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엄 문건’ 조현천 봐주기 의혹

꽉 막힌 ‘윗선’ 뚫기

[일요시사 취재1팀] 오혁진 기자 = ‘계엄 문건’ 의혹의 중심에 선 조현천 전 기무사령관에 대한 검찰 수사가 더디다. 해외 도주 후 입국한 지 석 달이 됐으나 추가 소환조사조차 없다. 김관진 전 국방부 장관을 포함한 ‘윗선 수사’가 활발해질 것이라던 관측은 저물었다. 일각에선 대통령실이 김 전 장관을 품으면서 검찰도 손쉽게 발걸음을 떼지 못하는 게 아니냐는 분석도 제기되고 있다.

“실체적 진실을 밝히고 책임질 게 있다면 책임지기 위해 귀국했다.” ‘계엄 문건’ 의혹의 핵심 인물인 조현천 전 기무사령관이 지난 3월 말 해외로 도주했다가 5년 만에 귀국해 한 말이다. 그의 갑작스러운 귀국을 두고 정권이 바뀐 게 배경이라는 관측이 무성했다. ‘솜방망이 처벌’을 기대한 걸까? 실제 조 전 사령관을 향한 검찰의 칼끝은 녹이 슬어가고 있다.

해외 도주 후
5년 만에 왜?

검찰은 지난 3월 인천공항 입국장서 조 전 사령관의 신병을 확보하고 멈췄던 수사를 재개했다. 자유총연맹 회장 선거 동향을 보고받고 박근혜 전 대통령 지지 관제 집회를 열게 한 혐의로 조 전 사령관을 재빠르게 기소했다. 그러나 계엄 문건 작성 혐의는 현재까지 제자리걸음 상태다.

군·검 합동수사단은 2018년 당시 계엄 문건 수사 개시 반년도 채 되지 않아 성과를 냈었다. 수사단은 기무사 요원들이 “비상사태로 보기 어려운 상황서 병력을 동원해 집회 시위 등 국민 기본권과 입법·행정·사법·언론 기능을 제한하는 계엄 문건을 작성했고, 문건의 상당 내용이 기무사 직무범위로 보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수사단은 한민구 당시 국방부 장관, 청와대 안보실장이던 김관진 전 장관 등 주요 인사들과의 공모 여부 등을 입증하기 위해 조 전 사령관 본인 조사가 꼭 필요하다며 수사를 잠정 중단해왔다.


<일요시사> 취재를 종합하면 수사단으로부터 바통을 이어받은 서울서부지검 형사5부는 조 전 사령관에 대한 소환조사를 단 한 차례도 진행하지 않았다. 관련자들에 대한 수사도 잠잠하다. 법조계에선 조 전 사령관의 귀국이 ‘윗선 수사’의 물꼬를 틀 것이라는 관측과는 정반대의 상황이 연출되고 있다.

정권이 바뀌면서 ‘계엄 문건’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인식도 사그라들고 있다. 국방부를 담당하는 100기무부대장 출신 민병삼 전 대령은 최근 언론 인터뷰서 “기무사의 ‘계엄령 검토 문건’은 단순 검토 문건이었지만 정치적으로 악용돼 기무사가 해편되는 사태까지 이르렀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기자들과의 만남에선 “계엄이 발령됐을 때 기무사가 해야 할 일에 대해 검토한 것”이라며 “1년에 2번 하는 검토다. 문제가 되면 파기했을 텐데, (문제가 없어)나중에 활용할 목적으로 정식으로 (시스템에 비밀로)등재했다”고 말했다.

계엄 문건 사건은 단순히 조 전 사령관만의 문제가 아니다. 그를 고리로 박 전 대통령, 황교안 전 국무총리, 김 전 장관, 한 전 장관 등 박근혜정부의 주요 인사 여럿이 얽혀 있다. 이들 모두 수사단의 수사 대상에 올랐었다.

귀국 석 달…추가 수사 지지부진
갑자기 김관진 품은 정부 비호?

