌다. 경찰에 따르면 A씨의 아버지는 아들에게 건강식품을 주기 위해 전화했다. 아들 내외의 집에 들러 문제가 있는지 살펴봤지만 집에는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

그는A씨 부부가 계속해서 연락을 받지 않자 이상함을 느끼고 경찰에 신고한다.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은 할 수 있는 모든 기법의 수사를 동원했지만 아무런 단서를 포착하지 못하고 있다.

경찰은 먼저 A씨 부부가 거주하는 아파트 주차장에 설치된 CCTV를 확인했다. CCTV에는 부인 B씨가 지난 5월27일 저녁에 차를 세운 뒤 집으로 들어가는 모습이 저장돼 있었다. 이튿날인 28일 새벽 3시경 A씨가 집으로 들어가는 모습도 찍혔다. 그러나 이들 부부가 집 밖으로 나가는 모습은 발견되지 않았다.


집 주변과 지하실, 옥상의 물탱크까지 수색했지만 두 사람의 흔적은 찾아낼 수 없었다. 흔적이 없다는 점에 착안해 경찰은 CCTV 사각지대를 의심하고 있다. 아파트 비상통로 계단이 바로 그곳이다. 아파트의 비상통로 계단엔 CCTV가 설치돼 있지 않아 이용 시 CCTV에 촬영되지 않는다는 점을 근거로 뒀다.

경찰은 A씨 부부의 핸드폰 신호도 확인했다. A씨의 핸드폰은 지난 6월2일 부산 기장군에서, B씨의 핸드폰은 같은 날 저녁 서울 강동구 천호동 근처서 꺼졌다. 부산 기장군에는 A씨 부부의 연고지가 없지만 강동구에는 A씨의 어머니가 살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핸드폰이 꺼지기 전에 주고받은 문자도 주목받았다. 여기서도 의혹은 제기된다.

A씨 부부의 실종을 신고한 아버지가 A씨에게 문자를 보냈더니 ‘별 일 아니니 걱정 말라’는 답장이 왔다. A씨의 동업자에겐 “내가 무슨 일이 있어 한 두 달 못 나가니까 그렇게 알고 있어라”라는 문자가 도착했다.

문자만 보내고 전화를 하지 않았다는 데서 경찰은 문자를 A씨가 아닌 다른 누군가가 보냈을 것이라는 추측도 하고 있다. A씨 부부가 제 3자에 의해 범행을 당했고 범인이 경찰수사에 혼선을 주거나 신고를 지연시키기 위해 메시지를 보낸 것이라는 분석이다.
 

A씨 부부의 집에서 없어진 물건도 주목받았다. 휴대폰과 노트북, 속옷, 여권, 여름옷이 조금 없어진 것으로 조사됐다. 여권과 옷이 없어져 일각에선 외국으로 간 것이 아니냐는 의혹도 있다. 출입국 관리 사무소도 조사를 했으나 두 사람의 출국 사실은 확인되지 않았다.

동갑내기 남편과 부인 행방묘연
CCTV 등 아무런 흔적 찾지 못해

부산서 중국이나 일본으로 밀항할 수 있는 루트에 대해서도 수사하고 있다. 자발적으로 사라졌는지 범행에 의해서 실종된 것인지에 대한 단서는 지금도 발견되지 않고 있다.


A씨는 생선요리 식당을 운영했고 채무관계 역시 깨끗한 편으로 조사됐다. 약 3000만원의 예금도 통장에 저축돼 있었다. 부부관계 역시 좋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들이 거주하던 아파트 경비원은 “싸우는 일은 없었다”고 증언하며 두 사람의 사이 불화는 없었다고 한다. 경찰은 제삼자의 범행을 고려해 집안 내부에 과학 수사요원을 동원해 현장 감식을 벌였으나 외부 침입이나 다툼의 흔적은 발견되지 않았다.

3개월이 넘도록 휴대폰, 교통카드, 신용카드의 사용 흔적이 없어 생존 여부도 밝혀지지 않은 상태다. 금전관계로 인한 갈등이라고 보기엔 보험 가입 혹은 약관추가가 없고 예금 인출기록도 없다.

