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가위특집> ⑩명절만 되면 생각나는 추억의 스타들

  • 최현경 mw2871@naver.com
  • 등록 2013.09.17 07:17: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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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 켜면 아이돌 일색…어르신들은 따분하다

[일요시사=특별기획팀] 가족들이 모이는 명절만 되면, TV에서는 ‘아이들’을 위한 ‘아이돌’ 특집 프로그램들이 수없이 쏟아진다. 우리 부모들에게도 한 때 로망이었던 스타들이 있었다. 이젠 추억이  된 그 스타들. ‘어른’을 위한 스타, 누가 있을까.




요즈음 TV에는 수많은 아이돌이며, 다들 비슷하게 생긴 배우들 등 정신없이 많은 연예인들의 얼굴이 지나간다. 얼굴도 알아보기 어려운 어린(?) 스타들 사이에서 가끔씩 떠오르는 옛 스타들이 있다. 예쁜 외모 또는 뛰어난 노래실력들로 당시의 화제가 되었던 스타들. 세월의 흐름과 함께 잊혀진 스타들은 지금 어디서 무얼 하고 있을까?

지금도 후배 연예인들의 성대모사 대상이 되고 있는 ‘꺾기’창법의 대가, 나훈아는 1966년 당시 19세 나이로 ‘천리길’을 발표하면서 가요계에 데뷔했다. ‘사랑은 눈물의 씨앗’ ‘강촌에 살고 싶네’ ‘님 그리워’ 등의 히트곡을 만들어내며 정통 트로트를 고수했다. 71년 ‘가지 마오’를 통해 KBS 음악대상을 수상하고 그 이후로도 ‘고향역’ ‘머나먼 고향’을 차례로 히트시켰다.

나훈아는 노래실력뿐만 아니라 뛰어난 작곡, 작사 능력으로 100곡 이상의 곡을 만들어 내면서 ‘대한민국 가요계의 살아있는 전설’로 불린다. 데뷔 이후 약 2500곡을 녹음하고 19개의 정규앨범을 포함하여 총 200개의 앨범을 발표했다.

행적에 대한 관심
언론의 억측들로

가수로서 완벽했던 나훈아는 완벽하지 못한 사생활로 세간의 입에 오르내렸다.


75년 첫 번째 아내, 이숙희씨와 이혼한 그는 76년 당시 유명했던 배우 김지미와 결혼하며 화제를 일으켰다. 그는 공식적으로 3번의 결혼을 했는데 85년 김지미와의 이혼 이후, 후배가수였던 정수경씨와 결혼했지만 현재 이마저도 순탄치 못했다. 2007년 예정됐던 공연 취소를 끝으로 그가 노래하는 모습은 볼 수 없었다. 그러던 그가 2008년 돌연 기자회견을 자청해 ‘신체절단설’을 부인했고 그것이 공식석상에서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간혹 그의 근황이 들리고 있지만 그의 모습은 언론에 노출되지 않았다. 최근 한 종편방송에 출연한 나훈아의 지인은 “나훈아가 양평의 실버타운 같은 비싼 요양원에 있다”고 전했다.

영화 <변강쇠> ‘옹녀’역의 영화배우 원미경은 당시 짙은 농염함으로 남성들의 마음을 설레게 한 섹시배우다.

원미경은 78년, 18세에 미스 롯데 선발대회에서 ‘미스롯데’로 선발됐고 TBC 공채탤런트 20기로 데뷔하며 이미숙, 정애리와 함께 80년대 트로이카로 불렸다.

70∼80년대 스타덤 올랐다 홀연 사라져
은퇴 후 억측기사와 황당소문에 시달려

연기자로서 그의 첫 작품인 79년 MBC 드라마 <청춘의 덫>은 비윤리적이라는 이유로 방송 도중 중단되었다. 이어 영화 <청춘의 덫>이 제작되며 영화배우 원미경으로서 영화계에 데뷔했다. 영화 <청춘의 덫>은 박근형, 한진희, 유지인이 함께 출연한 영화로 20만명이 넘는 관객을 동원하며 흥행했다. 당시 그의 나이 20살.

영화 <청춘의 덫>에 이어 영화 <제3 한강교>를 통해 깊이 있는 멜로 연기력을 인정받은 원미경은 ‘제 18대 대종상-신인상’ ‘백상예술대상-신인상’을 받으며 스타덤에 올랐다. 이후 <색깔있는 여자> <F학점의 천재들> <심장이 뛰네>등 많은 드라마와 영화에 출연하며 인기를 이어나갔다.

