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나지 않는 비극’ 순창 패러글라이딩 사고 공방전

  • 김민주 기자 alswn@ilyosisa.co.kr
  • 등록 2022.12.20 09:52:58
  • 호수 140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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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자만 있고 책임자는 없다

[일요시사 취재1팀] 김민주 기자 = 지난 5월11일 전북 순창군에서 패러글라이딩 체험을 하던 50대 A씨가 사망했다. 사고 당시의 CCTV도 분석했지만 지형지물에 가리면서 사망 원인을 밝혀내기는 쉽지 않다. 가족의 사망 외에도 유가족을 슬프게 하는 것이 있다. 패러글라이딩 체험을 관리·감독해야 하는 대상이 모두 책임을 회피하고 있고, 유가족은 여태까지 제대로 된 사과도 받지 못했다. 

패러글라이딩(paragliding)은 낙하산 활강과 행글라이딩의 원리를 포함한 항공 스포츠다. 패러글라이딩의 시작은 등산객이 등산 후에 빠른 하산을 위한 목적으로 시작됐다. 패러글라이딩은 2016년 이후 지금까지 세계에서 가장 많이 즐기는 비행 스포츠 중 하나다.

매년 느는 
안전사고

패러글라이딩 비행 계획을 세울 때 가장 고려해야 할 점은 날씨와 착륙장의 위치다. 패러글라이딩은 열기구 다음으로 장비 내구도가 약해서, 패러글라이딩 비행은 강풍 예보나 비행기 비행 일정이 있으면 바로 취소된다.

착륙장은 패러글라이딩의 저속과 착지라는 특징이 합쳐져 작은 편이라 어디서든 즐길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공터가 있으면 어디서든 착지가 가능하지만 전봇대 및 고압선이 지나가는 곳으론 절대 가면 안 된다. 또 패러글라이딩은 크기가 작아 하늘에서 찾기 힘들다. 이런 이유로 사고가 발생하기 쉽다.

실제로 패러글라이딩은 하늘에서 비행하는 스포츠이기 때문에 위험하다는 인식이 강하다.


하지만 착륙 거리가 짧아 착륙장 위에서 아래 쪽으로 고도를 떨어뜨려도 되고 천천히 직선 비행도 가능하다. 특히 산지가 70%인 한국은 패러글라이딩이 주요 레저 스포츠로 자리 잡아 있어 전국에 착륙장만 100개가 넘는다.

그만큼 패러글라이딩 안전사고도 많이 발생하는 실정이다. 특히 초보자의 경우 상급자 감독과 교육을 충분히 받고 비행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고 무리한 이착륙을 시도하다가 사고가 발생한다.

흔하게 발생하는 패러글라이딩 사고는 ▲착륙을 시도하다가 지나가던 차에 치이거나 ▲비행 중 서로 충돌 ▲착륙 시 고압전선 걸림 등이 있다. 사고가 발생하면 탑승자는 보조 낙하산을 타고 탈출해야 한다.

패러글라이딩 안전사고는 매해 끊이지 않고 발생한다. 국토교통부에 따르면 경량·초경량 안전사고는 2019년 총 6회 발생했는데, 그중 패러글라이딩 사고가 4번 있었다. 2020년 항공 안전사고는 총 9회 발생했고, 이 중 패러글라이딩 사고는 8회였다. 지난해 발생한 경량·초경량 안전사고는 총 11건이고, 이 중 패러글라이딩 사고는 총 8건이었다.

대부분의 항공 레저 안전사고가 패러글라이딩 사고였다.

퇴사 후 회사가 부탁해 체험 진행했는데…
군·업체 모두 책임 회피…교관만 처벌?

통계로 나온 사고는 인명피해가 있는 것만 잡혀 있고, 인명피해가 없는 패러글라이딩 사고까지 조사하면 패러글라이딩 사고가 더 잦을 것이란 분석도 있다. 이처럼 빈번한 사고에도 불구하고 패러글라이딩 안전·관리를 감독해야 할 주체가 책임을 회피하는 경우도 더러 있다.


