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제의 인물> 팔자 센 정윤희 기구한 인생사

전설의 미인 “아~ 옛날이여”

[일요시사 사회팀] 김성수 기자 = 1970∼80년대 주름 잡던 여배우 정윤희씨. 몇 년 전 아들이 사망한 데 이어 최근 살던 집마저 경매에 넘어간 것으로 알려져 주위를 안타깝게 하고 있다. 은막 최고의 스타로 활약하다 간통 사건이 얽힌 재벌과의 결혼 그리고 돌연 잠적, 이후 평범한 주부로 지내다 갑작스럽게 불운이 닥친 정씨의 기구한 삶을 되돌아봤다.

 
1954년 경상남도 통영에서 3녀 중 막내로 태어난 정윤희씨는 부산 당감초등학교와 혜화여중·고를 졸업하고 1975년 영화 <욕망>으로 스크린에 데뷔했다. 탤런트 노주현씨가 상대역이었다. 정씨는 한 영화사가 공모한 연기자 모집에서 떨어졌으나 우연히 영화인들의 눈에 띄어 이경태 감독에게 소개되면서 <욕망>에 출연하게 됐다.

21세 때 데뷔
미모·연기 퀸
 
당시 정씨는 모델 에이전시의 소개로 먼저 영화계 거장 신상옥 감독을 만났고, 신 감독이 이 감독에게 정씨를 적극 추천했다고 한다. 신 감독은 이 감독에게 “(정씨 같이) 가능성 있는 얼굴을 대담하게 쓰라”고 조언했다는 후문이다.
 
정씨는 영화 출연 후 처음엔 별로 빛을 못 보다가 같은해 해태제과 CF모델을 맡으면서 인기를 얻기 시작했고, TBC-TV(현 KBS-2TV)의 <쇼쇼쇼> MC로 박탈돼 인기가 급상승했다. 이후 TV드라마와 영화에서 주연 연기자로 절정의 인기를 누리면서 총 36편의 영화와 4편의 드라마에 출연했다. 유명 남자배우들과 호흡을 맞추며 충무로와 방송가에서 ‘캐스팅 영순위’여배우로 꼽혔다.
 

영화 <뻐꾸기도 밤에 우는가>와 <앵무새 몸으로 울었다>로 1980년과 1981년 2년 연속 대종상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수상해 미모뿐만 아니라 연기파 배우로도 두각을 나타냈다. 1982년엔 영화 <사랑하는 사람아>로 백상예술대상 여자최우수연기상을 받기도 했다.
 
정씨는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장미희, 유지인씨와 함께 ‘3대 트로이카 여배우 시대’를 이끌며 당대 최고의 톱스타 반열에 이름을 올렸다. 짙은 눈썹과 큰 눈망울, 오뚝한 코, 도톰한 입술. 고전미와 청순미, 현대적 미색을 겸비한 절세미녀로 평가받았다.
 
 
해외에서도 정씨를 주목했었다. 전 세계에 불고 있는 한류의 원조 격인 셈이다. 정씨의 뛰어난 미모는 일본과 대만 등 해외에도 알려져 외국 감독들의 러브콜이 잇달았다.
 
뿐만 아니라 세계적인 톱스타들만 참석했던 일본 <동경가요제>에 한국인 최초로 초청받아 영화 <러브스토리>의 여주인공 알리 맥그로우와 시상을 했다. 대만에선 정씨의 영화가 개봉됐었는데, 정씨가 대만을 방문했을 당시 공항에 수많은 취재진이 몰려나와 화제가 되기도 했다. 세계적 액션배우 성룡이 첫눈에 반한 정씨 때문에 한국을 자주 방문했고 한국을 너무 사랑하게 됐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인기가 하늘 높은지 모르고 치솟던 정씨는 1984년 심재석 감독이 메가폰을 잡고 영화배우 이영하씨와 출연한 <사랑의 찬가>를 끝으로, 그해 12월 크리스마스 이브날 결혼과 함께 연예계를 떠났다. 그야말로 대한민국을 떠들썩하게 했던 ‘사건’이었다.
 
