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습기살균제 참사 비하인드 스토리

공격하던 검사들이 방패막이로

[일요시사 취재1팀] 오혁진 기자 = 가습기살균제 참사를 수사하던 검사들이 대형 로펌으로 자리를 옮겼다. 현직 판검사들의 로펌 이직은 문제가 되지 않지만 ‘전관예우’의 씨앗이 되기도 한다. 특히 이들이 이직한 곳은 가습기살균제 참사 가해기업을 변호하는 곳이어서 논란이 일고 있다. SK케미칼과 애경산업 관계자들을 재판에 넘겼던 검사들이 반대로 그들의 방패막이가 된 셈이다.

가습기살균제 가해기업 편으로 해당 사건을 조사하던 검사들이 돌아섰다. 일부 공정거래위원회 간부도 SK케미칼과 애경산업의 변호를 맡았던 로펌으로 이직했다. 피해자들은 애초 사정기관이 가습기살균제 참사에 대한 진상규명 의지가 없었던 것이 아니냐고 비판한다. 지난 10년간 사건 축소·은폐 의혹을 받았던 검찰과 공정위가 애초 가해기업들과 한통속이었다는 주장이다.

검찰·공정위
의지 없었나

서울중앙지검에서 2019년부터 가습기살균제 참사를 수사해 SK케미칼과 애경 간부 여러명을 재판에 넘긴 검사는 최근 법무법인 태평양으로 이직했다. A 변호사는 공정거래와 기업자금, 금융·증권, 중대시민재해 등 사건을 주로 맡고 있다.

대형 로펌들이 지난해 중대재해처벌법 시행에 맞춰 노동과 산업재해 분야에 정통한 검사 출신을 대거 영입했는데 A 변호사의 로펌행 역시 이런 추세와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태평양은 재판에서 두 기업의 변호를 맡았고, SK케미칼과 애경은 지난해 1월 1심에서 무죄판결을 받았다. 이후 2심 재판을 진행 중인 태평양은 지난달 24일 A 변호사를 영입했다. 이 같은 로펌 이직은 불법이 아니다. 검사 시절 담당했던 사건은 원칙적으로 배당하지 않기 때문에 문제될 건 없다.


옥시 한국법인의 존리 대표 등을 수사했던 B 변호사도 지난해 법무법인 광장에 취업했다. B 변호사는 서울중앙지검에서 관련 수사를 맡았고 이직 직전에는 같은 검찰청에서 반부패수사부장으로 근무했다. 광장은 현재 SK케미칼 측의 변호를 맡고 있다.

B 변호사는 2016년 가습기살균제 사건을 맡았다. 당시 광장은 옥시의 피해자 배상 지원 업무에만 관여했다.

그러나 시민단체 일각에서는 가습기살균제 사건을 담당하던 검사들의 로펌 이직으로 가해기업의 입장이 유리해질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한 시민단체 관계자는 “검사 시절 그들이 직간접적으로 정보로 가해기업에 유리한 방향으로 활용될 수 있다”고 분석했다.

시민단체의 이 같은 우려는 이미 일어난 바 있다. SK케미칼과 애경은 2017년 ‘가습기살균제 피해구제법 개정안’의 국회 통과를 저지하려 했다. 사회적참사 특별조사위원회(사참위)에 따르면 협의체를 만든 SK케미칼과 애경은 2017년 10월18일, 11월1일 개정안 저지 대책 및 정부 움직임 등을 논의했다.

협의체는 당시 현재 김앤장에 개정안 내용을 비판하는 의견서 작성을 요청했고 일부 국회의원에게는 법률이 통과되지 않도록 지연시키는 계획을 짰다. 국내 최대 로펌인 김앤장에는 개정안에 대한 반대 논리 개발을 맡기고 국회의원들에게는 로비를 하기로 한 것이다.

실제로 정부는 2017년 9월 가습기살균제 피해자 범위를 확대하기 위해 피해구제법 개정을 추진한다고 발표했으나 개정안은 1년이 지난 2018년 7월에야 국회를 통과했다.

