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인물> 성범죄 전과 의혹 황석희

믿고 보던 번역가의 어두운 과거

[일요시사 취재1팀] 안예리 기자 = ‘스타 번역가’ 황석희가 성범죄 전과 의혹이 드러나며 곤욕을 겪고 있다. 평소 보여주던 가족에 대한 남다른 애정과 소신 있는 발언으로 긍정적인 이미지를 쌓아온 만큼, 이를 접한 대중 사이에서는 그에게 배신감이 크다는 반응이 이어지고 있다.

황석희는 1979년생으로 강원대학교 사범대학 영어교육과를 졸업한 영화 번역가다. 자막의 뉘앙스를 살려내는 감각과 캐릭터의 말맛을 살리는 번역으로 입소문을 타며, 이른바 ‘스타 번역가’로 자리 잡았다. 대학 시절 그는 영어교육학을 전공했지만, 주변 동기들처럼 교원 임용시험을 준비하지는 않았다. 오랜 시간 시험에 매달릴 자신이 없었고, 교사라는 직업이 자신에게 맞는지에 대한 확신도 부족했다. 대신 그가 선택한 방향은 ‘번역’이었다.

길고 긴
무명 시절

특히 책 번역가를 꿈꾸며 진로를 설정했지만, 초보 번역가에게 기회는 쉽게 주어지지 않았다. 결국 현실적인 선택으로 시작한 것은 계약서, 매뉴얼, 서신 등을 다루는 이른바 ‘단순 번역’ 작업이었다.

대학 4학년 시절부터 각종 아르바이트 형태의 번역을 맡으며 생계를 이어갔고, 이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실무 경험을 쌓았다. 당시만 해도 영화 번역 일을 하게 될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황석희는 미국 토크 프로그램 <닥터 필 쇼> 번역 작업을 맡으면서 영상 번역의 세계에 처음 발을 들이게 됐다. 그때까지 그는 영상 번역에 대한 체계적인 교육을 받은 적도, 제대로 된 작업 환경을 갖춘 적도 없었다. 단지 “영상 자막은 두 줄로 쓴다”는 정도의 기본적인 정보만 알고 시작한 수준이었다.

작업 환경 역시 지금과는 비교하기 어려울 정도로 열악했다. 당시에는 지금처럼 영상 파일이 아닌 비디오테이프로 작업이 이뤄졌다.

그는 중고 매장에서 비디오 재생 장비를 직접 구입한 뒤, 리모컨을 이용해 영상을 ‘돌리고, 멈추고’를 반복하며 번역을 진행했다. 한 문장을 확인하기 위해 수차례 되감기를 반복하는 방식은 시간과 체력을 동시에 요구하는 작업이었다.

황석희는 이 시기를 두고 “아마 이 바닥에서 나만큼 밑바닥부터 시작한 번역가는 없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실제로 현장에서 하나씩 체득해 온 경험에 대한 자부심인 것이다.

이후 그는 다큐멘터리와 방송 번역으로 활동 영역을 넓혔다. 내셔널지오그래픽 채널을 비롯한 다큐멘터리 번역을 약 1년 반가량 맡으며 영상 번역가로서의 기반을 다졌고, 이어 미국 드라마 번역 시장에 본격적으로 진입했다.

그는 <밴드 오브 브라더스> <24> <왕좌의 게임> <뉴스룸> <더 퍼시픽> <로앤오더> 등 다수의 인기 미드(미국 드라마)를 번역했다. 장르와 분위기가 각기 다른 작품들을 번역하면서 축적한 경험은 상황과 감정을 살려내는 번역 스타일을 형성하는 데 큰 도움이 됐다.

특히 드라마 번역은 영화와는 또 다른 방식의 엄격함을 요구하는 분야였다. 케이블 채널의 경우 맞춤법과 띄어쓰기를 사전 수준으로 맞춰야 할 정도로 검수가 까다로웠고, 표현 수위 역시 강한 제한을 받았다. 번역 과정에서 제작사나 채널이 직접 개입하는 경우도 많아, 번역가의 자율성이 상대적으로 제한되는 구조였다.

이처럼 오랜 기간 드라마 번역으로 경력을 쌓았지만, 그의 목표는 분명히 영화였다. 그는 “많은 영상 번역가들이 영화 번역을 하고 싶어 한다”며 “극장에서 내가 번역한 작품을 관객과 함께 보는 경험은 큰 의미가 있다”고 밝힌 바 있다.

