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재일 인권변호사 30년 임범부가 밝힌 혐한 실상

“교포 자녀들 다닐 학교가 없다”

[일요시사 취재1팀] 김성민·오혁진 기자 = 일본 내에 만연하는 혐한 문제를 해결하고자 스스로 차별된 삶을 자처한 남자가 있다. 현재 사단법인 ‘북한 귀국자의 기억을 기록하는 회’ 회원이자 오사카변호사회 임원인 임범부 변호사다. 재일동포 3세인 그는 일본 영주권을 갖고 있지만, 여전히 한국인이다. 출세의 길을 마다하고, 한국 이름 석자를 포기할 수 없어 귀화를 포기했다.

일본 내 외국인 변호사로 활동하는 임범부 변호사는 차별받지 않기 위해 남다른 삶을 살고 있다. 30여년간 헤이트 스피치(증오 표현), 혐한 시위 피해자 등을 위해 싸운 임 변호사는 북한 인권 실태 알리기에 나섰다. 

한마음
한뜻으로 

1959년 12월, 재일조선인은 배를 타고 북한으로 건너가기 시작했다. 당시 북한과 일본 정부가 공동으로 추진한 ‘재일조선인 북한 귀국사업’은 고향 땅으로 돌아가기 위한 취지였다. 다만, 북한이 고향이 아닌 사람들도 많았다. 1984년까지 재일동포와 그 일본인 가족 9만3000여명은 당시 부유했던 북한으로 갔다.

쌍수 벌려 환영한 북한 정권은 귀국 비용을 전부 부담했다. 

귀국자들이 북한서 어떤 삶을 살았는지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 북한 귀국자의 기억을 기록하는 회(이하, 기억기록회)는 재일동포와 일본인으로 구성된 단체로 변호사, 기자 등 다양한 직업의 사람들로 구성돼있다. 이들은 귀국사업 당시 북한으로 갔다가 탈북해 한국이나 일본에 사는 ‘귀국자’들을 쫓아 그들의 이야기를 기록하는 프로젝트를 수행했다.


지난달 17일 <일요시사>는 임 변호사가 운영하는 ‘한맘 법률사무소’를 방문하기 위해 오사카 니시텐마 지역으로 향했다. 빌딩숲이 일렬로 늘어선 이곳은 오피스 타운으로, 오사카 직장인의 근무환경을 엿볼 수 있었다. 화려한 간판 대신 법무법인, 유통회사 등이 자리를 잡았고, 일부 식당엔 외국어 메뉴판조차 흔치 않았다.

관광 수요를 만족시키는 여느 일본 지역들과 달리 다소 삭막하다는 인상을 주기에 충분했다. 한맘 사무소를 겨우 찾아 들어서자 한글 서적이 빼곡히 나열된 책장이 보였다. 괜히 반가운 기분마저 들었다. 푸근한 인상을 주는 임 변호사는 환한 미소와 함께 “반가워요”라며 취재진을 맞이했다.

“지금도 환영받지 못하는 우리 민족”
차별에 맞선 재일교포 3세 고군분투 

임 변호사는 지난 2015년 직원들에게 한국을 비하하는 내용을 교육해 논란을 빚은 주식회사 ‘후지주택’과 맞서기 위해 소송을 제기한 재일교포 직원을 변호했다. 당시 교육자료엔 ‘한국인은 야생동물’ ‘재일 한국인은 죽어라’ 같은 한국 혐오 문구가 실려있었다.

또 위안부 강제연행은 거짓말이라면서 실제로는 높은 급여를 받고 호화 생활을 했던 매춘부라고 역사를 왜곡하기도 했다. 

후지주택은 이 같은 내용의 자료를 수백 차례에 걸쳐 배포하고, 직원들에게 감상문까지 요구했다. 의뢰인이 문제를 제기하고 교육을 거부하자 후지주택은 3000만원을 줄 테니 회사를 그만두라고 제안했다. 결국 지난 2015년 소송을 제기했고, 임 변호사는 함께 싸웠다.

