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시사 정치팀] 허주렬 기자 = 국가정보원(이하 국정원)이 세월호 희생자 유가족에 대한 뒷조사를 하고 있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세월호 참사 희생자·실종자·생존자 가족대책위원회(이하 가족대책위) 측은 최근 국정원 직원이 유민아빠 김영오씨의 고향 전북 정읍과 김씨가 단식농성 중 쓰러져 입원한 병원을 찾아 김씨와 주변에 대한 불법사찰을 했다고 폭로했다. 국정원 측은 ‘사실무근’ ‘확인 중’ 등의 답변으로 의혹을 회피하고 있지만, 사실로 드러난 부분도 있어 상당한 파문이 예상된다.
“반드시 정치중립 서약을 지키겠다. 직원들의 머릿속에서 ‘정치관여’ 네 글자를 완전히 지우고 본연의 업무에만 집중하게 하겠다.”
지난 7월18일 취임한 이병기 신임 국정원장이 취임식에서 했던 발언이다. 이 원장은 또 박근혜정부 출범을 전후해 국정원의 대선·정치 개입 의혹이 불거지며 국정원에 대한 신뢰가 바닥으로 추락한 것과 관련해서도 “국정원 임무의 기본으로 돌아가 국민 신뢰를 회복하겠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이 약속은 허언에 불과했다는 정황이 겨우 한 달 만에 속속 드러나고 있다.
서약 지킨다더니
또 정치개입?
가족대책위 유경근 대변인은 지난달 24일 청와대 인근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유민아빠 김영오씨에 대한 국정원의 불법 사찰 의혹을 제기했다.
유 대변인은 “국정원 직원이 김영오씨의 고향인 전북 정읍에 내려가 과거 생활 등에 대해 조사하고 다니는 것으로 안다”며 “국정원 직원이 김씨가 입원해 있는 서울동부시립병원에도 와 있는데 이렇게 사찰을 함부로 해도 되는 것인가”라고 비판했다.
유 대변인은 이어 “아무 것도 문제될 게 없는 것들을 골라 공작을 펼치는 의도는 김씨 한 명을 죽이는 게 아니라 우리(세월호 희생자) 가족들을 몰아붙이고 분열시키려는 의도”라고 비판했다.
세월호 유가족들 중에서도 김씨는 특별한 존재다. 세월호 참사에 대한 실효성 있는 진상조사를 위해 진상조사위원회에 수사권과 기소권을 부여하는 세월호특별법을 제정해야 한다고 촉구하며 목숨을 건 단식을 40일 넘게 이어갔던 그는 세월호 정국의 향방을 가를 핵심인사로 꼽힌다.
이런 상황에서 국정원 직원이 김씨의 고향과 단식농성 중 쓰러져 입원한 병원을 찾아 그와 주변에 대해 캐묻는 것은 국정원이 또다시 정치에 관여하려는 것 아니냐는 의심을 낳고 있다.
이에 대해 국정원 측은 “정읍에는 내려간 적도 없고, 직원이 병원에 찾아갔다는 의혹에 대해서는 확인 중”이라는 말만 되풀이하고 있다.
그러나 김씨의 주치의인 서울동부시립병원 이보라 내과과장은 복수 언론과의 인터뷰를 통해 “국정원 직원이 병원에 찾아와 (김경식) 병원장에게 세월호 참사 가족을 치료하게 된 경위 등을 캐물은 사실이 있다”고 확인했다.
김경식 병원장도 “지난달 21일 기관장 회의에서 만나 평소 알고 지내던 국정원 직원이 찾아와 1시간가량 이야기를 나누고 갔다”며 “이(보라) 과장에게 ‘좋은 일을 하고 있는데 국정원이 주시하고 있는 것 같으니 불필요한 오해를 사지 않도록 조심하는 게 좋겠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해당 국정원 직원은 서울 동대문지역 관공서를 담당하는 A씨로 알려졌다.
가족대책위 “국정원이 유민아빠 김영오씨 불법사찰”
국정원, ‘확인 중’ ‘사실무근’ 등 불법사찰 의혹 부인
단식농성 중 쓰러진 김씨가 지난달 22일 병원에 실려간 직후 그의 고향 전북 정읍시 이평면에도 누군가 나타나 신상 파악을 하고 간 것도 확인됐다. 김씨의 어머니가 마을 이장으로부터 김씨의 신상에 대해 묻는 전화를 받았다고 밝힌 것이다.
