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획>노무현 쇼크③노(盧) 가슴 후벼 판 사람들

‘노심’에 비수 꽂아도… 타협하지 않았다! 굴복하지 않았다! 구걸하지 않았다!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을 가슴으로 보낸 국민들의 마음속에 ‘인간 노무현’에 대한 향수가 좀처럼 지워지지 않고 있다. ‘있을 땐 몰랐다’는 그리움과 ‘있을 때 잘할 걸’이란 아쉬움, ‘지켜주지 못해 미안하다’는 자책감에 ‘그냥 그렇게 보낸’ 울분과 탄식이 섞인 전 국민적 애도 물결이 여전히 출렁이고 있다. 그리고 이제 서서히 국민들의 참담하고 비통한 심정이 원망과 분노로 격앙되면서 새롭게 재조명되고 있는 노 전 대통령의 정치인생에 ‘상처’를 입힌 인사들에게 화살이 쏟아지고 있다. 그동안 ‘노심’에 비수를 꽂은 옛 동지들과 정적들을 추려봤다.

‘영원한 적, 동지 없는’구린 정치판서 수많은 배신 맛봐
친노세력 속속 변절…옛동지 등 돌린 뒷모습에 한숨만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은 탈권위과 수평적 리더십으로 국민과의 의사소통은 물론 정치, 경제, 사회 모든 분야의 ‘개혁’을 선창했다.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원칙’과 ‘소신’이 그의 무기였다. 노 전 대통령은 퇴임 후에도 기존 고정관념을 깨기 위해 뚜렷한 신념을 굽히지 않았다.

행동 하나 하나…
말 한마디에 시비

그러나 정치판엔 영원한 적도, 영원한 동지도 없는 법. ‘구린 전통’은 노 전 대통령도 그냥 두지 않았다. 노 전 대통령은 줄곧 ‘가시밭길’이었던 정치인생에서 수많은 배신과 모욕을 견뎌야 했다.
정치에 입문한 이후 지난 20여 년 내내 그랬다. 하루도 편한 날이 없었다. 같은 자리에서 한 시선으로 ‘노(盧)비어천가’를 외친 옛 동지들의 등 돌린 뒷모습을 쓸쓸히 지켜봐야 했고 행동 하나 하나 또는 말 한마디 한마디에 시비를 거는 정적들의 꼬투리 공세에 시달렸다. 하지만 그는 타협하지 않았고 굴복하지 않았으며, 구걸하지 않았다.

노 전 대통령에게 가장 먼저 ‘배신’을 맛보게 해준 인물은 김영삼 전 대통령이다. 노 전 대통령은 민주화운동에 뛰어들어 인권변호사로 활동하다가 1988년 13대 총선 때 김 전 대통령(당시 통일민주당 총재)의 권유로 정치에 발을 들였다.
그해 13대 총선에서 5공 신군부의 핵심인물인 허삼수(당시 민정당 후보)씨를 누르고 정계에 입문해(부산 동구) 곧바로 이어진 5공 청문회를 통해 이름을 알렸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노 전 대통령은 자신을 정치권에 끌어들인 김 전 대통령의 손을 뿌리쳤다. 김 전 대통령이 1990년 3당 합당(민정당-통일민주당-공화당)에 나서자 민주화운동에 대한 배신으로 규정, ‘변절자’라고 맹비난하며 제 발로 뛰쳐나왔다.
결별 대가는 컸다. 노 전 대통령은 김대중 전 대통령(당시 평민당 총재)의 우산 속으로 들어갔지만 허삼수씨와 다시 맞붙은 1992년 14대 총선에서 고배를 마셨다. 여당을 이끌던 김 전 대통령이 노 전 대통령 대신 허씨를 “충직한 군인”이라고 거든 결과였다.

이어 1995년 부산시장 선거, 1996년 15대 총선, 2000년 16대 총선에서도 연거푸 물을 마셔야 했다. 김 전 대통령은 지난 대선 당시 대놓고 “이명박을 지지한다”고 밝힌 것도 모자라 틈만 나면 각종 공식석상에서 “노무현을 괜히 키웠다”는 취지의 발언으로 노 전 대통령의 가슴을 후벼 파기도 했다.
노 전 대통령은 2002년 새천년민주당 대선후보 경선에서 ‘아군’들로부터 깊은 상처를 입었다. 특히 이인제 의원(무소속)과는 경선을 거치면서 완전히 ‘앙숙’으로 돌아섰다. 당초 두 사람 간 관계가 원만했던 것은 아니지만 경선 이후 더욱 벽을 쌓았다.

