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연재> 사무라이 정신은 거짓이다 ⑲주군 머리털만도 못한 목숨

사무라이는 그 누구보다 비굴했다

올해는 광복 69주년이 되는 해다. 내년이면 벌써 광복 70주년을 맞이하지만 일본의 진정성 있는 사과는 요원하기만 하다. 게다가 고노담화를 부정하고, 위안부 문제를 왜곡하는 등 일본의 역사인식은 과거보다 오히려 퇴보하고 있어 국민들을 분노케 하고 있다. 이런 시기에 일본의 자랑인 ‘사무라이 정신’의 실체를 낱낱이 밝혀내 화제가 되고 있는 책이 있다. 일요시사가 화제의 책 <사무라이 정신은 거짓이다>를 연재한다.

주군이 죽으라고 해서 죽는 것은 이미 불충이었다. 잘못을 했으면 미리 알아서 할복해야 했다. 그래야 주군으로부터 충성심 있는 사무라이, 책임감 있는 사무라이로 인정받아 그 가족이라도 앞날이 보장되는 것이다. 괜히 죽기 싫어 머뭇거렸다가는 주군에게 충성을 보여 주려는 다른 가신으로부터 살해당할 것이기 때문이다.

빈번했던 할복

영주나 주군으로부터 명을 받기 전에 스스로 알아서 할복해야 하는 것은, 오늘날 회사에 손해를 끼치면 알아서 사표를 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버티면 오히려 강제퇴직을 당한다. 그렇게 되면 퇴직금뿐 아니라 많은 불이익이 따른다. 당시 사무라이들도 마찬가지였다.

스스로 알아서 할복하면, 적어도 그가 갖고 있던 직책과 영지는 그의 아들에게 대물림될 수 있었으나, 할복하지 않고 머뭇거리면 다른 가신들에게도 본보기를 보여 주고 싶은 주군으로부터 할복을 명받아 죽을 뿐만 아니라, 그가 갖고 있던 직책과 영지도 빼앗기는 가혹한 처벌을 받았다.

당시 사무라이에게 있어 죽음이라는 것은 이미 일상의 한 부분이 되어 있었다. 날마다 계속되는 전투에서 보고 듣는 것이 죽음이었다. 지난 싸움에서는 형제가 죽고, 이번 싸움에서는 조카가 죽고……. 묻히지도 못한 주검이, 그것도 목이 떨어져 나간 시체가 곳곳에 널려 있었다.

아울러 말 한 마디 잘못했다고, 행동 한 번 잘못했다고 파리 목숨같이 죽어가는 평민 또한 심심치 않게 있었을 것이다. 도쿄대학 사료편찬소에는 규슈의 ‘시마즈(島津)’ 집안의 족보가 보관되어 있다. 그 족보에 의하면, 남자들은 18세를 전후하여 전사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로 미루어 볼 때 당시 사무라이들의 평균 연령은 20세를 넘기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들에게 있어 죽음은 단지 시간 문제였다. 이번 싸움에 죽느냐, 아니면 다음 싸움에 죽느냐 하는 문제이지, 결코 죽음 자체를 두려워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다. 그들에게 있어 가족을 위하여 죽는다는 것은, 그것도 전쟁터도 아닌 집안에서 할복하여 죽는다는 것은 행복한 죽음이었을지도 모른다.

할복함으로써 주군에게 충성심을 보여 주고, 또 한편으로는 자신의 가족을 책임지라는 말 없는 압박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충성심으로 할복한 가신의 아들을 거두지 않고, 그 가족을 돌보지 않는 주군이라면 다른 가신들로부터 신망도 받을 수 없을 것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자식에 대한 부모의 사랑은 헌신적이다. 하물며, 죽음이 생활의 일부분이 되어버린, 그래서 언제 어떻게 죽을지조차 알 수 없는 전국시대에, 그리고 자신의 영지와 직책이 아들에게 대물림되는 당시의 사회 구조를 고려하면, 사무라이들이 자신의 가족을 위해 할복하는 것은 기꺼이 맞이할 수 있는 죽음이었을 것이다. 여기에 바로 사무라이들이 주군을 위해 목숨을 쉽게 내버릴 수 있었던 근본 이유가 있는 것이다.