단아함과 청순함의 대표 아이콘이던 원미경은 86년 영화 <변강쇠>에서 섹시한 배우로서의 이미지를 보이며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다음 해인 87년 당시 출연 중이던 MBC 드라마 <조선왕조 오백년>의 담당PD인 이창순과 2년 열애 끝에 결혼했다. 결혼 후, MBC 드라마 <아줌마>에서 억척스러운 ‘주부’역할을 하며 ‘MBC 연기대상 여자 최우수상’ ‘백상예술대상 TV부문 최우수연기상’을 수상했다. 섹시스타에서 억척스러운 아줌마까지 다양한 변화를 시도하며 연기자의 길을 걷던 그는 2002년 MBC 드라마 <고백>을 마지막으로 활동을 중단했다.

활동을 중단한 원미경은 현재, 남편인 이창순PD와 미국 버지니아주에 거주 중이다. 원미경은 한 잡지와의 인터뷰에서 “한국에 다시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당분간은 계획이 없다. 다만 언제라도 좋은 작품이 있으면 실망스럽지 않은 좋은 모습으로 찾아뵐 날이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귀여운 아역배우 출신
시대흐름에 외면당해

“아저씨∼계란 드실라우?” 영화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에서 귀여운 목소리의 아역배우 전영선. 당시 초등학교 2학년이던 전영선은 영화배우였던 고모 나애심(본명 전봉선)의 권유로 영화 <종말 없는 비극>을 통해 데뷔했다.

아역 전영선의 연기력이 단연 돋보였던 영화는 1961년에 제작된 신상옥 감독의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이다. 영화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는 최은희, 김진규, 도금봉 등 최고의 배우들이 출연하며 많은 인기를 끌었던 작품으로 ‘옥희’역의 전영선 또한 앙증맞은 표정연기와 똑부러진 소녀의 아역배우로 거듭났다.

영화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를 통해 천재적인 자질을 보여준 전영선은 안성기, 안인숙 등과 함께 '꼬마별'로 불리며 <불효자> <슬픔은 없다> <살아있는 그날까지> 등 약 25편의 작품에서 아역을 도맡아 출연했다. 

그 중 신상옥 감독의 영화 <이 생명 다하도록>은 전영선에게 상을 안겨준 작품이다. 영화<이 생명 다하도록>에 출연한 전영선은 62년 베를린 국제영화제에서 국내 최초로 아역특별연기상을 수상했다. 당시 분단의 아픔을 겪었던 독일의 분위기가 분단과 전쟁을 소재로 한 한국영화에 관심을 갖기 충분했다고.




69년 영화 <암살자>를 마지막으로 영화계에서 사라졌던 그는 75년 고영남 감독의 영화 <서북청년>의 주연을 맡았다. 아역스타답게 탄탄한 연기력이 뒷받침되었지만 외모를 중요시하는 시대 흐름 때문에 성인 여배우로서는 성공하지 못했다. 이후 다시 영화계의 별이 되고자 했던 전영선은 81년 영화 <난쟁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에서 조연으로 출연했고 이 작품이 그녀의 마지막 작품이 되었다.

70년대 당시 연애잡지였던 <아리랑>과 <명랑>은 문희, 남정희, 윤정희를 ‘1세대 여배우 트로이카’라 칭했다. 그 이후로 당대 인기있는 여배우들을 ‘2세대, 3세대 트로이카’라고 지칭하곤 했다.

여배우 트로이카
여전히 아름다워

1세대 여배우 트로이카에 이어 70년대 후반에는 유지인, 장미희, 정윤희가 2대 여배우 트로이카로서 그 뒤를 이었다. 이 중에서도 단연 외모가 돋보였다는 정윤희. 지난 2005년 한 여성잡지에서 영화계 리더들을 대상으로 ‘한국 여배우 최고 미인’에 대한 설문조사에서는 ‘정윤희’가 1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젊은 층에게 배우 수애와 닮아 관심이 높아진 영화배우 정윤희는 75년 영화 <욕망>으로 데뷔했다. 영화 <뻐꾸기도 밤에 우는가> <앵무새 몸으로 울었다> <여자와 비> 등의 작품을 통해 연기력을 인정받아 각종 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 및 여자 최우수연기상을 수상했다.