이장은 면사무소 부면장의 부탁으로 김씨에 대해 캐물은 것으로 알려졌다. 부면장은 <뉴스타파>와의 인터뷰에서 “누군가로부터 김씨에 관해 미리 전해 듣고 개인적 호기심에 이장을 찾아가 물어본 것일 뿐, 특정 개인이나 단체의 부탁이나 지시를 받은 것은 아니다”라고 밝혔다. 그러나 그는 누구로부터 김씨에 대한 출생지 정보 등을 들었는지는 밝히지 않았다.
이에 <뉴스타파>는 “정황상 부면장은 누군가로부터 김씨에 대한 기본 정보를 파악한 뒤, 이장을 통해 세부정보를 확인하려 했을 가능성이 커 보인다”며 “가족대책위는 이런 정보전달 체계의 가장 윗선이 국정원이 아닌가 하는 의혹의 시선을 보내고 있다”고 전했다.
이와 관련해 새누리당 김재원 원내수석부대표는 최근 한 라디오 방송과의 인터뷰에서 “무슨 일이 있으면 항상 국정원이 무슨 일을 한다고 문제제기를 하는데 국정원 측은 전혀 아닌 것으로 생각된다”며 “유가족에 대한 경찰과 국정원의 정보활동이 통상적인 직무집행 행위라 하더라도 오해받을 짓이니 앞으로 일절 하지 말라고 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국정원과 새누리당의 부인에도 불구하고 국정원의 세월호 희생자 유가족 뒷조사 의혹은 오히려 점점 커지고 있다. 특히 국정원이 김씨와 그 주변을 사찰했다는 의혹이 제기된 시점에 보수언론, 인터넷, SNS를 통해 김씨에 대한 음해성 루머가 급속히 퍼지기 시작해 전방위적 공작이 이뤄지고 있는 것 아니냐는 의혹까지 나오고 있다.
유민아빠 인터넷·SNS 악의적 루머도 국정원 작품?
국정원 직원 A씨가 병원을 찾은 시점은 김씨가 입원하기 하루 전이자, 이(보라) 과장이 김씨와 관련해 한 온라인매체와 “김씨가 서서히 죽어간다. 하지만 특별법 제정까지 단식을 계속하겠다는 의지가 확고하다”는 내용의 인터뷰를 한 직후다.
A씨의 병원 방문 다음날에는 ‘김형오씨는 금속노조조합원으로 단식투쟁의 진정성이 의심된다’ ‘10년 전 이혼한 뒤 국궁이라는 호화 취미생활을 즐기며 두 딸에 대한 양육비도 제때 보내주지 않은 나쁜 아빠다’ 등의 악의적 내용의 보도가 보수언론을 통해 나왔고, 인터넷·SNS 등에서도 널리 퍼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김씨는 지난해 정규직으로 전환하면서 자동으로 노조원이 되었고, 김씨의 둘째딸 유나양이 언론인터뷰를 통해 아빠가 자신들을 따뜻하게 대해줬다고 밝혀 보수진영을 중심으로 제기된 주장은 사실무근임이 드러났다.
그러나 김씨와 딸의 해명은 무시한 채 어버이연합을 비롯한 보수단체들은 김씨를 비판하는 비난 집회를 열기 시작했고, 이 과정을 보수언론이 다시 기사화하면서 김씨에 대한 ‘나쁜 아빠론’은 확대·재생산됐다.
악성댓글작업까지
전방위적 공작?
가족대책위와 야권에서는 이러한 일련의 흐름들이 수사권·기소권이 부여된 특별법 제정을 요구하고 있는 세월호 희생자 유가족들을 무력화하기 위한 정보기관과 보수진영의 합작품 아니냐는 의구심을 갖고 있다.
야권 고위관계자는 “SNS 등을 통해 유민아빠에 대한 사생활과 유언비어, 흑색선전이 돌고 있는데 그 배경에 국정원이 있지 않나 하는 의혹이 든다”며 “악성댓글을 달고, 그들이 관리하는 단체들을 이용해서 유언비어를 퍼뜨리는 건 아닌지 의심스럽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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