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습기살균제 참사 비하인드 스토리

공격하던 검사들이 방패막이로

[일요시사 취재1팀] 오혁진 기자 = 가습기살균제 참사를 수사하던 검사들이 대형 로펌으로 자리를 옮겼다. 현직 판검사들의 로펌 이직은 문제가 되지 않지만 ‘전관예우’의 씨앗이 되기도 한다. 특히 이들이 이직한 곳은 가습기살균제 참사 가해기업을 변호하는 곳이어서 논란이 일고 있다. SK케미칼과 애경산업 관계자들을 재판에 넘겼던 검사들이 반대로 그들의 방패막이가 된 셈이다.

가습기살균제 가해기업 편으로 해당 사건을 조사하던 검사들이 돌아섰다. 일부 공정거래위원회 간부도 SK케미칼과 애경산업의 변호를 맡았던 로펌으로 이직했다. 피해자들은 애초 사정기관이 가습기살균제 참사에 대한 진상규명 의지가 없었던 것이 아니냐고 비판한다. 지난 10년간 사건 축소·은폐 의혹을 받았던 검찰과 공정위가 애초 가해기업들과 한통속이었다는 주장이다.

검찰·공정위
의지 없었나

서울중앙지검에서 2019년부터 가습기살균제 참사를 수사해 SK케미칼과 애경 간부 여러명을 재판에 넘긴 검사는 최근 법무법인 태평양으로 이직했다. A 변호사는 공정거래와 기업자금, 금융·증권, 중대시민재해 등 사건을 주로 맡고 있다.

대형 로펌들이 지난해 중대재해처벌법 시행에 맞춰 노동과 산업재해 분야에 정통한 검사 출신을 대거 영입했는데 A 변호사의 로펌행 역시 이런 추세와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태평양은 재판에서 두 기업의 변호를 맡았고, SK케미칼과 애경은 지난해 1월 1심에서 무죄판결을 받았다. 이후 2심 재판을 진행 중인 태평양은 지난달 24일 A 변호사를 영입했다. 이 같은 로펌 이직은 불법이 아니다. 검사 시절 담당했던 사건은 원칙적으로 배당하지 않기 때문에 문제될 건 없다.


옥시 한국법인의 존리 대표 등을 수사했던 B 변호사도 지난해 법무법인 광장에 취업했다. B 변호사는 서울중앙지검에서 관련 수사를 맡았고 이직 직전에는 같은 검찰청에서 반부패수사부장으로 근무했다. 광장은 현재 SK케미칼 측의 변호를 맡고 있다.

B 변호사는 2016년 가습기살균제 사건을 맡았다. 당시 광장은 옥시의 피해자 배상 지원 업무에만 관여했다.

그러나 시민단체 일각에서는 가습기살균제 사건을 담당하던 검사들의 로펌 이직으로 가해기업의 입장이 유리해질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한 시민단체 관계자는 “검사 시절 그들이 직간접적으로 정보로 가해기업에 유리한 방향으로 활용될 수 있다”고 분석했다.

시민단체의 이 같은 우려는 이미 일어난 바 있다. SK케미칼과 애경은 2017년 ‘가습기살균제 피해구제법 개정안’의 국회 통과를 저지하려 했다. 사회적참사 특별조사위원회(사참위)에 따르면 협의체를 만든 SK케미칼과 애경은 2017년 10월18일, 11월1일 개정안 저지 대책 및 정부 움직임 등을 논의했다.

협의체는 당시 현재 김앤장에 개정안 내용을 비판하는 의견서 작성을 요청했고 일부 국회의원에게는 법률이 통과되지 않도록 지연시키는 계획을 짰다. 국내 최대 로펌인 김앤장에는 개정안에 대한 반대 논리 개발을 맡기고 국회의원들에게는 로비를 하기로 한 것이다.

실제로 정부는 2017년 9월 가습기살균제 피해자 범위를 확대하기 위해 피해구제법 개정을 추진한다고 발표했으나 개정안은 1년이 지난 2018년 7월에야 국회를 통과했다.