지난 5월11일 오전7시10분 전북 순창군에서 동력 패러글라이딩을 타던 50대 남성 A씨가 숨지는 사고가 발생했다. A씨는 순창군 유등면의 한 논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경찰과 소방대원은 “논에 패러글라이더가 떨어져 있다”는 목격자의 신고를 받고 현장으로 출동했다. 이들이 현장에 도착했을 때 A씨는 이미 숨진 상태였다. 

해당 동력 패러글라이더 사고는 교관이 동승하지 않은 상태서 일반인이 동력 패러글라이더에 탑승해 벌어졌다. 사고는 당시 언론을 통해 짤막하게 보도됐다. <일요시사>는 사고 당시 교관으로 있었던 B 교관에게 어떤 일이 있었는지 취재했다.

B 교관은 사고 당시 순창군에서 동력 패러글라이딩 체험을 진행하는 M사를 퇴사한 상태였다. M사는 국내 최초로 장애인 액티비티 여행 프로그램을 만들어 판매하는 여행 회사다. 순창군과 M사는 지난해 7월6일 ‘항공레저스포츠 활성화를 위한 업무협약’을 맺고, 순창군은 M사에 패러글라이딩 체험을 할 수 있는 이착륙장 부지를 제공했다.

패러글라이딩 체험을 여행상품에 넣으려면 회사는 항공사업자를 내야 하며 해당 자격증을 보유한 교관도 필수다. 교관은 패러글라이딩 비행 때마다 인근 공항에 비행 승인 신청을 받아야 하며 이·착륙도 돕는다.

B 교관은 비행 전, 인근 공항에 비행 승인 신청을 받았다. 보통 비행 시간은 일출 후와 일몰 전으로 예약돼있었고, 비행 후에는 항상 비행 일지를 기록했다. 비행 일지에는 ▲비행 일자 ▲비행 목적 ▲비행 구간 또는 장소 ▲비행 시간 ▲동승자 ▲기장 등의 정보를 적는다.

사람이
죽었는데…

문제는 사고 당시 B 교관은 M사의 직원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지난해 12월, 국토교통부 항공교통본부 항공교통안전과가 M사에게 “항공사업자가 잘못됐으니 반납하라”고 했던 것이다. 이후 M사 대표는 항공사업자를 반납했다. 

항공사업자가 없으니 M사는 동력 패러글라이딩 체험을 더 이상 진행할 수 없었다. B 교관은 M사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없어졌다. 사직서는 지난 5월2일에 제출됐고 바로 사직 처리됐다.

3일이 지난 뒤 M사는 B 교관에게 전화해 “기존 동력 패러글라이딩 체험은 다 취소했는데, 취소 못한 건이 2개 있다. 이것만 해달라”고 사정했다. 하지만 항공사업자 없이 비행하면 불법이다. B 교관은 “비행하다가 사고가 발생하면 책임져달라”는 조건으로 M사의 부탁을 받아들였다.

5월11일 예약돼있었던 비행은 순조롭게 끝났다. 이날 오전 7시쯤 순창군 마을 이장이 B 교관을 찾아와 “한 명만 더 태워달라”고 부탁했는데 바로 A씨였다. 

B 교관에 따르면 이런 식의 부탁은 흔한 일이었다. 패러글라이딩 체험은 도시가 아니라 시골에 있을 수밖에 없고, 동네서 밉 보일 경우 사업이 어려울 수밖에 없는 구조다. 순창군에는 이장이 14명이나 되고, 대표 이장이 따로 있었다.


속된 말로 이들이 갑이었다. 심지어 이장이 데려온 손님들은 체험비도 받지 않았다.

B 교관은 A씨의 비행을 도왔다. 비행 장소 주위에 강이 있어 구명조끼를 입히고 헬멧도 씌웠다. B 교관 헬멧은 동력 패러글라이더와 4~5m 떨어진 곳에 있었는데 자신의 헬멧을 가지러 간 순간, A씨가 타고 있던 동력 패러글라이더가 이륙했다.

얼마 비행하지 못한 동력 패러글라이더는 인근 논으로 추락했다. B 교관은 추락 장소로 달려가 A씨를 끌어내고 심폐소생술을 실시했지만 이미 사망한 후였다.