인기 절정이던 84년, 정윤희는 조규영 중앙산업개발 회장과 결혼하며 영화계 은퇴선언을 했다. 현재 활동하고 있는 2대 여배우 트로이카, 유지인, 장미희와는 달리 배우의 길을 선택하지 않은 정윤희에 대한 팬들의 관심은 계속됐지만 결혼 이후 단 한 차례도 공개석상에 얼굴을 내보이지 않았다. 그랬던 그가 그는 2005년 MBC 한가위 특집다큐 <우리가 사랑한 여배우들-카페 정윤희>를 통해 “직접 만나 뵙고 인사드리지 못해 죄송하다”며 “아직까지 저를 잊지 않고 기억해준 분들께 감사하다”는 자필편지로만 소식을 전했다. 최근 한 언론사에 의해 공개된 그녀의 최근 모습에 대한 네티즌들은 “여전히 아름답다”, “배우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소탈하고 검소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팬들의 바람대로
조용히 활동 재개도

70년대 소녀들의 우상이던 포크계의 전설, 그룹 ‘어니언스’. 당시 가요계는 신나는 ‘팝계열’의 음악이 등장하고 있었다. 72년 ‘작은 새’로 가요계에 데뷔한 포크 그룹 어니언스의 등장은 포크음악의 대중화에 본격적으로기여했다. ‘편지’ ‘저 별과 달을’ ‘외길’ 등 이들의 앨범에 수록된 곡 전부가 히트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유쾌하고 잘생긴 외모 또한 여고생들의 마음을 흔드는 요소 중 하나였다.

그들의 인기를 당시 한 음악잡지에서는 “이대강당에서 지난 74년 5월 4일 열렸던 어니언스의 리사이틀은 모여든 관객들을 제 시간에 입장시키지 않고 있다가 관객들이 강당에서 이대교문까지 장사진을 이루는 등 대학가에서 흔치 않은 진풍경을 보인 뒤에야 뒤늦게 시작됐다. 교복차림의 중고교생들이 대부분인 것 같은 관객들은….”이라고 했다. 이후 멤버였던 이수영은 영화 <그대의 찬 손>에 출연하는가 하면 74년 KBS 방송가요 대상을 받으며 실력을 검증받았다. 

이들은 75년 멤버 이수영의 군입대와 함께 해체됐다. 홀로 남은 임창제는 ‘어니언스 임창제’라는 이름으로 가수 생활을 이어갔다. 이후 이수영은 군 제대를 하며 79년 ‘하얀 면사포’와 80년 ‘숙녀’라는 이름의 두 앨범을 마지막으로 가요계를 떠났다. 가요계를 떠난 그는 종합건설회사에서 근무하다 2002년 건설업 중견 사업가로서의 길을 걸어왔다. 이수영과 임창제는 ‘어니언스’라는 이름의 와인바와 카페를 각자 운영해오며 팬들과의 만남을 이어가고 있었다.

지난 2004년, 어니언스는 그들의 음악을 듣고 싶다는 팬들의 바람에 따라 ‘추억의 낭만 콘서트’를 통해 해체 후 30년 만에 변하지 않는 호흡을 보여줬다. 같은 해, 8월 이수영은 ‘프레셔스 메모리즈’를 발표하며 홀로 음악 활동을 다시 시작했다. 다른 멤버인 임창제는 지난 2월 KBS의 한 프로에 딸 임나경과 함께 출연해 과거 싱어스 누들(성대에 생긴 양성종양)로 인한 후유증 등을 고백하며 근황을 전했다.


좋은 작품으로 볼 수 있다면…
복귀 언제쯤? 기약 없는 귀환

66년 걸쭉하고 허스키한 저음으로 무대를 압도하던 소녀, 문주란. 당시 16세란 나이와 앳된 소녀얼굴과 달리 카리스마있는 저음으로 많은 이들에게 사랑을 받은 가수다. 데뷔와 함께 주목을 받았던 10대 신인스타, 문주란은 ‘보슬비오는 거리’ ‘파란 이별의 글씨’ ‘낙조’ 등의 히트곡을 내며 무명생활없이 스타가 되었다.

