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특집> 사라진 한반도 '범' 이야기

  • 김민주 기자 alswn@ilyosisa.co.kr
  • 등록 2022.01.24 15:49:41
  • 호수 135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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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호랑이, 무섭지만 복도 준다

[일요시사 취재 1팀] 김민주 기자 = 2022년 임인년은 ‘검은 호랑이의 해’다. 임인년의 임은 검은색, 인은 호랑이를 의미한다. 한국에서 호랑이는 용맹하고 강한 생명력의 상징으로, 2017년에는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동물 1위에 뽑히기도 했다. 그러나 한국의 야생 호랑이는 멸종됐다. 

한국 호랑이 기록은 어떻게 남아 있을까. 한반도는 산악지대가 대부분이라 호랑이가 살기에 좋은 지형으로, 예부터 한반도에 살아온 우리 민족은 호랑이를 무서워하면서도 숭배했다. 호랑이에 관한 기록도 꽤 많은데 <조선왕조실록>에는 876회 호랑이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조선왕조실록>은 472년의 조선왕조 역사를 담은 사서기 때문에, 호랑이에게 피해를 본 기록이 많다.

멀고도 친숙
친근한 얼굴

실록에 따르면, 영조 때는 호랑이가 궁궐에 3번이나 들어왔다. 세조 때는 말을 타고 호랑이 사냥을 즐겼고, 연산군은 간언한 환관을 호랑이 굴에 던졌다는 기록 등이 남아있다. 실록의 대부분은 호랑이를 잡아야 한다는 것과 잡아서 얼마나 포상을 했는지에 관한 것이 대부분이다. 또 부조리하거나 난폭한 관원은 호랑이에 비유하기도 했다.

당시 중국에는 ‘조선은 1년의 절반이 호랑이 때문에 죽은 사람들 문상을 다녀야 하고, 1년의 반은 호랑이 사냥을 다닌다’는 농담이 있었을 정도였다. 그만큼 한국에는 호랑이가 많았고 호랑이가 끼친 피해도 막심했다. 

그렇다고 조선이 호랑이를 경멸의 대상으로 본 것은 아니다. 조선의 유명한 호랑이 그림은 김홍도와 그의 스승인 강세황의 합작해 그린 <송하맹호도>다.


이 그림에서 호랑이는 김홍도, 소나무는 강세황이 그렸다. 이 그림은 거친 나무껍질을 가진 노송 아래 긴장한 채 무엇인가를 응시하는 호랑이를 표현했다. 

<송하맹호도>에서 호랑이는 자신감과 위엄이 넘치는 눈과 당장이라도 뛰어오를 것 같은 몸짓을 하고 있다. 이 그림을 통해 당시 조선 사회에서는 호랑이를 용맹함의 상징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민가에서도 호랑이 그림은 인기를 얻었다. 조선 후기에는 <까치 호랑이> 민화가 유행이었다. <까치 호랑이>는 익살스러운 얼굴을 한 호랑이와 소나무 가지 위에 앉아서 울고 있는 작은 까치가 그려져 있다. 

까치는 소나무 가지 위에 비스듬하게 앉아서 호랑이를 향하고 있다. 여기서 나오는 호랑이는 입을 벌리고 까치를 위협하고 있지만 무섭고 강인한 모습은 찾을 수 없다. 오히려 아이들도 가까이 할 수 있는 친근한 얼굴을 가졌다. 이 그림은 후에 ‘바보 호랑이’라고도 불렸다.

<까치 호랑이>에서 호랑이는 양반이나 권력을 가진 관리를, 까치는 서민을 상징한다. 지혜로운 까치가 힘이 쎈 호랑이를 이기는 장면이 표현된 이 그림은 당시 권력가들에게 겪는 부조리함을 해학적으로 드러낸 것이다.

전혀 다른 해석도 있다. <까치 호랑이>는 액막이와 경사를 의미하는 새해맞이 그림으로, 복을 기원하는 의미를 지닌다고 한다.

