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인물> 승부수 던진 나경원

윤, 또 골치 아프게 생겼다

[일요시사 취재1팀] 남정운 기자 = 국민의힘 전당대회는 결국 ‘윤심(윤석열 대통령 의중)’을 따라갈까? 당권주자들은 총선 전략보다도 자신이 가진 윤심의 크기를 앞세운다. 여당은 윤심 반영을 위해 룰 변경마저 불사했다. 그런데 산 넘어 산이다. ‘민심’을 넘으니 ‘당심’이 윤심을 막아섰다. 일찍이 정리한 줄 알았던 나경원 전 의원이 줄곧 당심 1위 자리를 수성하고 있다. 나 전 의원은 숱한 견제에도 출마를 강행할 분위기다. 친윤(친 윤석열)계가 ‘닭 쫓던 개’ 신세가 될지도 모를 일이다. 

국민의힘 나경원 전 의원의 당 대표 출마설은 오래전부터 제기돼왔다. 나 전 의원은 국민의힘에 비대위 체제가 들어선 직후 스스로 당권 도전을 시사한 바 있다. 아울러 지난해부터 실시된 당권주자 선호도 여론조사에서 줄곧 상위권에 이름을 올렸다.

판사 출신
보수 중진

일반 국민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는 ‘반윤(반 윤석열)계 핵심’ 유승민 전 의원에게 밀리는 모습을 보였지만, 당 지지층 대상 조사에서는 대부분 1위 자리를 지켜왔다. 국민의힘 전당대회 룰은 변경 전에도 당원 선호도 70%·국민 여론조사 30%였다. 나 전 의원이 다른 당권주자들보다 한발 앞서 있다는 평가를 받았던 이유다.

나 전 의원이 당심에서 높은 지지를 받는 배경에 대해선 여러 분석이 나온다. 우선 나 전 의원은 20년이 넘도록 탈당 없이 국민의힘에서만 4선을 쌓은 중진 정치인이다. 이 때문에 전통적 지지층 사이에서 탈당 전력이 있는 유 전 의원이나 진영을 건너온 안철수 의원보다 선호도가 높다.

당원들 사이에서 나 전 의원이 ‘진짜 보수’로 인식되는 점도 중요한 지점이다. 나 전 의원이 강도 높은 발언을 거리낌 없이 이어오면서 강성 보수 이미지를 구축해왔다. 이 때문에 중도 확장성은 상대적으로 떨어지지만, 열성 당원 사이에서는 ‘사이다’ 발언으로 높은 지지를 얻어왔다.


오랜 정치경력으로 만들어진 높은 인지도나 여당에서는 드문 수도권 출신 중진이라는 점 역시 강점이다. 정치색과는 달리 계파색이 옅어 독자 세력 조직에 난항을 겪을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오지만, 반대로 당내에서 포괄적인 지지세를 얻을 수 있다는 분석도 있다.

이 같은 나 전 의원의 특성은 그가 밟아온 이력에서 잘 드러난다.

나 전 의원은 1963년 서울 영등포구(현 동작구) 노량진동에서 태어났다. 서울에서 학창 시절을 보낸 뒤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에 진학했다. 82학번으로, 조국 전 법무부장관, 원희룡 국토부 장관 등과 동기다. 이후 동 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취득했고,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나 전 의원은 1992년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당시 서울 마포구 서교동의 한 고시원에서 서울대 법대 선배·동기들과 함께 하숙하며 시험을 준비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고시반 대장 역할을 자처했던 이가 윤석열 대통령이다.

윤 대통령은 79학번, 나 전 의원은 82학번으로 두 사람은 3살 터울의 선후배 사이다. 이들은 모두 수험생활이 상대적으로 긴 편으로, 오랜 시간 함께 공부하며 친분을 쌓았다고 한다.