두 사람의 사건이 대중에게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지인들이 SNS와 인터넷 커뮤니티에 글을 올리면서다. 단서를 찾을 수 없는 사건에 대중은 갖가지 추측을 쏟아냈다. 한 커뮤니티에선 CCTV에 찍힌 B씨의 모습이 커뮤니티에 올라온 사진과 너무나도 달라 믿을 수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일부는 ‘B씨의 머리를 바리깡으로 민 듯한 흔적이 있다’며 A씨의 가정폭력에 의한 실종사건이 아니냐는 의견을 제시하기도 했다.

올라온 글에 대한 추측도 난무하는 상황이다. 대중은 A씨의 사진과 신상에 대해 올라오지 않은 점을 지적했다. 또 A씨의 지인이 왜 B씨의 사진만 올렸냐는 말도 나왔다. CCTV에 찍힌 B씨의 모습과 지인이 올린 B씨의 사진이 다른 사람으로 보인다는 의혹도 제기됐다. 이에 A씨 부부의 지인이라고 밝힌 이들이 글을 작성해 해명에 나섰다.
 

그들은 A씨의 사진이 없어 B씨의 사진만 올라온 이유는 A씨의 집에서 원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말을 했다. CCTV 사진과의 괴리감에 대해선 평소 B씨가 화장을 안 하고 다녀 다르게 보일 수 있고, CCTV의 화질과 각도 문제로 생긴 오차라고 했다.

머리를 바리깡으로 밀린 게 아니냐는 추측엔 실종 며칠 전만해도 머리길이에 이상은 없었다고 했다. 그러나 이 해명은 또 다른 의혹을 불렀다. A씨도 같이 실종이 됐는데 왜 A씨의 집에선 사진공개를 원하지 않느냐는 주장이다.

혹시 자작극?

경찰은 A씨 부부의 지인에 눈을 돌리고 있다. A씨의 지인이 노르웨이에 있다가 실종사건 전에 귀국한 뒤 사건 이후 6월 초 다시 출국했다는 점에 초점을 뒀다.

하지만 A씨 지인의 혐의는 확정이 된 것이 아니라 수사에 난항을 겪고 있다. A씨 지인에게 귀국해서 수사에 협조하라는 요청을 보내고 있지만 그는 입국을 거부하고 있는 상황이다. 현재 경찰은 인터폴과 사법공조체제를 가동해 수사를 하고 있다.


<anjapil@ilyosisa.co.kr>

 

<기사 속 기사> 국내 미제 사건들

아직까지도 단서가 잡히지 않고 있는 사건들이 있다. 화성 연쇄 살인 사건과 이형호군 유괴 살인사건, 개구리 소년 실종사건은 지금까지 미제 사건으로 남아있다.


화성 연쇄 살인사건은 지난 1986년 경기도 화성시 태안읍에서 여성노인의 시신이 발견되며 시작됐다. 이후 1986년에 2건, 1987년에 3건 등 총 10건에 걸쳐 1991년까지 불특정 다수의 여성이 강간·살해당했다. 3000명의 용의자가 조사를 받았지만 범인은 잡히지 않았다.

지난 1991년 1월 이형호군이 유괴 당한 사건도 범인이 잡히지 않았다. 유괴범은 이군의 부모에게 돈을 요구했고, 이군의 부모는 돈을 넣은 박스를 전달했다. 돈을 가지고 사라진 범인은 가짜 돈이 섞였다며 이군을 살해하고 사라졌다.

개구리 소년 실종사건도 있다. 지난 1991년 대구 성서초에 다니던 9∼13살까지의 소년 5명이 도롱뇽알을 주우러 간다고 한 뒤 귀가하지 않았다. 이 사건은 경찰 50만명이 동원돼 조사를 벌였지만 난항에 빠졌다. 11년 뒤인 지난 2002년에 그들은 대구 성산고교 뒤쪽에서 유골로 발견됐다. <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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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꾸는’ 장동혁 용꿈