장미희·유지인과 ‘80년대 트로이카’
‘간통 회장님’과 결혼후 연예계 은퇴
 

상대남은 조규영 중앙건설 회장. 재벌가로 시집간 것이다. 당시 정씨의 나이는 30세. 조 회장은 38세였다.
친지의 소개로 정씨를 우연히 만난 것으로 알려진 조 회장은 남산초등학교와 경기고를 졸업하고 미국 사립명문 서던캘리포니아대학(USC) 회계학과를 나와 1980년 중앙건설을 설립, 현재 대표이사 회장을 맡고 있다. 금융감독원 전자공시에 따르면 지난 9월 말 기준 중앙건설의 최대주주는 조 회장으로, 지분 12.95%(85만3510주)를 보유하고 있다. 정씨도 4.29%(28만2525주)의 지분이 있다.
 
‘하이츠’브랜드로 알려진 중앙건설의 모태는 조 회장의 부친 조성철 창업주(1981년 별세)가 1946년 설립한 중앙산업이다. 조 회장이 선친의 뒤를 이어 회사를 이끌고 있는 것. 중앙산업은 1950년 6·25전쟁 이후 복구사업 바람을 타고 각종 건설공사를 수주해 1952∼54년 3년 연속 건설업체 도급순위 1위를 차지하는 등 국내 굴지의 건설사로 성장했다. 1958년엔 서울 종암동에 한국 최초의 아파트 ‘종암아파트’를 건립하기도 했다.
 
그러나 1970년대 중반 부도로 회사는 공중분해됐다. 조 창업주의 4남1녀 중 차남인 조 회장은 미국 유학을 마치고 LA에서 개인사업(폴함사)을 하다 중앙산업이 파산 위기에 처하자 1977년 귀국해 계열사를 인수한 후 재건했다.
 
정윤희-조규영 부부의 결혼 과정은 결코 순탄치 않았다. 문제는 조 회장이 법적으로 유부남인 상태에서 사랑을 키웠다는 사실이다. 전 부인과 이혼절차를 밟고 있는 상황에서 교제가 시작된 것이다.
 
 
결국 두 사람은 1984년 8월 간통 혐의로 쇠고랑을 찼다. 정씨와 조 회장은 잠을 자다가 급습한 조 회장의 전 부인에게 발각돼 경찰에 연행됐다. 줄곧 간통 사실을 부인한 이들은 유치장에 들어간 지 4일 만에 풀려났다. 전 부인은 조 회장과 이혼 조건으로 거액의 위자료를 받고 고소를 취하했다.
 
조 회장은 당시 경찰 조사에서 “정씨와의 관계 때문에 가정불화가 생긴 것이 아니라 집안에서 이혼 얘기가 나오는 등 가정문제가 복잡하던 중 정씨를 만나 친하게 지내게 된 것”이라며 “부인이 원하는 대로 위자료 합의가 이뤄지지 않자 고소한 것”이라고 진술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혼 전 만나
큰 파문 일어
 
정씨는 풀려난 직후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복잡한 심경을 털어놨다. 그는 “몸둘 바를 모르겠다. 연기생활 10년 만에 공인이란 사실을 새삼 느꼈다. 무조건 죄송하다. 깊이 사죄한다”고 머리를 숙였다. 이어 조 회장에 대해 “그를 좋아한다. 꼬집어 말할 수는 없으나 그 사람의 무엇이 나를 끌어 잡아당긴다. 모든 것에 대해 나를 리드한다”고 밝혔다.
 
이 인터뷰에서 “당분간 쉬고 싶다”던 정씨는 4개월 뒤 조 회장과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린 이후 연예계를 완전히 떠났다. 영화와 TV 출연은 물론 일체 인터뷰도 하지 않았다. 영화·방송 제작진들은 수없이 정씨에게 러브콜을 보냈지만 번번이 거절당했다.
 