일본 법원은 5년 만인 지난 2020년 후지주택이 ‘모욕과 차별적 대우를 받을 수 있다는 두려움을 느끼게 했다’며 110만엔, 우리돈 약 1100만원을 의뢰인에게 위자료로 지급하라고 결정했다. 하지만 직원 개인을 향한 차별은 아니었다며 청구한 위자료의 30분의 1만 인정했다.


당시 임 변호사는 국내 언론과의 인터뷰서 “‘위안부는 없다’거나 ‘식민지 지배는 없다’든가 그렇게 주장하는 일본 회의와 (창업자가) 접촉한 것 같다”며 “일본 재판의 한계다. 일반적으로 한국 사람은 안 좋다, 나쁘다, 추악하다고 하는 건 개인이나 법인을 상대로 한 공격이 아니기 때문에 손해가 생겼다고 볼 수 없다고 판단한다”고 주장했다.

후지주택 측은 당시 판결로 자유를 침해당했다며 즉각 항소하기도 했다. 사측은 “사원 교육을 할 때도 회사에 재량이 있고, 경영자에게는 표현의 자유가 있는 것”이라고 반박했다.

혐오 발언에 벌금을 부과하는 조례가 시행됐지만, 일본 곳곳서 혐한 움직임은 지속됐다. 대부분 혐한 시위 참가자들은 “(일본 정부가)왜 일본인보다 외국인을 우선해서, 생활보호도 받지 못하는 일본인이 피해를 보느냐”는 입장이다. 

창씨개명 잔재 여전
재일코리안 몸부림 처절

혐한에 맞서 싸우던 임 변호사가 북한 인권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변호사를 시작할 때부터였다. 대학 시절 임 변호사는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이하, 조총련) 산하에 기업인 금강보험주식회사 등에 취업을 시도하는 학생들을 봐왔다.

1980년대만 해도 북한은 남한과 경제 수준이 비슷했고, 조총련 산하 기업은 차질 없이 운영됐기에 일본 국적으로 귀화하지 않은 재일교포들에게 유일한 희망이었다. 당시만 해도 재일교포가 일본 기업에 입사한다는 것은 ‘하늘에 별따기’였기에 이력서에 출신을 숨기기도 했다. 

임 변호사는 “우수한 성적의 학생들도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대도시 진출은 어려웠다”며 “일본서 태어났지만, 한국 이름을 가졌다는 이유로 생계를 걱정해야 할 만큼 차별을 받았다”고 토로했다.

그러면서 “당시만 해도 북한 귀국사업에 대해 자세히 몰랐지만, 북한에 살다가 일본이나 한국으로 돌아온 귀국자들이 하나둘 늘어나면서 그들이 얼마나 고생했는지 뒤늦게 알게됐다”며 “지금도 일본서 귀국자들은 제대로 된 직업을 갖지 못해 어렵게 살고 있다”고 말했다.

‘재일조선인 북한 귀국사업’은 1959년에 처음으로 시작됐다. 해방 후 재일조선인은 일본 복지제도서의 배제, 사회적 차별과 억압, 가난 등으로 힘겨운 삶을 살고 있었다. 당시 자유주의 진영에 속한 일본과 공산주의 진영에 속한 북한은 우호적인 관계가 아니었다.

그러나 재일조선인을 북한으로 보내고 데려가는 문제에 있어서는 양쪽의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지는 부분이 있었다.

북한은 전후 사회와 경제를 복구하는 데 많은 노동력이 필요했고, 일본 정부에 재일조선인은 골치 아픈 존재였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체결된 샌프란시스코 조약으로 재일조선인은 일본 국적을 상실했는데, 일본 정부는 이들을 추방할 수도 없었지만 일본 국적을 부여해 부양하고 싶지도 않았다.