조선시대 사람들에게 호랑이는 두려움, 부정부패한 관리, 새해의 복 등을 상징했다. 육식동물인 호랑이는 당시 사람들에게 두려움의 존재였지만, 동시에 강하면서 멍청하고 복을 주는 상징이기도 했다. 이렇게 호랑이는 한반도와 떼려야 뗄 수 없는 존재다.


조선시대부터 일제강점기
계속된 수난으로 ‘멸종’

한국에서 호랑이가 사라진 것은 언제부터일까. 조선 전기 200년은 호랑이의 세상이었다. 조선 정부는 매년 각 군현에 호피 3장을 진상하도록 했다. 그 당시 군현은 대략 330여개, 매년 1000마리의 호랑이가 죽은 것이다.

조선에는 호랑이를 포획하는 착호갑사가 성종 때는 400여명에서, 숙종 때는 1만1000명으로 늘어났다. 호랑이는 모피, 고기, 약재 등으로 비싸게 팔렸기 때문에 경제적인 이득도 있었다. 영종 때는 호랑이 개체 수의 감소로 호피 진상 제도가 중단됐다.

호랑이 수난시대는 일제강점기에도 계속된다. 일제강점기 때 조선총독부는 ‘사람과 재산에 위해를 주는 해수(해로운 동물)를 구제한다’는 명목으로 야생동물의 퇴치와 포획을 장려했지만, 야생동물에 대한 체계적인 보존 정책은 없었다.

해수구제사업에서 가장 피해를 본 동물은 호랑이와 표범이었는데 모두 멸종됐다.

1911년 조선총독부는 ‘야생동물은 누구라도 포획할 수 있다’는 것을 원칙으로 수렵 규칙을 공포했다. 이후 사냥도구 사용은 수렵 기간에 수렵 면허를 받은 사람에게 한정했다. 수렵 금지구역 지정, 일출 전, 일몰 후의 총기 사용금지, 폭발물‧독극물‧총‧함정의 금지 등 수렵 규칙을 정했다. 

그러나 일본인과 조선인의 총기 소유는 큰 차이를 보였다. 1920년 일본인 총기 소유가 2만25개, 조선인 총기 소유는 1627개였다. 수렵활동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일본인이 훨씬 많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국 호랑이는 왜 사라졌는가>의 저자인 엔도 키미오는 “일제강점기 시기에는 조선인보다 일본인들이 한반도의 야생동물 개체 수에 큰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1921년 마지막
일본인이 사살

실제로 일본인들은 일본에서 조선으로 호랑이 사냥을 떠나오기도 했다. 사업가 야마모토 타다사부로는 큰돈을 내서 호랑이 몰이꾼과 사냥꾼을 고용했다. ‘정호군’이라고 이름 붙인 사냥팀은 함경남북도, 금강산, 전라남도로 보내 사냥을 지휘했다.

이 내용으로 <정호기>라는 서적을 출간했다. 이 책은 조선총독부의 해수구제정책을 내세우면서 부의 과시, 일본군 사기 진작, 제국주의 이데올로기 확산 등 복합적으로 뒤엉켜 기술돼있다.

이렇게 호랑이들은 조선시대부터 일제강점기까지 말살당했다. 그렇다면 한국에서 호랑이는 언제 마지막으로 발견됐을까?


1921년 10월2일 오전 9시에서 10시쯤, 경북 경주 대덕산에서 한국의 마지막 호랑이가 사살됐다. 인근에 거주하고 있던 25세 마을 주민 김유근씨는 나무를 하러 산에 오르다가 호랑이를 발견했다. 김씨는 호랑이의 공격으로 왼팔에 상처를 입었다. 

호랑이로부터 도망친 김씨는 경찰서에 보고해 일본인 순사인 미야케 요조우와 인근 도로 공사 현장의 인부들을 몰이꾼으로 동원해 호랑이를 사냥했다. 대덕산에서 잡힌 호랑이는 몸길이 173cm, 꼬리길이 56cm, 몸둘레 84cm이었다.

대책 없는 해수구제정책에 대해 일본인 역시 우려를 표했다. 조선 경성사범학교의 생물학 교사였던 우에다는 ‘사라져가는 조선의 호랑이’라는 글을 잡지에 실었다.