잘못했으면 알아서 할복해야
18살 전후로 전사 ‘파리 목숨’


또 한편으로는 당시 일본인들의 생사관(生死觀)의 기초를 이루었던 불교의 윤회설도 이들이 쉽게 죽을 수 있었던 또 다른 배경이 되었다. 당시의 권력 구조뿐만 아니라 일본인들의 소심한 성격까지 생각한다면, 사무라이는 그 주군 앞에서 고양이 앞의 쥐 정도가 아니라 호랑이 앞에 쥐 꼴이었을 것이다. 사무라이는 그 주군의 뜻에 어긋나는 말 한 마디, 행동 한번 제대로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사무라이가 그 주군에게 충성을 하는 데 있어 어떤 이유도 있을 수 없고, 선택의 여지도 있을 수 없었을 것이다. 주군이 좋다고 충성을 하고, 싫다고 충성을 안 할 수도 없는 것이다. 자신이 살고, 가족이 살고, 그 자식이 계속 사무라이로서 살아가려면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주군에게 진심으로 충성을 하든 아니면 싫어도 하는 척이라도 해야 하는 것이다. 결코 주군의 눈 밖에 나서는 안 되었다. 절대적 권력자 앞에서 사무라이들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런 의미에서 주군에 대한 사무라이들의 충성이, 목숨을 초개같이 버려가며 보인 충성이 진심에서 우러난 충성인 경우도 있었겠지만, 대부분이 자신이 살고 가족을 살리기 위한 위장된 충성이요, 영지를 유지하려는 또 다른 형태의 아부성 충성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당시 사무라이들은 ‘내 주군의 주군은 내 주군이 아니다’라고 생각하며 살았다. 오직 자신에게 무사 직책을 주고 영지도 내려 주며, 때로는 몰수도 함으로서 실생활에 막대한 영향을 줄 수 있는 자만을 주군으로 믿고 충성도 하고 때로는 배반도 하였던 것이다. 심지어 쇼군도 주군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당시 사무라이들의 기본 정신이요, 영주와 사무라이들의 주종관계를 잘 나타낸 말이 있다. 1) 주군은 부하 사무라이에게 영지를 내림으로써 은혜를 베풀며, 사무라이는 전쟁에 나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싸우는 것이 그 은혜에 보답하는 사무라이의 의무이다.
 
2) 사무라이는 주군에게 무조건 복종함을 원칙으로 하며, 주군에 대한 반항을 가장 극악한 죄로 생각한다. 이 말도 당시의 정치적, 경제적 상황 등을 고려하여 곰곰이 따져 보면, 바로 사무라이들의 주군에 대한 아부성 표현이다.

여기서 ‘영지를 내림으로써 은혜를 베풀며’라는 말은 단순히 농지를 나누어 주어 먹고살게 해 주었다는 것이 아니다. 칼도 갖게 해 주고, 성(姓)도 갖게 해 주고, 평민들에게 호랑이같이 군림하며 살 수 있는 신분도 주었다는 뜻인 것이다.

영주가 사무라이에게 영지를 하사하는 첫 번째 이유는, 전쟁이 났을 때 영주를 위하여 전쟁에 나가 싸우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자신과 영지를 지키라는 것이다. 이 말을 뒤집어 보면 사무라이는 영주에게 ‘목숨을 걸고 전쟁에 임하겠다’는 충성 서약 아래 영지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이 된다.

사무라이가 받은 영지를 유지하려면 목숨을 사리지 않고 전쟁에 임해야 하고, 영주에게 충성을 보여 주어야 하는 것이다. 또 당시 일부 사무라이들은 칼집에 이런 문구의 글까지 새기고 다녔다. ‘어떤 산도 주군의 은혜보다 가볍고, 주군의 한 가닥 머리카락도 나의 목숨보다 무겁다(萬山不重君恩重, 一髮不輕我命輕)’ 진실로 주군에 대한 고마움과 충성심을 잊지 않으려고 이렇게 칼집에 새겨 놓은 것일까? 아니면 주군에게 은근히 보여 주려고 새겨 놓은 것일까?