1993년 조 회장이 대주주로 있었던 가구업체 모델로 브라운관에 잠깐 등장했고, 1995년 한 토크쇼에서 전화 인터뷰를 한 것을 제외하고 단 한 번도 공개된 장소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2000년대 초반 한국영상자료원이 주최한 ‘정윤희 영화주간’에 여전히 고운 모습으로 나타나 화제를 모은 바 있다.
 

정씨가 외부에 얼굴을 내비치지 않자 베일에 싸여있는 그에 대한 궁금증은 더욱 증폭됐다. 항간엔 하도 소식이 없자 정씨를 둘러싼 악성 루머가 나돌기도 했다. ‘왕년의 스타’로 대중의 기억에서 사라진 정씨가 다시 회자된 것은 2011년 추석 때다. 그해 9월 한 세대를 풍미한 정씨의 인생과 필모그래피, 현재까지도 그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인터넷 팬클럽 회원 4000여명) 등을 전한 MBC 한가위특집 <우리가 사랑한 여배우-카페 정윤희>가 전파를 타면서 은퇴 27년 만에 그의 삻이 재조명됐다.
 
 
당시 함께 활동했던 최불암, 노주현씨 등은 “정말 예뻤다”고 극찬했고, 한 성형외과 전문의는 “완벽한 황금비율”이라고 평했다. 특히 정씨의 과거 사진들이 공개되자 네티즌들은 “자연 미인” “진정한 여신” “올킬 미모” 등의 찬사를 보냈다.
 
정씨는 이 프로그램에도 출연하지 않았다. 제작진의 끈질긴 섭외 요청에도 불구하고 방송에 등장하지 않았다. 대신 화환과 자필로 쓴 편지를 방송국으로 보냈다. 정씨는 “여러분 곁을 떠난 지 벌써 27년이 흘렀습니다. 아직까지 저를 기억해주는 분들이 계시다는 말씀에 놀랍고 감사할 따름입니다. 직접 인사드리지 못해 죄송하다는 말씀드리고, 저를 기억해주시는 모든 분들께 행운이 가득하시길 기도하겠습니다”란 메시지를 전했다.
 
영화·방송사 러브콜 거절 ‘칩거’
갑자기 자녀 사망·집 경매 ‘불운’
 
그로부터 불과 2개월 뒤인 11월 정씨의 이름이 다시 언론에 오르내렸다. 남편을 내조하고 자녀들을 뒷바라지하면서 평범한 가정주부로 지내던 정씨에게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전해졌다. 갑자기 아들이 사망한 것. 정씨와 결혼하기 전 조 회장은 전처와 사이에 1남1녀를 두고 있었다. 정씨는 이들 남매를 키우다 결혼 5년 만인 1989년 뒤늦게 막내아들을 낳았는데 그가 바로 사망한 아들이다. 
 

당시 정씨 아들은 국내에서 영재학교를 졸업한 뒤 조 회장과 같은 서던캘리포니아대학에서 유학 중이었다. 그러던 중 친구들과 술을 마신 후 급성폐렴증세를 일으켜 한인타운 인근 할리우드장로병원 응급실로 이송됐으나 의식을 회복하지 못하고 끝내 숨을 거뒀다.
 
의문사인 만큼 부검이 실시됐다. 이 결과 사인이 어느 정도 드러났다. 로스앤젤레스 카운티 검시소는 “약물 복용으로 심장마비 증세를 일으킨 것 같다”며 “타살이나 자살의 흔적은 없었다”고 밝혔다. 일각에선 정씨 아들의 사인을 두고 설왕설래가 끊이지 않았다.
 
아들을 가슴에 묻은 정씨의 마음고생은 말로 헤아릴 수 없었다. 한동안 아들 얘기만 나오면 눈물부터 흘렸다는 후문이다. 이런 와중에 최근 살던 집마저 경매에 넘어가는 일까지 생겼다.
 
 
지난 8일 부동산경매 전문 법무법인 열린에 따르면 조 회장 소유의 서울 압구정동 현대아파트 79동 전용면적 196㎡에 대해 지난 6월 경매개시 결정이 내려졌다. 이 아파트에 걸린 등기부상 채무액은 53억원에 이른다. 국민은행은 빌려준 돈과 이자 20억원을 받기 위해 경매에 넘겼다. 
 