이후 윤 대통령은 검찰 재직 시절 나 전 의원이 17대 총선에 출마하자 “(나 전 의원이)나중에 대선에 출마하면 검사를 그만두고 지지 유세를 해주겠다”고 약속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나 전 의원은 사법연수원을 수료한 뒤 1995년 부산지방법원에 초임판사로 부임했다. 이어 인천지방법원, 서울행정법원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러다가 2002년 제16대 대선 때 판사직을 내려놓으며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 지지를 선언했다. 당시 나 전 의원은 이 후보의 여성특보를 맡아 정계에 입문했다.

2년 뒤인 2004년 제17대 총선에서 한나라당 비례대표 후보로 출마해 당선됐다. 2007년 제17대 대선정국에선 이명박 전 대통령의 대변인을 맡아 대선 승리에 기여했다. 나 전 의원은 이를 계기로 당내 입지를 다지고, 대외적으로는 인지도를 높일 수 있었다. 

‘당심’ 1위지만… ‘윤심’ 없어 고민
“곧 결단” 사실상 출마 결심 굳힌 듯

이듬해엔 18대 총선서 서울 중구에 출마해 재선 고지를 밟으며 당내 유력 여성 정치인으로 부상했다. 일각에서는 나 전 의원을 차차기 대권후보로 꼽을 정도였다. 하지만 계속 탄탄대로를 걸을 것 같았던 그의 정치 행보에도 위기가 찾아왔다.

시작은 2011년 치러진 서울시장 보궐선거였다. 당시 무상급식 주민투표에 직을 걸었던 오세훈 서울시장이 물러나면서, 선거 판세가 이미 기울어진 상태였다. 불리한 상황에서 의원직을 던지고 출마한 나 전 의원은 이변 없이 고 박원순 전 서울시장에게 득표율 약 7%p 차이로 석패했다.

낙선은 어느 정도 예견된 일이었지만, 더 큰 문제는 선거 과정에서 다른 논란들이 함께 불거진 것이었다. 선거캠프 대변인의 음주 방송 논란이 사실로 드러났고, 반대 진영서 주장했던 ‘호화 피부과 의혹’ ‘일본 자위대 창설 기념행사 참여 의혹’ 등에도 내상을 크게 입었다.

결국 이듬해 치러진 제19대 총선에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출마하지 못했다. 한동안 정계와 거리를 두고 변호사 생활에 전념했다.

나 전 의원은 2014년 국회의원 재보궐선거를 통해 정계에 복귀한다. 당시 동작구을 지역구의 현직 의원이었던 정몽준 전 의원이 서울시장에 출마했고, 나 전 의원이 공석을 메우기 위해 낙점됐다. 당시 그는 야권 단일후보로 나선 정의당의 고 노회찬 의원을 상대로 단 1.3%p(929표 차) 앞서는 진땀승을 거뒀다. 

결국 19대 국회에 입성하면서 연속 3선에 성공한 정치인이 됐다. 중진 반열에 올라선 그는 후반기 외교통일위원장을 맡았다.

이후 2016년 치러진 제20대 총선서 연속 4선 기록에 도전했다. 앞서 당선됐던 동작구을 지역구에 다시 출사표를 던졌다. 새누리당은 원내 1당 자리를 빼앗기는 등 고전한 선거였지만, 나 전 의원은 무난하게 4선에 성공했다. 어려운 선거에서 수도권 4선 고지를 밟은 나 전 의원의 정치적 입지는 더욱 커졌다.

이를 바탕으로 원내대표 경선에 두 번 도전하지만, 모두 친박(친 박근혜)계에 밀려 고배를 마셨다. 두 번째 경선은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 정국에서 치러졌다. 이때 나 전 의원이 낙선하면서 친박계가 주도권을 지켜내는 모양새가 연출됐다. 이는 비박(비 박근혜)계 의원들의 집단 탈당 사태를 초래하는 직접적인 계기가 됐다.

나갈 수도
안 나갈 수도


하지만 정작 나 전 의원은 탈당 대열에 합류하지 않아 비판 여론이 일었다. 보수 지지층 일각에선 “나 전 의원이 개인적인 정치적 이득을 취하는 과정에서 대의를 저버렸다”는 비판이 나왔다. 