몸에 밴 아부

진심으로 주군에 대한 고마움과 충성심을 잊지 않으려고 칼집에 새겨 놓은 것이라 하더라도, 보통 사람들은 낯간지러워 함부로 할 수도 없는 아부성 말을 일부 사무라이들은 칼집에까지 새겨놓고 다닌 것이다. 과연 도를 넘어선 사무라이들의 태도가 진정으로 주군을 존경해서였는지, 아니면 영지를 지키기 위한 또 다른 아부였는지 궁금하다. 이렇게 전국시대는 형성되었고, 주군과 사무라이들 사이의 주종관계도 이렇게 정립되었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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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랑 끝 국민의힘 뒤집기와 자충수

벼랑 끝 국민의힘 뒤집기와 자충수

[일요시사 정치팀] 박형준 기자 = 국민의힘 장동혁 대표는 비상계엄 1주년을 맞아 페이스북에 사과 입장을 밝혔다. 국민의힘 원내 지도부도 기자회견을 열고 고개를 숙였다. 사과는 짧았지만, 더불어민주당에 대한 비난은 길었다. 사과 의견을 통해 확인되는 국면 전환 노림수는 ‘한동훈을 제외한 빅텐트’인 걸까? 국민의힘 공보실은 지난 2일 오후 10시54분 출입기자들에게 지난 3일 지도부 일정을 공지했다. 공보실에 따르면, 지도부의 일정은 ‘통상 일정’이었다. 공개 외부 일정이 없단 의미다. 지난 3일은 윤석열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 1주년이었다. 통상의 의미는? 지도부의 공개 외부 일정이 없단 것은 국민의힘 장동혁 대표의 비상계엄 관련 공개 사과 및 기자회견 일정이 없었단 의미로 해석될 수 있었다. 장 대표는 지난 3일 오전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사과 의견을 밝혔다. 장 대표는 “윤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은 의회 폭거에 맞서기 위한 계엄이었다”는 등 “정당화하는 것 아니냐”는 지적을 받을 소지가 있는 주장부터 제시했다. 윤 전 대통령 파면에 대해서도 “한국 정치의 연속된 비극을 낳았고, 국민과 당원들께 실망과 혼란을 드렸다”는 등 ‘탄핵 반대’ 의견을 유지했다. 장 대표에 따르면, 국민의힘의 잘못은 하나로 뭉쳐 제대로 싸우지 못했다는 부분이었다. 자신에 대해서도 “당 대표로서 책임을 통감한다”고 강조했다. “장 대표가 사과하지 않을 것”이란 예상은 같은 날 오전 4시50분경 이정재 서울중앙지법 영장전담 부장판사가 국민의힘 추경호 의원의 구속영장을 기각하면서 확실시됐다. 장 대표는 페이스북 게시글에서도 “추 의원 구속영장 기각은 어둠의 1년이 지나고 두터운 장막이 걷히고, 새로운 희망의 길이 열리는 신호탄”이라면서 대정부 투쟁에 의미를 부여했다. 장 대표는 “이재명정권의 대한민국 해체 시도를 국민과 함께 막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장 대표가 사과 불가는 지난달 28일 대구에서 진행된 국민의힘 장외집회에서 어느 정도 예고된 것이었다. 당시 그는 “비상계엄에 대한 책임을 무겁게 통감한다”면서도 “우리가 흩어지고 분열한 결과, 이재명정권이 탄생했단 것을 기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어 “책임을 무겁게 통감한다”면서도 이재명 대통령과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을 비난하는 내용으로 연설 대부분을 채웠다. 5일 간격으로 같은 얘기를 반복한 것이었다. 당시 장 대표가 주장한 민주당에 대한 비난의 핵심 내용은 ▲의회 폭거·국정 방해 ▲무모한 적폐 몰이에 따른 공무원 사찰 위협 ▲폭거로 인한 민생 파탄·국가 시스템 붕괴 ▲내란 몰이 등이었다. 비상계엄 1주년에 강조된 “민주당 폭거” 국면 전환·결집 노리는 선 사과·후 비난? 