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시사 정치팀] 정인균 기자 = 정당은 위기가 닥쳤을 때 이따금씩 외부 인사들을 영입해왔다. 당 내부의 ‘고인 물’을 제거하기 위해 ‘새로운 물’을 끌어오는 전략이다. 그러나 새로운 물이 고인물을 이겨내는 것은 쉽지 않다. 오히려 고인 물에 흡수되거나 동화되지 못한 채 우물을 떠나는 일이 부지기수다. 이 어려운 역할을 요즘 더불어민주당에서 박지현 비대위원장이 맡고 있다.
민주당이 요즘 시끄럽다. 대선 후 불안한 비상대책위원회 체제가 이어지며 연일 당 안팎에서 잡음이 끊이지 않고 있는 것이다. 현재 민주당 비대위는 지방선거 공천 문제에 대해 뚜렷한 기준을 제시하지 못한다는 비판을 듣고 있다. 이 공천 문제를 중심으로 계파 갈등 또한 다시 불거지고 있는 중이다.
트러블메이커?
여러 문제가 산적해 있는 민주당에 또 다른 문제를 야기하는 ‘트러블메이커’가 급부상하고 있다. 지난달 비대위원장으로 선임된 박지현 위원장이다. 박 위원장은 지난 대선에서의 공로를 인정받아 지난달 13일, 민주당의 비대위원장에 임명된 바 있다.
소식을 듣고 일반 대중들은 의아해했다. 그가 아무리 이재명 선대위에서 일했다지만, 위원장에 임명될 만큼의 ‘공로’가 있냐고 의심했다. 그의 이름이 처음 대중에게 알려진 것은 텔레그램 성 범죄 집단에 관한 탐사보도를 하면서부터다.
한림대학교 언론학과에 재학 중이던 그는 2019년, 탐사 보도 공모전에 참가하기 위해 ‘추적단 불꽃’ 활동을 시작했다. 본격적인 취재 도중 텔레그램 단체 채팅방에서 성폭력 영상물을 공유하는 범죄가 발생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고 피해자 중에는 미성년자도 포함돼있다는 충격적인 사실을 목격했다.
취재한 자료를 모아 경찰청 본청에 신고했으나, 수사관으로부터 피해자 본인이 아니면 신고가 안 된다는 말에 좌절했다.
그는 이때 정치의 중요성을 깨달았다고 한다. 각고의 노력 끝에 결국 강원지방경찰청에서 수사가 시작됐고, 후에 N번방 일당이 모두 검거되며 박 위원장은 N번방 사건의 숨은 공신으로 떠올랐다.
‘N번방 추적단’의 이미지가 강했던 그가 정치인으로서의 입지를 다지게 된 건 지난 1월 때 일이다. 당시 국민의힘 이준석 대표의 맹활약으로 이대남(20대 남자)들의 표 결집도가 올라가자 민주당 이재명 선대위 측은 이대녀(20대 여자)의 표심을 공략할 만한 인물 찾기에 나섰다.
영입 과정 중 눈에 들어온 게 바로 박 위원장이다. 이재명 상임고문은 박 위원장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영입을 시도했다고 전해진다. 실제로 그의 영입은 이 고문에게 많은 도움이 됐다. 이대녀가 열광하는 박 위원장은 국민의힘 이 대표의 훌륭한 대항마로 떠올랐고, 선거유세에 종종 등장해 이 고문에게 많은 힘이 됐다.
그의 도움은 선거 결과에까지 이어졌다. 이 고문은 대통령선거에서 이대녀에게 압도적인 지지를 받았다. 최종 득표에서 이 고문은 이대남에게 지지를 받은 윤 후보와 20대 득표율에서크게 밀리지 않았다.
박 위원장은 비대위 합류에도 이 고문의 제안이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고 했다. 민주당 내부 목소리에 따르면 이 고문은 비대위 구성에 많은 힘을 쏟았고 그 일환으로 박 위원장을 영입했다. 이 고문은 실제로 그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약 1시간 동안 설득했다.