조 전 사령관의 귀국 직전 국민의힘 국가안보문란실태조사 태스크포스(TF)는 계엄 문건과 관련해 문재인정부의 송영무 전 국방부 장관, 이석구 전 기무사령관, 임태훈 군인권센터 소장 등을 검찰에 고발했다. 국민의힘 측은 계엄 문건이 단순 검토보고서여서 불법성이 없다는 점을 알면서도 기무사가 내란음모를 꾸민 것처럼 송 전 장관 등이 조작했다고 주장했다.

눈에 띄는 건 국민의힘 TF에 소강원 전 기무사 참모장도 민간위원으로 참여했었다는 점이다. 그는 조 전 사령관의 지시로 계엄 문건 작성에 관여해 합수단의 수사를 받았다. 조 전 사령관이 귀국하면서 그도 다시 수사 대상이 됐다.


소 전 참모장은 지난해 7월 TF의 1차 회의서 “과거 기무사 참모장 시절 초유의 대통령 탄핵이라는 사태를 앞두고 국방부 장관의 지시에 따라 검토한 계엄령 사안에 대해 쿠데타 등 정치적 몰이를 하는 것을 보고 너무 가슴이 아팠다”고 밝혔다.

계엄 문건 작성을 내란음모죄로 처벌할 수 있을지를 두고는 다툼의 여지가 남아있다. 다만 조 전 사령관은 문건 작성 과정서의 허위공문서 작성 및 행사, 기무사의 정치 관여 활동, 기무사 자금 유용 등 혐의로 기소될 가능성이 크다.

또 수사단은 수사 당시 조 전 사령관의 자금 사용처가 담긴 ‘장부’도 확보한 것으로 알려졌다. 앞서 기무사는 2017년 2~3월 8쪽 분량의 ‘전시 계엄 및 합수업무 수행방안’과 여기에 딸린 67쪽짜리 ‘대비계획 세부 자료’를 작성했다.

박정부 인사
여럿이 얽혀

2016년 12월 국회가 박 전 대통령의 탄핵소추안을 가결한 데 이어 헌법재판소의 탄핵심판 선고를 앞둔 시점이었다. 문건에는 탄핵 선고 이후 전망되는 상황이 서술돼있다. 여기에는 ▲대규모 시위대의 청와대·헌재 진입 및 점거 시도 ▲화염병 투척 등 과격양상 심화 ▲사이버상의 유언비어 난무 ▲집회·시위 전국 확산 등이 핵심이다.

중요시설과 광화문·여의도 등 집회 예상 지역 2곳에 기계화사단 6개, 기갑여단 2개, 특전사 6개 이상 등 병력을 배치하는 계획도 담겼다. 언론 보도를 통제하고 국회의 계엄 해제 시도를 무력화하는 방안도 구체적으로 문건에 포함됐다.

내란음모가 성립하려면 2명 이상이 계획을 실행에 옮긴다는 구체적인 합의와 실질적인 위험성이 인정돼야 한다. 계엄 문건이 실제 실행을 위한 계획이라는 점도 입증돼야 한다. 수사단의 수사 결과 계엄 문건이 실행을 위해 작성됐다고 볼 수 있는 정황은 이미 여러 차례 확인됐다.

우선 기무사는 계엄 문건 작성 과정서 TF를 구성했는데, ‘미래 방첩수사 업무체계 발전방안 연구’로 계엄 문건과는 전혀 무관한 이름이다. 이 TF로 인사명령을 내고 예산도 책정했다. 부대원들은 인터넷과 인트라넷이 연결되지 않은 별도의 컴퓨터로 작업했다.

TF 운영 종료 후 컴퓨터 하드디스크를 초기화했다. 이는 계엄 문건 작성을 은폐하기 위해 비밀리에 움직였다고 의심할 수 있는 대목이다.