그러나 영화 번역 시장은 이미 기존 번역가들이 자리 잡고 있는 폐쇄적인 구조였다. 실제로 그는 첫 영화 번역 기회를 얻기까지 적지 않은 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나에게 실망할 날 온다”
의미심장 발언 재조명

처음 맡은 영화는 2009년 개봉한 <선샤인 크리닝>으로, 비교적 규모가 작은 작품이었다. 운 좋게 기회를 얻었지만, 그 이후에도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첫 작품 이후 약 4년간 추가적인 영화 번역 작업을 맡지 못하는 공백기를 겪어야 했다.

그러던 와중 두 번째 영화 번역을 맡으면서 전환점을 맞았다. 황석희는 영화 <웜 바디스> 번역을 통해 다시 영화 작업에 참여하게 됐다. 그는 당시 “첫 작품을 맡았던 회사였지만 나를 기억하지 못했고, 미드 번역 이력을 본 실무자가 추천해 기회를 얻게 됐다”고 설명했다.

<웜바디스>는 예상 외로 흥행했고, 번역에 대한 좋은 평가도 받게 되면서 이후 영화 번역 작업이 꾸준히 이어졌다. 이를 계기로 황석희는 본격적인 영화 번역가로 활동하게 됐다.

황석희는 지금까지 500편이 넘는 다양한 장르의 작품을 번역했다. 그가 참여한 작품은 <스포트라이트> <사울의 아들> 등 해외 주요 영화제 수상작이 많다. <스포트라이트>는 아카데미 작품상을, <사울의 아들>은 칸영화제 심사위원 대상을 수상한 작품이다.

황석희라는 이름이 대중적으로 알려진 계기가 된 영화는 히어로물 <데드풀>이었다. 국내에서 약 290만 관객을 기록하며 흥행에 성공한 작품이다. 이 작품은 기존 히어로 영화와 달리 19금 유머와 비속어, 은어가 다수 포함된 이른바 ‘B급 정서’가 특징이다. 번역 난도 역시 상당히 높은 작품이었다.

황석희는 당시 작업을 마친 뒤 “개봉하면 욕을 많이 먹을 것 같아 잠수를 고민했다”고 밝힌 바 있다. 그러나 개봉 이후 반응은 정반대였다. 관객들은 그의 번역을 두고 ‘약 빤 번역’이라는 표현을 쓰며 호평을 보냈고, 기존 자막과는 다른 방식의 표현이 신선하게 받아들여지면서 ‘초월 번역’이라는 수식어가 붙기도 했다.

번역 과정에서 그는 캐릭터의 성격을 기준으로 표현을 선택한다고 설명했다. 오프닝 크레디트 번역에는 원문 표현을 단순히 직역하는 대신, 캐릭터의 성격을 반영해 ‘호구들’과 같은 표현을 사용했다.

이에 대해 그는 “데드풀이 직접 썼다면 어떤 표현이 어울릴지를 기준으로 판단했다”고 말했다. 특히 <데드풀>처럼 대사의 비중이 큰 작품의 경우, 말의 리듬과 뉘앙스를 살리는 것이 중요하다고 설명했다.

황석희는 <스파이더맨: 홈커밍>과 <스파이더맨: 파 프롬 홈> 번역 과정에서도 시리즈의 설정과 캐릭터 톤을 고려해 작업을 진행했다. 특히 <스파이더맨: 파 프롬 홈> 자막에서 등장한 ‘피터 찌리릿’이라는 표현은 원문 ‘Peter tingle’을 번역하는 과정에서 약 3주간 표현을 검토했으며, “유치한 느낌과 의미 전달을 동시에 고려했다”고 설명했다.

<데드풀>로
초월 번역

표현 수위 조정 역시 번역 과정의 일부다. 예를 들어 ‘male escort’라는 표현은 ‘애인 대행 알바’로 순화해 번역했다. 그는 해당 사례에 대해 “장면의 분위기를 고려해 표현을 조정했다”고 밝혔다.

황석희의 번역에 대한 철학은 남다르다. 여러 인터뷰에서 번역의 역할을 “연출자의 의도와 대사의 의미를 관객에게 정확하게 전달하는 것”이라고 설명해 왔다. 그가 말하는 좋은 자막은 ‘들리는 자막’이다. 관객이 자막을 읽는다는 느낌이 아니라, 마치 인물이 한국어로 말하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상태를 의미한다.