이 글에는 “조선에는 옛날부터 호랑이가 많아 사람과 가축에게 참혹한 해를 끼쳤다. 호랑이를 잡아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것이 지방관리의 중요한 행정과제였다”며 “지금은 호랑이가 너무 줄어서 북조선의 오지가 아니면 호랑이의 모습을 찾을 수 없다. 이는 사람에게 위해를 방지하기 위한 것 외에도 모피와 뼈로 경제적 이득을 얻기 위한 것이다. 가까운 미래에 조선의 호랑이는 전멸할 것”이라고 안타까운 마음을 표현했다.

환경부 보고서에 따르면 호랑이는 1943년 이후 전혀 관찰되지 않았기 때문에, 정부는 1996년 국제사회에 “남한에서 호랑이가 멸종됐다”고 공식 보고했다.

동물의 왕 
구경거리로


사라진 호랑이가 다시 필요한 시기가 도래했다. 바로 1988년 서울올림픽 때문이었다. 1986년 아시안게임과 1988년 서울올림픽 마스코트는 농악대의 상모를 쓰고 돌리고 있는 호랑이 캐릭터 ‘호돌이’다. 올림픽 마스코트가 결정된 것은 1986년으로, 호돌이는 사람들에게 큰 사랑을 받았다. 

특히 서울을 뜻하는 ‘S’와 상모 돌리는 모습은 한국의 미를 제대로 알렸다는 평가를 받았고, 각종 문구류‧과자‧음료‧생필품‧은행 통장에까지 등장했다. 1988년 서울올림픽 때는 호돌이 마스코트와 휘장 사업으로 712억원의 수입을 올렸다. 

호돌이의 뒤를 이어 2018년 동계올림픽에서는 백호 ‘수호랑’과 반달가슴곰인 ‘반다비’가 마스코트로 선정됐다. 조직위는 1988년 서울올림픽 마스코트였던 호돌이의 연속성을 지키고, 백호가 한국 민속신앙에서 마을의 평안과 안녕을 기원하는 신으로 등장하는 점에 착안해 올림픽의 신성함을 강조한 것이라고 밝혔다.

백호 수호랑은 흰색을 좋아하는 한국인 정서를 바탕으로, 하얀 설원에서 펼쳐지는 동계올림픽과 조화를 이룬다는 평도 있었다.

한국 국제대회에서 호랑이의 데뷔는 전 세계로 한국인의 호랑이 사랑을 알렸다. 이로써 호랑이는 한국인을 대표하는 동물이 된 것이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한국인의 호랑이 사랑은 대중문화로도 이어졌다.

전통적인 판소리에 현대적인 팝 스타일을 조화시킨 음악으로 인기를 끈 밴드 그룹 이날치는 지난해 5월 앨범 수궁가를 발표했다. 이 앨범의 대표곡은 ‘범 내려온다’로 가사는 호랑이가 숲속에서 나오는 묘사를 주로 이룬다.

이 곡은 발매 후 한국관광공사 유튜브에 ‘Feel the Rhythm of Korea: SEOUL(한국의 흥을 느껴라: 서울)’이라는 제목의 뮤직비디오로 게재됐으며, 총 4823만7529 조회 수를 기록했다.

해당 조회 수는 한국관광공사 유튜브 채널에서 가장 높은 기록이다. 이 곡을 들은 누리꾼들은 “수궁전의 호랑이 이야기가 이렇게 멋있을 수 있다니 놀랍다” “한국의 정서와 현대의 느낌이 잘 묻어난다” 등 긍정적인 의견을 표했다.

한국인의 호랑이 사랑에도 불구하고, 호돌이가 마스코트로 채택되는 과정은 순탄치 못했다. 바로 우리 땅에 고유종인 한국 호랑이가 멸종됐다는 것 자체가 문제가 된 것이다.