주심 맡던 공정위 위원도 법무법인행
전관·사정기관 출신들 여러 차례 미팅


사참위가 공개했던 협의체 회의록에도 “일부 보수 매체를 선정해 개정안에 대한 비판 기사 보도될 수 있게 조치, 개정안에 대해서 100% 찬성은 아니라는 분위기 조성 필요”라는 내용도 담겨있다. ‘언론 플레이’를 통해 개정안에 대한 여론을 호도하려 했던 것으로 해석된다.

협의체는 검찰과 정부 내의 구체적인 움직임까지 파악하고 있었다. 회의록에는 “새로 부임한 형사2부 박모 부장검사는 검찰 동향 모니터링 중이기는 하나 공정위로부터 자료 등을 받은 것이 없고 당장 조치 취할 계획은 없다고 함” “살인죄 등 명백한 죄가 성립되지 않는 죄책은 무혐의로 종결하고, 나머지 부분은 환경부 실험 결과가 나올 때까지 시한부 기소중지로 처리할 예정” 등의 내용이 나와 있다.

가습기살균제 참사를 조사했던 공정위도 부적절한 이직에서 자유롭지 않다. 가습기살균제 참사 주심을 맡았던 김성하 전 상임위원은 지난해 법무법인 지평에 고문으로 재취업했다. 지평은 업무상 과실치사상 재판에서 SK케미칼 변호를 맡았다. 가습기살균제 단독 사용 피해자들과 SK케미칼·애경의 피해지원을 위한 합의 중재를 담당한 곳이기도 하다.

공정위는 가습기살균제 피해자들에게 많은 비판을 받아왔다. 부실 조사 및 은폐 의혹 정황이 여러 차례 드러난 바 있기 때문이다. 공정위는 가습기살균제 가해기업들에 대해 지난 10년간 2~3차례만 조사했다. 이들 기업은 공정위로부터 모두 면죄부를 받았다.

가해기업들이 면죄부를 받을 수 있었던 이유는 적극적인 로비 때문으로 보인다.

사참위에 따르면 SK케미칼과 애경 측 임직원·법률대리인은 김 전 위원과 여러 차례 만났다. 법원 1심 역할을 하는 공정위 심의·의결에서 공정위 상임위원은 판사다. 판사가 법정 밖에서 변호인들을 따로 만난 셈이다. 김 전 위원은 사참위 조사에서 “안건이 많고 방대해 면담을 하면 논점을 좁히는 데 도움이 된다. 일종의 과외받는 것과 비슷하다”고 밝혔다.

수년간 수사
축소, 은폐…

사참위는 공정위가 ‘공정위 위원의 면담 등에 관한 지침(이하 면담 지침)’을 어긴 점도 지적한 바 있다. 면담 지침은 2012년 만들어졌다. 지침에는 원칙적으로 기업 측 피심인을 만나선 안 된다고 규정해놨다. 공정위는 김 전 위원이 면담 지침을 어겼다고 보지 않았다.

가습기살균제 사건을 계기로 전관이나 로펌 인사와 ‘장외 접촉’이 문제가 되자, 공정위는 2017년 외부인 접촉 관리규정을 만들었다.

사참위는 공정위가 소비자 안전을 책임지는 정부부처인데도, 가습기살균제의 안전성을 엄격하게 평가하지 않았다고 지적한다. 공정위는 산하에 한국소비자원을 둔 소비자 안전 주무부처다. 공정위는 SK케미칼·애경의 가습기살균제 사건을 다루면서 오히려 가습기살균제의 안전성 입증을 예단하기도 했다.

2011년 5월 공정위에는 또 다른 제품인 ‘세퓨’의 안전성 검증을 묻는 구체적인 민원이 접수됐다. ‘인체에 무해하며 흡입하더라도 안전해 유아나 환자가 있는 곳에서도 사용’이 가능하다는 표시 광고가 검증된 내용이냐는 민원이었다.