결국 당적을 지킨 나 전 의원은 2018년 원내대표 경선에 재출마했다. 앞선 선거에서는 친박계에 맞서 낙선했지만, 이때는 오히려 친박계의 지지에 힘입어 무난하게 당선됐다. 나 전 의원은 야당 원내대표로서 여권을 상대로 한 강성 투쟁에 앞장섰다.

하지만 강성 투쟁 일변도 실리를 챙기지 못했고, 중도층 등 지지층 확장에도 실패했다는 비판이 뒤따른다. ‘문빠’ ‘달창’ 등 여권 지지자들을 비하하는 표현을 사용했다가 뒤늦게 사과하는 등 개인적 구설도 잇따랐다.

임기 만료를 앞두고 본인의 재신임 투표를 제안했지만, 황교안 전 대표가 비공개 최고위원회를 긴급 소집해 이를 막았다. 나 전 의원은 자신에게 언질도 주지 않고 재신임 논의를 끝낸 것에 격노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를 기점으로 나 전 의원의 정치 행보는 다시 수난기에 접어들었다. 2020년 제21대 총선에서 5선 도전장을 내밀었지만, 정치 신인급이었던 더불어민주당 이수진 의원에게 밀려 낙선했다. 전반적으로 미래통합당이 참패한 선거이긴 했어도 나 전 의원은 이미 자신이 2번이나 당선된 지역구에서 정치 신인에게 7%p 득표율 차이로 패배했다는 점이 강조되면서 더 큰 굴욕을 맛봤다.

그는 낙선 후 정치권과 잠시 거리를 두는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정치권에서 다시 나 전 의원의 이름이 언급되기 시작했다. 2020년 7월 박원순 서울시장이 임기 중 성추문 의혹을 받고 사망하면서다. 나 전 의원은 서울시장 보궐선거 출마자로 거론됐다.


약 10년 전 서울시장 보궐선거 때는 불리한 구도가 형성돼있었지만, 이때는 반대로 낙승이 예견됐으므로 구미가 당길만한 기회였다. 

‘윤심’ 보다 
‘민심’ 이다?

실제로 나 전 의원은 2021년 1월13일 보궐선거 출마를 공식 선언했다. 하지만 결국 오 시장에게 당내 경선에서 패배했다. 경선 결과 발표 직후 나 전 의원은 “결과에 승복한다. 국민의힘 승리를 위해 끝까지 최선을 다하겠다”고 밝혔다.

나 전 의원은 당시 오 시장의 선거유세 공동선거대책위원장을 맡았다. 아울러 동시에 진행되던 부산시장 선거 지원유세에도 적극적으로 나섰다. 나 전 의원은 2주 동안 총 65회의 후보 지원유세 일정을 소화했다.

나 전 의원은 숨 고를 새도 없이 당권 도전을 선언해 이준석 전 대표와 양강 구도를 형성했다. 민심에서는 이 전 대표가, 당심에서는 나 전 의원이 앞서는 양상이었다. 두 사람은 후보 토론회 등에서 날선 공방을 주고받았다. 하지만 민심은 계속 벌어졌고, 당심은 계속 좁혀졌다.

결국 2021년 6월 전당대회서 이 전 대표에게 6%p 득표율 차이로 밀리며 고배를 마셨다. 전체 70%를 차지하는 당원 득표에서는 아슬아슬하게 1위를 차지했지만, 여론조사의 격차를 끝내 극복하지 못했다.

이로써 나 전 의원은 불과 1년 사이에 치른 세 번의 선거에서 모두 낙선하고 말았다. 정치권 일각에서는 나 전 의원이 정치생명에 치명타를 입었다는 진단이 나왔다. 외연 확장과 중도층 포섭에 난항을 겪는 모습을 잇달아 보이면서 정치인으로서의 한계점을 여실히 드러냈다는 것이다. 