열린은 “연말이나 연초에 첫 번째 입찰이 진행될 가능성이 높다”며 “같은 아파트 동일 면적은 최근 25억원에 거래된 바 있다”고 밝혔다. 조 회장은 1988년 이 아파트를 매입해 가족이 20년 넘게 거주한 것으로 알려졌다. 실제 등기부등본에도 조 회장의 주소지가 여전히 이곳으로 등재돼 있다.
 
경매는 조 회장이 경영 중인 중앙건설 사정과 무관치 않다. 중앙건설은 벼랑 끝에 서있다. 지난해 매출 583억원을 올렸지만 영업손실 657억원, 순손실 2142억원을 냈다. 총 자산은 1427억원이지만, 2009년부터 적자를 기록하면서 부채가 무려 3968억원으로 불었다. 결국 회사는 법정관리에 들어간 상태다.

아들 가슴에 묻고
남편 회사도 휘청 
 
올해 60세인 정씨는 아직까지도 아들을 잃은 슬픔과 충격에 빠져있을 게다. 여기에 집까지 잃을 판이니 패닉 상태가 아닐까 싶다. 은막 최고의 스타로 활약하다 간통 사건이 얽힌 재벌과의 결혼 그리고 돌연 잠적, 이후 평범한 주부로 지내다 갑작스럽게 불운이 닥친 정씨의 기구한 삶을 지켜보는 팬들은 안타깝기만 하다.
 
<kimss@ilyosis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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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단지도체제 꺼낸 친윤 진짜 노림수