또 계엄 문건의 본래 제목은 언론에 공개된 ‘전시계엄 및 합수업무 시행방안’이 아니라 ‘현 시국 관련 대비계획’이었던 것으로 파악됐다. 조 전 사령관은 2017년 2~3월 계엄 문건서 ‘계엄임무 수행군’으로 편성된 20사단장과 8사단장을 만나기도 했다.

내란음모
처벌 가능?

기무사는 2017년 5월10일 문재인 대통령 취임 당일에 해당 문건을 온라인시스템에 훈련 비밀로 등재하려 했으나 실제 행동으로 옮기지는 않았다. 수사단은 문건을 훈련비밀로 등록하면 훈련 때 다른 부대원들이 열람할 수 있기 때문에 문건의 존재가 탄로날까봐 우려했다고 판단했다.


박근혜정부 청와대가 문건 작성에 관여했을 가능성을 보여주는 정황도 나왔다. 계엄 문건은 육군참모총장이 계엄사령관을 맡도록 했다. 그러나 현행 계엄 관련 계획에는 군령권을 가진 합참의장이 계엄사령관 역할을 수행토록 한다고 돼있다. 계엄 문건에는 국회가 계엄 해제를 시도했을 때 체포 등 대응하는 방안도 들어 있다.

국회 재적의원 과반의 찬성으로 계엄 해제를 요구하면 대통령은 이를 따라야 한다.

그런데 계엄 문건 작성에 앞선 2016년 10월 김 전 장관은 국방비서관실 소속 행정관에게 북한 급변 사태를 가정해 계엄을 선포하는 방안 등을 검토하도록 지시했다. 행정관은 계엄사령관을 육군참모총장으로 지정하는 방안, 국회의 계엄 해제 요구에 대응하는 방안 등도 김 전 실장에게 보고했다.

특히 육군본부 작전과도 2017년 2월 육군참모총장이 계엄사령관이 되는 방안을 검토하기도 했다. 조 전 사령관도 부하 간부에게 “계엄사령관을 육군참모총장으로 하고 국회가 계엄 해제를 건의할 경우 국회를 해산하는 방안에 대해서도 검토하라”는 취지의 지시를 내렸다.

수사단은 이 지시가 실제 계엄 문건에 실제 반영됐다는 진술을 확보하기도 했다. 조 전 사령관은 2016년 11월~2017년 2월 모두 네 차례 청와대를 방문했다. 세 번은 김 전 장관을 만나 대북 관련 보고 등을 한 것으로 파악됐다.

현재까지 계엄 문건과 관련해 재판에 넘겨진 기무사 실무진들은 “장관이 현 위중한 상황을 고려해 위수령과 계엄 절차를 검토하라고 지시했다” “장관이 그림을 그릴 수 있도록 도와줘야 한다고 했다”고 한 전 장관을 배후로 지목했다.


조 전 사령관 역시 미국서 보낸 우편 진술서를 통해 “한민구 장관의 구체적 지시에 따라 위수령과 계엄을 검토했다”고 진술했다고 검찰이 밝힌 바 있다. 실제로 국방부 장관은 계엄 선포 건의 권한을 갖고 있기도 하다.

국힘 TF 활동하던 소강원 유죄 판결
조, 기소 넘어 집유 이상 가능성 ↑

그러나 한 전 장관은 2018년 검찰 조사에서 “당시 국회서 위수령에 대한 질의를 두 번 받았는데 일관된 답변을 하지 못해, 전반적으로 검토시키려고 한다고 했다. 그러자 조현천이 그 얘길 듣고 먼저 ‘그럼 저희도 검토해보겠다’고 말했고, 그래서 ‘그럼 한 번 해보라’고 했을 뿐”이라고 진술했다.