그렇게 영입한 박 위원장의 입지가 요즘 많이 위태로운 모양이다. <일요시사> 취재 결과에 따르면 박 위원장은 비대위의 ‘애물단지’로 전락하고 있다. 이 고문의 입김이 강하게 작용하고 있는 분위기 속에서 민주당은 그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다.
지방선거 공천 두고 잡음 끊이지 않아
계파 갈등 확전…비대위 무용론 급부상
우선 구설수가 박 위원장의 발목을 잡고 있는데 이는 사소한 실수에서 비롯됐다. 그는 지난달 25일 서해 수호의날을 맞아 서해수호 호국영령 55인을 추모하는 자리에 참석했다.
그는 이날 오전 자신의 SNS에 “오늘은 서해 연평도에서 북한의 기습 공격을 당한 지 20년째 되는 날”이라며 “2002년 3월26일 북한의 잠수정의 기습 공격에 맞서 끝까지 서해를 지켜내신 분들을 잊지 않겠다”고 추모했다. 그러나 그가 지칭한 제2연평해전은 6월29일에 발발했다.
3월26일은 천안함 피격사건이 벌어진 날이다. 그의 이날 발언은 민주당의 ‘안보 의식 결여’에 대한 의심에 기름을 붓는 꼴이 됐다. 사소한 실수만이 박 위원장의 위치를 위태롭게 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가장 큰 문제는 그가 민주당의 기류를 읽고 있지 못한다는 점이다. 정치에 입문한지 얼마 되지 않는 박 위원장은 최근 나와 있는 정치적 현안에 대해 당의 기류와 정반대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쓴소리’를 하는 것이 외부인사의 역할이라지만, 그 기준은 신중히 결정해야 한다.
기준을 잘못 설정하면 ‘사퇴’까지 거론될 것을 각오해야 하기 때문이다.
민주당 내의 ‘당심’을 가장 많이 잃은 부분은 ‘검수완박(검찰 수사권 완전 박탈)’에 대한 당의 기조에 박 위원장이 힘을 싣고 있지 않는다는 점이다. 민주당은 최근 사활을 걸고 검수완박에 당력을 집중하고 있다.
박 위원장은 이에 대해 “속도를 중요시 하다가 방향을 잃는 것 아닌가 하는 걱정이 있다”며 “국민들이 듣는 뉴스에 검찰개혁, 개혁적인 이야기들만 보이는 게 맞을까 하는 고민이 있다”고 신중론을 펼쳤다.
민주당의 한 의원은 <일요시사>와의 전화 통화에서 “속사정을 모르고 하는 이야기”라며 박 위원장을 깎아내렸다. 그가 말하는 ‘속사정’은 대통령의 거부권을 행사에 대한 민주당의 걱정이다.
다음 달 9일 대통령에 취임하는 윤석열 당선인이 검수완박에 관한 법률안 거부권을 행사하면 법률안 통과가 사실상 물 건너 가기 때문에 그전에 입법을 진행하려는 게 민주당의 입장이라는 것이다.
대통령 거부권이 행사되지 않는다면 국회에서 과반 이상 득표수로 의결될 수 있지만,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하면 과반 출석과 출석의원 3분의 2 이상의 득표가 필요하다. 민주당은 현재 과반 이상의 의석 수를 차지하고 있으나 3분의 2이상 의석 수를 차지하고 있지는 않다.
몇몇 민주당 인사들은 박 위원장의 검수완박 발언을 두고 “선을 넘었다”는 평가마저 나온다.
쓴소리는 좋지만 당의 ‘대의’를 너무 가볍게 생각하고 있지 않냐는 것이다. ‘서울시장 경선 도입’ 같은 주장이야 받아들일 수 있는 수준이지만, 당이 총력전을 펼치고 있는 검수완박에 대한 ‘신중론’은 너무 나가지 않았냐는 지적이다.
이준석 대항마
민주당 측 관계자는 “비대위원장의 낙마는 많이 이뤄져왔고, 앞으로도 벌어질 수 있는 일”이라며 짧게 박 위원장의 위기설을 <일요시사>에 전했다. 이 관계자는 “굳이 사퇴하지 않더라도 의원들의 무시하는 분위기가 이어지면 위원장으로서 아무런 영향력도 남지 않게 될 것”이라고 우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