국민의힘의 비상계엄 관련 사과는 ▲송언석 원내대표 ▲유상범·김은혜 원내부대표 ▲최수진·최은석 원내대변인 등 원내 지도부 차원에서 나왔다. 송 원내대표 등은 지난 3일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국민께 큰 충격을 드린 비상계엄 발생을 막지 못한 데 대해 국민의힘 국회의원 모두는 무거운 책임을 통감하고 있다”며 “국민 여러분께 다시 한번 진심으로 사과드린다”고 말했다. 이어 군인·공직자·의료인·자영업자 등 비상계엄 선포 피해자들에게 “깊은 위로와 사과의 말씀을 드린다”고 고개 숙였다. 하지만 이후의 메시지는 이재명정부·민주당 비판 등 장 대표의 주장과 크게 차이가 없는 내용이었다. 송 원내대표는 “국민의힘 의원들은 패배의 아픔을 딛고 분열과 혼란의 과거를 넘어서 다시 거듭나겠다”며 “소수당이지만 처절하게 다수 여당과 정권에 맞서 싸우겠다”고 강조했다. 이전까지 국민의힘에서 장 대표에게 공개적으로 대국민 사과를 요구한 정치인은 오세훈 서울시장과 김용태·김재섭·권영진·엄태영·이성권·조은희 의원 등이었다. 국민의힘 양향자 최고위원은 지난달 29일 대전에서 진행된 장외집회 중 “국민의힘은 불법 계엄을 방치했으니, 반성해야 한다”고 주장했다가 일부 지지자들의 강한 항의를 받았다. 김재섭 의원은 지난달 28일 YTN 라디오 <더 인터뷰>에 출연해 “당 지도부의 사과가 없으면 제 나름의 사과를 해야 할 것 같다”며 “같이 메시지를 낼 국민의힘 의원들이 약 20명은 된다”고 주장했다. 이는 곧 “연판장을 돌리거나 기자회견을 할 수도 있다”는 압박으로 해석될 가능성이 있었다. 오 시장도 같은 날 채널A <김진의 돌직구 쇼>에 출연해 “중도층의 마음을 얻기 위해서라도 당 차원의 사과가 필요하다”며 “공당이라면 반성문을 쓰는 게 도리”라고 주장했다. 결국 이들은 당과 무관하게 대국민 사과를 했다. 오 시장은 지난 3일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국민의힘 소속 중진 정치인이자, 서울시민의 일상을 책임지는 시장으로서 그 책임을 무겁게 받아들인다”며 “그날의 충격과 실망을 기억하는 모든 국민께 거듭 사과의 말씀을 드린다”고 밝혔다. 국민의힘 의원 25명은 지난 3일 국회에서 “비상계엄 선포 당시 집권여당의 일원으로서 비상계엄을 미리 막지 못하고 국민께 커다란 고통과 혼란을 드린 점에 대해 거듭 국민 앞에 고개 숙여 사죄드린다”면서 ▲헌법재판소의 윤 전 대통령 파면 결정 존중 ▲윤 전 대통령과의 정치적 단절 ▲국민의힘 체질 개선·재창당 수준의 혁신 등을 약속했다. 이어지는 각자 플레이 장 대표에게 대국민 사과를 요구한 후 자체적으로 대국민 사과 성명을 발표한 국민의힘 정치인들은 대체로 수도권에 기반을 둔 소장파다. 이들 중 국민의힘이 강경 보수 정당으로 자리매김하면 가장 큰 손해를 볼 정치인으로는 오 시장과 김재섭·김용태 의원이 거론된다. 오 시장은 높은 개인 인기를 바탕으로 민주당의 서울시장 탈환 공세에 맞서고 있다. 김재섭 의원의 지역구 서울 도봉갑은 원래 민주당 텃밭이었다. 김 의원은 지난해 총선 당시 민주당 후보로 출마한 안귀령 대통령실 부대변인을 1094표 앞서 어렵게 이겼다. 지난해 12월7일 국민의힘의 윤 전 대통령 탄핵소추 표결 집단 이탈에 동참했을 때도 지역구에서 규탄 집회가 개최되는 등 홍역을 치렀다. 김용태 의원도 경기 가평·포천에서 민주당 후보로 출마한 박윤국 한국도자재단 이사장에 2774표 앞서 어렵게 금배지를 다는 데 성공했다. 국민의힘에 대해선 “강경 보수화가 진행된다”는 지적이 각계에서 이어지고 있다. 이 우려는 장 대표가 지난달 16일 유튜브 채널 ‘이영풍 TV’에 출연해 ▲자유통일당 ▲우리공화당 ▲자유민주당 ▲자유와혁신 등 원외 강경 보수 4당과의 지방선거 연대 가능성을 언급하면서 깊어졌다. 장 대표는 지난달 28일 개혁신당과의 연대 가능성에 대해선 “지금은 연대를 논의할 때가 아니”라면서 선을 그었다. 최근 국민의힘에선 “한동훈 전 대표를 축출하려는 것 아니냐”는 의문을 제기할 만한 밑그림을 계속 그리고 있다. 