알 수 없는
이륙 미스터리

이날 교관도 없이 이륙한 동력 패러글라이더는 추락했고 탑승자는 추락과 동시에 사망했다. B 교관은 “가만히 있었던 동력 패러글라이더가 왜 작동됐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말했다. 동력 패러글라이더는 일반 패러글라이더와 다르게 프로펠러가 장착돼있어 엔진 힘으로 추진력을 얻는 구조다. 덕분에 산이 아닌 평지에서도 패러글라이딩을 즐길 수 있다.

엔진이 장착된 동력 패러글라이더는 자동차처럼 직접 기계를 ‘작동시켜야’ 출발할 수 있다. 비행 장소에는 CCTV가 설치돼있었다. 경찰은 CCTV를 수거해 이날 사고를 조사했지만, 동력 패러글라이더가 이륙하는 순간은 인근 둑에 가려서 보이지 않았다.


항공사고철도조사위원회 관계자 역시 A씨가 탄 동력 패러글라이더가 교관 없이 이륙해버린 것에 대해 의문을 품고 있다.

이런 상황임에도 유가족은 단 한 곳에서도 사과를 받지 못했다. 관리·감독의 주체인 순창군도, M사도 마찬가지였다. 순창군은 모든 책임이 M사에게 있다고 주장하고, M사는 사건 당시 B 교관이 회사에 사직서를 낸 상황이었기 때문에 책임질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순창군 관계자는 “순창군에서 안전사고를 대비해 든 5000만원 보험이 있다. 보험회사에 서류를 접수해보니 이번 사고는 해당이 안 된다고 한다. 그리고 M사와 업무협약서를 쓸 때 안전사고 책임은 M사가 지기로 했다”고 밝혔다. 즉 순창군은 M사와 업무협약을 했지만 어떠한 책임도 지지 않겠다는 것이다.

순창군과 M사의 ‘항공레저스포츠 활성화를 위한 업무협약서’에는 ▲순창군은 항공레저스포츠 운영을 위한 이착륙장 부지 제공 ▲M사는 항공레저스포츠 및 지역관광 활성화를 위해 공동 홍보 및 모객 지원 ▲상호 간 공동발전을 위해 적극 노력 ▲항공레저스포츠 안전을 위해 현장 상황 및 안전기준에 적합한 조치를 취함 ▲항공레저스포츠 사업 운영에 따른 사고 발생 책임은 M사에 있다고 적혀 있다.

항공사업자 반납했는데 영업?
일반인이 혼자 왜 동력 탑승?

협약서 내용에 따르면 이 사고의 책임은 전적으로 M사에 있다. 그러나 이는 기본적으로 순창군이 패러글라이딩 체험에 있어서 안전관리 감독을 소홀히 한 책임이 있기 때문에 민법 제756조에 해당한다. 민법 제756조에는 ‘수인(직접 서명한 문서)이 공동의 불법행위로 타인에게 손해를 가한 때에는 연대해 그 손해를 배상할 책임이 있다’고 기재돼있다.

그렇다면 M사는 어떤 입장일까. <일요시사>는 M사에 전화했지만, M사 측 관계자는 “당시 입사자가 아니어서 잘 모른다. 상사들은 모두 출장 갔다. 언제쯤 출근하는지 알 수 없다”고 답했다. 이후에도 전화를 했지만 받지 않았다.

<일요시사>는 M사 이메일로 지난 5월11일 패러글라이딩 사망사고의 책임 소재에 대해 물었다. M사는 메일을 즉시 확인했지만 답장을 보내지 않았다.

다만 B 교관을 통해 M사의 입장을 들을 수 있었다. B 교관은 “M사는 현재 이미 폐업한 상태고, 내가 단독으로 벌인 일이라며 자신들은 죄가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내가 그 회사에서 일한 것은 비행 일지 기록 등으로 다 나와 있다”며 “내가 책임을 회피하는 것이 아니다. 죄를 받아야지. 그런데 순창군이든, M사든 전부 죄가 없다고 하는 건 너무한 것 아니냐”고 말했다.