같은 달 질병관리본부(질본)에서는 역학조사 중 가습기살균제가 원인이라는 사실을 인지한 상황이었다. 공정위는 기업 측 자료를 받아 전달하는 데 그쳤다. 훗날 세퓨 가습기살균제는 인체 위해성이 드러났다. 정부부처 간 정보공유가 되지 않으면서, 그 사이 가습기살균제 사용 피해자는 더 늘었을 가능성이 크다. 공정위는 2012년 7월 뒤늦게 세퓨 가습기살균제가 표시광고법 위반 혐의가 있다고 판단했다.


2012년 7월 공정위는 애경과 이마트를 무혐의 처분했다. 이때 원료 제조와 판매에 모두 관여한 SK케미칼은 처분 대상조차 아니었다.

공정위는 2016년 2차 조사 때에도 “환경부가 피해 인정은 했지만, 2012년 질본 동물실험 결과와 상충된다”며 심의절차 종료를 의결했다. 심의절차 종료는 사실상 무죄 판단에 가깝다.

공정위 전 고위관계자는 사참위 조사에서 “재심사건이다 보니 새로운 증거나 입증에 논점이 맞춰졌다”며 “원심의 기초자료까지 다 보는 것은 시간상 불가능했다”고 진술했다.

대형 로펌
자리 옮겨

공정위의 잘못된 행정은 가습기살균제 참사 부실조사로 이어졌다. 공정위가 심의했던 가습기살균제 표시광고법 위반 사건에서 입증 책임은 기업에 있다. 기업은 안전성 검증자료를 제출해 허위 혹은 과장·기만 광고가 아니었음을 증명해야 했다.

공정위는 ‘표시·광고 실증에 관한 운영(고시)’에 따라 표시광고에서 주장하는 내용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는지 판단했어야 했으나 그러지 않았다.


애경은 공정위 조사를 받던 시기에 “SK케미칼에서 인체 무해성이 입증됐다는 이야기를 듣고 구매했다”고 공정위에 밝혔다. 애경산업은 안전성 검증 문건도 확보하지 않은 채 제품을 판매해왔다. 당시 이마트 또한 공정위에 “안전성을 실증할만한 자료가 없다”고 밝혔다.

가습기살균제 안전성 관련 자료가 SK케미칼에 있음에도 공정위는 1차 조사 때 SK케미칼을 조사조차 하지 않았다.

공정위를 향한 비판 여론이 거세지자 실시한 3차 조사에서는 SK케미칼·애경 실지조사, 유통망 실지조사, SK케미칼·애경 관계자 진술조사, 애경산업 포렌식 실시가 이뤄졌다. 3차 조사에서도 공정위는 SK케미칼은 포렌식 조사를 하지 않았다.

SK케미칼은 사참위 조사에도 협조하지 않았다. 사참위가 공정위에 SK케미칼의 제출자료를 내달라고 했지만, 공정위는 표시광고법 제12조 비밀엄수의 의무를 들어 사참위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SK케미칼이 자료 제출을 거부했고, 공정위는 표시광고법에 따라 비밀엄수를 해야 해 SK케미칼 자료를 사참위에 제출할 수 없다고 밝혔다.

가해기업들은 여전히 재판을 받고 있으나 1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통상 1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은 사건은 2심에서 뒤집히기 어렵다. 가습기살균제 제품의 원료인 클로로메틸이소티아졸리논(CMIT)·메틸이소티아졸리논(MIT)과 폐질환의 인과관계를 입증하는 연구 결과가 없다는 게 결정적 이유였다.

2020년 7월 기준 환경부에 가습기살균제로 인한 피해를 신고한 사람은 7000여명으로 사망자는 1500명이 넘는다. 이들의 피해 원인을 특정해야 가해자 처벌과 피해 구제가 이뤄질 수 있다.

‘SK케미칼·애경 변호’ 태평양·광장에 둥지
가해기업 관계자 재판 넘긴 수사 담당 이직

문제는 피해자 대부분이 폴리헥사메틸렌구아니딘(PHMG) 성분 가습기살균제인 옥시싹싹과 CMIT·MIT 성분의 가습기살균제인 가습기메이트를 함께 사용한 ‘복합 사용자’라는 점이다. 이는 가해기업들의 무죄 근거 중 하나로 쓰이기도 했다.