65년 잡지 아리랑에서 주최한 연말 시상식에서 최고 인기상 독수리상을 수상했으며 이후 MBC 10대 가수 가요제 가수상, TBC 신인상 수상 등을 수차례 수상하며 당대 최고가수였던 남진, 이미자와 같은 선배들과 한 무대에서 섰다. 어린 나이에 데뷔하며 인기를 누리던 문주란은 데뷔 3년 만에 한 방송국 PD와의 스캔들과 언론의 억측기사들로 힘들어하다 음독자살을 시도를 하며 연예계에서 사라졌다.

80년대 다시 가요계로 돌아온 문주란은 일본에서 활동하며 국내에서도 ‘백치 아다다’ 등의 앨범을 발표하기도 했지만 교통사고로 인해 곧 활동을 중단했다. 그 이후에도 국내 가요계에 간혹 앨범을 발표하며 ‘남자는 여자를 귀찮게 해’를 발표하기도 했지만 이 또한 길지 않았다. 그러던 그가 지난해 신곡 ‘양재동 거리’를 발표하며 SBS <도전 1000곡>, KBS <불후의 명곡>에 출연했다. 최근에는 한 방송에 출연해 인간 문주란으로서의 모습을 공개했다. 청평의 한 카페를 운영하며 팬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곤 했던 그는 데뷔 45년만인 지난 6월 첫 대형 콘서트를 시작으로 중후한 매력의 가수 문주란으로 돌아왔다.

 

최현경 기자 <mw2871@ilyosisa.co.kr>

 

<기사 속 기사>

제2의 전성기 스타들
안방 여왕들 속속 귀환

연예계를 은퇴했던 스타들이 드라마와 영화를 통해 다시 복귀하면서 제2의 전성기를 누리고 있다. MBC 드라마 <모래시계>를 끝으로 배우 고현정은 결혼과 동시에 연예계 은퇴를 선언했다. 은퇴 10년만에 이혼하며 연예계에 컴백한 고현정은 SBS 드라마 <봄날>을 시작으로 <선덕여왕> <대물> <여왕의 교실>등의 드라마를 통해 실력있는 연기파배우임을 다시 한 번 입증했다.

미스코리아 진 출신의 배우 오현경 비디오 파문으로 은퇴한 지 2년 만에 결혼하며 배우활동을 중단했다. 지난 2006년 안타까운 이혼소식과 함께 돌아온 오현경은 SBS 드라마 <조강지처 클럽>로 연예계에 복귀한 이후 MBC 시트콤 <지붕 뚫고 하이킥> 등을 통해 다양한 매력의 연기활동을 선보이고 있다. <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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닻 올린 ‘2차 계엄’ 수사 큰 그림