‘이인제 대세론’이 ‘노풍’에 의해 서서히 함몰되자 다급해진 이 의원은 노 전 대통령의 장인이 6·25 빨치산 활동으로 옥사한 좌익인사란 점을 부각시켜 공격했고, 노 전 대통령은 “그러면 사랑하는 아내를 버리라는 말이냐”고 받아쳐 엄청난 호응을 받았지만 대선 내내 ‘색깔론’에 시달려야 했다.
이 의원은 16대 대선을 코앞에 둔 2002년 12월 초 새천년민주당을 탈당한 뒤 “노무현 지지율은 광기다. 노풍은 광풍”이라고 노 전 대통령을 향해 독설을 퍼부었다. 지난 4월엔 ‘박연차 게이트’가 터지자 “노무현 정권이 비전도 신념도 없이 낡은 이념과 포퓰리즘에 의존해 생긴 결과다. 지금 드러나고 있는 것은 빙산의 일각”이란 입장을 드러내기도 했다.

노 전 대통령은 2002년 대선 막판에 또 한 번 등에 칼이 꽂히는 아픔을 겪었다. 정몽준 한나라당 최고위원(당시 국민통합21 대표)으로부터다.
2002년 4월 새천년민주당 대선 후보로 확정된 노 전 대통령은 지지율 하락과 6·13 지방선거와 8·8 재보선의 연이은 참패로 같은 당 의원들이 집단 탈당하는 등 ‘반노’진영의 사퇴 압력을 받자 과감한 결단을 내렸다. 한일월드컵 열기에 힘입어 상승세를 탔던 정 최고위원과 ‘단일화’란 승부수를 던진 것.
이 결과 같은 해 11월, 노 전 대통령이 단일후보로 선출됐으나 정 최고위원은 대선 하루 전날 밤 노 전 대통령이 ‘다음 대통령은 정몽준’이란 피켓을 보고 “속도위반 하지 말라. 우리에겐 정동영, 추미애도 있다”고 말한 명동 유세 등을 문제 삼아 일방적인 지지철회를 선언했다.

노 전 대통령은 이회창 자유선진당 총재(당시 한나라당 후보)를 57만표 차로 이기고 극적으로 대권을 거머줬지만 정 최고위원과 후보단일화를 이룬 뒤 포장마차에서 기울인 소주잔이 기억하고 싶지 않은 기억으로 남았다. 정 최고위원 역시 노 전 대통령의 검찰 소환을 앞두고 “노무현은 배신과 기만의 정치로 표를 얻은 정치꾼”이라고 몰아붙인 바 있다.

정치적 시련 겪자
가신들까지 짐싸

‘대통령 노무현’의 행보도 순탄치 않았다. 그중에서도 2004년 3월 헌정사상 최초로 한나라당이 꺼내든 탄핵소추안은 노 전 대통령의 정치인생에 최대 위기를 불러왔다.
노 전 대통령에게 ‘탄핵 폭탄’을 떨어뜨린 실질적인 주역은 조순형 자유선진당 의원(당시 민주당 대표), 홍사덕 한나라당 의원(당시 한나라당 원내총무) 등이다. 조 의원은 노 전 대통령이 대선 후보시절 선대위원장을 맡은 참여정부 탄생의 일등공신.

‘여기서 맞고, 저기서 터지고’
정적은 소리 내 울지 못한다


하지만 민주당-열린우리당 분당 이후 2004년 17대 총선 때 노 전 대통령이 열린우리당 선거운동으로 비치는 발언을 했다는 이유로 탄핵을 처음 거론했다. 노 전 대통령이 대선 때 정 최고위원과 결별을 감수하고도 치켜세웠던 추미애 민주당 의원도 이를 거들었다.
홍 의원은 한나라당 쪽에서 이들 의원과 손발을 맞춰 노 전 대통령에 대한 탄핵을 진두지휘했다. 이들은 헌법재판소의 탄핵 기각 결정 이후 불어 닥친 메가톤급 ‘역풍’으로 여의도를 떠났다가 가까스로 다시 정치권에 얼굴을 내밀 수 있었다.