나 전 의원은 전당대회 이후 미국으로 출국하며 대권 레이스와 거리를 뒀다. 이후 당내 경선에서 승리한 윤 대통령이 나 전 의원을 캠프에 참여시킬 것이라는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하지만 나 전 의원은 “선대위에 내 자리가 있는지 없는지 모르겠지만 내 작은 자리라도 내어놓고 싶다”며 “그 자리가 한 표라도 가져올 수 있는 외연 확대를 위한 인사 영입에 사용되길 소망한다”며 거부 의사를 에둘러 밝혔다.

윤정부 출범 전후로는 입각설이 꾸준히 제기됐다. 인수위 출범 초기 외교부 장관 내정설에 이어 문화체육관광부, 중소벤처기업부, 환경부 장관 등의 하마평에 지속적으로 언급됐다. 이어 보건복지부 장관 후보로도 거론됐다. 하지만 약 반 년간 ‘내정설’이 수차례 돌았음에도 실제로 성사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던 중 지난해 10월13일, 나 전 의원은 부총리급인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 부위원장에 내정됐다. 다음 날 바로 임명장이 수여되면서 정식으로 임기를 시작했다. 같은 달 18일에는 기후환경대사에 임명됐다, 불과 나흘 사이에 정부 고위직 두 자리를 얻은 셈이다.

일각에서는 나 전 의원의 갑작스러운 중용 배경을 두고 대통령실의 ‘당권 교통정리’라는 해석이 나왔다. 이른바 윤심을 받는 친윤 주자를 당선시킬 목적으로 다른 유력 주자들을 정리하는 중이라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 나 전 의원은 “(받은 자리가)비상근이기 때문에 어떤 제한이 있지는 않다. 당적을 내려놔야 되는 것도 아니다”라며 “당권과 관련해 배제되거나 배척되지는 않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이 같은 발언은 자리를 받았음에도 당권 도전 의사를 당장 접을 생각은 없다는 의미로 풀이됐다.

게다가 마치 유 전 의원을 겨냥해 변경한 듯한 ‘당원투표 100%’ 선거방식은 당 지지층 선호도 1위를 달리는 나 전 의원에게 큰 호재로 다가왔다.

친윤 파상공세 버티고 당선될까? 
되든 안 되든 막대한 파장 예고

‘동상이몽’ 아래 미묘하게 이어지던 갈등은 이달 초 폭발했다. 지난 5일 나 전 의원이 출산 시 부모의 대출 원금을 탕감하는 ‘헝가리식 저출산 대책’을 제시하자, 대통령실이 “실망스럽다” “납득하기 어려운 부적절한 처사” 등의 표현으로 나 전 의원을 직격했다.

이후 대통령실에서는 나 전 의원을 향해 해촉까지 시사하는 강경 발언을 이어갔다. 아직 시행되지도 않은 정책을 명분 삼아 과도한 비판이 가해진다는 지적이 나왔다. 표면적인 이유는 나 전 의원이 정부와 상의 없이 저출산 대책을 발표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속에는 나 전 의원이 교통정리를 거부하고 당권 행보를 계속 이어간 것에 대한 대통령실의 불만이 깔려 있다는 의혹이 꾸준히 제기됐다.

당 안팎에서는 나 전 의원을 향한 비난이 쏟아졌다. 특히 ‘윤심 후보’로 꼽히는 김기현 의원과  친윤계에서는 “전당대회에 나온다면 ‘제2의 유승민, 이준석’ 프레임으로 정리하는 수밖에 없다”며 나 전 의원을 압박했다. 앞서 이 전 대표는 윤 대통령 및 친윤계 의원들과 극한 갈등을 빚은 끝에 대표직에서 축출된 바 있다.