주심 맡던 공정위 위원도 법무법인행
전관·사정기관 출신들 여러 차례 미팅


사참위가 공개했던 협의체 회의록에도 “일부 보수 매체를 선정해 개정안에 대한 비판 기사 보도될 수 있게 조치, 개정안에 대해서 100% 찬성은 아니라는 분위기 조성 필요”라는 내용도 담겨있다. ‘언론 플레이’를 통해 개정안에 대한 여론을 호도하려 했던 것으로 해석된다.

협의체는 검찰과 정부 내의 구체적인 움직임까지 파악하고 있었다. 회의록에는 “새로 부임한 형사2부 박모 부장검사는 검찰 동향 모니터링 중이기는 하나 공정위로부터 자료 등을 받은 것이 없고 당장 조치 취할 계획은 없다고 함” “살인죄 등 명백한 죄가 성립되지 않는 죄책은 무혐의로 종결하고, 나머지 부분은 환경부 실험 결과가 나올 때까지 시한부 기소중지로 처리할 예정” 등의 내용이 나와 있다.

가습기살균제 참사를 조사했던 공정위도 부적절한 이직에서 자유롭지 않다. 가습기살균제 참사 주심을 맡았던 김성하 전 상임위원은 지난해 법무법인 지평에 고문으로 재취업했다. 지평은 업무상 과실치사상 재판에서 SK케미칼 변호를 맡았다. 가습기살균제 단독 사용 피해자들과 SK케미칼·애경의 피해지원을 위한 합의 중재를 담당한 곳이기도 하다.

공정위는 가습기살균제 피해자들에게 많은 비판을 받아왔다. 부실 조사 및 은폐 의혹 정황이 여러 차례 드러난 바 있기 때문이다. 공정위는 가습기살균제 가해기업들에 대해 지난 10년간 2~3차례만 조사했다. 이들 기업은 공정위로부터 모두 면죄부를 받았다.

가해기업들이 면죄부를 받을 수 있었던 이유는 적극적인 로비 때문으로 보인다.

사참위에 따르면 SK케미칼과 애경 측 임직원·법률대리인은 김 전 위원과 여러 차례 만났다. 법원 1심 역할을 하는 공정위 심의·의결에서 공정위 상임위원은 판사다. 판사가 법정 밖에서 변호인들을 따로 만난 셈이다. 김 전 위원은 사참위 조사에서 “안건이 많고 방대해 면담을 하면 논점을 좁히는 데 도움이 된다. 일종의 과외받는 것과 비슷하다”고 밝혔다.

수년간 수사
축소, 은폐…

사참위는 공정위가 ‘공정위 위원의 면담 등에 관한 지침(이하 면담 지침)’을 어긴 점도 지적한 바 있다. 면담 지침은 2012년 만들어졌다. 지침에는 원칙적으로 기업 측 피심인을 만나선 안 된다고 규정해놨다. 공정위는 김 전 위원이 면담 지침을 어겼다고 보지 않았다.

가습기살균제 사건을 계기로 전관이나 로펌 인사와 ‘장외 접촉’이 문제가 되자, 공정위는 2017년 외부인 접촉 관리규정을 만들었다.

사참위는 공정위가 소비자 안전을 책임지는 정부부처인데도, 가습기살균제의 안전성을 엄격하게 평가하지 않았다고 지적한다. 공정위는 산하에 한국소비자원을 둔 소비자 안전 주무부처다. 공정위는 SK케미칼·애경의 가습기살균제 사건을 다루면서 오히려 가습기살균제의 안전성 입증을 예단하기도 했다.

2011년 5월 공정위에는 또 다른 제품인 ‘세퓨’의 안전성 검증을 묻는 구체적인 민원이 접수됐다. ‘인체에 무해하며 흡입하더라도 안전해 유아나 환자가 있는 곳에서도 사용’이 가능하다는 표시 광고가 검증된 내용이냐는 민원이었다.