그래서 단순히 영어를 한국어로 바꾸는 데 그치지 않고, 캐릭터의 말투나 상황, 장면의 흐름까지 함께 고려해 문장을 다듬는다. 작업 방식도 이런 기준에 맞춰져 있다.

원작이 있는 작품은 사전에 관련 자료를 충분히 찾아본다. <데드풀>이나 <로건>을 번역할 때는 코믹스 세계관을 따로 공부했고, <알리타: 배틀 엔젤>을 맡았을 때도 원작 만화를 직접 찾아봤다. 팬들이 낯설지 않게 느끼도록 하기 위한 과정이다.

전문적인 내용이 나오는 작품에서는 더 꼼꼼해진다. 전쟁 영화라면 군사 용어를 따로 확인하고, 언론이나 법조 분야를 다룬 영화는 실제 종사자에게 자문을 구한다.

<더 퍼시픽>이나 <스포트라이트> 같은 작품에서 이런 방식으로 작업했다. 그는 “관련 분야 사람이 봤을 때 어색하지 않은 게 중요하다”고 말해왔다. 표현 선택에도 나름의 기준이 있다. 특정 단어나 욕설이 누군가에게 불쾌감을 줄 수 있다고 판단되면 다른 표현으로 바꾼다.

단순히 원문을 그대로 옮기기보다는, 상황에 맞고 자연스럽게 들리는 쪽을 선택하는 방식이다.

번역가들에게는 숙명과도 같은 오역에 대한 태도도 비교적 분명한 편이다. 문제가 제기되면 인정하고 사과하는 쪽을 택한다. 이후 수정이 가능한 경우에는 자막을 다시 손보기도 한다.

과거에는 비판을 반박하기도 했지만, 지금은 “인정하고 고치는 게 가장 빠른 해결”이라는 입장으로 바뀌었다. 번역 기준도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 달라졌다.

초기에는 본인이 생각하는 ‘좋은 번역’에 더 무게를 뒀다면, 지금은 관객이 어떻게 받아들이는지를 더 중요하게 본다. 관객이 자연스럽게 이해할 수 있는 표현을 선택하는 쪽으로 방향이 바뀐 셈이다.

그렇다고 기준이 느슨해진 건 아니다. 오히려 스스로에 대한 기준은 더 엄격해졌다. 그는 지금까지 번역한 작품 중에서도 “100% 만족한 대사는 없다”고 말한다. 개봉 이후에도 더 나은 표현이 떠오른다고 할 정도로, 작업에 대한 아쉬움을 계속 남겨두는 편이다. 이처럼 완벽주의적인 작업 때문에 황석희는 흔히 ‘초월 번역가’로 불린다.

남다른
철학으로

하지만 최근 황석희의 성범죄 전과에 대한 의혹이 보도되면서 ‘스타 번역가’의 명예가 땅으로 떨어졌다. 지난달 30일 <디스패치> 보도를 통해 황석희의 과거 성범죄 전력 의혹이 공개됐다.

매체 보도에 따르면 황석희는 2005년과 2014년 두 시기에 걸쳐 총 3차례 사건에 연루됐으며, 이 과정에서 피해자는 총 5명에 이르는 것으로 전해졌다.

황석희는 2005년 강원 춘천 일대에서 길을 가던 여성들을 상대로 연달아 범행을 저질렀다. 한 여성에게는 뒤에서 접근해 신체를 만지며 넘어뜨린 뒤 추행을 이어갔고, 이를 제지하던 피해자의 지인을 폭행해 상해를 입힌 것으로 보도됐다.

같은 날 인근에서 또 다른 여성을 상대로 유사한 방식의 추행을 시도했고, 이를 말리던 동행인을 폭행하는 등 추가 피해가 발생했다. 해당 사건으로 황석희는 강제추행치상 및 상해 등의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고, 징역 1년6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후 2014년에는 당시 자신이 강의를 맡고 있던 문화센터 수강생을 상대로 술자리를 가진 뒤 만취 상태의 수강생을 숙박업소로 데려가 유사강간을 시도하고, 피해자의 신체를 촬영한 혐의로 기소됐다.

이 사건에 대해 재판부는 피해자가 항거불능 상태에 있었다고 판단해 준유사강간 및 성폭력처벌법 위반 혐의를 인정했고, 징역 2년에 집행유예 4년을 선고했다. 이와 함께 성폭력 치료 강의 수강과 사회봉사 명령도 내려졌다.