총 98명의 피해자 중 94명은 옥시싹싹과 가습기메이트를 함께 쓴 복합 사용자이고, 가습기메이트만 쓴 단독 사용자였다. 이들의 피해가 CMIT·MIT 성분으로 인한 피해라고 단정하기 어렵다고 본 것이다.

재판부는 CMIT·MIT와 폐질환의 인과관계를 입증하는 동물실험 결과가 없다는 점도 지적했다. 재판부는 환경부가 2018년 수행한 ‘가습기살균제 건강피해 규명을 위한 독성시험’ 결과를 근거로 제시했다. 당시 환경부는 PHMG 성분을 쥐의 기도에 점적투여(용액을 떨어뜨림)해 폐섬유화를 유발한 뒤 CMIT·MIT 성분을 쥐에 흡입 노출하는 시험과 CMIT·MIT 성분만 단독으로 쥐에 흡입 노출하는 시험을 각각 수행했다.

CMIT·MIT 성분 가습기살균제만 사용했다는 피해자의 수 자체가 적었기 때문에 두 가지 방식의 실험을 모두 한 것이다.

하지만 CMIT·MIT에만 노출된 쥐에서는 폐의 염증이나 폐섬유화가 관찰되지 않았다.

재판부는 “위 연구에서는 시험 동물에 대한 노출 시간을 하루 20시간으로 늘리고, 시험 물질의 농도도 가습기메이트 권장사용량의 833배에 달하도록 높였지만 CMIT·MIT를 흡입한 시험동물에게서 폐섬유화는 관찰되지 않았다”고 했다.

검찰은 1심 법원이 동물실험에서 CMIT·MIT와 폐질환의 인과관계가 입증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무죄를 선고한 점이 부당하다고 주장했다. 쥐 실험에서 폐섬유화가 발생해야만 사람에게 폐섬유화가 발생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논리다.

검찰은 ‘탈리도마이드 사건’을 예로 든다. 1957년 서독의 한 제약회사는 ‘탈리도마이드’라는 입덧 완화 약품을 출시했다. 쥐를 대상으로 한 독성 실험 결과로만 보면 안전성이 검증된 약이었다. 하지만 약을 복용한 산모들은 사지가 없거나 짧은 아기를 출산했다.

“로비·정보
공유 우려”

전 세계 48개국에서 1만명 이상의 피해자를 남긴 이 사건은 동물과 사람의 차이를 간과한 대표적 사건으로 꼽힌다. CMIT·MIT가 동물 호흡기 등에 상해를 입힐 수 있다는 실험 결과가 존재하기에 재판부가 인과관계를 인정했어야 했다는 설명이다.

가습기살균제 참사는 공론화된 지 11년이 됐다. 환경보건시민센터와 가습기살균제 피해자·유족들은 최근에도 기자회견을 통해 진상규명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며 정부의 발 빠른 대응을 강조했다. 이들은 가습기살균제로 목숨을 잃은 피해자들의 유품을 전시해 추모하고, 가해 기업인 옥시·애경에 대한 불매운동을 촉구하기도 했다.


<hounder@ilyosis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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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곡점’ 의정 갈등 엔드게임