나 전 의원 입장에선 대통령실의 비토가 상당한 부담으로 작용한다. 만일 나 전 의원이 윤심을 등지고 출마해 당선되더라도 그 이후가 문제일 수도 있다. 계파색이 옅어 세력이 약한 나 전 의원이 사실상 ‘식물 대표’가 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 전 의원은 쉽게 물러날 수 없는 입장이다. 앞선 선거에서 연달아 패배하면서 정치력을 지나치게 소모했기 때문이다. 당심의 큰 지지를 받으면서도 이에 응하지 않는다면 이 또한 정치적 타격으로 돌아올 수 있다. 이번 대표 출마가 나 전 의원이 부활할 마지막 기회라는 시각도 존재한다.

일단 나 전 의원은 저자세 전략을 택했다. 그는 지난 10일 “대통령께 저출산위 문제로 심려를 끼쳐드렸다”며 저출산위 부위원장직 자리를 내려놓겠다는 뜻을 대통령실에 전달했다. 이미 높은 지지율을 확보한 나 전 의원이 대통령과 악화된 관계를 먼저 풀려는 시도를 보여주기만 해도 동정표를 꽤 얻을 수 있다는 계산이다.

이와 관련해 대통령실은 사의는 서면으로 표명해야 한다는 입장 외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자 나 전 의원은 지난 13일 오전 서면 사직서를 제출했다. 이는 대통령실에 사실상 자신의 거취를 조속히 정리해달라고 요구한 것이다. 결국 대통령실은 같은 날 오후 나 전 의원을 저출산위 부위원장과 기후대사 직에서 해임했다.

당초 대통령실은 나 전 의원의 사의를 오는 21일 전에는 받지 않을 방침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이미 깔끔한 정리에 실패한 상황에서, 나 전 의원에게 일방적인 핍박을 가하는 구도가 오래 지속되는 것에 부담을 느낀 것으로 풀이된다.

낙장불입  
절치부심

대통령실 입장에서는 한결 자유로워진 나 전 의원의 출마 가능성이 올라간 점 또한 문제다. 결국 나 전 의원의 출마를 막지 못해 윤심 후보가 낙선한다면, 정권 초기부터 윤 대통령의 당 장악력에 큰 타격이 가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다만 나 전 의원 측은 출마 여부 발표 시점을 윤 대통령의 해외 순방 복귀 시점으로 잡을 것으로 보인다. 이 사이 출마를 결심한다고 하더라도 사직서 제출 직후나 윤 대통령의 해외순방 중 입장을 밝히면 자칫 ‘항명’으로 비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다. 지난 14일 출국한 윤 대통령은 오는 21일 귀국할 예정이다. 


<jeongun15@ilyosis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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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곡점’ 의정 갈등 엔드게임