재판 과정에서는 황석희의 반성 여부와 함께 가족의 생계 등이 양형에 고려된 것으로 전해졌다. 특히 2014년 사건에서는 아내의 선처 호소가 재판부 판단에 일정 부분 영향을 미쳤다. 이에 따라 징역형이 선고됐지만 법정 구속은 이뤄지지 않고 집행유예가 내려진 것으로 알려졌다.

이 같은 사실이 보도되자 황석희는 자신의 SNS를 통해 입장을 밝혔다. 그는 “현재 관련 사항에 대해 변호사와 검토를 진행 중”이라며 “보도 내용 중 사실과 다른 부분이나 확인되지 않은 내용, 법적 판단 범위를 벗어난 표현이 포함될 경우 정정 및 대응을 검토하겠다”고 짧은 입장문을 남겼다.

다만 해당 입장문에서는 구체적인 사실관계에 대한 설명이나 피해자에 대한 언급은 포함되지 않았다. 이후 황석희는 기존 게시물 대부분을 삭제하거나 비공개 처리하면서 SNS 활동도 사실상 중단한 상태다.

논란이 확산되면서 방송가와 출판계, 광고업계 전반에서 관련 콘텐츠를 정리하는 움직임도 빠르게 이어졌다. 먼저 방송가에서는 황석희가 출연했던 <유 퀴즈 온 더 블럭>과 <전지적 참견 시점> 회차가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에서 비공개 처리됐다.

해당 방송의 하이라이트 영상과 유튜브 클립 역시 대부분 삭제되거나 접근이 제한된 상태다. 라디오 프로그램과 인터뷰 콘텐츠 등에서도 그의 출연분이 잇따라 정리되며 사실상 노출이 중단됐다.

‘3차례’ 성범죄 전력 알려져 논란
방송·출판·광고 ‘전방위 손절’

출판계에서도 비슷한 조치가 이어졌다. 황석희가 펴낸 에세이 <번역: 황석희>와 <오역하는 말들>은 교보문고, 알라딘, 예스24 등 주요 온라인 서점에서 판매가 중단되거나 품절 처리됐다. 일부 서점에서는 “출판사 유통 중단” 사유가 안내되며 사실상 유통이 멈춘 상태다.

광고 및 브랜드 협업 콘텐츠 역시 빠르게 정리됐다. 그가 참여했던 광고 영상과 홍보 콘텐츠가 잇따라 삭제되면서, 상업 활동 영역에서도 그와 거리 두기가 이어지고 있다.

개인 SNS에도 변화가 나타났다. 논란 직후 입장문을 제외한 기존 게시물이 대부분 삭제되거나 비공개 처리됐고, 하루 사이 팔로워 수가 약 1만명가량 감소하는 등 대중 반응도 즉각적으로 나타났다.

이번 논란은 그동안 대중에게 알려졌던 그의 이미지와도 괴리가 있어 더 큰 파장을 낳고 있다. 황석희는 방송과 SNS를 통해 가족, 특히 딸에 대한 애정을 자주 드러내며 이른바 ‘딸 바보’ 이미지로 굳어졌다.

<유 퀴즈 온 더 블럭>에 출연했을 당시 그는 “32개월 된 딸이 하는 말을 전부 번역해보고 싶다”며 “아빠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하다”고 말하는 등 자녀에 대한 애정을 표현했다.

또 다른 인터뷰와 방송에서도 그는 딸과 관련된 일상을 언급하며 “아이를 볼 때마다 하루가 영화 같다”는 취지의 발언을 하거나, 놀이터에서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모습을 떠올리며 가장 행복한 순간으로 꼽는 등 가족 중심적인 모습을 강조해 왔다.

SNS에서도 육아와 관련된 고민이나 일상을 꾸준히 공유하며 대중과 소통해 왔고, 논란이 불거지기 불과 이틀 전에도 초등학교에 입학하는 딸을 언급하며 “새로운 시작을 앞둔 아이를 응원한다”는 글과 함께 자신이 번역한 그림책을 소개하기도 했다.

이와 함께 그의 과거 발언과 글들도 온라인을 중심으로 다시 확산되고 있다. 황석희는 과거 SNS와 인터뷰를 통해 “롤모델이나 멘토로 생각하지 말라. 언젠가 반드시 실망할 날이 온다”는 취지의 글을 남긴 바 있다. 또 “사람은 누구나 어느 정도 유해하다”는 표현을 사용하며 스스로를 완전한 존재로 보지 않는다는 인식을 드러내기도 했다.