같은 달 질병관리본부(질본)에서는 역학조사 중 가습기살균제가 원인이라는 사실을 인지한 상황이었다. 공정위는 기업 측 자료를 받아 전달하는 데 그쳤다. 훗날 세퓨 가습기살균제는 인체 위해성이 드러났다. 정부부처 간 정보공유가 되지 않으면서, 그 사이 가습기살균제 사용 피해자는 더 늘었을 가능성이 크다. 공정위는 2012년 7월 뒤늦게 세퓨 가습기살균제가 표시광고법 위반 혐의가 있다고 판단했다.


2012년 7월 공정위는 애경과 이마트를 무혐의 처분했다. 이때 원료 제조와 판매에 모두 관여한 SK케미칼은 처분 대상조차 아니었다.

공정위는 2016년 2차 조사 때에도 “환경부가 피해 인정은 했지만, 2012년 질본 동물실험 결과와 상충된다”며 심의절차 종료를 의결했다. 심의절차 종료는 사실상 무죄 판단에 가깝다.

공정위 전 고위관계자는 사참위 조사에서 “재심사건이다 보니 새로운 증거나 입증에 논점이 맞춰졌다”며 “원심의 기초자료까지 다 보는 것은 시간상 불가능했다”고 진술했다.

대형 로펌
자리 옮겨

공정위의 잘못된 행정은 가습기살균제 참사 부실조사로 이어졌다. 공정위가 심의했던 가습기살균제 표시광고법 위반 사건에서 입증 책임은 기업에 있다. 기업은 안전성 검증자료를 제출해 허위 혹은 과장·기만 광고가 아니었음을 증명해야 했다.

공정위는 ‘표시·광고 실증에 관한 운영(고시)’에 따라 표시광고에서 주장하는 내용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는지 판단했어야 했으나 그러지 않았다.


애경은 공정위 조사를 받던 시기에 “SK케미칼에서 인체 무해성이 입증됐다는 이야기를 듣고 구매했다”고 공정위에 밝혔다. 애경산업은 안전성 검증 문건도 확보하지 않은 채 제품을 판매해왔다. 당시 이마트 또한 공정위에 “안전성을 실증할만한 자료가 없다”고 밝혔다.

가습기살균제 안전성 관련 자료가 SK케미칼에 있음에도 공정위는 1차 조사 때 SK케미칼을 조사조차 하지 않았다.

공정위를 향한 비판 여론이 거세지자 실시한 3차 조사에서는 SK케미칼·애경 실지조사, 유통망 실지조사, SK케미칼·애경 관계자 진술조사, 애경산업 포렌식 실시가 이뤄졌다. 3차 조사에서도 공정위는 SK케미칼은 포렌식 조사를 하지 않았다.

SK케미칼은 사참위 조사에도 협조하지 않았다. 사참위가 공정위에 SK케미칼의 제출자료를 내달라고 했지만, 공정위는 표시광고법 제12조 비밀엄수의 의무를 들어 사참위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SK케미칼이 자료 제출을 거부했고, 공정위는 표시광고법에 따라 비밀엄수를 해야 해 SK케미칼 자료를 사참위에 제출할 수 없다고 밝혔다.

가해기업들은 여전히 재판을 받고 있으나 1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통상 1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은 사건은 2심에서 뒤집히기 어렵다. 가습기살균제 제품의 원료인 클로로메틸이소티아졸리논(CMIT)·메틸이소티아졸리논(MIT)과 폐질환의 인과관계를 입증하는 연구 결과가 없다는 게 결정적 이유였다.

2020년 7월 기준 환경부에 가습기살균제로 인한 피해를 신고한 사람은 7000여명으로 사망자는 1500명이 넘는다. 이들의 피해 원인을 특정해야 가해자 처벌과 피해 구제가 이뤄질 수 있다.