닻 올린 ‘2차 계엄’ 수사 큰 그림

[일요시사 취재1팀] 오혁진 기자 = 내란 특검팀이 2차 계엄 의혹에 대한 실마리를 풀기 시작했다. 비상계엄 선포 다음 날인 지난해 12월4일 새벽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가 핵심이다. 법무부와 민정수석실 간 교감과 이날, 군 수뇌부의 움직임은 구체적으로 드러나지 않았다. 당시 상황을 재구성 중인 특검팀은 윤석열 전 대통령을 재소환할 방침이다. 내란 특검팀(특별검사 조은석)은 비상계엄 선포 이후의 상황을 재구성해 왔다. 법무부와 민정수석실의 역할은 수면 위로 올라오지 않고 있다. 특히 2차 계엄 논의 여부는 여전히 의혹에 그치고 있다. 박성재 전 법무부 장관과 김주현 전 민정수석이 무엇을 위한 법률을 검토했는지가 포인트가 될 전망이다. 안가 회동 정조준 특검팀은 지금까지 12·3 내란이 어떻게 준비됐는지에 대해 수사력을 집중했다. 북풍 공작과 평양 무인기 침투 작전, 국군정보·방첩사령부의 움직임 등이 상당 부분 사실로 확인됐다. 내란 이후의 상황을 수사하기 시작한 특검팀은 지난달 24일 오전 10시 박 전 장관을 소환 조사했다. 내란중요임무종사 혐의를 받는 박 전 장관은 13시간가량 조사를 받고 귀가했다. 박 전 장관은 내란 당일 대통령 집무실에서 계엄 선포 계획을 가장 먼저 들은 국무위원 중 한 명이다. 이후 법무부로 돌아와 실·국장 회의를 열고 검찰국에 ‘합동수사본부 검사 파견 검토’ 지시를 내렸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계엄 당일 법무부 출입국본부에 출국금지팀을 대기시키라고 지시한 혐의도 적용됐다. 계엄 이후에는 정치인 등 수용을 위해 교정본부에 수용 여력 점검 및 공간 확보를 지시한 혐의도 있다. 특검팀은 이를 뒷받침할 만한 근거로 그가 지난해 12월3일 오후 11시쯤 대통령실에서 정부과천청사로 이동하면서 통화한 내역을 확보했다. 박 전 장관이 통화한 인물은 임세진 전 검찰과장, 배상업 전 출입국·외국인정책본부장, 신용해 전 교정본부장, 심우정 전 검찰총장 등이다. 임 전 과장은 박 전 장관과의 통화를 마치고 검사·수사관 인사를 담당하는 실무진 2명에게 전화를 걸었고, 배 전 본부장은 출국금지·출입국 관련 담당자들에게 연락했다. 신 전 본부장은 김문태 전 서울구치소장과 연락을 취했다. 박 전 장관은 이후 간부 회의를 열어 관련 논의를 한 것으로 조사됐다. 이후 다음 날 한상대 전 검찰총장과 연락하기도 했다. 한 전 총장은 퇴직 검사 모임인 검찰동우회 회장으로 윤석열 전 대통령과 탄핵 당시 가장 많이 연락한 인물이다. 국회 계엄 해제 요구안 의결 이후에는 김 전 수석과 비화폰으로 통화한 것으로 조사됐다. 특검팀은 두 사람이 2차 계엄 등 후속 대책을 논의했다고 보고 있다. 박 전 장관 측은 김 전 수석에게 포고령에 문제가 있으며 국회가 의결했으니 국무회의를 신속히 소집해 계엄을 해제해야 한다고 전했다는 입장이다. 박성재·김주현 곧바로 2차 계엄 법률 검토? 용산 CCTV 속 최측근들 메모 후 문건 만지작 특검팀은 박 전 장관이 ▲계엄사령부 산하 합동수사본부 검사를 파견하라고 검찰국에 지시 ▲출입국본부 ‘출국금지팀’ 대기 지시 ▲교정본부 수용 여력 점검 및 공간 확보 지시 등을 추진했다고 판단한다. 조사를 마친 박 전 장관은 “제가 한 일에 대해 소상하게 다 말씀드렸다”며 “통상적인 업무 수행에 대한 다른 평가를 하는 것에 대해 제가 알고 있는 모든 내용을 상세하게 말씀드렸다”고 했다. 이어 “장관으로 재직하면서 지속적으로 특검법의 위헌성에 대해 지적을 했었는데, 이 부분이 현재 특검법에도 시정되지 않은 채 시행되고 있다고 생각한다”며 “그 점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고 언급했다. ‘어떤 내용을 (특검에) 말했느냐’는 취재진 질문에 “의문이 제기되는 모든 점에 대해 상세히 말씀드렸다”고 답했다. ‘혐의를 전면 부인하는지’ 묻자 “나는 항상 업무를 했을 뿐”이라고 했다. ‘5급 이상 간부들에게 비상대기를 지시했다’는 주장에는 “부당한 지시를 한 적이 없다”고 했다. ‘구치소장 연락 지시’ 관련 질문에는 “질문이 어디에 근거한 것인지 알 수 없다”고 말했다. ‘수용 지시가 계엄과 관련됐느냐’는 질문에는 “누구에게도 체포·구금하라는 지시를 한 사실이 없다”고 답변했다. 