둘 중 한 사람은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조 전 사령관은 실무진에게 정치인 가택연금 상황과 계엄 선포 뒤 발생할 20여 가지 상황을 상정하고, 심지어 수도권 군부대 통제계획까지 작성 지침을 주고 계엄 문건을 작성시켰다. 당시 국회서 질의한 이철희 전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과거 <시사인>과의 인터뷰서 “위수령을 폐지할 의지가 있는지를 물었는데, 민간을 상대로 군을 동원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지 검토했다는 얘기”라고 황당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1차 수사에서 검찰은 조 전 사령관의 청와대 방문 당시 김 전 장관을 만나거나 박 전 대통령으로부터 직접 지시를 받은 것 아니냐는 의혹을 해소하지 못했다. 김 전 장관은 계엄 문건을 보고받은 적도 없어 관련이 없다고 진술했다.

검찰 수사가 더디지만 조 전 사령관이 기소를 넘어 유죄 판결을 받을 가능성이 크다는 게 법조계의 시각이다. 재판부가 계엄 문건 핵심 인물로 분류되는 소 전 참모장에 대해 유죄를 선고했기 때문이다. 법조계에 따르면 지난 2월 서울서부지법은 소 전 참모장에 대해 군사법원의 무죄 판결을 깨고 유죄, 벌금 1000만원을 선고했다.

소 전 참모장은 “간첩 대응 방안을 연구하는 TF를 만들었다”며 예산을 타냈는데, 재판부는 “계엄 문건의 위법 가능성을 알고 조직을 숨기려 했다”고 판단했다. 어느 부대가 시위대를 통제할지, 국회 반발은 어떻게 막을지 검토한 것 모두 직무를 벗어난 위법이라고 봤다.

조 전 사령관의 책임도 분명히 했다. 2심 재판부는 “사령관 지시에 따라 ‘계엄 문건’ TF가 구성·운영됐다”며 “문건을 사령관에게 네 차례 보고했고 사령관이 3차례 수정 보완을 지시했다”고 밝혔다. 또 정권교체 뒤 계엄령 검토 문건을 훈련 비밀인 척 급조해 은폐한 부분도 사실로 인정했다.

“피하긴
힘들 것”

소 전 참모장은 대법원에 상고했다가 돌연 취하면서 판결이 확정됐다. 함께 기소된 부하 1명은 군사법원 판결이 대법원서 확정됐고, 예편한 대령 1명은 현재 민간법원서 항소심 재판이 진행 중인 것으로 파악됐다. 소 전 참모장은 세월호 유족 사찰 혐의로도 유죄 판결을 받고 지난 2월 법정 구속됐다.

판사 출신 한 변호사는 “1심 군사법원 판단이 2심서 뒤집히는 경우는 드물다”며 “사실관계와 법리가 일치한다는 검찰의 판단을 인정한 것이다. 판결문에까지 조 전 사령관의 책임 문제가 적시된 만큼 조 전 사령관이 유죄를 피하기는 힘들 것으로 보인다”고 내다봤다.

<hounder@ilyosisa.co.kr>

 



배너






설문조사

진행중인 설문 항목이 없습니다.