‘혼자 꾸는’ 장동혁 용꿈

[일요시사 정치팀] 박형준 기자 = 이재명 대통령의 임기 초반 난맥상이 이어지지만,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힘의 지지율 격차는 더욱 벌어지고 있다. 국민의힘 장동혁 대표는 용꿈을 꾸지만, 새 비전을 제시하지 못한 채 강경 보수 세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장 대표에게 그와 용꿈을 함께 꿀 수 있는 창조적 소수가 없는 이유는 뭘까? 국민의힘은 지난달 장외투쟁에 집중했다. 지난달 21일엔 대구에서, 지난달 28일엔 서울에서 각각 개최했다. 국민의힘 장동혁 대표는 지난 2일 기자간담회에서 “장외투쟁을 통해 정부·여당의 잘못을 국민에게 알렸다”며 “그 과정에서 정부·여당의 지지율이 하락했다면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것이고, 지지층 결집으로 싸울 동력도 확보했다”고 주장했다. 벌어지는 지지율 격차 하지만 외부의 평가는 다르다. 보수 신문 <조선일보>는 지난달 23일 사설에서 “스마트폰과 각종 미디어가 발달한 시대라서 국민은 정치권 소식을 실시간으로 보고 듣는다”며 “장외투쟁은 시대에 뒤떨어졌다는 느낌을 준다”고 비판했다. 추석 연휴 직전인 지난 2일 오후엔 이진숙 전 방송통신위원장이 체포됐다가 지난 4일 체포적부심이 인용돼 석방됐다. 김건희 여사의 경기 양평군 공흥지구 개발사업 개입 의혹과 관련해 김건희 특검에 소환돼 조사를 받았던 고 정희철 단월면장도 “특검이 강압 수사를 했다”는 취지의 자필 메모를 남긴 채 같은 날 사망했다. 이후 국민의힘은 국회에 정 면장의 분향소를 차렸고, 의원들이 돌아가면서 빈소를 지키고 있다. 지난달 6일 방송된 JTBC 예능 프로그램 <냉장고를 부탁해>엔 이재명 대통령 부부가 출연했다. 이 방영분은 지난달 26일 발생한 국가정보자원관리원 화재 사건 이후인 지난달 28일 촬영됐다. 이를 두고, 국민의힘 주진우 의원은 “국가적 재난 때문에 지금도 국민은 피해를 보고 있는데, 한가하게 예능 촬영하고 있었다면, 이 대통령은 대통령 자격이 없다”고 주장하면서 추석 연휴 내내 쟁점화를 주도했다. 하지만 국민의힘의 대여 투쟁엔 힘이 붙지 않는다. 리얼미터가 <에너지경제신문> 의뢰로 지난 1일부터 2일까지 전국 18세 이상 유권자 1008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국민의힘 지지율은 전주 대비 2.4% 하락한 35.9%로 확인됐다. 47.2%의 지지를 얻은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보다 11.3% 뒤처지는 수치였다. 이는 장 대표의 자화자찬과는 다른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그동안 이 대통령과 민주당엔 ▲검찰 해체 시도 ▲조희대 대법원장과의 갈등 ▲이 대통령의 예능프로 출연 논란 ▲김현지 제1부속실장 관련 논란 등 악재가 이어졌다. 그런데도 지지율 격차가 10% 이상 벌어진 결과가 나온 것이다. 정의화 전 국회의장은 지난 13일 장 대표와 상임고문단의 오찬 회동에 참석해 그 이유를 설명했다. 정 전 의장은 장 대표에게 “과거 안하무인 정치 행태를 보여온 보수 정당의 잘못이 크다는 걸 인정해야 하고, 깊은 반성과 성찰도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이어 “국민의힘 한동훈 전 대표·개혁신당 이준석 대표·국민의힘 유승민 전 의원 등과 함께 못할 이유가 없다. 새 지도부는 용광로 같은 화합의 정치를 만들어내길 바란다”며 “부정선거론이나 ‘윤 어게인’ 같은 낡은 의제와 결별하고, 민생을 살피면서 국가 미래 비전을 제시하는 데 온 힘을 다해주길 바란다”고 강조했다. 