특검팀은 윤 전 대통령이 비상계엄 선포 직전 국무회의를 열기 위해 일부 국무위원을 용산 대통령실로 소집했을 때의 CCTV 영상도 확보했다. 박 전 장관은 대통령실 대접견실에서 A4 용지에 직접 내용을 메모하고 특정 문건을 들여다봤다고 한다. 특검팀은 그가 윤 전 대통령 등으로부터 문건 형태로 계엄 이후 법무부가 해야 할 조치 등을 지시받고 현장에서 이를 직접 정리했을 가능성을 의심하고 있다. 앞서 계엄 선포 당일 대통령실에 모인 일부 국무위원 등은 윤 전 대통령으로부터 계엄 이후 조치 사항이 담긴 문건을 직접 전달받았다. 최상목 전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계엄 이후 가동할 비상입법기구 예산 편성 등을 지시받았고, 이상민 전 행정안전부 장관은 <경향신문> 등 언론사에 단전·단수 조치하라는 지시를 받은 것으로 조사됐다. “지시를 한 사실 없다” 조태열 전 외교부 장관은 ‘공관을 통해 대외 관계를 안정화시키라’는 지시를 받았다. 박 전 장관 측은 윤 전 대통령으로부터 개별 지시 문건을 받지 않았고 통상적인 절차에 따라 법무부에 지시를 내렸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는 지난달 24일 특검 조사에서도 A4 용지에 메모했는지 등에 대해 “기억나지 않는다”고 진술한 것으로 전해졌다. 박 전 장관 측은 이날 “해당 CCTV 장면을 보여달라”는 취지의 의견서를 특검에 제출했다. 특검팀이 김 전 수석을 소환한 건 지난 7월 초다. 그는 지난해 12월4일 서울 삼청동에 위치한 대통령 안전가옥(안가)에서 이상민 전 행정안전부 장관, 박 전 장관, 이완규 전 법제처장 등과 계엄 관련 법률 검토를 했다는 의혹을 받는다. 모두 윤 전 대통령과는 고교·대학 및 검찰 동기나 선·후배로 윤석열정부 최고위직 법률가들이다. 지난해 말부터 정치권에서 “비상계엄 수사 등 법률적 대응 방안 또는 제2의 내란 모의 가능성을 논의한 것 아니냐”는 의혹을 제기하자 이들은 국회와 경찰 조사에서 “연말에 얼굴 보자는 취지였다”(박성재 전 장관), “신세 한탄이나 하자는 자리였고, 법률을 검토할 겨를도 없었다”(이상민 전 장관)며 의혹을 부인했다. 그러나 검찰과 경찰은 이 자리에 한정화 전 법률비서관이 동석한 사실을 확인했다. 주변 CCTV 등 안가 회동 참석자들을 확인하는 과정에서 한 전 비서관의 존재를 인지하고 소환 조사까지 진행했다. 특검팀은 삼청동 안가 모임 성격을 ▲비상계엄 선포 절차 사후 보완 ▲대통령 탄핵 대비 법적 대응 논리 개발 자리 등으로 보고 있다. 특히 내란 국정조사 청문회에서 나온 관련자 진술의 위법성을 면밀히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박 전 장관과 김 전 수석, 이 전 처장 등은 안가 회동 이후 휴대전화를 바꿨다. 류혁 전 법무부 감찰관은 지난 3월 <일요시사>와의 인터뷰에서 “윤 전 대통령 최측근으로 꼽히는 김주현 전 민정수석, 박성재 전 법무부 장관 등 밑에서 일하던 검찰 고위 관계자들은 대통령을 ‘운명 공동체’로 생각한다”며 “박 전 장관이나 김 전 수석에 대해서는 검찰이 적극적으로 수사하지 않았다. 이들에 대해 합리적이고 납득할 만한 수사 결론이 나오지 않으면 국민이 받아들이겠나. 모든 의혹이 해소될 때까지 그 사람들에 대한 수사는 계속돼야 한다. 이들은 죽을 때까지 수사선상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라고 비판한 바 있다. 증거 이미 폐기했다? 특검팀은 과거 검찰 비상계엄 특별수사본부가 작성했던 수사보고서도 확보한 것으로 확인됐다. <일요시사>가 입수한 검찰 특수본 수사보고서의 제목은 ‘2차 비상계엄 가능성에 대한 의혹 등 정리 보고’다. 수사보고서에는 “12·4 국회에서 계엄 해제 요구 결의안이 통과되고 난 직후, 윤 대통령이 계엄사령부 상황실로 찾아가 김용현 국방부 장관에게 ‘왜 국회의원들을 잡지 않았느냐’ ‘내가 다시 계엄을 할 테니 그때는 철저히 준비해서 국회부터 장악하라’라고 지시한 정황”이 있다고 적혔다. 