‘SK케미칼·애경 변호’ 태평양·광장에 둥지
가해기업 관계자 재판 넘긴 수사 담당 이직

문제는 피해자 대부분이 폴리헥사메틸렌구아니딘(PHMG) 성분 가습기살균제인 옥시싹싹과 CMIT·MIT 성분의 가습기살균제인 가습기메이트를 함께 사용한 ‘복합 사용자’라는 점이다. 이는 가해기업들의 무죄 근거 중 하나로 쓰이기도 했다.

총 98명의 피해자 중 94명은 옥시싹싹과 가습기메이트를 함께 쓴 복합 사용자이고, 가습기메이트만 쓴 단독 사용자였다. 이들의 피해가 CMIT·MIT 성분으로 인한 피해라고 단정하기 어렵다고 본 것이다.

재판부는 CMIT·MIT와 폐질환의 인과관계를 입증하는 동물실험 결과가 없다는 점도 지적했다. 재판부는 환경부가 2018년 수행한 ‘가습기살균제 건강피해 규명을 위한 독성시험’ 결과를 근거로 제시했다. 당시 환경부는 PHMG 성분을 쥐의 기도에 점적투여(용액을 떨어뜨림)해 폐섬유화를 유발한 뒤 CMIT·MIT 성분을 쥐에 흡입 노출하는 시험과 CMIT·MIT 성분만 단독으로 쥐에 흡입 노출하는 시험을 각각 수행했다.

CMIT·MIT 성분 가습기살균제만 사용했다는 피해자의 수 자체가 적었기 때문에 두 가지 방식의 실험을 모두 한 것이다.

하지만 CMIT·MIT에만 노출된 쥐에서는 폐의 염증이나 폐섬유화가 관찰되지 않았다.

재판부는 “위 연구에서는 시험 동물에 대한 노출 시간을 하루 20시간으로 늘리고, 시험 물질의 농도도 가습기메이트 권장사용량의 833배에 달하도록 높였지만 CMIT·MIT를 흡입한 시험동물에게서 폐섬유화는 관찰되지 않았다”고 했다.

검찰은 1심 법원이 동물실험에서 CMIT·MIT와 폐질환의 인과관계가 입증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무죄를 선고한 점이 부당하다고 주장했다. 쥐 실험에서 폐섬유화가 발생해야만 사람에게 폐섬유화가 발생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논리다.

검찰은 ‘탈리도마이드 사건’을 예로 든다. 1957년 서독의 한 제약회사는 ‘탈리도마이드’라는 입덧 완화 약품을 출시했다. 쥐를 대상으로 한 독성 실험 결과로만 보면 안전성이 검증된 약이었다. 하지만 약을 복용한 산모들은 사지가 없거나 짧은 아기를 출산했다.

“로비·정보
공유 우려”

전 세계 48개국에서 1만명 이상의 피해자를 남긴 이 사건은 동물과 사람의 차이를 간과한 대표적 사건으로 꼽힌다. CMIT·MIT가 동물 호흡기 등에 상해를 입힐 수 있다는 실험 결과가 존재하기에 재판부가 인과관계를 인정했어야 했다는 설명이다.

가습기살균제 참사는 공론화된 지 11년이 됐다. 환경보건시민센터와 가습기살균제 피해자·유족들은 최근에도 기자회견을 통해 진상규명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며 정부의 발 빠른 대응을 강조했다. 이들은 가습기살균제로 목숨을 잃은 피해자들의 유품을 전시해 추모하고, 가해 기업인 옥시·애경에 대한 불매운동을 촉구하기도 했다.