두려워하면서 숭배
강한 생명력의 상징

이 문제를 해결한 것은 미국 미네소타 주 정부 교정국 수석행정관이었던 이희관 박사와 미네소타 한인회다. 이들은 1986년 6월 미네소타 세인트폴 동물원과 미네소타 동물원으로부터 백두산 호랑이 암수 한 쌍을 들여와 서울대공원에 안착해 그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서울대공원 호랑이는 올해까지 총 54마리로 늘었고, 2007년에는 백두산 호랑이 암컷 4마리가 일본 후지 사파리 동물원에 수출된 사례도 있다. 이에 대해 서울대공원 관계자는 “호랑이의 번식을 성공적으로 이룬 것은 큰 의미가 있다”고 밝혔다.

그러나 여전히 호랑이 보전 원칙은 지켜지지 않고 있다. 맹수인 호랑이는 인간과 공존하기 어렵고, 행동반경이 400~1000km인데 비해 국내 사육시설은 너무 열악해서 호랑이가 심각한 스트레스를 받기 때문이다. 타 동물원과 교류 비용이 많이 들기 때문에 근친 교배를 하는 문제도 있다.

2001년 서울대공원에 태어난 한국 호랑이 ‘크레인’은 남매였던 아빠 ‘태백’과 엄마 ‘선아’ 사이에서 근친 교배로 태어났다. 크레인은 선천적 백내장과 송곳니 부정교합 등 안면기형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사육사들의 손에 길러졌고, 관람객들에게 인기가 많았던 어린 시절이 지나자 원주 드림랜드로 옮겨졌다.

그러나 2007년 경영난을 맞은 원주 드림랜드가 동물들을 방치하면서 동물단체 구조 후 서울대공원으로 다시 돌아와 여생을 마쳤다.

언론에서는 17년을 살고 사망한 크레인을 두고 천수를 누렸다고 표현했지만, 동물 삶의 질 측면으로 바라봤을 때 부족한 부분이 많다. 

러시아의 푸틴 대통령이 서울시에 선물한 호랑이 ‘로스토프’ 역시 마찬가지다. 로스토프는 2013년 스트레스를 이기지 못하고 사육사를 물어 죽였다. 당시 서울대공원은 공사 중이어서 로스토프는 호랑이사보다 절반 정도 좁은 여우사에서 생활했는데 이때 받은 스트레스로 로스토프가 사육사를 문 것으로 추정됐다.

한국인의 호랑이 사랑에 비하면, 호랑이 보존 정책은 턱없이 부실한 실정이다. 이 문제에 관해 시민단체와 동물 관련 전문가들 역시 우려를 표하고 있다.

동물자유연대는 “세계 곳곳에서 서식지 파괴와 더불어 밀렵까지 성행해 호랑이는 ‘멸종 위기에 처한 야생 동식물종의 국제거래에 관한 협약 부속서 1’에 속하는 멸종위기종이 됐다”며 “국내에서 호랑이가 멸종됐지만 우리는 동물원에서 호랑이를 만난다. 심지어 실내 동물원에서도 호랑이와 같은 대형 포유류를 조형물처럼 전시한다”고 지적했다.

사육 시설
너무 열악

이어 “누군가는 동물원을 두고 야생에서 살기 어려워진 동물의 종 보전을 위해 필요한 방책이라고 주장하지만, 각자의 생태나 습성을 전혀 고려하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 서식지 보존운동이나 전시 동물 처우 개선을 위한 활동에 동참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alswn@ilyosisa.co.kr>


<기사 속 기사> 백두산 호랑이 이동 거리는?

중국에 서식 중인 야생 백두산 호랑이는 하루 8.9km 이동하는 것으로 확인됐다.

지난 18일 <길림신문>에 따르면 중국 국가임업초국 고양이과동물연구센터가 야생에서 구조해 방목한 백두산 호랑이 ‘완다산 1호’를 8개월 동안 관찰한 결과 총 2063km를 이동한 것으로 확인됐다.

하루 평균 8.9km를 이동한 것으로 이 호랑이의 활동 범위는 동서로 180km, 남북으로는 100km에 달했다.

연구센터는 작년 4월 헤이룽장성 밀산의 야산에서 이 호랑이를 구조했고, 한 달 뒤 위치추적기를 부착해 백두산에 방목해 이동 경로를 관찰했다.

생후 7개월 된 이 호랑이는 정상적인 먹이 활동으로 건강상태가 양호했고, 민가에 접근하지 않고 야생생활에 잘 적응한 것으로 파악됐다.