집단지도체제 꺼낸 친윤 진짜 노림수

[일요시사 정치팀] 박형준 기자 = 국민의힘 송언석 비대위원장은 안철수 의원을 혁신위원장으로 임명하면서도 ‘전권 부여’ 가능성에 대한 즉답을 피했다. 송 비대위원장의 부인에도 불구하고, “차기 지도부를 집단지도체제로 구성할 것”이란 예상엔 여전히 힘을 실리고 있다. 국민의힘 김용태 전 비상대책위원장의 임기가 지난달 30일 끝났다. 이후 국민의힘은 지난 2일 송언석 원내대표가 비대위원장을 맡는 새 비대위를 출범시켰다. 송 비대위원장은 다음 달 중순 예정된 전당대회까지 당을 이끈다. 비대위원으로는 ▲4선 박덕흠 의원 ▲재선 조은희 의원 ▲초선 김대식 의원 ▲박진호 경기 김포갑 당협위원장 ▲홍형선 경기 화성갑 당협위원장이 내정됐다. 이들은 모두 친윤(친 윤석열)계 인사로 구분된다. 이들은 윤석열 전 대통령 파면을 반대했고, 공조수사본부의 윤 전 대통령 체포 시도 당시 저지 집회에 참석했다. 친윤 일색 새 비대위 지난 2일엔 대선후보 경선에도 출마했던 4선 중진 안철수 의원이 혁신위원장으로 임명됐다. 송 비대위원장은 같은 날 국회 비대위원장 취임 기자회견에서 안 의원의 임명 사실을 밝혔다. 안 의원은 곧바로 자신의 페이스북에 글을 올려 “코마(의식불명) 상태에 빠진 국민의힘을 반드시 살려내겠다”는 각오를 밝혔다. 그는 의사 출신답게 국민의힘의 현 상황을 일컬어 “악성 종양이 이미 뼈와 골수까지 전이된 말기 환자여서 집도가 필요한데도 여전히 자연 치유를 믿고 있다”고 비판했다. 그러면서 “메스를 들어 과거의 잘못을 철저히 반성하고 냉정히 평가하겠다”며 “보수 정치를 오염시킨 고름과 종기를 적출하겠다”고 강조했다. 혁신위원회 구성은 송 비대위원장의 원내대표 출마 당시 공약이었다. 국민의힘은 지난 2023년 인요한 의원이 위원장으로 활동했던 혁신위원회를 가동했던 적이 있다. 당시 혁신위는 다양한 혁신안을 발표했다. 하지만 ▲홍준표 전 대구시장·이준석 전 대표(현 개혁신당 의원) 등에 대한 징계안 취소 ▲대통령실 과학기술수석보좌관 신설 권고 등 혁신안 2개만이 실행됐다. 혁신위엔 의결권이 없다. 인요한 혁신위도 당 내외에서 “혁신위는 김기현 대표 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시간 끌기용일 뿐”이란 말을 들은 위원 3명이 사퇴하는 홍역을 치렀다. 안 위원장과 혁신위원들이 꼭 필요한 처방전을 제시한다고 하더라도, 비대위에서 의결하지 않으면 휴짓조각으로 전락한다. 국민의힘이 김 전 비대위원장의 5대 개혁안을 무위로 돌린 게 불과 한 달여 전 일이다. 혁신위원장으로 선임된 사람이 안 의원이란 것도 의미심장하다. 그는 친윤(친 윤석열)계도 아니고, 친한(친 한동훈)계도 아니다. 대선주자로서 독자적인 위상을 가지고 있지만, 당내 세력이 부실하다. 지난해 12월7일 윤 전 대통령 탄핵소추 1차 시도 당시엔 국민의힘 의원들이 모두 회의장을 빠져나가는 가운데 홀로 자리를 지키면서 찬성표를 던졌다. 이날 이후 안 의원은 국민의힘에서 독자적 정치 행보를 이어갔다. 윤 전 대통령 파면 찬성 견해를 꾸준히 유지했고, 지난 1월엔 국민의힘에서 유일하게 내란 특검법 표결에서 찬성표를 던졌다. 대선후보 경선이 진행됐던 지난 4월엔 국민의힘과의 관계는 물론, 자신과도 오랫동안 껄끄러운 관계였던 이준석 의원과 화해하고, AI와 미래에 대한 대담을 진행하기도 했다. 친윤계로선 안 의원의 혁신적이면서도 당내 충돌을 자제하는 성향과 이미지를 당 전면에 내세우기 위해 혁신위원장으로 발탁한 것으로 보인다. 역설적으로 안 의원에게 당내 세력이 전혀 없는 점도 매력적이었던 대목으로 해석된다. 어떤 혁신안을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큰 부담이 되지 않는다. 