현지 대기업 입사 포기하고 외길 
재일코리안 변호사협회 회장 역임


북한과 일본 정부의 협상은 급물살을 탔고 조선인이나 북한을 지지하는 사람 중 희망자를 북한으로 보내는 ‘귀국사업’이 시작됐다. 조총련은 재일교포들에게 북한의 사회주의 복지제도의 우수성을 선전하면서 귀국을 독려했다. 그렇게 9만3340명이 이 사업을 통해 북한으로 건너간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재일교포 6.5명당 1명이 북한으로 건너간 것이다.

이렇게 귀국하게 된 9만여명 중 많은 이산가족이 발생했고, 북한으로 간 사람들의 생사나 행방을 알 수 없는 경우가 상당수에 이르렀다. 기억기록회는 2018년부터 이들 중 총 50명을 만났고, 한 사람당 평균 8시간의 심층 인터뷰를 진행했다.

취재를 종합하면, 귀국자들의 삶이 고되고 힘들었다는 것이었다. 귀국자들은 일본 내에서의 차별을 북한서도 겪었다. 심지어 일본과는 비교할 수 없는 극심한 생활고가 그들의 삶을 고통스럽게 했다.

실제로 취재진이 오사카 야오시서 만난 귀국자 A씨는 북한서 고위급 간부로 살다가 지난 2010년경 아내와 두 자녀, 손주들과 함께 탈북했다. 1960년경 귀국사업을 통해 북한으로 건너간 그는 량강도 혜산시서 목재가공공장을 운영하며 제법 부유하게 살았다.

당시 일본서 도요타 자동차를 수입해 “최룡해를 비롯한 장성들이 손님을 맞이한다며 빌려가기도 했다”고 한다. 


하지만 1994년 김일성 사망 이후 김정일이 제2대 최고 지도자 자리에 올라 북한을 통치하더니 GDP는 (UN 통계 기준) 이전 해인 1993년 107억달러서 83억달러로 떨어졌고, 북한 주민들도 경제 빈곤을 몸소 느끼게 됐다고 한다.

재일코리안
몸부림 처절

이후 1995년 48억달러로 기존의 30% 수준으로 폭락하다 못해 GDP가 문자 그대로 초기화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북한 주민들은 김정일과 당이 자신들의 삶을 책임지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게 됐고, 배급제에 의존할 수 없어 장마당을 통해 생계를 유지하게 됐다. 김정은은 북한 경제의 시장화 움직임을 막기 위해 2009년 화폐개혁을 실시하고 연장 차원서 장마당을 금지시켰으나 대실패로 막을 내려 북한의 내수 경제를 완전히 파탄 상태로 몰고 갔다.

김일성 시절부터 최빈국 수준이었던 북한의 경제는 김정일 시기에 재기불능의 극빈국 수준으로 떨어졌다. 

경제가 어려워지자 당은 A씨에게 수시로 트집을 잡아 외화를 벌어오라고 강요했다. 김일성대학교를 나온 장남은 평양에 입성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째포(재일교포를 비하하는 단어)’라고 차별받으며 변방을 맴돌았다. 또 재일교포 출신이라는 이유로 불순 선전물을 수시로 검사하러 오자 A씨 가족은 견디다 못해 탈북을 결심했다.

A씨와 같은 귀국자들의 고초를 접하게 된 임 변호사는 기억기록회서 활동할 결심을 하게 됐다고 한다.

임 변호사는 사회적 지위를 얻었지만, 직접적인 차별을 당하기도 했다. 지난 2008년 1월 오사카가정법원은 이혼과 상속 문제 등을 중재하는 가사조정위원으로 추천된 임 변호사에 대해 공권력을 행사하는 국가공무원으로서 일본 국적이 필요하다는 점을 선임 거부 사유로 밝혔다.

북한 인권 문제 깊숙이 관심
평양 입성해도 변방 맴돌아

조정위원은 지방법원과 가정법원이 일반 응모자와 변호사회 추천을 받은 변호사를 후보자로 선고한 후 최고재판소가 임명하는 비상근 공무원으로, 최고재판소의 임명 기준에는 국적 제한이 없다. 재일교포 변호사가 국적을 이유로 조정위원 선임에 거부당한 것은 2003년 고베 가정법원 이후 2007년 9월 센다이 가정법원과 도쿄 간이재판소, 그해 12월 고베 가정법원에 이어 다섯 번째 사례다.