국민의힘 여상원 윤리위원장은 지난달 17일 사의를 표명했다. 여 위원장은 “당에서 ‘물러나면 좋겠다’는 연락이 왔다”며 “굳이 능욕당하면서 자리를 지킬 필요가 없다고 판단돼 원하는 대로 하겠다고 답했다”고 주장했다. 일각에선 이를 두고 “윤리위원회가 ‘계파 갈등 조장’을 이유로 윤리위에 넘겨진 국민의힘 김종혁 전 최고위원에 대해 주의 조치만 내린 것 때문 아니냐”고 의심하고 있다. 국민의힘 우재준 청년 최고위원은 지난달 30일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원하는 결론을 내리지 않았다고 윤리위원장을 사퇴시키는 게 정당한 일이냐”며 “내란 특별재판부를 만드는 민주당과 뭐가 다르냐”고 정면 비판했다. 이어 국민의힘 당무감사위원회는 지난달 28일 “당원 게시판 의혹에 대한 조사 절차에 착수했다”고 밝혔다. 당원 게시판 의혹은 “국민의힘 당원 게시판에 올라온 윤 전 대통령 부부 비방글 작성에 한 전 대표 가족이 연루된 게 아니냐”는 의혹이다. 장 대표는 취임 직후 “사실관계를 명확하게 밝혀 당원에게 알릴 것”이라는 방침을 밝혔던 바 있다. 윤 전 대통령 부부는 정치적으로 몰락해 서울구치소에 갇혔고, 형사재판을 받고 있다. 국민의힘이 당원 게시판 의혹을 밝혀낸 후 거둘 수 있는 실익으로는 “한 전 대표를 국민의힘에서 쫓아내고, 친한(친 한동훈)계를 무력화시킬 수 있다”는 것이 거론된다. 구 친윤(친 윤석열)계가 거둘 수 있는 이익이다. 한 전 대표에 대해선 보수 성향 유권자 사이에서도 호불호가 명확하게 나뉜다. 하지만 한 전 대표는 윤 전 대통령과 정치적으로 갈등하면서 비상계엄 해제에 동참했던 이력이 있다. 이 때문에 한 전 대표는 “국민의힘이 강경 보수 일색이 되는 걸 막는 방파제·상징”이란 분석이 오랫동안 있어왔다. 친한계로 거론되는 국민의힘 의원 중 상당수는 수도권에 지역구를 둔 소장파라는 분석이 나온다. 윤리위원장 쫓아낸 이유 윤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에 대해선 “윤 전 대통령이 정치에서 폭력을 동원하는 것에 무슨 의미가 있는지 잘 몰랐던 것 아니냐”는 의문이 제기됐다. 정치의 본질은 대화·토론·협상이다. 영국 하원에선 20세기 초까지 의원이 총칼을 이용해 결투·난투를 했다. 물리적 폭력이 아닌 ‘언어폭력’ 선에서 공방을 이어가는 정치 문화는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정착됐다. 윤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가 전 세계에 줬던 충격은 민주주의가 충분히 성숙했다고 믿었던 대한민국에서 군을 동원해 정적을 제거하려던 사태가 발생했다는 것이었다. 장 대표·송 원내대표는 사과 메시지를 먼저 짧게 발표하면서 이재명정부·민주당 비판은 길게 이어가는 형식의 사과 의견을 밝혔다. 사과엔 ▲직접적인 반성 ▲분명한 잘못 인정 ▲재발 방지 약속 ▲보상 약속 등 4개의 원칙이 제기됐는데 “상대방 비판에 더 중점을 둔 사과는 역설적으로 ‘반성을 하는 게 맞느냐’는 비판으로 이어질 소지가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지난 2008년 광우병 촛불시위 당시 대국민 사과를 했고, 박근혜 전 대통령은 지난 2016년 최순실 게이트가 불거진 후 대국민 사과를 했다. 이 전 대통령은 “모든 것이 제 불찰이고, 국민께 송구스럽게 생각한다”며 “미국산 쇠고기 수입 협상·후속 조치 중 국민의 마음을 헤아리는 데 미흡했고, 우려를 덜어드리지 못한 점에 대해 깊이 사과드린다”고 말했다. 박 전 대통령은 “국정을 꼼꼼하게 챙겨보고자 하는 순수한 마음으로 한 일”이라며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국민 여러분께 심려를 끼쳐 놀라고 마음 아프게 해드린 점에 대해 송구스럽게 생각한다”면서 “국민께 깊이 사과드린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 전 대통령은 당시 크게 불거졌던 각종 우려를 ‘괴담’으로 규정지었다. 