유가족은 이번 사고로 인해 황망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유가족 C씨는 “너무 억울하다. 사고가 나고 아무도 우리에게 사과하지 않았다. 장례식에도 찾아오지 않았고, 그저 법대로 하라고만 한다”며 “M사의 수익을 순창군이 어느 정도 가져간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면 순창군도 책임이 있는 것 아니냐”고 토로했다.

폭탄 돌리기
법적 대응

그는 “그런데 모두 교관에게만 책임을 지라고 한다. 사고의 근본 원인은 순창군도 M사도 제대로 된 관리·감독을 하지 않은 것”이라며 “사고가 발생해서 사망자가 생겼다. 피해자는 있는데 가해자는 없는 것”이라고 한탄했다. 이어 “유가족 입장에서 보면 운영주체는 빠지고 직원만 나쁜 사람 된 것 아니냐. M사와 순창군이 이 문제를 책임져야 한다. 두 곳 다 법적으로 하자고 하니, 우리도 법적으로 대응할 것”이라고 답했다.


<alswn@ilyosis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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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엔진 멈춘 3억 마이바흐 미스터리

[단독] 엔진 멈춘 3억 마이바흐 미스터리

[일요시사 취재1팀] 김성민 기자 = 서울 소재 H건설사 대표가 타는 메르세데스 벤츠의 최고급 사양인 마이바흐가 구매한 지 3년 만에 엔진 고장으로 멈췄다. H사 대표 박모씨는 2022년 말 메르세데스벤츠코리아와 한성자동차를 상대로 수리비 및 대차료 지급 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무상 수리해야 한다고 했던 1심 재판부는 급기야 ‘벤츠의 책임이 없다’는 판결을 내렸다. 2019년식 ‘마이바흐 S560 4MATIC’은 2022년 9월13일 오전 11시, 박씨의 운전기사가 서울 용산 한강로를 주행하던 중 계기판에 엔진 경고등이 켜지면서 차체 진동과 함께 엔진이 멈췄다. 곧바로 차량을 한성자동차 성동서비스센터에 입고했으나 진단은 충격적이었다. 침수차 의심 수리 나 몰라라 “엔진 연소실에 물이 들어가 부품이 손상된 것으로 보인다. 침수 차로 의심된다”며 무상 수리가 어렵다는 것이었다. 이에 박씨와 자동차 감정사는 반대 의견을 제시했다. 그날은 폭우나 침수와 무관한 날씨였으며 정상 주행 도중 발생한 차량 고장이었기 때문이다. 원고인 H사는 “벤츠코리아가 제공하는 ‘통합서비스패키지(ISP)’ 보증에 따라 3년 또는 10만km 이내의 결함은 무상 수리 대상”이라고 주장했다. 이에 1심 재판부(서울중앙지법 민사47단독, 2024년 7월23일)는 “침수나 연료 혼유 등 외부 요인으로 단정할 증거가 부족하다. 한성자동차는 ISP 약정에 따라 엔진 결함을 무상 수리해야 한다”며 원고의 손을 들어줬다. 그러면서 벤츠의 수입사인 한성자동차에 대해 월 400만원의 대차료 배상을 명령했다. 법원은 독립 감정인 강대공씨를 지정해 정밀 감정을 실시했다. 강씨의 감정서에는 “침수 차량에서 보이는 오염 흔적이 없다. 냉각수(부동액) 누출 흔적도 발견되지 않았다”며 “엔진 내부 수분은 외부 요인이나 정비 과정에서 유입됐을 가능성이 있다”고 분석했다. 또 추가 사실조회 회신에서도 “혼유(연료 내 수분 혼입) 여부는 감정 범위를 벗어나며, 침수가 아닌 요인으로 인한 수분 유입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밝혔다. 2심(서울중앙지법 제8-3민사부)에서 피고 측은 반격했다. 