자신의 과거를 대하는 태도에 대해서도 “영웅화나 낭만화를 경계한다”며 “기억에 살을 덧붙이고 각색하다 보면 결국 스스로를 속이게 된다”는 취지의 발언을 여러 차례 해왔다. 당시에는 현실적인 조언으로 받아들여지며 공감을 얻기도 했다.

이대로
나락행

하지만 이번 논란 이후 해당 발언들이 다시 조명되면서, 온라인에서는 다양한 해석이 나오고 있다. 일부 누리꾼들은 “본인의 성범죄 전과가 알려질 것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이 아니냐”는 반응을 보였고, 또 한편에서는 “과거 발언을 지나치게 확대 해석하는 것”이라는 의견도 나오고 있다.

<imsharp@ilyosis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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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점’ 더 깊은 늪에 빠진 국민의힘

‘점점’ 더 깊은 늪에 빠진 국민의힘

[일요시사 정치팀] 박형준 기자 = 국민의힘 지방선거 공천에선 인물난 속에서도 조직표를 놓지 못하는 흔적들이 감지된다. 서울시장 경선 참여자들은 장동혁 대표의 지원 유세에 난감해하고 있다. 조직표에 기반한 정당이 집권하지 못했던 과거 사례들은 국민의힘을 더 깊은 늪으로 몰고 있다. 리얼미터·한국갤럽이 지난달 각각 진행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이재명 대통령·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의 지지율은 높지만, 국민의힘의 지지율은 저조한 것으로 나타났다. 리얼미터가 발표한 이 대통령의 지지율은 62.2%로 확인됐다. 이 조사는 지난달 23일부터 27일까지 5일 동안 전국 만 18세 이상 유권자 2513명을 대상으로 진행됐다. 가면 갈수록 지지율 격차 민주당 지지율은 51.1%로 집계됐고, 국민의힘 지지율은 30.6%로 집계됐다. 이 조사는 지난달 26일부터 27일까지 이틀 동안 전국 18세 이상 유권자 1006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다. 두 조사 모두 무선 자동응답 방식을 활용해 무작위 생성 표집틀을 통한 임의 전화걸기 방법으로 실시했다(자세한 내용은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 홈페이지 참조). 한국갤럽도 비슷한 기간 동안 유사한 조사를 진행했다. 한국갤럽이 발표한 이 대통령 지지율은 65%였다. 정당 지지율은 민주당 46%로 집계됐고, 국민의힘은 19%로 집계됐다. 이 조사는 지난달 24일부터 26일까지 3일 동안 전국 만 18세 이상 유권자 1000명을 대상으로 진행됐다. 두 조사 모두 무작위로 추출된 무선전화 가상번호에 전화 조사원이 인터뷰하는 방식으로 진행됐다(자세한 내용은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 홈페이지 참조). 이 조사 결과들을 놓고 “민주당과 국민의힘 간 지지율 격차가 상당하다”는 평가가 나온다. 이는 지방선거에서 언제나 중요한 승부처로 거론되는 서울시장·경기도지사 선거와 관련해 국민의힘이 인물난을 겪고 있는 현 상황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국민의힘에선 양향자 최고위원·새누리당 함진규 전 의원 등 2명이 경기도지사 선거 출마를 선언했다. 민주당에서 김동연 경기도지사·추미애 의원·한준호 의원이 치열한 경쟁을 하는 것과 대비된다. 이 때문에 국민의힘에선 유승민 전 의원에게 지속해서 출마를 권유했다. 국민의힘으로선 “중도 성향 유권자에게도 설득력이 있다”는 평가를 받는 유 전 의원이 경기도지사 후보로 적임이란 판단을 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유 전 의원은 “국민의힘 의원들이 지난달 윤석열 전 대통령과의 절연을 선언한 이후에도 당의 강경 노선에 큰 변화가 없다”는 인식을 가진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지난달 27일 서해수호의 날 기념식에서 만났던 국민의힘 장동혁 대표의 출마 권유에도 “불출마한다는 생각엔 변화가 없다”면서 끝내 거절했다. 