중국과 러시아, 북한 접경 지역은 야생 백두산 호랑이 집단 서식지로 야생 호랑이 개체 수는 50여마리에 달하는 것으로 추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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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여발 사법 전쟁 ‘끝까지 간다’

거여발 사법 전쟁 ‘끝까지 간다’

[일요시사 정치팀] 박형준 기자 = 국회 문턱을 넘은 내란 전담재판부 설치법이 사법부를 강타했다. 검찰은 1999년 특별검사제 도입 이후 권한을 조금씩 잃다가 올해 해체가 결정됐다. 검찰이 26년 전 느끼다가 현실이 된 불안을 이젠 사법부가 느낄 차례일지도 모른다.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 등 범여권이 지난 24일 내란 전담재판부 설치법을 국회 본회의에서 통과시켰다. 대법원은 지난 18일 “내란 사건만 맡는 전담재판부를 만들어 운영한다”는 취지의 예규 제정 방침을 밝혔다. 특별재판부 영장전담 법관 하지만 민주당 박수현 수석대변인은 같은 날 논평을 통해 ‘24일 처리 방침’을 밝혔다. 이날 법안 처리는 이미 예고된 결과였다. 박 대변인은 지난 21일 오전 기자 간담회에서도 “민주당은 국회 본회의에서 내란 전담재판부 설치법을 예정대로 처리할 것”이라고 밝혔다. 민주당이 원래 처리하려던 법안은 ‘내란 특별재판부 설치법’이었다. 이 법안이 통과됐다면, 12·3 비상계엄 관련 재판을 맡을 특별재판부가 설치되고, 영장 심사를 맡을 특별영장 전담 법관이 따로 배정됐을 것이다. 이들은 국회·판사회의·대한변호사협회가 3명씩 추천한 위원으로 구성되는 9인 규모의 추천위원회의 2배수 추천과 대법원장의 임명을 거칠 예정이었다. 아울러 상고심에선 윤석열 전 대통령이 임명했던 대법관은 모두 제척될 예정이었다. 하지만 내란 특별재판부 설치에 대해선 각계에서 위헌 논란을 제기했다. 그러자 민주당은 지난 16일 내용을 대폭 수정했다. 명칭도 특별재판부에서 전담재판부로 바뀌었다. 전담재판부 후보추천위원회는 법무부 장관·헌법재판소 사무처장 등 외부 인사를 제외한 후 법관으로만 구성될 예정이다. 추천위원회에 들어갈 법관 중엔 각급 판사회의·전국법관대표자회의가 포함된다. 전담재판부에 소속될 법관은 추천위원회·대법관회의를 거쳐 대법원장이 임명한다. 윤석열 전 대통령 등 12·3 비상계엄 주요 연루자들은 이미 형사재판 제1심을 받고 있다. 전담재판부는 항소심부터 맡을 예정이다. 대법원은 민주당의 공세에 맞서 반격에 나섰다. 대법원은 지난 18일 대법관 행정회의를 열어 ‘국가적 중요 사건에 대한 전담재판부 설치 및 심리 절차에 관한 예규’를 제정하기로 했다. 여기엔 “형법상 내란·외환죄와 군형법상 반란죄 사건을 전담해 집중 심리하는 전담재판부를 설치할 수 있다”는 내용이 포함된다. 대법원이 규정하는 전담재판부는 무작위 배당을 거쳐 사건을 배당받을 재판부가 지정되는 방식이다. 전담재판부로 지정된 재판부가 원래 맡던 재판은 다른 재판부로 재배당된다. 예규엔 “해당 재판부는 이후 내란·외환과 관련 없는 새로운 사건은 맡지 않는다”는 규정이 포함됐다. 하지만 민주당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박 대변인은 “사법부가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을 왜 이렇게 늦게 했느냐”며 “왜 그동안 국민을 불안과 혼란에 빠뜨렸느냐”고 비판했다. 