<hounder@ilyosis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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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에 날아들 영수회담 성적표

용산에 날아들 영수회담 성적표

[일요시사 정치팀] 박희영 기자 = 꼬박 720일이 걸렸다. 한 나라의 대통령과 제1야당 대표가 만나기까지 걸린 시간이다. 악재에 악재가 겹쳐 궁지에 몰린 용산 대통령실이 꺼내든 최후의 카드는 영수회담이었다. 온 국민의 관심이 무색하게 이번 만남은 여야 어느 한쪽도 만족시키지 못했다. 윤석열 대통령의 임기가 3년 차에 접어든 시점서 또다시 ‘강 대 강’ 매치가 예상된다. 정치권이 학수고대하던 윤석열 대통령과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 이재명 대표의 만남이 성사됐다. 이번 영수회담은 지난 19일, 윤 대통령이 이 대표에게 만남을 제안하면서 시작됐다. 이도운 대통령실 홍보수석은 브리핑을 통해 “윤 대통령은 이날 오후 3시30분 이 대표와 통화했다”며 “이 대표에게 다음 주 형편이 된다면 용산서 만나자고 제안했다”고 말했다. 둘의 만남은 윤 대통령 취임 이후 1년 11개월 만이다. 어렵게 만났는데… 같은 날 민주당은 즉각 환영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민주당 강선우 대변인은 “윤 대통령은 이 대표에게 내주에 만날 것을 제안했다”며 “이 대표는 ‘많은 국가적 과제와 민생 현장에 어려움이 많다’며 되도록 이른 시일 안에 만나자고 화답했다”고 전했다. 그동안 이 대표는 꾸준히 영수회담을 요청했지만 윤 대통령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재판을 받고 있는 이 대표가 피의자 신분인 만큼 만남이 적절치 않다는 무언의 거절이었다. 윤 대통령의 변심에는 지지율이 20%대로 급락한 상황이 영향을 끼친 것으로 풀이된다. 여당인 국민의힘이 4·10 총선서 참패한 데 이어 인사 문제를 두고 대통령실의 손발이 맞지 않자 비선 개입 의혹까지 가중됐다. 야당과 소통함으로써 단단하게 굳어진 불통 이미지를 벗어던지는 등 현 상황을 돌파하겠단 뜻이다. 개혁신당 이준석 당선인은 “이번 총선 이후 ‘야당 대표를 무시하다가는 총리도 임명 못하겠구나’라는 상황을 파악한 것”이라며 “아마 구체적인 내용보다는 총리 인선 협조 정도를 받아내기 위한 피상적 대화가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어 “이 대표에겐 편한 회담이 될 것이다. 자기 할 말만 하면 되기 때문”이라며 “예를 들어 ‘채 상병 특검 받고 거부권 행사하지 말아달라’고 했을 때 대통령이 못 받으면 회담까지 하고 욕먹는 건 본인”이라고 주장했다. 두 사람이 만남을 갖기로 합의를 봤지만 하나부터 열까지 조율해야 하는 상황의 연속인 만큼 넘어야 할 고비는 많았다. 1차 실무진 회의도 쉽지만은 않았다. 당초 지난 22일 예정됐던 만남이 대통령실의 일방적인 취소로 불발된 것이다. 대통령실의 수석급 교체 일정으로 인해 일정에 변동이 생긴 것으로 전해진다. 피치 못할 사정이라지만 준비 회동조차 잡음이 새 나오면서 위태위태한 앞날이 예고됐다. 결국 첫 실무진 만남은 이로부터 하루 뒤인 지난 23일 이뤄졌다. 대통령실 측에서는 홍철호 정무수석과 차순오 정무비서관이 참석했다. 민주당 측에서는 천준호 비서실장과 권혁기 정무기획실장이 자리했다. 