임 변호사는 “조정위원은 변호사회가 추천한 변호사를 가정법원이 명부에 싣고, 그 명부에 실린 변호사 중에서 최고재판소가 선임하는 것”이라며 “대한민국 국적 변호사도 변호사회의 추천을 받아 명부에 기재되지만, 최고재판소가 선임하지 않는다. 태어나고 자란 일본 사회서 배제됐다는 생각에 착잡하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대한민국 국적 변호사도 파산관재인이나 상속재산관리인으로는 선임된다. 둘 다 남의 재산을 관리 처분하는 강력한 권한을 행사하는데 조정위원은 그런 일을 안 하고 당사자 간에 합의가 이뤄지도록 설득하고 유도하는 역할을 할 뿐”이라고 덧붙였다.

임 변호사는 귀화를 거부하고 소신을 지킨 것에 대해 “대한민국 국적은 태어나서부터 저절로 갖는 것이지만, 그 속은 나이를 거듭하면서 힘들게 손에 넣어온 것으로 가득하기 때문에 평생 손 놓을 수가 없는 소중한 것”이라고 답했다.

그는 민족교육의 중요성에 대해 “일본에 한국어를 제대로 배울 수 있는 학교가 없다. 조선학교는 북한 교육을 시켜 보내기 힘든데, 한국학교도 조선학교도 아닌 코리아국제학원이 오사카에 생겼지만 규모는 작다”고 말했다.

재일교포 자녀들은 주로 일본학교를 다니고, 오사카서 민족학급으로 민족교육을 시키지만 부족한 상황이다. 민족교육은 각 가정의 노력에 달린 문제라는 의미다.

한편, 임 변호사는 1963년 오사카와 나고야 중간에 있는 이가우에노라는 시골마을서 태어나 오사카시립대학을 졸업하고 1994년 변호사 활동을 시작했다. 재일교포 변호사들이 모인 ‘재일코리안변호사협회(Lawyers Association of ZAINICHI Koreans, 이하 LAZAK)’의 전 회장이며, NPO법인 코리아인권생활협회 대표이사를 맡고 있다.

귀화 거부
소신 지켜

실제로 협회는 서적 출판, 학습회 개최, 재일코리안의 인권에 관한 소송 지원, 재일코리안을 비롯한 재일외국인의 인권옹호를 위한 각종 의견서 및 성명 발표, 심포지엄 개최 등을 진행하고 있다. 현재도 유엔 인종차별철폐위원회에 NGO 보고서를 제출하는 등 인종차별, 인권보호 등에 앞장서고 있다. 이에 지난 2007년 12월 재일코리안의 인권옹호에 이바지함을 인정받아 대한민국 국가인권위원회로부터 대한민국인권상을 받았다. 


오사카 = <smk1@ilyosis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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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곡점’ 의정 갈등 엔드게임