그러자 양 최고위원은 같은날 KBS 라디오 <세상의 모든 정보 윤인구입니다>에 출연해 “정당·국가 운영과 공천은 원칙·절차적 정당성 확보가 중요하다”며 “어떤 분이 제게 ‘절대로 떠밀려서 나오는 선거는 하면 안 된다’고 말했는데, 확실한 소명 의식을 가진 사람이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국민의힘 이정현 전 공천관리위원장은 지난달 30일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공천이 마무리되는 대로 당이 필요로 하는 가장 어려운 곳에서 제 역할을 다할 준비를 하겠다”며 “아무도 가지 않으려는 곳에서 또 다른 역할을 할 것”이라고 썼다. 이는 전남·광주통합특별시장 출마 암시로 해석됐고, “유 전 의원에게도 출마를 간접 압박하는 것”이란 해석도 나왔다. 겹치는 악재에 강경 보수 조직표 의존? 장동혁 지원 유세? 각지 후보들 ‘난색’ 하지만 유 전 의원은 불출마 의사를 바꾸지 않았다. 이 전 위원장은 지난달 31일 “유 전 의원의 뜻을 존중하기로 했다”며 “현재 신청하신 훌륭한 두 분을 포함해 여러 방안을 검토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어 “지방선거 공천이 사실상 완료됐다”며 전남·광주통합특별시장 출마를 선언한 후 사퇴했다. 부산에선 국민의힘 주진우 의원과 부산시장 후보 경선을 치러야 하는 박형준 부산시장이 손영광 울산대 교수를 공동선대본부장으로 임명했다. 손 교수는 윤 전 대통령 탄핵 반대 집회를 주도한 손현보 목사의 아들이다. 이는 박 시장이 직접 지난달 24일 CBS 라디오 <박성태의 뉴스쇼>에 출연해 “손 교수는 역량이 뛰어난 사람이고, 누구의 아들이라고 매도하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고 해명해야 할 정도로 큰 논란이 됐다. 박 시장은 국민의힘 내에서 합리적 보수 이미지가 강한 인물로 평가된다. 손 교수 영입에 대해선 “경선을 앞두고, 부산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가진 대형 교회 조직표를 의식한 것 아니냐”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대구시장 후보 경선에서 공천 배제된 이진숙 전 방송통신위원장에 대해서도 여러 해석이 나오고 있다. 이 전 위원장은 지난달 29일 대구 삼성라이온즈파크에서 진행된 2026 KBO리그 개막전을 방문해 ‘대구시장 예비후보 이진숙’이란 어깨띠를 두르고 시민들에게 인사했다. 이에 대해선 “이 전 위원장이 대구시장 선거에 무소속 출마할 수도 있다”는 관측이 나오고 있다. 반대로 “국민의힘이 이 전 위원장의 공천 자체를 배제한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는 분석도 있다. 국민의힘 나경원 의원은 지난달 24일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이 전 위원장은 정권의 무도함에 맞선 최전선 투사”라며 “대구시장 후보에 현역 의원이 공천되면, 그 지역구 재보궐선거에 이 전 위원장을 공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전 위원장을 경기도지사 후보로 공천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국민의힘 조광한 최고위원은 지난달 26일 기자들을 만나 “이 전 위원장이 경기도지사 후보로도 추천되고 있다”며 “이 전 의원장의 결심 여하에 따라 선택지가 굉장히 다양하다고 본다”고 주장했다. 이 전 위원장은 경기도지사 공천 가능성은 강하게 부정하고 있다. 이 전 위원장은 지난달 25일 <조선일보> 유튜브 채널에 출연해 “경기도지사 출마는 사실상 불가능하다”며 “제 인지도 하나만 달랑 갖고 경기도지사를 하겠다는 건 경기도민에 대한 우롱”이라고 주장했다. 그러자 <경기일보>는 지난달 27일 ‘국힘, 경기지사가 경선 탈락자 처리장이냐’는 제목의 사설을 공개했다. 