이날 회의는 영수회담 날짜는 물론 의제도 정하지 못한 채 빈손으로 종료됐다. 지지율 하락에 반등 노렸지만… 의제 놓고 격돌…샅바 잡은 윤-이 지난 25일 진행된 2차 회의도 큰 소득은 없었다. 테이블에 올릴 의제를 놓고 양측이 이견을 좁히지 못한 탓이다. 그동안 민주당은 채 상병 사망 사건 수사외압 의혹을 담은 특검법 수용과 윤 대통령의 거부권 남용에 대한 사과 등을 의제로 다루자는 입장을 밝혀왔다. 반면 이를 전해 들은 대통령실은 난감하단 태도를 보이며 팽팽하게 대립했다. 천 비서실장은 실무 협상 직후 브리핑서 “사전에 조율해 성과 있는 회담이 되도록 의제에 대한 검토 의견을 (대통령실이)제시하면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고 말했다. 홍철호 대통령실 정무수석은 “지도부와 상의를 거쳐야 한다”며 추후 답변을 주겠다고 밝혔다. 민주당 측이 제안한 의제와 관련해서는 ‘포괄적 수용’이라는 입장을 전달했다. 의제를 놓고 양쪽이 평행선을 달리면서 이대로 영수회담이 불발되는 게 아니냐는 우려도 나왔다. 하지만 지난 26일 이 대표가 “다 접어두고 먼저 윤 대통령을 만나도록 하겠다”고 말하면서 논의는 급물살을 탔다. 진통 끝에 영수회담 날짜가 정해지면서 세간의 관심이 두 사람의 입에 집중됐다. 윤 대통령과 이 대표는 지난달 29일 오후 2시 용산 대통령실서 만났다. 대통령실에선 정진석 대통령 비서실장과 홍철호 정무수석, 이도운 홍보수석이 배석했다. 민주당에선 천준호 당 대표 비서실장과 진성준 정책위의장, 박성준 수석 대변인이 자리했다. 대통령실은 이번 영수회담을 통해 정국을 풀어갈 실마리를 확보할 것으로 기대했다. 민주당은 ‘총선 민의’를 가감 없이 전달하겠다고 거듭 강조했다. 이재명 15분 독주 윤 대통령은 대통령실로 들어선 이 대표를 웃음으로 맞이했다. 곧이어 두 사람은 악수를 한 뒤 건강 등 안부를 주고받았다. 이 대표는 “저희가 (국회서 이곳으로)오다 보니 20분 정도 걸리던데, 실제 여기 오는 데 700일이 걸렸다”며 뼈 있는 농담을 건넸다. 윤 대통령은 대답 대신 웃음으로 갈음했다. 이날 영수회담서 가장 눈길을 끈 건 이른바 이 대표의 ‘작심 발언’이다. 윤 대통령의 인사말 이후 취재진이 퇴장하려 하자 이 대표는 “퇴장할 건 아니고, 제가 대통령님한테 드릴 말씀을 써왔다”며 멈춰 세운 뒤 품에서 종이 뭉치를 꺼내 읽어 내려갔다. 700일 동안 묵혀둔 말을 몽땅 쏟아내겠다는 듯, 이 대표의 발언은 장장 15분 넘게 이어졌다. 이 대표는 “대통령님께서 너무 잘 아시겠지만 지금 우리의 현실이 참으로 팍팍하고 국민의 삶이 어렵다”고 운을 띄웠다. 이어 “국가적으로 보면 정치, 경제, 사회, 또 외교 안보, 모든 영역서 많은 위기가 도출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며 “물가, 고금리, 고환율 이런 삼중고를 포함해서 우리 국민의 민생과 경제가 참으로 어렵다는 것은 대통령님께서도 절감하실 걸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곧이어 이 대표는 ‘전 국민 1인당 25만원 민생회복지원금 지급’을 요구하면서 본격적인 의제를 던졌다. 이 대표는 “민간경제가 어려울 때 정부가 나서는 것이 원칙이다. 우리 민주당이 제안한 긴급 민생회복 조치를 적극적으로 검토해주실 것을 부탁드린다”며 “특히 지역화폐로 지급하면 소득 지원 효과에 더해서 골목상권 소상공인 자영업자 지방에 대한 지원 효과가 매우 큰 민생회복지원금을 꼭 수용해주길 부탁드린다”고 강조했다. 이 대표는 ‘김건희 특검법’ 수용도 에둘러 촉구했다. 