‘변곡점’ 의정 갈등 엔드게임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구성원의 압도적인 지지로 당선된 수장이 반년 만에 끌려 내려왔다. 막말에 가까운 강한 발언과 제멋대로인 행보가 탄핵을 불렀다. 강성 수장이 물러나면서 변화를 기대하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대화의 문이 열릴 것인가, 더 높은 벽이 쌓일 것인가. 임현택 대한의사협회(이하 의협) 전 회장이 3년 임기를 다 채우지 못하고 탄핵당했다. 지난 5월 취임 이후 6개월 만으로 의협 역사상 2번째, 최단기간 내 불명예 퇴진한 회장이 됐다. 첫 번째는 2014년 4월 임기 1년여를 앞두고 탄핵당한 노환규 전 회장이다. 두 번째 최단기간 의협은 지난 10일 오후 서울 용산구 의협회관서 임시대의원총회를 열고 임 전 회장의 불신임안을 처리했다. 참석 의원 224명 가운데 170명(75.9%)이 찬성했다. 반대는 50명, 기권 4명이다. 전체 대의원 249명 가운데 224명(91.1%)이 표결에 참여했다. 의협 정관에 따르면, 회장 불신임안은 제적 대의원 3분의 2 이상이 출석하고, 출석 대의원 3분의 2 이상이 찬성하면 가결된다. 지난 3월 임 전 회장은 선거서 유효 투표수 3만3084표 중 2만1646표를 받아 당선됐다. 65.43%의 압도적인 지지다. 의협 회장 선거는 정부의 의대 정원 증원 발표로 의정 갈등 수위가 높아지고 있을 무렵에 치러졌다. 전공의가 병원을 떠났고 정부가 ‘2000명’을 강조하던 시기였다. 의협 회원들은 강성 중의 강성으로 분류되는 임 전 회장에게 힘을 실었다. 임 전 회장의 어깨에 너무 힘이 들어갔던 것일까? 임 전 회장의 언행은 사사건건 도마 위에 올랐다. SNS에 올린 글, 공식 석상서 했던 발언 등이 막말 논란으로 번졌고, 단식투쟁 등의 행보는 ‘쇼’라는 비판을 받았다. 무엇보다 박단 대한전공의협의회(이하 대전협) 비대위원장과 갈등을 빚으면서 의료계 내부 분열을 조장한다는 지적이 뼈아팠다. 임 전 회장이 8개월 동안 보여준 모습은 고스란히 탄핵 사유가 됐다. 의협 회원 사이에서는 임 전 회장이 SNS로 막말과 실언을 해 의사단체의 명예를 훼손했다는 비판이 일었다. 또 ‘임 회장이 전공의 지원금을 빼돌렸다’는 허위 비방 글을 올린 시도의사회 임원에게 고소 취하 대가로 1억원을 요구한 사실이 녹취록을 통해 알려져 논란이 불거졌다. 특정 인물에 대한 수위 높은 비판은 여론의 역풍을 불렀다. 장상윤 대통령실 사회수석을 겨냥해 “정신분열증 환자 같은 개소리”라고 비난하는 글을 올렸다가 환자를 비하했다는 지적을 받았다. 임현택, 6개월 만에 탄핵당해 막말 논란·의대 증원 못 막아 또 2021년 한 의사가 80대 환자에게 ‘맥페란’ 주사제를 투여한 뒤 부작용이 나타나 기소된 재판에 대해서도 도 넘는 발언을 쏟아냈다. 이른바 ‘맥페란 재판’ 항소심서 판사가 1심의 금고 10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은 해당 의사의 항소를 기각하자 “이 여자 제정신입니까?”라는 글을 SNS에 올린 것이다. 임 전 회장의 발언에 법원은 이례적으로 “재판장의 인격에 대한 심각한 모욕일 뿐 아니라 국민의 신뢰를 크게 훼손할 수 있는 매우 부적절한 행동”이라고 공개적으로 유감을 표명했다. 의대 정원 증원 집행정지와 관련해 기각·각하 결정을 내린 재판장이 ‘회유’받았을 것이라는 주장으로도 입길에 올랐다. 서울고등법원 재판부가 결정을 내린 다음 날 한 라디오 프로그램에 출연해 재판장의 실명을 거론하면서 “지난 정권에서는 고법 판사들이 차후 승진으로 법원장으로 갈 수 있는 그런 길이 있었는데 제도가 바뀐 다음에는 그런 통로가 막혀서 이분이 아마 어느 정도 대법관에 대한 회유가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있다” 말했다. 