이전 혁신위원장이었던 인 의원은 친윤계 의원으로서 의정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안 혁신위원장 임명하고 권한 부여에 말끝 흐려 안 의원이 2회에 걸쳐 홀로 본회의장에 남아 국민의힘에 불리한 법안에 찬성표를 던졌던 사실도 참작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안 의원은 ‘의결권이 없는’ 혁신위원장이어야 한다. 현역 의원 20명 안팎으로 계보를 거느린 국민의힘 한동훈 전 대표만 해도 친윤계로선 상대하기 까다롭다. 세가 없는 안 의원이 당시와 같은 ‘고집’을 부린다고 하더라도 당내 세력이 없어서 ‘제2의 한동훈’이 되긴 어렵다. 지난달 27일부터 김민석 총리 후보자 지명 철회와 더불어민주당의 국회 법제사법위원장직 반환을 요구하면서 국회 로텐더홀에서 6일 동안 숙식 농성을 잇던 국민의힘 5선 나경원 의원은 묘한 견제구를 던졌다. 나 의원은 안 의원에게 “혁신위원장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혁신의 방향을 골고루 정하는 것”이라며 “기대도 있고, 걱정도 있다”고 말했다. “혁신의 방향을 골고루 정하라”는 말은 당내 다수인 친윤계의 요구 수렴에 방점이 찍힌 것으로 해석될 여지가 있다. 송 비대위원장조차도 안 의원과 혁신위에 권한을 부여할지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았다. 송 비대위원장은 기자들과의 질의응답에서 “당이 특위 형식 기구를 만들면, 당의 의사 결정 체계 내서 운영한 사례가 있다”며 “이를 고려해 혁신위를 운용할 것이고, 우리가 생각하는 최고 수준의 혁신 방안이 잘 마련되도록 고민하겠다”고 답변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부분은 ‘당의 의사결정 체계 내’라는 것이다. “안 의원과 혁신위에 전권을 부여할 생각은 없다”는 말을 돌려서 한 것으로 해석될 소지가 강하다. 이를 두고, 김 전 비대위원장은 “국민께서 바라고 계신 혁신은 인적 청산”이라며, “당을 잘못 이끈 사람들에 대한 조치 등 해법을 제시하는 것이 핵심”이라고 비판했다. 그러면서 “그걸 못하면, 혁신위는 결과적으로 의미가 없을 것”이라는 등 혁신위의 가능성을 회의적으로 봤다. 김 전 비대위원장은 5대 개혁안 발표 당시에도 같은 당 조정훈 의원으로부터 “혁신위원장을 맡는 게 어떻겠느냐”는 조롱을 당한 적이 있다. 결국 안 의원은 지난 7일 국회 기자회견에서 “혁신위원장직에서 사퇴하겠다”면서 전당대회 출마로 급선회했다. 그는 “당을 위한 절박한 마음으로 혁신위원장 제의를 수락했지만, 혁신의 문을 열기도 전에 거대한 벽에 부딪혔다”며 “최소한의 인적 청산을 행동으로 옮겨야 한다고 판단하고 비대위와 협의했지만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고 주장했다. 안 의원과 송 비대위원장은 혁신위원 인선을 놓고 갈등한 것으로 알려졌다. 명함만… 권한 없다 송 비대위원장은 혁신위 설치 외에도 많은 구상을 밝혔다. 비대위 활동 방향으론 ▲당의 근본적 변화를 위한 혁신안 추진 ▲비판과 견제를 제대로 수행할 수 있는 야당다운 야당으로 도약 ▲유능한 정책 전문 정당으로 발돋움 등을 제시했다. 또 정책 정당화를 위해 ▲반도체·AI 등 미래 첨단 산업 육성 ▲청년 자산 형성과 일자리 창출 ▲취약계층 재기 지원 등 국민의힘이 추진할 3대 중점 정책도 밝혔다. 문제는 불과 한 달여 남짓 활동할 비대위임에도 너무 많은 구상을 밝혔단 것에 있다. 구체적인 방안은 국민의힘의 정책연구소 여의도연구원이 전담한다고 하더라도, 현재의 비대위가 소화하기엔 너무 거시적이고 분야도 넓다. 이렇게 되면 구상의 진정성조차 의심받을 수 있다. 국민의힘 안팎에선 차기 당권 구도와 관련해 “차기 지도부는 집단지도체제로 구성된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일단 송 비대위원장은 이를 부정했다. 그는 지난 1일 국회에서 기자들을 만나 “누가 집단지도체제를 얘기했는지 모르겠다”며 “최소한 저는 얘기한 적 없고, 현 시점에서 바람직한지 의문이 많이 제기된다”고 말했다. 