이어 “국회의 입법권을 대법원의 예규 제정에 맞춰야 한다는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내란 전담재판부 신설이 갖는 ‘진짜 함의’ 대법원 예규 제정…반격 혹은 타협안 제시 민주당 정청래 대표도 같은 날 최고위원회의 중 “대법원이 헐레벌떡 자체 안이라고 내놨다”며 “더 일찍 해야 하지 않았느냐. ‘조희대 사법부’답다는 생각이 든다”고 비판했다. 국내 헌정사에서 특별재판부는 단 2회만 설치됐다. 제헌헌법 부칙엔 “이 헌법을 제정한 국회는 단기 4278년 8월15일 이전의 악질적인 반민족 행위를 처벌하는 특별법을 제정할 수 있다”는 내용이 포함돼있었다. 이후 국회는 반민족행위처벌법 등을 제정하고,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이하 반민특위)를 설치했다. 반민특위엔 특별검찰부와 특별재판부가 설치됐다. 특별검찰부는 검찰총장 등 9명으로 구성됐고, 특별재판부는 ▲국회의원 5명 ▲법조인 6명 ▲사회 저명 인사 5명 등 총 16명으로 구성됐다. 이들은 국회가 선출했다. 두 번째 특별재판부는 1960년 4·19 혁명 이후 개정된 제4차 개정 헌법을 근거로 설치됐다. 당시 개정 헌법엔 “3·15 부정선거 및 4·19 혁명 관련자들과 관련된 형사사건을 처리하기 위해 특별재판소와 특별검찰부를 둘 수 있다”는 취지의 부칙이 포함돼있었다. 이후 설치된 특별재판부는 부정선거관련자처벌법 제정을 거쳐 설치됐다. 민주당조차 ‘특별재판부’를 ‘전담재판부’로 수위를 낮춰 처리했다는 이유로 내란 특별재판부에 대해 불거진 위헌 시비를 거론한다. 법원은 ‘무작위 전산 재판 배당’ 원칙을 유지하고 있다. 따라서 “특정 재판부에 특정 재판을 배당한다”는 취지의 특별재판부에 대해선 기본적으로 위헌 시비가 불거질 가능성이 높다. 아직 헌법재판소가 관련 합헌·위헌 여부를 가린 적도 없다. 하지만 헌법 제27조는 “모든 국민은 헌법·법률이 정한 법관에 의해 공정한 재판을 받을 권리를 가진다”고, 제103조는 “법관은 헌법·법률에 의해 양심에 따라 독립해 재판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재판 배당의 무작위성은 재판에 대한 외부의 부당한 압력·영향력으로부터 법관을 보호해 재판의 공정성을 유지하기 위해 세운 원칙이다. 이는 위헌 시비가 불거진 핵심 이유였다. 그래서 과거엔 특별재판부를 설치하기 전에 개헌 과정 중 헌법 부칙에 그 근거를 규정했다. 헌법 부칙은 헌법 본문과 똑같은 효력을 가진다. 그래서 위헌 시비가 불거질 일은 없었다. 피해 가는 위헌 시비 하지만 위헌 시비를 피하려고 제시한 ‘내란 전담재판부’에 대해서도 논란이 이어졌다. 역설적으로 “기존 재판부 배당과 큰 차이가 없다”는 취지의 비판이 제기된 것이다. 사법부는 이미 무작위 배당의 예외를 운용하고 있다. ▲특허법원 ▲서울행정법원 ▲지역별 가정법원 등 특정 분야를 전문적으로 취급하는 법원이 따로 설치돼있는 것도 무작위 배당의 예외다. 또 각급 법원은 이미 지식 재산·환경·의료 등 특정 전문 분야를 전담할 재판부를 분류한다. 법원장 재량에 따라, 재판장들과의 협의를 거쳐 특정 사건은 ‘적시 처리 필요 중요 사건’으로 분류해 특정 재판부에 배당해서 신속한 재판 진행을 추진한다. 기소된 사건이 이미 진행 중인 재판과 사실 관계·쟁점·피고인이 같으면, 이미 진행 중인 재판을 담당하는 재판에 배당한다. 