답 없는 장외투쟁에 멀어지는 대권 ‘밖에서’ 집착… 본질 “사람 없어서” 정 전 의장의 발언 중 핵심은 한 전 대표를 향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장 대표는 지난해 12월 윤석열 전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와 관련해 의견이 엇갈려 한 전 대표와 결별했다. 장 대표는 지난달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 “한 전 대표를 지지하는 분들이 무차별적으로 저를 비난·모욕·배척하는데 어떻게 정치 행보를 같이 할 수 있겠느냐”고 비판했다. 장 대표는 취임 직후엔 자신의 당 대표 당선을 도운 강경 보수 성향 유튜버들의 반발을 감수하면서 당내 중도 성향으로 평가받는 김도읍 의원을 정책위의장으로 발탁하는 등 중도 공략을 고려하는 것으로 보였다. 유튜버 고성국씨는 이에 크게 반발하면서 “많은 분이 ‘김도읍이 웬 말이냐’고 비판하는데, 김 의원은 그런 비판을 받을 만하다”고 주장했다. 고씨는 “국민의힘은 자유통일당 등 원외 보수 정당에 지방자치단체장 30석을 양보하라”고 요구했다. 장 대표는 이들의 요구를 일체 무시하면서 이들의 영향력 감소를 시도하는 것으로 보였다. 한때는 “공천 청탁을 받고 있다”고 주장하는 등 “보수의 김어준 반열에 오르려는 것 아니냐”는 평가까지 들었던 전한길씨도 최근엔 전당대회 당시의 기세는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 장 대표는 추석 연휴이던 지난 7일, 서울의 한 극장에서 다큐멘터리 영화 <건국전쟁 2>를 관람했다. <건국전쟁 2>는 1947년부터 군·경찰·서북청년단 등과 남조선노동당이 제주도에서 번갈아 이어간 학살 사건인 4·3 사건을 다뤘다. 이를 연출한 김덕영 감독은 주로 남조선노동당의 학살 위주로 내용을 구성했다. 김 감독은 평소 이승만 전 대통령을 지지하면서 부정선거론을 주장해 왔던 인물이다. 4·3 사건은 국가 폭력을 상징하는 전형적인 사건이기 때문에 여전히 민감하다. 하지만 국민의힘과 보수 진영 일각에선 잊을 만하면 양민 학살을 부정하거나 군경의 대응을 찬양하는 움직임이 있었다. 장 대표의 <건국전쟁 2> 관람은 보수 정당 수장이 4·3 사건에 대한 국가 책임을 부정하는 것으로 해석될 소지를 남긴다. 아울러 국가 책임을 부정하는 주장을 수시로 제시하는 세력은 강경 보수 세력이다. 이런 대응은 이재명 대통령을 비판하는 사람들에게 “국민의힘이 대안이 될 수 있다”는 믿음을 주지 못하고 있다. 이는 국민의힘 지지율 추세로 확인할 수 있다. 추석 연휴 전까지 집중했던 장외투쟁도 장 대표 스스로 직접 전면에 나서 여론을 움직이려 한다는 취지로 해석됐다. 하지만 장 대표가 강경 보수 진영의 지원을 토대로 당선됐던 것 자체가 강경 보수 외 유권자에겐 큰 호감을 주지 못하는 족쇄가 되고 있다. 윤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 이후 국민의힘에서 가장 큰 문제가 됐던 것은 당내 쇄신이었다. 기행은 멈췄지만… 특검 3개(김건희·내란·채 상병)가 국민의힘을 동시에 겨냥하는 현 상황은 모두 윤 전 대통령의 그림자로부터 비롯된 것이었다. 따라서 국민의힘엔 ▲부정선거론 근절 ▲강경 보수 세력의 영향력 제거 ▲중도 공략 등 산적한 숙제가 있었다. 장 대표가 무시 전술로써 강경 보수 세력의 영향력을 서서히 줄이고 있지만, 유권자로선 만족을 느끼기 어렵다. 정권을 맡을 수 있는 정당으로 다시 도약하기 위해선 확실한 절연이 필요했다. 하지만 장 대표 스스로 <건국전쟁2>를 관람하면서 그동안 구사했던 무시 전술도 그 진의를 의심받을 가능성이 열렸다. “당내 쇄신이 아닌 자신의 영향력 확대만을 위한 무시였느냐”는 의심이다. 특정 세력의 지원을 받은 수장이 수성을 위해서 해야 할 일은 대개 토사구팽이다. 현대에 이르러서도 정치력을 높이 평가받는 역사적 인물들은 적절한 토사구팽을 통해 수성기를 열었다는 공통점이 있다. 