탄핵 역풍을 불러온 촛불집회 속에서 국민들의 기대감으로 온 나라가 들썩인 것도 잠시. 노 전 대통령은 재임기간 동안 보수세력과 잦은 충돌을 빚었고, 사사건건 언론의 집중포화를 맞으면서 ‘희망의 메신저’에서 ‘원망의 표적’으로 추락하는 신세로 전락했다.
노 전 대통령이 이런 시련을 겪는 과정에서 측근들까지 하나둘 떠났다. 노 전 대통령에 대한 여론이 악화되자 ‘친노세력’들이 속속 변절한 것. 이들은 한때 노 전 대통령과 한 배를 탄 정치적 동지였으나 참여정부 중반 이후 점점 거리를 두더니 ‘뒤뚱뒤뚱’한 정권 말에 이르자 다른 편에 붙거나 욕을 해대기 시작했다.
정동영 무소속 의원, 김근태 민주당 상임고문, 천정배 민주당 의원, 강봉균 민주당 의원, 김한길 전 의원….

이들은 모두 ‘노무현 대통령 만들기’와 ‘열린우리당 창당’(2003년 11월)의 일등공신들로 노 전 대통령의 보은 차원으로 참여정부에서 모두 한 자리씩(장관직) 차지했다. 그만큼 비수가 꽂힌 ‘노심’의 아픔이 더했다.
‘배반의 장미’는 열린우리당이 2004년 하반기부터 치러진 각종 재·보선과 2006년 5·31 지방선거에서 연달아 수모를 당하면서 싹을 틔웠다. 그 화살이 노 전 대통령에게 날아간 것.

열린우리당 존폐를 둘러싸고 노 전 대통령과 친정그룹간 신경전은 단순히 의견충돌을 넘어서 감정싸움으로 확전돼 집단탈당 사태로 이어졌고 결국 2007년 8월 열린우리당이 해체되는 수순을 밟았다.
특히 노 전 대통령과 정동영-김근태 사이는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버렸다. 노 전 대통령이 “지도급 인사들이 열린우리당의 해체나 탈당을 주장하는 것은 무책임한 일”이라고 지적하자 두 전직 의장은 “대통령은 더 이상 당의 현안에 상관하지 말라”며 맞받아치기도 했다.

급기야 청와대가 정동영-김근태의 노 전 대통령 비판을 ‘배신’으로 규정했고 이에 친노그룹이 ‘의리 없는 대통령’이라고 응수하면서 양측의 사이는 더욱 멀어졌다. 올 들어 노 전 대통령에 대한 검찰 수사가 본격화되자 일부 친노인사 출신들이 ‘노무현과 거리두기’에 나서는 씁쓸한 장면이 연출되기도 했다.

‘노(盧)비어천가’서
‘명(明)비어천가’로

노 전 대통령의 뒤통수를 친 참여정부 핵심 수뇌부들도 눈에 띈다. 이들은 ‘노무현 옷’을 벗은 뒤 한나라당으로 말을 바꿔 탔다.
참여정부에서 청와대 치안비서관을 거쳐 서울경찰청장과 경찰청장을 지낸 허준영 코레일 사장은 2005년 말 시위대 강경진압의 책임을 지고 불명예 퇴진한 것에 불만을 품고 한나라당에 입당, 2006년 7·26 재보선(서울 성북 을)과 지난해 4·9 총선(서울 중구)에서 공천을 신청했으나 탈락했다.

참여정부가 추진한 각종 부동산 대책과 행정수도 이전 작업에 충주적인 역할을 한 최종찬 전 건설교통부 장관도 4·9 총선에서 한나라당 후보(안양 동안갑)로 나섰지만 배지를 달지 못했다.
2007년 10월 남북정상회담 당시 국방부장관 자격으로 노 전 대통령을 수행해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악수하면서 허리를 굽히지 않아 ‘꼿꼿 장수’란 별명과 인기를 얻은 김장수 한나라당 의원은 4·9 총선 직전 한나라당에 입당해 비례대표로 선출됐다.

무엇보다 노 전 대통령은 퇴임 직전인 2007년 10월 자신이 직접 임명한 임채진 검찰총장의 수사팀으로부터 ‘표적’이 되는 고통을 당해야 했다.
이외에 윤증현 기획재정부 장관(전 금융감독위원장), 한덕수 주미대사(전 경제부총리), 윤진식 청와대 경제수석(전 산업자원부 장관) 등 노무현 정부 출신 인사도 이명박 정부로 자리를 옮겨 친노계에선 ‘배신자’로 낙인 찍혔다.