서울고법은 법원 명의로 입장문을 내고 “해당 단체장의 아무런 객관적 근거가 없는 추측성 발언은 재판장의 명예와 인격에 대한 심대한 모욕”이라면서 “사법부 독립에 관한 국민의 신뢰를 현저히 침해할 수 있는 매우 부적절한 언사다. 깊은 유감을 표명한다”고 밝혔다. 여기에 결정적으로 정부의 2025학년도 의대 증원을 막지 못한 점, 간호법 제정을 저지하지 못한 점이 탄핵 사유로 꼽혔다. 임 전 회장은 총회를 앞두고 의사 회원들에게 사과하고 페이스북 계정을 삭제하는 등 재신임을 호소했지만 반전은 없었다. 회장을 탄핵한 의협은 비대위원회 체제로 전환하고 지난 13일 새로운 회장 선거 전까지 단체를 이끌 비대위원장을 뽑았다. 그 결과 박형욱 대한의학회 부회장이 1차 투표서 총 유효 투표수 233표 중 123표(52.8%)를 얻어 과반으로 당선이 확정됐다. 임기는 내년 1월 차기 회장이 선출될 때까지다. 뒤늦게 호소했지만… 박형욱 비대위원장은 “정부는 의료 파탄이란 시한폭탄을 장착해놨다”며 “정말 대화를 원한다면 정부는 먼저 시한폭탄을 멈춰야 한다. 그래야 진정한 대화가 가능하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비대위원들의 합의에 기초해 입장과 행동을 결정할 것”이라며 “비대위 운영서 소외돼왔던 전공의들과 의대생들의 견해가 충분히 반영될 수 있게 하겠다”고 소감을 밝혔다. 임 전 회장이 물러나고 새로운 비대위원장이 등장하면서 의협의 투쟁 방향에 변화가 생길 가능성이 커졌다. 일각에서는 의협의 이번 행보를 의정 갈등의 중요한 변곡점으로 보고 있다. 강성 회장을 필두로 정부와 강하게 대립했던 이전 모습서 벗어나 대화에 참여할 것이라는 의견과 이전보다 더 수위 높은 대정부 투쟁이 예상된다는 의견으로 갈리는 중이다. 후자의 배경에는 대전협이 있다. 앞서 박단 비대위원장 등 전공의 70여명은 전날 의협 대의원들에게 “비대위원장으로 박형욱 교수를 추천한다”는 메시지를 보내 공개 지지 의사를 드러냈다. 대의원회서도 박단 비대위원장의 공개 지지에 대해 경고하는 등 잡음이 일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대전협의 지지를 등에 업은 박형욱 비대위원장이 당선되면서 전공의의 영향력이 상대적으로 커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됐다. 의협과 대전협의 공조가 본격화될 것이라는 관측이 나오는 이유다. 문제는 양측의 교류가 정부와의 대화로까지 이어질 수 있느냐는 점이다. 박형욱 비대위원장은 당선 소감부터 정부의 태도 변화를 요구하고 나섰다. 또 윤석열 대통령의 변화도 필요하다고 언급했다. 의정 갈등서 줄곧 선봉에 선 전공의들은 ‘의대 정원 증원 백지화’라는 요구사항서 앞으로도 뒤로도 움직인 적이 없다. 전공의의 행보는 의대생, 의대 교수 등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영향력 커진 전공의 단체 의료계가 전공의 중심으로 굴러가고 있는 셈이다. 실제 대전협은 지난 11일 출범했던 여야의정협의체(이하 협의체)에 대해서도 부정적인 태도를 보인다. 협의체는 야당인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이 불참하고 의료계에서는 학술 단체인 대한의학회와 의대 학장 모임인 한국의과대학·의학전문대학원협회(KAMC)만 참석하는 등 ‘반쪽 출범’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협의체의 운영 기한은 올해 말까지로, 다음 달 22~23일 전에 의미 있는 결과를 낼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는 태도다. 하지만 박단 비대위원장은 협의체에 대해 ‘무의미하다’고 평가했다. 그는 협의체가 첫발을 뗀 11일 SNS에 “국민의힘 한동훈 대표는 전공의와 의대생, 당사자 없이 대화나 하겠다는 한가한 소리를 하고 있다”며 “한 대표는 2025년 의대 모집 정지와 업무개시명령 폐지에 대한 입장부터 명확히 밝히시길 바란다”고 일갈했다. 