장 대표 취임 이후의 국민의힘이 이전과 달라진 게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장 대표 취임 이전 국민의힘은 권영세 전 비상대책위원장·권성동 전 원내대표가 일명 ‘쌍권 체제’를 구성해 ▲대선후보 심야 교체 시도 ▲자체 개혁안에 대한 특정 계파의 조직적 저항 등 기행을 저지르면서 여론의 손가락질을 받았다. 장 대표 취임 이후의 국민의힘에서 이런 기행은 잘 보이지 않으나, 그 이상으로 나아가질 못하고 있다. 이는 재보궐선거 당선으로 국회에 입성해 재선 의원이 된 지 불과 1년여가 지난 장 대표의 짧은 정치 경험 등 부실한 정치 기반으로부터 비롯되는 문제라고 할 수 있다. 개혁신당 이준석 대표는 장 대표에 대해 꾸준히 “용꿈을 꾸고 있다”고 평가한다. 장 대표도 이를 직접 부인하진 않는다. 그런데 용꿈은 특정 정치인 1명이 특출나다는 이유만으로 꿀 수 있는 꿈이 아니다. 장 대표는 아직 “용꿈을 꿀 만큼 특출난 정치인”이란 평가를 받고 있지 못하다. 용꿈을 현실로 구현하기 위해선 ▲시대적 사명 구현 ▲강한 개혁 의지 ▲구체적 개혁 대안 제시 ▲강도 높은 자체 혁신 ▲추상적 비전을 구체화할 수 있는 전문가 집단 구성 등 요소가 필요하다. 용꿈은 용이 되려는 사람과 이를 뒷받침하는 집단의 상호 작용으로 현실이 된다. 전문가 집단은 추상적 비전을 구체적 개혁 대안으로 제시해야 하고, 용꿈을 꾸는 사람은 구체적 개혁 대안을 현실에서 구현해 민심의 호응을 얻어야 한다. 부실한 정치 기반 역사학자 아놀드 토인비는 저서 <역사의 연구>를 통해 ‘창조적 소수’라는 개념으로 용꿈을 현실화하는 과정을 이론화했다. 토인비는 문명의 순환을 통해 역사의 변혁 과정을 설명했다. 그에 따르면, 문명이 쇠퇴하거나 낯선 도전에 직면했을 때 이를 극복하면서 새로운 발전을 꿈꾸는 집단이 나타난다. 토인비는 이들에게 ‘창조적 소수’라는 이름을 붙였다. 장 대표가 강경 보수와의 관계에 명확하게 선 긋지 못한 채 장외투쟁에 집중하는 것에 대한 해답도 있다. 토인비는 창조적 소수가 새로운 발전을 이끌 수 있는 비결로 혁신적인 구상을 제시했다. 혁신적인 구상을 통해 세상에 충격을 주면서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동력을 확보해야 한다. 이는 우리 역사에서도 충분히 확인할 수 있다. 진골 귀족들 간 왕위 쟁탈전이 장기간 이어져 중앙정부가 지방 통제 능력을 잃었던 통일신라 말기엔 후삼국시대가 이어졌다. 이때까지만 해도 이미 멸망한 고구려·백제가 통치했던 지역에선 유민 의식이 유지되고 있었다. 고려 태조 왕건이 후백제 견훤을 물리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정치적 비전이었다. 왕건은 ‘삼한일통’이란 구호를 내걸면서 신라에 우호적인 관점을 유지했다. 이는 신라를 무력으로 함락해 경애왕을 살해한 후 신라의 각종 기술자를 후백제로 압송했던 견훤의 대응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었다. 견훤의 대응에 분노했던 신라 호족은 고려로 기울었고, 이는 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하게 된 결정적 밑거름이 됐다. 훗날 고려는 원나라의 간접 지배와 권문세족의 수탈로 인해 저물었다. 권문세족이 산과 강을 경계로 대농장을 소유하면서, 조세·부역을 직접 감당하는 평민의 경제 기반이 무너졌다. 조선 태조 이성계는 2000명 규모의 사병 집단 가별초를 거느린 대부호였다. 그는 경제력과 군사력을 기반으로 왜구와의 전쟁에서 대활약해 실력자로 부상했다. 그의 막료로 가담한 정도전·조준·남은·윤소종은 당시 새로운 흐름이었던 성리학을 배운 신진사대부였다. 이들 중 조준은 권문세족의 토지 겸병을 막을 수 있는 방편으로 과전법을 제시했다. 