최근엔 노 전 대통령 서거 이후 막말을 쏟아낸 각계 인사들이 구설수에 오르고 있는 가운데 유난히 안상수 한나라당 원내대표의 발언이 여론의 뭇매를 맞고 있다. 안 원내대표는 지난달 27일 노 전 대통령의 국민장을 앞두고 “국민장을 정치적으로 이용하고 변질시켜 소요사태가 일어날지 정말 걱정”이라고 말한 바 있다.

공교롭게도 안 원내대표는 노 전 대통령과 사법시험 17회 동기로, 노 전 대통령 서거 직후 사법연수원 시절 함께 찍었던 사진을 꺼내 들며 감회에 젖는 액션(?)을 취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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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김건희 일가 연루 의혹 ‘선라이즈F&T’ 주주명부 공개

[단독] 김건희 일가 연루 의혹 ‘선라이즈F&T’ 주주명부 공개

[일요시사 취재1팀] 양동주 기자 = 소문이 어느덧 사실처럼 인식되고 있다. 명확한 물증이 없는 가운데 파편적인 의혹이 덧씌워진 양상은 좀처럼 바뀌지 않고 있으며, 흐름을 파악할 만한 유의미한 흔적이 이제야 겨우 나왔을 뿐이다. 증폭된 의혹 뒤편에서 여전히 진실은 빼꼼히 잘 보이지 않는다. 2010년 9월 설립된 ‘선라이즈에프앤티’는 황해경제자유구역에 자리 잡은 유일한 농산물 가공 업체로, 그간 심심치 않게 밀수 의혹을 받아왔다. 가공 목적으로 수입한 농산물을 가공 없이 시중에 유통시켜 엄청난 차익을 봤다는 꼬리표가 뒤따랐다. 의혹하는 눈초리 선라이즈에프앤티가 취급했던 대다수 농산물이 고관세 품목이라는 점은 이 같은 의혹을 부채질했다. 그간 선라이즈에프앤티는 ▲녹두 ▲콩나물콩 ▲다대기(혼합양념) ▲생강 ▲마늘 ▲참깨 ▲팥 ▲서리태 등 높은 세율이 붙는 고관세 품목을 주로 수입했던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한 예로 콩나물콩의 경우 그대로 들여와 국내에 유통하면 487% 관세가 부과되지만, 콩나물 재배 목적으로 수입하면 27%만 반영된다. 평택세관에 몸담았던 다수의 전직 세관공무원이 기업 출범 및 운영에 관여했다는 점도 선라이즈에프앤티를 부정적으로 보게 만들었다. 심지어 선라이즈에프앤티 이사진에 포함됐던 특정 세관 출신 임원이 한때 다이아몬드 밀수 사건에 이름이 오르내린 사례도 존재한다. 수년 전부터는 김건희씨 일가와 선라이즈에프앤티를 동일선상에서 바라보는 경향이 강해졌다. 선라이즈에프앤티의 밀수 의혹을 수차례에 걸쳐 제기했던 공익 제보자 이성열씨가 재판에 연루되는 과정에서 김건희씨의 모친인 최은순씨가 거론됐던 게 이 같은 흐름에 불을 지핀 형국이다. 이런 가운데 정치평론가인 장성철 공론센터 소장이 최근 ‘평택항’을 언급하자, 김건희씨 일가와 선라이즈에프앤티 간 연관성은 사실처럼 받아들여질 정도가 됐다. 장 소장은 SBS라디오 <김태현의 뉴스쇼>가 운영하는 유튜브 방송에 출연해 김건희씨 일가의 수상한 물건 수입 의혹과 관련한 이야기를 전했다. 갈수록 증폭되는 평택 논란 이제야 공개된 소소한 흔적 장 소장은 “최은순씨가 주인으로 있는 농수산물 수입업체에서 이상한 것을 들고 오려고 하다가 걸려서 (김건희) 오빠와 김건희씨가 그것을 무마시키려고 여러 가지 이상한 (일들을 했다고 한다)”며 “어떤 물건인지 구체적으로 밝히지는 않았지만, 부적절한 물건인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고 말했다. 급기야 선라이즈에프앤티의 폐업이 알려지자, 의혹은 그야말로 걷잡을 수 없이 커진 양상이다. 