‘변곡점’ 의정 갈등 엔드게임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구성원의 압도적인 지지로 당선된 수장이 반년 만에 끌려 내려왔다. 막말에 가까운 강한 발언과 제멋대로인 행보가 탄핵을 불렀다. 강성 수장이 물러나면서 변화를 기대하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대화의 문이 열릴 것인가, 더 높은 벽이 쌓일 것인가. 임현택 대한의사협회(이하 의협) 전 회장이 3년 임기를 다 채우지 못하고 탄핵당했다. 지난 5월 취임 이후 6개월 만으로 의협 역사상 2번째, 최단기간 내 불명예 퇴진한 회장이 됐다. 첫 번째는 2014년 4월 임기 1년여를 앞두고 탄핵당한 노환규 전 회장이다. 두 번째 최단기간 의협은 지난 10일 오후 서울 용산구 의협회관서 임시대의원총회를 열고 임 전 회장의 불신임안을 처리했다. 참석 의원 224명 가운데 170명(75.9%)이 찬성했다. 반대는 50명, 기권 4명이다. 전체 대의원 249명 가운데 224명(91.1%)이 표결에 참여했다. 의협 정관에 따르면, 회장 불신임안은 제적 대의원 3분의 2 이상이 출석하고, 출석 대의원 3분의 2 이상이 찬성하면 가결된다. 지난 3월 임 전 회장은 선거서 유효 투표수 3만3084표 중 2만1646표를 받아 당선됐다. 65.43%의 압도적인 지지다. 의협 회장 선거는 정부의 의대 정원 증원 발표로 의정 갈등 수위가 높아지고 있을 무렵에 치러졌다. 전공의가 병원을 떠났고 정부가 ‘2000명’을 강조하던 시기였다. 의협 회원들은 강성 중의 강성으로 분류되는 임 전 회장에게 힘을 실었다. 임 전 회장의 어깨에 너무 힘이 들어갔던 것일까? 임 전 회장의 언행은 사사건건 도마 위에 올랐다. SNS에 올린 글, 공식 석상서 했던 발언 등이 막말 논란으로 번졌고, 단식투쟁 등의 행보는 ‘쇼’라는 비판을 받았다. 무엇보다 박단 대한전공의협의회(이하 대전협) 비대위원장과 갈등을 빚으면서 의료계 내부 분열을 조장한다는 지적이 뼈아팠다. 임 전 회장이 8개월 동안 보여준 모습은 고스란히 탄핵 사유가 됐다. 의협 회원 사이에서는 임 전 회장이 SNS로 막말과 실언을 해 의사단체의 명예를 훼손했다는 비판이 일었다. 또 ‘임 회장이 전공의 지원금을 빼돌렸다’는 허위 비방 글을 올린 시도의사회 임원에게 고소 취하 대가로 1억원을 요구한 사실이 녹취록을 통해 알려져 논란이 불거졌다. 특정 인물에 대한 수위 높은 비판은 여론의 역풍을 불렀다. 장상윤 대통령실 사회수석을 겨냥해 “정신분열증 환자 같은 개소리”라고 비난하는 글을 올렸다가 환자를 비하했다는 지적을 받았다. 임현택, 6개월 만에 탄핵당해 막말 논란·의대 증원 못 막아 또 2021년 한 의사가 80대 환자에게 ‘맥페란’ 주사제를 투여한 뒤 부작용이 나타나 기소된 재판에 대해서도 도 넘는 발언을 쏟아냈다. 이른바 ‘맥페란 재판’ 항소심서 판사가 1심의 금고 10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은 해당 의사의 항소를 기각하자 “이 여자 제정신입니까?”라는 글을 SNS에 올린 것이다. 임 전 회장의 발언에 법원은 이례적으로 “재판장의 인격에 대한 심각한 모욕일 뿐 아니라 국민의 신뢰를 크게 훼손할 수 있는 매우 부적절한 행동”이라고 공개적으로 유감을 표명했다. 의대 정원 증원 집행정지와 관련해 기각·각하 결정을 내린 재판장이 ‘회유’받았을 것이라는 주장으로도 입길에 올랐다. 서울고등법원 재판부가 결정을 내린 다음 날 한 라디오 프로그램에 출연해 재판장의 실명을 거론하면서 “지난 정권에서는 고법 판사들이 차후 승진으로 법원장으로 갈 수 있는 그런 길이 있었는데 제도가 바뀐 다음에는 그런 통로가 막혀서 이분이 아마 어느 정도 대법관에 대한 회유가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있다” 말했다. 