벤츠코리아의 법률대리인 김성진 변호사(김앤장 법률사무소)는 지난 8월27일 제출한 준비서면에서 “ISP는 차량 ‘결함’이 발견된 경우에만 적용된다. 외부 수분 유입으로 인한 손상은 명백히 예외 사항이며 제조사 귀책이 없는 이상 무상 수리 의무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한성자동차 측(법무법인 세종)도 항소이유서에서 “ISP는 제조상의 하자에 국한된 품질보증 계약이다. 이번 사안은 ‘우발적 손상’으로 보증 대상이 아니다”라고 반박했다. 서울중앙지법 민사8-3부는 지난 9월26일, “한성자동차의 패소 부분을 취소하고, 박씨의 청구를 기각한다”고 판시했다. 2심 판결은 “외부 요인, 제조 결함이 아니”라며 1심을 전면 뒤집은 것이다. 항소심 재판부는 “외부 수분 유입으로 인한 손상은 차량 제조사 귀책 사유에 해당하지 않는다. ISP는 ‘제조 결함’에 한정된 보증이다. 한성자동차의 패소 부분을 취소하고 원고의 청구를 기각한다”고 밝혔다. 즉, 법원은 이 사건을 ‘차체·부품 결함’이 아닌 ‘사용 중 발생한 외부 요인’으로 결론 내린 것이다. 주행 중 경고등 켜지고 진동 후 엔진 스톱 감정 결과 “누수 없음, 외부 수분 가능성” 결국 박씨는 3년에 걸친 법정 다툼 끝에 패소했다. 따라서, 한성자동차는 더 이상 수리 의무를 부담하지 않게 됐으며, H사의 항소도 기각됐다. 이번 재판의 핵심 쟁점은 ‘수분 유입의 원인’이 제조 결함이냐, 외부 요인이냐였다. 법원은 “차체·부품의 결함으로 인한 냉각수 누수가 없었고, 외부 요인 가능성이 더 크다”고 판단했다. 결국, 제조물 책임(PL법)에 따른 보증 범위가 아닌 사용·관리상의 문제로 결론이 난 셈이다. 이번 판결은 ‘결함’의 해석 범위를 좁혀 정의한 사례다. 즉, ‘사용자 과실이 아닌 상황’이라도 차체·부품 자체의 결함이 입증되지 않으면 보증이 적용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자동차 전문가들은 “소비자 입증 책임만 더 무거워졌다”며 “ISP나 제조사 보증이 소비자 보호장치로 설계됐지만, 현실적으로 ‘결함 입증’의 벽이 너무 높다. 이번 판결은 소비자가 과실이 없더라도 제조사 책임을 묻기 어렵다는 선례가 될 수 있다”고 비판했다. 법조계 일각에서는 이번 판결을 “제조물 책임법과 민법상 품질보증의 경계선을 명확히 한 판례”로 평가하고 있다. 박씨의 마이바흐는 결국 엔진을 교체하지 못한 채 3년 동안 방치됐다. 이번 사건은 ‘명차’의 기술력보다 보증 체계의 경계선이 어디까지인지를 가늠케 한 사건이다. 소비자는 결함을 주장할 때 ‘입증의 문턱’을, 제조사는 ‘보증의 한계’를 확인했다. 독일 명차 대명사인 벤츠의 전기차는 해마다 폭발하는 배터리 화재로 뉴스를 장식하고 있다. 전기차뿐만 아닌 내연기관 모델 중에서도 최상위급인 마이바흐조차 원인 모를 엔진 고장으로 멈췄지만, 고객과 3년간 법정 다툼을 이어간 회사로 남겨졌다. 1심선 인정 “무상 수리” 벤츠는 고객과 진행한 재판에선 승소했지만, 우리나라 정부의 제재 착수 대상이 됐다. 공정거래위원회는 전기차에 저가 배터리를 쓰고도 고가 배터리를 쓴 것처럼 허위 광고한 혐의를 받는 벤츠코리아에 대한 제재에 착수했다. 공정위의 최종 판단은 벤츠코리아와 벤츠 전기차 이용자 간 진행 중인 법적 분쟁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칠 전망이다. 해당 저가 배터리는 지난해 인천 청라 아파트 지하 주차장 화재가 시작된 전기차에도 쓰였다. 