‘변곡점’ 의정 갈등 엔드게임

‘변곡점’ 의정 갈등 엔드게임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구성원의 압도적인 지지로 당선된 수장이 반년 만에 끌려 내려왔다. 막말에 가까운 강한 발언과 제멋대로인 행보가 탄핵을 불렀다. 강성 수장이 물러나면서 변화를 기대하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대화의 문이 열릴 것인가, 더 높은 벽이 쌓일 것인가. 임현택 대한의사협회(이하 의협) 전 회장이 3년 임기를 다 채우지 못하고 탄핵당했다. 지난 5월 취임 이후 6개월 만으로 의협 역사상 2번째, 최단기간 내 불명예 퇴진한 회장이 됐다. 첫 번째는 2014년 4월 임기 1년여를 앞두고 탄핵당한 노환규 전 회장이다. 두 번째 최단기간 의협은 지난 10일 오후 서울 용산구 의협회관서 임시대의원총회를 열고 임 전 회장의 불신임안을 처리했다. 참석 의원 224명 가운데 170명(75.9%)이 찬성했다. 반대는 50명, 기권 4명이다. 전체 대의원 249명 가운데 224명(91.1%)이 표결에 참여했다. 의협 정관에 따르면, 회장 불신임안은 제적 대의원 3분의 2 이상이 출석하고, 출석 대의원 3분의 2 이상이 찬성하면 가결된다. 지난 3월 임 전 회장은 선거서 유효 투표수 3만3084표 중 2만1646표를 받아 당선됐다. 65.43%의 압도적인 지지다. 의협 회장 선거는 정부의 의대 정원 증원 발표로 의정 갈등 수위가 높아지고 있을 무렵에 치러졌다. 전공의가 병원을 떠났고 정부가 ‘2000명’을 강조하던 시기였다. 의협 회원들은 강성 중의 강성으로 분류되는 임 전 회장에게 힘을 실었다. 임 전 회장의 어깨에 너무 힘이 들어갔던 것일까? 임 전 회장의 언행은 사사건건 도마 위에 올랐다. SNS에 올린 글, 공식 석상서 했던 발언 등이 막말 논란으로 번졌고, 단식투쟁 등의 행보는 ‘쇼’라는 비판을 받았다. 무엇보다 박단 대한전공의협의회(이하 대전협) 비대위원장과 갈등을 빚으면서 의료계 내부 분열을 조장한다는 지적이 뼈아팠다. 임 전 회장이 8개월 동안 보여준 모습은 고스란히 탄핵 사유가 됐다. 의협 회원 사이에서는 임 전 회장이 SNS로 막말과 실언을 해 의사단체의 명예를 훼손했다는 비판이 일었다. 또 ‘임 회장이 전공의 지원금을 빼돌렸다’는 허위 비방 글을 올린 시도의사회 임원에게 고소 취하 대가로 1억원을 요구한 사실이 녹취록을 통해 알려져 논란이 불거졌다. 특정 인물에 대한 수위 높은 비판은 여론의 역풍을 불렀다. 장상윤 대통령실 사회수석을 겨냥해 “정신분열증 환자 같은 개소리”라고 비난하는 글을 올렸다가 환자를 비하했다는 지적을 받았다. 임현택, 6개월 만에 탄핵당해 막말 논란·의대 증원 못 막아 또 2021년 한 의사가 80대 환자에게 ‘맥페란’ 주사제를 투여한 뒤 부작용이 나타나 기소된 재판에 대해서도 도 넘는 발언을 쏟아냈다. 이른바 ‘맥페란 재판’ 항소심서 판사가 1심의 금고 10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은 해당 의사의 항소를 기각하자 “이 여자 제정신입니까?”라는 글을 SNS에 올린 것이다. 임 전 회장의 발언에 법원은 이례적으로 “재판장의 인격에 대한 심각한 모욕일 뿐 아니라 국민의 신뢰를 크게 훼손할 수 있는 매우 부적절한 행동”이라고 공개적으로 유감을 표명했다. 의대 정원 증원 집행정지와 관련해 기각·각하 결정을 내린 재판장이 ‘회유’받았을 것이라는 주장으로도 입길에 올랐다. 서울고등법원 재판부가 결정을 내린 다음 날 한 라디오 프로그램에 출연해 재판장의 실명을 거론하면서 “지난 정권에서는 고법 판사들이 차후 승진으로 법원장으로 갈 수 있는 그런 길이 있었는데 제도가 바뀐 다음에는 그런 통로가 막혀서 이분이 아마 어느 정도 대법관에 대한 회유가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있다” 말했다. 