물론 민주당이 거둘 수 있는 실익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정 대표는 민주당이 ‘특별’을 ‘전담’으로 바꿔가면서도 서둘러 개정안을 추진하는 이유를 분명히 짚었다. 그는 “조희대 대법원장의 사법부와 지귀연 서울중앙지법 부장판사의 재판부는 내란·외환 사건의 심리를 의도적으로 침대 축구하듯 질질 끌었다”며 “조 대법원장은 경고·조치를 해야 했다”고 주장했다. 이어 “보다 못한 입법부가 나서기 전에 사법부가 진작 내란 전담재판부를 설치했다면, 지난 1년 동안 허송세월하는 것을 보면서 국민이 분통 터지는 상황은 없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정 대표의 주장 중 핵심 단어는 ‘조희대’와 ‘지귀연’이다. 민주당이 내란 특별재판부 설치를 추진할 당시 민주당 전현희 최고위원은 지난 9월 CBS 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에 출연해 지 부장판사를 지칭해 “재판의 공정성에 의구심을 갖도록 하는 인사들을 전보·징계한다면, 굳이 내란 특별재판부를 만들기 위한 입법 조치를 할 필요가 있겠느냐”고 주장했다. 정 대표는 지난 15일 최고위원회의 도중 “조희대 사법부는 특검 수사 훼방꾼이 됐다”며 “조 대법원장이 지휘하는 대법원이 지난해 12월3일 내란에 동조한 건 아닌지 강한 의구심을 갖는다”고 지적했다. 사법행정사무를 총괄하는 조 대법원장의 권한 일부를 사실상 박탈하고, 지 부장판사를 내란 관련 재판에서 손 떼게 할 수 있다면, 민주당은 상당한 실익을 거둘 수 있다. 특히 중요한 것은 재판부 배당에 전국법관대표자회의를 개입시키는 것이다. 힘 실어준 진짜 이유? 전국법관대표자회의는 양승태 전 대법원장 재임 당시 사법행정권 남용 사태 이후인 지난 2018년 4월 “권한이 집중된 제왕적 대법원장을 견제하고, 법관의 독립성을 보장해야 한다”는 취지를 갖고 설치됐다. 보수 진영 일각에선 이를 일컬어 “지나치게 민주당에 친화적”이라고 비판한다. 전국법관대표자회의 설치 직후 첫 의장으로 선출됐던 최기상 당시 서울북부지법 부장판사는 현재 민주당 의원이다. 전국법관대표자회의는 지난 9월 민주당이 주장한 의제 ‘대법관 증원론’을 포함한 상고심 제도 개선 토론회를 개최했다. 이어 “사법부는 대법관 증원안을 경청하고 자성해야 한다”는 취지로 보고서를 작성·공개했다. 이 때문에 일각에선 전국법관대표자회의를 일컬어 “민주당에 힘을 설어주기 위해 토론회를 개최한 게 아니냐”는 비판 목소리도 제기됐다. 대법원의 이재명 대통령에 대판 파기환송 판결에 대해서도, 정 대표는 지난 9월 전국법관대표자회의에 “조 대법원장 사퇴 권고 등 사법부에 대한 국민적 신뢰 회복 방안을 논의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일각에선 “대법원의 예규 제정은 반격”이라고 해석한다. 그 근거로는 “내란 전담재판부를 줄곧 반대하다가 갑자기 예규 제정을 밝힌 의도에 대한 의문이 제기된다”는 점을 들었다. 민주당은 내란 전담재판부 설치 외에도 기존 사법 체계를 모두 바꿀 만한 사법개혁안을 국회 본회의에서 통과시킬 준비를 하고 있다. 대법원의 예규 제정에 대해선 “민주당의 공세를 적절한 선에서 수용해 더 큰 공세에 대비하려는 의도”라고 보는 시선도 있다. 하지만 ‘특별재판부’가 ‘전담재판부’로 바뀌었다고 해서 다른 사법개혁안 통과 시도가 중단되는 것은 아니다. 법원으로선 기존 사법 체계를 모두 바꾸려는 민주당의 시도를 보면서 검찰이 해체되는 과정을 되새길 가능성이 아예 없는 건 아니다. 이미 민주당이 주도하는 사법개혁안 자체가 사실상 ‘기존 법원 해체’로 해석될 소지가 있다. 