업계에 따르면 공정위는 지난 8월12일, 벤츠코리아를 표시광고법·공정거래법 위반 혐의로 제재해야 한다는 의견을 담은 심사보고서(검찰 공소장에 해당)를 회사 쪽에 발송했다. 벤츠코리아는 자사의 모든 전기차에 중국 1위 배터리 업체인 시에이티엘(CATL)의 배터리가 장착됐다며 허위 사실을 소비자에게 알린 혐의를 받는다. 제휴사 딜러를 상대로 소비자에게 이런 허위 사실을 설명하라고 교육하는 등 소비자를 부당하게 속여 유인한 혐의도 있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EQE 차주들은 벤츠 본사, 벤츠코리아, 공식 딜러사 한성자동차 등 판매사 7곳, 벤츠파이낸셜서비스코리아 등 리스사 2곳을 상대로 손해배상소송을 제기했다. 벤츠 전기차는 지난해 8월1일 인천 청라국제도시 아파트 지하주차장에서 화재 사고를 일으켰다. 당시 충전 중이던 벤츠 전기차 한 대에서 불이 나 인근 차량 87대가 전소되고 783대가 그을러 38억원에 달하는 재산 피해가 발생했다. 당시 주민 23명은 연기를 마셔 병원으로 이송됐으며 화재로 아파트 14개 동 1581가구의 수돗물 공급이 끊기고, 5개동 480가구가 단전돼 승강기 운행이 중단되는 등 입주민 불편이 극심했다. 한때 주민 수백명이 피신하는 등 ‘도심 대형 전기차 화재’의 대표 사례로 기록됐다. 하지만 경찰은 장기간의 감식 끝에 “정확한 화재 원인을 확인할 수 없다”며 ‘원인 불명’ 결론을 내렸다. 수사 결과, 해당 벤츠 전기차의 배터리는 중국 CATL이 제조한 셀을 벤츠가 직접 조립해 만든 배터리팩으로 확인됐다. 현재 국내에서 판매 중인 벤츠 전기차 대부분(EQE, EQS 등)은 중국 CATL 또는 파라시스(Parasis) 배터리를 탑재하고 있다. 2심에선 “책임 없다” EQA 등 극히 일부 모델에만 LG에너지솔루션, SK온 배터리가 사용된다. 이에 공정위는 화재 발생 이후 벤츠코리아에 대한 직권조사를 시행했다. 공정위는 지난해 9월과 지난 1월에 각각 벤츠코리아 본사와 제휴 딜러사에 대한 현장 조사를 벌여 제재가 필요하다는 결론을 냈다. 공정위는 벤츠코리아 추가 의견서를 받고, 위원회 회의를 열어 최종 제재 여부와 수위를 확정할 예정이다. 표시광고법 위반 시 관련 매출액 최대 2%, 공정거래법 위반 시 최대 4% 내에서 과징금이 산정, 제재 강도가 낮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이다. 공정위 제재 착수에도 벤츠의 콧대는 꺾이지 않았다. 벤츠코리아는 “심사보고서의 결론은 당사의 법률적 판단과는 일치하지 않으며 제기된 혐의는 근거가 없다고 보고 있다”며 “추후 심사보고서 내용을 면밀히 검토한 후, 절차에 따라 의견을 제출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그러면서 “공정위 판단을 존중하지만, 회사의 법률적 판단과는 일치하지 않는다”며 “제기된 혐의는 근거가 없다고 보고 있다”는 공식 입장을 발표해 진통이 예상된다. 벤츠 전기차는 지난해 인천 청라 아파트 지하주차장에서 대형 화재를 낸 데 이어, 최근 수원시에서도 유사한 사고를 일으켜 배터리 안정 논란을 다시 불러일으켰다. 지난 10월5일 경찰과 소방에 따르면, 이날 오전 8시4분경 경기 수원시 권선구의 1800세대 규모 아파트 지하 1층 주차장에 서 있던 벤츠 전기차에 불이 났다. 이 불로 관리사무소 50대 직원이 연기를 마셔 병원으로 옮겨졌으며, 주민 수십여명이 명절 전날 오전 한때 대피하는 소동이 벌어졌다. 이 사고로 벤츠 전기차를 포함해 인근 차량 3대가 불에 탔고, 주차장 내부가 그을려 한동안 입주민 출입이 통제됐다. 