과전법은 권문세족의 토지를 모두 몰수해 국유화한 후 전·현직 관료에게 경기도에 한정해 세금을 거둘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하는 제도였다. 과전법은 이성계의 막강한 권력·군사력을 기반으로 실현됐고, 그가 새 왕조의 문을 열 수 있었던 결정적 계기가 됐다. 과전법이 시행돼 백성들이 춤을 추면서 기뻐할 때, 국왕 즉위 이전부터 대토지를 보유했던 고려 마지막 임금 공양왕은 아쉬움의 눈물을 흘렸다. 고려가 왜 멸망했고, 조선이 왜 개창될 수 있었는지 잘 보여주는 한 장면이다. “싸울 동력 확보” 자화자찬 “이미 한계만 노출” 평가도 이성계의 등장 이전 강력한 권력과 군사력을 가졌던 사람은 최씨 무신정권을 열었던 최충헌이었다. 그런데 최충헌은 정치개혁과 체질 개심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는 정예 병력을 자신의 사병 조직에 포함할 뿐, 거란 유민의 고려 침공을 방치했다. 거란 유민은 당시 떠오르던 몽골과의 협력을 통해 물리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는 늑대를 몰아내고 호랑이를 불러들였을 뿐이었다. 최충헌 사후 닥친 국난은 여몽 전쟁이었다. 최우 등 최충헌의 후계자들은 임시 수도 강화도에서 오로지 정권 보위에만 집중했다. 그들은 몽골군이 쳐들어오면 항복한 후 몽골군이 철군하면 항복 조건을 어기는 행태를 반복했다. 그러는 사이 백성들은 각자도생해야 했다. 최씨 정권이 몰락한 후 집권했던 무신 집권자들도 이 행태를 반복했다. 그들이 국난 극복을 등한시한 결과, 고려는 몽골이 중국을 접수한 후 세운 원나라의 간섭을 장기간 받아야 했다. 이는 현대 정치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역대 정권은 모두 새로움을 강조하는 슬로건을 제시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군정 종식을, 김대중 전 대통령은 최초의 수평적 정권교체를, 노무현 전 대통령은 사람 사는 세상을, 이명박 전 대통령은 경제위기 극복을, 문재인 전 대통령은 적폐 청산을, 이 대통령은 내란 종식을 제시했다. 토인비가 문명의 순환을 강조했던 이유는 성공하거나 많은 것을 누리면 나태해지는 인간의 속성과 관련돼있다. 토인비는 “성공한 창조자는 다음 단계에서 다시 창조자가 되기 어렵다”고 주장했다. 그 이유로는 “성공 자체가 큰 흠결이 되기 때문”이라며 “이미 성공했기 때문에 노를 젓는 손을 쉬고 있어서 사회 발전에 쓸모를 다했다”고 설명했다. 국민의힘에선 김용태 전 비대위원장과 윤희숙 전 혁신위원장이 당 체질을 개선할 혁신안을 발표한 후 실행하려고 했다. 하지만 일명 ‘언더 찐윤’으로 통하는 영남권 일부 국민의힘 의원들은 조직적으로 이를 방해했다. 이를 똑똑히 목격한 장 대표는 지방선거 승리를 외치면서도 당내 혁신에 대해선 언급하지 않는다. 오히려 당 주류와 반목하는 한 전 대표와 친한계(친 한동훈)를 겨냥해 패널 인증제를 언급하는 등 당 주류의 영향력을 고착화하는 방안을 발표했다. 누구나 꿈꿔도 이룰 수 없는… 하지만 여론은 국민의힘의 혁신과 중도 확장을 바라고 있다. 이 때문에 이재명정부의 초반 난맥상에도 불구하고, 민주당과 국민의힘의 지지율 격차는 더욱 커지고 있다. 용꿈을 함께 실현할 창조적 소수는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는다. 자기 사람은 진득하게 비전을 통해 설득하면서 만들어진다. 장 대표에게 필요한 것은 “국정감사 이후엔 어디서 장외투쟁을 하느냐”가 아니라 “왜 내 주변엔 사람이 없어서 내가 직접 장외투쟁을 해야 하느냐”는 것이다. 용꿈은 누구나 꿀 수 있지만, 아무나 이룰 수는 없다. <ctzxp@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