이어 “당의 힘을 모아 강한 정부·여당과 싸워야 하는 상황서 힘의 결집을 방해하는 이야기 같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집단지도체제는 친윤계 입장에선 매력적인 체제가 될 수도 있어서 논란이 끊이질 않는다. 집단지도체제는 대표로 선출된 후보가 아닌 다른 후보가 최고위원을 맡아 함께 지도부에 입성하는 체제를 말한다. 국민의힘과 민주당은 탈락한 후보들이 지도부서 배제되는 단일지도체제를 유지하고 있다. 국민의힘 차기 당 대표 후보로 유력하게 거론되는 인사는 ▲김문수 전 대선후보 ▲한동훈 전 대표 ▲안 의원 ▲나 의원이다. 이들 중 나 의원을 제외한 3명은 모두 윤 전 대통령 및 친윤계와 치열하게 다투거나 사이가 좋지 않다. 나 의원도 친윤계로 분류되지만, 전당대회 출마 및 대통령 직속 저출산고령사회 위원장직 사퇴 여부를 놓고 윤 전 대통령과 갈등을 빚었던 전력이 있다. 각자 추구하는 정치적 방향과 지지층도 다르다. 따라서 집단지도체제가 형성돼 이들 모두가 지도부에 모이면 심각한 갈등으로 이어질 수 있다. 시각에 따라선 “서로 싸우다가 죽으라”는 의도가 개입될 수도 있는 체계라고 할 수 있다. 안 의원은 집단지도체제에 대해 “단 한 발짝도 전진할 수 없는 변종 히드라”라고 비판했다. 그는 “집단지도체제에서는 계파 간 밥그릇 싸움·진영 간 내홍·주도권 다툼을 벗어나기 어렵다”면서 “협의와 조율이란 핑계로 시간만 허비하고 혁신은 실종되면서, 당이 다시 분열의 늪에 빠질 것”이라고 주장했다. 친한계 일원인 국민의힘 김종혁 전 최고위원도 지난달 27일 BBS 라디오 <금태섭의 아침저널>에 출연해 “친윤 중심 체제에 대한 이의 제기를 피하기 위한 생존 전략 아니냐는 지적을 받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쉼 없을 내부 투쟁 집단지도체제는 주로 사회주의 국가에서 채택한다. 이오시프 스탈린·덩샤오핑·김일성 등 강력한 권위를 가진 독재자가 없는 상황에선 파벌별로 당 최고의 의사결정기구 정치국원들을 추천하고, 그들 중에서 당과 국가를 통치할 수장을 배출한다. 그러다 보니 내부 정치투쟁이 매우 극심해지는 부작용이 있다. 권한과 책임의 범위가 모호해서 개혁도 지지부진해진다. 김일성은 파벌을 모두 숙청한 후 1인 지배체제와 세습체제를 확고히 굳혔다. 중국에서도 시진핑 국가주석이 중국공산주의청년단(공청단) 등 다른 파벌들을 몰아내고 자신의 휘하인 시자쥔으로만 정치국을 구성하는 과정을 거쳤다. 소련의 니키타 흐루쇼프도 게오르기 말렌코프·라브렌티 베리야 등 경쟁 상대를 몰아내 권력 독점을 완수했다. 이 같은 현상은 우리 정당사에서도 볼 수 있다. 국민의힘 전신 새누리당에서 지난 2016년 발생한 ‘옥새 파동’이 있었다. 당시 새누리당은 전당대회에서 가장 많은 표를 얻은 김무성 전 대표가 대표직을 차지했고, 2위에 머물렀던 서청원 전 의원 등은 최고위원에 올랐다. 김 전 대표는 비박(비 박근혜)계였지만, 최고위원 중 상당수는 친박(친박근혜)계였다. 당시의 집단지도체제는 지난 2004년 총선 패배 후 소통 강화를 목적으로 도입됐지만, 이로 인해 계파 갈등은 외부에도 격렬하게 표출될 정도로 극심해졌다. 지난 2016년 제20대 총선 당시엔 대부분 새누리당의 압승을 예측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의 당 장악력도 흔들리지 않았다. 이는 곧 극심한 공천 갈등으로 이어졌다. 김 전 대표는 완전국민경선제를 도입하려다가 실패했고, 친박에선 새누리당 유승민 전 의원 등 비박계 핵심에 대한 공천을 거부했다. 이한구 당시 공천관리위원장은 “김 전 대표도 공천 심사를 받아야 한다”고 하는 등 김 전 대표를 공천 과정에서 배제할 의사를 명확히 밝혔다. 이후 박 전 대통령의 새누리당 공천 개입 사건 수사와 재판에서 밝혀진 바에 따르면, 이 위원장은 현기환 당시 청와대 정무수석과 공천을 의논했다. 