소방당국은 ‘지하주차장 차량에서 연기가 난다’는 신고를 받고 출동, 펌프차 등 장비 10여대와 소방관 50여명을 투입해 진화 작업을 벌였다. 화재 발생 20여분 만에 연소 확대를 저지했고, 오전 8시43분경 초진에 성공했다. 이후 잔불 정리와 차량 냉각 작업을 거쳐 오전 10시16분에 완진시켰다. 소방 관계자는 “119 신고가 신속했고 출동 거리가 짧아 초기 대응이 빠르게 이뤄져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었다”고 밝혔다. 법원 ‘결함 아님’ 판결 ‘제재 대상’ 벤츠 편든 재판부 소방대원들은 불이 난 차량을 지상으로 끌어올려 열기를 식히는 등 2차 발화를 막기 위한 안전조치를 이어갔다. 현재까지 파악된 바에 따르면, 화재 당시 차량은 충전 중이었던 것으로 확인됐다. 다만 배터리 결함에 의한 발화인지, 전선 또는 충전기 접속부 문제 등 다른 원인에 의한 것인지는 아직 조사 중이다. 경찰과 소방당국은 국립과학수사연구원과 함께 합동감식을 실시해 배터리팩 손상 여부 및 충전 설비 결함을 중심으로 원인을 조사할 예정이다. 화재 차량은 2023년식 EQA-250 모델로 SK온 배터리가 장착된 것으로 알려졌다. 한편 국내 전기차 등록 대수는 지난 9월 기준, 60만대를 돌파했지만 화재 사고 관련 안전 관리는 미흡한 상태다. 국토교통부는 청라 화재 이후 지하주차장 내 전기차 충전소 안전기준 강화안을 추진 중이지만, 구체적인 방재 설비 기준은 아직 확정되지 않았다. 지방자치단체별 안전관리 강화 조례도 제각각이다. 지속되는 품질 문제에 전기차 관련 허위광고 혐의까지 겹치면서 벤츠의 입지가 좁아지고 있다. 일각에서는 “벤츠코리아 설립 이후 최대 위기”라는 평가도 나온다. 여기에 국내 최대 딜러사인 한성자동차 노조의 파업으로 서비스 품질 저하 문제가 불거지며 브랜드 이미지에도 타격이 예상된다. 연일 터진 사고 이전까지 벤츠는 국내 수입 전기차 시장에서 높은 판매량을 기록했다. 소형 전기 스포츠유틸리티차(SUV) EQA·EQB에 이어 전기 세단 EQE·EQS까지 라인업을 확대하며 시장을 선도했다. 2023년에는 전기차 판매량 9282대를 기록하기도 했다. 그러나 2024년 8월 벤츠 EQE 전기차 화재 사고 이후 분위기는 급변했다. 화재 전 월평균 400대 수준이던 판매량은 사고 이후 절반 이하로 급감했다. 한국수입자동차협회(KAIDA)에 따르면 올해 상반기 벤츠 전기차 판매량은 768대로, 전년 동기(2764대) 대비 72.2% 줄었다. 사고 이후 월 판매량은 100~200대에 그치며 반등 조짐을 보이지 않고 있다. 벤츠의 국내 최대 딜러사인 한성자동차의 노조 파업도 새로운 악재다. 수입차 업계는 딜러사와 벤츠코리아가 별개 법인임에도 불구하고 노조 파업으로 소비자 피해가 커지고 있어 결국 벤츠의 이미지 실추로 이어지고 있다고 분석한다. 추락하는 럭셔리카 한성자동차 노조는 지난 7월 31일부터 무기한 총파업에 돌입했다. 2023년 노조 설립 이후 진행된 3년 연속 파업으로, 사실상 매년 파업을 이어오고 있다. 노조는 구조조정과 차량 할인에 영업사원 인센티브를 활용하는 ‘선수당 할인’ 제도 등에 반발하고 있다. 최근에는 일부 정비 인력까지 준법투쟁에 나서면서 서비스 지연도 발생하고 있다. 실제 차량 정비 예약이 당일 일방적으로 취소되는 사례가 잇따르면서 소비자 불만은 커지고 있다. 이로 인해 “벤츠의 사후 관리 부실은 결국 한성자동차 탓”이라는 비판까지 나온다. <smk1@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