서울고법은 법원 명의로 입장문을 내고 “해당 단체장의 아무런 객관적 근거가 없는 추측성 발언은 재판장의 명예와 인격에 대한 심대한 모욕”이라면서 “사법부 독립에 관한 국민의 신뢰를 현저히 침해할 수 있는 매우 부적절한 언사다. 깊은 유감을 표명한다”고 밝혔다. 여기에 결정적으로 정부의 2025학년도 의대 증원을 막지 못한 점, 간호법 제정을 저지하지 못한 점이 탄핵 사유로 꼽혔다. 임 전 회장은 총회를 앞두고 의사 회원들에게 사과하고 페이스북 계정을 삭제하는 등 재신임을 호소했지만 반전은 없었다. 회장을 탄핵한 의협은 비대위원회 체제로 전환하고 지난 13일 새로운 회장 선거 전까지 단체를 이끌 비대위원장을 뽑았다. 그 결과 박형욱 대한의학회 부회장이 1차 투표서 총 유효 투표수 233표 중 123표(52.8%)를 얻어 과반으로 당선이 확정됐다. 임기는 내년 1월 차기 회장이 선출될 때까지다. 뒤늦게 호소했지만… 박형욱 비대위원장은 “정부는 의료 파탄이란 시한폭탄을 장착해놨다”며 “정말 대화를 원한다면 정부는 먼저 시한폭탄을 멈춰야 한다. 그래야 진정한 대화가 가능하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비대위원들의 합의에 기초해 입장과 행동을 결정할 것”이라며 “비대위 운영서 소외돼왔던 전공의들과 의대생들의 견해가 충분히 반영될 수 있게 하겠다”고 소감을 밝혔다. 임 전 회장이 물러나고 새로운 비대위원장이 등장하면서 의협의 투쟁 방향에 변화가 생길 가능성이 커졌다. 일각에서는 의협의 이번 행보를 의정 갈등의 중요한 변곡점으로 보고 있다. 강성 회장을 필두로 정부와 강하게 대립했던 이전 모습서 벗어나 대화에 참여할 것이라는 의견과 이전보다 더 수위 높은 대정부 투쟁이 예상된다는 의견으로 갈리는 중이다. 후자의 배경에는 대전협이 있다. 앞서 박단 비대위원장 등 전공의 70여명은 전날 의협 대의원들에게 “비대위원장으로 박형욱 교수를 추천한다”는 메시지를 보내 공개 지지 의사를 드러냈다. 대의원회서도 박단 비대위원장의 공개 지지에 대해 경고하는 등 잡음이 일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대전협의 지지를 등에 업은 박형욱 비대위원장이 당선되면서 전공의의 영향력이 상대적으로 커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됐다. 의협과 대전협의 공조가 본격화될 것이라는 관측이 나오는 이유다. 문제는 양측의 교류가 정부와의 대화로까지 이어질 수 있느냐는 점이다. 박형욱 비대위원장은 당선 소감부터 정부의 태도 변화를 요구하고 나섰다. 또 윤석열 대통령의 변화도 필요하다고 언급했다. 의정 갈등서 줄곧 선봉에 선 전공의들은 ‘의대 정원 증원 백지화’라는 요구사항서 앞으로도 뒤로도 움직인 적이 없다. 전공의의 행보는 의대생, 의대 교수 등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영향력 커진 전공의 단체 의료계가 전공의 중심으로 굴러가고 있는 셈이다. 실제 대전협은 지난 11일 출범했던 여야의정협의체(이하 협의체)에 대해서도 부정적인 태도를 보인다. 협의체는 야당인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이 불참하고 의료계에서는 학술 단체인 대한의학회와 의대 학장 모임인 한국의과대학·의학전문대학원협회(KAMC)만 참석하는 등 ‘반쪽 출범’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협의체의 운영 기한은 올해 말까지로, 다음 달 22~23일 전에 의미 있는 결과를 낼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는 태도다. 하지만 박단 비대위원장은 협의체에 대해 ‘무의미하다’고 평가했다. 그는 협의체가 첫발을 뗀 11일 SNS에 “국민의힘 한동훈 대표는 전공의와 의대생, 당사자 없이 대화나 하겠다는 한가한 소리를 하고 있다”며 “한 대표는 2025년 의대 모집 정지와 업무개시명령 폐지에 대한 입장부터 명확히 밝히시길 바란다”고 일갈했다. 