조금씩 권한 잃다 해체 결정 검 종착역은 헌재 최고법원 등극? 민주당 등 범여권이 검찰을 중대범죄수사청·공소청으로 분리해 완수했던 검찰 해체에 대해선 “헌법은 검찰 조직의 존재를 전제로 검찰총장의 존재를 규정했다”면서 위헌 논란을 제기하는 반대 측 의견이 있었다. 하지만 범여권은 이를 강행했다. 큰 틀에서 보면, 검찰은 ▲특별검사제도 도입 ▲검경 수사권 조정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이하 공수처) 설치 ▲중대범죄수사청·공소청 분리 등 과정을 거쳐 해체됐다. 최초의 특별검사(이하 특검)는 지난 1999년 김태정 전 검찰총장 부인에 대한 옷 로비 의혹과 한국조폐공사 노조 파업 유도 사건에 대해 진행됐던 최병모 특검이었다. 특검이 성립됐던 배경은 “검찰이 검찰총장의 부인이 연루된 사건을 제대로 수사할 수 있겠느냐”는 회의적인 시선이었다. 아울러 당시 국회 구도는 여소야대였다. 한나라당은 “사건을 축소·은폐했다”는 의혹이 제기되는 흐름을 타고 강하게 밀어붙여 특검법 제정을 주도했다. 이후 현재까지 개별 특검법은 총 16개가 통과됐고, 상설 특검은 6회 추진됐다. 검찰로서는 1999년 최병모 특검 설치가 수사권·기소권 독점이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현재까지 총 22회의 특검이 성립됐다는 것은 검찰에 대한 각계의 불신을 상징하는 중요 사실관계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것이 끝은 아니었다. 검찰을 노리는 다음 단계는 검경 수사권 조정이었다. 최초의 검경 수사권 조정은 지난 2011년 진행됐다. 이명박 당시 대통령은 국무회의에서 사법경찰관이 검사의 수사 지휘에 이의를 제기하는 재지휘 건의 제도 신설 등의 내용이 담긴 안을 대통령령으로 제정해 의결했다. 지난 2016년엔 ▲진경준 게이트 ▲정운호 게이트 ▲김형준 전 부장검사의 스폰서 의혹 ▲최순실 게이트 등이 연이어 발생해 검찰의 신뢰도에 대한 강한 문제 제기가 이어졌다. 이는 문재인정부 출범 이후 장기간 논의된 검경 수사권 논의로 연결된다. 공수처도 설치됐다. 민주당 집권 후 노무현 전 대통령 사망 사건을 강하게 기억하는 지지자들의 비원을 외면하긴 어려웠던 측면도 있었다. 그렇게 검찰은 서서히 권한을 빼앗겼다. 그러다가 지난 9월에 이르러 검찰은 내년부터 중대범죄수사청과 공소청으로 갈라질 운명에 처했다. 특히 중대범죄수사청은 행정안전부로 옮겨진다. 서서히 권한을 빼앗기다가 끝내 해체를 앞둔 운명을 맞게 된 것이다. 민주당 등 범여권은 ▲법원행정처 폐지 ▲법 왜곡죄 도입 ▲대법관 증원 ▲재판소원 도입 등 사법개혁안을 시도하고 있다. 범여권이 사법개혁안을 모두 통과시킨다면, 사법부로서는 “검찰에 이어 사법부도 한순간에 와해된다”고 인식할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한순간에 와해된다 법원행정처가 없어지면 대법원장의 권한이 줄어든다. 법 왜곡죄가 도입되면, 판사의 재판도 법적 처벌 범위 안에 포함될 위험에 노출된다. 대법관이 늘어나 대법관의 권위·희소 가치가 줄어든 후 재판은 헌법소원 제기 범위 안에 포함된다. 최종 종착지는 헌법재판소가 대법원을 제친 후 최상위 사법기관으로 규정될 순간임을 배제하기 어렵다. 지난 24일은 사법부가 느낄 법한 공포가 처음 피부에 와닿은 날이었을 수도 있다. 새해엔 민주당과 사법부의 전쟁이 더욱 거칠게 진행될지도 모른다. <ctzxp@ilyosisa.co.kr>