이 때문에 촛불 시위 세력이 제시한 재협상 시한과 맞물린 시점에서 사과가 나온 점을 감안할 때 국면 전환을 위한 명분 쌓기 아니냐는 비판을 받았다. 박 전 대통령은 이미 각종 의혹이 광범위하게 제기돼 근거 자료들까지 제시되는 시점에서 “취임 후 일정 기간 일부 자료들에 대해 최순실씨의 의견을 들은 적은 있지만, 청와대 보좌 체계가 완비된 이후에는 그만뒀다”고 주장했다. 이로써 박 전 대통령의 해명은 신뢰를 잃었다. 장 대표·송 원내대표의 사과도 두 전직 대통령의 사과처럼 자신의 주장을 뒤에 배치한 후 더 큰 비중을 부여하는 형식을 유지했다. 비상계엄 1주년에 강조된 “민주당 폭거” 국면 전환·결집 노리는 선 사과·후 비난? 이런 사과 형식은 국면 전환·지지층 결집 목적을 가진 이들이 활용한 사례가 많다. 대표적인 예로, 고대 로마에서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암살된 후 있었던 마르쿠스 브루투스·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의 연설이 꼽힌다. 카이사르 살해를 주동한 브루투스는 “카이사르에 대한 내 사랑은 카이사르를 사랑하는 다른 분보다 절대 뒤떨어지지 않는다고 단언한다”고 선언한 후 “로마를 더 사랑해서 카이사르를 죽였다”고 주장했다. 이어 “나라를 위해 눈물을 머금고 가장 사랑하는 친구를 죽였다”고 강조했다. 안토니우스는 “카이사르 암살에 가담한 사람들은 모두 존경할 만한 분들”이라고 선언한 후 카이사르를 찬양하면서 그의 유언장을 공개했다. 유언의 핵심 내용은 “내 재산을 로마 시민에게 기증한다”는 것이었다. 또 카이사르가 살해당할 당시 입었던 칼자국과 피로 얼룩진 옷도 공개했다. 흥분한 로마 시민은 암살자들의 집을 습격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안토니우스·아우구스투스는 로마 정국을 장악했다. 불리한 내용을 먼저 짧게 거론한 후 유리한 내용을 장황하게 거론하는 형식은 정치적 목적을 위해 즐겨 이용된다. 장 대표·송 원내대표가 짧은 사과 의견을 밝힌 후 이재명정부·민주당을 비중 있게 비판한 것도 강경 보수 세력에겐 강한 인상을 줄 가능성이 있다. 특히 장 대표는 비상계엄의 원인을 ‘의회 폭거’라고 규정했다. 이에 따르면, 윤 전 대통령은 카이사르가 된다. 비상계엄 해제에 찬성해 사실상 윤 전 대통령 몰락에 가담한 한 전 대표와 친한계는 브루투스 일당이 되는 구도가 그려질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그렇다면 강경 보수 세력은 당원 게시판 의혹에 대해 어떤 의견을 제시할지 어렵지 않게 예상할 수 있다. 공나형 전남대 학술연구교수는 지난 2022년 발표한 논문 <대통령의 공적 사과 담화에서 드러나는 ‘개입’ 양상>에서 김영삼 전 대통령이 지난 1993년 쌀 시장 개방을 수용하면서 밝힌 대국민 사과와 박 전 대통령의 최순실 게이트 관련 대국민 사과를 분석했다. 공 교수는 김 전 대통령의 사과문에 대해선 “선의로 행한 행위가 어쩔 수 없는 부정적인 결과로 이어졌다고 강조하면서 결과의 부정성에 관여하는 자신의 의도의 비중을 제거했다”고 분석했다. 박 전 대통령의 사과문에 대해선 “자기 고백이 많은 분량을 차지하지만, 그 고백의 원인이 되는 행위에 대해선 소극적”이라고 분석했다. 12월3일 조용히 장 대표·송 원내대표의 사과도 “어쩔 수 없었다”는 항변과 상대방 비판을 내용으로 채웠다. 그러면서 민주당 심판·보수 재건·대여 투쟁을 강조했다. 결국 두 사람의 답은 ‘한 전 대표를 제외한 빅텐트’ 방침 재확인으로 보인다. 국민의힘의 12월3일은 이렇게 조용히 지나갔다. <ctzxp@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