‘변곡점’ 의정 갈등 엔드게임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구성원의 압도적인 지지로 당선된 수장이 반년 만에 끌려 내려왔다. 막말에 가까운 강한 발언과 제멋대로인 행보가 탄핵을 불렀다. 강성 수장이 물러나면서 변화를 기대하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대화의 문이 열릴 것인가, 더 높은 벽이 쌓일 것인가. 임현택 대한의사협회(이하 의협) 전 회장이 3년 임기를 다 채우지 못하고 탄핵당했다. 지난 5월 취임 이후 6개월 만으로 의협 역사상 2번째, 최단기간 내 불명예 퇴진한 회장이 됐다. 첫 번째는 2014년 4월 임기 1년여를 앞두고 탄핵당한 노환규 전 회장이다. 두 번째 최단기간 의협은 지난 10일 오후 서울 용산구 의협회관서 임시대의원총회를 열고 임 전 회장의 불신임안을 처리했다. 참석 의원 224명 가운데 170명(75.9%)이 찬성했다. 반대는 50명, 기권 4명이다. 전체 대의원 249명 가운데 224명(91.1%)이 표결에 참여했다. 의협 정관에 따르면, 회장 불신임안은 제적 대의원 3분의 2 이상이 출석하고, 출석 대의원 3분의 2 이상이 찬성하면 가결된다. 지난 3월 임 전 회장은 선거서 유효 투표수 3만3084표 중 2만1646표를 받아 당선됐다. 65.43%의 압도적인 지지다. 의협 회장 선거는 정부의 의대 정원 증원 발표로 의정 갈등 수위가 높아지고 있을 무렵에 치러졌다. 전공의가 병원을 떠났고 정부가 ‘2000명’을 강조하던 시기였다. 의협 회원들은 강성 중의 강성으로 분류되는 임 전 회장에게 힘을 실었다. 임 전 회장의 어깨에 너무 힘이 들어갔던 것일까? 임 전 회장의 언행은 사사건건 도마 위에 올랐다. SNS에 올린 글, 공식 석상서 했던 발언 등이 막말 논란으로 번졌고, 단식투쟁 등의 행보는 ‘쇼’라는 비판을 받았다. 무엇보다 박단 대한전공의협의회(이하 대전협) 비대위원장과 갈등을 빚으면서 의료계 내부 분열을 조장한다는 지적이 뼈아팠다. 임 전 회장이 8개월 동안 보여준 모습은 고스란히 탄핵 사유가 됐다. 의협 회원 사이에서는 임 전 회장이 SNS로 막말과 실언을 해 의사단체의 명예를 훼손했다는 비판이 일었다. 또 ‘임 회장이 전공의 지원금을 빼돌렸다’는 허위 비방 글을 올린 시도의사회 임원에게 고소 취하 대가로 1억원을 요구한 사실이 녹취록을 통해 알려져 논란이 불거졌다. 특정 인물에 대한 수위 높은 비판은 여론의 역풍을 불렀다. 장상윤 대통령실 사회수석을 겨냥해 “정신분열증 환자 같은 개소리”라고 비난하는 글을 올렸다가 환자를 비하했다는 지적을 받았다. 임현택, 6개월 만에 탄핵당해 막말 논란·의대 증원 못 막아 또 2021년 한 의사가 80대 환자에게 ‘맥페란’ 주사제를 투여한 뒤 부작용이 나타나 기소된 재판에 대해서도 도 넘는 발언을 쏟아냈다. 이른바 ‘맥페란 재판’ 항소심서 판사가 1심의 금고 10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은 해당 의사의 항소를 기각하자 “이 여자 제정신입니까?”라는 글을 SNS에 올린 것이다. 임 전 회장의 발언에 법원은 이례적으로 “재판장의 인격에 대한 심각한 모욕일 뿐 아니라 국민의 신뢰를 크게 훼손할 수 있는 매우 부적절한 행동”이라고 공개적으로 유감을 표명했다. 의대 정원 증원 집행정지와 관련해 기각·각하 결정을 내린 재판장이 ‘회유’받았을 것이라는 주장으로도 입길에 올랐다. 서울고등법원 재판부가 결정을 내린 다음 날 한 라디오 프로그램에 출연해 재판장의 실명을 거론하면서 “지난 정권에서는 고법 판사들이 차후 승진으로 법원장으로 갈 수 있는 그런 길이 있었는데 제도가 바뀐 다음에는 그런 통로가 막혀서 이분이 아마 어느 정도 대법관에 대한 회유가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있다” 말했다. 