그는 “이번 기회에 국정운영에 큰 부담이 되는 가족 등 주변 인사들의 여러 의혹도 정리하고 넘어가시면 좋겠다는 생각”이라고 말했다. 이 밖에도 이태원 참사나 채 상병 순직 사건의 진상을 밝혀 그 책임을 묻고 재발 방지 대책을 생각할 것과 연구·개발(R&D) 예산 등도 화제로 올렸다. 거부권 행사를 자제할 것도 강하게 요구했다. 아울러 “지금까지 제가 말씀드린 게 상당히 불편하실 수 있을 것 같다”면서도 “또 민심을 과감하게 가감 없이 전달하는 것이 이 자리가 마련된 이유라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윤 대통령은 이 대표의 말을 들으면서 중간중간 고개를 끄덕이는 식으로 답했다. 처음 웃는 얼굴로 이 대표를 맞이할 때와 달리 표정은 점차 굳어져 갔다. 모두발언이 끝나자 윤 대통령은 “이 대표와 민주당이 강조해 오던 이야기라 예상하고 있었다”며 모두발언은 생략한 뒤 비공개 회담을 이어갔다. 이날 회담은 예상 시간인 1시간을 훌쩍 넘은 오후 4시10분쯤에 마무리됐다. 130분간 자리를 함께했지만 도중에 배석자를 제외하는 등 두 사람이 독대하는 상황은 발생하지 않았다. 정치권 안팎에서는 두 사람이 영수회담 도중 배석자를 물리고 자연스럽게 만찬 회동을 가질 것으로도 기대했지만 이번 만남은 차담 수준서 그쳤다. 영수회담을 마친 뒤 대통령실과 민주당은 각각 브리핑을 진행했다. 같은 장소서 같은 시간을 보냈지만 이번 회담을 바라본 양측의 시각은 극명하게 엇갈렸다. 두 쪽 난 여론 국민의 판단은? 이도운 대통령실 홍보수석은 영수회담 종료 직후 브리핑을 통해 “전체적으로 볼 때 대통령은 제1야당인 민주당의 대표와 민생 문제 등에 대해 깊이 또 솔직하고 허심탄회한 대화를 나눴다”며 “합의에 이르지는 않았지만, 양측이 총론적 혹은 대승적으로 인식을 같이한 부분은 있었다”고 평가했다. 이 수석의 설명처럼 별도의 합의문은 없었다. 다만 의료개혁이 필요하고 의대 정원 증원이 불가피하다는 데 인식을 같이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 대표가 “의료개혁은 시급한 과제며 대통령의 정책 방향이 옳다. 민주당도 협력하겠다”라는 취지로 말했다는 것이다. 다만 “민생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개선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대통령실과 여야 간의 정책적 차이가 존재한다는 데 대해서도 조금 이견이 있다는 것도 확인했다”며 “대통령은 민생 협의를 위한 여야정 협의체 같은 기구가 필요할 수 있다고 말했고 이 대표는 ‘여야가 국회라는 공간을 우선 활용하자’는 입장을 표명했다”고 말했다. 이태원 특별법에 대해서는 “대통령은 이 사건에 대한 조사나 재발 방지책, 피해자 유족들에 대한 지원에 대해서는 공감을 하지만 지금 국회에 제출된 법안이 법리적으로 볼 때 민간조사위원회서 그 영장 청구권을 갖는 등 좀 법리적으로 문제가 있을 부분이 있기 때문에 ‘이런 부분은 조금 해소하고 다시 논의를 하면 좋겠다’ ‘그렇게 한다면은 무조건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라는 취지로 말했다”고 밝혔다. 아울러 “대통령과 이 대표는 앞으로도 종종 만나기로 했다”며 “두 분이 만날 수도 있고 여당의 지도체제가 들어서면 3자 회동도 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양측이 대승적으로 인식을 같이한 부분은 있었다는 대통령실의 평가와 달리 민주당은 이번 영수회담에 대해 냉랭한 반응을 보였다. 