이어 “눈치만 보며 뭐라도 하는 척만 하겠다면 한동훈의 ‘여야의정 협의체’ 역시 임현택 전 의협 회장의 ‘올바른 의료를 위한 특별위원회(올특위)’와 결국 같은 결말일 것”이라고 우려했다. 올특위는 의료계의 입장을 하나로 모으기 위해 의협 주도로 구성한 범의료계 특별위원회다. 전공의와 의대생이 해당 위원회에 불참하면서 파행 운영되다 지난 7월 해체됐다. 정부는 협의체서 의료계가 제안한 내용에 대해 “진정성 있게 검토하겠다”는 견해를 밝혔다. 지난 11일 협의체서 의료계는 한국의학교육평가원 자율성 보장, 추가 합격 제한 등을 통한 2025학년도 의대 선발 인원 축소 등을 제안한 것으로 알려졌다. 정윤순 보건복지부 보건의료정책실장은 지난 14일 의사 집단행동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이하 중대본) 회의를 주재하면서 “마주 앉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린 만큼 활발한 대화와 소통을 통해 누적된 갈등을 해소하고 신뢰를 회복해 국민이 원하는 결과를 끌어낼 수 있길 기대한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의협과 전공의 등 다른 의료계 단체의 참여를 호소했다. 박단 공개 지지 새 비대위원장 강경 투쟁이냐 VS 노선 변화냐 의료계 내부 상황은 크게 바뀌었지만 향후 상황은 여전히 ‘시계 제로(0)’ 상태다. 임 전 회장과 박단 비대위원장 간 갈등의 불씨도 여전히 살아있다. 대전협은 임 전 회장의 탄핵을 공개적으로 요청하는 등 ‘(임 전 회장과)같이 갈 수 없다’는 뜻을 분명히 밝힌 바 있다. 실제 대전협은 임 전 회장의 탄핵을 요청하면서 “이해와 소통이 가능한 새로운 회장을 필두로 의협과 대전협 두 단체가 향후 상호 연대를 구축할 수 있길 기대한다”는 입장문까지 냈다. 임 전 회장의 탄핵안 가결 직후 박 비대위원장이 “결국 모든 길은 바른 길로”라는 내용의 SNS 글을 올리기도 했다. 문제는 임 전 회장이 박단 비대위원장을 상대로 반격을 진행하고 있다는 점이다. 임 전 회장은 탄핵 사흘 만에 닫았던 페이스북 계정을 다시 열고 “박단과 그 뒤에서 박단을 배후 조종해 왔던 자들이 무슨 일을 해왔는지 전 의사 회원들에게 아주 상세히 밝히겠다”며 박단 비대위원장을 저격하는 글을 올렸다. 그러면서 “의협 대의원회 비대위원장과 의협 회장 선거가 더 이상 왜 필요한가”라면서 “박단이 의협 회장 겸 비대위원장을 맡아 모든 권한과 책임하에 의료 농단을 해결하면 된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지지해주셨던 모든 분에게 우선 사과의 말씀을 드린다”며 “이유가 어떻든 회장 취임 전부터 탄핵하겠다고 마음먹고 있던 자들에게 빌미를 주어 넘어간 것 자체가 제 잘못”이라고 주장했다. 또 의협의 근본적인 개혁의 첫걸음으로 의협 대의원회 폐지 등을 내용으로 하는 민법상의 사원총회를 개최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사원총회는 민법에 규정된 사단법인의 최고의사결정 기관이다. 의협 최고의결기구로 알려진 대의원총회보다 상위에 있고 정관의 규정으로 폐지할 수 없다. 사원총회는 이사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경우나 총 사원 5분의 1 이상이 회의의 목적 사항을 제시해 청구하는 경우 소집될 수 있다. 반격 시작 내부 갈등? 올해 2월 시작된 정부와 의료계의 갈등이 10개월째로 접어들었다. 온갖 말이 오갔지만 되짚어보면 조금도 좁혀지지 않은 평행선 상황이 계속되는 모양새다. 정부와 의료계의 대치 상황이 길어질수록 ‘의료 붕괴’는 가시화되고 있다. 한 의료계 관계자는 이렇게 말했다. “이제는 정말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jsjang@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