서울고법은 법원 명의로 입장문을 내고 “해당 단체장의 아무런 객관적 근거가 없는 추측성 발언은 재판장의 명예와 인격에 대한 심대한 모욕”이라면서 “사법부 독립에 관한 국민의 신뢰를 현저히 침해할 수 있는 매우 부적절한 언사다. 깊은 유감을 표명한다”고 밝혔다. 여기에 결정적으로 정부의 2025학년도 의대 증원을 막지 못한 점, 간호법 제정을 저지하지 못한 점이 탄핵 사유로 꼽혔다. 임 전 회장은 총회를 앞두고 의사 회원들에게 사과하고 페이스북 계정을 삭제하는 등 재신임을 호소했지만 반전은 없었다. 회장을 탄핵한 의협은 비대위원회 체제로 전환하고 지난 13일 새로운 회장 선거 전까지 단체를 이끌 비대위원장을 뽑았다. 그 결과 박형욱 대한의학회 부회장이 1차 투표서 총 유효 투표수 233표 중 123표(52.8%)를 얻어 과반으로 당선이 확정됐다. 임기는 내년 1월 차기 회장이 선출될 때까지다. 뒤늦게 호소했지만… 박형욱 비대위원장은 “정부는 의료 파탄이란 시한폭탄을 장착해놨다”며 “정말 대화를 원한다면 정부는 먼저 시한폭탄을 멈춰야 한다. 그래야 진정한 대화가 가능하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비대위원들의 합의에 기초해 입장과 행동을 결정할 것”이라며 “비대위 운영서 소외돼왔던 전공의들과 의대생들의 견해가 충분히 반영될 수 있게 하겠다”고 소감을 밝혔다. 임 전 회장이 물러나고 새로운 비대위원장이 등장하면서 의협의 투쟁 방향에 변화가 생길 가능성이 커졌다. 일각에서는 의협의 이번 행보를 의정 갈등의 중요한 변곡점으로 보고 있다. 강성 회장을 필두로 정부와 강하게 대립했던 이전 모습서 벗어나 대화에 참여할 것이라는 의견과 이전보다 더 수위 높은 대정부 투쟁이 예상된다는 의견으로 갈리는 중이다. 후자의 배경에는 대전협이 있다. 앞서 박단 비대위원장 등 전공의 70여명은 전날 의협 대의원들에게 “비대위원장으로 박형욱 교수를 추천한다”는 메시지를 보내 공개 지지 의사를 드러냈다. 대의원회서도 박단 비대위원장의 공개 지지에 대해 경고하는 등 잡음이 일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대전협의 지지를 등에 업은 박형욱 비대위원장이 당선되면서 전공의의 영향력이 상대적으로 커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됐다. 의협과 대전협의 공조가 본격화될 것이라는 관측이 나오는 이유다. 문제는 양측의 교류가 정부와의 대화로까지 이어질 수 있느냐는 점이다. 박형욱 비대위원장은 당선 소감부터 정부의 태도 변화를 요구하고 나섰다. 또 윤석열 대통령의 변화도 필요하다고 언급했다. 의정 갈등서 줄곧 선봉에 선 전공의들은 ‘의대 정원 증원 백지화’라는 요구사항서 앞으로도 뒤로도 움직인 적이 없다. 전공의의 행보는 의대생, 의대 교수 등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영향력 커진 전공의 단체 의료계가 전공의 중심으로 굴러가고 있는 셈이다. 실제 대전협은 지난 11일 출범했던 여야의정협의체(이하 협의체)에 대해서도 부정적인 태도를 보인다. 협의체는 야당인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이 불참하고 의료계에서는 학술 단체인 대한의학회와 의대 학장 모임인 한국의과대학·의학전문대학원협회(KAMC)만 참석하는 등 ‘반쪽 출범’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협의체의 운영 기한은 올해 말까지로, 다음 달 22~23일 전에 의미 있는 결과를 낼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는 태도다. 하지만 박단 비대위원장은 협의체에 대해 ‘무의미하다’고 평가했다. 그는 협의체가 첫발을 뗀 11일 SNS에 “국민의힘 한동훈 대표는 전공의와 의대생, 당사자 없이 대화나 하겠다는 한가한 소리를 하고 있다”며 “한 대표는 2025년 의대 모집 정지와 업무개시명령 폐지에 대한 입장부터 명확히 밝히시길 바란다”고 일갈했다. 