회담에 배석한 박성준 민주당 수석 대변인은 같은 날 국회서 브리핑을 열고 “영수회담에 대해 큰 기대를 했지만 변화를 찾아볼 수 없었다”고 지적했다. 박 수석 대변인은 “상황 인식이 너무 안일해서 향후 국정이 우려된다”며 “특히 우리 당이 주장했던 민생회복 국정기조와 관련해 민생을 회복하고 국정 기조를 전환하겠다는 의지가 없어 보였다”고 밝혔다. 이날 회담에 대해 이 대표의 소회를 묻는 질문에는 “답답하고 아쉬웠다. 소통의 첫 장을 열었다는 데 의미를 둬야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소통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서로 공감했으나 이 대표가 내민 청구서에 윤 대통령이 딱 떨어지는 답변을 내놓지 않았다는 점을 꼬집은 것이다. 범야권 집중 포격 맞은 대통령실 “결과도 실리도 없다” 쏟아진 질타 범야권도 일제히 쓴소리를 얹었다. “이럴 거면 대체 왜 만났냐”는 반응이 대체적이다. 조국혁신당(이하 조국당)은 “윤 대통령의 답은 거의 없었다”며 “총선 민심에 관한 시험을 치르면서 백지 답안지를 낸 것과 다름이 없다”고 혹평했다. 조국당 강미정 대변인은 <일요시사>와의 통화서 이번 회담을 통해 윤 대통령의 기조가 곧바로 바뀌진 않을 것으로 전망했다. 강 대변인은 “준비가 덜 된 대통령과 그럼에도 최대한 민심을 담아 질문을 한 야당 대표의 만남”이라며 “(대통령이)여러 가지 법안과 자신의 가족 문제 등 민감한 질문은 빼버렸다. 추후 만남을 기약한 정도일 뿐 아무런 결실이 없었다”고 지적했다. 다만 “그래도 윤 대통령 측에서 ‘자주 소통하자’는 뉘앙스가 나왔다”며 “만남을 거듭한다면 나아질 가능성이 있을 거라는 희망을 걸어본다”고 말했다. 새로운미래는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은 없었다”며 “130분간 회담을 했으나 공동합의문은 없고 소모적인 정쟁에 불과했다”고 양측을 모두 비판했다. 새로운미래 신재용 대변인은 <일요시사>와의 통화서 “가장 시급한 문제인 의료대란 관련해 조금이라도 진정성 있는 결과가 나왔어야 이번 회담이 성과가 있었다고 본다”며 “진전도 성과도 없이 끝나 버렸다”고 혹평했다. 김준우 정의당 대표는 자신의 SNS를 통해 “130여분간 진행됐다는 대화의 결말은 결국 ‘2년 만에 첫 대화를 했다’는 그 자체와 여야 모두 입장이 애초에 비슷했던 의대 정원 확대 필요성을 확인한 것 외엔 아무런 성과가 없었다”고 비판했다. 다만 일각에서는 이번 영수회담이 아쉽게 끝난 것에 대해 이 대표에게도 책임이 있다고 봤다. 익명을 요구한 정치권 관계자는 <일요시사>와의 통화에서 “(이 대표는)대화의 기본이 안 돼있다”며 “대화라는 건 서로 말을 주고받는 걸 전제로 해야 하는데, (이 대표처럼)하고 싶은 말을 모조리 한다고 해서 소통이 되는 건 아니다”라고 지적했다. 또 다른 정치권 관계자 역시 “이번 만남은 이 대표의 1승”이라면서도 “이 대표가 무리하게 정국을 끌고 갈 가능성처럼 비칠까 우려되는 지점도 있다”고 말했다. 첫술에 배부르랴 현재로서는 이번 회담이 윤 대통령의 ‘자충수’라는 여론이 강하다. 소통하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TK·PK 기반의 집토끼를 꽉 쥐는 데 효과적일지 몰라도 중도층이 보기에는 여러모로 아쉬움이 남는다는 평이다. 영수회담 민심이 반영된 여론조사 결과도 주목된다. 레임덕 돌파구로 이 대표와의 만남을 선택한 윤 대통령의 선택이 자충수인지 신의 한 수인지 지켜봐야 할 전망이다. <hypak28@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