이어 “눈치만 보며 뭐라도 하는 척만 하겠다면 한동훈의 ‘여야의정 협의체’ 역시 임현택 전 의협 회장의 ‘올바른 의료를 위한 특별위원회(올특위)’와 결국 같은 결말일 것”이라고 우려했다. 올특위는 의료계의 입장을 하나로 모으기 위해 의협 주도로 구성한 범의료계 특별위원회다. 전공의와 의대생이 해당 위원회에 불참하면서 파행 운영되다 지난 7월 해체됐다. 정부는 협의체서 의료계가 제안한 내용에 대해 “진정성 있게 검토하겠다”는 견해를 밝혔다. 지난 11일 협의체서 의료계는 한국의학교육평가원 자율성 보장, 추가 합격 제한 등을 통한 2025학년도 의대 선발 인원 축소 등을 제안한 것으로 알려졌다. 정윤순 보건복지부 보건의료정책실장은 지난 14일 의사 집단행동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이하 중대본) 회의를 주재하면서 “마주 앉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린 만큼 활발한 대화와 소통을 통해 누적된 갈등을 해소하고 신뢰를 회복해 국민이 원하는 결과를 끌어낼 수 있길 기대한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의협과 전공의 등 다른 의료계 단체의 참여를 호소했다. 박단 공개 지지 새 비대위원장 강경 투쟁이냐 VS 노선 변화냐 의료계 내부 상황은 크게 바뀌었지만 향후 상황은 여전히 ‘시계 제로(0)’ 상태다. 임 전 회장과 박단 비대위원장 간 갈등의 불씨도 여전히 살아있다. 대전협은 임 전 회장의 탄핵을 공개적으로 요청하는 등 ‘(임 전 회장과)같이 갈 수 없다’는 뜻을 분명히 밝힌 바 있다. 실제 대전협은 임 전 회장의 탄핵을 요청하면서 “이해와 소통이 가능한 새로운 회장을 필두로 의협과 대전협 두 단체가 향후 상호 연대를 구축할 수 있길 기대한다”는 입장문까지 냈다. 임 전 회장의 탄핵안 가결 직후 박 비대위원장이 “결국 모든 길은 바른 길로”라는 내용의 SNS 글을 올리기도 했다. 문제는 임 전 회장이 박단 비대위원장을 상대로 반격을 진행하고 있다는 점이다. 임 전 회장은 탄핵 사흘 만에 닫았던 페이스북 계정을 다시 열고 “박단과 그 뒤에서 박단을 배후 조종해 왔던 자들이 무슨 일을 해왔는지 전 의사 회원들에게 아주 상세히 밝히겠다”며 박단 비대위원장을 저격하는 글을 올렸다. 그러면서 “의협 대의원회 비대위원장과 의협 회장 선거가 더 이상 왜 필요한가”라면서 “박단이 의협 회장 겸 비대위원장을 맡아 모든 권한과 책임하에 의료 농단을 해결하면 된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지지해주셨던 모든 분에게 우선 사과의 말씀을 드린다”며 “이유가 어떻든 회장 취임 전부터 탄핵하겠다고 마음먹고 있던 자들에게 빌미를 주어 넘어간 것 자체가 제 잘못”이라고 주장했다. 또 의협의 근본적인 개혁의 첫걸음으로 의협 대의원회 폐지 등을 내용으로 하는 민법상의 사원총회를 개최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사원총회는 민법에 규정된 사단법인의 최고의사결정 기관이다. 의협 최고의결기구로 알려진 대의원총회보다 상위에 있고 정관의 규정으로 폐지할 수 없다. 사원총회는 이사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경우나 총 사원 5분의 1 이상이 회의의 목적 사항을 제시해 청구하는 경우 소집될 수 있다. 반격 시작 내부 갈등? 올해 2월 시작된 정부와 의료계의 갈등이 10개월째로 접어들었다. 온갖 말이 오갔지만 되짚어보면 조금도 좁혀지지 않은 평행선 상황이 계속되는 모양새다. 정부와 의료계의 대치 상황이 길어질수록 ‘의료 붕괴’는 가시화되고 있다. 한 의료계 관계자는 이렇게 말했다. “이제는 정말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jsjang@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