서울고법은 법원 명의로 입장문을 내고 “해당 단체장의 아무런 객관적 근거가 없는 추측성 발언은 재판장의 명예와 인격에 대한 심대한 모욕”이라면서 “사법부 독립에 관한 국민의 신뢰를 현저히 침해할 수 있는 매우 부적절한 언사다. 깊은 유감을 표명한다”고 밝혔다. 여기에 결정적으로 정부의 2025학년도 의대 증원을 막지 못한 점, 간호법 제정을 저지하지 못한 점이 탄핵 사유로 꼽혔다. 임 전 회장은 총회를 앞두고 의사 회원들에게 사과하고 페이스북 계정을 삭제하는 등 재신임을 호소했지만 반전은 없었다. 회장을 탄핵한 의협은 비대위원회 체제로 전환하고 지난 13일 새로운 회장 선거 전까지 단체를 이끌 비대위원장을 뽑았다. 그 결과 박형욱 대한의학회 부회장이 1차 투표서 총 유효 투표수 233표 중 123표(52.8%)를 얻어 과반으로 당선이 확정됐다. 임기는 내년 1월 차기 회장이 선출될 때까지다. 뒤늦게 호소했지만… 박형욱 비대위원장은 “정부는 의료 파탄이란 시한폭탄을 장착해놨다”며 “정말 대화를 원한다면 정부는 먼저 시한폭탄을 멈춰야 한다. 그래야 진정한 대화가 가능하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비대위원들의 합의에 기초해 입장과 행동을 결정할 것”이라며 “비대위 운영서 소외돼왔던 전공의들과 의대생들의 견해가 충분히 반영될 수 있게 하겠다”고 소감을 밝혔다. 임 전 회장이 물러나고 새로운 비대위원장이 등장하면서 의협의 투쟁 방향에 변화가 생길 가능성이 커졌다. 일각에서는 의협의 이번 행보를 의정 갈등의 중요한 변곡점으로 보고 있다. 강성 회장을 필두로 정부와 강하게 대립했던 이전 모습서 벗어나 대화에 참여할 것이라는 의견과 이전보다 더 수위 높은 대정부 투쟁이 예상된다는 의견으로 갈리는 중이다. 후자의 배경에는 대전협이 있다. 앞서 박단 비대위원장 등 전공의 70여명은 전날 의협 대의원들에게 “비대위원장으로 박형욱 교수를 추천한다”는 메시지를 보내 공개 지지 의사를 드러냈다. 대의원회서도 박단 비대위원장의 공개 지지에 대해 경고하는 등 잡음이 일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대전협의 지지를 등에 업은 박형욱 비대위원장이 당선되면서 전공의의 영향력이 상대적으로 커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됐다. 의협과 대전협의 공조가 본격화될 것이라는 관측이 나오는 이유다. 문제는 양측의 교류가 정부와의 대화로까지 이어질 수 있느냐는 점이다. 박형욱 비대위원장은 당선 소감부터 정부의 태도 변화를 요구하고 나섰다. 또 윤석열 대통령의 변화도 필요하다고 언급했다. 의정 갈등서 줄곧 선봉에 선 전공의들은 ‘의대 정원 증원 백지화’라는 요구사항서 앞으로도 뒤로도 움직인 적이 없다. 전공의의 행보는 의대생, 의대 교수 등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영향력 커진 전공의 단체 의료계가 전공의 중심으로 굴러가고 있는 셈이다. 실제 대전협은 지난 11일 출범했던 여야의정협의체(이하 협의체)에 대해서도 부정적인 태도를 보인다. 협의체는 야당인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이 불참하고 의료계에서는 학술 단체인 대한의학회와 의대 학장 모임인 한국의과대학·의학전문대학원협회(KAMC)만 참석하는 등 ‘반쪽 출범’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협의체의 운영 기한은 올해 말까지로, 다음 달 22~23일 전에 의미 있는 결과를 낼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는 태도다. 하지만 박단 비대위원장은 협의체에 대해 ‘무의미하다’고 평가했다. 그는 협의체가 첫발을 뗀 11일 SNS에 “국민의힘 한동훈 대표는 전공의와 의대생, 당사자 없이 대화나 하겠다는 한가한 소리를 하고 있다”며 “한 대표는 2025년 의대 모집 정지와 업무개시명령 폐지에 대한 입장부터 명확히 밝히시길 바란다”고 일갈했다. 