이 사설엔 “국민의힘 경기도지사 후보 경선에 나선 주자는 중량감·연고성 등이 모두 부족하다는 평가를 받는 2명”이라며 “급기야 대구시장 탈락자 차출설도 나오는데, 이쯤 되면 경기도민 모욕 아니냐”고 비판했다. 낮은 당 지지율과 공천 과정의 잡음이 이어지면서 급기야 지방선거 출마자들이 장 대표의 지원 유세에도 난감해하는 상황도 이어졌다. 유권자에게 “공개적 절윤 선언과 달리 인적 절연이 제대로 안 되고 있다”는 인상을 준 영향이라고 분석되고 있다. 7년 만에 대표 거부 오세훈 서울시장은 지난달 27일 SBS 라디오 <김태현의 정치쇼>에 출연해 “저도 장 대표를 선거 유세에 모시고 싶다”면서도 “변신한 모습으로 와주시면 감사하겠다”고 말했다. 서울시장 선거 출마를 선언한 국민의힘 박수민 의원도 지난달 26일 같은 프로그램에 출연해 “장 대표의 지원 유세는 조금 예민한 문제”라며 “시민 눈높이에서 해결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어 “선거는 후보가 시민이 듣고 싶어 하는 말을 잘 전하는 시민을 위한 시간”이라며 “장 대표는 노선형 정치인이 됐으므로, 정책 선거 현장이 정치 선거로 비화하면 유불리를 떠나 서울시민께 도리가 아니라고 생각한다”고 설명했다. 그러다 논란이 이어지자 지난 1일엔 의견을 바꿔 채널A 라디오 <정치시그널>에 출연해 “저는 국민의힘이 확장해야 한다는 것에 공감대가 확실히 있다고 생각한다”며 “정공법을 선택하겠다”고 말했다. 주요 선거 후보들이 당 대표의 지원 유세에 난감해하는 것은 지난 2018년 지방선거 당시 주요 후보들이 자유한국당 대표였던 홍준표 전 대구시장의 지원 유세를 거부한 상황을 연상시킨다. 낮은 지지율과 혼란을 거듭하는 국민의힘의 현 상황에 대해선 “이미 예고됐던 것”이란 분석이 나온다. 국민의힘은 윤석열 전 대통령이 지난 2024년 12월 비상계엄을 선포한 이후 대규모 집회 개최 및 참여 등 강경 보수 행보를 유지했다. 당시 진행됐던 대규모 집회는 손 목사·전광훈 사랑제일교회 담임목사·유튜버 전한길씨 등이 주도했다. 울림이 큰 방에서 나는 소리는 메아리가 돼 돌아온다. 이는 특정 성향·신념이 일치하는 사람들이 모여 비슷한 정보·주장을 계속 접하면서 그 의견이 굳어지는 현상을 비유하는 데 활용된다. 이를 두고 에코 체임버 현상이라고 한다. 보통은 SNS에서 일어나지만, 최근엔 정치권에서도 구조화되고 있다. 정치인의 관점에서 대규모 집회에서 동원한 인파·우호적인 사이트에서 확인할 수 있는 열렬한 지지는 쉽게 눈에 띈다. 선거에선 이게 독이 되는 경우가 많다. 후보의 캠프에선 이를 유권자의 보편적 정서로 착각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기 때문이다. 아울러 최근엔 당원투표의 비중이 높아지고 있다. 당원의 뜻이 공천에 반영되면, 정당의 민주적 구조가 탄탄해진다. 하지만 조직표 동원 경선이 될 위험이 커진단 치명적인 단점도 있다. 당내 강경파·특정 조직의 관성은 중도층·무당층까지 포함하는 전체 민심과 방향이 다른 경우가 많다. 집권은 불가능 후보도 선거를 치르면서 조직표를 움직이는 지역 토착 세력·강경 지지층을 만나는 과정에서 현장 분위기를 착각한다. 설령 당선되더라도 이들의 포로가 되는 경우가 많다. 이와 같은 확증 편향 현상은 “누구나 현실을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대부분 사람은 자신이 보고 싶은 현실만을 본다”던 고대 로마 정치인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격언이 현재진행형임을 알 수 있게 한다. 조직표는 장단점이 명확하게 나뉜다. 일정한 득표를 보장하는 것은 분명한 장점이다. 하지만 득표 이상의 목표 달성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전형적인 사례는 일본 공명당이다. 공명당은 창가학회란 종교를 배경으로 두고 있다. 덕분에 공명당은 엄청난 조직력을 동원할 수 있다. 창가학회 회원 1명은 강력한 선거운동원이 된다. 그 1명은 주변 지인 모두에게 공명당 선거운동을 한다고 보면 된다. 정치와 종교의 결합이 흔히 발생하는 중요한 원인이다. 일본 자유민주당(이하 자민당)은 공명당과 연정을 하면서 창가학회·공명당의 조직력을 토대로 많은 정치적 이익을 얻었다. 