해당 의혹은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에서 처음 제기했다. 민주당은 지난해 12월6일 비상 의원총회에서 윤 전 대통령이 비상계엄 2차 발령을 준비했다는 정황을 공개했다. 검찰이 이 같은 민주당의 의혹 제기와 관련해 수사 필요성이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와 관련해 검찰은 수사보고서에 “계엄사령관인 박안수 육군참모총장은 윤 대통령, 김용현 장관과 함께 합참 지휘통제실 내 별도의 방에 들어갔다고 국방위 현안 질의에서 답한 바 있으나 대화 내용은 기억나지 않는다고 발언했으나 박 총장이 답변한 날인 12월5일은 윤 대통령의 위와 같은 발언이 공개되지 않은 시점”이라며 박 전 총장에 대해 조사 필요가 있다고 적었다. 검찰은 수사보고서에서 시민단체와 언론사 보도 등 2차 계엄 의혹과 관련한 의혹 확인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육군 복수 부대에 지휘관 휴가 통제 지침이 내려졌고 비상계엄 선포 이후 경계 태세가 유지되고 있다는 의혹과 계엄 둘째 날 지방 공수여단의 서울 진입 계획이 있었다는 육군특수전사령부 간부의 언론사 인터뷰 등이 그 근거다. 검찰은 윤 전 대통령과 김용현 전 국방부 장관이 곽종근 전 특수전사령관에게 ‘국회 문을 열고 들어가 의사당 내 의원들을 밖으로 이탈시킬 것’이라고 동일한 명령을 내렸지만, 지시가 이행되지 않아 2차 계엄이 준비됐을 가능성이 있다고 봤다. 12월4일 새벽 중요…검도 “수사 필요” 인정 자료 이미 사라졌나…용산 PC 전부 포맷 확인 검찰은 수사보고서에 “윤 대통령의 ‘국회의원 이탈 명령이 제대로 시행되지 않자 김 장관에게 위와 같은 발언(왜 국회의원들을 잡지 않았느냐)을 했을 가능성이 충분히 있어 보이고, 이와 더불어 ‘추가 계엄 선포’와 관련된 발언을 했을 가능성도 있어 보이므로 관련 내용 수사 필요성 있음”이라고 적었다. 특검팀은 대통령실 고위 간부들이 조직적으로 2차 계엄 관련 자료를 폐기했다고 보고 있다. 지난달 18일 정진석 전 대통령실 비서실장을 참고인 신분으로 소환한 특검팀은 정 전 실장에게 계엄 이후의 상황을 따져 물은 것으로 파악됐다. 정 전 실장은 불법 계엄 전후 윤석열 전 대통령을 가까이서 보좌했다. 그는 계엄 선포 직전 서울 용산 대통령실에 있었다. 국무위원은 아니지만 계엄 선포 전 국무회의에 신원식 전 국가안보실장과 함께 참석했다. 이튿날 새벽에 계엄 해제 국무회의가 열리기 전, 윤 전 대통령이 합동참모본부 전투통제실에 머물 때 찾아가 만나기도 했다. 정 전 실장은 지난해 12월4일 국회가 계엄 해제 요구 결의안을 의결한 이후 윤 전 대통령, 박 전 총장, 김 전 장관 등과 함께 합동참모본부 전투통제실 내 결심지원실에 함께 있었던 것으로 조사됐다. 그는 국회에서 계엄 해제 요구 결의안이 의결된 후 국민의힘 추경호 전 원내대표와도 통화했다. 추 전 원내대표는 앞서 “지난해 12월4일 오전 2시58분쯤 정 전 실장에게 전화를 걸어 국회 계엄 해제 요구 결의안이 정부에 도착했음을 확인하고 정부의 신속한 계엄 해제 조치를 촉구했다”고 밝혔다. 정 전 실장은 대통령실 윗선이 계엄 증거를 조직적으로 은폐했다는 의혹에도 연루돼있다. 특검은 지난 4월 대통령실 컴퓨터(PC) 전체 초기화 계획이 정 전 실장의 지시로 실행됐을 가능성을 살펴보고 있다. 특검팀은 앞서 별도 전담팀을 꾸려 정 전 실장 관련 의혹을 수사해 왔다. 특검팀은 이날 정 전 실장을 상대로 계엄 당시 국무회의와 대통령실 상황, 추 전 원내대표와의 통화 경위 등을 조사한 것으로 알려졌다. 시간이 부족하다 특검팀은 박 전 총장도 참고인 신분으로 재조사했다. 앞서 박 전 총장은 계엄 당시 계엄사령관으로서 불법 포고령을 발령한 혐의(내란중요임무종사) 등으로 구속 기소됐다. 박 전 총장도 국회가 비상계엄 해제 요구 결의안을 의결한 뒤 윤 전 대통령, 김 전 장관 등과 합참 결심지원실에 함께 있었다. <hounder@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