선라이즈에프앤티는 국세청 사업자 과세 유형 조회 결과 지난 10일자로 폐업한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폐업자로 조회된 지난 10일은 김건희 특검법이 공포된 시기와 맞물린다. 물론 꾸준히 의혹이 제기된 것과 별개로, 김건희씨 일가와 선라이즈에프앤티 간 연관성을 입증할 만한 확실한 단서는 없는 상황이다. 특히 주주명부가 지금껏 외부에 공개되지 않았다는 게 의혹과 진실을 구분 짓기 어렵게 만들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일요시사>가 최초 입수한 주주명부는 간접적으로나마 의문을 풀 수 있는 열쇠로 작용할 여지를 남긴다. 2022년 10월 작성된 ‘카리나에프앤티(선라이즈에프앤티에서 2020년 9월 상호 변경) 주주명부’를 검토한 결과 주주는 총 17명, 발행주식은 91만8400주(1주당 5000원)로 확인됐다. 2010년 9월 자본금 5억원으로 설립된 선라이즈에프앤티는 수차례 증자를 거쳤고, 해당 시기에 자본금을 45억9200만원으로 늘린 상태였다. 의문 해소 첫 단추 일단 주주명부에서는 김건희씨 일가의 이름을 찾을 수 없다. 대신 경영권 교체 과정이나마 엿볼 수 있을 뿐이다. 법인 등기와 주주명부를 교차 검증한 결과를 토대로 추정하면, 표면상 선라이즈에프앤티 지배 세력은 ‘전직 세관공무원(설립~2018년 중순)→지엔티에이치(~2020년 중순)→킴스에O엔O(~2022년 초순)→동OO앤에스(~2025년 6월)’ 순으로 변경된 흐름이다. 첫 번째 경영권 교체는 ‘펀딩하이 연체 사건’과 함께 발생했다. 펀딩하이는 중국·동남아시아에서 농산물을 수입하는 업체에 돈을 빌려 주고, 투자자들에게 15% 이상 수익을 보장하는 펀딩 상품으로 인기를 끌던 P2P 업체였다. 그러나 펀딩하이는 2018년 6월20일 ‘마늘 시즌2-17차(모집 금액 3억원, 차주 승리산업)’ 펀딩 상품의 연체를 시작으로 ▲세척 당근 시즌2-18차(모집금액 5억원, 차주 지엔티에이치) ▲김치 펀딩 2차(모집금액 1억2000만원, 차주 상아농산) ▲번데기 펀딩 1차(모집금액 1억8000만원, 차주 월량완코리아) 등에서 차주의 투자금 상환 실패를 알렸다. 연체 금액은 ▲지엔티에이치 29억원 ▲승리산업 33억원 ▲상아농산 11억8000만원 ▲월량완코리아 1억8000만원 등 총 75억6000만원에 달했다. 급기야 펀딩하이는 연체율 100%를 찍은 채 영업을 중단했다. 상환 실패 이후 차주 사이에 관련성이 드러났다. 지엔티에이치와 승리산업에서 대표이사였던 윤석호씨는 두 회사 지분을 각각 60%, 100% 보유 중이었다. 또한 월량완코리아 사내이사로도 등재돼있었다. 거듭되는 교체 수순 연체가 발생한 직접적인 사유는 선라이즈에프앤티를 대상으로 한 지분 투자였다. 지엔티에이치는 펀딩받은 금액을 농산물을 들여오는 데 쓰지 않고, 선라이즈에프앤티 주식을 매입하는 데 활용한 것으로 뒤늦게 확인됐다. 이를 계기로 지엔티에이치는 2018년 6월경 주식 16만1400주를 확보한 선라이즈에프앤티 최대주주로 올라섰다. 지엔티에이치가 지배력을 확보한 이후 선라이즈에프앤티 임원 명단에 변화가 목격됐다. 선라이즈에프앤티 초창기부터 함께했던 사내이사와 부친에 이어 회사에 몸담았던 대표이사를 대신해 지엔티에이치가 끌어들인 얼굴들이 등기임원 자리를 꿰찼다. 정작 지엔티에이치는 연체 발생 넉 달 후인 2018년 10월 보유 중이던 선라이즈에프앤티 주식을 ‘란릉현래보식품유한공사’에 넘겼다. 펀딩하이 투자자들과의 소송전이 불거지자 중국에 본거지를 둔 우군에 주식을 양도한 모양새였다. 두 번째 경영권 교체는 ‘킴스에O엔O’ 측이 선라이즈에프앤티의 주체로 올라서는 과정에서 발생한 것으로 보인다. 