현 수석도 직속상관인 이병기 당시 대통령비서실장을 건너뛴 채 박 전 대통령에게 직접 보고하면서 이 위원장과 공천을 논의했다. ‘옥새 들고 나르샤’ 바로 엊그제 같은데… 이 위원장은 유 전 의원 등 비박계 인사 5명의 공천을 취소하고, 친박계 후보를 공천한다는 계획을 세워 추천장을 작성했다. 하지만 여기에 직인을 찍어야 할 김 전 대표는 날인을 거부하고 “후보자 등록이 마무리될 때까지 최고위원회를 열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이어 취재기자들을 대거 몰고 자신의 지역구인 부산 영도로 내려가 대형 선거 홍보 현수막을 배경 삼아 영도대교에서 사진을 찍었다. 세간에선 이 사건을 두고 당시 유행하던 드라마 제목을 따서 ‘옥새 들고 나르샤’라는 패러디를 갖다 붙이기도 했다. 당 대표에게 명확한 권한을 부여하지 않은 채 서로 비슷한 위상을 가진 주자들을 같은 지도부에 몰아넣으면 이 같은 내부투쟁은 쉼 없이 이어질 확률이 높다. ‘옥새 들고 나르샤’는 불과 9년 전 일이었고, 국민의힘 구성원 대부분은 이를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새누리당은 제20대 총선 패배 후 지도 체제를 현재와 같은 단일지도체제로 바꿨다. 아픈 기억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다시 집단지도체제라는 구상이 외부에 거론된 것에 대해선 “구 친윤계의 셈법이 있는 것 아니냐”는 분석이 나온다. ▲김 전 후보 ▲한 전 대표 ▲안 의원 등 친윤계와 사이가 좋지 않은 당권 주자들을 같은 지도부에 몰아넣어 서로 싸우게 하다 자멸시키려는 것 아니냐는 분석이다. 윤 전 대통령 사례로부터 알 수 있듯이, 친윤계는 대선주자를 외부에서 데려와 옹립하는 것에 거부감이 없다. 당내 후보 경선이 완료된 상황에서도 외부의 한덕수 전 총리를 데려와 새벽에 기습적으로 대선후보를 교체하려고 했을 정도로 거부감이 없다. 당시 “적당한 사람을 물색해 대충 대선을 치르고, 대구·경북과 서울 강남 3구 등 핵심 지역구 공천을 보장할 당만 유지하면 된다”는 당 지도부의 판단이 여전히 유지되고 있을 가능성이 거론되고 있다. 국민의힘 친윤계는 텃밭 지역구와 특정 이익집단의 지원만 있으면 계속 여의도서 정치를 할 수 있다. 이는 일본식 정치라고 할 수 있다. 일본 여당 자유민주당(이하 자민당) 정치인 중 상당수는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지역구 ▲후원회 ▲특정 이익집단과의 연결고리를 매개로 반영구적인 정치생명을 누린다. 현재 일본에서 이어지는 쌀값 상승 파동과 관련해, 농협·쌀 도매상 등과 오랫동안 유착관계를 형성한 에토 다쿠 전 농림수산상이 “쌀을 사본 적 없다. 지지자들이 많이 주신다. 팔아도 될 만큼 있다”는 망언을 대놓고 했을 정도였다. 일본엔 특정 집단과 유착관계를 형성한 의원들이 의회를 구성하고 있다. 일각에선 “내년 지방선거 결과가 좋지 않으면, 친윤계가 집단지도체제를 배경 삼아 지도부에 모든 책임을 떠넘기고 숙청하려고 할 것”이란 예상도 나오고 있다. 하지만 이는 자민당의 겉모습에만 집착하는 안 좋은 방식의 표절이라고 할 수 있다. 자민당 겉핥기 자민당 내부엔 다양한 정치적 스펙트럼이 존재한다. 총리를 배출하는 파벌만 달라져도 정권교체와 비슷한 효과를 준다. 이것이야말로 자민당이 오랫동안 권력을 잡은 비결이었다. 집단지도체제 구상엔 당의 혁신엔 무관심하고 자리 다툼에만 집착하는 일부 계파의 뻔한 속내가 숨어있을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국민의힘을 반드시 살려내겠다”고 다짐하는 안 의원과 “혁신위와 안 의원에게 권한을 부여할 것이냐”는 질문에 말끝을 흐린 송 비대위원장이 크게 대비된다. <ctzxp@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