공명당 후보가 출마하지 않는 지역구에선 그 조직력이 고스란히 자민당 후보의 선거 조직이 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공명당은 종교 기반 정당이기 때문에 그 틀을 벗어나긴 어려웠다. 그래서 공명당이 정치적으로 확장할 수 있는 최대치는 집권당의 연정 파트너였다. 공명당과 손을 잡았다고 무조건 선거에서 좋은 결과를 얻는다고 보긴 어렵다. 이는 지난 2월 진행된 제51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이하 중원선)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제1야당 입헌민주당(이하 입민당)은 자민당과 결별한 공명당과 손잡고 ‘중도개혁연합’이란 선거 연대를 구성했다. 하지만 선거 결과는 참혹했다. 입민당·공명당은 원래 총 169석을 보유했지만, 선거 결과 49석만 확보하는 대참패를 당했다. 이 중 입민당이 확보한 의석수는 21석에 불과했다. 중도개혁연합이 해체되면 각각 28석을 확보한 공명당·국민민주당이 제1야당 반열에 오를 수 있을 정도의 대참패였다. 조직력보다 더 중요한 것은 민심이란 걸 보여준 선거였다. 경기도지사 후보 인물난…유승민은 거듭 고사 손현보 아들 등장·컷오프 이진숙 못 놓는 이유? 절대로 몰락하지 않는 안정적인 하한선을 보유했지만, 상한선·기대치도 낮은 사례로 일본 공명당만 있는 것은 아니다. 성향이 강한 특정 집단을 기반으로 유지되는 정당은 그에 대한 다른 유권자의 거부감 때문에 집권이 불가능하다. 대표적인 사례로는 ▲독일 좌파당 ▲영국 민주연합당 ▲이스라엘의 샤스·유대교 토라 연합 등을 거론할 수 있다. 독일 좌파당은 독일 통일 이후 구동독 지역 사회주의 통합당 후신이 모여 조직됐다. 따라서 구동독 지역의 고령 유권자·옛 공산당 관료·강성 노동계급 등이 핵심 지지층을 이루고 있다. 이런 연유로 구동독 지역에선 큰 영향력을 행사하지만, 전체 민심과 조화를 이루긴 어렵고, 주요 정당의 연정 파트너로 주로 거론된다. 영국 민주연합당은 북아일랜드 강성 개신교·연합주의자 조직에 기반한다. 이들의 강경한 종교 성향은 잉글랜드·스코틀랜드 등의 정서와 많이 멀다. 따라서 이들도 북아일랜드 지역 정당 겸 주요 정당의 연정 파트너로 거론된다. 지난 2017년엔 영국 보수당이 과반 확보에 실패하자 민주당과 신임 공급 협약을 맺고 정부를 구성할 수 있었다. 이스라엘의 샤스·유대교 토라 연합은 이스라엘 내 극단적인 유대교 원칙주의자들로서 사회적 민폐라고 거론되는 하레디를 기반으로 구성된 정당이다. 이들은 사회적인 활동보다 경전 공부에 몰두한다. 극단적인 일부 하레디는 19세기 생활 양식을 고집하고, 일체 생산 활동을 하지 않면서 정부 보조금에 의존한다. 이들은 출산율이 높아 이스라엘 재정에 부담을 주지만, 이스라엘 내 유대인 인구 비율 유지를 고려하면, 정부가 이들을 지원하지 않을 수 없는 측면도 있다. 이들은 랍비의 지시에 따라 절대적인 투표 성향을 유지한다. 이스라엘의 보수 정당 리쿠드당은 이들과의 연정을 통해 조직표를 동원한다. 일본 자민당은 원래 다양한 성향의 여러 파벌이 모여 구성된 특성을 역설적으로 정권 유지 비결로 활용했다. 총리를 배출하는 회파만 바뀌어도 국정 기조가 바뀌어 유권자에게 정권교체 체감을 주는 유사 정권교체 효과가 발생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난 2월 중의원 의원 선거 대승은 자민당으로서도 기존과 다른 형태였다. ▲다카이치 사나에 총리의 기민한 유튜브·SNS 활용 ▲실용적 포퓰리즘으로 통하는 사나에노믹스 등 다카이치 총리의 개인 팬덤이 강력하게 형성된 것이 승리로 연결됐다. 공명당 등 해외 사례 표면적으로는 국민의힘은 이미 지난 2월에 입증된 자민당의 승리 비결을 외면하고, 공명당의 길을 선택한 것으로 보인다. 주요 후보들이 당 대표 지원 유세에 신중한 반응을 보이는 것 자체가 국민의힘이 ‘더 깊은 늪’에 들어가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는 일면일 수도 있다. 국민의힘은 늪에서 나올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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