충청권에 본적을 둔 킴스에O엔O는 2022년 10월 기준 선라이즈에프앤티 주식 10만8200주를 확보한 것으로 확인됐다. 킴스에O엔O 대표이사의 친인척이 보유한 주식 13만2800주를 합산하면 우호 주식은 24만주 안팎이다. 기존 지엔티에이치 측 우호 세력(란릉현래보식품유한공사 16만1400주+마송재 3만주)과 비교해 5만주 가까이 격차를 벌린 셈이다. 킴스에O엔O 측이 선라이즈에프앤티 주식을 대량 매입한 시기는 2020년 중후반으로 추정된다. 이 무렵 선라이즈에프앤티 등기임원 구성이 크게 요동쳤다는 점을 통해 짐작 가능한 사안이다. 실제로 지엔티에이치가 지배력을 발휘하던 2018년 7월 대표이사에 선임됐던 김정일 대표는 2020년 3월 해임됐다. 2018년 9월 취임했던 또 다른 대표이사 역시 당해 10월을 넘기지 못한 채 사임했다. 쉽게 거두지 못하는 의심 의미심장 세력 교체 과정 공석이 된 주요 등기임원 자리는 킴스에O엔O 측 인물로 채워졌다. 킴스에O엔O 대표이사가 2020년 10월 선라이즈에프앤티 대표이사로 취임했고, 해당 시기에 사외이사, 감사 등 등기임원 전원이 새 얼굴로 교체됐다. 킴스에O엔O에 이어 지배 세력으로 등장한 곳은 식료품 제조업을 영위하는 동OO앤에스였다. 이 회사는 2022년 10월 기준 주주명부에 선라이즈에프앤티 주식 41만주(지분율 44.64%)를 보유한 단일 최대주주로 등재돼있다. 여기에 우호 세력(글로O포O 1만주+김성수 2만주+김종봉 788주)의 주식을 합산하면 지분율은 50%에 육박한다. 동OO앤에스는 사실상 선라이즈에프앤티를 인수하고자 만든 업체로 비쳐질 여지를 남긴다. 2022년 2월 출범 당시 자본금 10억원짜리였던 동OO앤에스는 불과 두 달 만인 2022년 4월14일 자본금을 21억원으로 두 배 이상 키웠다. 공교롭게도 동OO앤에스가 설립 이후 8개월 사이 선라이즈에프앤티 주식 41만주를 확보하는 과정에서 투입한 금액은 총 20억5000만원이었다. 이는 동OO앤에스 자본금 21억원이 선라이즈 주식 41만주를 매입하는 데 쓰였을 가능성에 주목하게 만든다. 게다가 선라이즈에프앤티는 기존 61만8400주였던 발행주식을 2022년 4월22일 91만8400주로 30만주 확대했다. 동OO앤에스가 자본금을 21억원으로 확충한 지 8일 만이다. 선라이즈에프앤티가 발행주식을 30만주 늘린 덕분에 동OO앤에스는 상대적으로 수월하게 주식 41만주를 확보한 형국이다. 동OO앤에스가 선라이즈에프앤티를 지배하는 위치로 올라설 무렵에 선라이즈에프앤티 임원 구성은 또 한 번 바뀌었다. 동OO앤에스 대표이사가 사내이사, 글로O포O 대표이사가 사외이사에 이름을 올렸고, 김성수 대표이사가 신규 선임됐다. 이후 김성수 대표는 선라이즈에프앤티 폐업 전까지 자리를 지킨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되짚어보는 연결고리 한편 일각에서는 김건희씨 일가에서 선라이즈에프앤티에 영향력을 행사했다면 그 시기는 지엔티에이치 측이 지배력을 상실한 이후일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나마 킴스에O엔O 혹은 동OO앤에스와의 연관성이 높다고 보는 것이다. 한 경찰 관계자는 “김건희씨 일가에서 선라이즈에프앤티에 관여한 직접적인 흔적이 발견되지 않았지만, 만약 영향력을 행사했다면 그 시기를 2021년 이후로 특정해볼 수 있을 것”이라며 “항간에 떠도는 마약 적발 여부는 2022년 근방으로 얘기가 오가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heatyang@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