이어 “눈치만 보며 뭐라도 하는 척만 하겠다면 한동훈의 ‘여야의정 협의체’ 역시 임현택 전 의협 회장의 ‘올바른 의료를 위한 특별위원회(올특위)’와 결국 같은 결말일 것”이라고 우려했다. 올특위는 의료계의 입장을 하나로 모으기 위해 의협 주도로 구성한 범의료계 특별위원회다. 전공의와 의대생이 해당 위원회에 불참하면서 파행 운영되다 지난 7월 해체됐다. 정부는 협의체서 의료계가 제안한 내용에 대해 “진정성 있게 검토하겠다”는 견해를 밝혔다. 지난 11일 협의체서 의료계는 한국의학교육평가원 자율성 보장, 추가 합격 제한 등을 통한 2025학년도 의대 선발 인원 축소 등을 제안한 것으로 알려졌다. 정윤순 보건복지부 보건의료정책실장은 지난 14일 의사 집단행동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이하 중대본) 회의를 주재하면서 “마주 앉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린 만큼 활발한 대화와 소통을 통해 누적된 갈등을 해소하고 신뢰를 회복해 국민이 원하는 결과를 끌어낼 수 있길 기대한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의협과 전공의 등 다른 의료계 단체의 참여를 호소했다. 박단 공개 지지 새 비대위원장 강경 투쟁이냐 VS 노선 변화냐 의료계 내부 상황은 크게 바뀌었지만 향후 상황은 여전히 ‘시계 제로(0)’ 상태다. 임 전 회장과 박단 비대위원장 간 갈등의 불씨도 여전히 살아있다. 대전협은 임 전 회장의 탄핵을 공개적으로 요청하는 등 ‘(임 전 회장과)같이 갈 수 없다’는 뜻을 분명히 밝힌 바 있다. 실제 대전협은 임 전 회장의 탄핵을 요청하면서 “이해와 소통이 가능한 새로운 회장을 필두로 의협과 대전협 두 단체가 향후 상호 연대를 구축할 수 있길 기대한다”는 입장문까지 냈다. 임 전 회장의 탄핵안 가결 직후 박 비대위원장이 “결국 모든 길은 바른 길로”라는 내용의 SNS 글을 올리기도 했다. 문제는 임 전 회장이 박단 비대위원장을 상대로 반격을 진행하고 있다는 점이다. 임 전 회장은 탄핵 사흘 만에 닫았던 페이스북 계정을 다시 열고 “박단과 그 뒤에서 박단을 배후 조종해 왔던 자들이 무슨 일을 해왔는지 전 의사 회원들에게 아주 상세히 밝히겠다”며 박단 비대위원장을 저격하는 글을 올렸다. 그러면서 “의협 대의원회 비대위원장과 의협 회장 선거가 더 이상 왜 필요한가”라면서 “박단이 의협 회장 겸 비대위원장을 맡아 모든 권한과 책임하에 의료 농단을 해결하면 된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지지해주셨던 모든 분에게 우선 사과의 말씀을 드린다”며 “이유가 어떻든 회장 취임 전부터 탄핵하겠다고 마음먹고 있던 자들에게 빌미를 주어 넘어간 것 자체가 제 잘못”이라고 주장했다. 또 의협의 근본적인 개혁의 첫걸음으로 의협 대의원회 폐지 등을 내용으로 하는 민법상의 사원총회를 개최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사원총회는 민법에 규정된 사단법인의 최고의사결정 기관이다. 의협 최고의결기구로 알려진 대의원총회보다 상위에 있고 정관의 규정으로 폐지할 수 없다. 사원총회는 이사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경우나 총 사원 5분의 1 이상이 회의의 목적 사항을 제시해 청구하는 경우 소집될 수 있다. 반격 시작 내부 갈등? 올해 2월 시작된 정부와 의료계의 갈등이 10개월째로 접어들었다. 온갖 말이 오갔지만 되짚어보면 조금도 좁혀지지 않은 평행선 상황이 계속되는 모양새다. 정부와 의료계의 대치 상황이 길어질수록 ‘의료 붕괴’는 가시화되고 있다. 한 의료계 관계자는 이렇게 말했다. “이제는 정말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jsjang@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