이어 “눈치만 보며 뭐라도 하는 척만 하겠다면 한동훈의 ‘여야의정 협의체’ 역시 임현택 전 의협 회장의 ‘올바른 의료를 위한 특별위원회(올특위)’와 결국 같은 결말일 것”이라고 우려했다. 올특위는 의료계의 입장을 하나로 모으기 위해 의협 주도로 구성한 범의료계 특별위원회다. 전공의와 의대생이 해당 위원회에 불참하면서 파행 운영되다 지난 7월 해체됐다. 정부는 협의체서 의료계가 제안한 내용에 대해 “진정성 있게 검토하겠다”는 견해를 밝혔다. 지난 11일 협의체서 의료계는 한국의학교육평가원 자율성 보장, 추가 합격 제한 등을 통한 2025학년도 의대 선발 인원 축소 등을 제안한 것으로 알려졌다. 정윤순 보건복지부 보건의료정책실장은 지난 14일 의사 집단행동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이하 중대본) 회의를 주재하면서 “마주 앉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린 만큼 활발한 대화와 소통을 통해 누적된 갈등을 해소하고 신뢰를 회복해 국민이 원하는 결과를 끌어낼 수 있길 기대한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의협과 전공의 등 다른 의료계 단체의 참여를 호소했다. 박단 공개 지지 새 비대위원장 강경 투쟁이냐 VS 노선 변화냐 의료계 내부 상황은 크게 바뀌었지만 향후 상황은 여전히 ‘시계 제로(0)’ 상태다. 임 전 회장과 박단 비대위원장 간 갈등의 불씨도 여전히 살아있다. 대전협은 임 전 회장의 탄핵을 공개적으로 요청하는 등 ‘(임 전 회장과)같이 갈 수 없다’는 뜻을 분명히 밝힌 바 있다. 실제 대전협은 임 전 회장의 탄핵을 요청하면서 “이해와 소통이 가능한 새로운 회장을 필두로 의협과 대전협 두 단체가 향후 상호 연대를 구축할 수 있길 기대한다”는 입장문까지 냈다. 임 전 회장의 탄핵안 가결 직후 박 비대위원장이 “결국 모든 길은 바른 길로”라는 내용의 SNS 글을 올리기도 했다. 문제는 임 전 회장이 박단 비대위원장을 상대로 반격을 진행하고 있다는 점이다. 임 전 회장은 탄핵 사흘 만에 닫았던 페이스북 계정을 다시 열고 “박단과 그 뒤에서 박단을 배후 조종해 왔던 자들이 무슨 일을 해왔는지 전 의사 회원들에게 아주 상세히 밝히겠다”며 박단 비대위원장을 저격하는 글을 올렸다. 그러면서 “의협 대의원회 비대위원장과 의협 회장 선거가 더 이상 왜 필요한가”라면서 “박단이 의협 회장 겸 비대위원장을 맡아 모든 권한과 책임하에 의료 농단을 해결하면 된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지지해주셨던 모든 분에게 우선 사과의 말씀을 드린다”며 “이유가 어떻든 회장 취임 전부터 탄핵하겠다고 마음먹고 있던 자들에게 빌미를 주어 넘어간 것 자체가 제 잘못”이라고 주장했다. 또 의협의 근본적인 개혁의 첫걸음으로 의협 대의원회 폐지 등을 내용으로 하는 민법상의 사원총회를 개최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사원총회는 민법에 규정된 사단법인의 최고의사결정 기관이다. 의협 최고의결기구로 알려진 대의원총회보다 상위에 있고 정관의 규정으로 폐지할 수 없다. 사원총회는 이사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경우나 총 사원 5분의 1 이상이 회의의 목적 사항을 제시해 청구하는 경우 소집될 수 있다. 반격 시작 내부 갈등? 올해 2월 시작된 정부와 의료계의 갈등이 10개월째로 접어들었다. 온갖 말이 오갔지만 되짚어보면 조금도 좁혀지지 않은 평행선 상황이 계속되는 모양새다. 정부와 의료계의 대치 상황이 길어질수록 ‘의료 붕괴’는 가시화되고 있다. 한 의료계 관계자는 이렇게 말했다. “이제는 정말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jsjang@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